택시가 한국 대학교 음악대학 입구에 멈춘다. 푸른빛을 머금은 긴 생머리, 연한 핑크 블라우스에 짧은 블랙 스커트, 족히 10센티 이상 될 것 같은 붉은 하이힐을 신은 혜숙은 자신의 모습이 만족스러워 다소 느리고 우아한 걸음으로 음대 건물을 향해 걸어간다. 걸을 때마다 찰랑거리며 빛나는 티파니 브랜드의 귀걸이와, 같은 디자인의 팔지는 여러 개의 작은 다이아몬드를 품고 있다. 혜숙은 두 잔이 든 아메리카노 캐리어와 투명상자 속 색색의 파스텔 톤 마카롱을 쳐다보며 빙긋 웃는다.
교수실 문을 열기 전, 앞 머리카락을 살짝 부스스하게 만든다. 문을 열고 들어간 혜숙은 숨을 헐떡이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한다. 강 교수는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윤희를 본다. 건우의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하다.
“헉… 헉… 교수님 죄송해요, 헉… 헉… 오다가 제가 탄 택시가 사고가 나서… 제가 너무 늦었죠… 죄송해요”
“아니…뭐… 근데 어디 다치진 않았고? 전화하지… 병원에는 갔니?” 오히려 미안한 기색이다.
“아뇨, 전 괜찮아요… 택시만 좀 많이 파손됐어요. 다른 택시를 잡으려 해도… 죄송해요” 강 교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스친다.
“아냐… 안 다쳤으면 됐지. 그런데 오늘 레슨은 가능하겠어?” 풍부한 바리톤 음성이 잘생김을 부추긴다.
“레슨 준비 많이 했는데…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담는다. ‘난 왜 이리 연기를 잘할까!’ 속으로 연신 쾌재를 부른다. 오늘 레슨 곡은 하나도 준비하지 않았다. 놀기도 바쁜데 공부는 무슨… 지난밤, 클럽에서 놀다 보니 아침이 다돼 집에 들어왔고, 몇 시간 만에 다시 학교에 가야 할 상황이 되었다. 일주일은 왜 이리 빨리 돌아오는 건지…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생각해 낸 게 오늘의 상황극이었다. 그런데 이 순진한 교수님이 속아 넘어간다. 아이돌 같은 외모에 순진하기까지 하니 좀 귀엽다.
“교수님 드리려고 마카롱이랑 커피 사 왔어요… 사고만 안 났으면 시원하게 드셨을 텐데…”
강 교수는 아마 상상도 못 할 거다. 이를 대비해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미리 얼음을 빼 달라고 했다.
얼른 커피와 마카롱을 가져다 티 테이블에 놓는다.
“혜숙아 서 있지 말고 이쪽으로 와서 앉아.”
“정말 병원에 안 가도 되겠어?”
“괜찮을 것 같아요. 병원은 수업 끝나고 갈게요.”
“그럼, 오늘은 레슨 하지 말고 네가 부를 곡만 들어보자. 혹시 지난 학기에 김애령 교수님께 받은 아리아 있니?
“아뇨, 그냥 교수님이 골라 주세요”
“그럼, Vissi d’arte, vissi d’amore,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이 곡이 가능한지 한번 해보고 아니면 바꾸자 괜찮지?” 레코드판 몇 개를 빼서 두 개를 고르고 나머지는 다시 넣는다.
풍부하고 애절한 감정을 담은 마리아 칼라스의 목소리가 오디오 스피커를 타고 흐른다.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무슨 트로트 가사 같다. 짜증이 꿈틀거린다. 뭐 이런 칙칙한 곡을 주는 건지. 칙칙하다 못해 질척거리기까지 하다.
혜숙은 지난 3년 동안 김애령 교수의 제자였다. 어찌나 돈을 밝히던지, 공부도 싫은데 그 교수는 정말 짜증 그 자체였다. 뭐 그래도 나름 예쁨은 받았다. 아빠가 여러 개의 병원을 소유한 스펙은 가장 큰 재능이었다. 교수를 바꾸고 싶어 3년을 짜증 나는 김 애령 교수에게 알랑거렸다. 이제 그 수확으로 일명 ‘아이돌’ 교수의 제자가 되는 첫 시간이다.
들리는 음악엔 아랑곳하지 않고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교수실 문을 마주 보며 그랜드 피아노가 교수실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랜드 피아노를 중심으로 오른쪽 벽에는 올리브색 책장이 벽을 차지하고 있고 수많은 음반과 악보들, 음악 서적들이 보인다. 책장 앞에는 평범한 연한 밤색 서랍이 있는 책상과 위로 연회색 책상 매트가 단정하다. 책상 위에는 가족사진으로 보이는 은빛 프레임을 두른 액자가 정면에 있다.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강 교수와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혜숙의 눈썹이 꿈틀 경련을 일으킨다. 시선을 잡아끄는 사진을 벗어나려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시선을 돌린다. 책갈피가 꽂힌 책 두 권이 머리를 나란히 하고 있고 큰 특징 없는 검은 등받이 의자도 열을 맞춰 있다. 피아노 왼쪽으로 빛바랜 회색 4인용 소파가 마주하고, 소파 옆 미니 냉장고 위에 티팟과 머그컵 2개가 작은 쟁반에 다소곳이 올려져 있다. 소파 뒤 위 벽면 3장의 큰 포스터에 강건우 교수의 개인 음악회와 출연 오페라 포스터가 붙어있다. 그랜드 피아노 뒤 넓은 창문 너머로 키 큰 나무들의 가지와 나뭇잎들이 싱그럽다. 이곳에서 봐줄 만한 건 창밖 풍경뿐이군. 두리번거리는 시선이 강 교수 얼굴에 머문다. 아니, 강건우 교수뿐이다. 혜숙의 미소가 비틀린다.
“혜숙아”
“네… 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니? 어디 아프니?”
“어머, 아니에요, 교수님. 음악이 너무 아름다워서 너무 깊이 빠졌었나 봐요”
“그렇지! 마리아 칼라스의 노래는 언제 들어도 심금을 울리지”. 음악 이야기를 하니 생기를 더한 건우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난다.
“다음은 같은 노래 다른 느낌으로 키리테카나와 노래를 들어볼까?” 새 레코드판을 들고 바꾸려다 혜숙을 흘끔 본다.
“혜숙아, 다치지 않았다고 하지만 병원에 지금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레슨 보강은 다음번에 시간 내서 다시 정 하자. 연습하다 모르겠거나 잘 안되는 부분은 악보에 표시해서 가져오고. 오늘은 그만하고 다음 레슨 시간에 보는 건 어떨까? 괜찮지?”
속상한 듯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혜숙은 너무 아쉬운 듯 꾸벅 인사를 하고 뒤돌아선다. 교수실 문을 닫고 나오는 혜숙이 소리 없이 웃는다. 아무래도 올해는 좀 재미있을 것 같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오늘도 건우의 수업 일정을 꿰고 있는 혜숙이 교수실에 들어온다. 작은 케이크 상자와 함께 두 잔의 디카페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티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응 혜숙이구나. 이런 건 뭐 하러 사 들고 오니?” 요즘 개인 공연 준비로 피곤한 나날을 보내는 강 교수의 눈 밑에 다크서클이 보인다.
“교수님 요즘 피곤하시죠? 카페인과 당분이 필요하실 것 같아 서요”
강 교수가 손목시계를 흘끗 본다. 착한 강 교수는 귀찮겠지만 제자의 열심을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 오늘은 또 어디가 문제야? “혜숙이 건네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아 들고 마신다.
“이 곡, 특히 이 부분은 전혀 감이 안 와요. 음정도 떨어지고, 호흡도 딸려요. 무엇보다 감정도 안 살고… 그래서 말인데요, 교수님, 제가 이번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계속 아파서 레슨을 제대로 못 받았잖아요. 교수님 시간 되실 때 몇 번 더 레슨을 받아야 할 것 같아요. 교수님, 제발 요.” 애교를 가득 담아 콧소리로 녹여 보낸다. 수업을 못 한 것이 아니라, 하기 싫어서 안 했다. 교통사고 후유증인지 온몸이 너무 많이 아프다며 곡 분석과 감상을 종용했다.
“그래, 너도 기말시험을 봐야 하니 수업 끝나고 몇 번 정도 레슨 하면 되겠다.” 다이어리에 가능한 시간을 확인한다.
“일주일에 한 시간씩 세 번만 더 하면 되겠지?” 자꾸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아뇨, 일주일에 한 시간씩 두 번, 8주 해주시면 안 될까요? 올해가 대학 마지막 해인데 다음 학기 졸업 연주 준비도 해야 하고…”
“시간은 내 보겠지만… 나도 바쁘고… 네가 내야 할 레슨비와 반주비도 부담스럽지 않겠니? 방학 동안에 하지 그래?”
“방학 때도 당연히 해야죠. 비용은 괜찮아요. 교수님… 네? 네?”
“우선 세 번 해보고 결정하자. 괜찮지?” 더 이상 졸음을 참을 수가 없다.
“오늘은 미안하지만 내가 좀 쉬어야 할 것 같아. 내일 오후 5시 30분에 여기서 보자.” 건우가 소파에 몸을 기댄다
“네… 그럼, 케이크는 냉장고에 넣어둘까요?”
“그래, 고마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다시 한번 마신다. 마시는데도 졸음이 밀려온다. 나오는 하품을 손으로 가린다. 케익을 들고 냉장고로 가는 혜숙의 입꼬리가 씰룩거린다. 디 카페인 아메리카노에는 수면제가 들어있다. 냉장고에 케이크를 넣고 뒤돌아서니 건우는 이미 깊은 잠에 빠져 있다. 가까이 다가가 흔든다.
“교수님. 교수님” 대답이 없다.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린다. 핸드백에서 립스틱을 꺼내 건우 입술 주변에 바른다. 넥타이를 풀고 셔츠 단추도 푼다. 거울을 꺼내 혜숙의 입술도 립스틱이 번진 것처럼 연출한다. 밝은 갈색 단발머리 가발을 쓴다. 콧등에 점을 그려 넣으며 참을 수 없다는 듯 킥킥거리며 웃는다. ‘콧등의 점’을 이리저리 살피다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장난을 친다. 아이셰도우를 진하게 바른다. 건우의 오른쪽 팔을 들고 혜숙의 어깨에 둘러 얹고 딱 붙어 앉는다. 얼굴을 가까이하고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몇 장의 사진을 찍고, 클렌징 티슈를 꺼내 건우의 얼굴을 닦는다. 건우의 옷매무새와 머리를 정리하고 S브랜드 N.5 향수를 꺼내 셔츠에 바른다.
혜숙의 아버지는 가정이 있는 상태로 엄마를 만났다. 엄마는 일명 첩이었다. 본부인에게 혜숙 보다 3살 많은 아들과 동갑내기 딸이 있다. 아버지의 SNS에는 ‘행복한 우리 집’이라는 제목으로 가족사진들이 올라와 있다. 거기에도 혜숙과 엄마는 없다.
언제부터인가 한주에 두세 번 오던 아버지가 한 달에 한두 번으로 바뀌었다. 불시에 집에 들이닥쳐 꼬투리를 찾아내 엄마를 구타한다. 아주 작은 일에도 불같이 화를 낸다. 집안은 티끌 하나 없어야 하고, 모든 건 가지런히 줄을 맞춰야 한다. 아버지가 물건을 집어 던지고 소리를 지를 때면, 혜숙은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옷장 안에 들어가 손으로 귀를 막는다. 엄마의 비명이 들리면 귀를 막은 채 노래를 부른다. 아버지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는 혜숙의 노랫소리를 뚫고 귀를 어지럽힌다. 아버지는 엄마를 ‘무식하고 쓸모없는 것’이라 한다. ‘그 배에서 난 것도 쓸모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본부인은 얼마나 유식하고, 그 집안은 얼마나 좋은 집안 인지. 이복 남매는 자신을 닮아 얼마나 똑똑하고 예쁜지... 아버지가 스스로 분노에 침몰 해가는 것 같다. 둔탁한 소리에 이어 뭔가가 깨지는 소리... 엄마의 고통에 찬 비명 소리와 아버지의 분노에 찬 비명 소리가 폭탄처럼 날아온다. ‘술이나 따르던 년을 이만큼 살게 했으면, 나라님처럼 나를 받들어야지 어디서 미친년처럼 나돌아 다녀. 천한 것이 내 발목 잡으려고 새끼부터 낳았으면 찍소리 말고 엎드러져 있어야지’. 한참 동안 인간 샌드백 삼아 엄마에게 분풀이하고 난 후, 아버지는 혜숙을 부른다. 아버지의 발치에 뒹굴 듯 쓰러져 있는 엄마를 보며 바들바들 떨고 있는 혜숙의 발치에 돈다발을 던진다. 터진 입술에 피가 흐르고 눈두덩이는 부어서 검푸른 빛을 띠는데도, 혜숙의 발치에 흩어진 돈을 주섬주섬 모으며 엄마는 아버지에게 연신 고맙다고 말한다. 한마디의 사과도 남기지 않고 집을 나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언젠가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한다.
혜숙은 뭘 해도 짜증이 난다. 사람들의 웃는 소리가 모두 혜숙을 향한 비웃음으로 들린다. 매 순간 소리를 지르고 싶다. 갑자기 속에 불이 붙는 것 같이 치밀어 오르다가 심연 깊숙이 가라 앉는 것처럼 몸이 무거워진다. 답답한 가슴은 뭘 해도 시원해지지 않는다. 뭔가를 찾아야 한다. 같이 노는 애들을 불러 폐차장에 가서 긴 망치를 들고 차를 부순다. 차를 부수고 오는 길에 혜숙은 아르바이트로 목소리 예쁜 여성 몇 명을 고용한다. 건우가 집에 없는 시간에 맞춰 매일 건우 와이프에게 전화하게 한다. ‘여보세요’라는 말을 듣고 ‘어머… 사모님?... 죄송…합니다’라고 놀란 듯 그리고 느른하게 말하고 끊으라고 한다. ”
모처럼 엄마가 외식 어떠냐고 문자를 보내왔다. 혜숙의 생일을 기억하지 않고 그냥 지나간 것이 미안한 것일까? 레스토랑에 도착해 엄마를 찾는다. 엄마 옆에는 오늘도 처음 보는 남자가 있다. 밖에서 보는 엄마는 귀부인처럼 보인다. 세상 걱정 없이 돈만 펑펑 쓰고 돌아다니는 사모님. 혜숙은 엄마 앞에 앉아 메뉴판을 뒤적인다. 이미 입맛은 저 멀리 달아났다. 엄마는 모르는 사람을 친절히 소개하지만, 혜숙은 대꾸하지 않는다. 엄마도 기분이 나빠졌는지 주문받으러 온 종업원에게 화풀이한다. 종업원을 하대하는 모습이 아버지가 엄마를 대하는 모습과 판박이다.
혜숙은 짧은 단발 가발을 쓰고 짖은 눈화장과 함께 콧등에 점을 그린다. 건우에게 발랐던 향수를 바르고 건우 와이프가 자주 다니는 길목에서 우연을 가장하고 건우 와이프와 부딪친다. 혜숙이 손에 들고 있던 사진을 땅에 떨어트린다. 사진 속 남편을 본 건우 와이프는 그 자리에 얼어붙는다. 혜숙은 속으로 뇌까린다. ‘너도 불행하니?’
아버지가 사는 본가는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혜숙은 왜 자신이 이곳에 왔는지 스스로 한심하다. 도대체 뭘 바란 건지… 높다란 담벼락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쉰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겠다. 아버지의 집을 지나 모퉁이를 돌 때, 익숙한 목소리에 놀라 몸을 숨긴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맞는데 뭔가 다른 느낌이다. 몸을 숨긴 채 귀를 쫑긋 세우고 빼꼼히 내다본다. 아버지 팔짱을 끼고 즐거워하는 이복 남매, 그 옆에서 온화한 웃음을 보이는 여자. 아버지의 가족은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얼굴 가득 웃음을 담고 있다. 이복 남매의 손에는 백화점 쇼핑백이 여러 개 들려 있다. 혜숙에게는 보여주지 않은 아버지의 다정함은 이복 남매에게만 향한다. 혜숙은 주먹을 말아 쥔다. 분노는 가슴에 차다 못해 머리를 뚫고 나오려 한다.
혜숙은 매주 두 번씩 강 교수 와이프 주변을 맴돌았다. 어느 날 초췌한 몰골로 혜숙 앞에서 남편과의 관계를 묻는 윤희에게 비수를 꽂는다.
“꼴에, 그 꼬라지를 하고 다니니 네 남편이 내가 좋다고 하지! 아이들 데리고 멀리 떠나는 거 어때? 필요하면 내가 돈도 조금 줄 수도 있고. 건우 씨가 그러던데… 아이들 때문에 사는 거라고” 혜숙이 깔깔거리며 웃는다.
“그냥 애들 놓고 너만 사라지는 것도 괜찮고” 위아래로 훑어보는 눈에 비아냥거림이 걸려있다.
“그렇게 살아서 뭐하니? 나 같으면 안 산다!”
한 달이 넘게 아버지가 집에 오지 않았다. 엄마도 어디를 갔는지 며칠 동안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없는 집은 적막하지만 편하다. 아침 등교를 위해 집을 나선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귀가하는 엄마와 마주친다. 흥분한 듯 엄마는 빠른 걸음으로 혜숙의 팔을 잡아끌고 집으로 들어간다. 술 냄새가 역하게 풍긴다.
“걔네 죽었대, 진짜 죽었대” 몸을 덜덜 떨며 하는 두서없는 말을 묻고, 또 물어 이복 남매의 죽음을 알게 됐다. 이복 남매에게는 전담 운전사가 있었고, 등하교는 물론 쇼핑할 때도 동행했다. 3주 전, 이복 남매는 백화점 쇼핑을 끝내고 가족 식사를 하려고 레스토랑으로 향하던 중 마주 오는 트럭 운전사의 졸음운전으로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빠르게 병원에 옮겨졌지만, 워낙 큰 사고로 수술 도중 둘 다 죽었고, 두 자식을 먼저 보낸 본처는 며칠 동안 미친 사람처럼 술을 마시던 중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고 한다. 소식을 전하는 엄마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히죽히죽 웃는다. 무슨 복권이라도 당첨된 듯 점점 흥분해 간다. 이복 남매의 죽음 후, 아버지는 더 이상 혜숙과 엄마를 구타하지 않았다. 몇 달 후 엄마와 혜숙은 본가로 들어갔다.
아버지가 집을 자주 비운다. 아버지에게 다른 젊은 여자가 생겼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가족 식사를 하지 않았고, 아버지가 학교에 찾아온 일도 없다. 뜸한 아버지의 귀가에 엄마도 애인을 바꿔가며 사귄다. 아버지의 공식적인 모임에도 엄마 자리는 없다. 모든 모임은 아버지의 비서와 혜숙이 엄마와 딸인 것처럼 아버지와 동행한다. 오늘도 아버지와 아버지의 비서를 뒤따라가며 사람들에게 인사한다. 두 사람은 몹시 가까워 보인다. 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한 마리의 공작새처럼 사람들 사이를 누비는 저 여자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싶다. 아버지를 향해 보이는 미소가 싫다. 그 얼굴을 쥐어뜯고 싶다.
아버지의 빈자리는 돈으로 메꿔졌다.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가능했다. 돈으로 친구를 살 수도 있었다. 혜숙이 어떤 문제를 일으켜도 아버지의 변호사는 혜숙에게 면죄부를 갖다주었다.
혜숙은 대학 졸업 후에도 ‘무너뜨리기 게임’을 종종 한다. 그 무리 중 가장 약한 사람을 찾고 가장 약한 부분을 공격해 자존감을 바닥으로 만들어 스스로 좌초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게임은 조직적인 전투게임처럼 플랜이 필요하다. 그래서 무료할 때면 노는 친구들을 동원해 친구의 음료에 수면제를 타고 진한 연인 사이처럼 보이게 연출한 사진을 찍는다. 스스로 도덕적 굴레에서 벗어 나지 못하는 멍청하고 착한 사람들은 더 많은 고통을 받음으로 혜숙에게 즐거움을 준다.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선 자리에 불려 나왔다. 짧은 목에 머리는 민머리를 향해 출발한 지 한참 된듯한데, 본인이 검사인 것이 얼마나 스스로 자랑스러운지 거의 한 시간 동안 검사가 하는 일과 사건들 부장검사와 친분을 과시하고 있다. 대부분이 자신의 잘난 척을 동반한 듣고 싶지 않고, 별 관심도 없는 이야기를 삐질삐질 땀을 흘려가며 말한다. 만난 지 한 시간 동안 우리나라 검사들의 중심이 자신인 것처럼 하더니, 벌써 혜숙과 결혼을 하려고 한다. 아주 저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한다.
“그래서요?” 순간, 상대남은 상황이라도 파악하려는 듯 휘둥그레 뜬 눈을 껌벅거린다.
“그렇게 잘나셨는데 나랑 결혼은 왜 하려고요? 아, 잘사는 처가 등에 업고 정치라도 하시려고?” 상대남은 벌게진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혜숙도 같이 일어난다. 킬 힐을 신은 혜숙의 키는 180센티에 가까웠다. 혜숙의 키에 한참 못 미친 상대남은 제분에 못 이겨 의자를 발로 차고 나간다. 지끈거리는 머리에 손을 얹는다. 두통약을 꺼내 입에 털어 넣고 물을 마신다. 다음 상대남과의 맞선을 위해 이동할 시간이다. 옆 건물 카페를 향해 걸어간다. 이번엔 의사라 했던가? 과는 모르겠고. 두통약을 먹었는데도 통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관자놀이를 누른다. 화장실에 들러 옷 매무새를 고친다. 주위를 둘러보니 화장실에 아무도 없다.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여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이고 길게 숨을 내쉰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여자들의 수다스러운 소리가 가까워진다. 세면대 안쪽 남아있는 물에 담배를 비벼 끈다. 세면대 밑 휴지통에 담배꽁초를 버리고 향수 샤워를 한다. 제발 상대남이 이 향수 냄새에 질식하기를 바란다. 화장실 모퉁이를 돌아설 때 한껏 꾸민 남자가 여자친구와 통화하는 소리가 들린다.
“자기야, 우리 자기 너무 보고 싶은데 엄마가 나 보고 싶다고 시골에서 올라오셨어. 어떡하지? 오늘은 좀 힘들겠다.” 정성 어린 남자의 애교가 통했는지 약속을 다음 날 모 호텔로 변경하고 핸드폰에 한참을 쪽쪽거리더니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넣고 화장실로 사라진다. 카페 안 창가 쪽 자리를 잡고 앉아 핸드폰을 꺼내 들고 메시지를 확인한다. 관심 있는 가방의 입고 소식이다. 매장에 전화를 걸어 한 개 확보한다.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손에 든 핸드폰이 진동한다. 앉아있는 위치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전화를 끊는다. 잠시 후 혜숙 앞에 상대남이 앉는다. 만나서 반갑다는 상대남은 호감 가득한 눈길을 보낸다. 첫눈에 반했다는 둥, 혜숙을 만나게 되려고 이제껏 아무도 만날 수 없었나보다는 개소리까지. 여기저기 짜증 나는 개판이다.
“집이 시골이세요?”
“아뇨, 시골은 아니고, 대전입니다.”
“의사라고요?”
“네, 성형외과의입니다” 턱을 살짝 비틀어 들고 눈을 게슴츠레 뜬 채 우쭐대며 말한다.
“혜숙씨는 음대 나오셨다고… 이렇게 뵈니” 또다시 길게 재잘거릴 것을 생각하니 끔찍하다. 말허리를 툭 자른다.
“요즘 병원 개원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죠?”
“네…그렇죠, 뭐. 아무래도 피부과 성형외과는 환경을 어떻게 꾸미느냐에 따라 매출에 많은 영향을 미치니까요” 혜숙의 얼굴에 비웃음이 어린다.
“아, 그래서 돈줄 잡으러 나오셨구나?”
“무슨...”
“근데, 내가 네 엄마니? 난 너 같은 자식 둔 적 없는 것 같은데.”
“아니 무슨 막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장난해요?” 상대남은 낯빛이 뻘게진 채 앉아있다. 자존심도 돈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나 보다.
“난 장난 아닌데. 네 멍청한 여친한테나 가보는 게 어때?”
“여친이라뇨?” 시치미를 떼지 만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내일 네 여친과 만날 호텔 이름까지 알려줄까? 이젠 별 거지 같은 것까지 꼬이네”
엄마가 사라졌다. 혜숙에게는 ‘미안해! 잘살아!’라는 편지도 아닌 메모만 남겼다. 현금과 금을 좋아하는 아버지는 서재에 커다란 금고를 가지고 있다. 한 번씩 금고 모서리를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으며 혼잣말하는 것을 보았다. 집에 들어오는 아버지에게 엄마가 남기고 간 메모를 보여준다. 아버지는 창백한 얼굴로 서재로 뛰어간다. 아버지를 뒤따라 서재에 들어서던 혜숙은 아버지의 외마디 절규를 듣는다. 커다란 금고는 문이 열려 있고 그 안은 텅 비어 있다. 혜숙은 아버지를 피해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근다. ‘똑’ 하는 잠금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장롱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아버지가 자신을 때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숨을 죽이며 옷가지로 자신을 가린다.
아버지는 엄마를 향한 분노를 혜숙에게 쏟아 놓는다. 아버지의 매질은 혜숙의 온몸을 가격한다. 머리, 얼굴 가리지 않는다. 혜숙이 맞다가 쓰러지면 발길질을 시작한다. 죽지 않으려고 머리를 감싸고 몸을 둥글게 한다. 혜숙의 몸이 고통에 겨워 축 늘어져 기절할 때면, 아버지는 손에 감아쥔 허리띠를 들고 욕설을 흘리며 방을 나간다. 혜숙은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침대에 눕는다. 입안은 피비린내가 가득하고 한쪽 눈은 부어서 앞이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며칠 정도는 괜찮겠지. 잇새로 빠져나가는 자신의 신음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든다.
아버지가 혜숙의 결혼식 날짜를 통보했다. 혜숙보다 20살 더 많은 정치인이다. 이미 한 번 결혼했었고 사별 한 그 사람에게는 세 명의 딸이 있다. 이 결혼을 거부하면 아버지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이 결혼이 절망만이 살아 있는 지옥의 통로라 할지라도 선택의 여지는 없다.
혜숙의 남편은 일주일 중 6일은 자정을 넘기고 고주망태가 되어 집에 들어온다. 하루 종일 뭘 하고 지내는지 불편한 점은 없는지, 세 딸과 관계는 괜찮은지,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세 딸은 혜숙이 눈앞에 있어도 마치 보이지 않는 유령처럼 말을 시키지도, 묻는 말에 답을 하지도 않는다. 아무도 혜숙에게 관심이 없다. 집안일을 돕는 도우미들도 딸들과 혜숙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혜숙을 외면한다. 팔려 오듯 한 결혼이라도 날마다 더해가는 상실감은 혜숙의 삶의 정체성을 무너뜨린다. 왜 살아야 하나?
남편의 정치적 행보가 국민 입에 좋은 모습으로 오르내리고 당내에 입지를 견고히 다지게 되면서 아버지는 혜숙에게 한도가 없는 블랙카드와 강남 한복판의 빌딩 하나를 선물로 줬다. 혜숙은 헛헛함을 달래려고 남자들을 만난다. 빈번한 호텔 파티는 전등 주위를 맴도는 나방 떼처럼 많은 일회용 친구를 만들어 준다.
늦은 아침을 먹고 치장을 한 후 집을 나선다. 천천히 백화점 쇼핑을 한다. 가방 하나에 옷도 몇 벌 산다. 다이아몬드 귀걸이와 목걸이, 반지, 팔찌 세트를 착용하고 거울에 비춰 본다. 단순한 디자인이 마음에 든다. 블랙카드를 건네니 직원이 공손히 두 손으로 받아 결제한다. 예전 같으면 아버지의 욕설이 날아들었겠지만, 남편의 정치적 입지가 강해질수록 돈이 되는 다방면의 인맥들이 아버지를 통해 손을 내밀고, 이는 아버지에게 수백 배의 이익을 내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어 하루에 얼마의 돈을 쓰든 상관하지 않았다.
쇼핑백을 차 트렁크에 던져 넣고 일식당에 전화를 건다. 식당 안에 들어서니 낯익은 쉐프가 반갑게 맞이한다. 스시 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쉐프와 대작을 하며 사케를 곁들여 초밥과 회를 먹는다. 대리운전을 불러 가수 출신 사장이 운영하는 B 클럽으로 향한다. 입구의 가드들이 혜숙을 보고 몇 걸음 앞으로 나와 맞이한다. 줄 서 있는 사람들과는 별개로 순서를 지키지 않아도 먼저 입장 할 수 있는 것이 VIP의 특권이다. 클럽 안은 낮은 조도, 현란한 불빛, 온통 시끄러운 음악과 사람들의 샤우팅 소리는 뜨거운 열기가 되어 혼미한 지옥의 중심부를 연상하게 한다. 2층의 룸으로 들어가자 먼저 자리 잡은 두 친구가 손 인사를 한다. 대기업 총수의 손녀인 H와 연예인 Y는 이 클럽의 죽순이와 죽돌이로 통한다. 이변이 없는 한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저녁 7시 이후 이곳에서 산다.
혜숙이 6개월 전에 처음 B 클럽에 왔을 때, VIP 룸으로 초대되었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이 연예인 Y씨다. 흐리멍덩한 눈에 초점은 사라지고 끊임없이 모를 말을 지껄이며 웃는 그는, 몸은 이곳에 두고 정신은 안드로메다로 보낸 듯 보였다. 혜숙이 위스키와 보드카를 여러 잔 마셨을 때, 아침까지 놀아보자며 에너지드링크에 술을 섞은 Bomb을 받아 마셨다. 그리고 그 후의 기억이 사라졌다. 아침에 깨질듯한 머리를 감싸 쥐고 일어났을 때는 호텔이었다. 침대는 흐트러져 있었고 여기저기 벗어 던진 혜숙의 옷가지가 쓰레기처럼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 뒤로 Y의 소개로 H를 알게 됐다.
함께 술을 마시고 그들이 하는 대로 마약을 했다. 마약이 온 신경에 퍼질 때면, 혜숙은 엄마를 만난다. 엄마는 다정하게 혜숙을 안아주며 식탁에 손수 지은 밥과 된장찌개, 김치, 김, 소시지를 차려 놓는다. 혜숙은 게걸스러울 정도로 맛있게 먹는다. 먹는 것도 예쁘다며 자꾸 머리를 쓰다듬는 엄마에게 머리모양 망가진다고 투정을 부린다. 마약 중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지만 처음 경험한 그 기분을, 엄마를 다시 느끼고 싶어 B클럽을 자주 찾는다. 마약은 서서히 윤희의 몸과 정신을 정복한다. 양심은 사라지고, 속된 남자들과 의미 없는 만남을 갖는다. 윤희의 마음과 정신도 우주 어딘가로 보내 버린다. 빨리 죽음이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연일 남편의 미투 사건과 혜숙의 기행이 모든 뉴스채널에 도배됐다. 코미디 프로에서는 혜숙 부부를 ‘막장 부창부수’라는 제목으로 패러디했다. 날로 심해지는 사람들의 비난 속에 버티다 못한 남편은 정치를 내려놓고 혜숙과 이혼 후 야반도주하듯 세 딸을 데리고 이민을 떠났다. 천년만년 살 것처럼 군림하던 아버지도 혜숙 부부의 일이 연일 세상을 들썩이던 어느 여름날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도우미 아주머니의 휴가 기간과 맞물려 뒤늦게 발견된 아버지는 이미 부패가 시작돼 주위에는 구더기가 창궐한 상태였다고 한다.
검은 선글라스와 검정 마스크, 깊이 눌러쓴 챙 있는 까만 모자에 숨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변호사를 만난다. 상속 내용을 전달받고 아버지 집으로 간다.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퇴직금을 주고 집을 나서려 할 때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마당 한쪽에는 개 집이 있고, 큰 몸집의 누런 개 한 마리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몇 주전 아버지가 품종이 좋은 개라고 데려왔다고 한다. 아주머니에게 개를 부탁해 보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거절한다. 개 목줄을 잡고 아버지 집을 나선다. 개 목줄을 슬그머니 놓는다. 너라도 자유롭게 살라고. 차를 타려고 문을 연다. 뭔가 혜숙을 스치고 차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조수석에 당당하게 앉아있는 누런 개다. 나오라고 다그쳐도 고개만 이리저리 갸웃거린다.
중부 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간다. 뱃속의 꼬르륵 소리에 지난 며칠 동안 먹은 것이 없다는 것을 상기한다. 한참을 달리다 배가 고파 인접 도로로 빠져나온다. 휴게소는 사람들이 많아 가기 싫다. 시골 도로를 한참 달리다 작은 마을로 들어선다. 인연 국밥이라는 허름한 국밥집 안으로 들어간다. 누런 개도 따라온다. 테이블은 4개 메뉴는 달랑 두 개다. 인연 국밥 대, 인연 국밥 보통. 혜숙을 흘끔 쳐다보던 할머니는 말도 없이 부엌으로 들어가 쟁반에 한 상 차려 혜숙 앞에 놓는다. 누런 개가 낑낑 소리를 낸다. 개를 위해 국밥 대자를 주문한다. 할머니는 넓다 란 그릇에 국밥을 가져와 누런 개에게 내민다. 힘없이 몇 숟갈 뜨는 혜숙에게 할머니가 참외 한 접시를 내주며 먹으라 한다. 창밖을 본다. 벌써 날이 저물고 있다. 근처에 숙박시설이 있냐는 혜숙의 질문에 할머니는 국밥집 옆으로 통하는 오솔길을 걸어 자그마한 이층집으로 데려간다. 주위가 키 큰 나무들로 둘러싸여 도로 쪽에서는 잘 보이지 않은 점이 마음에 든다. 집에는 그 흔한 TV 하나가 없다. 다음날 할머니는 아침으로 숭늉과 열무김치를 내어 오셨다. 아침에 보니 나무들이 우거져 집을 감싸고 작은 텃밭 앞에는 개울이 흐른다. 동네 다른 집들은 한참을 들어가야 있다고 하니 잠시 이곳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할머니는 혜숙의 가족 사항을 묻는다. 그냥 며칠 전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혼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할머니는 안쓰러운 듯 혜숙이 원하는 대로 있으라고 한다. 아들 내외가 미국에 살고 있어서 한국에 자주 들어오기 힘든데, 적적하지 않게 잘됐다고 좋아하신다. 이층은 아들 가족 짐들이 많아 어지러우니 일 층의 문간방을 쓰기로 한다. 마당에 누런 개를 풀어 놓으니 좋은가보다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어디를 가든 누런 개는 따라온다. 아무래도 이름을 지어 줘야겠다. 딸랑이, 그림자, 껌딱지, 친구 그래, 친구가 좋겠다. 누런 개를 향해 불러본다. 친구야!
친구는 아침을 먹고 나면 혜숙을 재촉한다. 근처의 작은 산을 헤집고 다니는 걸 좋아하는 친구는 혜숙이 함께 집을 나설 때까지 짖어댄다. 오솔길을 따라 산을 오를 때면 한참을 먼저 뛰어 올라가다 뒤를 돌아보고 혜숙에게 다시 뛰어온다. 혜숙이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다시 전속력으로 뛰어 산 근처의 풀숲을 헤매다 오면 털에 오만 산의 흔적을 가득 묻히고 있다. 친구와 긴 아침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면 녹초가 된 혜숙은 누울 곳을 찾는다. 친구도 마당 그늘진 곳을 찾아 엎드려 잠을 잔다. 할머니가 점심 먹자고 부를 때 부스스한 몰골로 일어나 이른 점심을 먹고 마스크와 모자를 눌러쓰고 할머니의 식당 일을 돕는다. 사람들을 마주하는 일은 힘들지만, 부엌에서 설거지와 야채 다듬는 일은 도울 수 있다. 점심 장사가 끝나고 혜숙이 집으로 돌아오면 친구는 혜숙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재롱을 부린다. 혜숙이 노란 플라스틱 원반을 멀리 날리면 친구는 정신 없이 달려가 점프한다. 어느새 원반을 받아 물고 뛰어와 혜숙 앞에 놓는다. 친구의 머리를 쓰다듬고 ‘하이파이브’하면 앞발을 든다. 작은 간식에 행복한 친구는 날아가는 원반을 향해 다시 뛴다.
요즘 들어 자꾸 잠이 쏟아진다. 너무 많은 일을 하는 것 같다. 평생 하지 않았던 아침 산책은 잠을 부른다. 입맛도 아주 좋아졌다. 마음이 편해서인지, 할머니를 따라 식당 일과 텃밭 농사를 도와서 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삐쩍 말라 뼈를 드러내던 몸도 살집이 올랐다. 저녁밥을 먹으면서 졸고 있는 혜숙은 누군가 자신을 흔드는 손길에 정신을 차린다. 눈을 뜬 혜숙에게 따스한 미소를 보이는 할머니, 할머니의 손이 혜숙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이 따뜻한 기분, 눈물이 핑 돈다.
며칠 전부터 속이 좋지 않다. 어떤 날은 괜찮다가도 하루 종일 속엣것을 다 게워 내 기도 한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혜숙의 몸 상태에 할머니는 큰 닭 한 마리를 사와 인삼과 찹쌀을 넣어 닭죽을 끓여 주신다. 할머니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자꾸 반복되는 어지럼증과 구토에 힘겨운 나날이다. 병원에 가보는 것이 어떠냐며 걱정스레 쳐다보는 할머니께 걱정하지 마시라고, 이제 서야 긴장이 풀린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떤다.
친구를 차에 두고 차 유리창 문을 내려놓는다. 친구는 낑낑거리지만, 차 안에 얌전히 있다. 내과의원을 찾은 혜숙을 향해 나이 지긋한 의사는 같은 건물에 있는 산부인과를 꼭 가보라고 한다. 산부인과를 나서는 혜숙은 갑자기 치미는 욕지기에 눈물이 난다. 누구의 아이인지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무엇보다 혜숙은 자신이 엄마가 된다는 사실이 끔찍하다. 아이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까? 훗날 아이가 혜숙의 과거를 알게 된다면 아이는 얼마나 절망할까? 주위 사람들은 혜숙을 욕하고 아이까지 싸잡아 혈통 운운하며 수군거리지는 않을까? 좋은 엄마가 될 자신이 없다. 아이가 혜숙을 저주하며 울부짖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어린 시절 혜숙의 모습이 겹쳐 보이며 절망으로 다가온다. 시야가 흐릿해진다. 세워둔 차를 지나쳐 걷는다. 아스라이 들리는 개 짖는 소리… 자동차 경적… 날카로운 마찰음… 둔탁한 소리…사람들의 비명…
병원 침대에서 눈을 뜬 혜숙은 산모와 아이는 이상이 없다는 의사의 말에 손을 가슴에 얹고 긴 숨을 내쉬는 할머니를 본다. 혜숙에게 다가와 손을 잡고 토닥이는 할머니는 혜숙의 눈물에 품을 내어준다. 친구를 찾는 혜숙에게 할머니는 친구는 이미 집에 갔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다음날 국밥집 앞에 차를 세우고 급히 집으로 향한다. 친구를 부른다. 막연히 엄습하는 불안한 느낌, 친구를 찾는다. 뒤따르는 할머니는 말이 없다. 혜숙은 집을 나와 친구가 좋아하는 산책로로 향한다. 소리쳐 친구를 부른다. 불안은 공포로 변한다. 산길을 오르는 혜숙의 앞을 막아서는 할머니는 혜숙의 두 손을 거머쥔다.
“아가, 다 괜찮혀. 친구가 니를 얼마나 생각했음 니 대신 갔겄냐. 친구가 좋은 일 한겨. 친구가 준 목숨인디 니가 이라먼 안되는겨. 괜찮혀, 괜찮혀”
정신을 놓은 혜숙이 도로로 걸음을 내딛자, 친구가 혜숙의 앞을 막아섰고, 달려오는 차를 보고 혜숙은 기절했다. 친구는 혜숙을 지키려는 듯 달려오는 차를 향해 짖고 있었고 늦게 개를 발견한 운전사가 핸들을 틀었지만, 이미 친구와 간격이 가까워 혜숙은 피했지만, 친구는 피할 수 없었다고 한다.
혜숙은 힘을 낼 수가 없다. 세상의 모든 저주를 혼자 받은 것 같다. 왜 자신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건지. 혜숙은 세상에 태어나 유일하게 자신을 사랑해 준 친구가 보고 싶다. 친구에게 가고 싶다. 친구와의 이별은 혜숙이 살아가는 의지를 가져갔다. 세상은 잿빛으로 변했다. 배는 불러오는데 혜숙은 말라 간다. 출산 예정일을 한 달 앞두고 혜숙은 지난 자신의 과거를 할머니에게 고백한다. 못되게 살아서 천벌을 받은 것 같다며 힘없이 웃는다. 혹시라도 자신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할머니가 아이를 키워 달라고 할머니의 손녀로 키워달라고 부탁한다. 할머니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잘라 말한다. 자식은 엄마가 키워야 하는 것이니 헛소리하지 말고 건강히 순산할 생각만 하라고 호통을 친다. 혜숙은 변호사를 불러 유언장을 쓴다. 모든 재산은 할머니와 아이에게 상속한다.
이틀 뒤 눈이 어른의 키만큼 내린 새벽에 혜숙은 몸을 풀었다. 갑자기 내린 폭설에 앰뷸런스도 발이 묶였다. 할머니의 도움으로 아이를 안고 아이 얼굴을 눈에 담는다.
“할머니 제가 부탁할 사람이 할머니밖에 없어요. 아이를… 아이를… 부탁해요.” 말하는 중간중간 가쁜 숨을 쉰다. 혜숙은 마지막 힘을 모아 할머니에게 애원한다. 하혈은 멈추지 않는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할머니 제가 이 아이의 엄마라는 걸 아이가 모르게 해주세요. 과거의 나를 알까 봐, 닮을까 봐 무서워요.” 혜숙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사랑받고… 사랑하고… 절대… 외롭지 않게… 아이… 사랑…” 친구가 보인다. 친구가 다가와 혜숙의 뺨을 핥는다. 아이를 안고 있는 혜숙의 몸이 축 늘어진다. 혜숙의 귓가에 친구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오늘 이사하신 새로운 터전에서는 좋은 일 많이 생기시길 빕니다.
'혜숙의 이야기'는 잘 읽었습니다.
제 마음에는 소설로 안 읽히고.
아침 드라마 대본으로 읽히네요.
이번 주 갠 일정이 많아 <학평자료>를 안 올릴 예정입니다.
학평시간에 뵙겠습니다~~~
새 터전에서 좋은 꿈 이루시길 다시 한번 祝願합니다.
네~ 너무 막장이죠^^
많이 지적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쇠고기 육회의 핏빛 향기가 나는 글
잘 읽었습니다.
탯줄로 이어가는 모녀 3대의 끈질김은 감히 남자들은 흉내도 어렵다
피해자인 것 같이 보여도 사실은 생명을 이어가는 지배자
역시 시인 이시네요^^
내용 전개가 빨라서 재미를 더해주는 것 같습니다
후속편도 기다려 집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