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의 키워드<1> - 깨어남(覺)!
수행을 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나를 지배하고 억압하는 그 모든 조건들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다. 마음이 그 어떤 조건 속에 묶여있으면 마음에는 평화와 평온이 찾아올 수 없으며 마음이 평화와 평온에 다다를 수 없다면 마음은 늘 무지와 혼돈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무지와 혼돈이 찾아드는 이유는 자명하다. 자기란 동굴 안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동굴 안에서 자신이 내뱉는 소리들은 그대로 반사되어(메아리가 되어) 동굴 안을 가득 울릴 것이다. 그 동굴 안에서 그 소리의 파장 속에 갇혀 살 수밖에 없기에 고통은 그칠 수가 없다. 울림통 안에 들어가 사는 것이 평온할 리가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 울림이 자기의 내면에서 일어나는지 모르고 밖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하니 울림이 잦아들 리가 없다.
수행은 결국 자기의 본래면목, 즉 <참나>를 찾아나가는 머나먼 탐사의 여정이다.
자신이 구축해놓은 삶의 모든 조건들, 즉 타자화된 나를 해체하고 참다운 나를 찾음으로써 울림의 원인을 찾아내고 그로부터 자유롭기 위한, 즉 그 누구를 위한 그 누구에 의한 삶이 아니라 스스로 삶의 주인공으로서 지금 이 순간 여기 존재하는 일이다.
수행의 방법이나 과정들은 수없이 많다.
사유나 행위의 통찰, 좌선, 행선, 행공(기공수련), 명상, 간화선, 비파사나, 요가, 염불 기타 등등 많은 방법론들이 동양적 전통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유불선 삼교의 전통은 바로 수신(修身)과 수심(修心)을 기초로 성장해왔다. 그 모두는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실은 인간의 몸과 마음에 관한 일이며 그 부조화를 조율을 통해 극복하면서 일치의 과정을 통해 평화와 평온으로 인도한다. 이 때 집중(止)과 관찰(觀)은 필연적이며 필수적이다. 몸의 영향력 속에 갇혀있는 마음의 역동적 흐름을 집중해서 관찰함으로써 억압과 구속의 원인을 통찰하고 그 통찰을 통해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몸과 마음의 역학적 현상을 꿰뚫고 그로부터 깨어나는 일은 장소와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든 깨어나고 깨어있으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생물학적 몸의 영향력 안에 갇혀있고 그 마음은 몸이 관계하고 있는 가족, 사회, 국가, 세계라는 역사 과정 속에 묶여있으며 자신이 구축해놓은 조건화된 삶의 틀 속에 가두어져있다. 즉 그로부터 깨어나고 깨어있지 못하는 한 그는 언제나 조건화된 나, 즉 타자화된 나를 나의 참 모습이라고 오도하며 살아들 간다. 모든 에너지가 밖으로 투사되어 자기란 동굴 속에서 가득 찬 울림으로 그 자신을 현혹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일생을 살아간다. 따라서 그는 자기란 동굴 밖의 세상을 한 번도 나와 보지도 못한 채, 자기가 어떠한 존재인지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영지적 생명체>로서의 그 존재가치를 상실한 채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해내지 못하고 죽음의 순간들을 맞이한다.
수행의 일차적 키워드는 깨어남이다.
생물학적인 몸과 자신이 구축해놓은 조건화된 마음 안에 갇혀있는 동굴 안에 그 스스로 갇혀 살고 있는 지를 깨닫는 일이 바로 깨어남, 즉 깨달음(覺)이다. 그 스스로 그 동굴 안에 살고 있으면서 그 동굴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한 그는 결코 그 동굴 밖을 벗어날 수 없다. 아무리 고준한 진리를 말하고 도(道)를 논한다 하더라도 깨어나서 깨어있지 못하는 한 동굴 속에 갇혀있기는 매 한가지다. 아는 것 자체가 자신을 결정짓는 또 하나의 조건이 된다면 그의 앎은 그를 동굴 밖으로 결코 안내하지 못한다. 따라서 참으로 수행한다는 것의 일차적 과제는 다름이 아니다, 즉 아는 것을 통해 그런 조건화된 나(내가 구축해놓은 동굴)로부터 깨어나는 것이 핵심이다. 참으로 아는 이는 자신이 동굴 안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온전하게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 때 우리는 비로소 동굴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바로 그것이 깨어남이며 깨달음이며 각(覺)이다.
따라서 모든 수행은 일차적으로 <깨어남>이 우선이다.
태생적으로 그 동굴 안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조건들과 자신이 구축해놓은 조건화된 나로부터 깨어나는 일, 그것이 수행의 일차적 관문인 <깨어남>이다. 하지만 <깨어남>, 즉 깨달음은 깨어있기 위한 전제 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깨달았더라도 깨어있지 못하고 그 깨달음에 천착하고 그에 묶여있다면 그의 깨달음은 그 자신을 장막 속에 둘러싸는 또 하나의 조건을 추가했을 뿐 동굴 밖의 세상으로 결코 나오지 못한다. 아는 것에 천착해 스스로 구축한 언어에 묶여버린다면 그의 앎은 타자화 됨으로써 그를 결코 동굴 밖으로 인도할 수가 없다. 따라서 깨달음, 즉 자신이 동굴 안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연통철 함으로써, 조건화된 나로부터 스스로 깨어나는 일이 우선이다.
나라고 인지하고 있는, 그 어떤 대상에 조건화되고 그에 천착해 일상적으로 적응해 살아가는 나를 온전히 통찰하고 그로부터 깨어나는 일이 바로 수행자의 첫걸음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무아(無我)란 나란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어떤 대상 속에 조건화된 나를 해체함으로써 <텅 빈 충만함>으로 세상과 교감하는, <깨어있는 나>, <열려있는 나>, <자유로운 나>를 말함이다. 따라서 무아(無我)의 지평에 도달해서 대아(大我), 즉 교감과 열림의 일체적 세계를 체감하는 것이 결국 수행자의 마지막 종착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