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증: 1404. [역경의 열매] 김승일 <1-10> 배달하는 길에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오 솔레미오’
생계 꾸리던 어머니 뇌출혈로 입원, 병원·생활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
SBS 프로그램 ‘놀라운 대회 스타킹’에 출연해 ‘한국의 폴포츠’로 이름을 알린 성악가 김승일씨가 16일 자신의 삶을 간증하면서 환히 웃고 있다.20대 중반 내 직업은 야식배달부였다. 한 밤에 오토바이를 타고 출근해 밤새도록 근무하고 아침 늦게 퇴근하곤 했다. 허름한 옷에 배달통을 든, 흔히 거리에서 쉽게 마주 칠 수 있는 그렇고 그런 동네 청년이었다.
노래를 좋아했다. 거리에서 들려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곤 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헬멧을 쓰고 있으니, 크게 노랠 불러도 주위엔 잘 들리지 않았다.
‘네순 도르마’(공주는 잠 못 이루고) ‘오 솔레미오’(나의 태양) ‘물망초’ 등이 애창곡이었다. 고달픈 삶의 연속이었지만 노래 솜씨를 녹슬지 않게 하려는 생각이었다.
유명한 성악가 파바로티의 곡들을 오토바이를 타고 부를 때면 하늘을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다. 한번은 오토바이를 타고 신호를 대기하고 있었다. 이날도 ‘오 솔레미오’를 불렀다. 그런데 아뿔사 이날따라 헬멧을 쓰는 것을 잊어버렸다. 오토바이가 한 대가 멈춰 섰다. 옆을 보니 인근 중국집 배달원이었다. 그는 나를 위아래로 한번 훑어 봤다.
“당신이 부르는 소리 맞아? 노래 꽤 잘 부르는데….”
그때 중국집 배달원의 놀란 눈동자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순간 무안했다. 무슨 잘못한 일도 없는데 말이다. 그래서 신호도 무시한 채 오토바이 엑셀을 당기고 그곳을 재빨리 벗어났다.
며칠 뒤 저녁 높은 빌딩으로 음식배달을 갔다. ‘25층이니까 노래 1절 부르는 것은 문제 없겠군’ 생각하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성악곡을 불렀다. 배달을 마치고 1층까지 내려올 때도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울림이 컸나 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웅성웅성 대며 몰려 있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안을 들여다보더니 ‘누가 우리 건물 엘리베이터에 오디오를 설치했나’며 수근댔다. 부끄러웠다. 이날도 잽싸게 오토바이를 타고 도망치듯 빠져 나왔다.
사실 나는 성악을 전공하던 학생이었다. 1996년 한양대 음대 성악과에 입학했다. 단지 3개월간 레슨을 받은 것뿐인데, 하늘이 대학합격을 도왔다고 생각한다. 열심히 공부해 장학금도 받았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갑자기 집안 살림이 기울었다. 직장생활을 하며 집안 생계를 잇던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지신 것이다. 충격이었다. 잦은 병원비와 생활비 등 돈이 많이 필요했다. 나는 졸지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다.
택배기사, 노점상, 대리운전, 휴대폰판매원, 어부생활 등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을 정도였다. 외롭고 고달픈 시절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학교와 집만 오가던, 세계적인 성악가를 꿈꾸던 성악과 학생의 신분에서 180도 뒤바뀐 현실은 정말 힘들었다. 하는 수 없이 다니던 대학을 자퇴했다. 그리고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무엇부터 어떤 일을 해야 할까 막막할 뿐이었다.
정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 [역경의 열매] 김승일 <1> 배달하는 길에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오 솔레미오'
* [역경의 열매] 김승일 <2> 한겨울 택시 세차하다 중풍 맞은 어머니
* [역경의 열매] 김승일 <3> 밴드·노래로 인기 오를수록 교회와는 멀어져
* [역경의 열매] 김승일 <4> 가족과 떨어져 사는 외로움 찬송가 부르며 달래
* [역경의 열매] 김승일 <5> "선생님, 레슨비가 없는데요…" "그냥 해주마"
* [역경의 열매] 김승일 <6> 어머니 중풍 재발해 대학 자퇴… "돈 벌자" 일본으로
* [역경의 열매] 김승일 <7> 새우잡이 배에서 탈출… 섬의 십자가 불빛 찾아가
* [역경의 열매] 김승일 <8> 내 노래 듣고 사장님이 TV 출연 신청… 벼락스타 돼
* [역경의 열매] 김승일 <9> 오랜 훈련 뒤 넘치게 부어주시는 은혜가…
* [역경의 열매] 김승일 <10·끝> 국내외서 줄잇는 러브콜 축복에 감사
약력=△1977년 경기도 수원 출생 △수원 삼일상업고 졸업. 1996년 한양대 성악과 입학 후 20년 만인 2016년 졸업 △SBS ‘놀라운 대회 스타킹’ 출연, 성악가 데뷔(2010) △앨범 ‘마이 스토리(My Story)’ ‘하나님의 은혜 Hymn’ 등 출시 △KBS 신년음악회, 폴포츠 내한공연 등 활발한 연주 활동 △경기도 평택 합정감리교회 집사
***[역경의 열매] 김승일 <2> 한겨울 택시 세차하다 중풍 맞은 어머니
정신 없이 물 뿌리던 모습 아픈 기억… 가난한 집안 사정 깨닫고 대학 자퇴
단란했던 가족들과 함께 찍은 어린 시절의 김승일(오른쪽 두 번째).깊은 잠에 빠진 새벽 4시 반 ‘따르릉’하고 전화벨이 울렸다. ‘누가 이 이른 시간에 전화를 하지.’ 잘못 걸린 전화라 생각하고 받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벨은 계속 울렸다. 하는 수 없이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누구신가요.” 전화기 넘어 목소리는 중년의 남자였다. 그 남자는 “○○○씨 댁 맞죠. 전화 받으시는 분은 가족이신가요”라고 물었다. 낯선 남자로부터 어머니 이름을 들으니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왠지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머니 행동이 좀 이상해요. 어디 불편하신 것 같아요. 얼른 어머니 회사로 오셔야할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어머니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어머니는 어제 저녁 택시회사에 세차일을 하러 가셨는데 마음이 착잡해졌다. 옷을 대충 챙겨 입은 아버지와 나는 어머니가 일하는 회사로 발길을 옮겼다.
그날 새벽은 엄청 추운 한겨울 날씨였다. 어머니 회사에 도착하자, 먼발치에 홀로 서 있는 어머니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갔다. 전화 온 남자의 말대로 어머니가 좀 이상했다. 택시가 아닌, 아무 것도 없는 맨 바닥에 물 뿌리는 호스를 들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서성이고 있었다. “어머니, 왜 이러고 계세요. 집에 가셔야죠. 저 알아보시겠어요. 막내 승일이에요….”
곧 바로 병원에 가서 정밀진단을 받았다. 어머니 병명은 뇌출혈이었다. 흔히 말하는 ‘중풍.’ 이후 어머니는 2년가량 투병생활을 했다. 말이 어눌해지고 몸까지 불편해졌다.
내게 어머니는 특별한 존재였다. 늘 옳고 그름이 분명하던 분, 키가 작고 왜소하셨지만 성격이 다부지고 열정적으로 가족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 너무나도 헌신적인 어머니였던 것이다.
충격에 빠졌다. 어머니가 정신을 잃은 채 바닥에 물을 뿌리시던 모습은 지금도 잊지 못할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죄책감이 들었다. 어머니를 더 잘 모셨어야 했는데. 아들로서 평소 혈압이 높았던 어머니의 건강을 좀 더 챙겨 드렸어야 했는데….
어머니가 발병한 뒤 비로소 집안사정을 알게 됐다. 가난한 우리 집, 착하지만 경제적인 능력이 부족한 아버지, 대학등록금 마련도 힘들다는 것 등등.
무엇보다 세 차례 쓰러지신 어머니가 불쌍했다. 자식 키우느라 고생하신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밤새도록 자식 학비를 마련하시느라 고생하신 어머니가 아닌가. 이것저것 생각하니 힘들고 막막했다. 어떻게 할 능력도 용기도 당시 내겐 없었다.
문득 머릿속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성악공부를 그만둬야겠다.’ 우리 집 형편에 성악 공부는 사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학비 때문에 어머니를 힘들게 했다는 죄책감이 맴돌았다.
짐이 되기 싫었고 학교를 다닐 자신감도 없어졌다. 점점 학교 캠퍼스 언덕을 오르기 힘들었다. 평온하게 수업을 받는 다른 학생들이 부러웠다. 마음속엔 시기와 질투, 분노와 불평 등 안 좋은 생각으로 가득했다.
결국 대학을 자퇴했다. 명랑하고 밝았던 내 모습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노래로 칭찬을 받던 기억도, 세계적인 성악가가 되겠다는 꿈도, 다 물거품이 됐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듯 했다. 인생의 긴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김승일 <3> 밴드·노래로 인기 오를수록 교회와는 멀어져
미션스쿨 덕분 음악·노래공부 심취… ‘별밤’ 뽐내기 대회서 대상 받기도
고등학교 재학시절 그룹사운드를 조직해 열창하는 김승일씨.평소 갈고닦은 음악재능을 펼칠 기회가 생겼다. 그룹사운드(밴드)를 만들어 학교축제에 참가했다. 건반과 드럼, 기타를 반주로 신명나게 노래를 불렀다. 나는 메인보컬이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미션스쿨이라 교회음악을 많이 다뤘다. 찬송가와 복음성가도 불렀다. 교가도 ‘하나님 은혜 주사 이룩한 동산’이란 가사로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부담 없이 이 학교에 진학했다. 학교는 내게 천국 같았다. 선생님께 노래연습이나 노래대회에 나간다고 말씀을 드리면 수업이나 보충수업을 안 해도 되도록 배려해 주셨다.
음악과 노래 공부에 심취했다. 거의 음악실에서 노래와 함께 생활하다시피 했다. 음악책을 보고 열심히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피아노를 치고 주로 음악하는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한번은 노래대회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른 참가 신청서를 냈다. 대회를 마치고 수상자 발표시간,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우리 밴드의 이름은 없었다.
‘내가 어떻게 노래대회에서 떨어질 수가 있지. 이건 내 스타일이 아닌데….’
어린 마음에 충격이었다. 상을 받지 못한 이유를 알아봤다. 그건 건방지게 노래 불렀다는 것이었다. 이게 웬일인가, 잠시 숙연해졌다. 신앙적으로 생각할 때 하나님은 결코 겸손하지 않은 태도나 행동을 용납하지 않으셨음을 그때 깨달았다.
이듬해도 밴드를 만들어 학교축제에 나갔다. 멋들어지게 노래를 불렀다. 축제에 참가한 여학생들은 우리 밴드를 향해 소리를 질러댔다. 정말 열기가 뜨거웠다. 여학생들의 함성을 들으니 너무 신이 났다. 세상 모든 걸 얻은 느낌이었다. 신비로운 경험이었고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돌이켜 생각하면 내 음악인생의 서막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점점 음악세계에 빠져들었다. 밴드 활동에 더 열심히 매진했다. 전국 무대에도 진출했다. 당시 가수 이문세씨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에’(약칭 별밤)라는 코너의 뽐내기 대회에 나갔다. 우리 반 학생 50여명의 열화와 같은 성원과 지지를 받아 출연한 것이다.
하지만 무대경험이 많지 않고 다소 당황하는 나와 우리 밴드 단원들의 모습에 ‘피식’ 웃던 이문세씨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 그러나 이문세씨의 웃음을 뒤로 하고 대상을 차지했다. 다음날 나는 학교에서 제법 유명인사가 됐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수원에서도 내 노래 실력을 알아주기 시작했다. 수원시 청소년 음악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했다.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여학생들 사이에 ‘김승일 팬클럽’이 생길 정도였다. 노래를 부르고 좀 더 다듬어진 성악가로 거듭나고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일이 있다. 바로 무감각해진 나의 영성이다. 주일에만 형식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소위 ‘선데이 크리스천’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런 내 신앙심은 교회 권사님으로 믿음생활에 열심이셨던 어머니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그러나 결코 하나님은 김승일을 버리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나를 향한 계획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해 나가셨다고 믿는다. 이제와 고백함이 주님께 송구할 따름이다.
***[역경의 열매] 김승일 <4> 가족과 떨어져 사는 외로움 찬송가 부르며 달래
부모님 일 때문에 할머니 댁에 맡겨져… 혼자라는 상처·공허함 음악으로 채워
2012년 9월 생애 첫 앨범 ‘마이 스토리(My Story)’ 자켓 사진.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형들과 누나 등 다른 식구는 모두 도시에 살았다. 하지만 막내인 나는 시골 할머니 댁에 맡겨졌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신 까닭이다. 허드렛일로 생계를 잇는 부모님은 막내까지 키우기 힘드셨던 것 같다. 할머니는 나를 애지중지 키우셨다. 지금도 고마운 할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그래선지 어머니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한번은 어머니가 나를 보러 할머니 댁에 왔는데도 할머니 등 뒤에 숨었다고 한다.
하지만 자라면서 밝고 긍정적인 성격 때문에 바뀐 환경에 잘 적응했다. 교회에서 목사님과 교인들이 심방을 오면 분위기 메이커였다. 교인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걸 좋아했다. 교회 식구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하지만 아픈 기억이 있다. 정서적으로 심약하고 실의에 빠진 삼촌 때문이다. 삼촌과 나는 할머니 댁에서 함께 생활했는데 삼촌 성격이 좀 삐딱했다. 어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때리곤 했다. 어린 나는 그냥 속수무책으로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다.
부모와 함께 살지 않는다는 사실이 늘 상처로 남았다. 상대방에게 무시당한다고 느낄 때면 공격적으로 변했다. 외로움에 힘들어 할 때도 있었다.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었다.
힘들 때마다 음악을 듣고 노래 부르는 것으로 마음을 달랬다. 교회를 열심히 다닐 때는 교회음악을 좋아하기도 했다. 감미로운 찬송가와 CCM(현대기독음악)을 즐겨 들었다.
하지만 중·고등학교 때 대중음악을 더 좋아하게 됐다. 교회 권사님인 어머니도 유행가를 부르셨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는 평소엔 찬송을 열심히 부르시다가도 힘들 때면 대중가요 “울고 싶어라 울고 싶어라 내 마음”으로 시작하는 가수 이남이의 노래를 목놓아 부르셨다.
혼자 놀길 좋아했다. 내게 음악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채워주는 도구이자 마음의 안식처였다. 멀리 떨어져 사는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도 음악을 통해 채웠다. 음악 덕분에 친구들과의 관계도 원만해졌다. 청소년 시절의 낭만도 하나둘 생겼다.
아쉬운 점은 참을성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그렇게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까지 했지만 욕심이 생기면 그걸 이루려 노력하기보다 안 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부끄럽게도 ‘오래 참음’이라는 덕목을 한 번도 실천해 본 적이 없다.
한번은 집 근처에 자전거를 자물쇠로 묶어 놨다. 그런데 우연히 자전거를 훔쳐가는 친구를 지켜보게 됐다. “야 이 자식아. 왜 내 자전거를 훔쳐 가. 이 나쁜 놈아….”
나도 모르게 크게 소리쳤다. 당시 나는 자타가 인정하는 조용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이날 스스로도 놀랄 만큼 그 친구를 향해 분노를 폭발시켰다. 그렇게 소리칠 필요까지 없었는데….
외톨이였다. 나를 이해해줄 사람은 세상엔 없다고 생각했다. 외로움이 온통 내 유년시절을 대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성장과정 때문에 한때 외골수 성격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외로움이 밀려올 땐 찬송가와 복음성가를 듣고 부르며 마음의 평정을 찾았다. 지금도 힘들 때마다 당시 교회에서 부르던 찬송가 곡조가 생각나곤 한다.
***[역경의 열매] 김승일 <5> “선생님, 레슨비가 없는데요…” “그냥 해주마”
집안 형편 배려해준 고마우신 선생님… 3개월 레슨 받고 성악과 덜컥 합격
테너 김승일씨가 한양대 음대 재학 중 해군에 입대해 노래연습을 하고 있다.유년시절 클래식보다 우리나라 대중가요를 더 좋아했다. 그 중에서도 크게 소리를 질러 대는 ‘소프트 락’(Soft Rock) 장르를 좋아했다. 락가수 김종서를 좋아했다. 밝고 명쾌한 리듬을 매우 좋아했기 때문이다. 학창시절은 음악과 노래 때문에 마냥 즐겁고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등학교 음악선생님이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했다. 하지만 나는 그 선생님의 권유를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았다. 속으로 ‘내가 왜 그 재미없는 클래식 음악을 전공해야 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아울러 교회음악,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로 이렇게 바쁘게 쓰임 받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이 오지 않던 어느 날 테이프에 있는 노래나 한곡 듣고 자야겠다고 생각하고 ‘카루소’(Caruso)란 노래를 틀었다. 순간 귀가 번쩍 뜨였다. ‘세상에 이런 음악 장르도 있구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대중가요에서는 느낄 수 없는 풍성함, 설명할 수 없는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이탈리아어 가사를 한글로 바꿔 써가며 외우고 맹연습했다. 놀란 사실은 카루소 노래는 매우 높은 음의 영역인데도 내 목소리가 쉽고 거침없이 부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신기했다.
어느덧 고등학교 3학년 진로의 기로에 섰다. ‘어릴 때부터 해 온 것이라곤 노래 부르는 것뿐인데. 대학은 준비도 안 했는데….’
대학에서 어느 학과를 선택해야 할지 고민을 거듭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이런 것인가, 아버지 소개로 성악 레슨 선생님을 만났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이탈리아어로 성악곡을 부르려니 어려웠다. 무엇보다 매회 레슨비 부담이 컸다.
한두 번 레슨을 받은 뒤 선생님께 “이제 우리 집 형편이 어려워 못 올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아 그렇구나. 레슨비는 나중에 가져와도 된다. 당장은 그냥 해 주마.”
그땐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하는지, 사례비를 받지 않고 레슨을 해준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조차 잘 몰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고마우신 선생님이다.
그 선생님께 3개월 동안 성악 레슨을 받았다. 한양대 성악과에 응시했고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들어 있었다. 합격자 명단을 보고 난 뒤 넓은 운동장을 혼자 좋아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달렸다. 한참을 정신없이 몇 바퀴 돌고 난 뒤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열심히 공부해 장학금도 받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입학동기들 중에는 비싼 레슨을 수년간 받아왔던 친구, 재수에 삼수까지 한 친구들도 많았다. 나처럼 단 3개월 레슨에 합격한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대학재학 중 해군에 입대해 군악대에 배속됐고 해외공연도 다녔다. 해군군악대가 KBS 열린음악회 ‘호국가요제’란 프로그램에서 대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실로 일사천리였다. 그대로 계속 평탄하게 성악가로의 내 인생이 잘 되기만 할 줄 알았다. 내 명성은 가족은 물론 친척, 주위 사람들에게도 점점 높아만 갔다. 다니던 교회에서도 내 노래실력을 높이 평가했다. 마음속에서 나는 이미 프로였고 활동하는 성악가였다.
***[역경의 열매] 김승일 <6> 어머니 중풍 재발해 대학 자퇴… “돈 벌자” 일본으로
사기 당하고 귀국해 15개 직업 전전, 빚만 1억… “희망이 없다” 자살 시도
김승일이 자신의 삶과 신앙을 회상하고 있다.장학금까지 받던 대학생활과 즐거웠던 음악과 노래연습, 하지만 어머니의 중풍이 재발을 거듭하면서 자퇴를 결심했다. 막내인 나를 위해 무리하게 허드렛일을 하신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이 컸다.
학교에서 등록금을 되돌려 받았다. 현금을 보자 돈을 더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 하다 직업소개소에 100만원을 건넸고 일본행 배를 탔다. 소개한 사람에겐 고등학교 때 제2 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웠다고 적당히 둘러댔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일본은 비자가 없으면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곳이었다. 주위 사람 말로는 세 가지 직업밖에 구할 수가 없었다. 도로포장 노동자와 미싱사, 그리고 유흥업소 종업원이었다.
일본에서 노래를 부르게 해준다고 소개 받은 곳은 밤무대였다. 그것도 단 3일. 나중에 안 사실인데 정식 비자 없이 일본 체류 15일이 지나면 불법체류자 신세가 됐다.
그제야 사기 당한 것을 알게 됐다. 실망이 컸다. 남은 돈으로 일본 도쿄 시내를 기웃거리다 한국으로 돌아왔다. 참 겁도 없이, 그렇게 첫 사회생활은 시작됐다.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던 시절이었다.
방황하다 집 근처 서점에 들어갔다. 꽂혀 있는 책 중 성공이라고 써 있는 책들을 한아름 구입해 고시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보름 만에 그 책을 모두 읽고 나왔다.
성공할 것 같은 착각에 사로 잡혔다. 3000만원을 카드로 긁고 새 차를 구입했다. 택배회사 수도권 지사장을 꿈꾸며 열심히 일했다. 새벽에 일어나도, 밤늦게까지 일해도, 즐겁고 신이 났다. 어린 나이에 사장을 꿈꾸며 일하는 게 즐겁고 행복했다.
누구 하나 충고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또 일을 가르쳐주거나 격려해주는 선배나 어른도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였고 생각과 행동을 책임져야 했다.
당시 나는 오히려 그게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말 열심히 하루하루 일을 해 나갔다. 빚도 갚고 저축도 해가면서 말이다.
하지만 삶은 생각대로 나아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교통사고까지 났다. 시골길에 어떤 할아버지와의 접촉 사고였다. 이후에도 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빚을 갚기 위해 15가지 직업을 전전했지만 빚은 더 늘어만 갔다. 그 마지막 직업이 야식배달부였다.
그런데 야식배달부를 할 때 중풍으로 고생하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장례식이 끝난 뒤 내 통장을 보니 1억원이 넘는 빚이 쌓여 있었다. 막막했고 자살을 생각하게 됐다.
‘내게 희망이 없어지고 있어.’
집에 있는 면도날을 꺼내 손목을 그어댔다. 몇 번이나 피가 났다. 하지만 죽는 것도 용기가 있어야 된다고, 진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길 몇 번.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셨다. 면도날에 묻은 피를 보는 순간,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게 됐던 것이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내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언젠가 반복해 읽던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을 생각나게 하셨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 했다. 이게 뭐지 꿈인가 생시인가. ‘어머님은 돌아가셨지만 내가 용기 있게 살아가기를 바라실 거야.’
거짓말같이 몸이 가벼워졌다. 믿음을 갖게 되니 불끈 용기가 났다. 다음 날 일터에 나가 정말 열심히 성실하게 일했다. 이후 빚은 점점 줄었다. 삶에 대한 희망이 다시 생기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김승일 <7> 새우잡이 배에서 탈출… 섬의 십자가 불빛 찾아가
지옥 같은 환경 못 견뎌 바다 뛰어들어… 먹이고 재워주신 섬 목사님 배려에 감사
야식배달부 시절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나가고 있는 김승일.절망 가운데 하루하루를 버텼다. 삶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다니던 대학을 중퇴하고 돈을 벌어야만 했다. 젊은 혈기에 고생 한번은 견딜 수 있다는 각오를 다졌다. 고생만큼 수입도 생길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도 했다.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그러나 돈은 잘 모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선원생활을 하면 목돈을 만질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직업소개서에 소개비 20만원을 내고 전남 여수 앞바다 한 선장을 찾아갔다.
선장의 모습은 어린 시절 영화에서 보던 그런 잘생기고 키 큰 맘씨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험악한 모습에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두려움에 휩싸였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왕에 배를 탔으니 돈이나 좀 많이 벌자.’
다음날 새벽 일찍 배를 탔다. 승선한 배는 아주 작은 통통배였다. 하지만 일거리는 엄청났다. 새벽부터 밤 12시가 돼야 일이 끝나는 일명 ‘새우잡이 배’였다. 2∼3일간 바다에서 생활했다. 어떤 날에는 일이 끝나도 육지에 안 올라오는 경우도 있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어부 4명이 쉬지 않고 그물에서 올라오는 새우나 조개, 생선 등을 손으로 떼어냈다. 손에 생선가시가 박혀도 반복해서 그물을 내리고 끌어 올리고 또 내리고 끌어올리고…. 소변과 대변은 배 뒤편에 작게 뚫어 놓은 구멍에서 해결했다.
보름 정도 일하니 힘도 진도 모두 빠졌다. 돈이고 뭐고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지에서 약 50미터쯤 떨어져 배가 정박돼 있을 때였다. 당시 수영도 제대로 못할 때였다. 칠흑처럼 어두운 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바다에 죽기를 각오하고 뛰어들었다. 여기서 계속 일하다간 죽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헤엄쳐 도착한 곳은 어느 작은 섬이었다. 불빛부터 찾았다. 멀리 교회 십자가가 선명했다. 교회는 섬 꼭대기에 있었다. 경사가 너무 심했다. 지친 심신 상태로 걷기가 무척 힘들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비까지 세차게 내렸지만, 죽기 살기로 산길을 걸었고 교회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목사님 부부가 나오셨다. 조금 놀라신 것 같았다. 당시 내 몰골은 초라하고 볼품없었다. 하지만 목사님 부부는 이내 나를 교회 안으로 인도해 따뜻한 차와 음식을 먹여주시고, 재워주시면서 보살펴 주셨다.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낯선 사람을 존대해 주시는 손길이 너무 고마웠다.
다음날 육지 가는 배를 타려고 준비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밤새 비가 내리는 것이 아닌가. 목사님은 육지 가는 배가 오전 6시20분에 오는데 비가 많이 오면 뜨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것도 며칠에 한번 오는 그 배가 말이다.
비가 멈추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오전 5시 반이 됐는데도 계속 비가 왔다. 비가 멈추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그때였다. 거짓말 같이 비가 딱 멈췄다. 오전 6시 20분에 정확히 배가 나타났다.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그 교회를 찾아 꼭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여수 밑 다도해 어딘가만 알고 있을 뿐 찾지를 못해 인사하지 못하고 있다. 안타깝고 송구한 마음뿐이다.
이렇게 어설픈 어부생활은 끝나버렸다. 하지만 하나님이 부족한 나를 훈련시키셨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분의 가장 좋은 타이밍으로 나를 구해주셨다. 또다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났던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승일 <8> 내 노래 듣고 사장님이 TV 출연 신청… 벼락스타 돼
방송 이후 격려와 방송출연 요청 쇄도… 15번째 직업인 야식배달 그만두게 돼
테너 김승일이 2010년 12월 SBS 예능프로그램 ‘놀라운 대회 스타킹’에 출연해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 중 ‘네순 도르마’를 열창하고 있다.돈을 벌기 위해 가졌던 15가지 직업 중 야식배달부는 마지막 직업이었다. 땀 흘려 일하며 동분서주하던 어느 날, 주문 음식을 독촉하는 곳으로 황급히 배달을 나갔다. 그날은 유난히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이었다.
옷은 모두 젖어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화려한 대리석으로 지어진 부잣집 대문의 초인종을 눌렀다. 그리고 주문한 음식을 내려놓는 순간 어린 중학생쯤 되는 친구가 늦게 음식이 도착했다며 연거푸 짜증을 냈다. 그리고는 만원짜리 지폐 몇 장을 내팽개치듯 던졌다.
음식 값을 집어 들면서 거의 정신이 없었다. 집 안에서 들려오는 노래 소리 때문이었다. “웬 아이 엠 다운 앤드 올 마이 소울 소 위어리(When I am down and all my soul so weary·내가 힘들고 영혼이 지칠 때)….”
예전에 즐겨 부르던 ‘유 레이즈 미 업(You Raise Me Up·주여 당신이 나의 영혼을 높여주십시다)’이었다. 바로 핸드폰을 꺼내 그 노래를 입력했다. 집에 돌아와 열심히 그 노래를 불렀다. 울적한 마음이 풀릴 때까지 말이다.
며칠 뒤 핸드폰에 녹음한 내 노래들을 야식집 사장님께 자랑삼아 들려 드렸다. 노래를 유심히 들은 사장님은 무슨 각오라도 한 듯 넋 나간 사람처럼 쏜살같이 동네 PC방으로 향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사장님은 그때 SBS 예능프로그램 ‘놀라운 대회 스타킹’에 내 절절한 사연을 자세히 써서 보냈다고 한다.
며칠 뒤 방송국 작가에게서 전화가 왔다. 하지만 처음엔 거절했다. 출연 요청이 장난인 줄 알았던 것이다.
결국 나는 전국 방송에 출연하게 됐다. 출연하는 날 몹시 떨렸다. 그래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부르고 몇 번이나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는지 모른다. ‘평소대로 잘 부르게 해 주세요.’ 속으로 기도했다.
2010년 12월 4일 방송국에서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에 나오는 아리아 ‘네순 도르마’를 부르면서 기적을 체험했다. 방송 이후 내 삶이 180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근무지인 야식집에 무슨 식품위생법도 위반하지 않았는데 구청장을 비롯 수원시청 직원들이 찾아왔다. 나를 보기 위해서였다. 격려와 찬사도 쏟아졌다. 방송출연 요청이 줄을 이었다. 축구선수 박지성씨의 아버지는 저와 같은 고향 출신이라며 야식집을 방문했다.
저마다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전화를 걸어왔다. 곰국을 끓여 오는 아주머니들 때문에 또 한 번 놀랐다. 어머니들은 방송 이후 나를 국민아들로 생각한다고 했다. 고맙고 눈물겨운 일이었다. 네티즌 7만명이 동시에 접속해 방송국 인터넷이 마비 됐던 일도 있다. 자살을 시도하던 한 청년이 내 사연을 듣고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하지만 나는 야식배달을 멈추지 않았다. 방송 후 6개월간 말이다. 방송 출연 한번으로 내 신상에 무슨 일이야 생기겠느냐는 생각이 앞섰다.
그런데 황당한 일들이 자꾸 일어났다. 내가 배달을 나가지 않을 땐 주문을 취소하는 일이 속출했다. 야식집에 김승일이 근무하는 게 확실한지 묻는 전화도 많았다. 정말 사장님께 미안했다. 며칠 뒤 야식집 사장님은 “너 때문에 장사가 안 되니 나가 달라”고 했다. 결국 7년간 일했던 야식배달부 직업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역경의 열매] 김승일 <9> 오랜 훈련 뒤 넘치게 부어주시는 은혜가…
폴 포츠와 공연·앨범 발매·콘서트까지… 한양대 성악과 복학해 장학생으로 졸업
테너 김승일이 2011년 4월 24일 수원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첫 단독 콘서트에서 열창하고 있다.SBS TV ‘놀라운 대회 스타킹’에 출연하고 ‘야식 폴 포츠’라는 애칭을 얻었다. 야식배달부 출신이 폴 포츠 만큼이나 노래를 잘 한다는 뜻이었다.
유명세를 탔다. 많은 명사들이 나를 찾았고 격려해 주었다. 특히 많은 교회와 교인들의 기도와 사랑은 오래전부터 예비하신 하나님의 손길이라고 굳게 믿는다. 하나님께 “아직은 이렇게 세상이 따뜻하네요. 저도 그렇게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사람으로 살게 해 주실 거죠”라고 고백하는 기도를 드렸다.
선원과 택배기사, 노점상, 유흥업소 종업원, 야식 배달부를 전전하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눈물이 나왔다. 벅찬 가슴을 가누기 힘들었다. 동서대 변영인 교수님은 멘토를 자처했다. 교수 생활과 전인가족연구소를 운영하느라 바쁘신데도 어머니처럼 정성껏 보살펴 주셨다. 전 세계에 부족한 내 이력을 영어로 번역해 보내기도 했다.
2011년 4월 24일은 첫 단독 콘서트가 열렸다. 방송에서 나를 눈여겨 본 당시 경기도문화의전당 이사장인 탤런트 조재현씨가 제안해 성사된 일이다. 관람석 2000석 티켓이 3일 만에 매진됐다. 기라성 같은 음악가들과 함께 노래하니 꿈만 같았다. 그 공연에서 나는 눈물을 끝까지 참지 못했다. 하룻밤 자고 나니 유명인사가 됐고,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 될 지경이었다.
강한 훈련 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상상을 초월했다. 각종 국가행사에 초청됐다. 3·1절과 8·15광복절, 제헌절, 심지어 제야의 타종행사까지….
교육부와 통일부 환경부 문화체육관광부 등 관공서 모임에서도 나를 불렀다. 뮤지컬 ‘지킬 앤드 하이드’의 테마곡 ‘지금 이 순간’을 들은 공무원들이 일어났고 응원과 환호를 보냈다.
2011년 이명박 당시 대통령 내외가 참석한 KBS 신년음악회에서 노래했다. 2013년 교계가 주최한 대한민국 국가조찬기도회에서 또다시 박근혜 전 대통령 등 정·교계 인사 3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창했다.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이즈음 대한적십자사 홍보대사로 위촉되는 영광도 안았다.
KBS 프로그램 ‘강연 100도C’를 비롯 CTS CBS 극동방송 MBC C채널 등에선 내 인생이 조명됐다. 각종 대기업과 금융기관에서 열린 연수 및 교육시간에도 강사로 초청됐다.
감사기도와 찬양이 절로 나왔다. “오 주님, 이리도 넘치게 준비하시려고 그리도 오래 참으셨나요. 열심히 살면 분명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기도 드렸는데 정말 감사드려요.”
영국의 오페라 가수 폴 포츠와의 협연도 큰 인기였다. 포츠는 어눌하고 못생긴 외모, 왕따, 가난한 집안 형편, 교통사고, 종양수술 등 역경을 딛고 꿈을 이뤘다. 2007년 영국 iTV 오디션 프로그램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서 우승, 평범한 휴대전화 판매원에서 세계적인 스타로 부상했다. 그런 그와 함께 전국을 돌며 순회공연을 여러 차례 펼쳤다. 크고 작은 교회에서 공연과 간증을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났다.
2012년엔 첫 앨범도 냈다. 중퇴했던 한양대 음대 성악과에 다시 복학했다. 한양대 총장을 만났고 전액 장학금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헤아려보니 입학한지 꼭 20년 만의 감격적인 졸업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승일 <10·끝> 국내외서 줄잇는 러브콜 축복에 감사
美서 찬송·간증 후 명예시민증 받아… 청년들에 희망 전하는 사명 다할 것
지난해 1월 미국 조지아 주 정부청사에서 열린 ‘한국의 날’ 행사에서 찬송 ‘어메이징 그레이스’ 등을 열창했다. 주정부 관계자로부터 미국 명예시민증을 받았다. 왼쪽 세 번째가 김승일.지난해 1월 미국 애틀란타 조지아주정부 청사에서 ‘한국의 날’ 행사가 열렸다. 행사에 초청 받은 나는 미국의 저명한 정·교계 지도자들 앞에서 찬송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불렀다. 실로 은혜가 넘쳤다. 이어 야식배달부, 택배기사, 선원 등 15가지 허드렛일을 전전했던 삶과 신앙을 소개했다.
순서가 끝나자 청중들의 큰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참석자들은 내게 특별한 관심을 보여줬다. “당신을 미국의 명예시민으로 인정하고 초대합니다.”
귀를 의심했다. 내가 미국시민이라니. 나는 미국에 친·인척이나 거주한 적이 전혀 없지 않는가. 한참 멍한 상태였다. 정신을 차리니 ‘아! 하나님은 이렇게 나를 강하게 훈련시키신 후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시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나는 “미국에 살고 있는 청년들에게 복음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한 뒤 귀한 선물까지 받은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소감을 말했다. 그리고 호텔에 돌아와 “하나님 이제 뒤늦게 깨달았으니 더욱 바로 살아 당신의 증거가 돼 보이겠습니다”라고 서원기도를 드렸다.
미국 조지아주 교회들을 돌며 ‘청년을 위한 희망콘서트’를 열었다. 교회성장을 위한 다양한 전도집회와 공연이 이어졌다. 내 이야기는 고등학교 교과서 ‘진로와 진학’이란 책에 실렸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희망의 아이콘이라는 이유에서다. 정말 놀랍고 감사한 일이다.
“사랑의 주님. 이리도 넘치도록 복을 주시나이까”라는 감사의 고백이 흘러나왔다. 또 “하나님 저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믿습니다. 제게 주시는 모든 무대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알고 목소리가 다하는 그날까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아들로 살겠습니다”고 다짐했다.
요즘에도 국내외 교회와 단체에서 ‘간증음악회’ ‘이야기가 있는 콘서트’ ‘스토리와 콘서트’ ‘절망의 늪에서 희망의 숲으로’ 등 다양한 행사 초청이 줄을 잇고 있다. 내 노래와 사연을 들은 이들은 집회가 끝나면 나와 사진 찍기에 바쁘다. 또 사인을 받기 위해 몰려든다.
교회에서 이렇게 귀하게 쓰임 받고 하나님이 사용하실 줄 미처 몰랐다. 감격이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놀라고 있다. 국내는 물론 미국과 일본, 유럽, 전 세계 방송국, 교회 등에서 불러주심에 감사드린다.
세계적인 성악가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이를 위해 기도로 하루일과를 시작한다. 교회 부흥과 청년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순회공연을 자청하고 있다. 미자립 교회에 자비량으로 공연할 때도 있다. 이태리 가곡 등을 모은 3집 앨범을 준비 중이다. 남예종예술실용전문학교 실용음악과 특임교수에 내정된 상태다.
연재를 마치며 마지막으로 복음을 전하고 싶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분의 사랑과 계획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그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