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눈 깜짝할 새에 벌어졌다. 단희는 어찌된 영문인지 알지도 못한 채로 눈앞에 오스왈드와 검은 양복의 남자가 엉키는 모습을, 헬기가 갑작스럽게 고도를 잃고 내려앉으며 몸이 붕뜨는 기분을, 제드릭이 막 빼들었던 45구경 권총을 다시 허리춤에 꼽고 기어가듯 조종석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눈 한번 깜빡이지 못하고 망막에 새겨 넣었다.
탕!
탕!
탕!
엎치락 뒤치락 거리는 둘 사이에 세발의 총성이 연속적으로 울렸다. 단희는 깜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펠트를 풀고 아빠의 몸을 부둥켜 안았다.
탕!
마지막 한발의 총성이 더 울린 이후엔 비릿한 냄새가 나더니 뜨듯한 뭔가가 단희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피.
눈을 들었을 때는 오스왈드가 남자의 팔꿈치 관절을 꺾어 그의 턱 밑에서 방아쇠를 막 당기고 난 직전이었다.
남자의 뇌수와 선혈이 헬기의 후면에 낭자했고 후면에 부딪힌 피는 단희의 얼굴에 튀었다..
날카로운 비명소리.
고막을 찢는 소리가 허공을 갈랐고 단희는 그때까지도 그 소리가 자신의 비명소리인줄 조차 느끼지 못했다.
남자는 죽은 해파리처럼 물렁하고 끈기 없이 시트위에 늘어졌다. 오스왈드는 남자의 손에서 총을 빼앗아 자신의 허리춤에 꼽고는 얼굴에 튄 피를 소매로 닦아냈다.
헬기는 아래로 내리꽂히듯 떨어지고 있었다. 오스왈드는 좌석 시트에 무릎을 데고 두 손으로 헬기의 천장을 받친 채 조종간으로 시선을 던졌다.
“ 제드릭!”
“ 기체에 동력이 부족해요! 고도를 낮춰야할 것 같습니다!”
빗나간 총알은 운 나쁘게 조종사의 관자놀이를 관통했다. 앞으로 꼬꾸라진 조종사의 시체를 치우고 제드릭은 불안정하게 앉아, 헬기의 급강하를 완만하기 하기위해 힘껏 조종간을 당겼다.
헬기가 요동치더니 위로 솟아올랐다가 다시 한번 아찔하게 추락하길 반복했다. 단희는 그 자리에서 샌드위치가 되는 기분에 다시 한번 비명을 내질렀다.
“ 통제 불능입니다! 추락에 대비해야 될 것 같습니다!”
제드릭이 엔진의 출력을 낮추며 목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질렀다.
미치겠군! 오스왈드는 두 눈을 꽉 감고 아빠의 몸을 기둥처럼 붙잡은 채 덜덜 떠는 단희의 몸을 돌렸다.
“ 대니! 자리에 앉아!”
그는 몸의 중심을 간신히 잡고 단희를 좌석에 앉혔다. 붉은 피를 뒤짚어 쓴 얼굴은 그와 아주 선명한 대조를 이룰 정도로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오스왈드는 침착하게 여자의 몸에 벨트를 멨다.
“ 추락할 거야! 꽉 잡고 있어.”
오스왈드는 여자의 덜덜 떨리는 두 손을 그녀의 어깨에 메어진 벨트 쪽으로 인도한 후 재빠르게 자신의 좌석에 앉아 서둘러 벨트를 맸다.
공포에 질린 여자의 얼굴은 내내 오스왈드에게서 벗어나질 못했다. 마치 그가 이 모든 게 꿈이라고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평소엔 잘만 하던 모든 게 다 잘 될 거란 확신의 말이 좀처럼 입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까딱하면 이대로 모두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도저히 떨칠 수가 없었다. 오스왈드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불안정한 기체가 좌우로 요동치고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는 동안 그는 단희의 눈을 계속해서 붙들고 있었다. 온전한 의지. 그 순간 오스왈드가 여자에게 해줄 수 있는 거라곤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비정상적인 엔진음. 갑작스럽게 헬기의 기수가 직각으로 들렸고 단희의 등이 벽에 쾅 하고 붙었다. 그러더니 다음 순간 기수가 아래쪽으로 롤러코스터마냥 수직 하강했다.
죽는다.
단희는 두 눈을 꽉 감고 부디 그 순간이 고통스럽지 않기만을 빌었다.
아래로 꺾인 헬기의 기수가 바닥에 곤두박질치며 쾅! 하고 충돌했다. 몸이 위로 붕 떴다가 아래로 쾅! 하고 내리 찍히며 온몸에 충격을 가했다. 그러더니 갑작스럽게 모든 게 정지한 것처럼 일순 아무것도 느껴지질 않았다.
숨을 멈춘 채 단희는 그 아찔한 찰나의 순간을 경험했다. 헬기의 스키드가 바닥에 마찰하며 모래와 돌에 쓸려 불꽃을 일으켰다.
콰콰콰콰콰콱 소리를 내며 요란스레 진동하더니 한 순간 헬기가 단희가 앉은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로터 회전 날이 바닥에 긁히며 마른 수풀을 잔인하게 찢어발기고 있었다. 잠시 후 헬기의 후면이 들렸다가 동체는 그대로 생명을 잃고 그 자리에 멈췄다.
들렸던 후면이 쾅! 하고 아래로 내려가며 다시 한 번 충격이 온 몸을 관통했다. 그 이후 갑작스레 모든 것이, 짓누르고 있는 것 같은, 온몸을 압착시키는 것 같은 고통의 순간이 너무 한순간에 멎었다.
죽었나?
단희는 눈을 감은 채 자신이 죽어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방이 고요했다. 이것은 꿈이거나, 죽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눈을 뜨면 거기에 지학이가 있을까?
엄마가 함께 있을까? 내게 손을 내밀까?
“대니!”
날카로운 오스왈드의 목소리에 머릿속에 번개 같은 생각이 스쳤다.
아빠.
단희는 몽롱한 의식을 부여잡고 감았던 눈을 떴다. 오스왈드는 헬기가 멈추자 마자 자신의 벨트부터 풀었다. 죽은 남자의 몸을 이리저리 뒤져 신분증을 찾았지만 남자의 몸에선 전원이 켜져있는 핸드폰 하나만 발견됬다
빌어먹을!! 그는 핸드폰을 발로 밟아 부숴서 문 밖으로 힘껏 던졌다. 켜진 휴대폰으로 위치를 추적하고 있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누가 꾸민 짓인지 모른다.cia일수도, 폴일수도, 아니면 이 남자일수도, 그 배후에 누가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확실한 건 이 남자는 적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내내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갈 준비를 하고 있던 적. 노리는 것이 한사람이였일즈도 . 어쩌면 헬기 안의 모두였을지도 모른다.
단희의 안색은 끝나지 않은 공포로 여전히 도배되어 있었다. 아니 어쩌면 더 나빴다. 또렷하게 맨 정신을 되찾았지만 여자의 눈은 두려움을 완전히 빛을 잃어버린 후였다.
“ 아빠가...이상해요....”
오스왈드는 단희의 끊어질 듯 멍한 목소리에 유환오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숨소리가 거칠고 공기가 부족한 듯 날카로웠다.
빌어먹을. 오스왈드는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유환오의 쇄골을 눌렀다.
“ 총에 맞았어.”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 제드릭!!”
오스왈드가 고함치자 그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두 남자는 축 늘어진 노인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고 단희는 오스왈드가 일러준 대로 아빠의 쇄골에 손수건을 꾹 누른 채 그들을 따라 이동했다
손끝에서 뜨거운 것이 느껴졌다. 그게 단희의 모든 감각을 앗아가고 오로지 공포만을 상기시켰다.
그들은 헬기에서 멀리 떨어진 마른 초목 옆에, 유환오를 눕혔다. 노인의 입술을 마르고 질려있었다. 붉게 충혈 된 눈동자는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알려주었다.
“ 헬기에 구급상자가 있을 겁니다. 제가 가져오죠.”
제드릭은 유환오를 바르게 눕히자마자 다시 헬기로 뛰어 들어갔다. 아픔에 짓이겨진 노인의 눈동자가 자신의 딸을 향했다. 옴찔거리는 입술.
불안한 감각이 숨통을 죄였다. 단희는 흐느껴 울며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애썼다.
“ 됐어! 말하지 마!! 말하려고 하지 마!”
이렇게 끝내진 않을 거야. 무수히 많은 절망을 지나왔다. 그 끝에 희망도 보았다. 다시 이렇게 참혹하게 무너지진 않겠다. 단희는 이를 물고 손수건을 꽉 쥐었지만 이내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손수건의 누른 자리부터 뜨거운 선혈이 얇은 천을 타고 베어 나왔다. 끊임없이, 끊임없이.
손끝에 닿는 축축하고 미지근한 감각. 사지가 사정없이 떨리며 눈앞에 아찔해졌다. 여자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주저앉았고 떨리는 손은 쇄골에서, 천에서 떨어져나갔다. 다시 환영처럼 지학이의 핏덩어리 몸이 떠올랐다.
여자의 손이 떨어져 나가자 오스왈드는 아무 말 없이 냉큼. 유환오의 쇄골위에 손을 눌렀다. 벌벌 떠는 애처로운 눈동자는 다시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안돼. 안돼. 여자는 흐느끼며 다시 마른 모래 위를 기어 아빠의 뺨을 감싸 쥐고 비명처럼 고함쳤다.
“ 아빠! 아무데도 가면 안 돼! 알겠어!? 아무데도 가지 마! 나 두고 가면 안 돼!”
유환오는 웃었다. 그는 이미 아주오래전부터 생명에 초연한 사람처럼 굴었었다. 한 순간도 자신의 목숨을 구걸해본 적이 없던 사람. 그는 고통 앞에서도 잔잔했다.
“ 단희야.”
그는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사람답지 않게 또렷하게 말했다.
“ 사람답게 살 거라.”
그가 하는 말이 너무 또렷하고 힘이 있어서 오열하던 단희의 얼굴이 일순 멍해졌다.
아빠의 깨끗한 목소리는 희망이었다. 단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정말 그러고 싶다. 이젠 정말 아빠와 함께 제대로 살아보고 싶어졌다. 아빠만 옆에 있어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아무것도 필요 없어. 아빠만 있으면 돼. 그럼 정말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지학이는, 엄마랑 내가 잘 돌보고 있으마.”
“ ......”
“제대로. 행복하게. 네 인생을 살아.”
그의 오른손이 딸의 손을 강하게 쥐었다. 잡힌 손이 오그라들 만큼 아주 강하게. 잔잔하고 고요한 숨결. 평화롭고 맑은 눈동자. 딸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지극히 정상이다. 아빠는 괜찮을 거야. 그럴 거야.
유환오의 눈동자가 딸에게서 오스왈드로 이동했다.
“ 제드릭!!”
오스왈드가 마른 성을 낸다. 그의 숨결은 유환오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칠고 빨랐다. 죽어가는 사람은 그가 아니라, 오스왈드 같았다. 그는 초조하게 입술을 씹으며 제드릭이 구급함을 빨리 찾아오기를 재촉했다. 이미 손수건은 피로 흥건했다.
지혈을 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난 지 너무 오래였다. 노인과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다. 그와 마주치면 모든게 끝날 것 만 같다.
두려웠다. 그렇게 될까봐. 오스왈드는 그를 외면했다. 그의 따가운 시선을. 그의 타는 듯한 눈동자를.
제드릭이 구급함과 생수 두통을 들고 뛰어왔다. 마른 모래먼지가 눈앞을 따갑게 한다. 제드릭이 구급함을 열고 붕대를 오스왈드에 건넸고 그는 유환오의 앙상한 몸에 붕대를 다급하게 둘렀다.
“ 애쓰지 말게.”
빌어먹을.
그 차분하고 상냥한 목소리에 오스왈드는 비로소 두려운 두 눈을 들었다.
그는 잔잔하게 웃고 있었다. 빛이 났고 총명했으며 인정으로 가득했다. 그 눈동자는 오스왈드에게 멈췄다. 미동도 하지 않았다. 생명이 날아간 몸에 오로지 그 눈동자만이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둔탁한 충격. 오스왈드는 그 자리에 정지한 채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그 숨소리가 무척이나 아프게 들려왔다.
“ ........”
제드릭도. 오스왈드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정지하자 단희는 그제야 아빠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유언이었음을. 으스러질 듯 잡았던 그의 손이 일순 풀어졌다. 깃털처럼 가볍다. 그에게서 이미 생명의 빛은 꺼졌다.
안 돼. 이렇게는 안 돼. 단희는 아빠의 마르고 껍질만 남은 몸 위에 엎드렸다. 생명이 떠나간 몸엔 아직 익숙한 온기가 남아있었다.
“ 아빠! 안 돼! 가면 안 돼! 지금은 안 돼! 지금은 아니야! 나만 두면 안 돼!”
아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때가 언제였을까. 아빠에게 웃어보였던 적이 언제였을까. 아빠의 무동을 타고 별을 구경하던 때가 있었다. 자고 일어나 호빵처럼 부은 얼굴이 귀엽다며 카메라 플래시를 쉼 없이 터트리며 웃던 아빠도 있었다. 지학이를 가졌을 때, 혹여 몸이 허할까 엄마가 밤새 끓인 사골 국을 시댁의 문 앞에서 건네고는 그 먼 길을 다시 돌아가던 아빠의 뒷모습을 보며 하염없이 울 때도 있었다. 언제나 과분하게 넘치는 사랑을 늘 조건 없이 받았다. 그걸 한 번도 고맙게 여겨본 적이 없다. 늘 당연하게, 때로는 귀찮게 여겼다. 어째서일까. 어째서 늘 이렇게 손에서 사라지고 난 이후에야 깨닫는 걸까. 지학이도. 엄마도, 아빠도 늘 너무 빠르고 갑작스럽게 떠나간다. 멍청하게도 이만큼을 반복했어도 그녀는 여전히 그 누구에게도 사랑을 고백해보지 못했다. 항상 했어야 하는 말을 그녀는 늘 놓쳐버리고 만다. 고맙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 함께하자는 말... 그리고 매번 이 순간, 이 반복되는 순간, 도저히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여자는 부들부들 떨며 꺽꺽 힘겨운 숨소리로 울음을 토했다. 그 작은 몸은 손을 대면 그대로 바스라질것만 같다.
보아왔던 장면. 보아왔던 슬픔. 보아왔던 죽음.
늘 오스왈드의 눈앞에서 펼쳐졌던 죽음의 순간들 중 이토록 무거운 때가 있었을까. 이토록 죽음 앞에 경건해지던 때가 있었던가.
광물이 아니었다. 그의 딸 때문도 아니었다. 그를 구하고 싶었던 것은 그를 살리고 싶었던 것은 그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단 한 번도 만나본적이 없던 정말로 어른다운 어른. 그 어떤 치부도, 아픔도 담아줄 것 같은 바다 같은 그를 오스왈드는 좋아했다. 그와 가까워지고 싶었다. 자신의 어깨를 다독이던 그 감촉이 좋았다. 어떤 순간에도 초연히 그를 향해 웃어 보이는 그의 눈이 좋았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노인은 그런 눈을 했다. 그 눈은 마치 아직 이 곳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증명하는 듯 했다.
“ ...가야해...”
오스왈드의 중얼거림에도 단희는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 우린 계속 가야해.”
오스왈드가 단희의 팔뚝을 잡았다. 슬픔에 가누지 못하는 몸을 그는 억지로 붙들어 자신과 마주보게 했다.. 먼지와 땀, 아빠와 낯선 남자의 피로 얼룩진 얼굴은 찢겨진 짐승처럼 보였다.
“ 이위치는 노출 됐어. 여기에 있는 건 위험해.”
여자를 안아주고 싶다. 으스러지게 껴안고 싶었지만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 자신이 없어 오스왈드는 그저 무너지는 여자를 잡고만 있을 뿐이었다.
“ 여길 떠나야 해.”
“ 먼저 가요. 난 못가요. 난 여기 있을래요. 난 여기 아빠와 있겠어요.”
이성을 놓은 듯 여자는 공허하게 중얼거렸다. 떨리는 목소리는 정신이 없었고 평소보다 한 톤 높아진 채 격앙됐다.
“ 정신 차려! 그는 죽었어!”
그 잔인한 질타에 여자의 얼굴을 타고 다시 고통스러운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속이 다 타고 없어져버린 여자는 끓는 듯이 괴로워했다.
“아빠를 이런 곳에 혼자 남겨둘 순 없어요! 까마귀 떼의 먹이로 만들 순 없어요!”
오스왈드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품으로 당겨 안았다 으스러지듯 껴안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초조하고 동시에 슬펐고 또 동시에 겁이 났다.
“ 알아! 금방 찾으러 올 거야. 이곳에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제대로 찾아서 제대로 수습해서 제대로 한국 땅으로 돌려보내드릴 거야. 하지만 그러려면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
단희는 오스왈드의 품에 무너졌다. 마음 한구석에 이 모든 게 그의 탓이라는 원망의 감정이 스쳤다. 그러나 그 외침은 오스왈드의 목소리와 품에 비해 너무 미약하고 너무 가벼웠다. 무너진 자신을 끌어안는 그의 강한 팔이. 또렷하고 낮은 목소리가 몸 안에서 요동치며 자신을 흔들었다.
오스왈드는 아이처럼 우는 여자의 끌어안고 눈물을 닦아내고 경건한 의식처럼 절박함을 담아 여자의 젖은 뺨에 입을 맞췄다.
“ 당신은 할 수 있어. 이겨 낼 수 있어. 제대로 마무리 할수 있어.”
그는 단희에게 주문을 걸 듯 반복해서 속삭였다. 반복적이고 규칙적으로.
그리고는 여자의 겨드랑이 아래에 손을 넣어 여자를 땅에서 일으켰다. 경황이 없는 여자의 손에 제드릭에게서 건네받은 물병을 쥐어주며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이제 걸어. 사람이 보일 때까지 계속해서 걸을 거야. 우린 여기서 살아서 나갈 거야. 알겠어?”
단희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의 사고는 완전히 마비되었고 기계적으로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걸었는지 알 수가 없다. 단희는 제드릭이 헬기에서 가져온 모포를 머리위로 뒤집어 쓴 채 걷기만 했다.
타는 듯한 태양 아래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메마른 모래는 지글 지글 타올랐다. 온 몸에 수분이 증발되는 기분. 괴로운 기분에서 벗어날 탈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눈앞에 펼쳐지는 건 오로지 지금껏 지나온 것과 같이 끝도 없이 펼쳐진 모하비 사막의 마르고 황량한 풍경들뿐이다.
손목에 채워진 시계의 시침을 확인하며 그들은 끊임없이 북쪽으로 걸었다. 터지지 않는 휴대폰은 고립된 상황에선 쓸모없는 기계덩어리에 불과했다. 부디 자신들이 조난당한 곳이 라스베이거스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길 바랬다. 하다못해 어딘가에 쉴수 있는 그늘이나, 물웅덩이라도 나오길 바랐다.
감각을 잃은 다리는 생존을 위해 그저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돌부리에 걸려 그 자리에 꼬꾸라졌을 때는 차라리 편안했다. 달콤한 안정감이 몰려들었고 단희는 그 자리에 쓰러져 그대로 잠들고 싶었다.
오스왈드가 생수통 뚜껑을 따고 단희의 머리위에 뿌려주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정신을 놓았을지도 몰랐다.
정신 차려!
그의 언성은 날카로운 채찍이었다. 건조한 모래를 뒤집어쓰고 타는 듯한 더위에 온몸이 녹아갔다. 이 뜨겁고 괴로운 기분은 끝이 없었다.
마른 땅이 노을로 불탔고 모두가 마음만 바빴다. 어둠이 내리기 전에 이 사막에서 벗어나야 한다. 타는 듯한 더위가 지면 얼음처럼 서늘한 추위가 찾아왔다. 그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던, 아니면 쉴 수 있는 곳을 찾아야만 한다. 제드릭은 생수대신 베럴선인장이 발견될 때마다 잘라내어 선인장을 씹었다. 단 두통뿐인 생수를 남자들은 온전히 단희에게 양보한 것이다. 그마저도 한통은 진작 동이 나버렸다.
“ 아.”
제드릭이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누군가가 버리고 간 듯 반쯤 무너진 집이 한 채 보였다. 폐가가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얼마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자리 잡고 있을 가능성이 꽤 높다는 뜻이기도 했다
“퀸튼씨. 저기 폐가가,”
제드릭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오스왈드가 앞으로 꼬꾸라지며 바닥에 무릎부터 충돌했다.
그는 마른 표면위에 주저앉아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놀란 제드릭이 그의 허리에 손을 두르는 순간 그 장승같던 남자의 얼굴이 일순 하얗게 질렸다.
그는 오스왈드의 허리에 둘렀던 손을 떼어낸 후 자신의 손바닥을 확인했다. 흥건한 피.
“ 퀸튼씨.”
총에 맞았던 건 유환오 뿐이 아니었다. 오스왈드가 검은 옷을 입고 있어 눈치 채지 못했다. 제드릭은 당황했다. 이건 전혀 그답지 않아. 그는 사선을 여러번 넘은 사람이다. 자신의 부상을 스스로 자각하지 못했을리는 없다. 어째서? 피를 흘리며 어째서 버틴거지? 여자때문에? 그녀를 불안하게 할까봐? 아니면 자신의 부상보다, 여자의 안정이 더 중요해서?
곁으로 다가온 단희도 제드릭의 손에 묻은 피를 확인하고 아찔함에 몸을 잠시 휘청거렸다.
“ 괜찮으십니까?”
제드릭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그는 낮게 욕설만 지껄였다.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인지 이 불타는 더위에 그의 얼굴은 얼음처럼 창백했다.
남은 붕대는 없다. 이미 유환오의 몸에 모두 둘렀다. 제드릭은 구급상자를 단희의 손에 쥐어 주고 오스왈드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둘러 지탱한 후 일어섰다.
“ 폐가로 가죠. 서둘러요.”
실내는 어두웠다. 켜켜이 쌓인 먼지와 거미줄을 대충 치우고 단희는 나무 바닥 위에 자신이 덮어 쓰고 있던 모포를 깔았다. 제드릭이 그곳에 오스왈드를 눕혔고 그의 크고 무거운 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 어, 어,,,,어떻게 해야 되요?”
단희는 덜덜 떨며 물었다. 제드릭은 오스왈드의 몸에서 재킷과 검은 셔츠를 모두 벗겨냈다. 움직일 때마다 그의 상처에서 피가 샘물처럼 왈칵 솟아났다.
찌익 찌익, 제드릭은 능숙한 솜씨로 오스왈드의 셔츠를 찢었다. 남은 생수 한통을 열어 물로 상처부위를 씻어낸 뒤 거즈를 덧대고 곧바로 임시방편으로 만든 붕대를 그의 허리에 칭칭 감았다. 그러더니 오스왈드의 재킷과. 자신의 재킷도 벗어 그의 몸 위에 덮었다.
“ 피를 많이 흘려 한기가 들 겁니다. 해가 지면 체온이 더 내려갈거에요.”
“ ......”
그는 휴대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했다. 여전히 수신불가. 사람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최소한 휴대폰 전파는 잡히는 곳으로 가야했다. 이 상황을 빠져나갈 방법은 그것 뿐이다. 그는 하나뿐인 손전등을 손에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제가 사람을 불러올게요. 여기서 퀸튼씨와 계세요.”
그는 단희에게 나이프를 건넸다.
“아까 제가 잘라먹던 선인장. 기억하세요?”
단희는 기억을 상기시키려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 둥글고 끝에 노란 열매가 달린 선인장이요. 배가 고프면, 선인장 열매에 씨를 드세요. 갈증이 나면 선인장 몸통을 자르고 수분을 짜드셔야 합니다. ”
이미 텅 빈 두 개의 생수통을 대신해 그것으로라도 수분을 보충해야 한다. 단희는 두어 번 고개를 힘겹게 끄덕였다.
“ 잘 부탁해요.”
제드릭은 의식을 잃은 오스왈드를 근심스럽게 한번 쳐다보고는 서둘러 폐가를 빠져나갔다.
그 어둡고 퀘퀘한 공간에 남은 건 오스왈드와 자신뿐이다.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뭘.. 어떻게?
선인장. 그래. 그거라도.
단희는 오스왈드의 몸에 재킷을 꼼꼼하게 덮어주고 폐가 밖으로 뛰어나갔다. 해진 로퍼는 앞자락부터 벌어졌다. 엄지발가락에서는 피가 나기 시작했고 마른 모래바닥에 손과 무릎이 쓸려 엉망진창이었다.
단희는 제드릭이 말한 선인장을 발견했다. 아까 봤어. 오스왈드와 그가 어떻게 선인장을 먹는지.
할수 있어. 못할 거 없어.
단희는 제드릭이 건네준 칼을 바닥에 내려놓고 주변의 아무 돌이나 들어 선인장의 내리쳤다. 팡팡 소리를 내며, 선인장의 가시가 조금씩 아래로 우수수 떨어졌다.
여자는 고집스럽게 울음을 참고 이를 악 물었다. 손등으로 따갑게 젖은 눈두덩을 닦아내고 나이프를 들었다.
서툰 나이프 질에 여기저기 가시가 박혔다. 쓸리고 찢기고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여자는 선인장의 밑동을 인내심있게 잘랐다.
어느 정도 자르고 발로 퍽퍽퍽 선인장을 치자 쩌어억하는 소리가 나며 선인장 몸통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여자는 자신의 치맛자락위에 선인장을 쓸어 담았다.
가시에 질린 고통스러움은 아주 잠시다. 올이 다 나가고 더러워진 스타킹. 쳐든 치맛자락 아래로 보이는 찢겨진 속바지, 너덜거리는 로퍼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창피함 같은걸 느끼기엔 두려움이 너무도 컸다. 그녀는 어두운 실내로 들어와 치마에 담았던 선인장을 바닥으로 쏟아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오스왈드가 벽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아픔에 일그러진 얼굴. 이마에선 식은땀이 나고 있었다.
“ 대니.”
그가 조용히 여자를 불렀다.
“ 괜찮아요?”
“ 이리로.”
그는 자신의 쪽으로 다가오라고 고개짓했다.
“ 제드릭이, 피를 많이 흘렸다고 했어요. 괜찮은 거예요?”
그는 대답대신 단희의 앞에 총을 들어보였다. 제드릭이 그의 옷을 벗기며 바닥위에 내려놓았던 것을 그가 찾아 든 것 같았다.
그는 단희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철컥 총기의 배럴을 당겼다.
“ 8발이 장전되어 있어. 이게 해머야. 이걸 아래로 당겨야, 방아쇠를 당겼을 때 총알이 나가.”
“뭐하는 거예요.”
그는 이성적이고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 방아쇠를 당기면, 반사적으로 손이 위로 들려 그러니까,”
“ 그만해요!”
단희는 울음을 터트렸다.
“ 알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하면 되잖아요!”
“ .......”
단 한 자루뿐인 총을 그는 자신에게 넘기려 하고 있다. 여자는 절망했다. 그가 왜 총의 사용법을 알려주는지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오스왈드는 피에 젖은 손을 들어 여자의 눈물을 닦았다.
“ 난 끝을 이야기 하는 게 아니야. 최선의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하는 거야.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야 해”
“ 만약의 경우란 건 없어요! 난 아버지를 저 사막에 버리고 왔어요! 당신은 내게, 아빠를 찾아온다고 이야기 했잖아요! 난 당신 포기 안 해! 난 그렇게 못해!”
“ 대니.”
“ 그러니까 여기서 당장 죽을 것 처럼 이야기 하지 마요!”
오스왈드는 달래기 위해 여자를 품으로 당겼다. 단희는 다시 한 번 오스왈드에게 무너졌다. 흑흑거리는,. 끝이 없는 절망의 울음소리가 모든 것에 가득 차 사정없이 요동쳤다.
“ 당신마저 죽으면, 나한테는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고. 내가 잡고 버틸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 당신이 죽으면 나도 죽을 거야.”
이상한 일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위해 이렇게 울어준 경험이 있던가. 고통스러운 감각의 사이로 따듯한 것이 피어올랐다. 울컥하는 뜨거운 기분.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행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자는 벌떡 일어나 코를 훌쩍였다.
“ 알겠어요? 나도 죽을거라고! 그러니까 당신은 꼭 살아야 돼!”
오스왈드는 부드럽게 웃었다. 슬픔과 기쁨이 교차한 표정엔 지금껏 본 적이 없는 따듯한 애정이 깃든다.
“ 당신의 아버지에게, 당신을 웃게 해준다고 약속했는데”
그는 단희의 뺨을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문질렀다.
“ 난 늘 당신이 우는 것만 보네.”
어쩌면 처음부터 불가능한 거래였을지도 모른다. 그 똑똑하고 속 깊은 노인은 어쩌면 이런 결말을 예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스왈드는 언제나 외로웠다. 모든 순간, 모든 공간, 그를 둘러쌓은 모든 것들이 그를 지독히 외롭게 만들어왔었다. 어떤 식으로 발버둥 쳐도 그는 그 외로움의 덫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방법이 없기 때문에 외로움에 순응했다. 썩고 망가지고 텅 비어버린 내면을 달래고 뭔가를 채워 넣을 여유조차 그는 갖질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무거운 족쇄가 느껴지질 않는다. 끊임없이 자유로운 기분만 들었다. 그 어떤 외로움도 느낄 수가 없었다. 지독히 평화롭고, 지독히 아름답다.
“ 내 이름은 최도운이야.”
“ ......”
절망에 찬 여자가 코를 훌쩍였다.
“ 난 12살때까지 할머니 손에 자랐어.”
“ .....”
“엄마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어. 밤에 나갔다가 아침에 들어오면 늘 더러운 침대에서 죽은 듯이 잠만 잤어. 그저 막연히 엄마가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팔았다고만 추측할 뿐이야. 그리고 할머니도.”
“ 내게 이러지 말아요.”
“ 엄마도, 나도 우린 아빠가 없었지. 할머니는 엄마의 인생을 망친 게 나라고 하더군.”
“ 고해성사는 성당에 가서 해요.”
단희는 고개를 저으며 거부했다.
“ 당신이니까 이야기하는 거야.”
“ 어째서요. 유언이라면 이미 내겐 충분해요.”
“ 지금이 아니면 누구에도 이런 이야기를 할수 없을거야.”
“ ......”
“ 난 세상의 누구도 믿지 않아. 사람도, 신도. 내가 누군가에게 고해성사를 해야한다면 지금, 당신이 좋을것 같아.”
“ ......”
“ 난 사생아가 낳은 사생아야. 대니. 그게 내 혈통이야.”
“ .......”
“ 할머니는 엄마에게 자신의 꿈을 걸었댔어. 자신의 모든 걸.”
할머니는 말했다. 엄마가 유학을 중도 포기하고 부른 배를 부여잡고 한국 땅으로 돌아오던 날,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다고 말이다. 자신의 꿈. 희망. 인생의 의미조차 말이다. 할머니의 분노는 딸이 낳은 제 아비를 닮은 어린 몸뚱이로 향했다. 한국 땅에서 살아남기 힘든 혼혈인, 거기에 미혼모.
그럼에도 엄마는 꽤나 발버둥 쳤던 것 같다. 어떻게든 정상적인 삶의 범주로 들어가 보려고 말이다. 하지만 어린 그녀에게 세상의 벽은 너무 높았다. 결국 엄마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자신의 어미와 똑같은 길을 걷던 날, 그녀의 어미는 차라리 자신의 손주가 죽기를 바랬다.
끝없는 매질, 욕설. 선택권 없이 태어난 그는 영문도 모른 채 할머니의 악다구니를 견뎌야했다.
엄마 죽은 후엔 강도가 훨씬 심해졌다. 그는 매일 할머니를 피해 맨발로 도망 다녀야 했다. 학교는 당연히 제대로 나가질 못했다. 매일 매일 앙상하게 마른 몸으로 거리를 배회했다. 미군들에게 구걸해 끼니를 때웠다. 그의 키는 12살 때까지 120센치를 넘지 못했다. 어느 날 할머니가 술에 취해 깨진 유리병을 손에 들었을 때 그는 완전히 그곳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저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는 피를 흘리며 비오는 거리를 무작정 내달렸다.
남자는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아무도 그를 12살 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스왈드도 자신을 12살 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제대로 배운 것이 없고 폭력에 길들여진 아이는 말이 없고 늘 순했으며 조금은 정신병자처럼 보였다. 고아원의 생활도 끔찍하긴 마찬가지였다. 폭력의 가해자가 할머니에서 원장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는 아이들에게 썩은 고기와 다 상한 국을 먹게 했다. 6개월 후, 그는 입양됐다. 평생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깨끗한 샤워, 평생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새 옷을 입고 덜컹거리는 비행기를 타고 12시간을 날아가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그는 그곳에서 니콜라스를 처음 만났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가져보는 아버지. 늘 술을 마시고, 놀기 좋아하고 자기 마누라를 떄리는 못난 남자였지만 오스왈드는 그에게서 애정을 느꼈다. 그와 함께 일을 하는 것이, 그와 함께 같은 밥상에 앉아 밥을 먹는 것이 좋았다. 그의 험한 욕이 섞인 말들을 듣는 것이, 대화라는 것을 나누는 것이 말이다. 그는 나쁜 남자였다. 가정적이지 못했고 불성실했다. 그가 레베카라는 여자와 바람을 핀 사실을 들키고 나서도 남자는 네년 따위가 감히 입에 담지도 못할 사람이라며 아내에게 손찌검을 했다. 그의 아내가 남편을 향해 총을 장전한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오스왈드는 폭력에 못 이겨 할머니에게서 도망치는 것을 택했지만 그녀는 그저 맞서서 싸우는 것을 택한 것뿐이었다.
“ 인생 자체가 전쟁터였네요.”
단희의 추임새에 그는 빙그레 웃었다. 정말로 그랬다. 사람들은 가끔 그에게 왜 군인이 되었는지를 물었다. 단 한 번도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았지만 그는 그저 이 거지같은 삶에서 도망치고 싶었을 뿐이었다. 군대의 단순함은 그에게 잘 맞는 옷이었다. 눈앞의 적은 죽인다. 적을 죽이면 나는 살아남는다. 그 두 가지 원리만이 존재하는 세계. 그곳에선 애정을 기대하는 일도, 누군가의 인생을 망쳤다고 원망을 듣는 일도 없었다. 다만 가끔 깜깜한 밤하늘을 올려다볼때, 그는 외로움을 느꼈다. 인생의 고단함이, 괴로움이, 그리고 어디에도 정을 붙일 때가 없는 자신의 초라함이 그를 지독히 아프게 했다.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의미를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신이란 것이 있다면, 그래서 매번 게임을 하듯 목숨을 걸때마다 그의 생명을 앗아가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그때부터였다. 그가 다시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말이다. 12년 동안 썼던 말은 잘 잊히지 않는 법인가보다.
그는 아주 빠르고 익숙하게 모국어 기억해냈다.
“ 내 이름은 할머니가 지어줬어. 그 여자는 늘 그걸 내게 반복해서 말했거든. 마치 주문이라도 걸듯이 말이야.”
성이 왜 최씨인지는 모른다. 누군가의 호적을 빌렸을 거라고만 짐작한다.
“ 그래서 인지 난 한 번도 내 이름을 잊어본 적이 없어. 심지어 한자의 획수까지 기억하고 있었지. 한국에서 어떤 식으로 이름을 짓는지 알아. 태어난 날, 시간, 앞으로의 운명까지 따져가며 무척 신중하게 이름을 만든다는 거 말이야.”
그저 궁금했다. 할머니는 어떤 식으로 자신의 이름을 지었을까. 무슨 뜻이 담겨있을까.
“ 빌 도에 죽을 운.”
“ .....”
“ 그 한자를 찾아보고서 알았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단 한순간도 할머니는 날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걸 말이야. 그녀가 부르던 내 이름은 저주였어. 내가 어서 사라져주길 바라는 저주.”
지독한 분노. 그는 태어날때부터 그런 운명을 타고났다. 그의 황폐함은 그가 살아온 인생에서 잉태된 어쩔수 없는 산물이었다. 단희는 감히, 그를 동정할 수조차 없었다. 그저 안타까운 마음은 두 주먹을 꽉 말아 쥐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아이를 잃었을 때 어떤 기분이냐고 묻던 그의 공허함을.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든 짐작해보려던 그의 노력을. 그에겐 너무도 익숙해 공기와 같던 그 절망감을.
“ 당신은 내게..너무 어려운 여자야.”
단희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여자의 콧잔등이 불규칙적으로 찡긋거렸고 슬픔이 아닌 동정의 눈물이 방울 방울 턱을 타고 흘렀다.
“ 하지만 당신은 무척 좋은 여자야. 내 인생을 통틀어서 어쩌면 가장 좋은 여자일지도 몰라.”
단희는 고개를 저었다.
“ 난 그렇게 좋은 여자가 아니에요. 실은 난 형편없는 사람이에요.”
인생은 늘 고단했고 괴로웠다. 아이를 잃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하루하루 눈을 뜨면 그곳에서 탈출하기만을 꿈꿨다. 너무 어린나이에 시작한 결혼 생활에 그녀는 내내 적응을 하지 못했다. 아이를 향한 끓는 모정은 오히려 아이가 죽은 이후에 시작됬다.
“ 난..좋은 엄마가 아니었어요. 아이에게..사랑한다는 말 한번 제대로 해준 적이 없어요.”
“ 그렇지 않아.”
오스왈드가 부드럽게 말을 이어갔다.
“ 만약 내가 당신의 아이였다면, 나는 하루하루가 행복했을 거야.”
“ ......”
“ 한순간도 당신의 애정을 의심해보지 않았을 거야.”
“ .....”
“ 날 믿어. 아이는 행복했을 거야.”
바보 같아. 그 말을 믿을 줄 알고. 단희는 떨리는 입술을 꽉 물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아이에게 어떤 엄마였는지, 남편에게 어떤 아내였는지, 그녀의 결혼생활이 어땠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의 진심에는 그 어떤 핑계도, 그 어떤 이유도, 그 어떤 증거도 필요가 없었다. 오랫동안 자신을 조여 왔던 고통이, 그의 부드러운 한마디에 서서히 풀렸다. 늘 가슴을 치던 통증이, 메말라 터져 나오지 않던 눈물이,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차올랐다.
무엇 떄문에 울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 이 남자도 결국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오랫동안 숨통을 조이던 고통, 아이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절절한 모성이 뒤섞여 단희는 모든 것을 토하듯 오스왈드를 끌어안은 채 소리 내어 울었다.
그의 따듯한 손이 내내 여자의 등을 문질렀다.
사막에 밤이 찾아왔다. 멀어져가는 의식 속에 단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갑고 축축한 것이 입가에 닿았다. 쓰고 떫은 맛.
마셔요! 죽지 말아요! 날 두고 가면 가만 안둘 꺼야!
다음 순간에 아마도 여자는 울고 있었다.
무서워요. 너무 무서워요.
모든 감각이 몽롱하고 맹렬한 추위가 찾아왔다.. 얼음차람 차가운 발끝부터 온기가 닿는다.
부드러운 손가락이 그의 갈색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지학이는 정말 개구쟁이였어요.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서하고, 말끝마다 싫다는 말을 반복했어요. 언젠가 한번은 너무 속이 상해 아이의 엉덩이가 퍼렇게 멍들 때까지 때리기도 했어요. 그 어린것을 때릴 곳이 어디가 있다고. 그러고 나서, 잠든 아이의 엉덩이에 연고를 바르며 펑펑 울었어요.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엄마인지, 내가 얼마나 나약한 인간인지 아이를 키우는 매 순간 느껴야 했어요. 당신 할머니는 몰라도, 당신 엄마는 당신을 사랑했을 거예요. 사랑하지 않았다면 당신을 낳지도 않았겠죠. 사랑하지 않았다면 몸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려고 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다만 인생이 너무 고단해 당신에게 그걸 표현하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나처럼요.
꿈과 현실을 분간할 수 없다. 오로지 몸을 감싸고 있는 따듯한 온기만이 느껴졌다. 정신을 놓쳤다가 다시 깨어나길 반복하는 동안 여자는 울다가, 그를 어르다가 다시 절망하기를 반복했다.
퀸튼씨!!!!!!!!!!
제드릭의 고함소리. 헬리콥터의 로터 소리. 눈을 찌르는 듯 한 헤드라이터 불빛에 오스왈드는 게슴츠레하게 뜬 눈을 다시 감았다.
내내 쥐고 있던 단희의 작고 뜨거운 손이, 그가 들것에 옮겨지며 그의 손에서 빠져나갔다.
대니.
그는 계속해서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멀어져가는 의식 속에 오로지 그 이름만 또렷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6.07 17:07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6.07 17:34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6.07 17:57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6.07 18:07
첫댓글 너무 슬퍼요... 죽고 누군 죽을 위기를 넘기고 누구는 사람을 떠내보내고 또 누군가를 잃을까 노심초사하고..
헐...이럴수가...단희 아버지께서 결국은....ㅜㅜ
오스왈드도 다치고...이번 편은 뭔가 허무하고,애절하고,슬프네요ㅜㅜ
눈물이............ 갑자기 아빠 보고싶네요.
단희의 아버지와 오스왈드는 정말 좋은 사위와 장인이 될 수 있었을텐데... 제대로된 어른을 처음 만나본 오스왈드.. ㅠㅠㅠ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6.07 19:32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6.07 19:44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6.07 19:54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6.07 19:54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6.07 20:59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6.07 21:03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6.07 21:32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6.07 21:48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6.07 21:50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6.07 21:53
눈물 한바가지 흘리고갑니다. 우리주인공들 넘불쌍하네요
작가님정말잘읽었어요ㅜㅜ
담편이더기다려지네요~~ ♡♡
어째...단희 불쌍해서ㅠㅠ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6.08 01:47
❤❤❤❤❤ 감사합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6.08 05:14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6.08 07:23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6.08 10:16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6.08 11:16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6.08 11:17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6.08 11:40
당연히 살거라고 생각했었는데 험..생각지도못한 전개때문에 사무실에서 눈물이 ㅜ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6.08 14:32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6.08 16:50
힝 작가님... ㅠ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6.08 23:51
잘보고감니다.주인공들넘넘안타깝네요.담편기대해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6.10 13:11
몰입감 완전 굿~~
불쌍한 여주 이제 꽃길만 걸었음해요~ㅠ
ㅜㅜ 슬퍼요
눈물은 필수네요 ㅜㅜ
나도 모르게 울면서 보고있네요 ㅎ
정말 영화네요
작가님 흡입력 짱이에요
휴가 마지막날인데.. 밖은 엄청 뜨거운데..시원한 데서 읽으니 넘 행복합니다.
이야기가 쓸프지만 영화같기도하고
좋은 결말 만들어주실거라 믿어요
작가님 감사합니다.
슬픈 인생이 담긴 글들이네요 ㅠ하지만 희망이 있으니 ~작가님을 믿어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8.18 13:47
눈물이 주르륵~ 불쌍한 오스왈드~ 흑흑~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9.25 1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