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안교(萬安橋)>
만안교를 직접 보니 여러가지로 놀랍다. 무엇보다 아직도 건너다니는 현재형 다리라는 점, 또 잘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리기까지 하는 점이 그렇다. 만안교비에 더해 새로 만안정이라는 정자까지 세워가며 역사를 더하고, 만안구 지명의 근원으로 삼아 역사참여의 주체가 되는 점은 역사를 대하는 자세에 대해 놀라게 한다.
명칭 : 만안교(萬安橋)
소재지 :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679
방문일 : 2022.1.24.
1. 둘러보기
만안교는 홍교이고 석교이다. 무지개 돌다리이다. 지역민의 일상속에 들어 있는 아름다운 다리이다. 다리가 가설된 삼막천변에 산책로가 조성되어 끊임없이 사람들이 오간다. 다리가 외롭지 않다. 대보름이면 답교놀이(다리밟기)도 한다. 230년이 되는 다리를 230년 전의 사람들처럼 건너다니고, 산책로를 걸으며 완상하고, 민속놀이를 한다.
만안교(萬安橋) 만년이 편안한 다리, 만 번을 건너는 다리, 만백성이 편안한 다리이다. 만안교를 세우고 교비를 쓴 서유방도, 서유방에게 다리 건설을 하면한 정조도 모두 그리 생각하고 다리를 만들었을 것이다. 오늘 다리를 건너는 모든 사람도 그리 생각하고 건널 것이다.
*소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8호. 길이 31.2m, 너비 8m. 1795년(정조 19)에 조영되었다. 현재 아랫부분은 모래 속에 묻혀서 확실한 상태를 알 수 없고, 7개의 수문은 매끄럽게 다듬은 장대석을 총총하게 잇대어 아치(arch)를 형성하였는데, 아치는 하단부부터 곡선을 그려 전체의 모양은 완전한 반원형을 이루고 있다.
7개의 아치 사이에는 크고 작은 선단석(扇單石)·장군형[缶形] 또는 잠자리형[蜻蜒形]으로 다듬은 무사석(武砂石)을 차곡차곡 쌓아 메꾸었다. 아치 상단의 이맛돌은 중앙부를 둥글게 다듬은 장군형 무사석으로 연결하고, 그 윗면에 장대석을 쌓아 길바닥을 형성하였다.
지금은 그 위에 아스팔트를 포장하고 또 콘크리트 난간도 덧붙여놓아서 원형이 많이 손상되어 있다. 원래는 남쪽으로 약 200m 떨어진 만안로 입구에 있었는데, 1980년에 국도 확장 때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복원되었다. 다리 남쪽 측면에 축조 당시에 세운 비석이 있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인 현륭원(顯隆園)에 전배할 때 건너기 편리하게 하고자 가설한 다리로 그 옆에는 만안교비가 세워져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1795년 당시 만안교의 완공은 정조에게 큰 관심거리였다. 공사 감독자인 김천보에게 승진의 상을 내리고 기타 공사 참여자들에게도 승진과 승급의 상이 주어졌다.
"정조 19년 을묘(1795) 10월 4일(신사)
19-10-04[05] 시흥(始興) 만안교(萬安橋)의 공사를 감독할 때 가장 공로가 큰 사람인 김천보(金天寶)는 도내의 임기가 찬 첨사(僉使)의 자리를 비워서 차출하여 보내고, 장정(張烶) 등 3인은 모두 오위장(五衛將)의 자리를 비워서 조용(調用)하며, 경기 감영의 비장(裨將)과 장교(將校)에게는 상으로 자급(資級)을 올려 주거나 첩가(帖加)를 작성해 주라고 명하였다."
정조는 화성행궁의 완공에 즈음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화성(華城)의 궁각(宮閣)과 누정(樓亭) 여러 곳의 상량문(上樑文)을 나누어 지으라고 명하였다."
규장각 제학 정민시(鄭民始)는 신풍루 상량문(新豐樓上樑文)을 지었는데, 상량문 가운데 7언절구 연작시를 지어 축원했다.
이중 만안교를 노래한 구절이 있다. 만안교는 1795년에, 화성행궁 상량문은 이듬해 1796년에 지었다.
어기영차 아래쪽 들보 올리세 / 兒郞偉抛樑下
높다란 붉은 난간에선 먼 들판이 다 보이고 / 縹緲朱欄控遠野
고개 돌려 만안교 밑 시내 바라보니 / 回看萬安橋底川
도도한 세월이 세차게 흐르는 물과 함께 흘러가누나 / 滔滔日與沛流瀉
만안교 아래 흐르는 시내물을 도도히 흘러가는 세월에 비유하여 만대의 평온을 빌었다. 상량문의 끝은 "산천이 누(樓)와 호(壕)를 에워싸 이 땅을 길이길이 평안하게 하소서." 화성행궁을 에워싸는 川의 대표로 안양천을 들었다. 신산스럽게 건너던 만안교를 이제 편안하게 걸어 건너게 된 평안처럼 행궁의 평안을 빈 것이다. 그렇게 미래는 평안한 세월이 될 것이라는 축원이다. 만안교는 정조가 건너온 고난의 세월을 건너는 다리, 평온의 권역으로 인도하는 다리였다.
만안교비(萬安橋碑)
만안교의 축조를 칭송함(머리글을 겸함)
남충현(현재의 과천) 관아 남쪽 20리에 안양천이 있는데 바로 화성으로 가는 행차길이다. 우리 성상께서 해마다 원침(사도세자가 묻힌 융릉)을 참배하려면 이 하천을 건너게 된다. 올 봄에도 어머니를 모시고 이 하천을 건넘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대체로 행차길에는 하천이 있고 반드시 다리가 있기 마련인데 이들 다리는 나무로 놓였다가 왕이 행차한 뒤 바로 철거하였다. 이로써 얼음이 풀릴 때와 장마가 질 때에 물을 건너는 사람들이 고생을 하였다.
이에 전 경기관찰사 서용보가 이 다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돌다리로 바꾸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다가 미천한 신(현 경기관찰사)이 명을 받고 초가을 음력 7월에 일을 착공하여 3개월 만에 준공하였다. 교량은 길이 15장(1장은 10자)에 폭은 4장이며, 높이는 3장이고, 갑문이 다섯 개다.
임금께서는 이 일을 아시고는 감독하는 사람과 장인들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리고 특별히 ‘만안교'라는 이름을 내리셨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왕들이 다리로 편안히 건너게 된 것은 한나라의 장안교에서 비롯하였지만 어머니를 모시고 다녔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또한 도보로 건너는 작은 다리와 수레로 건너는 큰 다리가 성주 때에 만들어졌으나 돌로 쌓아 만년을 전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이 다리는 다행히도 화성의 행차길에 있으니 왕의 수레는 1년에 한 번, 어머니의 가마는 10년에 한 번씩 육룡(왕의 수레, 말 여섯 마리를 이름)에 멍에를 얹고 8개의 방울을 울리며 편안히 지나갔다가 편안히 오기를 만년을 한결같이 할 수 있다. 그리고 편리함은 만백성에게 미쳐서, 멀고 가까운 짐 꾸러미들이 튼튼한 다리로 건너게 되어 이제는 옷을 걷어 올리거나 험한 길로 돌아서 갈 걱정이 없어졌다.
이로써 만년토록 임금의 큰 은혜를 입고 자애로운 덕을 기리게 되었으니 어찌 참으로 성대하지 않겠는가! 공사를 처음 시작할 때 하천가에서 돌을 캐내는데, 과연 돌이 나와 경비가 절반으로 줄어서 마치 하늘이 도운 것 같으니 이 또한 기이한 일이다. 신은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머리를 숙여 그 일을 기록하며 기리어 말한다. (이상 줄바꾸기 필자)
왕께서는 해마다 한 번씩 원침에 행행하시니 이 다리 건너기를 만 번을 하옵소서.
복(福)이 함께 이르렀으니 아래에는 하천이 있습니다.
때때로 어머니의 가마를 모시고 만년토록 편안하소서.
은혜가 만 백성에 미치니 마음 놓고 건넘에 환성을 올리도다.
천년만년 편안하기가 반석과 같도다.
정헌대부 지중추부사 겸 경기관찰사 병마수군절도사 수원부유수 개성부유수 강화부유수 광주부유수 도순찰사 규장각검교직제학 신(臣) 서유방 삼가 글 내용을 지음.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신(臣) 조윤형은 삼가 비석에 새길 글씨를 쓰고, 학신(學臣) 유한지는 비석 전면의 글씨를 삼가 씀.
감동(감독관) 첨사(절도사 아래의 첨절제사) 김천보
오위장(중앙군사조직 오위의 장수) 장연 김대연 김원섭
영비(감사나 유수를 따라 일을 돕던 무관직의 비장) 가선 서협수
영교(군영의 장교) 가선 서의린
영리(관아의 아전) 이효석
각수편수(조각장의 책임자) 이삼흥
석수편수(석공장의 책임자) 최귀득 박복돌
홍예편수(무지개돌을 쌓는 책임자) 최흥서
야장편수(대장장의 책임자) 정일성
상지(上之) 19년(1795년, 정조 19) 9월 일 세움
만안교비문을 쓴 경기 감사 서유방(徐有防)은 만안교 다리 건설에 애를 쓴 공로자들에게 상을 요청하는 장계를 올렸다.
“안양(安養)의 석교(石橋)가 이제 완공되었으므로 교량의 간가(間架), 길이와 너비의 척수(尺數) 및 연보(捐補)ㆍ감동(監董)ㆍ간역(看役)한 비장과 장교 등 공로를 세운 사람을 열거하여 급히 장계합니다.
'석교의 홍예수문(虹霓水門)은 5칸으로, 길이가 100자이고 너비가 22자이고 높이가 15자이며, 좌우 선창(船艙)의 석축(石築)은 총 160자이다. 연보와 감동을 한 사람은 가선대부(嘉善大夫) 김천보ㆍ장정ㆍ김대연(金大衍), 출신(出身) 김원섭(金元燮)이고, 간역한 사람은 영비(營裨)인 절충장군(折衝將軍) 서협수(徐浹修), 영교(營校)인 절충장군 서의린(徐毅麟)이다.'
논상(論賞)하는 문제를 병조에서 상에게 여쭈어 처리하게 해 주소서.” (<일성록 > 정조 19년 을묘 1795년 10월 4일)
정조는 1797년 행궁행차길에 만안교에 이르러 공사 참여자를 만나 다리가 견고한지를 묻는다.
만안교(萬安橋)에 이르러 교역 감동인(橋役監董人) 신형(申泂)ㆍ서의린(徐毅麟)ㆍ서협수(徐浹修)를 소견(召見)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새로 만든 다리가 견고하여 걱정할 것이 없는가?”
하니, 신형 등이 아뢰기를,
“이번에는 전에 비해 상당히 완고(完固)합니다.”
하여 내가 신형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화성 성역에서 어떤 일을 맡았으며 어떤 상을 받았는가?”
하니, 신형이 아뢰기를,
“장안문(長安門)의 성 700보와 동장대(東將臺)의 간역(看役)을 신이 하였고, 받은 상전은 오위장(五衛將) 및 실동지(實同知)입니다.”
하여, 내가 화성에 가서 대령하라고 명하고, 서의린과 서협수에게 전교하기를,
“다리를 지금 다시 완성하였으니, 그대들은 전날에 일을 잘못 처리한 죄를 속죄할 수 있을 것이다. 도로 바친 첩가(帖加)는 예조로 하여금 다시 만들어 주게 하겠다.” (일성록, 정조 21년 정사(1797) 1월 29일)
만안교 건설 참여자는 화성행궁 건설에도 참여하였다. 둘 다 상을 받거나 전일의 잘못을 면죄받았다. 만안교 건설은 정조의 행궁 행차에 매우 중요한 공사였다. 대규모 공사로 단련되고 기술이 발전한 장인들이 이와 같이 견고하고 멋진 다리를 만든 것이다.
*만안정
#만안교 #안양가볼만한곳 #안양만안교 #정조행차 #정조만안교 #경기감사서유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