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식과 정지상: 설화와 진실
최연식(서울대 강사)
최고 시인의 명예를 둘러싼 갈등?
고려 중기의 문인 김황원은 대동강가의 연광정에 올라 먼 산과 들판의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다가, 문득 시상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읊조렸다.
긴 성 한쪽에는 넘실거리는 물이요,
큰 들판 동쪽에는 점점이 산이다.
그러나 다음 구절을 이어가려 하니 전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날이 지도록 정자에서 고심하다가 끝내는 눈물을 흘리며 내려오고 말았다.
이처럼 문인들은 한 구절의 훌륭한 문장을 짓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쉽사리 자신과 다른 사람이 공감하는 명구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종종 문인들 사이에는 모방과 표절의 시비가 있게 되고, 특정 문인의 문장을 둘러싼 시기와 질투에 관한 소문도 생겨나곤 한다. 그 중에서도 고려중기의 시인 정지상에 대한 김부식의 시기와 질투는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일 것이다.
<고려사> 묘청천에는 정지상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김부식이 평소에 정지상과 문장을 경쟁하다가 불만이 있어 묘청의 난에 연루된 것을 구실로 살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불만의 구체적인 내용이 고려 후기에 편집된 <백운소설> 에는 다음과 같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김부식과 정지상은 문장으로 함께 이름을 날렸는데 두 사람은 서로 갈등하여 잘 지내지 못하였다. 세상에 전하기를 정지상이 “사찰에 범어가 그치자, 하늘빛은 유리처럼 맑다.”라는 시구를 짓자 김부식이 이를 탐내어 자기의 시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정지상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뒤에 정지상은 김부식에게 죽임을 당하여 음귀가 되었다. 김부식이 어느 날 “버드나무 천 가지가 푸르고 복숭아 꽃 만 송이가 붉다”라고 봄을 노래하자, 갑자기 공중에서 정지상의 귀신이 나타나 그의 뺨을 때리며 “누가 천 가지, 만 송이를 세었느냐. ‘버드나무 가지마다 푸르고 복숭아 꽃마다 붉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고 나무랐다. 뒤에 (김부식이) 어느 절에 가서 변소에 들어갔는데 정지상의 귀신이 (김부식의)음낭을 쥐고서 “술도 마시지 않고서 왜 얼굴이 벌건가”하고 묻자 김부식은 “강 저쪽의 단풍이 얼굴에 붉게 비쳤다”고 대답하였다. 정지상의 귀신이 더욱 세게 쥐면서 “이 가죽이 무엇이냐”라고 하자 “네 아비의 불알이다”라고 하였다. 귀신이 더욱 힘을 주어 김부식은 끝내 변소에서 죽었다.
여기에는 은연중 별다른 문장 능력이 없던 김부식이 재기발랄한 정지상을 질시하고 끝내는 정치적 이유를 내세워 해치고 마는 비겁한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천재소년 모짜르트를 질시하여 그의 성공을 막고 끝내는 비참하게 숨져가게 한 살리에르의 모습(영화 아마데우스 중에서)을 연상시키기에 족하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많은 사람이 애송하는 ‘비 갠 언덕 위 풀빛 푸른데/ 남포로 님 보내는 구슬픈 노래// 대동강 물이야 언제 마르리/ 해마다 이별 눈물 보태는 것을// (님을 보내며)’이라는 시를 10대에 지었다고 하는 천재시인 정지상, 규범적인 유교사상을 앞세워 우리의 자랑스런 역사를 위축시킨 사대주의적 역사책인 <삼국사기>를 편찬한 모짜르트와 실리에르의 모습이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12세기초 중국사신의 견문록인 <고려도경>에 김부식이 최초의 학자요 문인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이 문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단순히 문장에 대한 질투 때문에 무고한 천재시인을 시기하고 죽여야 했던 정도의 인물이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인정되고 있었다면 당시 고려의 지식인들의 수준은 어느 정도였다는 말인가. 이 문제는 고려 중기의 사상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상을 담을 것인가, 감수성을 담을 것인가
국어 교과서에는 실리지 못했지만 김부식도 많은 시를 지었고 상당수가 <동문선>에 실려 있다. 그 중 한 편을 적어 보자.
요 임금 뜰은 석자 높이였지만 천추에 덕을 남겼고
진시황의 성은 만리나 되었지만, 2대만에 나라를 잃었네.
옛날의 역사는 오늘의 거울이 될 만한데
수나라 양제는 아무 생각 없이 토목공사로 백성의 힘 말렸구나.
(비단궁전에 대하여)
수양제의 사치를 비판하는 내용의 이 시는 교훈적이고 계몽적이긴 하지만 정지상의 시처럼 심금을 울리는 멋있는 시라고하기는 힘들다. 남포로 임을 보내는 애절한 감정 대신 ‘정치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당위의 명제만이 있을 뿐이다. 이로 보면 김부식은 정말로 문학적 감수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딱딱한 학자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시들이 나타나게 된 문화 .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서 성급하게 내린 결론은 역사의 본 모습을 흐리게 할 뿐이다.
문종 때(1046-1083) 이후 고려는 송나라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매우 적극적인 노력을 하였다. 이러한 문화교류의 결과 고려 사회에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지식인들의 학문과 문장에서 그러한 변화가 두드러졌다. 고려 전기에는 통일신라의 경향을 계승하여 당나라의 시가 유행하였는데, 특히 비애적인 정서를 노래하는 만당풍이 아름다운 시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문종 때 이후에는 송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시풍이 등장하였다. 송나라를 주도해 간 사대부들은 황제와 귀족들의 비서에 가깝던 남북조 시대 이래의 문인형 지식인들과는 달리 사회를 올바르게 운영해 가야 할 책임의식을 지닌 새로운 유형의 지식인들이었다. 따라서 문장을 짓는 데 있어서도 개인적 정서를 노래하기보다 사회적 책임의식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자 하였다. 이러한 시풍의 영향을 받은 고려 중기의 시는 지식인 관료들의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을 강조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정지상과 김부식의 시는 각기 이러한 만당풍과 송나라풍의 시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송나라 풍의 시는 사상을 담고자 하다 보니 자연히 음악성과 감수성에는 비교적 관심을 덜 쓰게 되었고, 당연히 시적 아름다움에서는 만당풍에 견주기 힘들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시는 당나라의 것이 제일로 꼽히고 많은 사람들에 의해 애송되지만, 송나라의 시는 그다지 사랑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책임의식을 전면에 내세운 새로운 지식인들의 등장은 역사적 의미가 적지 않은 것으로, 이는 동아시아 사회의 발전 특히 정치. 사상 분야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개인적 감수성과 공존해야 하는 사회적 감수성을 내세운 이들의 문학관은 ‘문학은 도, 즉 사상을 담아서 사회의 교화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문이재도론’으로 불리는데 이러한 입장은 잊혀졌던 문학의 사회성을 재발견함으로써 문학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진지한 반성을 추구하게 하였다.
따라서 송나라 풍의 시가 고려 사회에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시풍이 기반하고 있는 문학관의 수용을 뜻한다. 이는 또한 개인적 감수성에 기초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정치의 주체인 지식인으로서 사회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일반 민중들을 올바른 길로 교화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지닌 문인들의 등장을 의미한다. 실제로 현재 남아 있는 자료를 보면 김부식과 가까웠던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풍의 시들이 발견되고 있는데 여기에는 물론 김부식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거센 비가 바닷바람 따라 휘몰아치니
뇌성 수레 구름 사닥다리 어찌 그리 웅장한고.
개천 바닥은 물이 넘쳐 수레도 말도 못 다니고
마을은 폐허인 듯 우물과 부엌이 다 비었네. ...
만 백성들 모두 농사의 희망을 잃었으니
태평한 세상 올 섭리의 공 어서 베풀어 주소서.
(김돈시, ‘거센비’)
옛 놀던 곳에 다시 찾아오니
바람과 달은 지난봄과 같은데
다만 완산 아래에
배부른 이 없음을 탄식하네.
(허홍재, ‘완산 가는 길에’)
김돈시는 김부식의 아들이며, 허홍재는 김부식이 주관하는 과거에 합격한 후 문하생으로서 김부식과 가깝게 지냈고 <삼국사기>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이들의 시에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는데, 이러한 내용은 이 시기의 시에서는 그리 흔한 것이 아니었다.
이처럼 12세기에는 사회적 의미를 강조하는 문학관이 고려 사회에 주요한 흐름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는데 여기에 큰 역할을 담당한 사람이 바로 김부식이었다. 그런데 새로운 경향의 지식인들의 출현은 자연히 기존의 수식 위주의 문인들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 최충의 손자인 최약은 문구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나무에 조각을 하는 기술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서 그러한 문학은 진정한 문학이 아니라고 하였다가 기존의 문인들로부터 문장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 하는 질투일 뿐이라는 반박을 받았다. 한편 위의 허홍재의 시에 대하여도 일부 문인들은 시의 기품이 부족하다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김부식이 정지상을 죽인 진짜 속사정
당시의 문화적 경향과 김부식의 위치를 생각할 때 <백운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김부식이 정지상의 시구를 빌리려고 했다거나, 그것을 거절당한 데 대한 분노 때문에 정지상을 죽였다는 일 같은것은 실제로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기존의 경향을 비판하고 새로운 문학풍조를 만들어 가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비판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시풍에 미련을 가지고 시구를 빌리려 했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다. 설혹 그렇게 빌려서 시를 지었다고 해도 누가 그 시를 김부식의 시로 받아들이겠는가.
그러나 두 사람이 서로 상반되는 문학관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일정한 갈등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문학관의 차이는 기보적으로 정치적 입장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단순히 ‘문학적’차이만은 아니었다.
현대 문학계의 참여, 순수논쟁에서도 그 배경이 되는 정치, 사회적 지향의 차이를 모름으로서는 그러한 논쟁의 실제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김부식이 정지상을 죽인 직접적 이유는 정지상이 묘청의 난에 연루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묘청 일파는 땅의 기운이 왕성한 서경(평양)에 천도하면 36국에서 조공을 바칠 것이라고 설득하면서 서경천도 이후의 새로운 정치 체제를 구축하려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정지상과 점술가인 백수한 같은 서경출신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이러한 주장은 외척의 발호로 권위가 실추되어 있던 국왕으로부터도 호응을 받았으며, 북쪽에서 새롭게 등장한 금나라를 정벌하자는 민족주의적 주장으로 일시 여론의 지지를 얻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이론적 근거가 풍수설이나 도참과 같은 비합리적인 사상체계를 이용하였던 점에서 적지 않은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당시 송나라의 사대부적 정치이념을 받아들이고 있던 김부식과 같은 유교관료들이 반대하였던 것은 당연하다.
유교관료들은 묘청의 행태를 북송 말기에 황제의 신임을 얻어 정치에 관여하다 나라를 망친 승려 임영소에 견주면서, 국가기강의 확립과 사회의 안정은 도참이나 풍수지리적 방법이 아니라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는 유교정치 이념의 실천에 달려 있다고 주장 하였다. 이들은 서경 건설을 위한 대규모 공사자금 조달과 백성들의 부역 동원이 바로 사회안정을 해치는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 점은 국가의 부강과 왕실의 권위 강화를 명붐으로 내세워 백성들의 어려움을 고려하지 않은 묘청 일파보다 정치적으로 진전된 입장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국왕이 묘청을 적극적으로 신뢰하였으므로 유교관료들이 열세였지만, 묘청의 장담과 달리 서경 궁궐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고 민심이 동요하면서 점차 국왕의 지지도 약해졌고 유교관료들의 비판도 강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급해진 묘청은 결국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중앙에서는 진압 책임자로 묘청 반대에 앞장섰던 김부식을 임명하였다. 그는 반란군의 배후세력을 일소한다는 구실로 당시 개경에 있던 정지상과 백수한 등을 즉결처분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물론 총애를 받던 정지상 등이 국왕을 설득하여 정책을 다시 되돌리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나온 것으로 전략상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가 국왕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처형을 단행한 것은 이후 정지상의 죽음이 억울한 죽음이 되고 김부식 자신은 질투의 화신으로 전해지는 배경이 되었다.
정지상의 복권과 천재시인 살해설 출현
묘청의 난을 진압한 후 김부식은 고려의 정치를 주도해 나갔다. 따라서 이 기간에는 김부식의 문학관이 보다 우세해졌고 개인적 감수성을 중요시 하는 문학은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다. 특히 정지상은 역적의 일원으로 구정되었기 때문에 이후 상당기간 문학적으로 제대로 인정받기 힘들었다. 그러나 무인정변 이후 사회분위기가 바뀌고, 그에 따라 문인들의 위치와 문학관이 변하면서 상황은 다시 일변하였다. 잘 알려진 대로 무인 집권기에 문신들은 정치에 본격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고 단지 문장 솜씨를 무인 집권자들에게 인정받아 그들의 식객으로 연명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규보 같은 사람도 과거에 합격한 후에 관직을 얻지 못하자 연일 최충헌에게 시를 지어 바치며 탄원한 후에야 겨우 작은 벼슬을 하나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무인 집권자에게 등용돤 문인들은 자연히 그들의 식객과 같은 존재로서 무인들의 잔치자리에 나가 집권자를 칭송하는 시를 짓거나 그들에게 부족한 문학적 소양을 보필하는 역할을 수행하여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념을 담은 글을 짓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고, 오히려 세련된 표현과 민첩한 글 솜씨가 요구될 뿐이었다. 앞에서부터 읽거나 뒤에서부터 읽거나 모두 시가 되는 회문체나 짧은 시간을 정해 놓고 먼저 시 짓는 것을 경쟁하는 주필 풍조가 유행한 것 등은 이 시기의 문학적 분위기를 반영한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정지상과 같은 인물이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정지상의 복권은 조심스러운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무인집권기 초에 이인로가 고려 문인들의 이야기를 모은 <파한집>에는 정지상의 시가 두어 편 소개되고 있는데 이인로는 정지상이라는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단지 ‘시인’이라고만 언급하였다. 아직도 쉽게 그의 이름을 드러내기에는 석연치 않은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조금 늦게 나온 최자의 <보한집>에는 분명하게 ‘정지상’이라는 이름을 언급하면서 그의 시가 대단히 아름답고 뛰어나다고 칭송하였다. 송나라 풍의 시가 퇴조하고 다시 개인적 정서가 강조되던 당시의 분위기에서 일반 문인들 사이에 정지상에 대한 인기는 대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애상적 시풍은 그의 비극적 죽음과 연결되면서, 불우한 처지에 있던 많은 문인들에게 정서적 공감을 일으켰고 이는 자연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는 마음으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반면 김부식의 시가 말하고자 했던 문인의 사회적 책임감과 정치참여에 대한 자신감은 지도력을 상실한 당시의 문인들에게는 쉽게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의 시는 단지 따분하고 재주 없는 사람의 글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정지사의 죽음은 점차 억울한 죽음으로 인식되었고, 그 이유도 정치적인 것에서 문학적인 것으로 대체되면서 그를 죽인 김부식이 자신의 문학적 부족함을 감추기 위하여 천재시인을 죽였다는 전설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