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심장을 가진 모든 동물은 신장을 가지고 있으며, 신장을 가진 동물은 심장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했다. 따라서 (마)가 참이라면, (바) 역시 참이다. 마찬가지로 (마)가 거짓이라면, (바) 역시 거짓이다. 즉 ‘심장을 가진 동물’이라는 표현과 ‘신장을 가진 동물’이라는 표현은 진리 값의 변화 없이 서로 바꾸어서 사용할 수 있다. 그럼 ‘심장을 가진 모든 동물은 신장을 가지고 있다.’는 분석적인 명제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심장을 가진 모든 동물은 신장을 가지고 있다.’는 진술이 참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심장’, ‘동물’, ‘신장’의 의미를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세상으로 나가 세계를 관찰해야 한다. 즉 ‘심장을 가진 모든 동물은 신장을 가지고 있다.’는 종합 명제다. 따라서 동의어를 진리 값의 변화 없이 서로 바꾸어 사용할 수 있는 표현으로 설명하는 것은 잘못이다. 더 나아가 동의어라는 개념만으로 분석 명제를 종합 명제와 구분하여 설명할 수 없다. (콰인은 여기에 필연성이라는 개념을 이용해 동의어를 설명하는 전략을 소개한다. 하지만 이 전략은 순환적이라는 것이 콰인의 지적이다.)
그럼 동의어를 이용하는 것 말고 분석 명제와 종합 명제를 구분하는 다른 방법은 없는가? 한 가지 방법은 분석 명제가 아닌 것을 규명하는 것이다. 즉 종합 명제가 무엇인지 제시하고, 그것을 제외한 것은 분석명제라고 말하면 된다. 그럼 논리 실증주의자들에게 종합 명제는 무엇이었는지 다시 생각해보자. 앞에서 경험에 의해서 검증될 수 있는 것들을 종합 명제라고 불렀다. 여기에는 이론적 명제와 관찰 명제가 모두 포함된다. 과학 속의 실험과 관찰을 통해서 많은 명제들은 참인 것이 밝혀지고, 많은 명제들은 거짓인 것이 밝혀진다. 이렇게 실험과 관찰에 의해서 진리 값이 결정되는 것들은 모두 종합 명제들이다. 따라서 분석 명제를 무엇을 실험하든, 무엇을 관찰하든 그 진리 값이 바뀌지 않는 명제라고 규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순간, 콰인 철학의 핵심 논제 중에 하나가 등장한다. 그것은 바로 ‘인식론적 전체론(Epistemological Holism)’이다. 어렵지만 콰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외부 세계에 대한 진술들은 개별적으로 감각 경험의 법정에 서지 않는다. 그것은 집단적으로 감각 경험과 마주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