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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은 거룩하다
이홍사
목련 잎이 낙엽이 되어 마당을 구른다. 목련은 꽃을 보는 시기가 겨우 일주일 남짓, 봄의 전령사로 잎보다 먼저 꽃을 피우지만 낙엽은 보통 성가신 게 아니다. 성가시게 마당을 뒹구는 목련 낙엽을 보다가 어느 후배 시인의 시어를 떠올렸다.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소식이 끊긴 후배 시인은 목련 꽃잎이 지는 걸 보고 ‘누가 화단에 생리대를 무더기로 버렸는가?’ 라는 시어로 목련꽃이 지는 걸 쓰고 버린 생리대에 비유했었다. 기발한 표현을 한 그 녀석의 얼굴은 기억에서 가물가물한데 그 구절만은 내 귀에 생생히 살아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상가 건물을 짓고 나서 화단을 만들고 목련 한 포기와 홍단풍, 석류나무, 생강나무를 심고 그 사이에 키가 작은 연산홍과 쥐똥나무를 사다 심었다. 목련은 초봄에 겨우 일주일 남짓 꽃을 보기 위해서 화단에 그대로 두고 있지만 낙엽은 너무 성가시다. 낙엽이 흩날리는 마당을 서성이다 버릇처럼 후배 시인의 시어를 읊조리며 빗자루를 찾았다.
마당의 낙엽을 대충 치우고 군대 시절의 동기가 하는 중고 타이어 집에 가서 커피나 마시고 내기바둑을 두며 무료한 오후를 달랠 생각이었다. 심심할 적이면 자주 가서 무료한 시간을 자장면 내기 바둑으로 때우든가 자장면이 아니면 탕수육에 이과두주 한 병을 마시면 그 짜릿한 맛이 죽이는 시간이다.
그 친구는 훈련소의 동기지만 공교롭게도 같은 중대에 배치를 받아 삼 년간 같이 군 생활을 했던 기막힌 인연이다. 더구나 전역하고 같은 도시에서 생활하고 있으니 이 보다 더 깊은 인연이 있을까? 나달나달한 병장 계급장을 같은 날 떼어버리고 예비군복을 입고 같은 열차를 탔던 그 친구는 이십 년이 훌쩍 넘은 지금은 둘도 없는 짝궁이다.
목련 꽃잎을 쓰고 버린 생리대에 비유하던 후배 녀석을 생각하다가 금세 군대 동기 녀석과의 인연을 헤아리며 빗자루를 찾아 마당의 낙엽을 군데군데 쓸어서 모았다. 낙엽이 완전히 마르지 않았을 뿐더러 태울 장소가 마땅찮아 낙엽을 한 아름씩 싸안아서 썩어서 거름이 되라고 화단에 버리고 있는데 마당으로 흰색 소형 화물차 한 대가 거침없이 들어왔다. 선팅을 워낙 진하게 해놓아서 밖에서 보아선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구지? 의아해하고 있을 때 손을 번쩍 들며 내리는 이는 바로 옛날에 살던 동네, 말바우의 이장을 하던 경태였다.
-아! 장로님 오랜만이네여.
경태는 지금 말바우의 하나 뿐인 시골 교회의 장로가 되어 있다. 최고의 예우가 장로님이라는 호칭이다. 나는 그 호칭을 사용하여 환영하며 악수를 했다. 분명 가을걷이를 끝내고 쌀을 가져온 것이라 생각하고 적재함을 보니 짐작대로 쌀자루가 실려 있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못 볼 뻔 했네.
-어디 가려던 참이었어?
-응! 나가려고 차 시동을 걸었다가 마당이 어수선해서, 낙엽을 좀 치우고 나가려고. 그건 그렇고 올 가을걷이는 다했어?
-어제 겨우 다 마쳤어.
-올해도 수고 했네. 올 농사는 잘 되었어?
-농사는 늘 그렇지 뭐!
-올해 태풍이 지독했잖아?
-해마다 오는 태풍인데, 까짓 거.
지극히 상투적인 인사치레를 지극히 상투적으로 끝내고 쌀을 삼 층 집으로 올리기 시작했다. 쌀은 열두 포대다. 열 개는 올리고 두 개는 내 차에 싣자는 말에 따라 트렁크에 두 포대를 먼저 싣고 삼 층 복도 현관 구석에 열 포대를 둘이서 메다가 쌓았다. 경태는 힘이 좋아 두 포대씩 어깨에 가뿐하게 걸치고 올라가고 나는 겨우 한 포대씩 들고 낑낑거리며 올렸다. 말바우에 논을 사고 벌써 십 몇 년째 해마다 받아오는 쌀이다. 쌀을 가져오면 답례 겸 인사치레로 부근의 술집에서 한 잔하곤 했다. 그러나 경태가 장로가 되고부터 그런 인사치레는 없어졌다. 술 한잔하자는 소리가 인사가 아니라 범례가 되기 때문이다.
-장로님께 한잔하자면 결례고 커피나 한 잔 하지.
내 말에 따라 이 층 사무실에서 종이컵 커피를 마시며 농사의 작황에 대해서 얘기하고 팔 생각도 없지만 지금은 그 쪽 땅값이 좀 어떤지 물었다. 대답은 예상했던 대로다.
-거래되는 땅이 없어서 시세를 알 수가 없어.
내가 말바우에 논을 산 지 벌써 십오 년이 훨씬 넘었다. 시내 구획정리 지구에 상가건물을 지어서 이사 온 지가 십이 년인데 그 전에 말바우에 살 때 그 곳에 논을 샀고 그때부터 경태가 농사를 짓고 소작료로 쌀을 여섯 가마씩 받아오고 있다.
말바우에서는 딱 십일 년을 살았다. 아파트가 섬 같은 기분에 사람 살 곳이 아니라는 판단으로 과감하게 살던 아파트를 처분하고 촌집을 사서 말바우로 들어갔다. 그 때가 큰 놈이 초등학교 오 학년 때였다. 거기서 아이들이 대학 졸업하고 나왔으니 헤어보면 딱 십일 년을 말바우에서 살았다. 처음에는 떠내기라고 텃세도 심했지만 차츰 친구를 사귀고 정이 드니 살기가 그만이었다. 이웃과 정이 드니 아파트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그 곳에서 시내로 출퇴근을 했다. 물론 아이들은 시내에 있는 학교를 다녔다. 그 때 마을 구판장에서 청년회 회원들과 술을 마시다가 장난삼아 했던 말이 씨가 되어 경매로 날아갈 그 논을 우연히 사게 되었다.
-땅을 팔 생각이 있어?
-아니. 장로님이 팔 생각이 있으면 장로님 땅을 내가 더 사려고.
내 농담에 둘은 웃었다.
-장로님께서 오시니 대접할 게 없네. 커피 밖에는........
술을 먹지 않는다고 비꼬는 투였다. 옛날에 말바우에 살 때에는 술을 많이 마시고 주사도 심했던, 나 보다 겨우 한 살 많은 친구다. 그러나 장로가 되고부터 칼로 무 자르듯이 술과 담배를 딱 끊은 위인이다. 그렇지만 커피 한 잔으로 때우고 그냥 보내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섭섭했다. 거절할 줄 알지만 한 번 청했다.
-나도 출출한 시간이네. 어디 가서 딱 한 잔만 하지?
-안 돼. 올라가서 할 일이 남았어.
술자리를 피하기 위한 핑계라는 걸 안다. 그러고는 바로 커피 잔을 놓고 자리를 먼저 털었다. 마주앉아 안부를 묻고 농사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시간은 채 오 분이 되지 않았다. 마당으로 내려와 차를 돌리는 걸 보며 잘 가라고, 애써 농사를 지어서 쌀을 주어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보니 치우던 낙엽이 바람에 흩날려 온 마당에 흩어져 있었다.
낙엽을 대충 치우고 집으로 올라가 손과 얼굴을 씻었다. 그리고 복도 구석에 쌓인 쌀 포대를 보니 마음이 뿌듯하다. 우리 식구가 먹으면 일 년 식량으로 충분하지만 쌀을 일 년 동안 그대로 두고 먹을 수가 없다. 겨울이 지나면 쌀벌레가 생기기 때문에 맘에 맞는 이웃, 친지들과 나눠먹고 모자라는 기간은 새로 찧은 쌀을 사서 먹곤 한다.
쌀을 보면 항상 어린 시절, 그러니까 60년대의 배가 고프던 시절이 떠오른다. 그 때를 생각하면 쌀은 성스러운 물건이다. 그 때 배고픔을 생각하면 다른 먹을거리는 괄시를 해도 괄시할 수가 없는 게 쌀이다. 쌀은 거룩하다. 농촌에서 자란 나는 쌀 한 톨이 어떻게 생산되는지 똑똑히 알고 있다. 농사짓는 과정을 일일이 다 열거하기 어렵지만 쌀 한 톨을 만들기 위해 어떤 고생을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으며 쌀을 무시하면 삼 대가 빌어먹는다는 말을 할머니로부터 듣고 자랐고 어린 시절 논에 들어가 모내기를 해보고 타작까지 해본 나는, 쌀을 보면 거룩함을 느낀다. 쌀은 그냥 나는 것이 아니다. 지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피땀이 필요한 작물이다. 그 피땀이 먹을거리로 거룩하게 태어나는 것이다. 한마디로 명제를 내리자면 쌀은 거룩하다. 그렇다.
차에 두 포대 실어놓은 쌀은 특별한 쌀이다.
바로 외갓집에 갖다 드릴 쌀이다. 해마다, 논을 사고부터는 해마다 쌀을 받으면 외갓집에 갖다 드리곤 했다. 차에 두 포대를 실어놓고 앉아 있어도 마음이 든든하고 반가워하실 외숙모의 얼굴이 떠오른다. 뿌듯한 마음으로 느긋하게 담배를 한 대 피운 나는 타이어 가게에 내기 바둑을 두러 갈 것이 아니라 외갓집부터 다녀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외가는 손이 번성한 집안이 아니다. 외조부는 내가 초등학교 이 학년 때 돌아가시고 외조모는 그 이듬해에 돌아가셔서 얼굴도 모른다. 일흔이 넘은 외삼촌은 외동이다. 이모님이 한 분 계시기는 하나 수녀님이 되어 전국의 여러 성당을 돌다가 지금은 베트남에 계신다. 그 곳에서 성직자로 선교활동을 하고 계신다. 외동인 외숙부는 삼남매 외사촌 동생들이 장성하여 다들 살림을 내주고 두 분이서 단출하게 사신다. 외갓집은 그리 멀지 않다. 마음만 먹으면 차로 이십 분이면 족하다. 지금은 도시의 변두리가 되어 이 작은 도시의 이쪽 끝과 저쪽 끝에 살고 있지만 무엇에 바쁜지 외가에 그리 자주 찾아뵙지 못한다. 아무리 적당한 핑계를 대도 정성부족이 아니면 성의결여다. 그 점을 항상 죄스럽게 생각하며 겨우 일 년에 쌀 두 포대 갖다 드리고 명절에 인사하러 가는 정도다. 명절인사도 매번 가는 게 아니라 어떨 때는 전화로 때울 때도 있다.
오늘은 외숙모와 외숙부께서 집에 계실까?
전화를 해보려다가 그냥 출발했다. 작년에는 쌀을 한 포대 밖에 드리지 못했다. 그 포대가 반가마니짜리인줄 알았는데 이십 킬로그램짜리 작은 포대였다. 그 사실을 저녁에 아내로부터 듣고 알았다. 반가마니가 되려면 두 포대를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아내의 타박을 듣고 알았다. 아차! 했지만 늦었다. 그 날은 마실을 가셨는지 아무도 없는 외갓집 마루에 그 쌀 한 포대를 올려놓고 왔는데 아내는 집에 남은 쌀 포대를 헤어보고 왜 하나만 가져갔냐고 따져서 그게 이십 킬로인 줄 알았다.
그날 저녁에 마실에서 돌아와 마루에 놓인 쌀 포대를 보신 외숙모는 그 쌀이 누가 갖다 놓았는지 금세 알고 저녁에 전화가 왔었다.
-아이고, 오늘 생질이 왔다갔는갑네.
수화기를 들자 컬컬하고 호탕한 외숙모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외숙모께선 반갑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외숙모의 성격은 호탕하다. 그에 걸맞게 컬컬한 목소리에 욕도 잘하고 반면에 잔정도 많으신 분이다.
-집에 아무도 안 계시기에 그냥 마루에 놓고 왔는데 아이 엄마한테 한소리 들었습니다.
-왜에?
-그게 반가마니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십 킬로짜리라고 하네요. 저는 몰랐습니다. 죄송해요, 외숙모!
-죄송하긴........ 바로 옆집에서 할망구들과 십 원짜리 고스톱을 하고 놀았는데 오랜만에 온 생질을 보지도 못 하고 맨입으로 보내서 어떻게 하나?
-잘 노시네요. 그렇게 노세요. 아이들과 노인은 그저 건강하게 잘 놀기만 하면 칭찬받을 일이예요.
-그런가? 하하하. 맞다. 근데, 생질부 옆에 있어?
외숙모는 아내를 찾았다. 나보다 아내와 더 친하고 잘 통한다. 나는 아내를 바꿔주었다. 외숙모와 아내는 죽이 맞다. 할 말이 많은 사이다. 묵은 이야기와 최근 이야기를 섞어 외숙모는 아내와 거의 삼십 분이 넘게 통화를 했다. 아내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오랜만에 외가에 들리며 고기라도 한 칼 끊어 가지.’라며 밉지 않은 힐책했다. 그게 바로 작년의 일이다.
오늘은 그런 실수를 않게 일찌감치 쌀 두 포대, 반가마니를 차에 실었으니 드리고도 죄스러운 작년과는 돌아오는 기분이 다르겠다.
외가에 쌀을 드리는 것에 대해 그 역사를 얘기하자면 대를 이어야 한다. 마흔여섯에 요절하신 어머님은 내 어릴 적에 외가에 가시는 날이면 늘 쌀을 가져가셨다. 가을걷이를 끝내고 외할아버지 제사가 되면 흰 자루에 쌀을 담았다. 다섯 되를 담았다가 다시 반 되를 뺐다가 다시 한 되를 더 담았다가 머리에 이고 갈 만큼 그 무게를 가늠했다. 어머니의 그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고 있는데 그러시는 어머니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그 땐 쌀이 귀하던 시절이었다. 어쩌면 어머니는 이고 가실 무게를 가늠하는 게 아니라 외가에 퍼주고 쌀독에 남을 쌀의 양을 가늠했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시어머니인 할머니의 눈치를 봐 가면서 쌀을 담았다가 들어냈다가 다시 담는 심정이 어땠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다.
내 고향 해평에서 외가까지는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 지금 차를 가지고 산업도로를 달리면 삼십 분이면 족하지만 당시의 교통수단으로는 하루가 걸리는 거리였다. 십 리 길을 쌀을 이고 걸어서 강가에 닿아 나룻배로 낙동강을 건너고 또 신작로까지 걸어가서 버스를 타고 역에 내려서 또 십 리를 쌀을 이고 걸어야 외갓집 삽짝에 닿을 수가 있었다. 얼마나 멀고 험난한 친정나들이였을까? 결코 녹녹치 않은 행보였을 것이다. 어린 마음에도 어머니가 애처로워 따라가겠다고 때를 쓰지 못했다. 나는 당시에 눈치가 빤한 아이였던 모양이다.
쌀자루를 이고 나루터를 향해 가던 어머니의 뒷모습을 떠올리면 숙연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운전을 하면서 어머니의 그 뒷모습을 떠올리고 곧장 숙연해지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일찍 여윈 어머니의 모습은 항상 눈물 속에 살아있다. 어머니의 모습은 곧장 눈시울이 붉어지는, 제어할 수 없고, 주체할 수 없는 본능적인 행위로 연결되는 것이다. 신호를 받으면서 한 손으로 붉어진 눈시울을 훔쳤다. 가급적이면 운전을 하면서 어머니를 생각하지 않는 게 좋다. 그 옛날 쌀자루를 이고 친정으로 향해 걷고 걷던 어머니의 심정이 지금 쌀자루를 신고 외갓집으로 향하는 내 심정과 비슷했을까? 아침나절에 출발해서 걷고 걸어 해거름에 외가에 닿으려면 얼마나 허기가 졌을까?
가급적이면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말자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사유는 자꾸 어머니에게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오늘따라 왜 이러지? 운전하기가 곤란하다. 생각을 떨쳐버리려면 자꾸 어머니의 뒷모습이 떠올라 운전에 집중할 수가 없다. 나는 할 수 없이 핸들을 꺾어 길가의 분수 공원의 주차장으로 차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시동을 끄고 내려 나무 벤치에 가서 앉았다.
벤치에 앉아 담배를 한 대 빼물었다.
분수가 나오지 않고, 낙엽만 뒹구는 썰렁한 분수공원 저쪽에 노인들이 앉아 무슨 얘긴가 나누고 있었다. 노인들을 외면하고 눈시울을 훔친 나는 속으로 한마디 중얼거렸다.
-어머니! 저 외가에 쌀을 가져가요.
어디에선가 나를 보고 계실 어머니를 향해 중얼거렸다.
그 옛날, 어머니는 외할아버지 제사를 위해 외가에 가면서 몇 번이나 쉬어 갔을까? 쌀자루를 이고 한 손에는 옷이 든 보따리를 들고 얼마나 걷고 또 걸었을까? 그러면서 집에 남은 쌀독을 쌀을 또 얼마나 헤아렸을까? 그 당시에는 절미통이라는 게 있었다. 푸른 플라스틱으로 만든 통인데 밥을 하기 전에 쌀 한 숟가락을 퍼 담아 절미하라고 정부에서 제공한 통이다. 어머니는 밥을 지을 때마다 한 숟가락의 쌀을 절미통에 집어넣는 것이 눈에 선하다. 그 만큼 쌀이 귀한 시절이었고 하얀 쌀밥은 평상시에는 언감생심 꽁보리밥을 주식으로 삼던 시절이었다. 하얀 쌀밥은 제사나 명절 때만 먹을 수가 있었다. 그나마도 양식이 떨어질 성 싶으면 멀건 죽에다가 밀가루 국수를 넣고 나물을 듬성듬성 썰어 넣은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닌 것을 우리는 ‘갱시기’ 라고 불렀다. 그 갱시기가 저녁이 되는 날도 많았다. 당시에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농토가 있어 농사를 좀 짓는다는 우리 집에서도 그랬으니 농토가 없이 머슴살이하는 집에서는 오죽했을까? 요즘 아이들에게 그 시절 얘기를 하면 ‘라면 끓여 먹으면 되잖아, 그렇게 낭창하게 대꾸할 것이다. 그게 결코 오래된 일이 아니다. 70년대 중반까지는 그랬다. 70년대 중반에 들어서서 소득증대를 범국가적으로 외치면서 통일벼를 개발하고 농촌지도소에서 그 개량품종을 적극 장려했던 시절이 있었다. 쌀이 그 만큼 귀했으니 돈은 얼마나 귀했겠는가?
비교적 일찍 철이 든 나는 그런 일이 없었지만 또래들 중에는 그 귀한 쌀을 퍼다 주고 과자와 바꿔먹는 일이 허다했다. 우리는 그것을 ‘쥐잡기’ 라고 불렀다. 쌀을 자루가 아닌 책보에 싸서 구멍가게에 가져가면 양을 따져서 돈으로 쳐주는 곳이 허다했다. 마을 구멍가게는 물론이요 문방구에서조차도 그런 짓을 관행처럼 행했다. 쌀을 가져가면 어린 녀석이 이런 짓을 한다고 나무라기는커녕, 환대를 받을 수가 있었다. 또 군것질할 게 없어서 쌀을 한 줌씩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생쌀을 먹는 아이들도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생쌀을 먹는 아이들을 보고 놀려댔다. ~에이 생쌀을 먹으면 엄마가 일찍 죽는대요~ 하며 놀려댔다.
‘쥐잡기’ 한창이던 그 시절, 동네 엄마들은 누가 ‘쥐잡기’를 할까봐 밥을 하기 위해 쌀독에서 쌀을 퍼고 쌀독을 쌀을 매끈하게 손바닥으로 문질러 이름을 쓰거나 특이한 그림을 그려서 아이들이 ‘쥐잡기’를 못하도록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 어머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건 어린 시절 이야기고 간이 좀 커서 고등학생쯤 되면 ‘쥐잡기’를 책보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집에 아무도 없는 날 곳간 앞에 경운기를 돌려대 놓고 벼를 한 가마니씩 싣고 방앗간에 갖다 팔아서 그 동안 밀린 외상값을 갚는 친구도 있었지만 산업화 사회로 변하면서 먹을 게 흔해지고부터는 더 이상 아이들을 쌀독에 눈을 들이지 않게 되었다.
아무튼 엄마가 외할아버지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집에서 이고 가는 쌀은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외가에 가져다주던 쌀은 대를 이어 삼십 년이 지난 지금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 차에 마음 놓고 두 포대를 실어다주는 시대로 변했다. 그러나 심정만은 그 옛날의 쌀자루를 이고 나루터로 향하던 어머니의 마음이다.
마음을 추스르고 담배를 다 피운 나는 다시 차의 시동을 걸었다. 분수 공원을 빠져나와 대로로 나섰다. 길이 막히지 않는 시간이라 금세 외갓집 대문 앞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안에 누가 계시는지 파란색 낡은 대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차의 시동을 끄고 트렁크를 열고 쌀 포대를 들고 낑낑거리며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 앞에 쌀 포대를 놓았다. 인기척을 들은 사람은 바로 큰방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계시던 외숙부였다.
-아이구, 이 사람아! 해마다 무신 쌀이고? 여보! 생질이 쌀 가져왔어.
외숙부는 건넌방에 대고 소리쳤다.
건넌방에 누워계시던 외숙모가 마루로 나와서 반갑다는 표정이 역력한 얼굴로 얼른 올라오라고 했다.
잠깐만요! 하고는 다시 대문 앞으로 나와서 트렁크에 실린 나머지 한 포대를 안고 들어갔다.
-무신 쌀을 이렇게 많이 가져 왔노?
마루에 선 외숙부께서 타박하듯이 말씀하셨다.
-아닙니다. 이건 작은 포대입니다. 요즘은 들기 좋도록 포대가 이렇게 나오는 모양입니다.
현관을 내려선 외숙모의 손에 이끌려 큰 방으로 들어갔다. 텔레비전에서는 정치권 얘기가 나오고 있었다. 야당 후보와 무소속후보의 단일화에 대한 얘기다. 나는 가급적이면 정치에 대해서 무관심해지려고 한다. 누가 되어도 똑 같다는 게 내 지론이다. 관심을 가지면 정치가 주는 스트레스가 대단하다. 정치에 관심이 없으면서 외숙부께 인사치레로 텔레비전을 보며 물었다.
-이번에는 누가 될 거 같습니까?
-야당 후보와 난데없이 나타난 무소속 후보가 저렇게 단일화를 해서 여당의 준비된 후보를 죽이려하니 나도 잘 모르겠다. 어떤 변수가 생길지.
-외숙부님께서는 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까?
-그러는 너는 누가 되었으면 좋겠냐?
-아직 결정을 못했습니다.
-대선이 한 달 정도 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직 결정을 못했다고?
외숙부는 핀잔과 함께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말문을 열었다.
-너도 야당을 맹신하는 모양이구나. 정권이 바뀌어야 한다고 젊은 것들이 떠들고 있지만 그것 잘 몰라서하는 소리야. 또 무조건 야당만을 지지하는 젊은 것들은 굶어보지 않아서 그래. 그런 녀석들은 똥구멍이 찢어지도록 먹을 게 없어서 배를 곯아봐야 세상을 알게 되지. 우리나라가 이렇게 먹고 살도록 만든 게 누구냐?
나는 말없이 텔레비전을 껐다. 대답을 기다리는 질문이 아니라는 걸 안다.
-바로 여당 후보의 아버지 박정희야. 그 양반은 장기집권과 유신으로 욕을 먹고 있지만 지역감정을 만든 인물이 아니야. 지역감정을 조장하여 경상도다, 전라도다 편을 갈라놓은 사람은 정작 허울 좋은 민주를 위장한 김대중이지. 물론 고인이 된 사람들을 욕하자는 게 아니야. 김대중이가 지역감정의 최대 피해자이자 최고의 수혜자지. 따져보면 그렇잖아. 얼마나 심했으면 아들까지 국회의원을 그렇게 여러 번 해먹을 수가 있겠냐. 이 나라를 먹고 살도록 초석을 닦은 사람은 박정희야. 얼마나 깨끗했냐? 국가관을 지닌 사람이야. 그 딸이 대통령을 한 번 해도 돼. 순전히 내 생각이다만 야당후보와 무소속으로 나선 후보가 저렇게 단일화해서 여당후보를 이기겠다고 하는 것도 정작은 민주적인 사고가 아녀. 더러운 정치판의 야합이지.
-외숙부께선 여당 여성후보를 찍겠다는 말씀이군요.
-당연하지. 우리 국민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진 빚이 많아. 이 정도로 먹고살도록 만든 사람이 바로 박정희야. 그 딸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줌으로 그 빚을 조금이라고 갚아야 하는 거야.
거기까지 얘기하고 있을 때 외숙모께서 커피와 단감을 깎아서 내왔다. 외숙모는 단감이 실하게 달려서 달다고 하면서 입맛을 다셔보라고 했다. 나는 쟁반에 담긴 감 한 조각을 찍어서 외숙부께 내밀었다. 외숙부는 감을 받아들고 다시 말을 이었다.
-척박하고 황량한 대지에 경제의 씨앗을 뿌리고 싹을 틔우고 열매가 달리도록 만든 사람은 바로 박 대대통령이야. 그 다음 대통령들은 그 다음 대통령부터는 그것을 따먹고 모자라서 나라를 잡히고 이채만 잔뜩 빌려서 썼지. 한 게 뭐 있냐? 너 지금 우리나라 외채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 있냐?
-정확히는 모르겠는데요.
-천문학적인 액수야. 나도 정확히 모른다만 애들이고 노인이고 국민 한 사람당 일억 이천 만 원이 넘는다고 하더라. 결국은 누가 갚아야 할 돈이냐? 국채보상운동에 실패해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지 아직 백 년이 되지 않았는데 정신 못 차리고 외채 중독증에 걸려있으니....... 나라꼴이 어떻게 되려는지........ 외채를 전직 대통령이 갚겠냐? 무조건 빌려다 쓰면 장땡으로 생각하고 있어. 군부독재 정권이라고 해도 그 사람은 국가관을 가지고 있었다. 국민의 아픔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야. 일례로 그 사람이 바로 요 앞에 있는 지산 앞들에 온 적이 있었다. 그 때 별 두 개를 달고 왔었지. 내가 중학에 다닐 때였어. 물구경을 갔었지. 그 때 가을을 해서 나락을 베어서 논에 마르라고 눕혀 놓았는데 가을 태풍에 홍수가 져서 그 나락이 둥둥 떠내려가는 거야. 마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옷을 입은 채로 가슴팍까지 물이 차오르는 논에 들어가 벼를 건지기에 바빴다. 그래봐야 얼마나 건지겠냐? 그냥 몸부림치는 거지. 다 지어놓은 농사가 그 모양이니 환장할 일이 아니겠냐? 그 양반은 별 두 개를 달고 군용 짚을 타고 와서 그 광경을 똑똑히 보고 이빨을 굳게 물고 돌아갔어. 그 해 겨울에 어떻게 되었는지 아냐?
-제가 태어나기 전에 일 같습니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외숙부의 말을 끊지 않았다.
-물론 네가 태어나기 전이지. 그 해 겨울에 군용 불도저와 덤프트럭을 보내서 지산 앞들에 제방을 쌓았다. 지금 있는 제방이 그 때 쌓은 거야. 낙동강의 모래를 밀어붙이고 퍼다 날라서 제방을 만들고 홍수 때는 물을 뺄 수 있도록 배수장을 만들었지. 물론 자기 고향이라고 그런 것이 아니야. 자기가 눈으로 나락이 떠내려가는 걸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야. 좀 비약적인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네가 지금 쌀을 이렇게 가져 올 수 있는 것도 그 양반 덕분이라고 생각해. 국민 입에 밥이 들어가게 해준 사람이 바로 그 양반이야. 정치에 대해서, 아니 국민에 대해서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었지.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경부고속도로를 놓을 적에 김대중 김영삼이 어떻게 지랄했는지 아냐?
-글쎄요.
-없는 돈에 고속도로를 놓으면 나라 망한다고 국회에서 밥도 안 처먹고 데굴데굴 구르며 시위를 했어. 그 돈은 외채를 끌어다 쓴 돈이 아니었어. 월남전에 가서 피를 팔고 벌어온 돈이야.
그 말을 끝으로 외숙부는 커피를 마시며 입을 축였다. 외숙부는 월남전 참전 용사다. 이젠 몇 번이고 들은 월남전에서 얘기할 차례다. 외숙부의 이야기 말미에서는 살아서 돌아온 월남전으로 막을 내린다는 걸 알고 있다.
-당신 또 월남전 얘기하려고 하죠?
월남전으로 들어가는 이야기를 외숙모께서 그 꼬리를 잘랐다.
-한국전은 내가 너무 어려서 그 내막을 잘 모르고 월남전에는 직접 총을 들었으니 아는 게 월남전이야. 남자들 정치 얘기하는데 왜 끼어들고 난리야.
외숙부께서 외숙모에게 퉁을 먹였다.
-우리 집도 살 게 된 건 내가 월남전에 다녀온 덕이야. 아무튼, 박정희 그 사람 보통 대통령이 아니야. 진짜 국민을 생각하는 국가관을 가진 사람이야. 그 분이 일궈놓은 일이 얼마나 많으냐? 한 가지 예를 들어 새마을 운동만 해도 그래. 나라를 확 바꾼 범국가적인 운동이 아니었냐? 아직까지도 시청에는 새마을과가 있고 그 새마을을 세계 각국에서 개발도상국들은 따라하려고 난리지만 박정희 같은 인물이 없어서 잘 되지 않고 있어. 영웅반열에 올려야 돼. 어떤 방법으로 정권을 잡았든 간에.
-외숙부님께선 모든 게 훤하시네요. 국내 정세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것까지........
내가 추임새를 넣었다.
-할 일이 뭐있냐? 텔레비전보고 있으면 대충 감이 잡힌다. 너는 민주노총이다, 한국 노총이다,하며 노조활동을 하는 것을 잘하는 짓이라고 생각하냐?
-글쎄요. 없어서는 안 될 단체죠.
-네 말이 맞다. 없어서는 안 될 단체이긴 하지만 너무 과격해. 민주노총이 들어가서 안 망한 회사가 있느냐? 민주노총이 설쳤다하면 그 회사는 삼 년 안에 망하게 되어 있어. 자본가가 투자자가 설 자리가 없도록 만들어버리는 단체야. 결국 투자심리를 위축시키고 아이들 취직자리가 없어지는 거야. 취업이 취업대란이라는 말이 나오도록 만든 데 노총이 한 몫을 톡톡히 한 셈이지. 지금 누가 공장 짓고 사업을 벌리냐?
나는 노조에 가입해 본 적도 없이 자영업을 하지만 대답이 궁해졌다. 아무래도 일어날 때가 된 모양이다. 그러나 외숙부의 말씀 중간에 일어선다는 건 언감생심이다.
-골수 좌파가 너무 설치는 세상이 되었어. 박정희가 있었으면 노조도 적정수준을 찾아서 선을 딱 그어서 해결했을 거야. 기업도 죽이지 않고 노조도 살리고....... 정말 민주적인 세상을 만들었을 거야. 지금 야권 후보와 무소속후보가 저렇게 단일화를 외치고 안 되면 내일 둘이서 대면해서 단판 짓는다고 하더라만 팽팽하게 대립하다가 한 명이 사퇴할 것 같아. 지난 번 서울시장 선거 때처럼.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제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단일화가 안 되지 싶은데요.
-저만큼 국민한테 약속한다고 했으니 모를 일이지. 단일화가 되던 안 되던 박정희의 신드롬이나 향수가 있으니까, 박근혜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거야. 배가 고파본 사람들은 다 안다. 박정희가 우리 국민들 배고프지 않게 초석을 깔았다는 것을.
그 말을 끝으로 외숙모가 나섰다.
-이렇게 늙었어도, 외삼촌 말씀이 틀린 것 없어. 생질! 나는 생질이 가져오는 쌀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어. 옛날에 성님이 아버님 제사 때 쌀자루를 이고 오는 것 같아. 동네사람들에게 생질이 해마다 쌀을 준다고 자랑을 했더니, 누가 그런 생질이 있냐고 하더라고. 배가 고파본 사람은 쌀이 얼마나 반가운지 알 수가 있어. 생질이 자져온 쌀을 보면 옛날 배고프던 시절에 쌀자루를 이고 삽짝을 들어서던 성님이 생각나서 눈물이 나려고 그래여. 그 쌀자루를 이고 걸어오느라 얼마나 힘이 들고 땀을 흘렸는지 몸에서 쉰내가 날 지경이었어. 그렇게 고생을 하시고 우리가 살만해 지니까 또 그렇게 일찍 가셨으니........
-저도 어머님이 쌀자루를 이고 골목을 나서는 모습이 아련합니다.
외숙모의 말씀이 어머니에게 기울어지자 또 가슴이 뭉클했다.
-생질이 가져온 쌀은 그대로 두었다가 다음 주에 있는 아버님 제사상에 메로 지어 올려야겠어. 그냥 쌀이 아니라 성스러운 물건이니까. 아버님 제사에 먼저 드리는 게 도리지.
-다음 주에 외할아버지 제삽니까?
-올해는 제사가 좀 늦쟈? 윤달이 끼어 있어서 그랴!
-외할아버지 제사가 며칠입니까? 성의가 부족해서 제삿날도 모르고 있었네요.
-시월 초하룻날 밤이여.
나는 외숙부의 어깨너머 바람벽에 걸린 새마을 금고에서 나온 달력을 보았다. 음력이 크게 표시되어 있는 달력이었다. 시월 초하루면 딱 일주일이 남았다.
-이번에는 외할아버지 제사에 한 번 참석해보아야겠네요.
-너는 외할아버지 얼굴도 모르지?
외숙부께서 물으셨다.
-제가 초등학교 이 학년 때 돌아가셨으니 키가 장대하시다는 것 외에 얼굴은 기억이 없습니다.
-생질이 가져온 쌀로 메를 지어 올리면 아버님께서 좋아하실 거다. 그쟈?
외숙모의 말에 생각난 게 있었다. 바로 밀감이었다. 작년에 노후 대비로 제주도에 조그만 밀감농장을 샀다. 제주도에 흘러들어가 농사를 짓고 있는 고등학교 후배 녀석의 소개로 샀는데 그 밭의 밀감농사를 후배가 짓고 있다. 어제 우리 밭에서 생산된 밀감을 수확해서 다섯 박스 택배로 보냈다고 했는데 내일쯤 도착할 것이다. 제삿날 고기를 한 칼 끊어서 밀감 한 박스를 들고 오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외숙부는 이야기를 다시 정치권으로 돌렸다. 심심하던 차에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마음 놓고 할 상대를 만났다는 듯 했다.
-이번 선거는 아무래도 박근혜와 야당후보의 대결이 아니라 박정희와 노무현의 대결 같지?
-야권 단일화가 된다면 딱 그런 구도로 변하겠지요.
그 말끝에 외숙모가 나섰다.
-누가 되어도 똑같아 박정희 같은 인물을 없을 걸.
-박정희 딸이 되면 모를 일이죠.
농담조로 내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나 외숙부께서 한숨 같은 한마디를 뱉었다.
-박정희 같이 국가관을 지닌 인물이 되면 좋겠는데........
-저는 박근혜가 말한 사 년 중임제를 채택하겠다는 공약이 마음에 듭니다. 오 년 단임제는 너무 짧아요. 적어도 팔 년의 안목을 지니고 대통령을 해야죠. 국가의 미래를 볼 수가 있죠.
-박정희는 경제개발 오계 년 계획을 세울 적에 이십 년 앞을 내다봤다. 그런 안목으로 국가를 살렸어. 지금은 외채가 너무 걱정이다. 오 년 단임제 하니까 너도 나도 마구잡이로 빌려 쓰고 보는 거야. 누가 갚을 돈인데........ 국민들도 외채 불감증이야. 외채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곗돈 취급하고 있어. 요새 사람들은 쌀 귀한 걸 몰라. 박정희는 쌀을 가장 중하게 여겼어. 모내기할 적이면 바지를 걷고 모를 심었지. 그리고 추수할 때도 밀짚모자를 쓰고 논에 들어갔어.
외숙부의 이야기는 다시 쌀로 돌아갔다.
-그 땐 농경사회였으니 그럴 수밖에요. 그러자 외숙모는 쌀에 대해서 거들었다.
-나는 며느리가 오면 밥을 내가 앉힌다. 요즘 젊은 것들은 쌀을 씻으면서 얼마나 흘리는지........ 얼마나 귀한 쌀인데, 쌀이 아까운 걸 몰라.
-옛날에는 부뚜막에 절미통이라는 게 있었지요.
-생질이 그런 걸 기억해?
-알죠. 어머니가 밥을 하기 전에 한 숟가락씩 떠서 정성들여 모으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땐 한 톨이라도 절약해야 했어.
회상에 잠긴 듯 앉아계시던 외숙부계서 한마디 거들었다.
-쌀은 거룩한 것이다. 쌀을 무시하면 삼 대가 빌어먹어.
나는 그 말에 전율했다. 어릴 적에 할머니께 자주 듣던 말이었다. 그렇다. 쌀은 거룩하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바람벽에 걸린 달력을 보고 외할아버지 제삿날을 다시 꼽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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