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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20년 병진(1796) 3월 26일(임신) 양력 1796-05-03
20-03-26[04] 문열공 조헌의 시호를 다시 의논하라고 명하다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이 아뢰기를,
“선정신(先正臣) 조헌(趙憲)은 도학(道學)의 연원으로 문묘(文廟)에 배향하자는 논의까지 있었으니, 그가 순절(殉節)한 것은 다만 그것을 미루어 행한 것일 뿐입니다. 같은 때 사람으로 고(故) 상신(相臣) 유성룡(柳成龍)과 증(贈) 판서 김성일(金誠一)은 모두 ‘
도덕박문(道德博聞)’의 ‘문(文)’을 시호로 얻었습니다. 그런데 선정신은 ‘
근학호문(勤學好問)’의 ‘문(文)’ 자와 ‘강극위벌(剛克爲伐)’의 ‘열(烈)’ 자를 얻었으니, 이는 마치 사람들을 따라 전사(戰死)한 절개를 포상하고 증직한 것처럼 되었으므로 사문(斯文)이 불행으로 여기고 사림(士林)이 수치로 여긴 지 오래되었습니다. 바야흐로 성상께서 문(文)을 숭상하고 어진 이를 본받게 하는 이때에 이와 같은 유감스러운 전례(典禮)는 의당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고사로 말하더라도 문청공(文淸公) 정철(鄭澈)은 처음 시호가 문개(文介)였는데, 고 상신 문충공(文忠公) 김수항(金壽恒)이 반박하고 건의하여 시호를 고치기까지 하였으므로 지금까지도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선정의 시호도 마땅히 다시 의논해야 합니다.”
하자, 주상이 대신(大臣)에게 물으니, 여러 신하가 이견이 없으므로 우의정의 말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증 참의 이사룡(李士龍)의 서원은 성주(星州)에 있습니다. 고 참의 안방준(安邦俊)이 목사로 있을 때 그 유허(遺墟)에 창건하였고, 그 후 고 판서 오도일(吳道一)이 그 비문을 지었습니다. 다만 그의 신분이 미천한 탓에 아직껏 표창하는 조치가 없었습니다. 본관으로 하여금 봄가을로 제수를 갖추어 보내 주게 한다면 또한 풍교(風敎)를 세우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하니, 주상이 말하기를,
“만약 이사룡 한 사람이 없었다면 천하에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경의 말대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증 판서 최효일(崔孝一)에게 시호를 내렸습니다. 그의 손자 최성렬(崔性烈)이 마전 군수(麻田郡守)로 있는데 그 고을의 물력으로는 연시(延諡)를 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해당 조에 분부하여 평안도의 걸맞은 자리와 서로 바꾸어 주게 해서 그로 하여금 관아에서 연시하게 함으로써 평안도의 인사를 격려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신이 첫 번째 연석에서 나이가 젊고 경서를 깊이 연구한 선비들을 북돋워 주고 장려하여 등용하는 일로 아뢰었습니다. 고 참판 김양행(金亮行)의 손자 김직순(金直淳)과 고 찬선 송명흠(宋明欽)의 손자 송계간(宋啓榦)은 경학에 대한 식견과 훌륭한 행실이 사우(士友)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좋은 가문에 이런 사람들이 있는 것은 실로 성상께서 배양하신 성과입니다. 이 두 사람을 특별히 조용(調用)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옛날 계방(桂坊)의 관원으로 서연(書筵)에 출입하던 자는 지금 세 사람이 남아 있습니다. 이민보(李敏輔)는 지위가 숭품(崇品)에 이르렀고, 정존중(鄭存中) 역시 기로소(耆老所)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신광리(申光履)는 유독 중간에 영락하여 불우한 처지를 면치 못하고 있는데, 나이 또한 70이 찼으니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베푸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여, 전교하기를,
“재신(宰臣)은 궁료(宮僚)로 있을 때부터 그 사람됨을 익히 알고 있었다. 특별히 지중추부사에 제수하고, 중신(重臣)에게는 해당 조로 하여금 쌀과 고기를 실어 보내게 하라.”
하였다.
[주-D001] 도덕박문(道德博聞) : 저본에는 ‘道德博問’으로 되어 있는데, 《승정원일기》 같은 날 기사에 근거하여 ‘問’을 ‘聞’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承政院日記 正祖 20年 3月 26日》[주-D002] 이사룡(李士龍)의 서원 : 성주의 충렬사(忠烈祠)를 가리킨다. 이사룡은 성주 사람으로 1640년(인조18) 청나라의 요구에 의해 금주(錦州) 전투에 포수로 투입되어 명나라 장수 조대수(祖大壽)와 대치하던 중 실탄을 쏘지 않고 공포탄을 쏜 것이 청나라 측에 발각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仁祖實錄 19年 5月 4日》 《肅宗實錄 7年 1月 30日》[주-D003] 고 …… 창건하였고 : 안방준은 성주 목사(星州牧使)를 지낸 경력이 없으며, 채제공(蔡濟恭)이 지은 이형상(李衡祥)의 행장에, 숙종 13년(1687) 이형상이 성주 목사를 지낼 때에 이사룡의 묘에 제사 지내고 충렬사를 지어 충의를 장려하였다고 하였다. 《樊巖集 卷40 嘉善大夫慶州府尹甁窩李公行狀》 여기서 안방준이라고 한 것은 잘못인 듯하지만 우선 원문대로 번역하였다.[주-D004] 첫 번째 연석 : 윤시동이 정조 19년(1795) 12월 16일에 우의정에 제수된 이후 처음 참석한 그달 26일의 연석을 말한다. 《承政院日記 正祖 19年 12月 2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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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右議政尹蓍東啓言: "先正臣趙憲道學淵源, 至有配食文廟之議, 殉義立慬, 特其緖餘。 同時如故相臣柳成龍、贈判書金誠一, 皆得道德博問之諡, 而先正則得勤學好問之文、剛克爲伐之烈, 有若隨衆戰亡, 一節褒贈者然, 斯文之不幸, 士林之羞恥, 厥惟久矣。 方當聖朝右文象賢之時, 如此欠典, 合有商量。 雖以故事言之, 文淸公 鄭澈, 初諡文介, 故相文忠公、金壽恒, 駁議而建請改諡, 至今稱道。 先正諡號, 亦宜改議。" 上詢大臣, 諸臣無異辭, 命依右相言爲之。 又啓言: "贈參議李士龍書院, 在星州, 故參議安邦俊爲牧使時, 創建于遺墟。 其後故判書吳道一撰其碑, 特坐於其地處, 尙未有表章之擧。 若使本官, 備給春秋祭需, 亦足爲樹風聲之道矣。" 上曰: "若無李士龍一人, 則何以有辭於天下? 依卿言爲之。" 又啓言: "贈判書崔孝一, 賜諡矣, 其孫性烈, 方爲麻田郡守, 邑力難以延諡。 西關相當窠, 分付該曹相換, 使之延諡于官次, 以爲聳勸西土人士之地何如?" 從之。 又啓言: "臣於初筵, 以年富窮經之士, 扶植奬用, 爲奏矣。 故參判金亮行孫直淳、故贊善宋明欽孫啓榦, 經識行誼, 傳誦于士友間。 故家之有此等人, 實是聖朝培養之效, 此兩人, 請別例調用。" 從之。 又啓言: "昔年桂坊之人, 出入書筵者, 今餘三人。 李敏輔位至崇品, 鄭存中亦入耆社, 而獨申光履, 中間流落, 未免潦倒, 年亦恰滿七十, 恐合有優老之典。" 敎曰: "宰臣則自在宮僚, 習知其人, 特除知中樞, 重臣, 令該曹米肉輸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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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22년 무오(1798) 7월 28일(경인)
22-07-28[16] 별편 [영원백(寧遠伯) 영당(影堂)의 선액(宣額) 여부와 매년 제수(祭需) 마련에 대해, 강화 유수 신광리(申光履)가 장계를 올렸다.]
○ 강화 유수(江華留守) 신광리(申光履)의 장계에,
“영원백(寧遠伯)의 영당(影堂)에 선액(宣額)하였는지 여부 및 매년 제수(祭需)를 관에서 마련해 주는지에 대해 이치를 따져 장계로 보고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신종 현황제(神宗顯皇帝)의 기신(忌辰)을 맞아 몸소 북원(北苑)에 임하여 정성스럽게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시고, 이어 이날 윤음(綸音)을 크게 반포하였는데 이루 다 하지 못하는 풍천(風泉)의 감탄과 무한한 진령(榛苓)의 감회가 말씀 가운데 가득하였습니다. 백 년의 세월은 비록 멀지만 만력(萬曆 신종의 연호)이 이리 가까우니, 모든 보고 들은 자는 누군들 흠앙하여 감읍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훌륭하여라, 왕의 말씀이여. 운한(雲漢)이 밝게 돌고 일성(日星)이 빛남과 같으니, 천지(天地)의 떳떳한 의리가 어두워지다가 다시 밝아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성상의 감개하고 격앙하신 뜻이 차례로 말씀 가운데 드러났는데, 첫째는 송(宋)나라가 강남(江南)으로 천도한 이후의 존주(尊周)에 대한 기록을 편찬하도록 한 것이고, 둘째는 〈낙고(洛誥)〉를 지을 때 공로가 드러난 자를 기록한 일을 따르신 말씀입니다. 수백 자의 윤음으로도 천하에 만세토록 길이 칭송할 것인데, 이어 우리 효묘(孝廟)의 오매불망 복수하시려는 뜻과 숙묘조(肅廟朝)의 황단(皇壇)을 설치하여 보향(報享)한 정성 및 우리 영종조(英宗朝)의 항상 명나라를 생각하는 의리를 기리셨으니, 전성(前聖)과 후성(後聖)이 헤아리신 바가 똑같았습니다.
신종황제를 생각하여 이에 당시 으뜸가는 공을 세운 신하들을 언급하셨는데, 평양(平壤)에서 승리하여 섬 오랑캐를 두려워 떨게 하고 우리 양경(兩京 평양과 서울)과 팔도를 수복한 것은 이 누구의 공적이었습니까. 만일 성천자(聖天子)의 밝은 덕과 어짊으로 우리나라에 파견한 당당한 군사가 아니었다면 어찌 전장에서 죽을 각오를 하였겠으며, 만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의, 계책을 결정하여 무찔러 싸운 공이 없었다면 또한 어찌 섬 오랑캐를 소탕하여 나라를 회복하는 공렬이 있었겠습니까.
제독이 우리나라로 출전할 때에 영원백 이성량(李成梁)이 거듭해서 가르치고 경계한 것은 진실로 근본에 보답하여 충성을 바치라는 지극한 뜻에서 나왔는데, 제독이 수립한 공적 또한 반드시 그 아비가 아들에게 말한 한마디에 말미암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또 영원백이 막남(漠南)을 굴복시켜 우리나라를 보호한 일은 야사(野史)에 분명히 실려 있습니다. 그의 초상화가 우리나라에 온 것은 실로 우연한 일이 아니었으며, 영당에 봉안한 곳이 강도(江都)의,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가는 나룻가에 있는 것도 기이한 일입니다.
열성조(列聖朝)에서 선액(宣額)하는 조처가 없던 것은 아마도 미처 겨를이 없었기 때문일 듯합니다. 본부(本府)의 등록(謄錄) 및 본가(本家)에 전해 오는 문적(文蹟)을 살펴보면 초상화가 우리나라에 온 것은 영종조(英宗朝) 신유년(1741, 영조17) 4월이었고, 사우(祠宇)를 조성하고 급복(給復)ㆍ급결(給結)한 것도 그해에 있었습니다. 예조의 관문에 따라 본부에서 봄가을 두 정일(丁日)의 제수를 도와주도록 한 것은 신미년(1751)에 있었습니다. 사우를 조성하고 급복ㆍ급결한 것은 격례를 벗어난 특별한 은전이고 보면,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조정에서 선액하는 것도 풍성(風聲)을 수립하고 대훈(大勳)을 기록하는 성대한 은전일 것입니다.
이번에 두 통의 유서(諭書)를 받들어 왔기에 신은 고취(鼓吹)를 영솔하여 나룻가에서 공경히 맞이하였는데, 군복을 갖춰 입은 무사들은 빽빽하게 서서 뜀을 뛰고 손뼉을 쳤으며, 구경 나온 부녀자들도 모두 기뻐하면서 발을 굴렀으니, 여기에서 또한 백성의 떳떳한 본성이 없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신이 사우의 문 밖에서 편액(扁額)을 우러러 바라보니 적막하게 몇 글자는 매몰될까 두렵긴 하지만 선액 여부에 대해서는 신이 감히 우러러 청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오직 조정의 처분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주-D001] 영원백(寧遠伯) …… 올렸다 : 저본(奎12812)에는 별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강'을 생성하였음[주-D002] 영원백(寧遠伯)의 …… 명하셨습니다 : 1798년(정조22) 7월 21일 명나라 신종(神宗)의 기신을 맞아 선조(宣祖) 연간에 공로가 있던 이들을 기리는 윤음을 반포하였는데, 그 가운데 강화도에 있는 영원백의 초상화를 언급하면서 그 사당의 선액 여부 등을 장계로 보고하도록 하였다. 《正祖實錄 22年 7月 21日》 영원백은 이여송(李如松)의 아버지 이성량(李成梁)이다.[주-D003] 풍천(風泉)의 감탄 : 《시경》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이라는 뜻이다. 모두 제후의 대부가, 주(周)나라 왕실이 쇠미해진 것을 탄식해 읊은 시인데, 여기에서는 신종의 기일을 맞아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明)나라의 멸망을 서글퍼하는 심정을 말한 것이다.[주-D004] 진령(榛苓)의 감회 : 《시경》 〈패풍(邶風) 간혜(簡兮)〉에 “산에는 개암나무가 있고, 습지에는 감초가 있도다. 누구를 그리는가, 서쪽에 계신 임이로다.〔山有榛 隰有苓 云誰之思 西方美人〕” 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나라 신종의 은혜에 더욱 감사한다는 말이다.[주-D005] 송(宋)나라가 …… 것 : 정조의 윤음 가운데, 신종의 은혜를 사람들이 갈수록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대의(大義)가 날이 갈수록 어두워져, 금(金)나라에 쫓겨 강남으로 옮긴 것을 통탄한 주희(朱熹)의 말을 거론하여 《존주록(尊周錄)》의 편찬을 독촉한 것을 말한다. 《존주록》의 정식 명칭은 《존주휘편(尊周彙編)》인데, 1595년(선조28) 신충일(申忠一)을 건주위(建州衛)에 사자(使者)로 보낸 이후부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거쳐 정조가 죽을 때까지 대후금(對後金)ㆍ대청(對淸)의 전란과 교섭사 및 이와 관련된 여러 신하의 사적을 모은 책이다.[주-D006] 낙고(洛誥)를 …… 말씀 : 〈낙고〉는 《서경》의 편명으로,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의 명을 받들어 낙읍(洛邑)으로 동도(東都)를 정하고 그 복사(卜辭)를 지어 바친 것인데, 주공이 성왕에게 “공로가 높고 드러난 자를 기록하여 공로에 따라 원사(元祀)를 만드십시오.”라고 청한 구절이 있다. 여기서는 정조의 윤음에, 신종이 장수들에게 명하여 동쪽을 구원하게 한 것과 아울러 종계변무(宗系辨誣)를 바로잡은 《대명회전(大明會典)》을 내려 준 은혜를 언급하면서, 이 일에 공로가 큰 충목공(忠穆公) 유홍(兪泓) 등을 기리도록 명한 것을 가리킨다.[주-D007] 제독이 …… 나왔는데 : 《국조보감》 권31 선조 26년 조(條)를 참조하면, 이여송이 우리나라에 나올 때 그의 아버지 영원백 이성량이 글을 주기를 “조선은 바로 우리 선조의 고향이니, 너는 힘쓰라.” 하였는데, 이여송이 그 글을 접반사(接伴使)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아버님이 이처럼 분부하셨는데, 감히 귀국을 위해 힘을 다하지 않겠는가.” 하였다.[주-D008] 편액(扁額) : 《일성록》 정조 22년 7월 27일 강화 유수 신광리(申光履)의 장계에 의거하면, 계미년(1763, 영조39) 10월에 고 판서 정포(鄭宲)가 유수로 재직할 때 ‘영원백영당(寧遠伯影堂)’ 5글자를 게판(揭板)하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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