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심. 옥천희. 김귀동
교회의 밀사들,그리고 배론의 용기점 주인
황 심 : 1756〜 1801. 세례명 토마스,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
옥천회 : 1766〜1801, 세례명 요한, 서소문 밖에서 참수
김귀동 : ?~1802, 세례명은 미상, 홍주에서 참수
교회가 창설된 후 지도층 신자들이 오랫동안 노력해 온 것은 바로 ‘성직자 영입 운동’ 이었다. 목자 없이 자발적으로 탄생한 교회를 굳건한 반석 위에 올려 놓기 위해서는. 그리고 신자들이 성사의 은혜를 통하여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들을 이끌어 줄 목자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목자를 영입하기 위해서는 비밀리에 국경을 넘어 북경 교회를 왕래하여야만 했는데. 당시 교회의 밀사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이를 담당하였다.
한국 교회의 초대 밀사들인 윤유일과 지황은 주문모 신부를 이 땅에 입국시킨 뒤 용감하게 순교하였다. 그러므로 그 뒤를 이을 제2 세대의 밀사가 필요하였는데, 이때 신자들이 주문모 신부에게 천거한 인물이 바로 황심(黃沁. 토마스)이었다. 그는 ‘인철’(寅喆)이라고도 불렸으며, 자는 ‘신거’(信巨)혹은 ‘인보’(仁甫)이다.
조선 포교지와 중국 교회를 잇는 가교자들
충청도 덕산의 용머리(지금의 충남 예산군 삽교음 용동리)에서 태어난 황심은 일찍부터 그 지역에 퍼져 있던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된 뒤, 이존창을 만나 교리를 듣고는 즉시 입교하여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웃에 살던 이보현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그의 누이동생을 아내로 맞이하여 성가정(聖家庭)을 이루었다.
1793년경 서른일곱 살의 황심은 좀더 자유롭게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처남 이보현의 가족과 함께 연산(連山) 땅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2년 정도 살았을 무렵, 조선에 입국한 주문모 신부가 충청도와 전라도를 순방하며 밀사를 구하자. 신자들은 서슴지 않고 황심을 천거하였다.
사실 한겨울에 북풍이 거센 만주 벌판에서 노숙하며 . 3천 리 길을 오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사 역할을 거절하기에는 그의 신심이 너무나 깊었고. 그의 용기는 교회의 부름에 응답하기에 아주 적당하였다.
이후 황심은 1796년과 1797년, 1799년 세 차례에 걸쳐 북경을 왕래하면서 그곳에서 성유(聖油)를 받아 오거나 조선 교회의 서한을 전하였다. 그는 조선 포교지와 중국 교회를 잇는 가교자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황심은 1796년 동지사(冬至使) 일행의 마부로 처음 북경에 갔을 때, 구베아(A.deGouvea, 湯士選)주교를 만나 이(李)신부로부터 ‘토마스 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밀사로 활동하면서 황심은 두 명의 든든한 동료를 만났는데, 하나는 충청도 보령 출신으로 이존창에게 세례를 받은 김유산이었고, 또 한 명은 평안도 선천 출신으로 북경을 오가며 등짐장수를 하던 옥천희였다. 특히 옥천회는 황심이 1798년에 교회로 인도한 뒤 밀사로 활동하게 된 바로 그 사람이다. 배운 것이 별로 없었던 옥천희였지만, 황심이 설명하는 교리를 듣는 동안에는 마음이 환히 열리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이에 그는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기로 약속한 뒤 황심을 도와 북경에 가겠다고 하였다. 실제로 그의 오랜 경험은 밀사의 역할에 아주 합당한 것이었고, 황심은 이러한 동료를 만나 떨 듯이 기뻤다.
1799년 겨울. 옥천회는 황심과 함께 북경으로 가서 남당(南堂)을 찾았다. 그곳에는 구베아 주교와 여러 성직자들이 있었는데, 옥천희는 이곳에서 주요 교리를 다시 배운 다음 구베아 주교로부터 '요한’ 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 황심은 황사영의 제안에 따라 구베아 주교에게 “백서”를 전달하고자 하였으나 옥천희의 발설 로 체포되고 말았다.
황사영의 은거지를 실토 하고말아
그 동안 충칭도에서는 정사박해로 인해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순교하였다. 이때 황심의 처
남 이보현도 체포되어 1799년 12월 해미에서 매를 맞아 순교하였다. 그러나 황심은 밀사로 활동
하면서 주로 서울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1800년 7월에 그는 연산을 떠나 서울로 이주하였으며, 쌍림동에 거처하면서 황사영과 함께 교회 일을 도왔다.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황심과 동료들의 밀사 활동도 잠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박해를 피해다니면서 신자들을 돕던 황심은, 황사영이 충청도 제천 땅 배론에 숨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8월에 그곳을 방문하였다. 이때 황사영은 북경을 여러 차례 왕래하면서 그곳 성직자들과 안면을 넓힌 황심의 이름으로 서한을 보내자고 제안하였고, 9월 그몸 이전에 서한을 완성하여 그에게 주겠노라고 약속하였다. 이 서한이 바로 그 유명한〈백서〉(帛書)이다. 그리고 옥천희가 북경에서 돌아오는 시기에 맞추어〈백서〉가 완성되면, 이를 받아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옥천희는 1800년 겨울과 1801년 4월에 혼자 북경을 오가며 서한을 전달 하였고, 전교 비용으로 사용할 은자(銀子)를 받아 오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8이년 6월 북경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의주에서 관원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옥천희는 즉시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형벌과 문초를 받았는데, 이때 그는 저간의 사실들과 황심과의 관계를 발설하고 말았다. 그가 뉘우쳤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 그의 고백으로 9월 15일(양 10월 22일)에 황심이 체포되고 만 것이다.
이에 옥천희는 '이제부터라도 허물을 기워 갚기 위해 신앙을 증거하겠다’ 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그 못된 종교를 버리고, 다른 신자들의 이름을 대라”는 포도 대장의 심문에 비록 이 자리에서 매를 맞아 죽는다 하더라도 천주교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마지막으로 신앙을 중거한 옥천희는 형조를 거쳐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한편 포도청으로 압송된 황심은 황사영 한 사람 때문에 박해가 더욱 심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의 희생자가 나와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서 배론의 은거지를 실토하고 말았다. 황심의 생각은 단순한 것이었다. 그는 단순히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입혀서는 안된다는 교회의 가르침만을 생각하였던 것이다. 다행인 것은 그가 이후의 문초에서 더이상 어느 누구도 밀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9월 29일, 마침내 포졸들은 배론으로 몰려가 그곳에 있던 황사영과 동료 김한빈(金漢彬, 베드로), 집주인 김귀동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황심은 10월 10일부터 추국을 받기 시작하였는데, 그의 마지막 신앙에 대한 증거는 확신할 수가 없다.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그가 자신의 허물을 덮을 만한 용기를 보여 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그러나 이러한 아쉬움이 그가 교회의 밀사로 활동하면서 기여한 공로를 지워 버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결국 10월 23일(양 11월 28일) 모역에 동참한 죄로 능지 처사형(凌遲處死刑)을 선고받고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니, 그때 그의 나이 마흔다섯이었다.
옥천희는 황심보다 늦은 11월 5일(양 12월 10일)에 '모든 사실을 알고도 관청에 알리지 않은 죄목’ 으로 참수형을 선고받고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 서른다섯이었다.
황사영을 숨겨준 옹기점 주인
배 론(지 금의 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의 옹기점 주인으로 유명한 김귀동(金貪同)은 전라도 고산 출신으로, 천주교에 입교한 뒤 내포 지방과 청양 등지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좀더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제천의 궁벽한 산골짜기에 있는 배론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이곳에 살면서도 비밀리에 신자들과 교류하였는데, 홍주 출신의 김한빈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1801년 2월 그믐경. 김한빈은 황사영과 함께 배론으로 몸을 숨기러 왔다. 이에 김귀동은 김한빈과 함께 자신의 옹기점 뒤편에 토굴을 파고 황사영을 숨겨주었다. 당시 황사영이 이곳에 숨어 있
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김귀동과 그의 아내. 그리고 서너 명의 신자뿐이었다.
그러나 배론의 은신처가 황심에 의해 알려지면서, 9월 29일 김귀동은 황사영과 함께 체포되었다. 김귀동은 서울로 압송된 후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관원들은 그에게 석방을 약속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으나, 그는 동료들과 함께 죽기를 원한다며 이를 거절하였다. 마침내 김귀동은 홍주로 이송되어 1801년 12월 30일(양 1802년 2월 2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