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관외(關外)의 풍류인사(風流人士) 심랑은 손바닥을 마주 잡았다. "아! 알겠소. 그 음양인은 처음부터 중독되어 있었기에 쾌락왕을 만났을 즈음에는 죽을 거라는 말이지. 그건 마치 사람들이 인의장에 들어가자 마자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오." "네?...... 네......" "그녀가 그렇게 한 것은 바로 백비비를 쾌락왕의 수중에 넣어 두려는 속셈이었군." "이제는 완전히 알겠나요?" 심랑이 탄식을 하며 말했다. "난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있는데 그녀는 왜 백비비를 쾌락왕에게 넘겨준 것이오? 설마 옛날에 구천(句踐)이 서시(西施)를 부차(夫差)에게 갔다 바쳤던 것을 흉내내는 것인가?" "그럴지도 모르죠." 심랑은 또다시 탄식을 하였다. "단지 안타까운 점은 백비비가 너무 순결한 아가씨라는 것이오." 염향의 눈이 갑자기 동그렇게 커졌다. "그녀를 좋아 하시나요?" "그녀를 좋아하면 안 되오?" "되요...... 되요." 염향은 갑자기 교태를 부리며 웃기 시작했는데 거의 숨이 넘어갈 정도였다. 심랑이 계속 말했다. "나도 알고 있소. 당신들은 그 누구도 믿지 않지. 심지어 당신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 초명금과 이등룡 부부에게조차도 아직 모든 일들을 밝히지 않았으니까. 그들은 우리가 왜 왔는지도 모르고 심지어는 그들 자신들이 왜 이곳에 왔는지조차도 모르고 있으니까." "그들이 만약 알고 있다고 해요. 그 누가 그들이 이 비밀을 쾌락왕에게 누설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하겠어요? 특히 그 춘교는...... 흥! 누구든 그런 여자를 믿는다면 반드시 재수 없는 일이 생길 거예요." "그대는 어떻소?" "알아 맞춰 보세요." "난 그대를 믿소." 심랑은 갑자기 문으로 몸을 날리면서 한 손으로 문을 열어 제쳤다. 춘교가 문 밖에 서 있었다. 저녁은 푸짐했으며 술은 이름 그대로 달콤하고 감미로웠다. 초명금은 술을 조제했는데 그 모습은 마치 명의가 신중하고 엄숙하게 진맥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온 정신을 술잔에 몰두했다. 그의 옷은 비교적 되는 대로 걸친 것이었고 머리도 봉두난발( 頭難髮)이라 이대소의 옆에 서자 꼭 이대소의 하인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냉랭하고 웃음기가 전혀 없는 그의 얼굴에는 오만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만약 얼굴만 본다면 오히려 이대소가 그의 하인 같았다. 심랑은 그를 바라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난 귀하를 보기 전에는 이렇게 생긴 사람일 줄은 전혀 생각도 못했소. 내게도 술꾼인 친구가 있는데 귀하와는 전혀 틀리군요." 추명금은 차갑게 말했다. "난 술꾼이 아니오." 심랑은 눈매를 약간 치켜 올렸다. "네?" 이대소가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초형은 비록 술을 조제하는 데에는 능하지만 술맛을 볼때 외에는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죠." 심랑이 실소를 금치 못했다. "초 형께서는 술을 드시지 않으시면서 조제는 왜 하는 것이오?" 초명금의 말투는 여전히 냉랭했다. "술을 마시는 것과 조제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일이오. 술 마시는 것은 단지 유희일 뿐이지만 술을 제조하는 것은 예술이오. 단지 몇 가지 보통 술로서도 성품(聖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나의 제일 큰 즐거움이오. 그것은 마치 화가가 갖은 색채로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은 맥락이오. 귀하께서는 화가가 자신의 그림을 먹는 것을 본 적이 있소?" 심랑은 그의 말을 음미하더니 갑자기 손뼉을 치며 웃었다. "절묘한 이론이오, 정말로 절묘한 이론이군요." 춘교도 교태를 부리면서 끼어들었다. "그는 원래부터가 절묘한 사람이지요." 이대소는 술을 마실 때면 언제나 정신이 없었다. 한 잔, 또 한 잔 하면서 계속해서 정신없이 마셔대느라 그는 춘교의 발이 탁자 밑으로 해서 이 '절묘한 사람'의 바지 속으로 집어넣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심랑은 봤다. 이대소는 술을 마시는 속도가 빠르기는 했지만 쓰러지는 속도 또한 느리지 않았다. 자연히 그는 춘교가 손을 탁자 밑으로 해서 심랑의 옷소매 속으로 넣는 것 또한 봤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염향은 봤다. 그녀는 갑자기 코웃음을 쳤다. "정말로 아깝군요." 춘교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뭐가 아깝다는 거죠?" "사람이 단지 두 개의 손과 두 개의 발만 있으니 너무 모자란 것 같아서요. 예를 들어 만약 춘교 아가씨가 만약 당신에게 네 개의 손과 네 개의 발이 있다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춘교의 얼굴이 아무리 두껍다해도 이 빈정거림에는 어쩔 수 없이 얼굴이 달아올랐다. 염향은 계속해서 빈정댔다. "춘교 아가씨, 왜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는 거죠? 혹시 취하셨나요? 음, 분명히 취했을 거예요. 우리도 이제 갈 때가 된 것 같군요." 그녀는 한 손으로 심랑의 옷소매를 잡아 당기더니 결국에는 심랑을 끌고 나갔다. 심랑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대...... 그대는 왜......." "당신은 잊지 마세요. 난 지금 당신의 아내역을 맡고 있는 거라구요. 큰 마누라라도 좋고 작은 마누라라도 좋아요. 누구든 다 이렇게 일을 처리하는 거예요. 안 그러면 금방 들통나요." 심랑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을 아내로 두지 않은 것이 다행이오." 심랑과 염향이 함께 나가자 춘수가 뒤에서 욕을 퍼부었다. "음란한 여우 같으니라구, 그 새를 참을 수 없었나?" 춘교의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어느새 새파랗게 질리더니 춘수를 나무랐다. "누가 너보고 끼어 들라고 했느냐? 어서 어르신네를 방 안으로 모셔라!" "어르신네는 오늘 밤은 깨어나지 않을 거예요. 이모께서는 안심하세요." 그녀는 말을 끝내고는 곧 명주와 함께 이대소를 부축해서 연기처럼 달아났다. 춘교는 약이 올라 이를 악물었다. "요 깍쟁이가...... 요 깍쟁이가......." 그녀의 첫 '요 깍쟁이가'란 말은 별로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두번째로 한 '요 깍쟁이'란 말투는 매혹적이면서도 요염했는데 맨 처음 말한 것은 춘수를 나무라는 말이었지만 두번째로 한 말은 바로 초명금을 지칭한 것이었으니까. 그녀는 입으로는 '요 깍쟁이'라고 말했지만 몸은 벌써 초명금의 품 속에 인겨 있었다. 초명금은 냉랭하게 그녀를 쳐다 보았는데 마치 낯선 사람을 바라보듯 했다. 춘교가 교태를 부렸다. "뭘 보세요? 처음 봐요?" "처음 봤소." "아이, 당신은 양심이 있나요? 당신은 내 몸 구석구석을 수백 번도 더 봤잖아요?" 초명금은 냉소를 쳤다. "하지만 당신의 진면목은 오늘 처음 봤소." "오늘 당신은 얼음만 잡수셨나요? 왜 하는 말마다 냉기가 돌아요?"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당신은 남자라면 무조건 다 좋아하는 거요?" 춘교은 '픽'하고 웃었다. "당신은 술을 좋아하지 않는 대신에 질투하기를 좋아하는 군요. 당신은 바보예요. 내가 그 사내에게 추근거리는 것도 다 당신을 위한 것임을 왜 모르세요?" "나를 위해서라고? 흥!" "지금까지 우리 세 사람은 여기서 아주 편안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이제 그 자가 이 곳에 왔어요. 우리가 그 자를 이곳에서 몰아내지 않는다면 당신......, 당신은 조금도 초조하지 않으세요?" "당신이 바람을 피우고 싶을 때면 언제나 핑계가 많았었지." "하지만 당신은 안심하세요. 그 심가는 이미 염향, 그 불여우에게 꽉 잡혀 있어서 내가 유혹을 한다 하더라도 희망이 없어요." 초명금은 비웃는 듯이 말했다. "그래서 당신은 아주 실망이 크겠군." "내 첫 계획은 실패했지만 다행이 아직 두번째 계획이 있으니까요." "설마 그를 강간할 계획은 아니오?" "난 그를 죽이려고 해요." 초명금의 안면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를 죽이다니, 당신이 감히? 왕 부인이 알게 되면 당신은......." "그야 물론 내가 직접 죽이는 지는 않지요." "당신 날 시킬 생각은 아예 마시오." "어머나! 난 당신이 사람은 커녕 개미 한 마리 못 죽인다는 것을 잘 알아요." "당신은 누구를 시키려는 것이오?" 춘교가 천천히 말했다. "당신은 내일 누가 이곳에 오는지 잊었나요?" "당신은......쾌락왕을 말하는 것이오?" "네, 쾌락왕말고 그 누가 사람을 그렇게 쉽게 죽이겠어요? 심가가 쾌락왕에게 살해된다면 그 누가 감히 그를 위해 복수한다고 나서겠어요?" "쾌...... 쾌락왕이 왜 그를 죽이려 하겠소?" 춘교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한테 다 방법이 있으니 당신은 안심하세요. 당신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오직 나만을 안아 주세요. 꼬옥 안아주면 줄수록 좋아요. 음, 이래야 내 착한 아이죠!" 염향은 줄곧 심랑의 손을 잡고 있다가 잠깐 손을 놓고 문을 열었다. 금방 고개를 돌리니 심랑은 이미 온데간데 없었다. 그녀는 약이 올랐지만 어쩔 수 없이 이를 갈면서 그를 기다렸다. 달빛은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 들어와 마치 쪼개진 은자처럼 온 방 안에 쏟아져 들어왔다. 갑자기 창문이 열리더니 은색 달빛이 심랑을 들여보내 줬다. 염향이 이를 갈면서 말했다. "전 이제서야 비로소 아내가 집에서 밤늦도록 남편을 기다리는 심정이 정말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어요." "남편 노릇은 더욱 하기가 어렵지. 잘못하면 마누라가 금방 바람을 피우니까. 특히 남편이 자주 술을 마신다면 그의 마누라는 수없이 많은 바람을 피울 것이 아니겠소?" "당신 말대로라면 당신은 어서 웅묘아에게 절대 결혼하지 말라고 충고해 줘야겠군요. 그 술꾼이 결혼을 한다면 아마 그의 마누라는 날마다 바람을 피울걸요?" "결혼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여자를 곁에 두지 않는 것이 가장 좋소." "왜죠? 여인이 독사라도 되나요?" 심랑은 한탄을 하였다. "여인이란 비록 독사는 아니지만 모두가 괴물이오." "괴물이라구요? 여인의 어디가 그리도 이상한가요?" "여인들은 평소에는 부드러울지 모르지만 일단 누군가가 자신의 이익을 뺐는다고 판단했을 때는 금방 표범보다 더 사납고 독사보다 더 악랄해 지거든?" 염향이 '쳇!' 하고는 코웃음을 쳤다. "당신 아까 나가서 귀신을 봤어요? 무슨 헛소리예요?" "아까 나가서 귀신은 보지 못했지만 재미있는 귀신얘기는 들었지요." 염향이 앉으면서 얼굴을 붉혔다. "아이고! 알고보니 당신은 엿들으러 갔었군요? 당신. 뭘 들었나요?" "여인이여....... 아! 여인은 어째서 이런 일들에 대해서 이다지도 흥미를 느낄까? 안타깝게도 내가 들은 내용은 당신이 듣고 싶어 하는 그런 내용이 아니었소." 그는 담담히 웃고는 말을 이었다. "난 단지 누군가가 나를 죽이려 한다는 것을 엿들었을 뿐이오." 염향이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춘교인가요? 그 여편네가 미쳤나?" "사실 이건 그녀를 탓할 것이 아니지. 우리가 온 뜻을 시원하게 밝히지 않은 이상 그들이 두려움을 갖는 것도 무리는 아니니까. 만약 여인들의 의심이 없었다면 이 세상은 과연 어떻게 변했을까?" 염향이 이를 악물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좋아요, 그녀가 대체 어떻게 당신을 죽이려는지 두고 보겠어요." "그녀는 물론 직접 손을 쓰지는 않을 것이오." "누가 손을 쓰더라도 상관 없어요. 어차피......." "쾌락왕이 손을 쓴다면 어떨까?" 염향은 자지러질 듯이 놀랐다. "쾌락왕이라구요?" "쾌락왕이 내일 여기에 온다고 하오." "이...... 이를 어쩌죠? 내 당신의 이름을 그에게 말하지 안 했었는데, 심랑!...... 아! 쾌락왕이 만약 심랑이라는 이름을 들어 알고 있다면 모든 일이 망쳐질 거예요." 그녀는 갑자기 침대에서 뛰어 내리더니 옷매무새를 고치고는 밖으로 나가려 했다. 심랑이 물었다. "지금 어디를 가는 거요?" "어디라니오? 물론 그녀를 죽이려 가는 거지요." "내 말은 전혀 틀리지 않지! 여인은 누가 그에게 불리하다고 판단되면 금방 표독하게 변한다니까, 춘교도 그렇고 그대도 역시 마찬가지야!" 염향이 안타까워했다. "그녀를 죽이지 않는다면 설마 그녀가 우리 계획을 망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가요?" "그녀는 어떤 계획도 망치지는 못해요." "어떻게요?" "그녀에게 방법이 있다면 내게는 방법이 없을라구?"" "당신에게 무슨 방법이 있는데요?" "나도 여태껏 어떻게 쾌락왕에게 접근해야 하나 하고 걱정을 했었는데 이번 기회를 잘 이용한다면......." 갑자기 그는 말을 멈추었다. 심랑은 그대로 침상에 쓰러지더니 이불을 덮고는 잠을 청했다. 염향이 발을 동동 굴렀다. "어서 말하세요, 어서 계속 말하라니까요." "안돼오, 절대로 천기(天機)를 누설(漏泄)해서는 안 되지." 염향이 아무리 캐어 물어도 소용없었다. 그는 이미 잠이 들어 버렸으니까. 그는 정말로 잠이 든 것 같았다. 염향이 아무리 밀쳐도, 흔들어도 깨지 않는 것이 정말로 죽은 듯이 잠이 든 것이다. 결혼을 한 사람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잠 들은 척하는 방법이야 말로 여인을 상대하는 데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말이다. 아무리 표독한 여인이라 할지라도 이 방법에 대해서는 역시 뾰족한 대응책이 없는 것이다. 염향은 아무리 손으로 흔들고 발로 차고 또 입으로 욕을 해댔으나...... 그녀도 역시 힘이 부칠 때가 있는 법이고 그녀 또한 잠을 안 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 심랑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이른 아침이면 숲은 처아한 아침 이슬로 치장을 하고 그 의를 새들이 날며 지저귄다. 심랑은 뒷짐을 진 채로 산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모처럼 한가롭기도 하고 또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의 마음 속에 비록 천만 가지의 고민이 쌓여있다 할지라도 겉으로는 그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었다. 갑자기 매우 급한 말발굽소리가 숲 속을 가로지르며 들려왔다. 심랑이 미소지으며 중얼거렸다. "꽤나 일찍도 도착하는군." 그는 몸을 틀어 번개같이 나뭇가지를 밟고 올라 나뭇잎 사이로 내려다보니 두 필의 말이 급히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말 위의 기사는 금색꽃으로 수놓은 청색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맞바람이 불자 어깨 뒤로 검자루가 반쯤 노출이 됐는데 검자루의 붉은 수가 바람에 날려 춤추는 듯 펄럭였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니 과연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이 두 사람의 기마술은 매우 뛰어났다. 그들은 이 길에 대해서 매우 익숙한 듯 곧장 숲을 가로질러 이등룡 부부가 거처하는 작은 누각쪽으로 달려갔다. 춘교는 벌써 돌아와 있었는데 마침 비단손수건을 흔들면서 누각 위에서 수인사를 나누었다. 심랑은 멀리서 계속 바라보았다. 기사가 말에서 내리자 춘교도 누각에서 내려와서는 얘기를 나누고 웃고 하더니 무슨 말을 했는지 갑자기 기사들의 안색이 변했다. 그 중 한 사람은 마치 매서운 표정으로 외쳤다. "정말인가?" 춘교는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두 기사는 돌연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그들이 가는 방향은 바로 심랑이 거처하는 곳이었으나 심랑은 바로 그 길목에서 벌써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 두 기사가 분명 쾌락왕의 '급풍삼십육기(急風三十六騎)' 중의 두 사람이라고 판단을 했다. 과연 이들의 기마술은 무척 뛰어났으며 모두가 영준한 소년들인데다 걸음걸이나 몸짓으로 볼 때 결코 무공도 약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심랑은 아직도 춘교가 도대체 이들에게 뭐라고 했는지를 알 수 없었다. 이들은 점점 더 가깝게 접근해 왔다. 심랑은 그들이 나무 밑으로 다가왔을 때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두 분은 사람을 찾고 있소?" 그 두 사람은 깜짝 놀라 동시에 뒤로 물러서면서 검을 빼들고는 고개를 들었다. 이들의 동작은 완전히 일치할 뿐만 아니라 추호의 차이도 없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소리쳤다. "누구냐?" 그들은 곧 비스듬히 나뭇가지에 기대어 앉은 심랑을 발견했다. 연약한 나뭇가지는 아침 바람을 타고 흔들흔들 거렸고 심랑의 몸은 나뭇가지를 타고 흔들흔들 거렸으니 마치 언제라도 곧 떨어질 듯했지만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쾌락왕의 부하들도 물론 사람을 볼 줄 알기에 이것이 바로 무슨 경공인지를 알았다. 두 사람의 안색은 약간 변했지만 결코 놀란 표정은 짓지 않았다. 심랑도 내심 이들을 칭찬했다. (과연 강한 대장 밑에는 약한 부하가 없다는 말이 맞군.) 이 두 사람의 나이는 한 스물 두세 살 정도다. 모두가 오똑한 콧날에 큰 눈을 가졌다. 그리고 두 사람의 옷차림 또한 똑 같았다. 금빛 수를 놓은 망토에 비단으로 된 옷, 가슴에는 한결같이 '자동호심경'이 걸려 있었다. 단, 이 자동호심경 위에 쓰인 글씨만이 틀렸는데 왼쪽 기사는 '칠(七)'이, 오른쪽 기사는 '팔(八)'이 새겨져 있었다. 이들 급풍삼십육기에는 과연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심랑이 웃으며 다시 말을 걸었다. "급풍기사 양반들, 과연 영준하게 잘 생겼군." 칠호 기사가 무섭게 소리쳤다. "너는 누구냐?" "두 분이 사람을 찾고 있는 중이라면 그 사람이 바로 나 올시다." 두 기사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검을 받쳤던 손이 어느새 검자루를 쥐고 있었다. 급풍 팔호 기사가 무섭게 소리쳤다. "네가 바로 우리 대왕을 찾고 있는 사람인가?" 심랑은 내심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난 또 춘교가 그들에게 뭐라고 말했나 했더니 내가 쾌락왕에게 시비를 건다고 말했군. 아! 하긴 아주 간단하게 싸움을 붙여 놓고 남의 칼을 빌어 사람을 죽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 그리고 확실히 효과적이고. 단지 이상한 것은 어째서 여인은 항상 가장 효과적이면서도 가장 간단한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을까? 그녀가 이렇게 마음대로 지어댄 말이 내가 온 목적을 바로 맞췄다는 것을 그녀는 알까? 여인이란 정말로 영감의 동물인가?) 심랑은 내심 웃지도 울지도 못했지만 입으로는 큰소리쳤다. "내가 만약 '아니오'라고 한다면 두 분은 믿지 않을 것이고 내가 '그렇소.'라고 한다 하더라도 역시 믿지 않을 테니 진실여부는 당신들의 판단에 맡기겠소." 그 두 사람이 다시 눈빛을 교환하더니 동시에 말했다. "좋아, 아주 좋았어." 그들은 갑자기 돌아서더니 가려고 했다. 매우 뜻밖의 행동이었기에 심랑은 이상하게 여겼다. 이때, 돌연 '칙, 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개의 짧은 화살이 그들의 금빛 수를 놓은 망토 속에서 나와 곧장 심랑의 목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이 두 화살의 날아오는 기세가 만만치 않았지만 심랑은 비록 뜻밖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가볍게 손을 휘저어서 두 화살을 손에 넣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답례했다. "이토록 과중한 선물은 감히 받을 수가 없소이다." 그가 손을 한 번 떨치자 두 화살이 두 기사를 향해 날아갔는데 그 기세는 올 때 보다 더욱 강했다. 두 기사는 몸을 틀어 뒤로 물러서서 '챙'하는 소리와 함께 검을 뽑아 들었다. 두 화살은 그들이 이미 검을 뽑아 든 위치까지 계산에 넣었는지 '땅'하며 그들의 검끝에 명중했다. 그들의 검끝은 떨리면서 비파처럼 울어댔다. 검의 울음 속에서 두 가닥의 검광이 갑자기 하늘로 치솟더니 한 자루의 검은 곧장 심랑의 다리를 향했고 다른 한 자루의 검은 심랑이 앉아있는 나뭇가지를 향해 공격해 왔다. 심랑이 웃으며 말했다. "'급풍십삼식(急風十三式)'은 과연 듣던대로 대단하군." 그의 말이 끝나자 마자 그가 앉아있던 나뭇가지는 부러졌지만 그의 다리는 아직 부러지지 않았다. 심랑은 아주 태연하게 다른 나뭇가지로 자리를 옮기고는 급풍무사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급풍기사들은 더이상 웃을 수 없었다. 둘은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나뭇가지 위의 이 사람은 그들보다 훨씬 고수였던 것이다. 하지만 쾌활문의 급풍십삼기는 언제나 전진만 있을 뿐, 후퇴란 있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들은 아직 백전백승의 '급풍십삼식' 중에서 일초식 밖에 쓰지 않은 상태였다. 그들은 발끝으로 땅을 차더니 재차 몸을 공중으로 날렸다. 검광이 무지개처럼 좌,우로 나뉘어져 번개같이 심랑의 가슴과 등을 노리고 공격해 왔다. 심랑의 몸이 갑자기 아래로 가라앉더니 교묘하게도 두 가닥의 검광 사이로 빠지면서 두 손으로 그들 두 사람의 발을 받쳤다. 심랑은 땅으로 내려섰는데 급풍기사는 심랑에 의해 나뭇가지로 올려졌다. '화락'하는 소리와 함께 한 무더기의 나뭇가지가 그 둘에 의해 부러졌다. 두 사람은 매우 당황했지만 결코 흐트러지지는 않았다. 두 가닥 남색의 검광이 나뭇잎 속에서 곧장 아래로 찔러왔다. 검광의 기세가 매우 거세고 빠르며 악랄하면서도 정확했다. 하지만 심랑은 이번에는 검광 사이를 뚫고 하늘로 치솟았다. 검광이 땅에 떨어지자 그는 아까 앉아있던 자리에 도로 앉아서는 미소지었다. "다음에 다시 올 때에는 새 망토가 나뭇가지에 긁히지 않도록 조심하게." 급풍기사는 크게 포효하며 재차 검을 휘둘렀다. 그들은 위아래로 여덟 차례를 휘둘렀지만 심랑의 옷자락하나 건들지 못했다. 오히려 급풍무사의 망토만 갈갈이 찢겨져 완전히 조각이 나버렸다. 두 사람은 온통 땀투성이가 됐고 두 눈은 벌겋게 충혈되었다. 두건은 이미 풀잎으로 꽉 찼으며 신발도 심랑에 의해 벗겨져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를 악물고 여전히 그에게 덤볐다. 심랑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감탄했다. "좋았어, 과연 남자답군." 이번에는 그들이 몸을 날리기도 전에 갑자기 아래로 몸을 날렸다. 급풍기사는 깜짝 놀라며 검을 휘둘렀다. 두 검은 여전히 절도있게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일전일후(一前一後), 일좌일우(一左一右)로 독사가 굴에서 나오듯 회전하면서 공격해 왔다. 이 검법이야 말로 그들의 진정한 실력이었다. 검법이 변화막측하고 검빛이 난무하니 그들이 공격하는 방향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심랑은 그들의 방향을 가늠할 필요가 없었다. 심랑이 두 손을 합치자 두 자루의 검이 손에 끼워졌고 '카락'하는 소리가 두 번 났다. 곧 정교하게 만들어진 두 자루 검이 네 조각으로 부러졌다. 심랑이 손을 펼치자 그의 손에 끼워졌던 두 개의 부러진 검끝이 날아가면서 '칙칙'하는 소리와 동시에 그들 두건 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아무리 악랄하더라도 이젠 더이상 공격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부러진 검을 손에 쥔 채 넋을 잃고 심랑을 바라보았다. 자신들 나이와 비슷한 이 젊은 사내가 어떻게 이런 신출귀몰한 무공을 지니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심랑도 부드러운 미소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더 싸우겠소?" 급풍기사는 서로 마주 보더니 동시에 말했다. "그만 싸우겠소." "그만 싸우겠다니 그럼 가보시오." "우리들은 이제 가겠소." 그 둘은 졸지에 검을 거꾸로 하여 자신들의 목을 향했다. 심랑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몸을 번쩍이자 '땅'하면서 두 자루의 부러진 검이 땅에 떨어졌다. 급풍기사가 목쉰 소리로 물었다. "당...... 당신은 왜 막는 거요?" "실패하면 죽는다. 과연 쾌락왕의 부하들은 오만하기가 강철 같군." 급풍기사가 매섭게 부르짖었다. "검이 존재하면 사람도 존재하는 것이고 검이 부러지면 사람도 함께 죽어야 하는 법, 이것이 바로 우리의 규율이오." 심랑이 미소를 짓더니 말을 받았다. "하지만 두 분은 먼저 당신들 주인의 의향을 물어 보시오. 오늘 '심랑'이라는 사람에게 패했다고 말씀 드린다면 당신들의 대왕도 그대들을 탓하지는 않을 것이오." 급풍기사들은 다시 한 번 눈빛을 교환하더니 큰소리로 말했다. "좋소, 심랑!" 그들은 동시에 몸을 날려 곧장 달려 갔다. 심랑은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사람은 한 번 죽음에서 살아나면 다시는 죽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원리는 누구에게도 마찬가지야." 먼동이 트면서 햇살은 비스듬히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염향의 그 성숙되고 풍만하며 또 원시적인 욕망이 감도는 몸뚱이를 비췄다. 그녀는 거의 전라의 모습으로 이불을 껴안고는 침상에 웅크리고 누워 있었는데 마치 그 침상과 그녀 자신을 찢는 듯한 모습이었다. 심랑이 들어와서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백설처럼 하얗고 적나라하며 뭔가 갈구하는 몸을 마치 나무토막이라도 보는 듯, 아무런 표정도 없이 염향을 깨웠다. "아직도 일어나지 않았군." 염향은 매혹적인 눈을 가늘게 떴다. "저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당신은 장님이 아니겠죠? 남자가 지금 같은 초대를 거절한다면 그는 송장일 거예요." "요 며칠 동안 같이 지내면서 그대는 아직도 내가 송장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말이오?" 염향은 갑자기 침대에서 튕기듯이 일어나 이불을 땅에 팽개치고 죽으라고 밟으면서 이를 갈았다. "이 송장...... 송장......!" 심랑은 앉아서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염향이 한탄을 했다. "당신은 정말로 송장만도 못해요. 당신은...... 사람도 아니에요." "이제 그만 나를 미워하고 어서 예쁘게 치장이나 하지. 쾌락왕이 곧 올 텐데 듣자니 그는 미녀의 초대를 절대 거절 않는다고 하더군요." 염향은 갑자기 몸을 떨었다. "그...... 그가 정말로 오나요?" "그는 아마 예상보다 더 일찍 올 거요." "당신이 어떻게 알죠?" "그들의 부하인 급풍기사들을 방금 내가 만나고 오는 길이오." "아! 춘교가 그들 앞에서 당신에 대해 나쁜 말을 하지 않았나 모르겠네요." 심랑이 물었다. "그대 생각엔 그녀가 말을 했을 것 같소?" 염향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녀가 어떻게 말했나요?" 심랑은 아무 말없이 잠시 생각하더니 오히려 염향에게 물었다. "그대가 만약 쾌활왕으로 하여금 나를 죽이게 하려면 그대는 쾌활왕에게 어떻게 말하겠소?" 염향은 눈을 깜박이더니 즉시 대답했다. "난 그에게 당신이 이곳에 온 목적은 그에게 시비를 걸려는 것이라고 말하겠지요. 심지어 그를 죽이려고 한다고 말한다면 그는 분명히 당신을 죽일 테지요." 심랑은 손뼉치고 웃으며 말했다. "결국은 같군. 그녀도 여인이고 그대도 여인이니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은 자연히 다 같을 수밖에. 여인이 생각해내는 것은 영원히 간단하면서도 가장 유효적절하고 또 가장 악랄하지." "그녀가 정말로 그렇게 말했단 말인가요?" 심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서 손해볼 것은 없잖겠소?" "이 죽일 년, 쾌락왕이 그 말을 듣는다면 당신을 그냥 놔둘 리가 없을 텐데요." "그들은 물론 나를 그냥 두지 않았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를 그냥 놔줄 수밖에 없었소. 나는 이미 그들을 돌려보내 쾌락왕에게......." 염향이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 당신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당신이 심랑인 것을 알게 되면 쾌락왕은 당신을 그냥 놔둘 리 없잖아요. 그는 분명히 당신을 죽이려 할 거예요." 심랑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가 왜 나를 죽인단 말이오?" "이 바보, 당신은 당신의 명성이 얼마나 자자한지 모르고 있나요? 쾌락왕의 정보가 얼마나 영통한데 당신의 이름을 모르겠어요?" "들었으면 또 어때서?" "심랑이 쾌락왕하고 대적한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난 바로 그래서 알리려는 것이오." "당신...... 당신 미쳤어요?" 심랑이 웃으며 말했다. "그가 만약 내가 그와 대적하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도 이미 내가 인물인 것을 알고 있을 것이오. 그렇다면 그는 분명 실력있는 사람을 먼저 매수하려고 시도할 것이고 매수하는 것이 실패했을 경우 비로소 손을 쓸 테지." "하지만...... 당신은 절대로 그에게 매수당하지 않을 거잖아요?" "어째서 그렇소?" "그는 분명히 당신이 매수 당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 거예요." 심랑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왜 매수를 당할 사람이 아니라는 거지? 내가 그렇게 의로운 사람이란 말인가? 현 강호에서 누가 나 심랑만큼 욕을 먹는 사람이 있지? 당신마저도 내가 정말로 좋은 사람인지 아니면 나쁜사람인지 단정할 수 있을까?" 염향은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당신...... 그러니까......." "그대마저도 단정을 할 수 없는데 쾌락왕이 어떻게 단정을 하겠소? 그는 당연히 시도를 할 것이야. 그가 시도를 한다면 또 분명히 성공을 할테고." 염향은 결국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안 돼요. 이런 방법은 너무 위험한 모험이에요." "그런 사람을 상대하려면 모험을 안할 수 있겠소?" "나도 그런 사람을 상대하려면 이런 비상수단이 꼭 필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하지만 당신은......." 심랑은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대는 나를 걱정할 필요가 없소. 난 죽지 않으니까." 염향이 발을 동동 구르더니 한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당신을 걱정한다구요? 웃기지 마세요. 당신. 당신 죽는 게 제일 좋아요. 그것도 말 다섯 필로 온몸이 찢기면서 죽는다 해도 난 눈물 한 방울도 안 흘릴거예요." 심랑은 파안대소를 하였다. "미녀에게 이토록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매우 유쾌한 일이지. 단지 다른 남자들이 이런 느낌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이 ......." 그는 갑자기 몸을 튕기더니 문을 열어 제꼈다. 춘교가 문 밖에 서 있었다. 심랑이 크게 웃으면 말했다. "당신은 이번에도 우리보고 식사하라고 부르러 왔소? 지금 밥을 먹기에는 좀 이르지 않은지?" 춘교는 선채로 몸이 굳어 버렸고 얼굴도 빨개져 있었다. (이 녀석의 귀가 어쩌면 이리도 밝지? 설마 전생에 고양이었나?) "나도 왜 이렇게 내 귀가 밝은지 이상할 때가 있어요. 아! 귀가 너무 밝아도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죠. 잠을 자다가도 다른 사람의 소리에 수시로 잠이 깨거든요?" 심랑의 이 말에 춘교의 얼굴이 더욱 빨개지면서 말을 더듬었다. "전...... 전 단지 보러......." "뭘 보러 왔다는 거요? 혹시 내가 죽었나 안 죽었나 말이오?" "심...... 심 공자께서는 농담도 잘 하시네요." 심랑은 더욱 크게 웃었다. "그렇소, 난 너무 농담을 잘하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을 하거든요? 하지만 난 절대로 죽지 않아요." 춘교가 딴청을 부렸다. "음...... 음...... 심공자...... 향 아가씨께서는 간밤에 잘 주무셨나요?" 염향은 짐짓 웃음 띤 표정으로 냉랭하게 말했다. "우리는 물론 잘 잤죠. 오히려 춘교 아가씨께서는 간밤에 잠을 잘 못잔 듯하군요. 얼굴 좀 보세요. 눈두덩이까지 까맣게 됐네요. 아! 너무 무리해도 좋지 않아요. 가끔은 잠을 잘 자두는 것이 좋아요." 춘교는 말로는 상대방에게 지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쥐구멍이 있으면 얼른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심랑이 웃으며 말했다. "손님이 이미 다 도착을 했나 본데 춘교 아가씨도 어서 가서 접대 준비를 하시죠. 이렇게 우리한테만 신경을 써주시니 부담이 됩니다." 춘교는 기다렸다는 듯이 급히 대답을 했다. "네, 네, 네, 갈 때가 됐군요." 심랑이 말했다. "혹시 춘수 아가씨를 불러 줄 수 있겠습니까? 이곳을 구경하려 하는데 우리의 안내를 부탁하고 싶군요." "네, 그러죠.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녀는 감히 돌아 보지도 못하고 허리를 틀며 갔다. 염향이 크게 웃으며 외쳤다. "춘교 아가씨, 조심해서 가세요. 괜히 허리 다치지 말고요. 허리를 다치면 상심할 남자가 한둘이 아닐 테니까!" 춘수의 심장은 계속해서 두근반 세근반 하면서 뛰었다. 그녀의 심장은 심 공자가 그녀를 찾는다는 말을 들은 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뛰고 있었다. 심 공자께서 그녀를 불러 함께 이 근처를 구경하자고 하다니,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그런데 하필 그 '여우'도 함께 간다니......' 그녀는 왜 배가 아프지 않을까.' 춘수는 얄미워서 계속 이를 갈았다. 청초한 숲의 풍경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시원한 바람은 녹색의 대지 위를 쓰다듬었고 조각난 햇빛의 그림자들은 땅 위를 뛰어다녔으며 새들의 지저귐은 마치 음악처럼 울려퍼졌다. 춘수는 몽롱한 상태에서 심랑이 한 마디 물으면 한 마디 대답을 했다. 그녀는 그저 이 아름다운 대자연 속에 그들 외에 제 삼자가 있다는 것을 잊고 싶을 뿐이었다. 갑자기 숲 밖에서 마차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마차 일행이 언덕 아래를 내려오고 있었다. 이 마차는 칠흑 같이 검고 빛나는 것이 마치 흑옥으로 만든 듯했다. 마차 자체에 별로 특이한 장식은 없었지만 한눈에 봐도 기세가 대단했고 매우 호화스러웠다. 마차를 끄는 말도 가는 귀, 긴 다리에 위풍이 당당했다. 발걸음도 무척 가볍고 크면서도 안정되었는데 한눈에 그것은 대초원의 명마임을 알 수 있었다. 마차를 이끄는 마부는 보라색 비단옷을 입고 가볍게 말고삐를 잡고는 유유자적하게 마부석에 앉아 있었다. 전혀 마차를 모는 것 같지 않았는데도 마차는 매우 안정되고 빠르게 달렸다. 이로보아 매우 뛰어난 마부임에 틀림없는 것 같았다. 마차 앞에는 여덟 필의 말이 달리고 있었다. 그 역시 좋은 말이었는데 그 위에 앉아있는 남색의 옷의 대한은 보기에도 우람하고 기세가 등등하여 좀 실력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심랑은 언덕 위에서 내려다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혹시 쾌락왕의 행차인가요?" 춘수가 냉랭하게 웃었다. "쾌락왕이라구요? 흥, 쾌락왕이 올 때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 요란하죠. 이렇게 조용하지가 않아요. 향 아가씨는 쾌락왕을 너무 얕보지 말아요." 염향이 상관않고 다시 물었다. "그가 쾌락왕이 아니라면 누구지?" "내가 말해도 향 아가씨는 모르는 사람일 거예요." 심랑이 웃으며 말했다. "한 번 말해 보시오." 춘수는 금방 생긋이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의 성은 정(鄭)씨인데 모두들 그를 정난주(鄭蘭州)라고 부르죠." 염향은 내심 춘수를 욕했다. (요 불여우 같은 년, 내가 물을 때는 대답도 않더니 심랑이 물으니까 냉큼 대답하는 것 좀 봐. 어디 두고 보자.) 심랑이 말했다. "아, 정난주......! 그 사람의 신분은 어떻소? 대단한 기세인데." 춘수가 답했다. "듣기로는 정주(鄭州) 세가(世家)의 공자라고 하는데 난주 부근의 과수원은 반 이상이 그 집안의 소유이며 재산이 천만에 이르러 거의 나라와 맞먹는 거부라는군요." "음......!" 마차가 지나간 지 얼마 안 되어서 길에는 또 먼지가 일기 시작했다. 이번 마차 행렬은 아까 정난주보다 기세가 더 위풍당당했는데 두 대의 큰 마차에다 열여섯 필의 말이 달리고 있었다. 황금마차는 반짝이며 눈부신 빛을 발했다. 말등자, 바퀴, 고삐와 재갈, 그리고 마부의 손에 쥔 채찍 손자루 등등이 모두 황금으로 만들어진 듯했다. 금의를 입은 대한들은 '팍팍'하는 소리와 함께 채찍을 날렸다. 그들은 가슴을 펴고 배를 내밀고는 의기양양하게 계속 큰소리를 지르면서 갔다. 심랑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는 아마 금을 칠할 수 있는 곳은 전부 금칠을 한 것 같군. 단, 얼굴에도 금칠을 할 수 있었다면 그는 아마 절 안의 신상(神像)처럼 됐을 텐데, 정말 안타깝군." 춘수가 '픽'하고 웃었다. "그 사람의 금은 확실히 너무 많아요." 심랑이 물었다. "이 자는 또 어떠한 신분이오?" "이 사람은 원래 노새를 모는 사람이었다고 해요. 그러다가 갑자기 몇 개의 금광을 발견하게 됐지요. 금을 한 차 한 차씩 집으로 운반했고 결국 그의 원래 이름인 주쾌각(周快脚)에서 하늘이 부(富)를 내렸다 해서 주천부(周天富)로 고쳤지요." 심랑은 실소를 흘렸다. "과연 졸부였군." 염향이 눈썹을 찡그렸다. "어쩐지 멀리서부터 악취가 풍겨오더라니......." "졸부의 기세는 평소에는 크게 보이지. 하지만 진정한 세가(世家)와 비교한다면 마치 원숭이가 용포(籠袍)를 입은 것처럼 전혀 어울리지가 않아." 춘수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는 원숭이가 아니라 고릴라 같아요." 한 무리의 고릴라 행렬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아마 사람들이 더 올 것 같군." 심랑의 말에 춘수가 덧붙였다. "오늘 최소한 여섯, 일곱 무리가 올 거예요." "응? 또 어떤 사람들이오?" "물론 세가가 아니면 거부(巨富)들이죠. 예를 들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멀리서부터 말발굽소리가 들렸다. 이 말들의 속도는 어찌나 빠른지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눈 앞에 와 있었다. 말 위에는 한결같이 청색 두건을 한 대한들이 앉아 있었는데 모두 이상하리만큼 검소한 차림이었다. 염향이 물었다. "이들도 세가나 거부란 말인가요?" 춘수가 답답하다는 듯 냉소를 쳤다. "물론이죠. 그들의 옷은 비록 초라하지만 내력은 대단해요. 단지 겉만 보고 사람을 판단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실수죠." 심랑은 그들의 대화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해서 한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 사람의 옷은 일행과 조금의 차이도 없었지만 단지 그의 기개만은 크게 틀렸다. 비록 그가 그와 꼭 같은 차림을 한 육백 명의 사람들과 섞여 있다고 해도 누구나 그를 단번에 알아볼 것이다. 천성적으로 타고 난 그의 기개는 만 명 중에서도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심랑이 어깨를 들썩이더니 감탄을 했다. "대단한 사나이군. 저 사람의 기개는 웅묘아와 좀 닮은 데가 있어." 춘수가 웃으며 말했다. "그는 고양이가 아니라 용이에요." "용이라구요?" "그의 성은 용(籠)인데 어느 누구도 감히 그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없어요. 누구든지 그를 보면 모두들 '용두목(籠頭目)'이라고 부르죠." "응? 이 사람의 신분은 또 뭐지요?" "황하(黃河) 상류에서 물건을 운반하려면 반드시 뗏목을 사용해야 하지요. 황하의 모든 뗏목을 바로 이 용두목이 관리해요. 용두목의 허락없이는 누구도 감히 황하를 함부로 지나갈 수 없죠." "황하는 물살이 빨라서 그곳에서 뗏목을 조정하는 사람들은 거의가 목숨을 내건 자들이요. 이들은 모두 한 가닥 하는 사람들인데 이런 사람들을 다스린다는 것은 확실히 쉬운 일이 아니지." 염향이 참견했다. "그가 부하들과 같은 차림을 하고 있는 걸로 봐서는 역시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없는 것 같아요. 먼저 그의 무공은 차치하고 옷차림에서부터 벌써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죠. 누구든지 자신은 고기를 뜯고 남들은 뼈를 핥게하는 사람을 두목으로 섬기지는 않죠." "이런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두목'의 재질을 타고 난 사람들이오. 웅묘아도 바로 이런 부류의 사람이지." 염향이 묘하게 웃었다. "웅묘아라, 웅묘아! 당신은 툭하면 웅묘아, 웅묘아 하는데 그도 당신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지금쯤 이미 주칠칠하고 한데 붙었을 지도 모르잖아요?" 심랑은 안색이 굳어지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차갑게 말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대처럼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줄 아는가?" 염향은 자신도 모르게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언제나 미소만을 짓던 심랑이 이렇게 얼굴을 굳힐 줄은 전혀 생각도 못했다. 또 굳어버린 그의 얼굴이 이토록 무서울 줄도 미처 몰랐다. 춘수는 옆에서 손뼉을 치고 싶었다. 다행히 이때 멀리서 또 누군가가 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몇십 명의 수행원들에게 둘러싸여 녹색의 가마가 나타났다. 이들 수행원들은 남자와 여자가 섞여 있었는데 모두들 붉은 옷과 녹색 옷을 입고 있었다. 나이가 스물다섯 이상 되어 보이는 사람은 없었고 대부분이 십칠팔세의 소년소녀들이었다. 이들 소년소녀들은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희희낙낙하면서 어떤 이는 입에 뭘 넣고 십고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먹을 것을 쌌던 종이들을 맘대로 땅에다 버렸다. 그 큰 가마 안에서도 계속해서 종이를 버려댔다. 가마 안에서도 남자와 여자가 함께 희희낙낙하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한 가마 안에 마치 대여섯 명의 사람이 들어 있는 듯했다. 이들을 보자 춘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이 골칫거리들도 여기에 왔을까?" 심랑이 물었다. "이들은 또 어떤 사람들이오?" "이 자들은 모두가 돈많은 집에서 낳은 골칫덩어리들로 난주지방에서 온종일 개망나니짓을 하고 다니는 패지요. 비록 큰 사건을 저지르진 않았지만 작은 사건들은 부지기수로 쌓아놓으니 건달이나 깡패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자들이죠." "하지만 저 녹색 비단천으로 만든 가마는 나라에 공적이 있는 사람만이 탈 수 있는 가마인 듯한데 가마 안에 탄 사람은 혹 벼슬아치가 아니오? 그런데 어째서 이들 망나니들과 함께 어울리는 거요?" "이 가마 안에 탄 자는 골칫거리 중에서도 가장 심한 골칫거리지요. 그의 아버지가 살아있었을 때도 온종일 이들 개망나니들과 갖은 짓을 다 했어요. 그러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자 그는 엄청난 재산만을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무슨 지휘사(指揮使)라는 관직까지도 계승을 받아 저렇게 더 난리를 피우는 거죠." 심랑이 한심스럽다는 듯 내뱉었다. "한 마디로 집안 망칠 놈이군." 춘수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난주에서 이 자에게 당한 피해는 상당히 심했어요. 낮에조차도 이자 때문에 아가씨나 젊은 새댁들은 감히 길을 다니지 못했고 누구든지 '소패왕(小覇王)'이란 말만 들어도 모두가 구르듯이 도망을 가지요." "이걸로 봐서는 이 부근의 모든 세가나 거부들이 오늘 다 모인 듯한데 이 사람들이 어찌 이리도 공교롭게 동시에 이곳에 모인 것이오? 혹시 약속이라도 한 것이오?" 춘수가 답했다. "이들은 모두 쾌락왕이 초청한 거죠." 심랑이 눈썹을 치켜 세웠다. "아니 그들이 쾌락왕과 무슨 관계라도 있소?" "아무 관계도 없어요. 쾌락왕이 이들을 초청한 것은 단지 노름을 하기 위해서죠. 쾌락왕은 매번 이곳에 오면 언제나 이들과 노름하는 것을 빼놓지 않아요." 심랑이 실소를 하였다. "그래, 나도 쾌락왕이 도박을 무척 좋아한다는 것은 들었소. 그럼 이 사람들 외에 또 누가 그와 함께 노름을 하죠?" "쾌락왕은 매우 공정하게 노름을 해요. 그래서 모두들 그와 도박하기를 좋아하죠...... 심 공자, 당신도 흥미가 있으면 한 번 참가해 보세요." 심랑이 눈빛을 반짝였다. "내가 빠질 수는 없을 것 같군." 점심을 먹은 후 심랑은 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 갑자기 요란법석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소리, 말의 울음소리, 바퀴소리, 상자를 운반하는 소리....... 각양각색의 수많은 소리가 거의 반 시진 동안 들려왔는데 마치 십만대군이 이곳에 주둔하는 듯했다. 염향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 "쾌락왕이 왔어요!" "맞아, 이 사람이 오니까 과연 천지가 뒤집힐 정도로 시끄럽군." "우리...... 우리는 어떡하죠?" "기다리는 거요." "잠깐, 그냥 이대로 기다린단 말인가요?" "그가 이곳을 못 찾아 올까봐 걱정되오?" 그는 의자에 기대어 앉아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염향은 끊임없이 방 안을 왔다갔다 하였다. 마치 뜨거운 솥뚜껑 위에 있는 개미처럼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이미 수백 번을 왔다갔다 했지만 쾌락왕으로부터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심랑의 앞으로 가서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소리를 쳤다. "당신은 송장처럼 그렇게 가만히 앉아만 있을 거예요?" "휴식을 충분히 취해야 쾌락왕과 대적할 수가 있소." 염향은 자지러질 듯 놀랐다. "당신은#당신은 설마 그와......." "그래, 나는 그와 한판 붙으려는 것이오. 단지 결투가 아니라 도박을 하자는 것이지. 왕 부인이 준 은자를 이제 써먹을 수 있겠군......." "하지만...... 하지만 당신은 지금......." "그래서 내가 이렇게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오. 도박은 결투보다 더 기력을 소비하는 것이니까. 한바탕의 큰 도박은 생사를 건 결투와 전혀 다를 바가 없고 도박장에서의 심리전은 변화무쌍하고 예측불허하니 결투보다도 더 위험하고 자극적이라오." 염향이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당신은 혹시 일부러 그에게 져주려는 건가요? 그래서 그것을 아첨하는 빌미로 삼아 그의 눈에 들려는 건가요?" "난 절대로 그에게 질 수 없소. 내가 그에게 진다면 난 그의 눈에 전혀 값어치가 없는 사람으로 보일 테니까."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도박이 비록 돈으로 노름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지혜와 힘을 겨루는 것인데 이러한 결투에서 내가 만약 진다면 그가 어찌 나를 눈에 들어 하겠소? 내가 맘에 들지 않는다면 어찌 나를 매수하겠소? 내가 매수할 가치가 없다면 아마 그는 금방 내 목숨을 취할 것이오." 그는 미소를 짓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그러니 나는 도박판에서 반드시 그에게 통렬한 일격을 가해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될 뿐만 아니라 내 목숨조차 결코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오." "당신...... 당신이 이길 승산은 얼마나 되나요?" 심랑이 담담하게 말했다. "없소." 염향은 기가 막혔다. "당신은 전혀 승산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그에게 도전을 하다니, 그러면서도 전혀 긴장하지도, 초조해하지도 않고 태연하게 있다니......." "내가 긴장하지도, 초조해하지도 않는지를 어떻게 알고 있소?" "하지만 적어도 당신은 그렇게 보이지가 않아요." "만약 당신에게 들킬 정도였다면 내가 어떻게 남들하고 도박을 하겠소? 도박판에서는 승패가 순식간에 수천 번도 더 변하는데 만약 침착함을 잃으면 나 자신조차도 잃게 될 것이오." "당신은 색골인 줄만 알았더니 술꾼에다가 노름꾼이었군요?" 갑자기 문 밖에서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 공자께서는 이곳에 머물고 계십니까?" 염향은 몸을 떨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왔어요!" 심랑은 벌써 문을 열고 있었다. 금의를 입은 한 영준한 소년이 손에는 빨간 초청장을 들고 문앞에 서 있었다. 그는 약간 몸을 굽히고는 물었다. "귀하께서 바로 심 공자이십니까?" "바로 맞았소. 귀하께서는 쾌락왕의 부하시겠군요." 금의 소년은 눈빛을 반짝이며 재빨리 심랑을 한 번 살피더니 윗몸을 숙이며 말했다. "소인은 바로 쾌락왕 휘하의 급풍 제 십팔기입니다. 대왕의 명을 받아 심 공자께 소식을 전하려고 왔는데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발을 반 걸음 앞으로 내밀고 손에 든 빨간색의 초청장을 눈썹 높이로 치켜 올리면서 번개 같은 속도로 내밀었다. 이 동작은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예의를 차린 것이었지만 실은 권법 중의 살수(殺手)인 '거안제미(擧案齊眉)'를 가미한 동작으로 만약 심랑이 실수를 한다면 당장에 창피를 당하게 된다. 그러나 심랑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듯이 손을 모아 포권하고 답례했다. "형씨께서 수고가 많으십니다." 심랑이 포권을 한 손을 가볍게 위로 받치는 듯했는데 어찌된 노릇인지 이 소년의 손에 꼭 쥐여져 있던 초청장이 이미 심랑의 손에 들어와 있었다. 금의 소년의 안색이 약간 변하더니 뒤로 세 걸음 물러서서 몸을 굽혔다. "심 공자께서는 과연 비범하십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초청장을 펼치자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늘밤 자정에 약소한 주안상이 마련되 있사오니 귀하의 왕림을 기다립니다. 기나긴 밤, 식사 후 여흥도 많이 준비 되었사오니 회답을 부탁합니다." 위에는 칭호도 없고 아래에는 서명도 없었다. 심랑은 한눈에 전부 훑어보았다. "수고스럽지만 대신 쾌락왕께 심랑이 꼭 참석할 거라고 전해 주시오." 금의 소년은 다시 한 번 심랑을 보았다. 그는 존경스런 눈빛을 흘리면서 몸을 굽혔다. "네!" 그는 몸을 돌려 큰 걸음으로 돌아갔다. 염향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자정? 이 괴물은 사람을 초대해도 꼭 그런 시간에 한다니까? 설마 남들이 정신없이 졸 때를 틈타서 이기려는 건가?" "그러니 나는 지금부터 더욱더 열심히 휴식을 취해야 하니 그대는 절대 나를 방해하지 마시오." 지금부터 자정까지는 약 반 시진의 시간이 남았다. 심랑은 충분히 잠을 잤고 통쾌하게 목욕을 한 후 가장 깨끗하고 가장 가볍고 또 가장 편한 옷으로 갈아 입었다. 그 다음 깨끗한 비단 수건에 왕 부인이 준 거액의 은표(銀票)를 잘 싸고는 허리에 찼다. 그는 스스로를 자세히 한 번 훑어 본 후 아무런 흠이 없다고 판단했다. 정신도 매우 맑았으니 심신이 모두 가장 좋은 상태임을 확인한 것이다. 그는 진한 차를 한 잔 따르고는 가장 편한 의자를 골라서 앉았다. 아주 천천히 차를 음미하면서 조용히 다가올 그 자극전인 결전을 기다렸다. 염향은 참지 못하고 소리질렀다. "당신이 이토록 유유자적한 것을 보면 정말 탄복스럽군요. 당신은 아무렇지 않겠지만 나는 초조해 죽겠어요!" 그녀 역시 아주 세세하게 치장을 하고 있었다. 몸에는 아름다우면서도 대범한 비단을 걸쳤고 온몸은 온통 향기에 휩싸였으니 아무리 장님이라고 하더라도 그녀가 절세의 미녀라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그녀는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심랑이 질까봐 두려웠다. 심랑이 진다면 어떻게 하나? 그녀는 또 참지 못하고 안달을 했다. "심랑, 제발 좀 알려 주세요. 대체 얼마의 승산이 있는 건가요?" 심랑은 눈을 감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쾌락왕의 도박방식을 보기 전에는 어떻게 말할 수가 없소." "적어도 반 이상은 있겠죠?" "아마 그럴 것이오." 염향은 간신히 안심할 수 있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지만 지금 내게는 단지 십만 팔천 냥 밖에 없는데 쾌락왕의 밑천은 분명히 나보다도 훨씬 많을 거요. 밑천이 많은 것도 역시 승산의 일 할을 차지하는데......." 염향이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굴렀다. "이럴줄 알았다면 좀더 많이 가져오는 건데." "꼭 그럴 필요는 없소. 단지 쾌락왕으로 하여금 내가 대체 얼마의 밑천을 갖고 있는지 모르게만 한다면 그도 경솔히 전력을 다하지는 않을 것이오. 하물며......." 그는 잠시 미소를 짓더니 계속 말했다.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서 한밑천 잡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 후 다시 쾌락왕하고 생사를 건 결전을 벌이면 될 것이오. 정난주와 용사해는 매우 약을 것 같지만 주천부와 소패왕은 아마도 맛있는 반찬이 될 것이오." 염향이 '픽'하고 웃었다. "맛있는 반찬? 당신이나 제발 좋은 반찬이 되어서 남에게 먹히지나 마세요." 창문 밖을 내다보니 두 개의 궁사등롱이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심랑은 옷을 털더니 곧 몸을 길게 일으켰다. "갑시다. 우리를 대접하려는 사람이 왔소." '철취헌(綴翠軒)'은 쾌락왕이 여기서 여름을 지낼 때 머무는 행궁이었다. 자연히 온 쾌활림 중에서 가장 호화롭고 정교하며 또 가장 넓은 곳일 수밖에 없었다. 철취헌 밖에는 등불이 휘황찬란했지만 무척 조용했으며 지나다니는 사람도 전혀 안보였다. 단지 어두운 곳에서 가끔씩 건장한 그림자가 왔다갔다하는 것만이 보일 뿐이었다. 철취헌 안에는 이미 주안상이 차려져 있었다. 송강의 농어, 양청호의 게, 정해의 새우, 강남의 자라......, 사실 이 모든 것이 한시 한군데로 모이기는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렇게 동시에 상 위에 오르다니...... 이것은 정말로 신화와도 같았다. 역시 심랑의 예상대로 탁자에는 고기음식이 없었다. 하지만 심랑이 의외로 느낀 것은 내부가 매우 간결하고 아늑하여 추호도 가식적으로 꾸민 흔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탁자 위에는 금잔과 같은 잔들은 없었으나 정교하게 만들어진 자기(瓷 )들이 있었다. 심지어는 한나라와 당나라의 유물도 있었다. 심랑은 갑자기 주칠칠이 쾌락왕으로 변장했던 것이 생각이 나자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리고는 내심 감탄했다. (이것이야 말로 쾌락왕의 기풍이구나. 그녀가 흉내낸 것은 모두가 졸부의 그것에 불과해.) 탁자 옆에는 팔 구 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심랑은 한눈에 '용두목' 용사해를 발견했다. 그는 천으로 된 옷을 입고 있었는데 온통 비단옷을 입은 사람들 사이에 껴서도 마치 군계학립(群鷄鶴?)인 듯 상당히 비범했다. 용사해의 옆에는 짧은 콧수염을 기른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몸이 약간 뚱뚱하여 생활의 윤택함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간단하고 가벼운 옷차림이었고 몸에도 별로 눈에 뛰는 특별한 장식이 없었다. 단지 앞에 놓인 코담배통)은 검푸른 색이 돌며 상당히 비범해 보였다. 심랑은 생각도 할 것 없이 이 사람이 바로 그 '정난주'란 사람임을 알았다. 세가의 공자는 역시 세가의 공자다운 기풍이 서려 있었다. 정난주의 옆에는 전혀 틀린 자가 한 사람 앉아 있었다. 그의 몸에는 장식품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는데 모든 물건들의 가치는 절대로 천금 이하는 아니었다. 언뜻 보면 그 사람은 마치 전재산을 온통 몸에다 달고 다니는 가난뱅이처럼 보였는데 본인은 오히려 득의양양하여 안하무인격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심랑은 이 자가 바로 그 졸부인 주천부라는 것을 알았다. 그의 옆에는 머리 전체가 장식으로 싸인 여자가 기대어 있었다. 그녀도 주천부와 마찬가지로 전재산을 몽땅 머리와 손에 걸지 못해 안달이 난 듯했다. 그녀는 왜 목이 부러질 걱정을 안 하는 걸까? 그녀는 비록 몸은 주천부에게 기대고 있었지만 눈은 계속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유혹하는 눈길을 도처에 부렸다. 비록 못 생긴 편은 아니었지만 저속하고 음탕한 자태는 단지 '창녀'라는 간판만 달면 완전했다. 심랑은 내심 웃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사람은 끼리끼리 모인다는 말이 맞는 말이군. 저 주천부의 재주에는 역시 저런 여자가 어울려.) 다시 그 옆을 보니 '소패왕' 시명이 있었다. 그는 많아야 십팔 구 세쯤 됐는데 눈두덩이는 움푹 패여졌고 비록 작지는 않은 눈이지만 전혀 생기가 없어 종일토록 잠을 못잔 얼굴이었다. 그가 입은 옷은 그래도 주천부보다는 눈에 덜 거슬렸다. 그의 곁에도 역시 여자가 있었는데 이 소녀의 옷차림은 주천부의 여자보다 더욱 놀랄 지경이었다. 그녀는 조끼만 입었는데 하얀 두 팔과 하얀 가슴이 모두 노출됐으며 계속해서 팔찌가 딸랑딸랑하고 소리를 냈다. 그녀는 기껏해야 십오육 세밖에 안 되 보였는데 얼굴은 온통 화장품으로 뒤범벅을 해놓았다. 게다가 비취로 만든 담뱃대를 물고서는 코로 계속해서 담배연기를 뿜어냈다. 이것은 틀림없는 '여자깡패'였다. 심랑은 도저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는데 그 소녀는 오히려 탁자 옆의 빈 의자를 치면서 그를 불렀다. "이봐, 친구. 이리와서 앉아!" 심랑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고맙소, 하지만......." 그 소녀가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뭐야? 이 의자 위에는 불도 없으니 당신 엉덩이를 태우지는 않을 텐데 뭐가 무섭다는 거지?" 심랑은 어쩔 수 없이 눈 딱 감고 그 옆에 앉았다. 그 소녀는 염향을 보더니 '하하하'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 안목도 상당하군. 이런 류의 사내는 매우 수줍음을 타는 듯하지만 사실은 모두 한가닥들 하지. 내 어리다고 결코 어리게 보지는 말게. 난 그래도 경험이 당신보다는 많을 거야." 염향은 정말이지 그녀의 따귀를 갈기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 소녀는 심랑의 어깨를 쳤다. "나는 하원원(夏沅沅)이라고 해. 동료들은 나를 '여패왕(女覇王)'이라고 부르지. 옆에 있는 이 사람이 내 애인 '소패왕'이야. 당신 이름은 뭐지?" "심랑이라고 하오." "심랑이라. 좋군. 당신이 상당히 맘에 들어." 그녀는 소패왕의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이봐, 이 친구를 우리 패거리에 끼우면 어떨까? 내 생각 어때?" 소패왕은 이때 정신집중하여 자금(紫金)조각으로 탁자 위에다가 탑을 쌓고 있었는데 그녀가 툭치는 바람에 탑은 '우루루'하고 무너졌다. 소패왕은 그제야 비로소 심랑을 한 번 보더니 마지못해 말했다. "음, 괜찮군. 단, 맷집이 좋다면 막내로 삼지. 이봐, 알겠어? 여자가 있으면 먼저 덤빌 수 있지만 동시에 매가 있으면 먼저 매를 맞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