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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할아버지 안병희 ② 항일혁명의 한길
[연재] 안영민의 「아버지, 안재구」 (13)
증조할아버지는 1890년 밀양 성만의 통바우에서 태어났다. 집안의 6대 장손이었다. 전근대사회에서 집안의 장손은 그 집안의 얼굴이다. 그래서 온 집안이 힘을 모아 장손을 신언서판(身言書判)이 분명한, 집안의 얼굴로 만들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경우가 발라 아랫사람들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어. 장손답게 신언서판도 분명하고, 학식도 뛰어나 집안은 물론 고을의 유림에서도 다들 존경했지.”
증조할아버지는 1903년 낙동강 건너 30리쯤 떨어진 창원 동면의 석산 마을, 상산 김씨 집안의 동갑내기 아가씨에게 장가를 들었다. 당시는 개화기라 호적도 정리된 때여서 여자도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증조할머니는 그저 ‘상산 김씨’가 아닌, ‘상희(祥熙)’라는 자기 이름을 가지고 시집온 최초의 할머니였다고 한다.
증조할머니의 친정이자 아버지의 진외가가 김진균(1937-2004) 서울대 교수님 집안이다. 교수님의 어머니는 집안끼리 겹사돈으로 우리 집안의 할머니셨다. 모진 세월에 감옥에 갇힌 친정 조카손자의 안부가 걱정돼 종종 우리 집에도 전화를 주셨다. “독산동 할머니다!”라는 인정스러운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이런 인연으로 김진균 교수님은 형의 결혼식 때 주례를 서기도 했다.
증조할아버지가 나서 자라던 때는 봉건제도의 모순이 첨예했던 조선에 개화 바람이 불고, 열강들이 호시탐탐 침략의 발톱을 드러내던 시절이었다.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던 증조할아버지는 1906년, 열일곱의 나이에 새로운 세상을 배우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다.
그런데 그냥 조용히 올라간 게 아니었다. 집안의 아랫사람들을 모아놓고 노비문서를 꺼내 불살라 버렸다. 그다음 집안의 땅문서를 나눠 주고 제가끔 나가서 살라며 내보냈다. 그 길로 수산으로 나와 상투를 자르고 개화 머리부터 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밀양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집안의 장손이 개화 바람이 나서 머리를 깎고 서울로 달아났으니 어땠겠어? 집안이 발칵 뒤집혔지. 큰할아버지(아버지의 증조부)는 ‘이제 우리 집안은 망했다. 무슨 낯으로 사당에 들어가서 조상을 대하노!’ 하며 한탄하셨고, 큰할머니(아버지의 증조모)는 통곡하셨지.”
서울로 올라온 증조할아버지는 대한제국무관학교 시위연대 보병참위로 있던 숙부를 만났다. 숙부의 도움으로 한성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신학문을 배웠다. 하지만 1910년 국권이 일제에 완전히 침탈당한 뒤 한성학교 중등과를 중퇴했다고 한다. 공부보다는 어떻게 하면 나라를 되찾을까 하는 고심이 더 컸기 때문이다. 우리 집안에서 ‘참위 할배’라 불리던 증조할아버지의 숙부도, 1907년에 강제로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자 이에 통곡하고 저항하다가, 결국 밀양으로 내려가셨다.
“나라를 되찾을 방법을 찾다 교회에도 열심히 나가셨다고 해. 당시 예배당은 왜놈들의 치외법권이라서 독립운동이나 계몽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였어. 할아버지도 성서에 나오는 유대민족의 해방운동에 관심이 많았고……. 거기서 조국광복을 기원하는 사람들과 두루 소통했지.”
교회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미국인 선교사들이 독립운동가들을 예배당 안에 못 들어오게 한 것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려면 예배당 밖에서 하라”는 그들과 대판 싸웠다. 결국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믿는 것이다”라고 항변하면서 교회를 뛰쳐나왔다.
독립운동의 방향과 방법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먹고살 대책도 마련해야 했다. 한때 측량기사 자격증을 따서 취직도 했다. 하지만 그 일이 조선 사람들의 토지약탈을 위한 사전 작업이란 걸 알고는 반년도 안돼 그만두었다.
방황하던 증조할아버지는 서울 생활을 작파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당시에는 조국광복을 위해 실력양성이 필요하다며 사립학교 설립이 불길처럼 번지고 있었다. 증조할아버지도 고향 청년들을 깨우치기 위해 학교설립에 나섰다.
“할아버지는 통바우 동네 곁에, 지금의 초동초등학교 자리에 ‘초동학교’라는 이름으로 학교를 세웠어. 근방의 청년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에게 독립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많은 애를 썼지.”
실력양성을 위한 학교설립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일제는 사립학교 규칙을 개정해 교육과정은 물론이고 교과서와 교사까지 통제했다. 초동학교에도 규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헌병들이 들이닥치고, 휴교 명령을 내리기 일쑤였다. 일제는 끝내 초동학교를 강제로 폐쇄하고, 그 자리에 ‘초동공립보통학교’를 설립했다. 이때부터 학교는 황국신민을 양성하는 게 주목적이 됐다.
증조할아버지는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1917년 무렵이었다. 이때는 가족들을 데리고 올라왔다. 당시 여섯 살 난 할아버지도 함께 왔다. 증조할아버지는 점차 새로운 사조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볼셰비키 혁명은 새로운 세상을 동경하던 청년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사회주의 사상, 무정부주의 사상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증조할아버지도 이에 큰 영향을 받았다.
증조할아버지에게 새로운 각성을 준 것은 1919년 3.1만세운동이었다. 서울에서 직접 시위에 참여한 증조할아버지는 사회주의 사상과 결합한 독립운동이 장차 시대의 길임을 깨달았다.
“이때부터 할아버지는 본격적으로 조국광복운동, 민족해방운동에 나섰어. 서대문 근처에 ‘고학생동맹’이라고 간판을 건 사무실을 열고, 청년학생들과 새로운 사상을 함께 공부했지. 하지만 왜놈들의 탄압으로 단체는 해산당했고, 할아버지도 여러 차례 연행되며 갖은 고생을 했어. 이 와중에 너거 할아버지 밑으로 자식 둘을 가난과 질병으로 잃었다고 해.”
증조할아버지는 연행과 탄압에도 굴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조선노동학원’이란 간판을 내걸고 노동자들을 학습시키는 활동을 했다. 일제가 노동학원을 강제로 폐쇄하면 다시 문을 열기를 반복했다. 노동학원은 증조할아버지가 구속되면서 문을 닫고 말았다.
1924년 12월 결성된 '사회주의자동맹' 집행위원 명단에 안병희 선생의 이름이 나온다. (2) 적박단 해체 기사에 해체사유 작성위원으로 사륜, 안병희 두 사람의 이름이 나온다. (3) 신간회 밀양지회 결성식을 보도한 기사에도 '총무간사 안병희'라고 언급돼 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증조할아버지는 1924년 12월 6일 창립된 사회주의자동맹에도 집행위원으로 참여했다. 단체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증조할아버지는 일찍이 사회주의자로서 항일운동에 가담했다.
“할아버지는 일본 유학생이나 지식인 출신과 달리 자생적인 사회주의자였어. 1925년 조선공산당이 창립되자 그 산하에서 청년교양사업을 했지.”
하지만 1920년대 중반의 사회주의운동은 극심한 종파주의에 휩싸였다. 1925년 결성된 조선공산당 역시 파벌 싸움으로 점차 붕괴되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에 좌절하고 실망한 증조할아버지는 결국 당 운동을 그만두었다.
당시 항일운동은 내부 분열로 어려움에 부닥쳤다. 또 일제의 잔혹한 고문에 굴복하고 변절하는 자들도 늘어났다. 이에 증조할아버지는 항일운동의 새로운 각성을 촉구하는 허무당(虛無黨) 선언문 배포에 참여했다. 허무당은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은 무정부주의운동이었다.1)
증조할아버지는 적박단(赤雹團)에도 집행위원으로 참여했다. 적박단은 ‘붉은 벼락’이란 이름처럼 일제의 밀정이나 경찰들을 족치는 테러단체였다. 하지만 조선공산당의 파벌 싸움에 결부돼 폭력을 행사하는 등 문제가 되자 결국 1927년 9월 3일에 스스로 해체했다. 증조할아버지는 해체이유서를 작성한 두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2)
이러한 활동 때문에 증조할아버지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증조할아버지가 감옥을 들락거리니 증조할머니의 고초 역시 말할 것도 없었다. 10대 청년으로 자란 나의 할아버지도 증조할머니와 함께 옥바라지를 하였다. 반세기 이상이 지나 남민전 사건이 터지면서 할아버지는 아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서대문교도소’로 이름만 바뀐 곳을 다시 찾아가야 했다.
감옥에서 나온 증조할아버지는 더 이상 서울에서는 희망을 찾지 못하고 다시 밀양으로 하향했다. 이때 자리 잡은 곳이 앞서 말한 밀양 연계소였다. 1929년, 나이 마흔의 때였다.
밀양에 내려와서도 증조할아버지의 활동은 쉼이 없었다. 1927년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이 연합해 결성한 통일전선 조직인 신간회 밀양지회에서 총무간사로 활동했다.
1929년 5월 1일 조선형평사 총본부에서 발간한 잡지 『정진』의 표지. [사진 제공 – 안영민]
백정(白丁)들의 신분해방을 위해 1923년 4월 진주에서 결성된 조선형평사에도 참여했다. 증조할아버지는 조선형평사 총본부에서 발간한 잡지 <정진(正進)> 창간호(1929년 5월 1일 발간)에 ‘형평운동의 정신’이란 글을 게재할 만큼 형평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했다.3)
“할아버지가 형평사 집회에서 신분 차별의 부당성을 주장하자 밀양의 유림에서는 난리가 났어. 할아버지는 유림 영감들에게 언제까지 담뱃대만 두드리며 시회나 여는 유학에서 벗어날 거냐고 대들었고. 그 뒤로 밀양의 백정들은 할아버지만 보면 고맙다고 허리를 숙였다고 해.”
1932년 안재구 교수의 아버지 안의환, 어머니 김태숙의 혼례식 광경. 안병희 선생은 장남의 혼인 일제 고등계 형사를 대동하고서야 참석할 수 있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증조할아버지는 밀양에서도 늘 일제 경찰의 감시 아래 지내야만 했다. 일제에 굴복하지 않는 어른으로 모두의 존경을 받았지만, 그 때문에 특별 감시대상자로 찍혀 꼼짝도 못 하는 상태였다. 1932년 장남인 나의 할아버지의 혼인에도 고등계 형사를 대동하고서야 참석할 수 있었다. 사돈댁인 달성군 구지의 잔칫집에서도 눈이 휘둥그레질 일이었다.
이 장면은 60여 년이 지나 되풀이되었다. 1998년 10월에 아버지 역시 외출을 허락받아 철망으로 창문을 둘러쳐 놓은 교도소 호송버스를 타고 나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교도관들은 결혼식이 진행되는 도중 여기저기 흩어져 아버지를 감시했다.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그들은 다시 호송버스에 아버지를 태워 교도소로 돌아갔다. 나의 처가 친척들은 다들 뜻밖의 장면에 어리둥절했다.
일제의 철저한 감시로 증조할아버지는 ‘창씨개명’과 ‘사상전향’을 거부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운동도 할 수 없었다. 이를 핑계로 일제는 1940년에 다시 증조할아버지를 예비검속으로 잡아들이고 가택 수색을 자행했다.
“왜놈들은 창씨개명을 안 하는 것은 창씨개명 정책에 반대하는 것이고, 사상전향서를 안 내는 것은 사회주의운동과 조선독립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증거라며 몰아붙였지.”
일제는 증조할아버지를 유치장에 가둬 놓고 온갖 회유와 협박을 했다. 밀양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증조할아버지부터 굴복시켜야 만사가 평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사는 갈수록 험악해졌다. 그 과정에서 증조할아버지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결국 열흘 만에 경찰은 아무런 소득 없이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할아버지의 건강 상태였어. 병원에 입원해 진찰받은 결과 췌장염이었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만 해도 굉장히 위중한 병이야. 할아버지는 한 달 이상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야만 했어. 왜놈들의 혹독한 사상전향 공작을 끝까지 이겨냈지만, 이때 몸이 많이 상하셨지.”
태평양전쟁 속으로 빨려 들어간 일제는 조선의 물자와 사람을 강제로 동원하기 시작했다. 수탈이 전방위적으로 진행되던 때, 증조할아버지는 일제의 종말이 머지않았음을 예견했다. 식민지 해방을 전취(戰取)하기 위해 밀양의 북부 화악산 밀림 일대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일제의 최후 발악적인 징용·징집에 반대해 산으로 들어온 청년들을 조직했다. 적의 무기를 탈취해 우리 손으로 해방의 날을 맞이하려고 준비했다.
마침내 일제가 패망하던 날, 증조할아버지는 청년들을 이끌고 산에서 내려왔다. 청년들의 무등을 타고 밀양 북성거리로 입성했다. 환호하는 인민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아버지가 팔십 평생 가슴에 담아온 가장 감격적인 장면은 이렇게 나왔다.
그 길로 증조할아버지는 밀양경찰서부터 접수했다. 치안대를 조직해 조선 사람의 손으로 치안을 회복했다. 또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 밀양지부를 조직한 뒤 항일운동의 선배인 김병환 선생을 위원장으로 추대하고, 부위원장에 선임됐다. 증조할아버지는 병환 중인 위원장을 보좌하며 행정을 확보한 뒤, 일제가 물러간 뒤의 혼란을 정리해 나갔다.
일제의 만행을 피해 고향 땅을 떠났던 동포들이 일본에서, 중국과 동북 만주에서, 멀리 남양(南洋諸島)과 노령(露領, 러시아 영토 시베리아)에서 해방된 조국을 찾아 돌아왔다. 이들 귀환 동포들을 보살피는 일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그때는 나도 얼마나 신이 나던지 매일 같이 밀양 읍내를 쏘다녔어. 만나는 사람마다 ‘애국자 우정 선생의 손자’라고 알아주니 절로 어깨가 으쓱했지.”
아버지가 기억하는 해방은 이처럼 신나는 세상이었다.
해방은 모두에게 새 나라 건설의 희망을 심어주었다. 억눌리고 핍박받던 이들에게 해방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임과 동시에 봉건적 속박에서 벗어나 새 나라의 주인으로 일어서는 일이었다. 증조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일러준 그 나라는 바로 ‘조선 사람이 주인인 나라’이고,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모두가 평등한 나라’였다.
주(注)
1) 「허무당선언」은 1926년 1월 4일 일제강점기 조선의 경성부에서 아나키즘 운동가 윤우열에 의해 작성, 조선 각지로 배포된 아나키스트들의 선언서이다. 전국으로 확산된 유인물 및 벽보에는 1월 3일자 경성우체국 소인이 찍혀 있었으며, 이것을 인쇄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나키즘 운동가였던 윤우열은 당시 대구청년동맹의 회원이었다. 사건 관련자로는 선언문 작성자 윤우열 외에도 한성강습원 강사 안병희, 경성청년회 회원 하은수, 한글학자이자 경성청년회 러시아어 교사 이윤재 등이 지목되었다.
- 『한국 아나키즘 운동사 전편-민족해방투쟁-』(조선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형설출판사, 1978) 중에서 정리
2) 증조할아버지의 항일운동은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을 연구한 학자들의 기록과 일제식민지 고등계 경찰의 수사기록 문서와 검찰 행정사무의 수사기록과 증거자료, 당시 동아일보 등 신문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3) “대체 형평운동이라 함은 어떠한 의미로 어떠한 일을 하는지 그것을 자세히 설명하려 한다. 이제 우리 동족이 조선 각지에 대개 40만 명이나 있다. 조선 전 인구를 2천3백만이라 하면 2천3백만 분의 40만이라는 민족은 즉 우리 형평계급의 민족일 것이다. 하면 다 같은 조선민족이지마는 ‘백정’이니 ‘피쟁이’니 ‘갖바치’니 ‘천인’이니 하여 그 무엇이 특별한 조건이나 있는 것처럼, 왜 천대를 주며 학대를 주며 멸시를 하는가. 하고 또 우리로서는 그 어떠한 조건이나 있는 것처럼 천대와 박대에 슬픔에 신음하면서 억울한 한을 가지고도 의연히 짓밟히고 살아온 것은 무슨 이유일까? (중략)
조선 각지의 우리 계급 40만이 한 몸뚱이와 같이 되는 단결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의미로서 형평사라는 조직이 생겼다. ‘형평(衡平)’이라 함은 이 인간세상을, 이 인간사회를 저울대로 달아서 평탄하게 고르게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우리 형평사가 남병산에 동남풍이 불 듯 비 온 뒤에 죽순처럼, 곳곳마다 자유를 부르짖고 평등을 요구하며 정의의 함성으로 자유를 찾자, 평등을 찾자, 행복을 찾자 하는 것이 즉 형평운동이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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