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콜로3,4).
Ⅱ.주님의 기도
2765‘주님의 기도’(Oratio dominica 곧 Oratio Domini)라는 전통적인 표현은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전해 주신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라는 뜻이다.예수님에게서 우리에게 전해진 이 기도는 참으로 유일한 것으로서‘주님의’기도이다.한편,외아들께서 이 기도의 말씀을 통해,성부께서 당신에게 주신 말씀을 몸소 우리에게 전해 주신다.예수님께서는 우리 기도의 스승이시기 때문이다.반면에,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되신 말씀으로서,인간의 마음으로 당신의 인간 형제자매들에게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아시고,그것들을 우리에 알려 주신다.예수님께서는 우리 기도의 모범이시다.
2766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계적으로 되풀이하는 기도문을 우리에게 남겨 주시지는 않았다.모든 소리 기도의 경우가 드렇듯이,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성부께 기도드리는 법을 가르쳐 주신다.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녀다운 기도를 할 수 있도록,말씀만이 아니라 동시에 성령도 주시는데,성령을 통해서 이 말씀들은 우리 안에서 “영이며 생명”(요한6,63)이 된다.더욱이 자녀다운 기도를 할 수 있는 가능성과 실제로 자녀다운 기도를 하고 있다는 증거로서,성부께서는“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그 영께서‘아빠!아버지!’하고 외치고 계십니다”(갈라4,6).우리의 기도는 하느님께 우리의 소망을 나타내는 것이다.그러기에“마음속까지 살펴보시는 분께서는 이러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십니다.성령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로마8,27).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이 기도는 성자와 성령의 신비로운 사명에 직접 연결된다.
Ⅲ.교회의 기도
2767시초부터 교회는,주님의 말씀과 분리될 수 없고 또한 신자들의 마음 안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시는 성령과 떨어질 수 없다는 이 선물을 받아들이고 생활화하였다.최초의 공동체들은,유다인들의 신심으로 바쳐 왔던‘열여덟 가지 찬미’대신에 주님의 기도를 “하루에 세 번”바쳤다.
2769입문 성사 때 하는 ‘주님의 기도 수여’는 하느님의 생명을 얻는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그리스도인의 기도는 바로 같은‘하느님의 말씀’으로써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것이기 때문에,“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 태어난”(1베드1,23)사람들은,하느님께서 언제나 귀담아들어 주시는 바로 그‘말씀’으로써 아버지께 기도드리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그들이 이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성령의 도유로 받은 인호가 그들의 마음,귀,입술,그리고 자녀다운 그들의 존재 전체에 지워지지 않도록 직혀 있기 때문이다.이런 이유로,주님의 기도에 대한 교부들의 주석은 대부분 예비 신자들과 새로 입교한 교우들을 위한 것이었다.교회가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에는 언제나“갓 태어난”백성이 기도드리는 것이며,자비를 입은 것이다.
2770성찬 전례에서,주님의 기도는 모든 교회가 드리는 기도가 되어, 그 완전한 의미와 효력을 드러낸다.감사 기도(Anaphora)와 영성체 사이에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한편으로는 성령 청원 기도(Epiclesis)에 담겨 있는 청원과 전구를 요약하며,다른 한편으로는 영성체로 미리 맛보게 될 천국 잔칫집의 문을 두르리는 것이다.
2771성찬례에서 주님의 기도는 또한 이 기도에 담겨진 청원의 종말론적 특성을 나타낸다.이 기도는‘마지막 때’,곧 성령 강림으로 시작되었고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구원의 때에 바치는 기도이다.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청원들은 구약의 기도를과는 달리,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단 한번 결정적으로 실현된 구원의 신비에 근거를 둔 것이다.
2772이러한 흔들리지 않는 신앙에서 일곱 가지의 청원 하나하나에 생기를 불어넣는 희망이 솟아난다.이 청원들은“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므로”(1요한3,2)인내와 기다림의 때인 현세의 탄원을 표현하고 있다.성찬례와 주님의 기도는,“주님께서 오실 때까지”(1코린11,26)주님의 재림을 열렬히 갈망하고 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발췌)
너는 악을 저지르는 자들 때문에 격분하지 말고
불의를 일삼는 자들 때문에 흥분하지 마라.
그들은 풀처럼 삽시간에 스러지고
푸성귀처럼 시들어 버린다
(시편37,1-2).
“불의를 일삼는 자들 때문에 흥분하지 마라”는 ‘불의를 일삼는 자들을 부러워하지 마라’로 번역할 수 있다(RSV참조).이와 비숫하게 잠언24,19에서도“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격분하지 말고 악인들을 부러워하지 마라”고 한다.이 말은 동시에 통속적인 잠언이었을 것이다.현인의 모습을 한 시인은,의인들에게 악인들 때문에 분노하지 말라고 권고한다.악과 불의를 일삼는 자들을 보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흥분하게 된다.우리 모두는 악인들의 번영에 의해 유혹을 받는 연약함을 지니고 있다(타르수스의 디오도루스).그렇지만 시인은 우리가 그들을 모방하려는 유혹을 피하게 한다(암브로시우스).분노는 많은 악의 원천이다.그래서 시인의 의도는,다른 사람의 죄를 보고 성냄으로써 오히려 나쁜 영향을 받아 의인의 신앙이 약화되지 않도록 지켜주려는 것이다.
시편에 나오는 시든 풀의 표상은 하느님의 영원성에 대조되는 인생의 보잘것없고
덧없는 본질을 가리킨다(시편90,5;102,12;103,15-16).여기서는 악인들의 운명이 풀에 비유된다.악인들의 형통함은 오래가지 못하고 식물처럼 쉽게 시들어 버릴 것이다.시인은 악인들이 풀처럼 삽시간에 스러지고 푸성귀처럼 시들어 버릴 것이니 그런 무상한 것들에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그래서 모든 것을 영원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한다.악인들은 계절 식물과 같지만 의인들은 그리스도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린다(아우구스티누스).
시편37편의 전체적 의미:시편 37편의 시인은 마치 현인처럼 악인들 때문에 화내지 말고 그들을 질투하지 말라고 타이른다.사회적으로 악인들의 번영은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에게 좌절과 영적 위기를 안겨준다(시편73편).그뿐 아니라 의인들은 불의한 세상을 보며 분노를 느끼게 된다.그러나 시인은 분노하지 말고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라고 권고한다.악인들은 의인들이 질투할 대상이 못된다.왜냐하면 악인들의 번영은 풀처럼 덧없기 때문이다.그런가 하면 의인들은 땅을 차지하고 그 위에서 살뿐만 아니라 복을 누리게 된다는 약속을 받는다.땅은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표지이다.이 시편의 중심사상은,악인들은 뿌리채 뽑히어 멸망하게 되고,주님을 신뢰하는 의인들은 땅을 차지하고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다.악인들이 번영하는 사회적인 불의 때문에 경건한 사람들이 신앙의 위기를 체험하게 된다.따라서 이 시인의 목적은 의인들이 유혹에 직면할 때,하느님께 자신을 맡기는 참 신뢰의 길로 그들을 인도하고자 한다. 이 시편은 우리에게 모든 번민을 주님께 맡기고 하느님과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 신뢰하도록 교훈을 준다.
(‘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 시편1-41편/전봉순 著/바오로딸)
제9장 세계 공동체
1.3신앙의 요청-하나로 뭉치는 인류
구약 성경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순간부터 완성하시는 종말 때까지 인류 역사의 주님일 뿐 아니라 온 세상의 주님이라고 고백한다.하느님의 활동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온 세계와 온 인류 가족에게 두루 미친다.인류는 하느님께 등을 돌려 폭력과 불의를 저지름으로써 분열하여 고통과 시련을 겪는다.하느님께서는 노아와 아브라함 같은 신앙의 선조를 통해 온 인류와 계약을 맺어 인간 생명은 절대로 존엄하고 결코 침범해서는 안 되는 진리를 보존하게 하시며,여러 민족과 이들로 이루어진 인류의 번영을 축복하신다.예언자들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어기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질타하면서 아울러 민족들이 평화와 일치를 이룬다고 예언한다.
신약 성경은 예수님께서 새 인류의 원형이시며 토대이심을 고백한다.예수님의 강생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예수님께서 참 사람이며 참 하느님이심을 보여 주며 이와 함께 새 인류가 걸어야 할 길을 나타내 보인다.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심으로써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과 같아졌다.새 인류는 예수님 안에서 비로소 자기완성에 이르게 된다.특별히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구원을 명백하게 드러내셨다.하느님의 사랑의 증거 안에서 모든 불화의 장벽은 허물어졌으며,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인종과 문화의 차이는 더 이상 분열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
성령이 함께 하는 교회는 구원의 성사로써 하느님과 깊이 결합하고 온 인류가 하나로 뭉치는 표징이며 도구이다.교회는 그 얼굴에 그리스도의 빛을,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보여 주신’친교‘를 드러냐야 한다.현대 상황에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 세상 한 가운데에서 교회가 해야 할 직무인 것이다.교회는 창조주 하느님께서 바라신 대로 인류 가족이 하나로 뭉쳐 실제로 평화를 누리도록 이 세상을 가꾸어야 한다.교회는 인류가 단일성에 바탕을 두고 공동선을 실현해야 할 이 세상을 ’세계 공동체‘라고 부른다(간추린 사회 교리 참조).
(가톨릭 사회 교리 주제편,146-147쪽)
(맨발 걷기/인왕산 11/21)
“가을은 경제인처럼 풍성하게 수확하고,
겨울은 종교인처럼 춥게 수양한다”
(계절과 사람/차영섭)고 시인은 말한다.
추운 날씨 이지만,
주님께서 주신 행복,
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