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2024. 2. 4(주일) - 주현절 후 다섯째 주일 - (2024년 5주)
제목;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성경; 사 40:21-31 (p.1014) (시 147:11-12, 382<432>, 354<394>, 5)
<예배의 부름> (시 147:11-12)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예루살렘아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시온아 네 하나님을 찬양할지어다”
I.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4년 첫 달을 보내고 둘째 달을 맞이하며 우리 주님의 사랑과 은혜, 평화가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아직 날씨가 차갑고 영동 지방에서는 폭설이 내렸다고 하지만 계절은 벌써 봄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오늘 4일 주일이 봄으로 들어간다는 입춘(立春)입니다. 입춘은 우리 날 24절기 중 새해의 첫째 절기이기 때문에 농경의례와 관련된 행사가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입춘이 되면 도시 시골 할 것 없이 각 가정에서는 기복적인 행사로, 원래 대구로 쓰지만 줄여서 ‘국태민안 가급인족’(國泰民安 家給人足)(나라는 태평하고, 백성은 평안하다)’, ‘개문만복래 소지황금출’(開門萬福來 掃地黃金出)(문을 여니 만복이 들어오고, 땅을 쓰니 황금이 나오네)’,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입춘이 되어 크게 길하고, 따스한 기운이 도니 경사가 많으리라) 등과 같은 입춘 축을 대문이나 문설주에 붙이고 복이 들어오고 크게 잘 되기를 소망합니다.
또 입춘 때가 되면 다가오는 1년 동안의 농사가 잘 되고 길한 일들이 많이 있기를 바라면서, 농악대를 앞세우고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걸립(乞粒)을 하고, 상주(上主), 옥황상제, 토신, 오방신(五方神)을 제사하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제주도에서는 입춘일에 큰굿을 하는데, ‘입춘굿’이라고 합니다. 입춘굿은 무당조직의 우두머리였던 수심방(首神房 = 큰무당)이 맡아서 하며, 많은 사람들이 굿을 구경하였습니다.
이 입춘일은 농사의 기준이 되는 24절기의 첫 번째 절기이기 때문에, 이때 파릇파릇 자라나오는 보리 뿌리를 뽑아보고 농사의 흉풍을 가려보는 농사점(農事占)을 행합니다. 또, 오곡의 씨앗을 솥에 넣고 볶아서 맨 먼저 솥 밖으로 튀어나오는 곡식이 그해 풍작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봄으로 접어든다는 입춘이 되면 농악대나 무당을 불러서 굿을 하거나 겨울 지나고 자라는 보리 뿌리를 뽑아 일년 농사 운세를 점쳐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무당이 굿을 하고, 농악대를 신나는 농악을 연주한다고 해서 풍년이 들고, 우리 옛말 대로 액땜이 되는 것일까요? 보리 뿌리가 무성하면 풍년이 들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이 아무리 굿을 하고 농악을 울리고 자연 현상을 보고 점을 치고 풍년이 오기를 기대하지만, 우리에게 풍년을 주고 형통함을 주며 특별히 마귀와 귀신들로부터 우리는 보호해 주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이 하나님을 나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2024년 한 해 하는 일 마다 잘 되고 삶이 형통하며, 대박이 터져서 부자가 되고, 복된 승리의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II.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사 40:21-31)은 바벨론에서 암담하고 괴로운 포로 생활과 좌절을 경험하고, 곤비하고 피곤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향하여 그들의 회복과 구원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앙망하고 바라는 것만으로 가능함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한국인들에게 매우 사랑받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라’, 또는 ‘바라’라는 단어는 성서에 많이 나오며 소망을 줍니다. 오늘 본문을 듣는 청중의 상황은 무기력과 좌절입니다. 이는 코로나 시대에 성도들이 겪은 상황과 유사합니다. 회복을 위하여 청중에게 필요한 힘은 장정의 힘도 아니고, 돈과 명예도 아닙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새 힘입니다.
* 이사야서와 오늘 본문에 관해서 :
우리가 잘 아는 대로, 66장으로 되어 있는 이사야서를 신구약을 상징하는 책으로 언급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실제로 이사야서는 1-39장과 40-66장 두 부분으로 나눈다면, 전반부 1-39장은 구약 39권을, 후반부 40-66장은 신약 27권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요즘은 이사야서를 1-39장, 40-55장, 56-66장으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흔히들 전반부 1-39장의 ‘예루살렘 이사야’와 구분하여 40-58장의 저자를 ‘제2이사야’, 56-66장의 저자를 ‘제3이사야’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사야서 각 부분의 시대적 배경을 보면, 제1이사야, 1-39장은 기원전 8세기 예루살렘 이사야의 사역으로, 하나님을 떠난 유다와 예루살렘의 죄악과 심판의 선포를, 제2이사야, 40-55장은 기원전 538년 바벨론 포로 공동체에게 전해진 유다의 회복을, 제3이사야, 56-66장은 포로 귀환으로 성전이 건축된 후 예루살렘의 공동체에게 전해진 말씀으로 남은 자를 향한 결단의 촉구로, 여호와 신앙의 본질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은 21절과 28절의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라는 수사의문문을 기준으로 두 단락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리고 이 두 단락은 다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비교 불가능한 전능하신 하나님(21-26), ②여호와를 향한 이스라엘의 탄식(27), ③하나님은 누구이신가(28-29), ④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는다(30-31)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세상 무엇과 비교 불가능한 전능하신 하나님(21-26)
오늘 본문은 “너희는 모르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한 처음부터 너희 인간에게 알려진 것이 아니냐? 땅의 터가 잡힐 때부터 잘 알고 있던 일이 아니냐?”(21, 공동번역)라는 수사의문문을 사용하여 세상 무엇과도 비교 불가능한 하나님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선지자는 이미 18-20절에서 하나님은 아무와도 비교할 수 없는 자임을 설명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을 그에게 비기겠느냐,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은 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궁핍한 자는 거제를 드릴 때에 썩지 아니하는 나무를 택하고 지혜로운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세우느니라”(18-20) 이와 같이 18-21절에서는 인간이 만든 우상과 대비하여 창조자 여호와의 절대 권능을 부각시킵니다.
그리고 22-24절에서는 피조물인 인간과 대비하여 창조자 여호와의 절대 권능을 부각시킵니다. 먼저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22a), 곧 여호와 하나님이 그가 창조하신 세계의 일부가 아니라 그 세계로부터 초월해 계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며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땅에 살고 있는 인간과 달리 땅 위 궁창에 앉아 계신다고 묘사합니다. 이어서 “땅에 사는 사람들은 메뚜기 같으니라”(22b)고 말하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땅을 초월하여 계신 하나님과 비견할 때 사람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를 강조적으로 전달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표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땅에 사는 사람들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요쉐베하’(ישׁביה)의 원형 ‘야솨브’(ישׁב)와 상반절의 “앉으시나니”(하이요쉐브/야솨브, ישׁב/הישׁב)에 해당하는 단어의 원형과 동일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동일한 단어를 사용해 하나님의 앉으심과 인간의 거주를 표현한 것은 둘 사이를 보다 뚜렷하게 대조하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은 ‘땅 위 궁창에 앉으신 분’이며, 인간은 ‘땅에 앉는 존재’라는 사실을 밝혀, 인간이 그 권위의 측면에 있어서 도저히 여호와 하나님과 필적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들이 메뚜기 같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입니다. 이 말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인간이 너무나 보잘 것 없고 초라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가 하늘을 차일 같이 펴셨으며 거주할 천막 같이 치셨고”(22c)라고 말하므로, 인간에게는 한없이 높고 광대한 하늘, 미칠 수조차 없는 하늘을 하나님은 얇은 천을 만져 펴듯이 자유자재로 그것을 조성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23)라고 말하므로 이 세상의 통치자들이 이 세상의 진정한 통치자인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인간은 겨우 심기고 뿌려진 그들은 하나님의 입김에 의하여 불려가는 초개와 같습니다(24, “그들은 겨우 심기고 겨우 뿌려졌으며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이 입김을 부시니 그들은 말라 회오리바람에 불려 가는 초개 같도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다른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25,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
2. 여호와를 향한 이스라엘의 탄식(27)
이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해 탄식하는 이스라엘에게 “어찌하여”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응답하십니다.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27) 하나님이 기약하신 포로의 기간인 70년이 지나갔습니다(2). 하나님의 심판을 감당하며 70년을 보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술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질문합니다. 여기서 ‘숨겨졌다’는 말은 탄식시에서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 13:1)와 같이 하나님의 공의가 현실로 나타나지 않을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내 길이 여호와로부터 숨겨졌다’는 말은 하나님이 나의 사정을 무시하시고 정당하게 다루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또 “송사”(미쉬파트, משׁפט)는 원래 재판정에서 이루어지는 법에 따른 공정한 판단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내 송사”는 ‘나의 권리’라는 의미도 있는데, “내 송사가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는 말은 ‘하나님이 마땅한 나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나의 마땅한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시고, 나의 사정을 무시하시는 분’이라고 불평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포로 70년이 끝나 회복의 때가 되었는데도, 하나님은 무관심하거나 무능하셔서 이스라엘의 권리를 찾아주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의심하고, 기다리다 지쳐서 신앙을 포기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탄식과 원망, 실망에 대해 27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게 한 말을 다시 받아 수사학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되물으면서, 하나님의 공의가 현실로 드러나고 포로 귀환, 해방이 성취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3. 하나님은 누구이신가?(28-29) : 전지전능하시고 능력과 힘을 주시는 분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28-29)
셋째 단락(28절)에서는 하나님이 비교 불가능한 분이라는 21절의 주제를 다시 언급하면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설명합니다. 이 질문도 수사학적 서술로부터 시작합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당연히 알고 있으리라는 서술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며,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이 땅 끝까지 창조하신 하나님은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또한 “명철이 한이 없으신”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분이십니다. 여기서 “한이 없으시며”(엔 헤케르, אין הקר)란 표현은 원래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아인’(אין)과 ‘측량하다’, ‘계수하다’는 ‘하카르’(הקר)의 연결어로 “명철이 한이 없으신”이란 ‘측량이 절대 불가능함’이란 뜻입니다. 이는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의 명철함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인지를 결코 파악할 수도 없으며 헤아릴 수도 없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런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피곤한 자와 무능한 자에 능력과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인간의 피곤함과 대조되는 “능력과 힘”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피곤하지 않으시고 곤비하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피곤하고 무능한 인간을 위해 힘을 제공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 70년 동안 경험한 힘은 강한 제국의 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경험하는 힘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이요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의, 제국의 힘이 아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을 받아, 매일 힘차게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생명을 살리는 복음의 증인이 다 되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4.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습니다(30-31).
포로의 끝을 기다리다 지친 이스라엘 백성의 현실은 피곤하고 곤비하며 무능한 자였습니다. 이 피곤과 곤비, 무능함과 대비되는 것이 능력과 힘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이런 피곤하고 무능한 인간에게 필요한 힘과 능력을 제공하는 분이십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30-31)
과연 참된 힘이란 무엇입니까?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에게서 오는 힘이 아닙니다. 인간적으로 최고의 힘을 가진 자인 “소년과 장정의 힘”은 소진될 것으로 의지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30). 오직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힘이 곤비하지 않고 피곤하지 않는 참된 힘입니다. 그리고 이 지치지 않는 참된 “새 힘”을 얻는 비결은 바로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입니다. ‘앙망한다’는 말은 ‘의지한다’,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오직 … 앙망하는 자”(웨코예, וקוי)의 원형 ‘카와’(קוה)는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 혹은 ‘위를 쳐다보면서 대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어두운 밤이 광명을 바란다’(욥 3:9,“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었더라면, 그 밤이 광명을 바랄찌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루 종일 노동한 품군이 품샀을 바란다’(욥 7:2, “종은 저물기를 심히 기다리고 품군은 그 삯을 바라나니”), ‘고난 가운데서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대망한다(시 25:5“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등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칠흑 같이 어두운 인생의 고난의 때일지라도 광명한 아침을 가져다주실 여호와 하나님을 참을성 있게 대망하는’ 자들은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여호와를 앙망하는”, 여호와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자에게 새 힘을 주십니다. “새 힘을 얻으리니”(야할리푸 코아흐, יחליפו כח)는 문자적으로 ‘그들은 힘을 움트게 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땅 속에서 새싹이 나오듯 새 힘이 지속적으로 솟구쳐 오르며 강성해지게 됨’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 것입니다. 본문의 동사 ‘야할리푸’의 원형 ‘할라프’(חלף)는‘나무에서 싹이 나는 것’(욥 14:7), ‘땅에서 풀이 돋아나는 것’(시 90:5)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는 ‘사역 능동형’(Hiphil) 3인칭 복수로 사용되어,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들에게 힘이 솟아나게 할 것’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은 물론 당신을 의지한다고 하여 금새 암울하고 고통스런 환경 자체를 뒤바꾸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를 의지하는 백성들에게 샘솟듯 솟구치는 능력, 왕성하고 지속적인 생명력을 부여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힘을 의지하여 현실의 어두움에 주눅 들지 않고 도리어 그 어두움 가운데서도 빛된 삶을 살며, 더 나아가 보다 적극적으로 찬란한 새벽의 여명을 열어젖히는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힘은 피곤하여 넘어지는 장정과 소년에게서 오는 힘이 아니라,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가는 힘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않는 힘이요,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한 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새 힘”은 오직 여호와를 앙망함으로부터 옵니다. 인간의 힘이나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여호와를 앙망하므로’ 참된 “새 힘”을 얻어, 오늘도 성도들을 넘어뜨리려는 악한 사탄의 세력과 대적하여 승리하고 이 힘든 세상을 힘차게 살아가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III.
독일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학 교수인 한병철 철학자가 2010년 독일에서 발간되어 2012년 한국어로 번역된 『피로사회』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습니다. 책 제목처럼 현대 사회는 우리의 삶 자체에 피로함, 피곤함이 붙어 있어서 우리를 지치게 하고 버겁게 합니다. 『피로사회』는 현대 사회의 성과주의에 대하여 날카롭게 비판한 책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현대 사회의 패러다임 전환을 예리하게 포착합니다. 자아와 타자 사이의 적대성 내지 부정성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냉전, 면역학, 규율사회)에서, 그러한 부정성이 제거된 사회, 부정성 대신 긍정성이 지배하는 사회로의 변화가 20세기 후반 이후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한 교수님은 이 새로운 사회를 ‘성과 사회’, 그리고 이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을 ‘성과 주체’라고 명명합니다. 과거의 사회가 금지(“해서는 안 된다”)에 의해 이루어진 부정의 사회였다면, 성과사회는 “할 수 있다”는 것이 최상의 가치가 된 긍정의 사회입니다. 이 사회에서는 ‘성공하라’는 것이 남아 있는 유일한 규율이며, 성공을 위해서 가장 강조되는 것이 바로 ‘긍정의 정신’입니다(“Yes, we can!”). 그러나 부정성에 의해 제약받지 않는 긍정성은 긍정성의 과잉으로 귀결되며 타자의 위협이나 억압과는 다른 의미에서 자아를 짓누릅니다. 오직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통해서 주체로서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자아는 피로해지고, 스스로 설정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좌절감은 우울증을 낳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한병철 교수님은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규율 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 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피로사회』는 이 성과 사회의 과잉활동, 과잉 자극에 맞서 사색적 삶, 영감을 주는 무위와 심심함, 휴식의 가치를 역설하며, 이러한 관점에서 ‘피로’의 개념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성과사회에서 ‘피로’란 할 수 있는 능력의 감소이고, 그저 극복해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하지만 무위의 가치에서 출발하는 한병철은 피로가 가진 또 다른 측면을 봅니다. ‘피로는 과잉활동의 욕망을 억제하며, 긍정적 정신으로 충만한 자아의 성과주의적 집착을 완화한다. 피로한 자아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는 유아론적 세계에서 벗어나 타자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다.’
한병철 교수님은 모든 권위를 타파하고 가장 완전한 개인의 자유를 실현한 서구 사회, 부정성이 거의 완전히 제거된 듯한 긍정성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의문, 다시 말해 “왜 우리는 여전히 진정 자유롭지 못한가?” “왜 우리는 행복하지 못한가?”라는 의문에 대해 명석한 답을 제시해줍니다. 그것이 바로 유럽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독일에서 이 책이 그토록 큰 영향력을 발휘한 이유일 것입니다.
이 한병철 교수님의 『피로사회』에서 묘사되는 성과 사회의 모습은 상당 부분 한국 사회의 현실과도 일치합니다. 이 점은 긍정의 힘을 통한 성공을 설교하는 처세 관련 책들이 한국의 도서 시장에서 얼마나 많이 팔리고 있는지를 보더라도 확인됩니다. 한국인이 바라는 이상적 사회의 모습은 아마도 능력(업적)과 성공의 일치일 것입니다. 불우한 환경을 딛고 노래 실력 하나만으로 오디션 프로그램의 우승자가 된 ‘허각’이나 ‘임영웅’에게서 사람들이 본 것도 그러한 이상입니다. 하지만 ‘능력(업적)=성공’이라는 이상은 능력(업적)을 최상의 가치로 만드는 성과 사회의 패러다임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결코 이상적인 사회의 목표가 될 수 없음을 『피로사회』는 깨닫게 해줍니다. ‘존재하려면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명제가 모든 개개인의 마음속에 내면화된 지상 과제가 될 때 사회는 한병철 교수님의 말대로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양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자유로운 것 같은데 일의 노예가 되고, 시간의 노예가 되고, 엄청난 성공을 원하는 것도 아닌데 끊임없이 남과 비교되어 마음이 너덜너덜해지는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맞나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고,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맞는지, 때로는 하나님 안에서 온전히 살고 신실하게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큰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요, 그저 나의 삶의 자리에서 소박한 행복을 누리며 살고 싶은 소시민적 삶마저 허락되지 않는 것 같아 낙심하기도 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해 주십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지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31)앞서 살펴본 대로 ‘앙망한다’는 것은 멈추어 있는 명사가 아니라 움직이는 동사입니다. 즉 ‘하나님을 앙망한다’는 것은 계속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힘을 독수리가 얻는 힘에 비교합니다. “새 힘”이란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올라가는 듯한 힘이며, 인간의 현 상황과 같은 피곤을 초래하지 않습니다. 새 힘을 얻은 자라면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않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연약하고 부족하기에 자신을 의지하면 무력해집니다. 우리는 연약한 나와 인간, 그리고 사라지고 말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오직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을 기다려야 합니다. 바라봄은 정지된 명사가 아니라 계속되는 분사 형태입니다. 즉 앙망함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계속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3:5)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루 하루의 삶이 참으로 고달픕니다. 그리고 나를 도와주실 하나님께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인간들에게 이시야 선지자는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21,28)라는 수사의문문을 통하여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환기시킨 후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지는 새 힘을 얻으리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이 매우 고달프고 힘들어서 포기하지 싶을지라도, 오직 여호와를 앙망함으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힘과 능력을 받아, 이 사탄(마귀)이 지배하는 힘든 세상에서 도전하고 싸우며 승리하고, 새 희망과 하존(비전)을 얻고 나눠주는 하존(비전) 메이커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샬롬!!
첫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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