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5-12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이사야 1장 2절-3절
이슬람권의 자살 특공대는 1987년 이스라엘을 겨냥한 민중 무장 봉기인 1차 팔레스타인 ‘인티파다’ 이후에 형성돼 2000년 12월에 2차 ‘인티파다’를 거쳐 무장 세력들이 전격적으로 자폭을 ‘순교행위’로 간주하면서 본격화 되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자살 특공대를 조직하고 그렇게 허망하게 죽을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의 경전인 코란에 명시되어 있는 ‘지하드’때문입니다. ‘지하드’는 성전(聖戰) 즉 ‘성스러운 전쟁’이라는 뜻으로, ‘지하드’도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자기 정화와 깨달음, 그리고 자기개발을 위한 스스로와의 싸움이 우선이고, 두 번째가 이슬람의 가치를 훼손했을 때, 적과 상대해 싸우는 외부 세력과의 전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살 세력을 조직한 급진세력은 두 번째 것만 강조하면서 ‘지하드 도중에 즉 성전을 하다가 죽으면 천국으로 직행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자살 특공대원들은 아버지가 이스라엘군에 의해 희생돼 고아로 자라면서 이스라엘과 서방세계에 뿌리 깊은 복수심을 갖고 있는 10대 후반이나 20대가 많습니다. 그런데 어이없는 것은 이렇게 자기가 죽을 줄 뻔히 알면서 자살 특공대에 지원하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 지원 비율이 50대 1이 넘으며, 이렇게 어려운 비율 때문에 자살 특공대에 선발되지 못한 젊은이들은 도리어 너무나 원통해 하는 모습으로 안타까워하면서 되돌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신앙, 즉 믿음은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기독교인이기에 이슬람교도들을 무조건 비판하는 시각에서가 아니라, 냉정하게 생각할 때, 신앙 즉 믿음이라는 것이 자신들이 이루고자 하는 것 때문에 하나 밖에 없는 귀중한 목숨을 그렇게 값없이 여겨도 되는 것이며, 그들이 자살하면서 또 다른 많은 희생자를 내므로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어도 무방하다는 것이 참된 믿음인지 생각해 보자는 말씀입니다. 정말 어이없는 생각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런 결론을 내리고 이렇게 불나비처럼 귀중한 목숨을 값어치 없이 여기는 모습은 그들도 믿는 다고 하는 ‘알라’ 즉 하나님에 대하여 대단히 잘못 알고 있으므로 인한 안타까운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인간의 생명을 그렇게 소중히 여기지 않는 존재가 하나님이라면 결코 참신이라 할 수 없을 것임은 분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러한 행위가 아무리 진지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참된 신앙의 행위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운 잘못된 믿음을 가진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신과 신앙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미신은 내게 있는 나의 소유물 즉 돈, 재물, 재능 등으로 신을 달래고 어르려고 하는 행위입니다. 그럴 때 내가 변화되려는 생각은 추호도 그리고 결코 없습니다. 오직 신을 이용하고, 변화시켜서 나의 목적을 성취하고자 할 뿐입니다. 그러나 절대자이신 신을 인간이 좌지우지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하고 그 신 앞에서 내가 날마다 변화되어 가는 것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신앙과 미신의 차이는 내가 변화하느냐? 아니냐? 에 따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그리스도의 아름으로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드리며 앉아 있다 하여도 하나님 그분을 나의 돈이나, 재능으로 달래고 얼러서 내 목적을 성취하려는 도구로 여긴다면 그것은 미신을 쫒는 행위에 불과할 것이며, 반대로 내가 예배를 통해서, 그분의 말씀 앞에서, 기도와 찬양을 하면서 날마다 변화하여 간다면 참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때 바뀌는 것은 단순한 외적 변화(change)가 아니라 내적변화(transformation)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미신에 빠지지 않고, 참된 신앙인, 참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두말할 것 없이 ‘우리가 믿는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바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알아야 바로 믿을 수 있고, 바로 믿어야 만이 참된 신앙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함께 생각해 보시며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을 회복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미리 아시는 아버지’ 이십니다.
마태복음 6장 7절에서 8절 말씀입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이 세상의 언어를 창조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조금도 오해 할 수 없도록 분명한 단어와 어휘를 사용하여서 하나님에 대해 직접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찬찬히 살펴본다면 도대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증언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이셨습니다. 그것도 우리를 아시는 정도가 ‘아버지가 아들을 아는 것만큼 너무나 잘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너희 아버지’라고 표현하신 것이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그렇다면 아버지 하나님의 특성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아버지의 특성이 있겠지만 오늘은 있어야 할 것을 미리 아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특성을 살펴봅니다.
무엇이 있어야 할 것인지 당사자인 젖먹이 어린 아들이 잘 압니까? 아니면 그를 양육하는 아버지가 더 잘 알겠습니까? 두말 할 것도 없이 양육하는 아버지입니다. 젖먹이가 젖을 달라고 해야만 젖을 주고, 옷을 입혀 달라 해서 옷을 입혀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지금 젖을 먹여야 할 때인지, 목욕을 시켜야 할 것인지? 아이보다 부모가 더 잘 압니다. 자식이 분명한 의사표시를 하지 못해도 미리 알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는 것이 부모이고, 이렇게 공급하고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 것이 아버지의 역할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서 호흡할 수 있는 공기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밝은 태양을 내일은 꼭 주셔야 된다고 금식기도 했기 때문에 태양이 높이 떠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결코 기도하거나 재촉하지 않았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절대 안 되는 공기와 태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집을 팔아 헌금하지 않았지만 비를 내려 우리가 마실 물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결론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 수 있도록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들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있어야 할 것을 미리 아시고 구비해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내가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이라면 어떤 방법을 쓰시더라도 주시는 분이시며, 반대로 내게 결코 필요 없는 것이라면 아무리 졸라도 주시지 않으실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필요한 것을 나보다 잘 아셔서 멀리 보시고, 세밀하게 보시고,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는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좋은 것으로 주시는 아버지’ 이십니다.
마태복음 7장 9절에서 11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라고 하였습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쁜 줄 안다” 는 말이 이 말씀을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표현입니다.
영화를 보다가 보면 극중에 눈물 한방을 흘릴 것 같지 않을 정도로 아주 악한 사람으로 나오는 사람이 자기의 가족이 죽거나 가까운 사람이 다치는 것을 보면 안타까워하면서 어울리지 않게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세상에 아무리 흉악범이나 사기꾼도 자기 자식은 죽도록 사랑합니다. 도둑놈이 도둑질하는 이유가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하는 짓은 아닐 것입니다. 비록 도둑질하지만 제 자식에게 과외공부 시키고 자기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면서 극단의 비교급을 사용하셨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으로 줄 줄 알거든, 하물며 아버지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내가 계획한 바가 무참하게 깨어질 때 절망합니다. 그것을 잘 말해 주는 것은 우리가 사업을 시작하는 ‘개업예배’는 드리지만 사업을 포기할 때 ‘폐업예배’는 드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실패한 그때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것을 계획하시고 계시는데, 우리는 그렇게 믿지 않고 절망하고 낙심한다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32장은 형 ‘에서’에게 사기 쳤던 야곱이 20년 동안 삼촌에게 살다가 더 이상 그것에 살 수 없게 되자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고향에서 복수의 칼을 갈고 있을 형 ‘에서’를 행각하면 두렵기만 합니다. 그래서 자기 식솔들을 세 때로 나누어 먼저 선물을 주어 보내고 자기 혼자 남아 얍복 강가에서 밤새워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자기 생명을 지켜 주시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밤새도록 뒹굴며 기도한 야곱의 환도 뼈를 꺾어 다리를 절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살려 달라는 기도를 한 야곱에게 엉뚱하게 응답하신 것이라고 보여 집니다. 그러나 결과를 보면 결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야곱을 찾아온 형 ‘에서’가 칼잡이 400명을 대동하고 와서 만나 본 동생 야곱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밤새 기도하느라고 땀을 흘렸고,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다가 넘어져 흙투성이가 되어서 꼬질꼬질한 모습에다가, 더 한심한 것은 절뚝발이 병신이 되어서 돌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복수하겠다고 서슬이 파랗게 칼잡이와 함께 달려온 그는, 너무나 초라하게 실패자의 모습으로 돌아온 사기꾼 동생의 목을 끌어안고 도리어 대성통곡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다리가 절게 된 것은 생명을 건 야곱의 절실한 기도에 하나님이 엉뚱하게 응답하신 아니시고, 야곱을 살려 주시고자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아주 합당한 은혜였습니다.
요셉이 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팔려가지 않았으면 결코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자기를 시기한 사울을 피해 다니는 도망자의 삶이 없었다면 결코 성군이 될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결코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기도하셨는데 지금 여러분에게 주어진 어떤 결과가 있다면, 그것이 혹여 여러분들께서 기도 응답으로 기대하신 것과 많이 다를지라도 우리에게 ‘더 좋은 것’으로 주셨을 것이라고 감사하시고, 아직 받으시지 않으셨으면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으로 주실 것임을 믿으시고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죽음의 순간에 받아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누가복음 23장 46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 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면서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일깨워 준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땅 위에서 끝나는 순간, 우리의 영혼을 받아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죽음의 순간은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음의 순간에 마지막으로 남기시는 말씀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 하나이다.” 라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맡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아버지께서 우리의 영혼을 손으로 받아 주시고, 책임져 주시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내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 가장 큰 선물>이라는 책을 쓴 ‘헨리 나우웬’은 공중 곡예사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서커스에서 가장 클라이 막스인 공중 곡예는 가장 중요한 법칙이 있습니다.
대게 한 사람은 줄사다리에 거꾸로 매달려 있고, 또 한사람이 다른 곳에서 날라 와서 거꾸로 매달린 사람의 손을 잡고 묘기를 보이게 됩니다. 그렇게 구경을 하다가 보면 다른 곳에서 날아온 사람이 가장 중요한 기술을 가진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람은 정작 거꾸로 매달린 사람입니다. 사실 날아오는 사람은 그저 거꾸로 매달려 있는 사람에게 손을 죽 펴고 그가 자기 손목을 잡아 줄 것을 믿고 내맡기는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날아가는 사람이 거꾸로 매달린 사람의 손을 잡으려고 하다가는 서로 손목이 부러지던지, 아니면 어긋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그와 같다고 결론을 짓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다 산 뒤에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 하나이다.”하고 두 손 들고 나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안전하게 받아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죽음의 순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이며, 영혼이 참된 안식을 얻는 순간인 것이며, 실패가 아니라 성공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 있을 때는 물론, 우리의 죽음도 책임져 주시는 분이시고, 죽음 이후에도 책임져 주시고, 뿐만 아니라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결론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 확실하게 말씀하신 결론은 “하나님은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신전에 앉아 있는 신상이나, 인간을 두렵게 만드는 가공할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마가복음 14장 6절을 보면 죽음의 순간이 임박했을 때,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절박한 순간에 아버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아버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신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만큼 절박한 순간에도 무시하지 않고, 언제나 다정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아빠‘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식으로 양육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그러나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 역시 주인의 구유를 알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알려 하시 않고, 깨달으려 하려고도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오늘부터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서 확실하게 아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미리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항상 더 좋은 것으로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살아있을 때는 물론이고, 죽음의 순간에 우리의 영혼을 받아 주시고, 죽음 이후에는 우리의 영혼을 맡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버지로서 늘 우리를 지켜 주시고, 아빠처럼 다정하게 사랑해 주십니다. 그리고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이름 높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