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벙이와 순악질 여사. 공동체의 규범을 말하다
길창덕의 만화에는 내용적인 측면에서 당대의 감수성이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70년대 군사정부가 주도했던 산업화 정책은 국가를 키우고 국민을 살찌우는 역할을 했지만, 정치적 불안은 지속됐고 국민적 피로감과 위기감이 상존했다. 이 시대를 대표했던 길창덕의 만화에는 희망과 불안이 함께했다. 만화평론가 박인하는 길창덕 만화의 감수성을 세 가지로 분석한 바 있다.(곽대원 외, 한국만화의 모험가들, 열화당, 1996, 박인하- 1970~80년대 어린이의 웃음과 희망을 그린 길창덕 中) 요약하자면 ‘핵가족, 골목, 반공’이다. 이를 보완하여 한 단어로 정의하자면 ‘공동체’라 할 수 있다. 길창덕의 만화에는 산업화와 농촌 붕괴에 따른 핵가족화 된 도시공동체, 전 국민이 동일한 초등교과 과정(당시에는 국민학교였다)을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는 교육공동체, 그리고 북한과 대치 상태에 있는 휴전국가이자 유교적 규범과 도덕관을 유지하고 있는 윤리공동체로서의 기초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길창덕 만화에 담긴 공동체 의식은 당대 사회가 국민에게 요구했던 도덕관과도 일치한다. 미국의 대표적인 신문만화였던 ‘블론디’가 미국 중산층의 풍요로운 삶을 조금은 한심해 보이는 샐러리맨 남편의 모습을 통해 극화하면서 전 세계인에게 미국식 삶을 동경하게 했다면, ‘꺼벙이’는 산업화와 도시화가 동시 진행되고 있던 서울의 일상을 한국 사회에 중계했다. 풍요롭지는 않았으나 도시화된 한국식 중산층의 일상이 꺼벙이를 통해 알려지면서 아이들에게 도시는 곧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농촌과 다른 양옥집과 전봇대로 대표되는 골목, 직장에 다니던 아버지, 서로 다른 계급의 자녀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지만 같은 숙제를 풀어야 하는 학교, 늘 실수하고 사고치는 아이들을 용서하고 그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어른들이 있는 사회. 당대의 시선으로 아이들에게 ‘꺼벙이네 도시’는 흥미진진한 모험과 도전의 공간이었다. 공동체가 제시하는 규범만 따른다면 누구나 불안을 떨치고 그 도시에서 희망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꺼벙이’가 아이들을 위해 아동잡지에 연재했던 명랑만화였다면 길창덕이 같은 시기에 연재한 ‘순악질 여사’는 어른들을 위해 여성지에 연재했던 4칸 시사만화였다. 정치풍자를 주 역할로 했던 신문 시사만화와 달리, 잡지에 연재되는 시사만화는 사회문화적 관심사를 주제로 했다. ‘꺼벙이’와 같은 맥락에서 ‘순악질 여사’ 역시 도시에서 직장인 남편과 사는 전업주부이다. 하루 종일 농사일과 가사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농촌 여성들과 달리 순악질 여사는 가사노동 외에는 일을 하지 않았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월급에 맞춰서 한 달을 계획적으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가 된 만큼, 당시의 주부들은 ‘근검절약’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유교적 규범을 지키는 한편 ‘허례허식’은 버려야 했다. 또한 또순이, 짠순이를 뛰어넘는 강력한 절약정신과 가족 내 대소사에 대한 의식개혁이 필요했다. 길창덕이 그려낸 ‘순악질 여사’는 당대 사회가 요구했던 이러한 역할모델을 명확하게 수행했다. 당대 최고 여배우였던 장미희가 순악질 여사로 분했던 동명의 영화가 제작됐고, 방송인 김미화가 순악질 여사로 분한 코미디 프로가 선풍적 인기를 얻으면서 국가 사회가 원했던 규범은 대중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미치고 펄쩍 뛸 일, 명랑한 사회를 만들다
길창덕은 정식 미술 수업이나 만화창작 수업을 받은 바 없이 독학으로 그림과 이야기를 공부했다. 이 때문에 같은 1세대 만화가라 할 수 있는 김용환, 김종래, 박광현 등과 같은 붓과 철필의 화려한 매력을 보여주지는 못하였다. 또한 만화의 서사적 매력 역시 제시한 바 없으니 요즘 만화와도 다르다. 하지만 만화를 만화적이게 하는 전통적인 요소에 있어서 길창덕의 학습력과 창조력은 천부적이었다. 그는 대상의 특징을 간단명료하게 선화로 표현하고, 생명과 움직임을 불어 넣기 위한 장치인 동작선과 상징적 기호 체계를 창안하여 능수능란하게 활용했다. 또한 다소 황당한 사건을 만들어 주인공에게 문제를 해결하게 했고 이를 통해 주인공의 성격을 부각시켜 이야기를 주도하도록 했다. 때문에 독자는 길창덕의 만화에 빠르게 몰입했고, 캐릭터 이미지를 오랫동안 기억했다. 만화적 기호가 넘쳐나는 캐릭터 중심의 에피소드형 만화, 이것이 곧 ‘길창덕표 명랑만화’가 지닌 매력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