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사막 교부와 초기 수도회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313)은 기독교 영성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변화를 초래했다. 순교의 시대가 끝났고 교회는 국가의 공적 기관이 됐다. 교회는 이 시기에 니케아 신조(325)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381)를 결정했다.
교회는 새로운 종류의 영적 위기인 자기만족, 기계적 성례, 영적 무기력과 싸워야 했다.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은 문화 기독교의 위협이었다. 이에 대해 신앙적 저항이 일어났다. 기독교인의 일부는 사막의 교부 안토니의 본을 따라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 카파도키아의 사막으로 들어갔다. 사막은 기독교의 종교적 이상을 찾는 비전과 두려움의 장소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찾았고, 악마와 싸웠고, 기도했고, 성경을 명상했고 금욕훈련(금식과 가난)을 실천했다. 사막의 영성 전통은 순교 영성과 수덕 영성을 계승하면서 새로운 조건 아래 제자직의 표준을 유지하려고 했다.
수도원 운동은 이러한 사막 영성을 계승했다. 동서방의 수도원 전통을 처음 형성한 곳은 아프리카였고, 아시아와 유럽으로 확산됐다. 훗날 수도원 생활이 사막이 아닌 마을에서, 독거가 아닌 공동생활로 변화했지만, 수사는 도시 생활, 권력과 부를 버리고 하나님을 찾는 길을 택한다는 점에서 사막 영성을 계승했다. 하나님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을 버리는 것은 신앙을 증언하는 최고의 방식이었다.
수사의 최종 목적은 ‘그리스도를 본받는’(imitatio Christi) 것이었다. 수사는 거룩한 삶을 통해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영적 경주자로 여겨졌다. 그들은 문자적으로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하면서 예수님의 삶을 모방했다.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마 9:12)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막 10:21)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막 6:8-9)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
1) 안토니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오스는 수사들이 안토니의 생애를 모방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성 안토니의 생애』를 기록했다. 안토니(St. Anthony, 251~356)는 고대 이집트 콥트인으로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18~20세쯤 부모가 사망하자 그는 성경의 말씀(마 4:20, 행 4:35, 마 19:21, 마 6:34)에 문자적으로 순종해서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제자의 길을 따라갔다. 그는 마을 근처에서 은둔자를 모방하며 노동하고 기도했다. 선한 사람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영적 장점을 배웠고 그것을 종합했다. 안토니는 사탄이 주는 생각의 유혹, 육체의 연약함, 정욕의 공격과 투쟁하면서 승리했다. 이 책은 모든 영적 승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안토니는 더 가혹한 방식으로 훈련한다. 철야하고 빵과 소금으로 식사하며 맨땅에서 잠을 잤다. “덕의 진보와 그것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서 물러남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목적을 향한 열망과 굳건함이다.”
그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무덤에 들어가 사탄과 전투했다. 엄청난 고문과 고통을 받아 죽게 되었으나 영적 전투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가 승리한 후 비전으로 주님을 만났다. 그의 나이 35세였다. 안토니의 질문과 주님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내가 고난 중에 있을 때 왜 처음부터 나타나지 않으셨는가?”
“나는 처음부터 너와 함께 있었고 네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잘 견디고 패배하지 않았기에 너를 도와줄 것이고 너의 이름이 모든 곳에 알려지게 될 것이다.”
안토니는 더 먼 사막으로 들어갔다. 나일강 건너 폐허가 된 요새에서 20년을 사탄과 싸웠다. 안토니를 모방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그의 봉쇄 처소가 개방됐다. 그가 밖에 나왔을 때 과거 청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은둔자로서 자신을 훈련하며 단순하게 살았지만, 사람들이 도움과 조언을 구할 때는 그들을 위해 봉사하고 병자를 치료했고, 귀신을 추방했다. 이것은 영적 수행의 목적이 자기만의 완성이 아니라 이웃사랑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가 머물렀던 사막의 산에는 수실(修室, cell)이 늘어났고 그는 많은 수사의 아버지가 됐다. 그렇게 새로운 기독교 영성 수도 생활이 시작됐다.
아타나시오스는 안토니를 죽음과 마귀를 이긴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으로 묘사했다. 사막은 사탄의 거처이고, 살기 힘든 반역의 장소이기에 수사가 시험당하고 정화되고 온전해지는 장소로 적합한 곳이다. 사막에서 수사의 투쟁은 사탄의 정사와 권세에 대적하는 것이고 영혼의 깊이로 내려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여정이다. 안토니는 사탄의 본토인 사막에서 그리스도의 도우심과 현존을 의지해서 전 생애와 에너지를 사탄과 투쟁하는 데 사용했다. 아타나시오스의 목적은 그리스도 승리의 능력이 인간 안에서 신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을 나타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인의 의지도 중요하게 부각 된다는 점에서 동방교회의 영성이 잘 드러난다. 사막 영성이 지닌 시험과 정화의 이미지는 아포파틱 영성과 조화를 이룬다.
안토니의 고통 15세기 미켈란젤로
2) 수도 생활의 형태
초기 사막의 수사는 금욕을 실천하는 은수자(隱修者, hermit)였다. 점차 은수자들의 수도공동체가 출현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이집트 ‘스케테’ 수도원(Skete monastery)이다. ‘스케테’는 이집트 북부 나일강 서쪽 스케티스 계곡(Scetis Valley)에서 온 콥틱어다. 이곳의 수사는 각각 격리된 공간이나 동굴에 기거하면서 가끔 함께 모였다. 스케테 수도원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마카리우스(Macarius)였다. 그 후 공동체 생활을 강조하는 ‘케노비틱’ 수도원(cenobitic monastery)이 등장했다. ‘케노비틱’은 그리스어 ‘코이노스’(koinos)와 ‘바이오스’(bios)의 합성어로 ‘공동생활’(共住)을 뜻한다. 서방 전통에서는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원을 ‘종단’(Religious order)으로 표현한다.
3) 파코미오스
파코미오스(Pachomios, 292~348)는 이집트 사막에서 처음 수도원 공동체 운동을 시작해서, ‘공동생활 수도원의 아버지’라는 명칭을 얻었다. 본래 로마 군인이었던 그는 314년 회심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사막에서 은수자로 살면서 안토니를 모방했다. 파코미오스는 많은 수사가 엄격한 은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318~323년 어간에 이집트 북부 나일강 근처 타베니시(Tabennisi)에 공동생활 수도원을 세웠고, 그곳에 필요한 『수도규칙』을 기록했다. 수도규칙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순종과 가난의 영성이었다. 그의 금욕적 수도규칙은 서방의 온건한 베네딕토 수도규칙과 대조를 이룬다. 수사들은 파코미오스를 ‘압바’(Abba)라고 칭했는데, 이 말은 후에 대수도원장(abbot)을 지칭하는 말이 됐다.
4)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
대 바실레이오스(330~379), 그의 동생 니싸의 그레고리오(335~395),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329~390), 바실레이오스와 니싸의 그레고리오 형제의 누나 마크리나(Macrina), 네 사람은 카파도키아의 교부로 알려졌는데, 4세기 소아시아의 수덕 신학의 중심인물이다. 특별히 카파도키아의 여성 수덕 수도원을 이끌었던 마크리나는 동생 둘을 수사의 길로 인도했다.
카이사레아 바실레이오스 나지안주스 그레고리오 나싸 그레고리오
⑴ 대 바실레이오스
카이사레아의 주교 바실레이오스(Basileios of Caesarea, 330~379)은 파코미오스의 영향을 받아서 카이사레아에서 수도원 운동을 발전시켰다. 그는 부유한 순교자 가정에서 태어났고, 카파도키아와 콘스탄티노플에서 법을 공부하고 수사학을 가르쳤다. 은수자 세바스테 유스타티오스(Eustathios of Sebaste)를 만난 후 회심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는 357년 팔레스타인, 이집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를 순례하면서 금욕주의와 수도원 운동을 공부했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수사가 됐다. 바실레이오스는 완덕에 이르기 위해서는 독수(獨修) 생활보다 공주(共住) 수도원이 우월하다고 생각해서 358년에 수도원을 설립했다. 그는 기도, 노동, 공동체 생활에 중점을 둔 『수도규칙』을 썼다.
초기 공동체 수도원에서 중요한 규칙은 노동, 순종, 가난이었다. 노동은 자신의 생계를 해결하고 다른 사람을 돕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밧줄, 광주리와 담요를 제작했다. 순종은 감사로 자아를 죽이고 공동생활에서 영적 은사를 나누는데 중요한 덕목이었다. 수사 공동체는 가난의 규범을 정하고 서로 순종함으로써 가난의 이상을 실현해 나갔다. 바실레이오스의 『수도규칙』은 동방 수도원의 중심 원리가 됐고, 그는 동방 수도원의 아버지로 알려졌다. 그의 저술은 실천적, 윤리적(수덕적) 신학을 강조했다.
바실레이오스는 삼위일체 교리를 확정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형성 과정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는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를 수도원으로 초대해서 오리게네스의 작품을 함께 연구했다. 그는 영적 성장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으로 이해했고, 영성에서 ‘부정의 방법’을 선호했다. 바실레이오스 영성의 중심은 ‘기억’이다. “기억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연합한다.” 기도, 성경, 예전, 성찬에서 기억의 역할은 “우리를 사랑으로 인도하고, 사랑은 말씀에 순종하게 하고, 우리를 보전한다.”
⑵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Gregorios of Nazianzus)는 수도원주의 이론가로서 높은 차원의 사색적인 신학을 전개했다. 그는 바실레이오스와는 달리 수사에게 육체노동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독서와 지적인 문화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오리게네스의 신비신학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아서, 영적 생활이란 물질생활을 떠나서 영적인 빛과 정화를 향해 가는 여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리우스주의와 투쟁한 정통파의 강력한 지지자였고,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 기간에 잠시 회의를 주재했다. 그는 영성과 신학을 결합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보였고, 삼위일체 개념 안에서 성령론을 발전시켰다. 그는 성령과 성자의 동일본질을 주장해서 삼위일체 발전에 이바지했다.(『성령론』 14, 16, 27) 사람들이 처음부터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없기에 구약에는 성부를 신약에는 성자를 그리고 성령을 점진적으로 깨닫게 했다고 한다. (『성령론』 26) 그는 또한 신화로 알려진 동방 정교회의 구원론에서 인간의 존재론적 변형을 이해하는 데 성령 신학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인간이 신화에 참여하는 것은 운명이나 본성이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사역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한다고 주장했다.(『성령론』 19, 『성령강림』 9)
⑶ 니싸의 그레고리오
니싸의 그레고리오(Gregorios of Nyssa)는 최초로 부정신학을 발전시킨 동방의 교부다. 그는 바실레이오스의 인도로 사제가 됐고, 그 후 니싸의 주교가 됐다. 376년 아리우스파에 의해 주교직에서 폐위됐고 2년간 망명 생활을 한 후 복귀했다. 379년 바실레이오스가 죽은 후 그는 삼위일체 교리를 변증했고, 동방 정교회의 정통신학을 결정하는 최고의 신학자이자 영성가로 인정을 받았다. 그의 대표작은 『모세의 생애』(The Life of Moses)와 『아가서 주석』(Homilies on the Song of Songs)이다. 『모세의 생애』는 두 권으로 첫째는 ‘덕의 완성’이고 둘째는 ‘관상’으로 구성됐다. 그레고리오는 중기 플라톤주의와 스토아 철학의 개념을 사용해서 단계와 상승이라는 관점에서 관상의 여정을 설명했는데, 오리게네스와는 대조적으로 그 여정은 빛이 아닌 어둠을 향한 여행이었다. 그레고리오는 모세가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 더 깊은 어둠의 구름으로 들어간 것을 영적 여정의 은유로 사용했다. 『아가서 주석』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경험되는 관상적 상승의 절정은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깊은 어둠이다. 따라서 영적 여정은 완전을 향해 진전하지만, 결코 완전에 도달할 수 없는 과정이다. 이것은 정교회 신학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본질상 질적 차이를 설명하는데 중요한 기초가 된다. 니싸의 그레고리오의 부정신학은 오리게네스의 사상과 함께 5세기 후반에 위-디오니시오스(Pseudo-Dionysius)의 사상과 결합 돼 동서방의 신비신학과 영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5) 요하네스 카시아누스
카시아누스(Ioannes Cassianus, 360~453)는 지금의 루마니아에 속하는 소스키디아(Schydia Minor)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았다. 청소년기에 친구 게르마누스와 함께 팔레스타인으로 가서 3년간 베들레헴에서 은수자 생활을 했고, 이집트 스케테 사막에 가서 많은 수도 단체를 방문하고 공부했다. 카시아누스는 그곳에서 에바그리오스의 영향을 받았다. 399년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모스(St. Ioannes Chrysostomos)와 합류했고 404년 크리소스토모스가 망명할 때 함께 로마로 왔다. 카시아누스는 414년 프랑스 마르세유에 이집트 스타일의 수도원을 설립했고, 에바그리오스의 부정신학을 서방교회로 전했다. 누르시아의 베네딕토는 카시아누스의 저술을 거룩한 책으로 지정하고 수사들이 읽게 했다. 그를 통해 이집트의 오리게네스주의와 서방의 수도원 운동이 교차-문화적으로 만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