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세기 무렵 '무정불성(無情佛性)'이라고 알려진 교리가 중국불교의 주석가들 사이에서 유행되었다. 이 교설에 따르면, 모든 유정 뿐 아니라 초목, 수목, 돌, 그리고 벽돌 그리고 먼지조차도 본래의 불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런 진술은 우리에게 친숙한 대승의 불이(不二)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보일지 모르겠다: 모든 것은 연기하므로 상주하는 실체 또는 '자성'이 없으며, 모든 것은 본래 순수하고, 공이며, 고요하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절대적인 영역(법신, 여래, 열반, 공, 본래의 마음, 부처 등등)과 온갖 살아있는 경험의 세계는 궁극적으로 구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정물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중세의 불교 학자들에게, 터무니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라도, 처음부터 이상하게 들렸을 법하다. 초기의 비판에서 지적된 것처럼, 그 교리는 권위있는 대승경전에서 불성을 유정중생에게만 명백히 제한한 유명한 구절을 부정한 것이었다. 더구나 무정이 실제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고 주장한 선례도 없었으며, 그것을 본 사람도 없다. 그에 대하여 '무정불성'의 옹호자는 방편(up ya)과 '교상판석(敎相判釋)'을 통해 그들의 입장을 방어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입장에 반대되는 경전의 구절을, 근기가 하열한 중생에 대한 대기설법 정도로 여기고 그 구절을 삭제했다. 논쟁은 중세를 통해서 지속되다가, 송대에 '무정불성' 교리는 천태와 선 양쪽에서 광범하게 수용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진언종, 천태종, 정토종, 그리고 일련종파의 창시자를 포함하는 일본의 저명한 승려들도 마찬가지로 이것을 수용했다.
무정 - 우리들이 자연, 또는 물질계의 일부라고 여기는 대상 - 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현대의 많은 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불교의) 중국화'라는 주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중국불교 전문가들 사이의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열정이었다) 무정불성의 교리는 특별히 흥미로운 것이었다. 학자들이 추정하는 바에 의하면, 본래적 불성에 대한 문제는, 부분적으로는, 전국시대부터 문제시되어온 철학적 주제이자, 중국적 고유 개념인 '성(性)'이나 '본성'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불성의 문제는 맹자의 성선설에 동조하는 방향으로 결론지워졌다. 성선설은 모든 존재가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대승불교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불성 이론 자체는 인도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이것은 여래장 사상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무정불성으로 확대된 것은 분명히 중국적인 혁신이다. 요약하면, 이는 독특하며 아마도 전형적인 '중국화'의 한 모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따라서, '무정불성' 교리가 성(性)과 관련한 유가(儒家)의 담론을 도용하고, 동시에 그것을 전면에 내세운 불교도의 노력의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다: 돌담이나 기와에까지 확장시킨 대승의 보편적인 불성에 비해서 유가의 성에 대한 담론은 상대적으로 세속적이고 편협한 것 같다.
본래의 불성에 대한 동아시아의 논쟁은 수세기 동안 지속되었고, 최근 일본에서 무엇이 '진정한 불교도'인가 하는 논쟁을 통해 다시 한번 등장했다. 요약하면, '비판불교'를 지지하는 두 명의 일본 학자 - 하카마야 노리아키(袴谷憲昭)와 마츠모토 시로(松本史郞) - 는 '불성'과 같은 형이상학적 절대는 석가모니의 원래의 가르침에 위배될 뿐 아니라, 일보불교의 승려의 도덕적 타락에도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궁극적으로 모든 구별은 환상이고, 모든 존재는 그들이 공요한 불성의 관점에서 평등하다는 교리는 진정한 평등과 사회정의, 그리고 정치참여의 필요성을 도외시하는 한 본질적으로 반동적이다.) 하카마야 노리아키와 마츠모토 시로의 '비판 불교'적 견해에 따르면 무정에까지 불성을 확대시킨 것은 해석학적 과잉과 지적, 더덕적 파탄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절대에 대한 무분별한 구체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정불성' 교리는 중국불교를 중국적이게 (아마도 일본불교를 일본적이게) 하는 열쇠를 갖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런 이유로 우리가 이 주제에 대해 관심을 표하는 것은 아니다. 이 교리가 자연에 대한 개념 및 환경과 생태학적 주제에 대한 인도불교의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는 가설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다. 겉으로 보면 '무정불성' 교리는 자연계를 평준화할 뿐 아니라, 우리의 위상을 우리가 존재하는 자연계와 따로 떼어서가 아니라 그 자연계 안에서 정립해 준다.
이것은 이제 친근한 주제이다: 우리는 서양사람들이 인간을 자연계의 바깥에 서 있는 지배자나 주인으로 위치지우는 것과 다르게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인간과 자연을 하나로 보는 관점을 반복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차이가 서로 다른 문화적 유산에서 기인하는 일련의 형이상학적 전제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본다. 인간의 영역과 자연계 사이의 존재론적 괴리에 대한 서구적 신념은 창조자와 창조물을 지속적으로 분리하는 유대 - 기독교의 일신론과 후기 데카르트주의에서 비물질적인 정신세계와 연장을 지닌 물질 세계를 구분하는 이원론적 관점에 근거한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도가나 신도(神道)와 같은 동아시아 고유의 전통은 우연성에 기초한 인간 경험의 영역과 진리의 영역 사이에 간극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국과 일본의 종교사상은 자연계를 정신적인 통찰, 자유, 그리고 해방의 장소라고 찬양한다. '무정불성'의 교리가 은유적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인간과 자연의 합일'이라는 중국적 세계관의 명시적인 표현인 것처럼 보인다.
물론 우리들의 형이상학적 직관은 특별한 언어적, 지적, 문화적 유산에 따라 만들어졌고, '동양'의 유산은 '서양'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의 자연에 대한 태도는 단순히 우리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세계관에서는 자연에 대한 우리(서구인들)의 개념에 대응하는 것을 포함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의문을 제기한다. 공유하는 인식론적 기초 - 다시 말해서 '자연'이라는 지시어에 대응하는 문화, 언어, 역사적 구별을 넘어선 공통된 지시체 - 가 없이 문화간의 총체적인 비교를 위한 지적 토대가 확립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수준의 공통성이 기초한 노력은 필연적으로 공허한 것이 아닐까? 혹은, 더 나쁘게는, 이러한 시도가 바람직스럽지 못한 이념적 선례를 제공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러한 어두운 해석학의 수면 아래는 피하려고 한다. 내가 볼 때, 무정불성에 관계되는 초기의 자료들은, '자연'에 대한 본래의 중국적인 관점에 대해서도 알려주는 바가 거의 없고, 현대의 생태학적 관심에 대해서도 할말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이 자료들은 무척 학술적이다 - 그것들은 제도적으로 인정된 다수의 인도와 중국의 문헌학적 권위에 기초를 둔 탄탄한 교리체계와 결합되어 있다. 이런 문헌에서 지지된 교리가 때때로 서로 상충되는 것은 오히려 해석학적 방법론이 갈수록 복잡하고, 난해해지는데 도움을 주었을 뿐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대부분의 중세 불교사상의 학술적 가치에 대해 기꺼이 인정하는 분위기이지만, 선은 종종 예외가 된다. 선은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통찰로 이끄는 엄격한 명상수행을 위해 학술적인 탐구를 기피하는 종파로 인식되고 있다. 선의 가장 특징적인 문헌 양식인 공안은, 따라서, 학자적인 정신에 필수적인, 추론에 대한 충동을 좌절시키는 시도로 이해된다. 그러나 '무정불성'에 대한 논의를 조심스럽게 재구성하다보면 선에 대한 색다른 견해를 접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추론적인 논쟁에 선사들이 적극적이고 열정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 이외에도,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무정불성' 교리가 모든 공안 중에서 가장 유명한 '조주의 개'가 함축하고 있는 문제의식과 바로 맥락이 닿아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나의 첫 번째 임무는 '무정불성' 교리에 대한 초기의 전개과정을 재검토하는 것이다. 관련된 자료들이 많은 역사적이고 교리적인 연구의 주제로 상세하게 다루어져 왔기 때문에 나의 재검토는 비교적 간략할 것이다. 오히려 나는 이 논쟁에 대한 선의 관련성이 서양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했으므로, 삼론, 화엄, 그리고 천태의 자료보다는, 초기선의 자료에 더 주목하고자 한다.
5세기의 승려인 도생(道生[1360-434])이 일천제(一闡提, icchantica)를 포함한 모든 중생이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이론을 최초로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 주장은 당시에는 논쟁거리였다. 법현(法顯)과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 Buddhabhadra)에 의해서 번역된 『열반경』 제6권에서는 불성은 영원하지만 일천제는 이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였으나, 도생(道生)은 일천제 역시 불성의 씨앗을 가지고 있으며, 언젠가는 부처를 이룰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경전의 내용에 동의하지 않았다.
도생의 입장은 담무참(曇無讖, Dharmaksema[385-433 또는 436])이 421년에 다시 한 재번역에 의해 진실임이 입증되었다. '북방의 전통'으로 알려진 이 번역본에는 '일천제'라는 주제에 대해 별로 볼 만한 것이 없다: 『열반경』은 처음에는 일천제가 불성을 가지지 않은 존재로 묘사되었다.(T.374:12.404c4-21); 그러나 후에 일천제도 깨달을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자비심을 일천제를 포함한 모든 존재에 베풀어야 한다는 식으로 교리를 완화했다(454a6ff., 456a24ff.); 부처는 일천제 중에서 적어도 몇몇은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설법을 했다(482b3-12); 모든 일천제는 불성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493b20ff); 그리고 일천제를 포함하여 모든 중생이 근본 번뇌를 버리기만 하면 최상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505c14-15).
담무참의 『열반경』 번역은 중국에서 불성의 보편성에 대한 가장 중요한 경증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 텍스트는 불성의 소유를 명백히 유정에게만 허용했다. "'비불성'은 벽이나 담, 기와나 돌과 같은 무정물을 말한다. 이러한 무정물을 제외한 모든 것은 '불성'이라고 불려진다." 이것은 『열반경』이 학술적 주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또 많은 논평의 주제가 되었던 시기인 남북조시대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견해이다.
『열반경』에 대한 권위있는 번역이 유행하던 시기로부터 한 세기가 지나서야 '무성불성'에 대한 교리상의 발전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열반경』의 불성과 '본래청정심' 사이의 관계에 관심을 가졌던 6세기 지론종의 주석가였던 정영사 혜원(慧遠[523-592])에 의해 창도되었다. 『대승의장(大乘義章)』에서 혜원은 '아는 불성(能知性)'과 '알려지는 불성(所知性)'이라는 중요한 구분을 설정했다. (T.1851:44.472c) 전자는 무명의 소멸을 통해 불성을 깨달을 수 있는 '진실한 마음(眞識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문헌에서 그는 "이 성품은 유정에 있는 것으로서 무정에까지 미치지 않는다."라고 설명한다.(472c18-19): 局在衆生 不通非情) 그러므로 『열반경』에서 불성이 오직 유정 중생에 한하는 것이라 말할 때는 '아는 불성'을 가리킨다. 후자인 "알려진 성품은 법의 성품, 실제, 실재의 특성, 법의 영역과, 가르침과 경의 최상의 의미인 공, 궁극의 진리 등과 같은 말이다."(472c22-23: 所知性者 謂女\知法性實際實相法界法經第一義空一實諦等) 경전에서 최상의 가르침을 '불성'이라고 부르거나, 또는 중도를 '불성'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알려지는 성품'을 가리키는 것이다. 혜원은 이런 불성의 특성은 안과 밖 어디에나 꿰뚫고 있다고 분명히 말한다. (472c25-26) 그리고 그것은 불성이 유정뿐 아니라 무정에까지 확장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혜워이 불서을 둘로 나눌 때, 순회된 '내용', 즉 불이론적 인식 유형으로서의 불성과 그러한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론적 근거로서의 불성을 구별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인식론과 존재론 사이의 구분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이런 개념적 구조에 따라 이 주제에 대한 이론화과정이 뒤따랐다.
혜원은 자신의 사상 속에(무정불성을 지지하는) 모든 요소를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 무정이 불성을 가진다고 명시적으로 말한 적은 없다. 그런 주장을 처음 한 것은 삼론종의 길장(吉藏[549-623])인 것 같다. 길장은 이 주제에 대해서 혜원과는 다소 다르게 접근했다: 불성의 두 가지 측면 - 한 쪽은 무정과 관계가 있지만 다른 쪽은 그렇지 않은 -을 구분하기보다는, 유정과 무정 사이의 구분은 그 자체로 궁극적으로 공허하다고 말했다.
따라서 당신이 어떤 것의 불성을 부인하려고 한다면, 풀과 나무도 불성이 없게 될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 역시 불성이 없게 된다. 그러나 당신이 불성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살아 있는 존재뿐 아니라 풀과 나무도 역시 불성을 지니게 된다...... 의존적인 것과 진실한 것은 따로 나뉘어지지 않았으므로, 만일 유정이 불성을 지니면, 풀과 나무도 반드시 불성을 지녀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유정 뿐 아니라 풀과 나무도 불성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만약 모든 법이 평등하며, 의존적인 것과 진실한 것이라는 두 가지 모습이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실제로는 얻음과 얻지 않음이라는 상(相)이 없다. 얻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짐짓 불성을 얻는다고 말한다. 따라서 유정중생이 부처를 이루는 그 때 모든 풀과 나무도 또한 부처를 이룬다.
길장에게 있어서 불성이라는 주제는 단지 공, 연기, 그리고 중도를 확인하는 하나의 유용한 수단일 뿐이며, 이 유용한 개념에 의지하여 모든 구분 - 유정과 무정의 구분을 포함하여 - 은 폐기되어야 하는 것이다. 불성은 유정에 의해 소유되거나, 그 안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며, 무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면서 길장은 그의 분석이 모든 구분이 사라지는 '通門'의 관점에서 나왔다고 인정하면서, 곧이어 그가 제시한 명제의 성격을 밝힌다. 그러나 '別門'의 관점에서는 어쨌든 유정과 무정을 구분할 수 있다:
유정은 마음에 미망이 있기 때문에 깨달음의 진리를 얻을 수 있다. 풀과 나무는 마음이 없으므로 미망도 없다. 유정중생이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꿈에서 깨는 것과 같다. 꿈을 꾸지 않으면, 꿈으로부터 깨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열반경』에서) 유정은 불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부처를 이루지만, 풀과 나무는 불성이 없으므로 부처를 이루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길장은 아마 처음으로 무정이 불성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어 선언하려고 하면서도, 『열반경』의 가르침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했으며, 깨달음의 성취가 오직 유정에게만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혜원과 길장 둘 다, 당시의 학술용어를 통해 불성의 보편성에 대한 메시지를 강조하는데 관심이 있었다. 그들이 유정/무정의 구분을 다루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이 문제가 교리에 대한 권위있는 텍스트였던 『열반경』 속에서 논의되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그들의 사상체계 안에서 유정/무정이라는 주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인상을 주며, '무정중생의 불성'을 옹호하거나 거부함으로써 그들이 어떤 실제적인 효과를 거두었는지 알 길이 없다.
당(唐) 초기에 보편적 불성, 또는 부처와 모든 중생이 궁극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교리는 많은 중국불교의 주석가들 사이에서 정설이 되었다. 이 사상은 다양한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그 중 대부분이 유정과 무정간의 구분을 간단히 날조했다. 전형적인 예가, 위경이지만 매우 영향력이 컸던 『원각경(圓覺經)』 - 7세기 중반 이후에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 에 있는 다음의 글이다.
지혜와 우치가 모두 반야로 통한다. 보살과 외도에 의해 설해진 가르침도 모두 똑같은 보리이다. 무명과 진여는 경계가 다르지 않다. 戒, 定, 慧, 그리고 ?, 怒, 癡는 모두 거룩한 행동이다. 유정의 모든 세계는 같은 법성을 나누어 지닌다: 지옥과 천당이 모두 정토이다. (불)성을 가진 자나 가지지 못한 자 모두 불도를 얻는다. 일체의 번뇌가 궁극의 해탈이다. 법계의 지혜의 바다는 모든 현상을 텅빈 허공인 양 비춘다.
智慧愚癡通爲般若. 菩藏外道所成就法 同是菩提. 無明眞女無異境界. 諸戒定慧及?怒癡俱是梵行. 衆生國土同一法性. 地獄天宮皆爲淨土. 有性無性齊成佛道. 一切煩惱畢竟解脫. 法界海慧照了諸相猶知虛空.
(T. 842: 17.917b3-8)
나는 불성의 유무와 관계없이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것이라는 특징적인 주장이,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유정과 함께 무정을 같은 범주에 포함시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주장되었다고 추측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경전의 유래에 대해서 의심이 간다.) 그 당시 불성에 대한 해석을 둘러싼 도전은 함축적이고, 포괄적이었다.
그러나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수사학적 정형화에 대한 요구가 늘어나면서 경전에서 인정된 유정과 무정간의 이분법을 파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주석가들은 혜원과 길장이 수립한 바 있는 해석학적인 전략을 다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화엄의 주석가인 법장(法藏[643-712])이 이 주제를 다룬 방식을 보자: 『대승기신론의기(大乘起信論義記)』에 보이는 법성의 의미에 대한 토론에서 법장은 "진여는 오염된 것과 청정한 것, 유정과 무정 모두에 편재해 있다"고 설명한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논서를 인용하면서 그는 계속해서 유정에 대해서는 진여가 불성이라고 불리고, 무정에 대해서는 법성이라고 불린다고 말했다. 그는 그의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에서 같은 요지의 발언을 하는데, 여기에서 그는 "삼승에 의해 가르쳐진 진여의 본성은 유정과 무정이 공유하지만, 오직 유정만이 불성을 깨달을 수 있다."고 쓴다. 혜원과 매우 유사하게, 법장은 『열반경』의 내용과의 모순을 피하면서 무정의 불성을 주장하기 위해 인식론과 존재론 사이의 구분에 호소한다. 그래서 길장의 절대와 우연 사이의 구분 (즉, 불이론적인 절대계와 우연성에 기초한 경험세계)에 더욱 가깝게 다가간다. 이 세 가지 경우 모두 경전의 권위에는 도전하지 않는다.
무정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교리의 완전한 발전은 보통 천태종, 특히 담연(湛然[711-782])의 저작과 관련되어 있다. 앞으로 밝혀지겠지만 그의 주장은 다소간 잘못된 것이다. 담연은 그 당시에 어떤 유명한 선사의 가르침을 따른 것 같다. 어쨌든 담연은 그 주제에 관한 한 『열반경』에 도전한 최초의 인물이다.
의식적으로 천태의 전통성을 구축한 담연은 그의 주장이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마하지관(摩訶止觀)』 속에 선례가 있다고 주장한다. 담연은 후대의 전통에 의해서 천태의 가르침의 정수를 표현한 것으로 인정받은 그 작품에 대한 관정(灌頂[561-632])의 서문을 언급했다. '원돈(圓頓)' 행에 대해 관정은 이렇게 말한다: "(마음이) 법계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 즉 (매) 순간의 생각이 법의 영역(과 하나일 때) - 하나의 형상, 혹은 하나의 냄새도 중도 아닌 것이 없다." (T.1911: 46.1c24-25: 繫緣法界 一念法界 一色一香 無非中道) 그의 『지관보행전홍결(止觀輔行傳弘決)』에서 담연은 하나의 형상 또는 하나의 냄새에 대한 이런 언급은 무정물에 대해서도 불성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마하지관의 동질성의 원리에 근거하여 『마하지관』은 "각각 그리고 모든 색깔과 냄새는 중도이다"라고 말한다. '색깔'과 '냄새'는 말할 나위없이 무정물이다. 어쨌든 색깔과 냄새가 중도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무정이 불성을 (가진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거슬리는 소리는 귀에 대한 것이고, 망설이는 것은 마음에 대한 것이다.
사실 지의나 관정이 분명한 어조로 무정중생의 불성을 옹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열반경』에 대한 그의 주석에서 관정은 무정은 불성을 가지지 않는다고 분명히 진술한다: "유정에게는 불성이 있는 반면, 풀이나 나무에게는 불성이 없다; 풀과 나무 등은 그 자체의 본성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의 주장을 선배들의 저작과 연결시키기 위해서 담연은 방편을 사용했다: 그는 관정이 무정의 불성을 완전히 이해했으나 시기가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기를 주저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담연이, 적어도 천태종 내에서, 자신의 위치가 특이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 그가 죽기 얼마 전인 780년경에 쓴 『금강비(金剛 )』의 서두에서 그 사실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 짧은 논문은 관정이 '무정불성' 교리를 천명하고, 한편으로 방어하는데 공헌했다. 그 문헌은 저작경위에 대한 자전적인 서술로 시작된다: 어느 조용한 밤에 담연은, 모든 대립적인 것들의 합일, 한 순간의 생각 속에 모든 생각이 현존한다는 것 등 뛰어나면서도 치밀하게 조직된 천태의 가르침을 숙고하고 있었다. 담연은 그러던 중 "황홀경 속에서 잠에 빠졌고, 잠재의식에서 나는 '무정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문헌의 나머지 부분은 그가 꿈에 나타난 대담자와 토론한 기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논서는 갑자기 다음과 같이 끝난다. "나는 돌연 꿈에서 깨어났다. 질문자와 응답자, 질문과 대답 모든 것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주목할 만한 고백이다: 한 편에서 담연은 '무정의 불성'에 대한 그의 입장이 근본적으로 천태의 철학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의 사상이 영감을 주는 꿈 속에서 형성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의 생각의 독창성을 시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담연이 지지하고 있는 입장의 요점은 매우 단순하다: 대승의 교리는 불성의 보편성을 주장하고 유정과 무정사이의 구분을 궁극적으로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완전한 (가르침)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절대적인 원리가 둘이 아니며, 마음과 떨어진 대상이 없음을 알고 있다. 그러면 누가 유정인가. 그리고 무엇이 무정인가? 법화의 세계 안에서는 어떤 구별도 없다. (병을 고치는 세 가지의) 약초와 (두 가지의) 나무, 그리고 (그들이 자라는) 토양 또는 (그것들을 구성하고 있는) 네 가지 원소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담연에 따르면 『열반경』에 있는 '무정불성'을 부정하는 구절같이 반대되는 진실은 반어법(pratipak a)로 이해되어야 한다 - 그런 말들은 특정한 오해를 막기 위해 방편적인 해독제로 쓰인 것이며, 따라서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무정불성' 교리에 대한 담연의 접근은 그의 선배들의 영향을 보여준다: '원리' 또는 '마음' 같은 절대자에 호소한 그의 경향은 혜원의 지론에 대한 주석을 상기시키며, 유정/무정의 분류에 대한 그의 비판은 길장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여기에는 차이점이 있다. 첫째, 담연은 『열반경』의 일부분을 방편 또는 임시적인 가르침으로 여기고 기꺼이 그것을 버리려고 했다. 둘째, 여기에는 법화세계의 비유적 표현에 대한 담연 특유의 상상력이 있다. 그것은 초기의 『열반경』 주석가들의 다소 삭막한 추상화로부터, 바로 깨달음의 장소로서의 현상계에 대한 더욱 詩적인 관점을 담은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담연에게 있어서 무정이 불성을 지닌다는 주장은 생명없는 대상에 실현될 수 없는 잠재력을 부여한 것도 아니고, 절대적 진리에 대한 관점을 보여주는 순수한 형이상학적 이론도 아니다. 그보다 담연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색깔과 냄새가 그대로 법화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것들은 불성에 대한 직접적이고, 순수한 표현이다.
담연은 '무정불성'의 교설을 방어하기 위해 논서 전체를 바친 최초의 인물이다. 『금강비』가 그가 쓴 유일한 논서이고, (남아 있는 그의 자료는 대부분 주석이다) 또 그것이 그의 생의 후반부에 쓰여졌다는 사실은 이 교리가 그에게 특별히 중요했음을 의미한다. 왜 그는 그렇게 많은 노력을 무정불성이라는 특이한 학문적 관심에 쏟았던가? 확정적으로 대답하기에는 가용한 재료가 불충분하지만, '무정불성' 교리가 8세기 불교계에서 절박한 현안으로 등장했다는 증거가 있다. 담연의 저작은 지론, 삼론, 화엄의 초기 주석가들에 의한 학술적 논의와 관련되었다기 보다는, 그와 동시대의 인물들에 의해 개진된 비정통적 입장 - 초기 선의 전통과 관련된 -을 변호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돈황에서 발견된, 북종과 관련이 있는 문헌인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는 정각(淨覺[683-ca.750])의 저술로서, 개원(713-742) 초기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정의 불성에 대한 주제는 四祖 도신(580-651)의 기록에서 처음 언급되었다. "『열반경』에 이르기를 '모든 존재는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만약 벽, 담, 기와, 돌이 불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그들이 법을 설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五祖 홍인(602-674)의 전기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홍인이) 말했다. "부처님은 32종의 몸의 특징이 갖추어져 있다고 하는데, 항아리에도 32종의 특징이 있는가? 흙, 나무, 기와, 돌에도 32종의 특징이 있을 것인가?" ...그가 또 말하기를 "그대들이 바로 절 안에서 좌선하고 있을 때, 산 중 숲 속에도 그대들 몸이 가서 좌선하고 있는가, 아닌가? 모든 정원이나 건물들도 역시 마찬가지로 좌선할 수 있겠는가, 아닌가? 그 정원과 건물들도 역시 마찬가지로 형태를 보고 소리를 듣고, 옷을 입고 밥그릇을 가질 수가 있겠는가, 아닌가? 『능가경(楞伽經)』에서 '객관 영역의 법신(境界法身)'이라고 하는 말은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도신과 홍인 둘 다 『능가경』과 밀접하게 관련된, '일체가 마음'이라는 교리를 언급하고 있을 뿐 아니라, 주체적 세계와 객체적 세계의 불이를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보기에, 모든 생명없는 존재조차도 불성을 지니고 있고, 그리고 '법을 설한다'는 추론으로 몰고가려는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도신과 홍인의 가르침을 정확히 묘사했는지, 아니면 오히려 『능가사자기』의 편집자(혹은 편집자들)의 생각을 대변한 것인지 확인할 수는 없다. 아래에서 보겠지만, 또 다른 유명한 문헌인 『단경(檀經)』에서는 홍인을 '무정불성' 입장을 지지하기보다는 거부하는 인물로 묘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경전에 쓰인 구절은 담연이 그의 과업을 시작하던 시기인 8세기초의 선사들 역시 이 주제에 관심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능가사자기』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절관론(絶觀論)』은 우두종 계통과 관련이 있는 짧은 문헌이며, 여섯 종류의 사본이 돈황에서 발견되었다. 그 문헌은 보리달마, 혹은 하택신회(荷澤神會[684-758])나 우두법융(牛頭法融[594-657])이 저술한 것으로 인정되어 왔으나, 아마도 담연이 '무정불성'에 대한 그의 입장을 공식화하던 시기인 8세기 후반 어느 때인가 후기 우두종의 조사들이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이 문헌은 입리(入理)라는 스승과 그의 제자인 연문(緣門)간의 대화방식으로 되어 있다. 문헌의 삼분의 일쯤을 읽어가다 보면 다음과 같은 문답을 만날 수 있다:
제자가 물었다. "도는 오직 그것이 구현된 정신적 존재 속에서만 발견됩니까, 아니면 풀이나 나무 등에도 있습니까?" 스승이 말했다. "어디에나 도가 있지 않은 곳이 없다." (제자가) 묻기를 "도가 어디에라도 있다면, 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이고, 반면에 풀이나 나무를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닙니까?" (스승이) 답했다. "이것이 죄인지 아닌지를 말하는 것은 유정만이 관련된 일이고, 그러므로 바른 도가 아니다. 오직 세속의 사람들은 도의 진실함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고 개인적 자아에 대해서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살인에는 정신적인 (의도가) 수반된다. 이런 의도는 업의 과보를 낳기 때문에 이것을 죄라고 한다. 풀이나 나무는 유정이 아니고, 본래 도와 조화되어 있다. 그것들은 자아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그것들을 죽이는 것에 대해 따질 만한 것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이 죄인지 아닌지 논쟁하지 않는다.
이제, 자아로부터 자유롭고 도와 조화된 사람은 자신의 몸을 풀이나 나무를 보듯 보게 된다. 그는 자신의 몸이 잘리는 것을 숲속의 나무가 그런 것처럼 견딜 수 있다. 그런 고로 문수사리가 고타마(부처)에게 칼을 겨누거나, 앙굴리말라가 석가모니에게 칼을 들이댔을 때도 그들은 모두 도와 조화된 채로 있었다. 그들은 무생(無生)을 깨달았고, 그리고 무상한 변화의 세계의 공함과 비존재성을 완전히 이해했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죄인지 아닌지 논쟁하지 않는 것이다.
(제자가) 물었다. "만일 풀과 나무가 오랫동안 도와 조화되어 있다면 왜 경에는 풀과 나무가 부처가 되었다는 예를 기록하지 않고 오직 사람만이 (부처가 되었다고) 합니까?" (스승이) 답하였다. "그들은 사람만 기록한 것이 아니고, 풀과 나무도 마찬가지로 부처가 되었다"고 기록했다. 경에 이르기를 '티끌만한 먼지 하나도 모든 법을 포함한다.'고 했고, 또 다른 경에서는 '모든 법이 그러하며, 모든 유정 또한 그러하다.'고 했다. 진여는 둘이 아니며 차별이 없는 것이다.
이 문헌의 논의는 위에서 언급했던 삼론, 화엄, 그리고 천태의 권위자들이 했던 논쟁과 비교할 때, 중요한 점에서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 『절관론』은 중생의 관점에서 볼 때, 풀이나 나무가 무정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마음과 정념(情念)이 결여되어 있고, 따라서 '나' 또는 '나의 것' 이라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도와 조화되어 있다." 논문은 무정물이 실제로 부처를 이룬다는 견해에 대해 경전에 근거가 있다고 주장하는 데까지 이른다. 불성에 이르는 길은 무정중생이 되는 길이다: 우리는 분별을 끊어야 하고(絶觀), 무심해져야 한다. 그러면, 풀이나 나무처럼 道와 하나가 될 것이고, 죽음과 전적으로 관계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무정불성' 교리는 전통적으로 승조가 지었다고 하는 『보장론(寶藏論)』에도 그 단서가 보이지만, 이 논문은 8세기 말에 쓰여진 것이다. 이 문헌은 일반적으로 볼 때 초기 선과 관계가 적으나, 특별히 우두종계열과 관련하여 제3장에서 '무정불성'의 교설과 일치하는 간략한 글귀를 발견할 수 있다.
경전에 이르기를: "불성은 동일하고, 무한하며, 헤아리기 어렵다." 중생과 부처는 차이가 없다. (불성은) 모든 것에 가득하고 풀이나 나무에도 깃들어 있으며, 개미에게도 완전히 퍼져 있으며, 가장 미세한 먼지나 털끝에도 있다. 불성이 없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무성불성'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매우 드물게 개미가 언급되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시사를 한다. 왜냐하면 이 교리의 발전에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르는 장주(莊周)의 글을 언급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아래를 보라)
연수(延壽[904-975])에 의해 편집되고 961년에 출판된 『종경록(宗鏡錄)』의 '무성불성'론에 동조하는 주장이 북종의 선사인 신수(神秀[605-706])의 글에서 발견된다. 신수는 "유정이 수행을 할 때, 무정도 또한 수행을 한다.(卽有情修證 是非情修證)"고 가르쳤다. 자기와 남, 또는 유정과 무정 사이에는 궁극적으로 어떤 구분도 없다. 『종경록』이 비교적 후기의 것이므로 신수의 가르침을 그대로 반영한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수의 논조가 '무정의 불성' 교리와 '북종선'의 거장을 연관시키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단편적이지만 명백한 증거들은 '무성불성' 교리에 대한 혁신적인 해석에 대한 초기 선사들의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문헌들은 '무성불성'론을 단지 보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근거로 묘사한 것도 아니요, 유정과 무정간의 불이에 대한 논쟁으로 압축시킨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오히려 이들 북종선과 관련된 문헌들은 모두 유정이 실제로 '수행'하고 '부처를 이룬다'고 말한다.
그러나 초기 선의 지도자들이 모두 여기에 동의한 것은 아니다. 어떤 저명한 인물들은 '무성불성' 입장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무성불성' 교리에 대해 가장 호된 비판 중의 하나는 신회에 대한 기록에서 발견된다. 거기에서 그는 그 주제에 대해 우두종의 상대와 논쟁하고 있다.
우두산의 선사가 물었다. "불성은 모든 유정에게만 충만하고, 모든 무정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대가 말했다) 나는 옛사람이 '푸른 대나무 모두가 법신이요, 흐드러지게 핀 노란 꽃은 반야 아닌 것이 없다.'고 한 것을 들었다. 자, 그대는 왜 (불성은) 오직 유정에게만 충만하고 무정에게만 없다고 하는가?" (신회가) 답했다. "분명히 그대는 푸른 대나무의 장점이 법신과 같거나 또는 피어 늘어진 노란 꽃의 지혜가 반야와 같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대나무숲과 노란 꽃이 법신과 반야와 같다면, 어느 경전에서 여래께서 푸른 대나무 또는 노란 꽃이 깨달음을 가진 경우를 기록하고 있는가? 푸른 대나무와 노란 꽃이 법신과 반야와 같다는 생각은 이단의 교리이다. 왜 그런가? 『열반경』에 이르기를 '불성이 없는 것은 무정이라고 간주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논의될 또 다른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이 문답은 8세기 중반에 '무성불성'이 논쟁의 중심 주제였음을 보여준다. 더욱이, 신회와 그의 추종자들이 '무성불성' 논제를 그들과 북종의 라이벌을 구분하는 수단으로 여겼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있다: 『능가사자기』는 五祖 홍인을 '무성불성'의 지지자로 묘사하는 반면, 『단경』에서는 그 교설을 거부하는 것으로 그렸다. 돈황본 『단경』과 가장 가까운 판본에 있는 홍인의 '전법계'는 다음과 같다.
유정이 와서 씨뿌리니, 무정의 꽃이 피어난다.
정도 없고 씨앗도 없으니, 마음 땅에 아무 것도 생기지 않는다.
게의 교리적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조당집(祖堂集)』,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그리고 1291년에 출판된 『단경』의 유통본에서 발견되는 게송에서 홍인이 '무성불성'에 대해서 정반대되는 논리로 말을 바꾼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유정이 와서 씨뿌리니, 땅에서 열매가 생긴다.
정도 없고 씨앗도 없나니, (불)성도 없고 어떤 것도 생기지 않는다.
有情來下種, 因地果還生. 無情卽無種, 無性亦無生.
단어가 바뀌었을 뿐 아니라, 가장 후기의 판본에서는 혜능의 자서전적인 이야기가 게송에 덧붙여진다: 게송은 혜능이 법을 받은 은밀한 전법의식에서 등장한다. 전법게는 아마도 스승의 특징적인 '가르침의 형태'일 뿐 아니라, 그의 지혜의 정수를 구체화한 것이다. 따라서, 홍인의 게가 '무성불성'의 논제를 반박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신회와 그의 추종자드은 분명히 '무성불성'의 교리가 그들과 북종의 라이벌을 구별하는 '쐐기와 같은 주제'라고 보았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홍인이, 『능가사자기』에서 그가 취한 입장과 정반대되는 입장을 옹호하는 것으로 묘사했던 것이다.
당 중반에 남종이 우세하게 되자, 마조도일(馬祖道一[709-788])의 제자인 대주혜해(大珠慧海)를 포함한 조사들은 '무성불성'에 대한 신회의 입장을 재천명하였다. 혜해는 '무성불성'의 주제에 대해서 몇 줄 언급하고 있는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돈오요문』 제2권에는 그 주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세 개의 문답이 실려 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법신이 형상이 없으나 대상에 따라서 형상을 나타내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푸르게 우거진 대숲을 보고는 모두 법신이라고 하고, 흐드러지게 핀 노란 꽃을 모두가 반야라고 한다. 노란 꽃이 반야라면 반야는 곧 무정물과 같을 것이요, 푸른 대가 법신이라면 법신은 곧 초목과 같아서, 어떤 사람이 죽순을 먹으면 모두가 법신을 것은 것이 되니…
화엄을 강의하는 강사가 물었다. "선사께서는 왜 푸르게 우거진 대나무는 모두가 법신이고, 흐드러지게 핀 노란 꽃은 반야 아닌 것이 없다는 말씀을 인정치 않으십니까?" 대사가 대답했다. "법신은 형상이 없는데 푸른 대에 응하여 형상을 이루고, 반야는 지각이 없는데 노란 꽃에 응하여 드러난다. 저 노란 꽃이나 푸른 대 그대로가 반야와 법신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시기를, '부처님의 참 법신은 허공과 같은데, 물건에 따라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 마치 물 속에 달과 같다.'라고 하셨다.…
화엄경을 강설하는 강사가 물었다. "선사께서 무정이 부처란 말을 믿습니까?" 대사가 대답했다. "믿지 않는다. 만일 무정이 부처라면 산 사람이 오히려 죽은 사람만 못하고, 죽은 당나귀나 개가 사람보다 나을 것이다. 경에 이르기를 '부처의 몸은 법신이니, 계, 정, 혜에서 생기고, 삼명과 육통에서 생기고, 온갖 착한 법에서 생긴다.' 했는데, 만일 무정이 부처라면 대덕이 지금 당장 죽으면 반드시 부처가 되어야 할 것이오."
혜해가 신회의 저작에 나오는 것과 똑같은 질문에 응답하면서 '무성불성' 교리를 단순히 불합리한 것으로서 비슷한 논조로 논박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
황벽희운(黃壁希運[?∼850])은 '무성불성' 주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불성을 유정중생에게만 한정시킨 또 다른 인물이다. 그의 기록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읽을 수 있다:
선사께서 상당하여 말씀하셨다.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 위로는 모든 부처님에게 이르고, 아래로는 땅에 기는 것에까지 이른다; 모든 유정중생은 불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일시의 본체에 있어서는 모두 동등하다. 보리달마가 서쪽에서 온 이유는 일심법을 전하기 위해서이고, 모든 존재가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바로 가리키기 위해서이다."
황벽의 논리는, 골자만 말하자면, 단순명료하다: 부처는 마음이기 때문에, 오직 마음을 가진 것만이 부처이다. 역설적이지만, 마음과 부처의 동일시는 남양혜충(南陽慧忠[675-775])이 '무성불성'을 옹호하기 위해 개진한 설득력 있는 진술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신회와 동시대 인물인 혜충은 후기 선 전통에서 무정중생이 불성을 가졌을 뿐 아니라, 실제로 "법을 설한다"고 가르친 것으로 전해지는 인물이다. 우리는 이미 『능가사자기』에서 제 四祖가 이 문제에 관한 한 한 세기 정도 앞선 것을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에 대한 혜충의 위치는 아마도 이 논쟁의 역사에서 가장 발전된 것일 것이고, 따라서 나는 이 주제에 대한 그의 논의를 장황하나마 모두 인용하고자 한다.
한 선객이 물었다. "어떤 것이 '옛 부처의 마음'입니까?" 대사께서 말하였다. "담, 벽, 기와 그리고 돌 같은 무정물 모두가 옛 부처의 마음이다." 선객이 말하였다. "이는 경전의 말씀과는 매우 어긋나는군요. 『열반경』에서는 '담, 벽, 기와 그리고 돌 같은 무정물을 여읜 것을 불성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말씀하시기를 온갖 무정물이 부처의 마음이라 하시니, 마음과 성품의 관계를 고려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마음과 성품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대사가 말하였다. "미혹한 사람에게는 다르거니와 깨달은 사람에게는 다르지 않느니라" 선객이 말했다. "또 경과 어긋납니다. 경에서 말하기를 '선남자야, 마음은 불성이 아니니 불성은 항상함이요, 마음은 무상이니라' 하셨는데, 오늘은 다르지 않다고 하시니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대사가 말하였다. "그대는 말에만 의지하고, 뜻에는 의지하지 않는구나. 마치 겨울에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되었다가 봄이 되면 얼음이 풀려 물이 되는 것과 같이, 중생이 미혹할 때에는 성품이 엉기어 마음을 이루고, 중생이 깨달을 때에는 마음이 풀려 성품이 된다. 그대가 만일 무정물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꼭 집착한다면 경전에서도 삼계가 마음 뿐이고, 만법의 식뿐이라고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화엄경에서 삼계의 모든 법이 모두 마음으로 지어진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제 그대에게 묻노니, 무정물은 삼계의 안에 있는가? 아니면 삼계의 바깥에 있는가? 그것은 마음인가? 마음이 아닌가? 만일 마음이 아니라면 경전에서 삼계가 마음뿐이라고 하지 말았어야 할 것이고, 만일 마음이라면 (경전에서) 무정물은 불성이 없다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경전을 어긴 것은 그대이지 내가 아니다."
선객이 물었다. "무정물에게도 마음이 있다면, 그들은 법을 설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대사가 말하였다. "그들은 장엄하게 설하고 항상 설하되 계속 설하여 쉴 사이가 없느니라." 선객이 물었다. "그러면 나는 왜 듣지 못합니까?" 대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듣지 못하는 것 뿐이지 다른 사람도 듣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선객이) 계속 물었다. "그러면 누가 듣습니까?" 대사가 말하였다. "모든 성인이 듣는다."…
제자가 물었다. "경전의 가르침에서 유정들만이 미래에 완전한 깨달음을 이룰 것이라는 수기를 받아 오는 세상에 무엇무엇이라고 불리는 부처가 될 것이라는 것만 볼 수 있습니다. 무정들도 미래에 완전히 깨달아 부처가 될 것이라는 수기를 받은 예를 볼 수 없습니다. 현겁(賢劫)의 천 부처님 중에서 무정물로서 성불하신 경우가 한 번이라도 있으면 제게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대사가 말하였다. "내가 그대에게 물으리라. 왕자가 왕위를 물려받을 때를 생각해 보라. 왕자는 왕권을 (한번에 모두) 받느냐? 아니면 왕국내의 모든 영토들이 개별적으로 그에게 주어지느냐?" (제자가) 답하였다. "왕자가 왕위를 받으면, 왕국내의 모든 것이 그에게 속합니다. 그가 다른 것을 받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대사가 말하였다. "지금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유정들이 미래에 부처가 될 것이라는 수기를 받는 그 순간 삼천대천세계의 온갖 국토 모두가 비로자나부처님의 몸에 속하게 된다. 부처님의 몸 이외에 어찌 다시 다른 무정물이 있어 수기를 받겠는가?"…
(제자가) 말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푸른 대나무숲 모두가 진여요, 피어 늘어진 노란 꽃은 반야 아님이 없다.' 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 가르침을 인정하지 않고,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믿습니다. 이 말은 불가사의하여 나는 이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대사가 말하였다. "이는 보현, 문수 등 대인의 경지이다. 범부와 소인들이 능히 믿을 만한 대상이 아니다. 모두가 대승의 경전에 부합된다. 그러므로 화엄경에 말하기를 '부처님 몸이 법계에 충만하여 온갖 중생들 앞에 두루 나타나신다. 인연 따라 응하지 않은 곳은 없지만, 항상 보리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푸른 대나무가 법계를 벗어나지 않았으니, 어찌 법신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대반야경』에 이르기를 '色이 끝이 없으므로 반야가 끝이 없다'고 했으니 노란 꽃은 오직 色일뿐이니 어찌 반야가 아니겠는가?"
마지막 문단은 대나무와 노란 꽃에 대한 얘기가 '무성불성' 논쟁에서 핵심이 되는 부분이며, 혜충이 신회의 가르침에 호응한 것이 당연함을 암시하고 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혜충의 설득력 있는 관점은, 비록 지적으로 산만하긴 하지만, '무성불성' 논제의 논리적인 종착역을 의미한다. 우주 자체가 바이로차나의 몸이고, 무정이 항상 법을 설한다는 얘기를 하고 나서 또 다시 할 얘기가 더 남아있을 것인가! 당 말기를 거치면서 사람들이 이 주제에 무게를 실어 논했지만 이 주제의 두 가지 입장 중 어느 한 쪽에 대해서도 새로운 기여를 한 것 같지는 않다.
'무성불성'에 대한 당의 선 논쟁을 마무리하기에 앞서, 동시대에 유전되던 '무성불성' 교리에 대한 도가적 해석이 있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7세기초에 속하는 영향력 있는 도가의 해설서인 『도교의추(道敎義樞』는 중현(重玄) - 일반적으로는 불교, 특히 삼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문학전통 - 이라고 알려진 도가식 주석의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도성(道性)'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문헌의 29장은 '도성'의 보편성을 두루 옹호하고 있다.: "의식이 있는 모든 것은, 아래로는 동물, 과일, 나무, 그리고 돌을 포함하여, 모두 도성을 지닌다." 『도교의추』가 적어도 일부 학자군의 '무성불성' 논제에 대한 경향을 보여주는 한편, 이 논쟁을 도가 쪽에서 도용함으로써 그 당시 불교도의 논쟁에서 보이는 종파주의적인 열정의 원인을 제공했을 수도 있다.
당나라 말기에 '무성불성' 입장에 대한 옹호는 절정에 이른 것으로 보이며, 그 이후 적어도 중국에서는 이 논쟁이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그 교리가 나름의 생명력을 갖게 된 일본에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무성불성' 교리에 대한 혁신적인 토론이 수많은 일본승려 - 쿠카이(空海[774-835]), 사이초(最澄[767-822]), 안넨(安然[?-889]), 엔친(圓珍[814-891]), 료겐(良源[912-985]), 츄진(忠尋[1065-1138]), 도겐(道元[1200-1253]), 니찌렌(日蓮[1222-1282])을 포함한 - 들의 저작 속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듯이(각주 17) 963년 황실의 후원 아래 열린 화엄 - 천태간의 활발한 논쟁 시리즈 중의 초점도 '무성불성'에 관한 것이었다. '무성불성'에 대한 일본의 관심은 주석적인 작품에만 한정되지 않고, 문학과 행위예술 등에도 발견된다.
적어도 일본에서는 '무성불성' 교리가 사실상 '자연'에 대한 불교적 규정을 시도한 논의로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의 '무성불성'의 옹호자들은 인간 작위의 산물인 물리적인 사물(기와, 벽, 병 등)에 반대하여, 우리가 '자연계'(초목, 산, 하천)라고 여기는 것의 일부로서의 무정물의 현상에 초점을 두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적어도 천태종의 조사인 츄진은 식물은 그 식물성 - 뿌리, 줄기, 가지 등을 가지고 있다는 - 으로 인하여 부처이기 때문에 식물이 32상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증거는 우리가 중국에서 발견한 '무성불성' 교리에 대해서 다소간 다른 태도를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일본의 경우를 더 이상 논구하지 않겠다. 그 대신, 중국불교 일반, 특히 선을 이해하기 위해서 논쟁의 중요성에 초점을 두려고 한다.
중국의 경우, 다소 흐릿하고 사상사에서 부수적인 위치를 점하는 '자연' 개념을 가지고 논의를 시작하기보다는 다수의 중국학 학자들이 초기 중구사상의 특징으로 꼽고 있는 총체적 우주관을 다루는 것이 더 생산적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조셉 니담이 세계에 대한 '유기적' 관점 - 세상이 하나의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의존하는 전체를 구성한다는 개념 - 이라고 부른 것을 가리킨다. 초기 중국인들은 우주가 전체적으로 다양한 '氣'로 이루어져 있고, 기의 변화는 五行과 감응의 원리 등으로 분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세계관은 서양사상의 특징인 마음과 물질, 생물과 무생물, 내재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 또는 자연과 인간의 존재론적 구분보다 특별히 우월하다고 할 수 없다. 오랜 세월을 이어온 이와 같은 중국의 우주론적인 틀은 중국이 인도불교철학을 수용하고 해석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무성불성' 입장을 주장하기 위해 쓰인 많은 전략들은 물론 인도불교 일반에서 도출된 것이며, 특히 유식철학과 여래장사상으로부터 온 것이다. (모든 것이 마음이고, 그리고 마음이 불성이라면 불성이 결여된 존재는 없다.) 『화엄경』과 같은 인도의 문헌은 우주를 단일하게 서로 연결된 찬연한 전체로 보지만, 수사적 표현은 추상적이고 초월적으로 흐르기 쉽다 - 그것은 보통 사람이 아닌 부처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일 것이다. 인도의 문헌에서 기와나 돌과 같은 세속적 물체가 실제로 깨달음을 얻고 또 법을 설한다는 표현을 찾을 수 없다.
저명한 중국불교 학자인 카마타 시게오(鎌田茂雄)는 '무성불성'의 사상은 모든 것이 마음이라는 인도불교의 개념과, 초기 도가의 저작에 보이는 총체적 관점 - 만사만물이 하나의 몸을 이룬다는 - 의 종합이라고 주장한다. '무성불성' 교리에 대한 초기 중국의 선구자나 비유를 찾기가 결코 어렵지 않다.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 『莊子』 22장에 나오는 다음의 글이다.
동곽자가 장주에게 물었다. "道라고 불리는 것 - 그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장주가 말했다.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곳은 없다."
동곽자가 말했다. "있는 곳을 지적해주십시오."
"개미에게 있다."
"그렇게 비천한 데 있습니까?"
"기장풀에도 있다."
"그건 더욱 비천합니다!"
"기와나 벽돌에도 있다."
"어떻게 그토록 비천한 곳에 있습니까?"
"오줌과 똥에도 있다"
동곽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장주가 말했다. "그대의 질문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시장의 관리인이 시장감독자에게 물었다. 어떻게 돼지를 밟아보는 것으로 그 살찐 정도를 알 수 있느냐고. 그가 대답했다. 돼지를 밟아내려 갈수록 그 실상을 더 잘 알게 된다고. 그대는 어떤 특별한 장소에서 도를 찾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 이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극한 도는 이와 같은 것이며, 위대한 이론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포괄적이고(周)', '보편적이며(偏)', '모두 다 포함하는 것(咸)' - 이 셋은 서로 다르지만 뜻은 같다. 모든 것의 요체는 하나이다.
직계비속을 노자에까지 소급한, 당 황실의 통치 계급인 이씨 가문은 실제로 도가를 제국의 정통이념으로 격상시켰다. 위에서 기록한 것처럼, '무정불성' 교리에 대한 관심이 일던 시기와 통치시기가 겹치는 현종(712-756) 황제는 도가사상을 즉극 옹호하였다. 678년부터 도덕경이 과거의 시험과목으로 정해지면서 (측천무후의 재위기간인 693-705년간에 이 제도는 없어졌다.) 현종은 이 도가의 고전이 야심만만한 관리들의 학문적 열정을 지배하게 될 정도로 그 지위를 높였다. 741년에 황제는 숭현학(崇玄學)을 세워 도가의 고전으로 젊은 학자들을 교육시켰고, 동시에 국가적으로 지원한 유교의 교육기관과 시험제도에 필적하는 도가의 제도를 확립하기 위해 도거(道擧)를 설립했다. 이처럼 식자층에서 도가연구가 증진된 것이 불교계 식자층들 사이에서 무정불성 교리를 받아들이고 발전시킨 데 공헌한 바 있다는 가정도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카마타 시게오가 도가 사상의 특성과 불교의 '무성불성' 교리 사이의 유사점에 주목한 것은 확실히 타당하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대해서 두 가지만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카마타 시게오가 도가의 총체적 경향을 자연에 대한 평준화로 본 반면에, 위에서 검토한 불교의 주석가와 같이 장주는 문명의 산물(기와와 파편들) 과 자연계의 현상(개미, 풀, 오줌, 똥)을 구분하지 않았다. '무성불성'이라는 생각은 세계에 대한 중국의 총체적 개념에 의해 고무되었다고 하지만, 그 교리는 삼론, 화엄, 그리고 천태학자의 글에서 최초로 분명히 언급되고 있다. 초기의 '무성불성' 옹호자들의 주된 관심사는, 우리의 이해가 적확하다면, 인도의 문헌을 일관되고 무모순적으로 설명하는데 있었다. 인도의 문헌은 일련의 해석학적 문제를 제기했으며, 그 중에는 여래장의 존재론과 중관변증법의 조화 가능성 등 다루기 힘든 문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다소 융통성 있는 불성에 대한 수사적 표현은 그들이 그러한 주제들과 씨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집요한 중국학자들은 점차 다양하고 순화된 개념적 상부구조를 생산해냈던 것이다.
'무성불성'이라는 개념을 선에서 도용한 방식은 우선 분명히 학술적이지는 않다. 초기의 북종과 우두종의 조사들에게 '무성불성' 교리는 그들이 무심, 무념 등을 강조한 것과 논리적으로 일치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 교리와 관련한 그들의 관심사는 경전 주석학이 아니라 명상 수련이다. 따라서 '무성불성'이라는 개념은 단지 주관과 객관의 철저한 비이원성을 표현한 것에 그치지 않고, 나무 또는 벽과 구분되지 않는, 안팎으로 완전한 정적의 상태를 고취하는 것이었다.
북종이 '무성불성'에 대해 옹호하는 입장을 보이자, 신회는 이내 다양한 논거로서 공격의 화살을 퍼부었다. 물론 무정물이 걷고 말할 수 있는 부처가 된다는 생각은 경전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명백히 불합리한 것이다. 신회의 관점에서 보면 그 교리는 방향을 잘못 잡은 정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매우 위험했다. 우리를 둘러싼 물질 세계 - 푸른 대나무와 노란 꽃의 세계 - 와 깨달음의 세계를 동일시하는 것은 깨달음으로 이끄는 엄격한 사원수행의 의의를 저해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신회의 비판은 뒷날 송의 선사인 대혜종고(大慧宗고[1089--1163])가 라이벌이었던 조동계열의 '묵조선'에 대해서 공격하던 방식과 공통점이 있다. (이는 또한 현시대의 비판불교의 대표자들과 뜻을 같이 한다: '무성불성'이 개인적인 실천의 의미를 도외시하는 것처럼, 그것은 공동체의 사회적, 정치적, 또는 환경적 선을 향한 희구와 노력을 약화시킨다.)
신회의 공격은 무엇보다도 세속적 야망에 의해 촉발되었을 수도 있다: 그는 그의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 단순히 '무성불성'이라는 주제를 이용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신회가 '무성불성'이 초래할 윤리적이고 교리적인 문제 때문에 진지하게 고민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공정하게 말하면 두 요소가 조금씩 섞여있는 것 같다. 그러나, 있을 법한 윤리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를 제쳐놓는다면, 나는 '무성불성' 논쟁의 양 측에서 제기된 논쟁이 지리멸렬하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하고자 한다. 신회와 그의 추종자들은 경전의 권위를 인용하고, 이성과 논리, 그리고 상식에 호소하면서 비유를 자유롭게(적절한 비유인지 때로는 의문스럽기도 하지만) 사용한다. 선적인 글이나 문체상의 특징의 이면을 보게 되면, 우리는 선의 저변을 형성하는 개념적 전략이 삼론, 화엄, 그리고 천태와 같은 부류임을 눈치챌 수 있다. 혜충의 유명한 언명인 '무정이 법을 설한다'를 예로 들어보자. 겉에서 보기에 이 얘기는 과장되고, 강력한 도덕률 폐기론인 것 같고, 다소 '禪'적인 것 같다. 그러나 무정물이 계속해서 법을 설하는데 왜 우리가 그것을 들을 수 있다고 대답한다. 즉, 혜충은 혜원, 길장, 법장 등 저명한 논사들처럼 '두 가지 진리'라는 까다로운 해석학적 도구를 다시 도입함으로써 '현상을 살려야' 했던 것이다.
우선 이런 모든 논의가 선의 공안과 별 상관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 학자들은 공안을, 학술적 분석은 물론, 산만한 생각을 없애기 위한 교묘한 장치라고 이해해왔다. 공안은 스승의 깨달음의 즉각성과 투명함을 붙잡기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따라서 거기에는 교리적이나 개념적인 내용조차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유명한 공안 중의 하나인 조주의 개가 원래는 '무성불성' 논쟁의 난해한 지적 맥락과 관련되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다소간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개에 대한 공안은 1228년 무문혜개(無門慧開[1183-1260])에 의해 편집된 영향력 있는 공안집인 『선종무문관(禪宗無門關)』의 제 1칙으로 유명하다. 무문 자신은 이 공안을 공안집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것은 종종 일본 임제종의 초심자들에게 주어지던 공안이다. 무문은 이 공안을 당나라 시기의 유명한 스싱인 조주종심(趙州從 [778-897])의 기록에서 발췌했다. 전체의 문답은, 『조주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제자가) 물었다.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대사가 말했다. "없다." 제자가 물었다. "위로는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는 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개에게는 없습니까?" 대사가 말하였다. "그에게는 업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 즉문즉답에서 행간에 가려져 있는 문맥이 '무성불성' 논쟁이라는 것이 얼른 보기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 문헌의 뒷 부분에 있는 문답을 보라.
(제자가) 물었다. "잣나무에도 불성이 있습니까?" 대사가 말했다. "있다." (제자가) 물었다. "언제 성불합니까?" 대사가 말했다. "하늘이 땅에 떨어질 때이다." (제자가) 물었다. "언제 하늘이 땅에 떨어집니까?" 대사가 말했다. "잣나무가 성불할 때이다."
마지막으로 같은 문헌의 세 번째 문답에 주목하라. 그 속에서 조주는 개의 불성에 대해 또 다시 질문을 받고 있다:
(제자가) 물었다. "개도 역시 불성이 있습니까?" 대사가 말했다. "각각의 집 앞에 있는 (길)은 장안으로 통한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조주의 반응은, 적어도 일시적으로라도, 그가 나무와 같은 무정물의 불성을 인정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세 번째 문답에서도 그는 개의 불성을 인정하기를 주자하지 않는다. 그러면 왜 그는 첫 번째 문답에서 개의 불성을 부인했는가?
첫 번째 질문자는, 물론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모든 유정이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공부가 있는 승려라면 질문자가 무지해서 그런 질문을 던진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 실제로 질문은 오직 '무성불성' 논쟁의 맥락 속에서만 의미가 있다. 이것은 질문자가 논쟁의 와중에 있는 불성의 문제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선의 원리에 충실한 방식으로 명료하게 말함으로써 조주에게 도전한 것이다. 따라서 조주는 유정이거나 무정이거나 간에 불성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그것을 실체화하거나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 방식으로 반응해야 했다. 조주의 반응 - 개의 불성에 대한 변명의 여지없는 부인 - 은 그가 교리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움 (어떤 관습적 표현도 궁극이 될 수 없다는 태도)을 보여주는 것이며, 일상적이거나 초월적인 입장에 대해 자신의 의사를 밝히기를 거부하는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요약하면, 그는 문제를 교묘히 피했다.
공안에 대한 그의 논평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듯이, 물론 무문은 이런 문답의 '무성불성' 문맥에 익숙하다.
무문이 말했다: "선을 배우기 위해서는 먼저 조사의 관문을 통과해야된다. 오묘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의 길을 완전히 끊어야 한다. 조사의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마음의 길을 끊지 못하면 단지 풀과 나무의 정령과 다를 바 없다."
개가 불성이 없다는 조주의 단호한 주장은, 내가 생각하기로는, 무정물인 나무나 풀들이 불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문은, 말을 교묘히 비틀어서, 만약 우리가 조주의 언명 - 개가 불성이 없다는 - 이 의미하는 바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단지 풀이나 나무에 사는 정령에 불과할 뿐이라고 선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