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6 30
믿음의 명문가문을 이루라
마1:1, 17
서론
어느 고등학교 교실에 이런 급훈이 걸렸습니다.
“3년 고생해서 30년 먹고 놀래, 3년 놀고 30년 고생할래”
어느 남학생 교실에는 이런 급훈도 걸려있답니다.
“3년 열심히 공부하면 아내 얼굴이 달라진다.”
우리가 신앙생활 잘하여 믿음의 명문가문을 만들어 가시기를 축원 합니다.
가인과 아벨에 탄생
창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 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가인의 계보 시작
창4: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셋의 계보시작
창4:25~26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담의 신앙 계보시작
창5:3~4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 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노아의 족보
창6:9~10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 으며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노아의 족보
창10:1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야벳의 아들족보”
창10:2 “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
“함의 아들족보”
창10:6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셈의 아들족보”
창10:21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셈의 족보
창11:10 “셈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셈은 백 세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창11:26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데라의 족보
창11:27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이 믿음의 유전을 이었고 셈의 자손들이 영적으로 믿음의 유전을 이어 아브라함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유전이 아들 이삭 손자 야곱에게 야곱의 12아들에게 유전이 되었습니다.
유다의 믿음의 유전이 예수님까지 이어져 인류구원자이신 메시야 예수님께로 믿음의 유전이 끊기지 않고 이어져 내려갔습니다.
믿음의 유전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 축복입니다.
“야베스”도 유복자로 태어났지만 기도응답을 받아 축복에 가문이 되었습니다.
대상4:9~10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 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 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오벧에돔도 이스라엘의 변방 가드에서 살았지만 죽을 각오로 “법궤”를 모시고 축복받아 예루살렘에 성전 문을 지키는 축복의 가문이 되었습니다.
삼하6:11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 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대상26:8~9 “이는 다 오벧에돔의 자손이라 그들과 그의 아들들과 그의 형제들은 다 능력이 있어 그 직무를 잘하는 자이니 오벧에돔에게서 난 자가 육십이 명이며 또 므셀레먀의 아 들과 형제 열여덟 명은 능력이 있는 자라”
디모데의 외할머니 로이스의 믿음이 디모데의 어머니 유니게에게 유니게의 믿음이 아들 디모데에게 유전이 되었습니다.
딤후3: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딤후3: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록펠러가의 믿음-록펠러와 어머니 엘리자 데이비슨 여사.
록펠러 어머니의 십계명
1.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섬겨라.
2.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섬겨라.
3. 아무도 원수로 맺지 말아라.
4. 예배시간에는 항상 맨 앞자리에 가서 앉아라.
5. 오른쪽 주머니는 항상 십일조 주머니로 만들어라.
6. 주일예배는 본 교회에서 드려라.
7. 새벽마다 목표를 세우고 기도하라.
8. 남을 도울 수 있으면 힘껏 도우라.
9. 아침엔 꼭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라.
10.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루를 반성하고 기도하라.
록펠러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신앙생활을 잘 했고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98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번도 빠짐없이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어머니께서 축복을 받으려면 교회를 세우라고 해서 “리버사이드 교회”를 세웠습니다.
록펠러는 미국 명문 시카고 대학을 설립하였고 시카고 대학에서만 52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나왔습니다.
록펠러는 12개의 종합대학을 설립했으며, 수십 개의 연구소와 교육재단, 병원, 의료협력기구를 세우고 자연사 박물관과 문화 관련 사업 등을 하고 4,982개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가 죽을 때 남긴 돈이 14억 달러로, 이를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266억 6천 9백만 달러로 현재 한국 돈으로는 31조 5,361억원이나 됩니다.
록펠러는 이 돈을 그가 세운 록펠러 재단, 일반교육재단, 록펠러 의학연구소 등에 모두 기부하였는데, 지금도 그가 남긴 유산을 바탕으로 이러한 재단들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록펠러가 55세에 병에 걸려 죽을 것이라 했지만 주님을 만나고부터는 나누고 베풀며 98세까지 장수하였습니다.
록펠러는 “나의 어머니는 가난하게 사는 농부였지만 나에게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될 수밖에 없는 믿음의 유산 물려 주셨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입니다.”이었고, “우리 어머님이 물려 주신 것은 십일조 신앙이었습니다. 내 나이 8살 때 어머니는, “이제 너 혼자 주일학교에 가라.”고 교회에 보내시면서 일주일 쓸 용돈 20센트를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그중 2센트는 너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십일조를 바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록펠러는 그 말씀에 따라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어머니의 당부를 어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믿음이 록펠러에게 유전이 되었습니다.
록펠러의 어머니는 신앙의 바른 자세 10가지를 록펠러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라 사는 삶이 우리의 삶을 복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록펠러가 헌금해서 세운 리버사이드 교회는 에머슨 포비딕 이라는 목사님이 설립 계획하고 록펠러 주니어가 경제적인 지원을 하여 1930년에 완공된 교회입니다.
‘리버사이드교회(Riverside Church)는 이름처럼 뉴욕 허드슨 강변에 자리한 교회는 흑인 인권을 위해 힘쓴 마틴 루터킹 목사, 넬슨 만델라 등이 연설을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웨슬리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 가문은 중세부터 끊이지 않고 경건한 그리스도인 가문을 이어 내려온 믿음의 명문가를 이루며 하나님 나라에 충성한 선조들에게서 웨슬리 형제가 나왔습니다.
선조들과 부모인 사무엘과 수산나를 통해 신앙의 영향을 받아 존 웨슬리 형제가 위대한 인물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존 웨슬리는 “나의 나 된 것은 어머니의 기도와 교육에 의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존 웨슬리는 어머니 수산나는 “메도디즘의 어머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웨슬리의 선조들은 중세부터 존경받는 기사 가문이라 전해지고 있습니다.
존 웨슬리의 고조부 허버트 경은 경건과 학식과 덕망으로 당대에 존경 받는 인물이었으며 증조부 바톨로뮤는 국교회 성직자요 의사였으며 조부 존은 옥스퍼드를 나와 성직자로 개혁자로 비국교도 목사였으며 부친 사무엘 웨슬리는 옥스퍼드대를 나와 성직자, 신학자, 시인, 국교회 목사였으며 존 웨슬리도 옥스퍼드를 나와 국교회 성직자 신학자, 옥스퍼드 대학교수 , 메도디즘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존 웨슬리의 외조부 사무엘 아네슬리는 청교도의 대부였습니다.
존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 아네슬리는 1669년 1월 20일 런던에서 태어났습니다.
존 웨슬리의 외할머니는 24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수산나는 막내로 태어낫습니다.
수산나가 19명의 아이를 낳은 것은 어머니의 다산의 실력을 물려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산나는 책을 많이 읽었으며 13세에 비국교도에서 국교도가 되었으며 수산나는 외모와 내면이 모두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며 1688년 사무엘과 결혼하여 19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청교도 신앙으로 자녀들을 훈련 시켰습니다.
존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는 자녀들을 엄격하게 규칙적으로 가르쳤고, 가족 기도회를 드렸으며 자녀들과 상담을 하고 편지로 자녀들과 소통하였습니다.
수산나는 자녀들에게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가르치고 하루에 세 번 자신을 성찰하라고 자녀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수산나는 여성 최초의 설교가라 불릴 정도로 설교를 잘 하였으며 존 웨슬리의 신성회를 위해 웨슬리를 위해 기도해 주고 편지로 격려하였습니다.
수산나는 1735년 65세에 과부가 되어 자녀들의 효도를 받으며 살다가 1742년 7월 23일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742년 8월1일 존 웨슬리는 어머니 장례식을 직접 주례하며 수산나는 진정한 청교도의 딸이었으며 그리고 진정한 “메도디즘의 어머니” 였습니다.
극한 장애를 극복한 인물하면 “헬렌켈러”를 떠올립니다..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헬렌켈러”는장애를 극복한 인물로 옆에는 “엔 설리반”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시각 장애인 최초 유학생 강영우 박사님, 장로님과 석은옥 권사님의 이야기는 너무 유명안 이야기입니다.
강영우 박사님은 시각장애를 극복하고 “부시” 전 대통령 행정부에서 “국가장애인위원회정책 차관보”까지 지셨습니다
“강영우 박사님”은 13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중학교 1학년 때 축구를 하다 공에 눈을 맞아 실명하고 아들의 실명 판정에 충격으로 어머니가 사망하시고 가장이 되어 밤낮 없이 일하던 열일곱 살이던 누나가 어린 세 동생을 부양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봉제공장에 취직해 일하다 16개월 만에 과로로 쓰러져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강영우박사는 “맹인재활원”으로, 열세 살 됐던 남동생은 철물점 직원으로, 아홉 살의 여동생은 보육원으로 가야 했습니다.
죽고 싶은 마음 뿐이었는데 어느 목사님의 조언 “갖지 못한 한 가지를 불평하기보다 가진 열 가지를 감사하자”며 마음을 고쳐 먹었습니다.
“강영우 박사”는 신앙 덕분에 살아갈 의지와 소망을 가지고 맹인부흥원에서 재활을 시작합니다.
맹인부흥원에서 구본술 박사님으로부터 장애를 극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중도 시각장애인으로 영국의 애든버러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시각장애 재활의 선구자가 된 “이와하시 다케오”를 롤 모델로 삼았습니다.
시각장애인으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이와하시 다케오”를 생각하며 “강영우 박사님”은 한국의 “이와하시 다케오”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공부를 시작하여 서울 맹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당시 시각장애인은 안마사 아니면 점쟁이가 돼야 했는데 안마사가 되기에는 몸이 너무 약했고 기독교 신자였던 박사님은 점쟁이가 될 수 없었습니다.
“강영우 박사님”은 오로지 한국의 “이와하시 다케오”가 되겠다는 꿈으로 대입을 목표로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서울 맹학교에 입학하였을 때 부인인 석은옥 권사님을 만나게 됩니다.
석은옥 권사님은 숙명여대 1학년으로 걸 스카우트 회원으로 시각장애인을 그를 돕는 프로그램에 동참하게 되어 “강영우 박사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석은옥 권사님은 나의 인생을 뒤바꾼 한 맹인 소년과의 만남! 그 후 자원봉사자로 1년, 누나로 6년, 약혼녀로 3년, 그리고 아내로 34년을 “강영우 박사님”의 그림자가 되어 살아왔다고 합니다.
“강영우 박사님”은 열심히 공부해 여동생의 손을 잡고 1968년 연세대 교무처에 원서접수를 하던 날 교무처 직원으로부터 시각장애인은 원서 접수를 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고 기독교학교에서 장애인에게 입학 시험을 치를 기회도 주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고 반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강영우 박사님”은 지난날 부모님이 살아계실 적에 피난을 오면서 알고 지내게 된 목사님을 찾아가 이 일을 논의 드렸고 목사님께서 사방팔방으로 수소문하고 고생한 끝에 연세대의 관계자 분들을 설득하여 우여곡절 끝에 입학시험을 치를 기회를 얻게 되고 10등이라는 성적으로 연세대 교육학과에 입학하였습니다
입학 시험 당시 강영우 박사님은 “헬렌 켈러”는 장애를 세 가지나 갖고도 해냈는데 한 가지 밖에 없는 내가 못할 것도 없다고 자신있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장애인에 대한 차별은 여전하였고 “쪽팔리게 눈 먼 장님하고 같이 앉아 공부해야돼?” 등의 이야기를 들으셔야 했다고 합니다.
“강영우 박사님”은 차석으로 졸업하게 되었고, 대학 졸업 후 미국의 피츠버그 대학에 합격하고 “로터리 클럽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여권 수속을 위해 문교부를 찾습니다.
당시 문교부는 장애를 해외 유학의 결격사유로 정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강영우 박사님”은 연세대 총장님을 찾아뵈었고 다른 지인 분들의 도움으로 해당 조항을 바꿀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여권 수속은 됐지만 신체검사에서 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결핵 등의 병이 있는지 확인하는 검사였는데 의사가 “해외 여행에는 지장 없음”이라고 진찰서 소견을 써줘야 했는데 의사는 아니 지장이 있는데 지장이 없다고 어떻게 씁니까?
“눈이 안 보이는데 지장이 없다는게 말이 안되죠”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의사는 병적을 확인하는 검사에서 장애를 문제 삼은 것이었고 장애와 병을 혼동 하고 있었습니다.
“강영우 박사님”은 재치를 발휘해 “그러면 시각장애 외에는 아무 지장이 없음”이라고 써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미국에 유학해 박사학위까지 마치고 한국인 최초 맹인 박사가 되셨습니다
이후 한국에서 강사로 취직할 곳을 얻지 못해 미국에서 취직을 하셨고 나중에는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교수직도 역임하시다가 “부시 행정부의 정책차관보”까지 하시게 되었습니다.
“강영우 박사님”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두 아들 모두 하바드대학을 나와 아버지의 눈을 고쳐주겠다며 안과의사가 되고, 둘째 오바마 행정부 법률 상임고문이 되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인 그가 이렇게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하나님께서 동행하셨다”는 말과 석은옥 권사님이 항상 함께 해주었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습니다.
“강영우 박사”는 췌장암 말기라는 사형선고가 임했을 때 의사선생님이 수술로 2년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구차하게 목숨을 연장하고 싶지 않다며 거절했습니다.
그리고는 가까운 지인들에게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시면서 담담하게 이런 내용의 마지막 작별 편지를 이메일로 보냈습니다.
“저는 신앙인입니다. 죽음 이후의 다음 세상을 믿는 사람이죠. 죽음이라는 게 사람에게는 가장 나쁜 일 수도 있겠지만 그 다음에 더 좋은 일이 천국이 있다고 믿습니다.
육신으로 볼 때 죽음은 공포요 좌절이요 절망이지만, 다음 세상을 믿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것은 저에게 절망만은 아니기에 생명연장하는 일에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시력을 잃은 것은 저에게 축복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더 열심히 살 수 있었습니다.
장애라는 것을 지옥으로 생각하면 그대로 된답니다.
그러나 그걸 축복으로 여기면 놀라운 일이 생기죠. 무엇보다 만남의 축복이 옵니다.
여러분들로 인해 저의 삶이 더욱 사랑으로 충만했고 은혜로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로부터 딱 일주일 뒤 신문에 기사가 떴습니다.
시한부 삶 강영우 박사 “가진 것 다 주고 떠나렵니다, 국제로타리 재단에 25만 달러 기부”
강영우 박사는 그 동안의 하나님의 은혜에 너무 감사해서 하나님 은혜를 갚는 마음으로 25만 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2억 9000만원)의 장학기금을 만들어서 기부했습니다.
피츠버그 대학교의 공공정치학 법학 포럼에 2만 5천 달러, 한국의 연세대학교에 4억원의 돈을 기부했습니다.
강영우 박사는 2012년 2월 23일 향년 68세 나이로 하늘나라도 가셨습니다, 마지막 가시는 길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선물을 베풀고 가셨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 잘하여 천국을 소망하며 믿음의 명문 가문을 이루어 가는 임마누엘 가족들이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