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2024. 2. 11(주일) - 주현절 후 마지막, 주님산상변모 주일, 설 - (2024년 6주)
제목; “엘리야의 승천과 엘리사의 능력”
성경; 왕하 2:1-14 (p.561) (시 50:1,3, 430<456>, 440<497>, 6)
<예배의 부름> (시 50:1,3)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 우리 하나님이 임하사 잠잠치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불이 삼키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
I.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4년 설날을 보내며 우리 주님의 사랑과 은혜, 평화가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2024년 갑진년(甲辰年), ‘푸른 용의 해’라고 합니다. 60간지의 41번째로 ‘푸른색’의 ‘갑’(甲)과 ‘용’을 의미하는 ‘진’(辰)이 만나 ‘청룡’(靑龍)’을 의미하므로, ‘푸른 용의 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청룡’이니, ‘60간지’니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2023년 계묘년(癸卯年)은 ‘검은 토끼의 해’라고 하고, 금년 갑진년(甲辰年)은 ‘푸른 용의 해’라고 하는데, 어떤 방식으로 이렇게 하는지만 잠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색’과 ‘동물’을 조합해 그 해를 나타내는 말을 짓습니다. 순서대로 십간의 오방색, 곧 ‘청색(갑을, 甲乙), 붉은색(병정, 丙丁), 금색(무기, 戊己), 흰색(경신, 庚申), 검은색(임계, 壬癸)’과 12간지(十二干支), 곧 ‘쥐(자, 子), 소(축, 丑), 호랑이(인, 寅), 토끼(묘, 卯), 용(진, 辰), 뱀(사, 巳), 말(오, 午), 양(미, 未), 원숭이(신, 申), 닭(유, 酉), 개(술, 戌), 돼지(해, 亥)’를 조합해서 그 해의 이름을 만듭니다.
그리고 각 띠별로 궁합이 좋은 띠가 있고 상극인 띠가 있다고 합니다. 가령 용띠는 쥐띠나 뱀띠와는 궁합이 좋은 띠이지만, 개띠와 닭띠는 만나서는 안되는 궁합이 가장 나쁜 띠라고 합니다. 또 범띠 여자와 소띠 남자가 만나면 남자가 기를 펴지 못하므로 안된다고 말합니다. 하여튼 우리 선조들은 한 해 이름 정하는 것도 많은 생각 속에서 만들었고, 그 띠와 태어난 연월일시를 가리키는 사주팔자(四柱八字)를 따라 운명을 결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는 이런 조합이 필요 없이, 예수 믿으므로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예수 믿는 우리들은 용띠니 뱀띠니 하는 것이나, 사주팔자가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잘 믿느냐 아니냐에 따라 그 운명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예수 잘 믿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와 복을 받고 나눠주는 설 명절 되시길 기원합니다.
II.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왕하 2:1-14)은 선지자의 리더십이 계승되는 장면으로, 엘리야의 승천이 중심 주제입.니다. 위대한 불의 선지자 엘리야에서 목자 같은 선지자 엘리사에게로 그 리더십이 계승됩니다. 마치 출애굽의 지도자(영웅) 모세에게서 가나안 정복의 지도자(영웅) 여호수아에게로 그 지휘권이 넘어가는 것과 비슷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 2장의 전체 구조와 의도는 엘리사가 엘리야를 계승한 예언자임을 확증적으로 보여 주는데 있습니다. 2장에 등장한 인물들을 살펴보면,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의 생도들, 여리고성 사람들, 벧엘의 어린 아이들 등이 있으며, 하나님은 불수레와 불말들로, 그리고 말씀으로 등장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람들이 요단강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리더십 계승 과정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 엘리야에게서 엘리사에게로 리더십이 계승되어지는 과정을 살펴보므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교훈과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스승의 발자취를 끝까지 따라가는 것이 제자의 첫째 조건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여호와께서 회오리 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와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1)로 시작하여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승천시킬 것을 분명히 말씀해 주십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승천하는 요단강에 갈 때까지 네 곳을 거쳐 가면서 반복하여 엘리사에게 “너는 여기 머물라”(2,4,6) 하고 말합니다. 그때마다 엘리사는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2,4,6)라는 말을 반복하며 끝까지 엘리야를 따라갑니다. 여기서 “영혼”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네페쉬’(נפשׁ)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할 때, “생령”으로 번역된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영혼”이란 말은 ‘전인적인 인간의 삶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엘리사는 하나님과 엘리야의 사심 전체를 걸고 엘리야를 떠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위대한 스승의 후계자, 계승자가 되는 첫째 조건이 스승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스승인 엘리야는 계속해서 “여기 머물라”고 말하지만, 후계자 엘리사는 계속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떠나지 않겠다’고 대답하고, 엘리야가 승천하는 요단강까지 따라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편하고 좋을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려는 일을 잠시라도 멈추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때를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야곱같이 믿음이 좋은 사람도 얍복 강가에서 에서를 만나기까지 크게 두려워하다가 에서와 만나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화해한 후, 벧엘로 올라가야 하는데, 가나안의 타락한 도시 세겜에서 적어도 10년 이상 머물므로 딸 디나가 강간당하고, 아들들이 할례를 핑계 삼아 세겜 족속을 멸하므로 거대한 위기에 봉착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때를 조심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던 사람도 어느 순간 이젠 지쳤다고 생각하든지, 아니면 세상일이 분주하여 잠시 신앙을 멈추어야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첫째 조건은 스승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오늘 본문에 나오는 네 개의 지명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장소들입니다.
1) 길갈 : 신앙의 출발점(1)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회오리바람으로 하늘로 올리고자 하는 계획 때문에 길갈에서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길갈”은 출애굽한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넌 후 진쳤던 그 길갈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길갈’이란 지명이 두 개 등장하는데, 하나는 출애굽한 후 진친 요단강 근처의 길갈이고(수 4:19), 또 하나는 본문에 등장하는 벧엘 북서쪽 약 13km 지점에 위치한 해발 약 790m의 고지에 위치한 세겜 근처 길갈입니다(신 11:30).
그런데 “길갈”이란 지명의 뜻이 ‘굴러간다’, ‘~에서부터’라는 뜻입니다. 비록 위치는 다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입성에 앞서서 할례를 명령받고 할례를 행한 곳이 길갈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에 들어갈 자격을 부여한 사건이 길갈에서의 할례입니다. 할례 받지 못한 백성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축복의 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것을 고백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확증해주는 징표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세례는 이제부터 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히 살겠노라는 고백이며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하나님의 확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하고 교회에 나오는 모든 성도들은 꼭 세례를 받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합당하게 살겠노라는 거룩한 결심을 해야 합니다.
길갈은 출애굽할 때 홍해를 건넌 것과 마찬가지로 육체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의 새로운 출발을 뜻합니다. 홍해를 건너기 전의 삶은 애굽에서의 죄악의 삶이었고 홍해를 건넌 후 광야에서의 삶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받는 삶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길갈 역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새로운 출발을 뜻합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길갈에서 멈추라고 하는 것은 신앙의 출발점에서 머물러 있으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신앙의 출발선에서 멈춰 있습니다.
직분이 목사나 장로나 권사나 집사라고 하더라도 신앙의 출발선에서 전혀 성장이 되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신령한 은사가 있어서 심지어 귀신을 쫓아내고 예언을 하기까지 하더라도 그들이 사분오열되어 싸우고 있으니 신앙의 초보자에 불과하다고 책망을 하기도 했습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그 출발점에 머물러 있으라고 했으나 엘리사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엘리야를 따라 하나님의 백성이 나아가야 할 길을 계속하여 나아갑니다. 그는 계속하여 성장한 것입니다.
2) 벧엘 : 하나님의 집(2) : 예배의 회복
“벧엘”의 뜻이 ‘하나님의 집’이므로, 벧엘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로 결단한 사람은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고 하나님께 경배하고 예배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벧엘에서 멈추라 한 것은 날마다 하나님을 동행하는 것에 만족하는 삶을 살라는 것과 같습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하란에서 돌아온 야곱이 형 에서와 화목하고 벧엘로 올라가야 하는데, 세겜에 머물다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결국 야곱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고 벧엘로 올라갔듯이. 우리 성도들도 길갈에 머물러 있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 곧 벧엘로 올라가는 결단을 하고 올라가야 합니다.
벧엘로 올라가는 것은 예배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벧엘로 올라가 제단을 쌓으라는 명령을 받고(창 35:1), 모든 이방 신상들과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 나무 아래에 묻고, 벧엘로 올라가 제단을 쌓고, 그곳 이름을 “엘벧엘”, 곧 ‘벧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창 35:1-4)
이와 같이 벧엘은 야곱이 예배를 회복한 곳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를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배 받으시기를 원하시고 성도의 예배드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이 함께 성취되는 곳입니다. 지난날 모든 예배드리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약속과 복을 받았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기 예배드리는 성도들에게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을 넘치도록 부어 주실 것입니다.
3) 여리고 : 악한 영과의 승리(4)
여리고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제일 먼저 정복한 성입니다.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1주일 동안 매일 행진한 후에 큰 소리를 외치므로 무너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치와 하나 됨,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전적 신뢰와 순종은 문제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가나안 정복 전쟁의 승리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진멸했던 가나안족은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던 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리고는 악한 영과 승리를 동시에 상징합니다. 우리의 삶을 마감할 때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멈추지 않고 계속 살아간다면 우리는 악한 영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승리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여리고에서 머물러 있으라 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종이라 불리는 것에 만족하며 살라는 것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바로 여기에서 실족하여 자기 교만에 빠지든지 스스로 이단의 교주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갑니다.능력의 종이라고 스스로 자신을 자랑하고 과시하는 삶에서 만족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섬기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까지 더욱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섬기는 훈련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4) 요단강 :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6)
요단강은 이스라엘이 광야의 삶을 마감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이므로, 요단강은 종종 죽음이나 마지막 때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오실 때까지, 혹은 우리의 삶을 마감하는 그 순간까지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엘리야와 함께하여 엘리야의 뒤를 잇는 하나님의 능력의 선지자가 됩니다.
요단은 죽음입니다. ‘며칠 후 며칠 후’ 우리는 모두 요단강 건너가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죽음은 새로운 출발입니다.죽음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죽어야 사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산자만이 진정 죽을 수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만이 부활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에게 큰 영향력을 주었던 한신교회 故 이중표 목사님께서 생전에 좋아하셨던 성경 구절이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는 말씀입니다. 이 목사님은 이 말씀을 기초로 ‘별세 신학’을 펼쳤습니다. 이 목사님은 생전에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별세 영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월간목회의 박종구 목사님은 그를 추모하는 추모시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 것이라 하신 이여 산자만이 죽을 수 있으며 죽은 자만이 부활할 수 있다고 하신 이여 그래서 죽어도 행복하다고 하신 이여 그것이 당신의 별세 신학입니다.”
엘리사는 요단강의 신비를 체험했습니다. 불수레와 불말들이 호위하며 하늘로 승천하는 엘리야의 승천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처럼 요단의 물을 갈라지게 하는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죽음의 신비를 깨달았을 때 능력을 받았고 능력을 행사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엘리사는 엘리야가 머물러 있으라 권했지만 끝까지 엘리야와 동행하였습니다. 길갈에서 벧엘로, 벧엘에서 여리고로, 여리고에서 요단강을 건너 광야에 이르기까지 스승과 대화하면서 함께 고락을 나누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라는 엘리사의 결심과 그의 행동은 제자의 모범적인 모습을 너무나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는 하나님의 일꾼들의 기본적인 자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제자는 멀리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이 관심을 두시는데 함께 관심을 두고, 주님이 걸어가는 그 길을 함께 걸어가며 주님과 대화하는 사람들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간절히 구해야 됩니다(9).
요단강까지 따라 건너온 찰거머리 같은 제자 엘리사에게 엘리야는 묻습니다.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9a), 이에 엘리사는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9b)라고 말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갑절”의 영감을 요구하였습니다. 여기서 “갑절”(쉐나임, שׁנים)이라는 말은 ‘반복하다’라는 뜻의 동사 ‘솨나’(שׁנה)에서 유래된 명사로써 ‘둘’로 해석되며, 원래 ‘입’을 뜻하지만 추상적 의미로 ‘부분’을 뜻하는 명사‘페’(פה)의 연계형 ‘피’와 결합 되어 ‘두 몫’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따라서 “갑절”은 ‘두 배 많은 능력’이란 뜻이 아니라, ‘두 몫’이란 뜻으로, 구약의 율법에 아버지가 자기의 재산 중 장자에게 합법적으로 주는 몫을 말합니다(신 21:17).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스승보다 더 큰 능력을 당돌하게 요구한 것이 아니라, 모든 선지 생도들이 인정할 수 있도록 합법적인 장자, 즉 후계자로 인정해 주고 그에 따른 능력을 주실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12절에서 엘리사가 사라진 엘리야를 “내 아버지”로 호칭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엘리사의 요구는 엘리야보다 더 많은 능력을 행하고 싶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스승이 가진 영적 능력을 자신도 가지며 스승이 걸어간 선지자의 길을 자신도 그대로 걸어가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을 우회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후에 엘리사에게 임한 능력은 갑절이 아니라 단순히 엘리야의 영감 그 자체였다(15)는 선지 생도들의 증언도 이러한 해석이 타당함을 뒷받침해 줍니다.
사실 오늘 본문 2:1절부터 계속 이어지는 말씀 속에서 등장하는 선지 생도들의 말에서 엘리사는 이미 다른 제자들로부터 선발된 인물로 인정을 받고 있었고, 엘리야가 승천하면 지도자의 위치를 계승하게 될 것이 확실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지위를 부여받는데 도취된 것이 아니고, 그 지위를 확고히 해주시며, 그 지위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간절히 요청한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기에 하나님의 능력을 갑절이나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런 엘리사의 지혜로운 요구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자리, 큰 지위만을 요구하지는 않는지요? 자리나 지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자리나 지위를 유지하고 발전시켜나갈 능력이 더 중요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요즘 교회의 위기를 많이 이야기합니다. 이미 2천년대 들어오면서 교인 수가 줄어들고, 교회가 문을 닫아야 할 형편이라고 말했는데, 코로나19가 여기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국가에서 강제로 예배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하므로, 수많은 교인들이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고, 온라인 영상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코로나19 엔데믹이 오고, 교회 가도 좋다고 하는 대도 교인들이 교회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때 엘리사와 같이 “갑절의 영감”을 구해야 합니다. 엘리사는 갑절의 영감을 구했고 엘리야의 갑절의 영감이 엘리사에게 임했습니다. 엘리사가 갑절의 영감을 구한 것은 선생님보다 더 높아지기 위해서 교만으로 구한 것이 아닙니다. 시대를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구한 것입니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9)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갑절의 은혜와 축복을 구하십시오. 모든 문제 해결의 능력을 구하십시오. 은사를 구하시고 예언을 구하십시오. 갑절의 영감, 갑절의 축복을 구하십시오. 그리하여 능력 받고, 축복받고, 영감 받아, 민족과 열방에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오기까지 사명을 감당하는 충성스런 하나님의 일꾼들 다 되시기를 축복하며 기원합니다.
3.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만남으로 가능해 집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갑절의 영감을 요구했을 때 엘리야는 참으로 난감한 표정으로 말을 합니다.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10a)그러면서 계속 말합니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10b). 좀 쉽게 번역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질 것이다” 이런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이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만나야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끝까지 보면 그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라보는 일을 멈추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엘리야의 말에서 우리는 참다운 지도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떠난 후에도 계속될 자기 아성을 구축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엘리야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해낼 뿐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부르시니 그저 순종하여 갈 뿐입니다. 자기 권한 밖의 일은 정직하게 ‘그건 하나님께서 결정하실 일이다. 네가 하나님을 만나라’고 가르칩니다.
많은 지도자들이 이런 행동을 하지 못해서 넘어집니다. 평생을 잘 걸어오다가 은퇴할 즈음에 찾아드는 욕심 때문에 넘어집니다. 물러날 것을 생각하니 아쉽고, 아쉬운 마음이 조금만 커지면 주변의 아첨배들 때문에 마음이 흔들려서 욕심을 부리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속적인 구조를 만들려고 합니다. 은퇴 후에도 계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감 내놔라. 대추 내놔라.’ 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이것은 실수입니다! 욕심입니다! 여러분 ‘은퇴’(隱退)란 ‘숨을 은(隱) 물러날 퇴(退)’라는 말입니다. 은퇴하면 숨어버려야 합니다.
이제 엘리사는 요단 강변에서 하나님이 엘리야를 데려가시는 것을 목격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하이라이트인 하나님께서 회오리바람으로 엘리야를 데려가시는 장면입니다. 우리 11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
우리는 이 말을 잘 관찰해서 읽어야 합니다. 엘리야는 불말과 불수레를 타고 올라간 것이 아니라 회오리바람을 타고 올라갔습니다. “불수레와 불말들”은 엘리야와 엘리사를 갈라놓는 역할을 합니다. 불수레와 불말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부재를 두려워하면서 끝까지 엘리야를 붙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사에게 말씀하십니다. ‘왜 엘리야만 계속해서 바라보느냐! 이제는 나를 보아라. 나를 만나거라. 엘리야가 한 시대에 내가 준 사명을 감당했듯이 이제는 내가 네게 사명을 맡긴다. 나를 만나는 사람이 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자기 곁을 떠나가는 부재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합니다. 하나님 임재의 체험이 엘리사를 지도자로 세웁니다. 이제 엘리사는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 점과 연관하여 13절과 14절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구절은 애매하게 전승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개역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 가지고 돌아와 요단 언덕에 서서,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의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이르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그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게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을 치는 사람이 엘리사라는 것이 이미 표현되었으니까 “그도”란 말을 빼도 됩니다. 아니 빼야 자연스럽습니다. 이 단어가 문장의 흐름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히브리어 원문에 “그도”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성경은 이런 부자연스러움을 나름대로 해석하여 이렇게 옮겼습니다. “엘리야의 겉옷으로 물을 쳤으나 물이 갈라지지 않았다. 그래서엘리야의 하느님 야훼여, 어디 계십니까?하면서 물을 치자 물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리하여 엘리사가 강을 건너는데”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엘리사는 스승 옷의 힘을 빌어서 요단강 물을 쳤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자신이 직접 하나님을 부릅니다. 비록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표현하기는 하지만, 엘리사가 이제는 직접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승천하고 안계신 상황에서 자신이 직접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이 직접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제는 자신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사역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자 물이 갈라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님을 만남으로 가능합니다.
이 시대에 지도자가 없다고, 실실한 그리스도인이 없다고 탄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잘 쓰는 말 중에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일제 암흑기에 이 땅에 지도자가 없다고 탄식할 때, “지도자가 없다고 말하지 말고 네가 열심히 배우고 익혀서 지도자가 되면 될 것 아닌가?” 하는 말씀입니다.
참된 지도자가 없다는 이 어두운 시대를 안타까워하고 슬퍼하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 생각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분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엘리사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지도자로 세워졌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만나고 이 시대의 진실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며, 우리의 자녀들을 참된 지도자로 양육합시다.
III.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친구가 보내준 설 명절 유머 두 가지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 설날 슈퍼에 장보러 간 40대 아줌마 이야기
점원 : “너무 젊어 보이세요.”
아줌마 : “호호 정말요. 제가 몇 살처럼 보이세요?”
점원 : “스물아홉!!??”
아줌마 : “호호호 농담도 잘하셔. 정말 그렇게 보여요?”
점원 : “아~ 요즘은 세일 기간이라... 40% 할인해 드렸습니다.”
* 분만실에 남편들 : 분만실 앞에서 남편들이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간호사가 첫 번째 남자에게 말했다. “축하합니다. 귀여운 쌍둥이에요.”
“와! 우연의 일치네요. LG트윈스에서 일하고 있거든요.”
두 번째 남자에게 말했다. “축하합니다. 세쌍둥이 아빠가 되셨어요.”
“정말이요? 난 삼성에서 일하고 있어요.”
세 번째 남자에게 말했다. “기네스북에 전화하세요. 일곱 쌍둥이입니다.”
“세상에 설마 했는데, 난 칠성사이다에서 일해요.”
그러자 네 번째 남자가 울부짖었다. “나는 119구조대에서 일한단 말이오.”
오늘의 우리의 본문 말씀은 위대한 불의 선지자 엘리야의 승천과 요단강 건너편까지 따라서 승천한 엘리야의 겉옷으로 요단강을 가르고 건너오는 엘리사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위대한 선지자의 후계자가 되는 것이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위대한 스승을 따라간다는 것은 맨 정신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대단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 번이나 “여기 머물라”고 말하는 스승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따라가겠다’고 힘주어 말하며 끝까지 따라나선 엘리사의 고백과 결단, 행동력을 배워야 합니다.
저는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라 요단강을 건너가는 모습을 보면서 두 가지 기적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엘리야가 겉옷을 들어서 요단 강물을 치매 요단강이 갈라지는 기적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기적은 자신은 능력이 없으면서도 믿음 하나로 요단강을 엘리사와 같이 걸어가는 제자인 엘리사의 모습이 더 크게 보였습니다.
우리는 밤에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나도 주님과 같이 걷게 해주시옵소서’ 하고 물 위를 걷다가, 일렁이는 풍랑을 보고서 물에 빠져 들어가는 베드로의 모습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4-2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고백하고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주님의 뒤를 따라간 사도 바울과 같이, 세상의 모든 것 다 내려놓고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서 주님을 따라가는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됩시다. 아멘!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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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11일(주일) 주일 2부예배 facebook 실시간 송출한 동영상 url 주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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