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토박이의 고향은 추억이다. 유년의 세월에 퇴계로 4가에서 을지로4가 내리막길의 겨울은 썰매 장이었다. 사춘기의 봄과 가을은 남산 길에 봄 꽃 가을 단풍이 가득하였다. 청년의 사계절 분노와 좌절과 희망 속에 흘러갔다. 사랑도 미움마저. 충무로 3가 일신초등학교가 헐리니 극동빌딩이 세워지고, 나는 빌딩 안의 회사에서 사원에서 과장까지 10년 세월 남산 보며 살았다. 창가에 서면 남산은 봄이 좋아라. 가을이 좋아라. 여름 비가 좋아라. 겨울 눈 좋아라. 내려보면 수경사 연병장이 있다. 장갑차가 오갔고 수경사 방패 마크 견장 단 병사들이 훈련 모습이 한 눈에 보였다. 지금의 남산골 한옥 마을이었다. 그때는 수경사가 천년 만년 있을 줄 알았던 시절이었다.
나는 회사를 떠났다. 추억의 거리, 마음의 고향 충무로를 떠난 지 20 여 년, 세월은 마치 달력을 한 번에 넘기듯 흘러갔다. 내가 사는 서울 땅 여기가 삶의 터전이니 지하철을 타고 오다가 걷기도 하면 아른 아른 세월아 내월아. 유년의 부랄 친구들, 낡은 적산가옥들 즐비하게 보이고 사라진다. 시내에 일 있어 충무로 3가 지하철역에 서니 눈길이 화살 되어 과녁에 박히는 느낌을 받았다. 서울의 하늘아래 있으되 아직도 못 본 남산골 한옥 마을이다. 마침 햇살은 눈물 겹도록 투명하였다. 역에서 한옥 마을은 금세였다. 더구나 길을 막고 입장권 낼 일 없이 거저 들어가니 마음입장권만으로 출입이 자유로웠다. 오는 이들 가는 이들 . 우리 나라 사람 말고도 일본인들 중국인들.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 것이 딴 나라 것인 양 낯설건만 천리만리 낯선 땅 조선시대 집을 찾아온 이국인들이 감사하다. 고맙다면 대접을 하여야 할 망정 그이들을 맞이하느니 무정한 안내판뿐.
전통 한옥 현황은
1. 순정효황후 윤씨 친가 - 안채•사랑채•대문간채가 연결된 'ㅁ'자 평면 - 건평 224.79㎡(68평) 이 가옥은 조선 제27대 순종(純宗)의 황후(皇后)인 윤씨가 열세 살에 동궁(東宮)의 계비(繼妃)로 책봉되기 전까지 살았다고 하는 집을 복원해 놓은 것이다. 그러나 건축양식으로 볼 때 1907년 순종의 즉위로 윤씨가 황후가 된 이후인 1910년대 부원군(府院君)의 궁(宮) 집으로 새롭게 중건(重建)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의 집은 종로구 옥인동 47-133번지에 있는데, 집이 너무 낡아 옮기지 못하고 건축양식 그대로를 본떠 이곳에 복원(復元)하였다. 집의 평면은 'ㄷ'자형 몸채 앞쪽에 사랑채를 두어 전체 평면은 'ㅁ'자형이다. 몸채와 사랑채 쪽은 지붕에 단차이(段差異)를 두었고, 사랑채 대청 부분은 바깥에서 볼 때 중층(重層)으로 꾸며져 있는데 이것은 지형(地形)을 살린 구성이다. 장대석 기단(長臺石基壇), 방형초석(方形礎石), 초익공(初翼工), 운공(雲工)을 사용한 점, 후면과 측면 툇마루 바깥쪽으로 설치한 정자(井子) 살창, 사괴석(四塊石)과 전돌(塼石)을 사용한 화방벽(火防壁)이 설치된 점 등에서 최상류층의 저택임을 알 수 있으며, 언뜻 보면 별궁(別宮)의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2. 해풍부원군 윤택영댁 재실 - 사당채와 몸채로 구성된 '元(원)'자 평면 - 연면적 218.18㎡(66평) 이 가옥은 조선 제27대 순종(純宗)의 장인(丈人) 해풍부원군 윤택영이 그의 딸이 동궁(東宮)의 계비(繼妃)로 책봉(冊封)(1906)되어 창덕궁(昌德宮)에 들어갈 때 지은 집으로 전한다. 동대문구 제기동 224번지에 있던 것을 이곳 남산골 한옥마을에 이전 및 복원하였다. 이 집의 평면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元(원)'자 모양인데 제일 윗터에 사당(祠堂)을 배치하고 그 아랫터에는 몸채를 두었다. 사당은 1960년 4•19 혁명 때 불에 타서 없어졌던 것을 복원하였으며, 사당 앞에 두 단의 석축(石築)을 쌓아 화계(花階)를 구성하였다. 몸채는 일고주오량가(一高柱五樑架)이고 앞채는 삼량가(三樑架)이다. 장대석(長臺石) 기단(基壇)과 방형초석(方形礎石), 그리고 일부에는 굴도리를 사용하여 집의 격식(格式)을 높였다.
3. 부마도위 박영효 가옥 - 안채•사랑채•별당채로 구성 - 연면적 323.96㎡(98평) 이 가옥은 조선 제27대 순종(純宗)의 장인(丈人) 해풍부원군 윤택영이 그의 딸이 동궁(東宮)의 계비(繼妃)로 책봉(冊封)(1906)되어 창덕궁(昌德宮)에 들어갈 때 지은 집으로 전한다. 동대문구 제기동 224번지에 있던 것을 이곳 남산골 한옥마을에 이전 및 복원하였다. 이 집의 평면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元(원)'자 모양인데 제일 윗터에 사당(祠堂)을 배치하고 그 아랫터에는 몸채를 두었다. 사당은 1960년 4•19 혁명 때 불에 타서 없어졌던 것을 복원하였으며, 사당 앞에 두 단의 석축(石築)을 쌓아 화계(花階)를 구성하였다. 몸채는 일고주오량가(一高柱五樑架)이고 앞채는 삼량가(三樑架)이다. 장대석(長臺石) 기단(基壇)과 방형초석(方形礎石), 그리고 일부에는 굴도리를 사용하여 집의 격식(格式)을 높였다.
4. 오위장 김춘영 가옥 - 'ㄷ'자형 안채에 'ㅡ'자형 사랑채 연결 - 건평 82.46㎡(25평) 이 가옥은 조선말기 오위장을 지낸 김춘영이 1890년대 지은 집이다. 종로구 삼청동 125-1번지에 있던 것을 남산골 한옥마을에 이전, 복원하였다. 'ㄷ'자형 안채에 'ㅡ'자형 사랑채를 연결시켜 ('') 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안채 대청은 오량가(五樑架)이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삼량가(三樑架)이다. 판대공(板臺工)을 사용하고 홑처마로 꾸미는 등 전체적으로 평민주택(平民住宅)의 양식을 보이고 있지만, 안방의 뒤쪽 벽, 즉 길가에 면한 부분에 사괴석(四塊石)과 전돌(塼石)을 사용하여 화방벽(火防壁)을 쌓아 집의 격조를 더 높인 것이 특징적이다.
5. 도편수 이승업 가옥 - 안채•사랑채 - 건평 119㎡(36평 ) 이 가옥은 조선말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 의하여 경복궁(景福宮)이 중건(重建)될 때 도편수(목수의 우두머리)였던 이승업이 1860년대 지은 집으로 중구 삼각동 32-6번지에 있던 것을 이곳 남산골 한옥마을에 이전, 복원하였다. 대문간채와 행랑채가 안채와 사랑채를 둘러싸고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만 남아 있다. 안채는 '丁(정)'자형이고 사랑채는 'ㄴ'자형의 평면이다. 안채에서 부엌과 안방쪽은 반오량(半五樑)으로 꾸며 전후면(前後面)의 지붕길이를 다르게 꾸민것은 특색이 있는 구조이다. 대청과 건넌방쪽은 일고주오량가(一高柱五樑架)로 구성되어 있다.
두리번 대며 여기가 누구댁인고. 이 방은 사랑방인가. 이 작은 방은 무엇이며. 마치 여기 처음부터 있었던 양. 집들은 시치미를 떼며 있는데 찾아온 객은 허둥지둥이다. 방마다 살림 살이, 부엌 아궁이에 장작, 굴뚝에 연기가 오를 둣. 새집 증후군이 무슨 말이냐. 새집일 수록 흙 냄새 나무 냄새이니 바로 새집이 보약이지. 대문을 보면 큰 살림 위엄이 보이며 사랑채 마님이 객을 맞아 한담 들리는 듯. 안방 마님은 후원을 바라보며 마룻장 밟을 때 치마자락 소리 바람소리. 퐁당 우물에 두레박 담가 젊은 머슴 목축이면 우람한 가슴팍 송골 송골 땀에 저절로 눈가며 수줍던 종년 삼월이의 나주막한 한숨. 밤에 뜨는 초승달이 시름인줄 뉘 알랴. 삼월이 청춘의 나날들.
그 집 그 방 그 마당 그 부엌 그 장독대는 다 있건만 님들은 부유인생이 되셨구려. 돌아보면서 장판에 네 활개 피며 눕고 싶어라. 마루에 올라 동동 구르고 싶어라. 그때 경고판이 들어가지 마시오. 눈 바로 뜨고 낯선 이를 경계한다. 맞다 맞아 절대 보호해야지. 버려두면 애 어른 할 것 없이 마당발로 드나들며 개판 소판 만들 테니 잘했군 잘했어. 나는 그냥 마룻바닥을 만진다. 옛 어른 손길 발길이 와 닿는다. 그립고 정다워. 기쁨과 슬픔이 더깨되어 내렸을 마루판을 어르신네 당신들을 만지듯 만집니다. 내친 걸음 몽땅 보자.
그 집이 그 집 같고 저 집이 이 집 같다. 이러기에 사물은 아는 자의 눈에 보이는 법이다. 한 때 모든 이들이 구분하던 가옥을 한 백 년 뒤 이 나라의 땅에 사는 자식들은 못 알아본다. 대강 ! 찬찬히? 보노라면 사람 생김이 다 비슷하여도 다 다르듯 같은 구석 없다. 요즘의 집처럼 콘크리트를 비벼 똑같이 만든 그런 집들이 아니니 생김새는 비슷해도 서로 다르구나. 이 집 보고 저 집 살피다 보니 전체 게시판에는 있으나 내 눈에는 보이지 않던 경복궁 도편수 이승업 한옥이다.
▲ 한옥마을 홈페이지에는 이런 사진이 떠있다. 실제는 ?
ⓒ2005 황종원
다시 살피니 보이는데 웬 전통찻집 간판에. 에고 제고 먹거리도 파네. 잔치국수며 동동주에 부침이. 예까지 와서 취흥 도도할 일 무어있다고. 부엌은 주방 되고 마루에서 손님 접대. 앞 마당 뒷마당에 천막치고 잔치 벌려. 배고프고 술 마른 이들의 주막이냐.
▲ 실제는 이런 전통 찻집 간판이 걸려있으니...
ⓒ2005 황종원
밥 팔고 술 팔려면 한옥 마을 너른 터에 주막 한 채 지어놓고 머리 끈 질끈 매고 행주 치마 두른 두리 뭉실 입담 좋은 주모 썩 나서고, 삼월이 오월이가 음식 쟁반 나르는 풍습 보여 주면 팔면 안돼나. 어느 한옥은 들어가지 마시오 하고 여기서는 마른 장작 같은 한목에서 불일하니 어쩌자고 이러시오.
▲ 마당에는 테이블이 놓여 손님 받을 차비가 완비되었다.
ⓒ2005 황종원
언제 무슨 탈 나면 이게 아니네 저게 아니네 떠든들 불타버린 한옥이 살아나기나 할까. 바로 잡아야 한다. 음식점은 고택 한옥에서 나가라. 밥 먹자고 술 마시러 한옥 마을 오는 사람 어디 있나. 한옥마을 길 건너 극동빌딩 뒤 직장인들이 단골 삼는 식당이 즐비하니 그 곳들이 아니 좋으랴.
▲ 고택에 웬 차림표. 여기는 고가이지. 먹자집이 아니건만.
ⓒ2005 황종원
집만 있으면 뭘하나. 집이 있으니 사람들 세워 찾오 온 사람들에게 신바람 채울 이런 요량은 어떨지. 도우미를 세우자. 공공 취로요원중에서 5070 중에 난다 긴다 하며 한때 딴 나라 말로 한 시대를 살았던 이들을 도우미 세워 조근 조근 한옥 사연이며 집의 내력 풀어내면 얼마나 좋을까. 한옥 집집 전해오는 이야기는 집안내력에 나라의 풍운이 어찌 없으랴. 연극동호회 동아리들이 짧은 시간 집안 이야기 담아 집안 마루나 사량 채에서 연극 한마당에 관객 박수에 어깨 흥 아니 날까. 일주일 하루 정해 공연의 날로 정하면 이 나라 사람이면서 자신의 문화를 알게 되며 외국 사람에게 볼거리를 주니 이 아니 좋으련만. 언제까지 밥 팔고 술 팔며 조상의 얼을 뭉기며 살아 가려나. 어찌하오 어찌하오. 조상님들 어찌하오. 어르신네 남긴 유물 지키기 보다 내 밥 그릇 챙길 일이 급하여 이리도 소홀하니 우리 또한 자식들에게 부모라 하리까.
마음의 지우개로 이승업 가옥 대문에 걸린 전통 찻집 간판을 지우고 뜰에 놓인 천막을 지우고 돈 벌자는 상혼을 지우고나니 눈에 떠오르는 정경 하나. 남산골에 나이 찬 샌님이 하나 있어 근처 대감 눈에 들었다. 대감께서 샌님을 보자하니 눈치가 곰탱이 샌님이라 해도 대감의 외동따님과 눈 마주친 일이 있어 따끔하다. 그런 날 떠오르는 풍경이 있으니
딸깍발이 샌님 나섭니다 꿰진 갓 깡동 두루마기에 나막신은 딸각딸각 기세등등 솟을 대문에 멈춰 긴 숨 한 번 목청 가다듬고 나오너라 목심줄 불끈하니 뉘신지요 청지기 수작이 낭랑합니다
사랑방 대감 헛기침 소리 안방 마님 치마자락 마룻바닥 끌며 혼기 앞둔 낭자 손끝 자수에 원앙 한 쌍이 수줍습니다
이제 와 길손이 소리 높여 뉘 게신지요 하니 반쯤 열린 대문 사이 빈뜨락에 햇살 가득한데 청지기는 마실 가고 대감마님 연상 위 쌓인 세월은 그 동안 백 년이 지났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