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우리 지역의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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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향교 • 서원> 알아보기
⓵. 관아골, 회덕향교
향교는 전통시대 나라에서 세운 국립학교이다. 우리나라의 학교는 삼국시대부터 있었다고 한다. 고구려의 太學, 신라의 國學이 그런 것이다. 이들 학교는 중앙에 세운 官學으로 귀족의 자제들을 교육시키던 관리양성기관이었다. 그러다가 각 고을에 학교가 생긴 것은 과거제도가 시행되기 시작한 고려시대부터라고 한다.
그 후 조선시대에 이르면서 각 지방의 관학인 향교와 사학인 서원이 병존하게 된다. 향교와 서원은 설립주체나 배향인물, 설립시기 등에서 차이가 있으나 그 형태나 기능은 공통점이 있다. 오늘날의 학제로 본다면 향교는 중등교육기관에 해당하고, 서울의 성균관은 대학에 비유될 수 있다. 향교와 서원은 제향공간과 강학공간을 함께 갖추고 있다. 대전에는 회덕향교와 진잠향교가 있다. 사학으로는 崇賢書院과 道山書院이 있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향교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건국이념인 성리학을 널리 보급시키기 위하여 ‘一邑一校’의 원칙에 따라 군·현마다 향교를 세웠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당시 329개 고을에 향교가 건립되었다고 한다. 향교는 郡·縣의 존폐와 운명을 같이하였다. 군·현이 새로 생기면 향교도 세워지고, 군·현이 없어지면 향교도 폐교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근세에 세워진 향교는 충남 보령의 鰲川鄕校(1901년)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세운 향교도 있다. 강원도의 東海鄕校는 1995년에 세웠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향교가 모두 조선시대에 세운 것은 아니다. 현재의 향교는 모두 234개이고, 성현의 위패를 모신 文廟는 서울의 성균관(대성전)을 포함 235개이다.
우리나라의 향교는 지형에 따라 건물의 배치형식이 달랐다. 구릉지의 향교는 대체로 앞쪽에 강학공간인 明倫堂을 두고, 뒤쪽에 제향공간인 大成殿을 두는 前堂後廟이다. 다만 齋舍(기숙사)를 명륜당 앞에 두느냐, 뒤에 두느냐에 따라 前齋後堂, 또는 前堂後齋라고 한다. 평지는 사당을 전면에 배치하고, 강당을 후면에 배치하는 前廟後堂의 형태를 취했다. 서울의 성균관은 전형적인 전묘후당이다. 평지의 前廟 및 구릉지의 後廟는 사당을 上席에 두기 위한 고유의 전통이다. 그러나 평지라도 左廟右堂 및 右廟左堂의 형태도 있다.
회덕향교는 여느 향교처럼 제향공간인 대성전과 강학공간인 명륜당이 있다. 백제의 山城이 있던 雨述山 기슭의 구릉지에 세웠으므로 당연히 전당후묘이다.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어서 이곳이 신성한 지역임을 말해준다. 하마비가 있어서 누구든지 향교 앞에서는 말에서 내려야 한다. 성현의 위패를 모신 엄숙한 성역이기 때문이다. 하마비는 조선 태종 때부터 유래한다. 홍살문을 지나면 外三門이 있고, 또 入德門을 들어서면 명륜당이 있다. 명륜당을 돌아가면 基壇 위에 內三門이 있는데, 이 문을 통과해야 대성전에 이른다. 삼문가운데 중문은 神門으로 신이 드나드는 문이다. 석전대제 등 특별한 의식행사가 아니면 좀처럼 열지 않는다.
회덕향교는 작은 고을의 학교로서 정원은 30명이었다. 27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데 이를 小設位라고 한다. 공자를 비롯한 중국의 五聖과 宋朝四賢 및 우리나라 18현이 모셔져 있다. 문묘의 배향위차는 전통적으로 전국이 동일하다. 위패봉안은 主享·配享·從享이 있고 昭穆之序를 따른다. 회덕향교는 성균관의 위차와는 다른 점이 하나있다. 동춘이 상석(穆, 16位)에 배향되고, 우암이 하석(昭, 17位)에 배향되었다. 昭는 東壁의 左從享을 말하고, 穆은 西壁의 右從享을 말한다. 이는 항렬과 나이를 배려한 회덕만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동춘과 우암은, 동춘이 나이도 한 살 위이고 항렬도 叔行이다. 진잠향교도 같은 소설위인데 다만 宋朝六賢을 배향한 점이 다르다.
조선 초기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향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거의 소실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향교는 조선 후기에 중건한 것들이다. 회덕향교는 조선 초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기록이 없어서 확인할 수 없다. 다만 현재의 모든 향교들은 조선 개국시기인 1400년을 전후하여 지어지고, 임진·정유 兩亂에 소실된 것을 1600년을 전후하여 중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문헌상으로 창건연대가 확실한 향교들이 없지는 않다.
회덕향교의 현재 건물(대성전과 명륜당)은 고종 때 禮曹의 校宮重修關文(1871)에 의해 1872년 7월에 중수한 것이다. 불과 150년 전 일이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개·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1871년은 대원군의 1차 ‘未賜額書院撤廢令’ 후, ‘사액서원 철폐령’이 추가로 내려짐으로써 전국에 47개 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폐시킨 해이다. 많은 서원이 동시에 문을 닫았으므로 향교의 중수가 더욱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는 大成殿을 ‘大聖殿’이라 했다. 그러던 것을 단종 때 ‘大成殿’으로 고치고 현판의 글씨(색깔)는 金書로 쓰도록 했다. 문헌에 따르면 회덕향교 ‘대성전’ 편액은 한석봉 글씨라고 한다. 검은 판에 금서로 썼으므로 전통을 잘 따른 현판이다. 다만 명륜당은 靑書로 쓰도록 되어 있었으나, 書者未詳의 금색글씨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조선의 전통과는 어긋난다.
조선시대에는 앞에 기술한 대로 대성전과 명륜당의 현판 색깔이 달랐다. 大成殿은 검은 판에 금색글씨이고, 明倫堂은 흰 판에 청색글씨로 썼다. 금색과 청색은 음양의 원리를 따른 것이다. 死者들의 祠堂은 금색, 生者들의 學堂은 청색으로 쓴 것이다. 우리나라 明倫堂의 편액은 대체로 두 종류이다. 하나는 주자(朱熹)의 글씨를 모사해서 飜刻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1606년 중국(明)의 朱之蕃이 사신으로 왔을 때 쓴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향교마다 현판들이 제각각이나 고유의 전통을 따라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사자들의 공간과 생자들의 공간은 구별하는 것이 우리 전통이기 때문이다.
회덕향교의 건물배치는 앞쪽이 강학공간이고, 뒤쪽이 제향공간이다. 모두 三門으로 출입하는데 ‘東入西出’로서 동문으로 들어가서, 서문으로 나온다. 특히 내삼문을 오르내릴 때는 ‘涉級聚足’이다. 東階로 오를 때는 계단에 오른발을 먼저 디디고, 다음 왼발을 모아디디면서 한 계단씩 오른다. 西階로 내려올 때는 반대로 한다. 이것이 ‘東階先右足·西階先左足’이다. 曲禮(註)에 “서로 마주보기 위한 것으로, 공경하는 뜻”이라고 한다. 문묘출입은 이토록 엄격한 출입의례가 있는 것이다.
향교의 석전대제는 봄·가을로 제향을 드리는 의식이다. 향교나 서원은 祭享, 일반 가정은 祭祀라 한다. 제향과 제사는 祭羞의 차이가 있다. 제향은 날 음식(犧牲)을, 제사는 익힌 음식을 드린다. 회덕향교는 고례대로 ‘春秋仲月上丁’에 석전을 올린다. 이는 매년 음력의 2월과 8월 첫 번째 丁日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석전은 중국이나 일본에도 남아 있지 않은 전통의 악기와 祭器를 사용한다. 제례악과 八佾舞 및 제관이 입는 의상과 의식이 화려하고 장중하여 예술적 가치가 높다. 국가무형문화재(제85호)로 지정되어 있다. 중국이나 대만에서도 참관을 온다. 회덕향교는 여건이 안 되어서 佾舞는 없고, 제례악은 녹음으로 대신하고 있다.
조선시대 회덕향교는 오늘날로 말하면 소위 명문이었다. 송준길·송시열을 비롯하여 기라성 같은 선비들이 다닌 학교였던 때문이다. 그동안 녹지지역으로 묶여있어서 자연경관이 잘 보존되어있다. 우술산을 배경으로 좌청룡 우백호가 잘 갖춰진 명당이라고 할 수 있다. 자랑스런 우리 고을의 문화재이다. 잘 가꾸고 보존해서 후세에 전할 일이다.
⓶ 서원골, 숭현서원
서원은 강학과 선현에 대한 제향을 목적으로 대체로 16세기 이후 사림(士林)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이다.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정치를 펼쳤던 조선왕조는 서울과 지방의 고을마다 향교를 세우고 교육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향교는 점차 교육적 기능이 쇠퇴하면서 재야의 사림들이 다투어 서원을 세우기에 이른다. 숭현서원도 이런 와중에 설립되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회덕(縣)에는 ‘삼현서원(三賢書院)’이 있었다. 삼현서원은 정광필(鄭光弼) · 김정(金淨)·송인수(宋麟壽) 등 삼현의 위패를 모시고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던 사우(祠宇)로부터 출발했다. 이 사우는 처음 용두록(龍頭麓)에 건립되었다. 용두록은 현재의 을지대학교(대전캠퍼스)와 목양마을 일대로 추정된다. 이곳이 용의 머리를 닮았다는 용두봉(龍頭峰)이다. 숭현서원이 삼현서원 또는 삼현사로 불리는 것은 당시는 혹 서원으로도, 사우로도 혼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숭현서원을 처음 지은 시기는 문헌마다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대체로 1585년 창건설이 몇몇 문헌에 나타나고 있다. 다만 이건(移建) 시기는 1609년이 정설이다. 신흠(象村 申欽, 1566~1628)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소실된 사우를 1609년 송남수(宋枏壽, 1537~1626)가 현재의 유성구 원촌동에 옮겨지었다. 고을 선비들이 조정에 청액(請額)을 해서 묘호를 ‘숭현(崇賢)’으로 받았다. 제물과 제례도 관급으로 하고 제향은 중정(中丁)으로 한다.”고 기록했다.
옛날에 사우가 용두산 기슭에 있었는데, 임진년 병화에 없어지고 만력 기유(1609, 광해군 1)에 고을 서쪽 몇 리 밖에다 새 터를 잡아 창건하였는데, 역시 지형과 경관이 좋은 곳이다. 그 일을 실지 주관하기는 향대부(鄕大夫) 송남수가 하였지만 그 고을 선비들이 조정에 청액하여 묘호를 숭현으로 하사받고 제물과 제례도 관급으로 하여 중정으로 제사를 올렸던 것이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다음 해 1월 강화도가 함락되자 회덕의 죽창 이시직(竹窓 李時稷, 1572~1637)과 야은 송시영(野隱 宋時榮, 1588~1637)이 강화도에서 순절했다. 이들은 모두 회덕출신으로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의 문인이다. 1641년 서원의 바로 옆에 별사 충절사(別祠 忠節祠)를 세우고 이시직과 송시영을 배향하였다. 일명 죽사(竹祠)로도 불렀는데, 이시직을 배향했기 때문인 듯하다. 송준길이 발의(發議)하고, 주도하였다.
신사 14년(崇禎) 충절사(忠節祠)를 세우자는 의논을 일으켰다. 선생(宋浚吉)이 죽창·야은 두 공께서 동시에 순국해 절개를 세웠으니, 제사도 함께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논을 일으켜 숭현서원 옆에 사당을 세우고 ‘충절사’ 라고 이름 지었다.
그 뒤 1667년 별사(忠節祠)에 배향했던 이시직과 송시영을 본사(本祠)로 올려서 삼현(鄭光弼·金淨·宋麟壽)과 함께 봉안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지역의 선현들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1646년에는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 1681년에는 송준길(同春 宋浚吉, 1606~1672), 1695년에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을 추가로 배향함으로써 오늘날의 ‘팔현묘(八賢廟)’가 되었다. 팔현의 위패는 이서위상(以西爲上, 서쪽부터 차례로 모시는 법)으로 배향하였다. 춘추제향은 계월 중정일(季月 中丁日, 음력 3월과 9월의 두 번째 정일)에 봉행하였다.
숭현서원의 강당(立敎堂)은 송이창(淸坐窩 宋爾昌, 1561~1627)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1617년 유생들을 이끌고 창건하였다. 송이창은 신녕현감(新寧, 경북 영천의 옛 지명) 재임 시 서매부(庶妹夫) 서양갑(徐羊甲, ?~1613)이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죽었다하여 논파(論罷)당하여 그 해 가을 고향으로 돌아왔다. 향리에 머물면서 많은 역사(役事)를 일으켰다. 문헌에 나타난 것만도 읍호정(挹灝亭)을 짓고, 숭현서원 강당(立敎堂)을 세웠다. 또 정유재란 후 임시로 지었던 자신의 별당(淸坐窩)을 중수하였다. 송이창이 57세 때 지은 읍호정은 벼슬살이를 접고 만년을 보내려했던 곳이었다.
읍호정과 망신거를 지었다. 선암천 가에 있는 정자가 황폐한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부군이 마침 올라가 경치를 바라보고는 기뻐하여 몇 칸의 초옥을 지어 만년에 은거할 곳으로 삼고서, 옛 이름대로 읍호정이라 하였다. 또 그 앞에 작은 집을 지어 추·동기에 거처할 곳으로 삼고 ‘망신거(望辰居)’라 이름 하였는데, 선원 김 상공이 전자로 정액(정자의 현판)을 쓰고, 팔분으로 ‘망신거’를 써 주었다.
동네 어른들의 말로는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도 있었다는 읍호정이 지금은 흔적도 없다. 대화공단 도로변에 ‘읍호정지(挹灝亭址)’ 표석이 있으나 길가 화단에 있어서 보이지도 않는다. 송이창은 입교당을 세운 후, 선비들의 청원으로 숭현서원 원장이 되었다. 송준길의 기록으로는 1627년 죽을 때까지 10여 년 동안 원장으로 있으면서 성심을 다해 제생(諸生)을 고무시켰다고 했다.
부군의 나이 57세 때, 앞장서서 제생을 이끌고 숭현서원에 입교당(立敎堂)을 세웠다. 이때 회덕의 선비들이 부군에게 원장이 되기를 청하였다. 부군은 성심을 다해 10여 년 동안 몸소 앞장서서 제생을 고무시켰다.
숭현서원은 대전지역에 최초로 건립된 사액서원이다. 그러나 대원군의 섭정시절이던 1871년 3월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고 말았다. 이때 철폐를 면한 서원은 일인일원(一人一院)의 원칙에 따라 전국에 모두 47개에 불과했다. 이때 충청도는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과 논산의 노강서원(魯岡書院)만 남았다. 탄방동 도산서원(道山書院)도 이때 철폐된 것을 1968년과 1973년 2차에 걸쳐 안동권씨 종중에서 복원한 것이다. 도산서원은 권득기(晩悔 權得己, 1570~1622)와 그의 아들 권시(炭翁 權諰, 1604~1672)를 배향했다.
현재의 숭현서원은 훼철된 후, 130년 만인 지난 2001년 10월 대전광역시가 복원한 것이다. 어느덧 서원을 세운지 20년이 지났으나 전해지는 문적(文籍)도 없고, 그 흔한 세미나 한 번 개최한 적이 없다. 자치단체나 지역 학계의 관심이 절실하다. 다만 그동안 대전시와의 협약으로 회덕향교가 관리를 맡고 있는데, 재정이나 인력의 한계로 겨우 명맥이나 유지하는 수준이다. 필자가 원장으로 있던 2018년에는 시의 지원으로 시급한 몇 군데를 보수하고 보안시스템을 설치하였다. 관리사도 새롭게 단장을 해서 서원의 모습이 정돈되었다. 대전시의 문화관광해설사들이 상주하면서 방문객을 안내하고 있다. 서원을 널리 알리고 또 유용한 교육공간으로 활용되기를 기대하는 마음 크다.[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