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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02. 묵상글 들 ( 연중13. 금.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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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02.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대체 우리의 어떤 모습을 보고 부르셨을까? 우리의 잘난 모습, 우리의 능력, 혹은 우리의 선함, 봉사정신, 아니면 당신께 대한 충성이나 믿음을 보고 부르셨을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이는 우리가 죄인인 까닭에 부르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짓지 않은 이들인 것이 아니라,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그냥 죄인인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용서해야 하는 일을 해야 하는 이들입니다.
<신명기> 저자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너희에게 마음을 주시고 너희를 선택하신 것은, 너희가 어느 민족보다 수가 많아서가 아니라,
너희를 사랑하시어 구해내셨다.”(신명 7,7-8)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자애와 호의를 입어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토록 사랑과 호의를 입은 이들이기에, 그렇게 사랑과 호의를 베푸는 일을 소명으로 받은 이들입니다. 그토록 자비와 용서를 입었기에, 그렇게 자비와 용서하는 일을 소명으로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를 따라라” 하심은 우리도 죄인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께 받은 그 용서와 사랑, 그 자애와 호의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9,13)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 실행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나약하고 부족함이 많은 죄인들인 내 형제들을 단죄하기보다 하느님의 자비의 마음, 호의의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팡세>를 쓴 파스칼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며,
하나는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죄인이다.”
오늘, 나는 죄인인가? 의인인가? 만약 죄인이라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들의 친구인 그분을 친구로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당신은 죄인인 까닭에 저를 부르셨습니다.
찾기도 전에 먼저 부르시고,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용서받았으니 용서하게 하소서. 먼저 찾아가고 먼저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마태 9,12)
주님!
당신이 바라시는 바를 알게 하소서!
제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바라는 것을 바치게 하소서.
희생제물이 아니라, 제 행실을 바치게 하소서.
제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여 내어놓게 하소서.
제 자신이 자비의 산제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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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02.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자신이 예수님께로부터 제자로 부르심을 받게 된 경위를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세리 출신이었음을 굳이 숨기지 않고 기술하고 있으며, 심지어 자신이 부르심을 받던 자리에는 죄인들도 많이 끼어 있었다는 사실까지 밝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마르코나 루카 복음사가들이 같은 내용의 기사를 보도하면서, 동료인 마태오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그저 레위라는 세리가 제자로 부름 받았다고만 드러내고 있는 것과 대조적입니다(마르 2,13-17; 루카 5,27-32). 이로써 우리는 마태오가 세리로 활약하던 당시에 지니고 있었을 세속적 영민함이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이후 영적인 지혜로 승화되어 복음적 영민함으로 변화되어 있음을 확인합니다.
그 반면에 같은 사안을 두고 바리사이 유다인들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그들은 율법을 대단히 중시하던 자들이었으므로 율법을 잘 지키지 않는 세리와 죄인들을 멀리 하고 있었고, 예수님께서도 멀리 하기를 바랐을 터인데 느닷없이 세리와 죄인들을 불러 잔치를 벌이고 있으니 궁금해서 질문을 한 것이 아니라 반공개적으로 험담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를 눈치 채신 예수님께서 해학성 답변을 하신 겁니다. “당신네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자처하고 있으니 내가 당신네 편을 들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세리와 죄인들은 당신네 기준으로 볼 때 율법상 죄인들이니, 나 같은 의사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꺼지시오!” 그들 바리사이 유다인이 마태오처럼 복음적 영민함을 갖추었더라면, 그렇게 말고 이렇게 물어야 했습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가난한 이들을 친구로 삼는 것이오?”
사람이 자기라는 기준을 벗어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자기의 정서와 감정을 감추고 말하거나 억지 표정을 짓기 어렵고, 자기자신은 물론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해관계를 초월하는 입장을 견지하기 어려우며, 이로운 방향으로 생각하고 움직이면서 해로운 방향으로는 가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 조절해 주는 나침반이 양심이요 이 양심을 살아있게 해 주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각자의 양심이 신앙을 통해 하느님을 반영하고 가리키면 자기의 정서와 감정과 이해관계가 하느님의 관심사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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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02.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열려있는 분
우리는 기왕이면 깔끔하고 멋있어 보이는 사람과 만나고 싶어합니다. 얼굴도 잘생기고 돈도 있어 보이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입니다. 호감이 가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은총이요 복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매력이 흘러넘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갈수록 밥맛인 사람도 있습니다. 겉보기와는 너무도 달라서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보지 않으려 해도 자꾸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힘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도 참 소중한 사람인데 담을 쌓을 때가 있습니다. 더더욱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다가 세금 징수원으로 천대를 받는 사회계급에 속해 있는 마태오라는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길을 가시다가 부르셨다는 것은 하루하루 삶이 펼쳐지는 현장에서 부르셨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삶의 현장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길이란 목적지가 아니라 목적지에 이르는 통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현장인 이 세상은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니라 지나가는 곳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 세상은 간이역입니다. 종착역은 하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필이면 악명 높은 사기꾼이나 탐욕이 가득한 사람으로 간주 되어 공개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던 세리 마태오를 부르시고 그 집의 식탁에 앉아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자리를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식탁에는 죄인과 의인의 구별이 없습니다.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세리는 부정한 수단과 방법으로 돈을 버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주위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혐오의 대상이 되었으며 자기가 번 돈을 가치 있게 쓸 줄을 몰랐던 인색한 사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당시 사회에서 가장 천대받고 따돌림 당하던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과 자리를 함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렇게도 안목이 없었다는 말씀입니까?
그 반대입니다. 우리가 안목이 없다고 생각하는 만큼 예수님의 품이 넓다는 것입니다. 그 품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거부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습니다. 아무리 문을 크게 열어도 스스로 들어가지 않는 자는 받아들일 수 없는 법입니다. 바리사이들이 꼭 그러했습니다. 자신의 기득권이나 이해관계를 따지며 안주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마태오가 세관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바로 영적성장이 멈춘 상태를 말하기도 합니다. 세상에 안주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따돌림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것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고 그곳을 떠나는 것이 두려웠고, 그곳을 떠나면 죽는 줄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돈을 생각하면 떠날 수 없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은총의 날, 진정한 행복의 날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여전히 옛 생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우리는 안주를 탈피하여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에 안주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큰 품을 우리의 마음으로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나의 부족함을 인정할 때,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게 될 때 거기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새 삶이 시작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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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02.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시청(視聽)과 견문(見聞)’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청은 단순히 보고 듣는 것입니다. 견문은 보고 깨달은 지식을 이야기합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쓴 유흥준 교수는 ‘문학과 예술’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베들레헴 성당의 입구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당신이 여행객으로 왔다면 순례자가 되어서 가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순례자로 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가시기 바랍니다.’ 인터넷에서 기사를 검색할 때도 제목만 보기보다는 기사의 행간과 문맥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기사를 작성한 기자가 소속된 언론사도 보아야 합니다. 언론사의 보도 성향에 따라서 기사의 방향과 내용도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보고 싶은 기사만 찾아서 보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언론사가 전해주는 기사만 보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시대의 징표를 알기 위해서는 다양한 기사를 검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행이나 성지순례를 갈 때입니다. 바쁜 일정 때문에 사진만 찍고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처음 가는 곳이기도 하고, 주로 사진만 찍고 오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무엇을 보았는지, 어떤 느낌이 있었는지 잘 모르게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는 길은 정신없는 시장입니다. 관광객들도 많고, 길이 좁고, 사람이 많습니다. 여행객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순례자로 가게 되면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는 길이 다르게 보입니다. 그곳은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신 곳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길입니다. 기력이 없어서 넘어지신 곳도 있습니다. 성모님과 예수님이 만나신 곳도 있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가신 길도 있습니다. 베로니카가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땀과 피를 닦아 드린 곳도 있습니다. 순례자들은 그 길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기도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의 배우자를 찾으려고 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한 가지 원칙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미모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재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가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재능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원하는 것은 고향 땅에서 배우자를 찾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고향 땅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하느님께서 고향 땅에서 아브라함을 불러주셨듯이, 고향 땅에서 아들 이사악의 배우자를 정해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지금은 본인의 의지에 의해서 혼인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양가 부모의 의견을 따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박해시대를 살던 신앙인들에게 자녀의 배우자의 기준은 같은 신앙이었습니다. 능력이 있어도, 재물이 많아도, 가문이 좋아도 신앙이 없으면 자녀의 배우자로 삼지 않았습니다. 저의 어머니도 자녀들의 배우자는 신앙인이어야 했습니다. 신앙이 없으면 먼저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된 후에 혼인하도록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정해주신 원칙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이유입니다. 가난한 분, 외로운 분, 아픈 분, 절망 중에 있는 분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르신들, 아이들과 가까이 하고, 받을 것이 많은 분들과의 시간도 필요하겠지만, 줄 것이 없는 분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그분들을 통해서 주님께서 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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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02.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두 명의 기업 대표가 있는데 이들의 경영 방식은 정반대인 것으로 늘 대조되었습니다. 불경기 때 대처하는 방식만 봐도 알 수 있었지요. 한 대표는 불경기에는 인원을 줄이거나 현행 유지를 합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불경기니까.”
다른 대표는 불경기가 되면 오히려 인원을 많이 뽑습니다. 그 이유 역시 간단합니다.
“불경기니까.”
불경기에는 더 좋은 직원을 합리적인 연봉으로 채용할 수 있기에 이때 더 회사를 확장하는 기회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기업이 더 잘 나가는 회사일까요?
두 기업 모두 잘 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각 대표가 자기만의 철학을 가지고 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해괴한 선택이라 해도 남들도 이해할만한 합리적인 철학을 가지고 있으면 긍정의 결과를 얻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남 따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경우는 절대 잘 될 수가 없습니다. 남의 철학을 따라 하는 것이니 여기에 대한 믿음도 부족하고, 따라서 특별한 변수에 대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근동 특히 팔레스티나에서 식사는 사람들 사이의 일치를 가장 강하게 드러내는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율법 준수에 온갖 정성을 기울이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을 알지도 지키지도 못하는 ‘세리와 죄인’을 멸시할 뿐만 아니라 그들과 상종하는 것조차 피했습니다. 더구나 그들과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인 곧 부정한 자의 초청을 받아들이시어, 다른 많은 죄인과 함께 식사하십니다. 이로써 그분께서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중요한 규정을 의도적으로 깨드리십니다.
그들이 봐야 할 것은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확실하게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사랑이 아닌 규정의 준수만을 외쳤던 바리사이를 비롯한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꾸짖음이었습니다. 그들이 만약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었다면, 주님을 이해할 수 있고 또 함께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써 구원이라는 가장 큰 선물을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철저히 잘못된 철학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한 생명이라는 가장 큰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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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의 문제에는 깔끔하고 간단한 대답이 있지만 그 답은 항상 그르다(헨리 루이스 멩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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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신앙생활
저는 남들보다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듭니다. 10시만 되면 눈이 저절로 감기고 그래서 10시를 전후해서 침실로 향합니다. 잠을 꾹 참으면서 해야 할 일을 해도 눈꺼풀이 감기면서 능률이 전혀 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랜만에 선후배 신부를 만나서 술 한 잔을 마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계를 보고서 깜짝 놀랐습니다. 10시가 훨씬 넘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전혀 졸리지 않았습니다. 눈이 더욱 초롱초롱해지면서 더 같이 있고 싶었습니다.
만약 그 신부들이 반갑지 않고, 그 자리가 즐겁지 않았다면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졸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를 즐기니 이제까지와 다른 모습을 갖게 된 것입니다.
주님과의 만남도 즐겁고 유쾌한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치 의무감에서 주님을 만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즐거운 신앙생활이 아닌 어쩔 수 없이 하는 신앙생활이 되고 맙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늘 지루하고 힘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즐거운 신앙생활이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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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02.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부르심과 응답
- 주님과 늘 새로운 만남 -
참으로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나를 부끄럽게 하는 감동을 주는 책이 글이 말이 삶이 사람이 참으로 좋은 책이요 글이요 말이요 삶이요 책입니다. 요즈음 참 감동적인 책을 뒤늦게 읽었습니다. 책을 손에서 도저히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도 꽤 많이 남았습니다만 이렇게 감동적인 평전은 처음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볼 때 시인이자 신비가이자 혁명가인 이 사람이, 정말 진짜 하느님의 시인이자 신비가이자 영적 혁명가인 예수님을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예수님은 참 좋은 그의 스승이자 친구가 되어 그의 열망을 해결해 주었을 텐데 아는 아쉬움이 큽니다.
이제 영원히 살아있는 전설과 신화가 된 그의 이름,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1928-1967)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같은 아르헨티나 출신의 공산주의 혁명가, 정치가, 의사, 대학교수, 외교관, 저술가 등 참 다양한 면모를 지닌 불가사의한 인물입니다. 그가 혁명의 전사로 뛰어들면서 그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저는 예수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저는 힘이 닿는 한 모든 무기를 동원하여 싸울 것입니다. 저들이 나를 십자가에 매달아두게도 하지 않을 것이며 어머니가 바라시는 방식대로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다음 글도 감동적입니다. ‘체 게바라는 “전사 그리스도”이자 영혼의 순례자 였다. 신을 믿지 않았던 그는 오직 인간만을 믿었다. 그래서 그는 늘 ’새로운 것’을 추구했다. 그것이 비록 이루어질 수 없는 유토피아를 좇는 것이라 해도 자신의 신념을 위해 노력하는 강인한 정신과 용기를 지니고 있었다.그는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의 고통까지 함께 했다. 바로 휴머니즘의 전도사였다. 별이 없는 꿈은 잊혀진 꿈이다. 별이 없는 꿈은 깨어 있는 꿈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 모두 눈을 크게 떠야 한다. 체 게바라는 한 번도 눈을 감아본 적이 없다, 언제나 지금 여기를 살았다.‘
흡사 성인 평전을 읽는 느낌이었습니다. 그가 정말 ‘영원한 별이자 꿈’인 예수님을 만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여전합니다. 부질없는 ‘만약?’의 질문이지만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예수님을 만남으로 완전히 운명이 바뀐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우리의 영원한 별이자 사랑이자 꿈, 운명이 되었습니다. 결코 우연의 만남이 아니라 섭리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부르셨기에 주님과 은총의 만남입니다. 이런 만남 역시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과제가 됩니다. 만남에 걸맞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평생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합리주의 철학자 데칼트의 언명입니다. 그러나 유대인 랍비이자 신비가인 여호수아 헤쉘은 “나는 불림을 받았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언명에 절대적으로 공감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으로 인해 비로소 참으로 존재하며 살게 된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 역시 부르심에 따라 참 나를 살고 싶어하는 갈망이 절묘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 우리 모두 예수님의 꽃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바로 오늘 마태오 세리가 그 모범입니다.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있는 마태오를 보신 예수님은 “나를 따라라.” 부르시자, 그는 즉시 일어나 예수님을 따릅니다. 이제 세리 마태오에게 예수님은 삶의 목표가 방향이 중심이 의미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말그대로 예수님과 결정적 운명의, 구원의 만남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 예수님의 제자공동체에 합류하게된 마태오입니다.
당시 세리는 모두에게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며 무시당하는 직업에 속했습니다. 부정 착복한 세금으로 인해 부자였을지 몰라도 이웃과 고립단절된 참 외로운 삶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선입견이나 편견을 넘어 세리의 진심을, 주님을 찾는 순수한 열망을 첫눈에 알아 채셨고 부르셨음이 분명합니다. 다음 예수님 말씀이 오늘 복음의 백미입니다. 우리 성소의 의미가 환히 드러납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참으로 우리를 무한히 겸허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부르심의 성소는 순전히 주님 자비의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병자 아닌 사람, 죄인 아닌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잘 나서 부른 것이 아니라 병자요 죄인이기에 부르셨고 이에 응답한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 주님과의 은혜로운 만남입니다. 주님과 은혜로운 만남을 통한 회개와 용서, 치유의 구원, 자기 발견의 겸손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나를 따르라” 한 두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평생 늘 새롭게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과 늘 새로운 만남입니다. 이래야 늘 푸르른 건강한 영혼의 삶이겠습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여정은 ‘따름의 여정’이요 동시에 예수님을 닮아 참내가 되어가는 ‘예닮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창세기 제1독서는 흡사 아브라함 평전을 읽는 느낌입니다. 예수님 이전의 이야기이지만 참으로 한결같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충실했던 하느님의 벗 아브라함입니다. 하느님 은총의 축복으로 점철된 아브라함의 평생 삶입니다. 그대로 우리 삶을 비춰주는 거울같습니다. 산전수전, 파란만장한 삶의 한복판에서 늘 하느님과 깊은 친교의 만남중에 평생을 한결같이 새롭게 살았던 일상의 평범한 신비가 아브라함입니다. 다음 짧은 한 구절이 깊은 울림을 줍니다. 그대로 아브라함의 평생 삶을 요약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늙고 나이가 무척 많았다. 주님께서는 모든 일마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내려 주셨다.’
'참 곱게 늙었구나!' 부러운 생각까지 드는 아브라함입니다. 그대로 한결같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우리 하는 모든 일마다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따르는 축복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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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02.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9,9-13: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께서는 세관에서 일하고 있던 마태오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다. 주님께서는 그가 세리였지만 기꺼이 부르셔서 한순간에 사도가 되게 하셨다. 그는 세상일에 파묻혀 있었지만, 거짓 없는 신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마음속을 아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하다는 판단을 받는다. 주님께서 그에게 “나를 따라라.”하시자, 한순간도 머뭇거리거나 미루지 않고 곧바로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9절) 마태오는 주님의 방문을 기해 자기 동료들을 불러 예수님과 그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게 된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그래서 세리들과 또 죄인들이라고 표현된 그 사람들과 식사를 하시게 되었다.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심으로써 예수님은 나쁜 평판도 얻게 된다.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마태 11,19; 루카 7,34)하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헐뜯게 된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로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아주 많이 경멸하였고 상종하지 못할 사람들로 여겼기 때문에 그들과 거래는 물론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람들이 예수께서 세리인 마태오를 부르시고 또 그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으니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자신들은 스스로 율법을 잘 지키기 때문에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자처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비난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13절). 이 말씀은 당신이 지금 당신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와 계시며, 그러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으며,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열심하고 착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자신이 모든 것을 잘하고 있어서 자신으로 이미 가득 찬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른 것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스스로 튼튼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배워라”(13절). 여기서 제사는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예식인데 그 제사에 마음이 담기지 않은 제사, 형식적으로만 드리는 제사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형식과 의식은 중요한 것이지만, 여기에 우리 마음이 함께 봉헌되는 제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과 자비를 통하여 우리가 실천하는 삶을 함께 봉헌할 때 참된 제사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자선이 바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하시듯이 죄인들에게 가까이하시는 모습이다. 선입견과 편견에서 벗어나 진정한 사랑을 베풀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우리도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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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02.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9-13)”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부르신 이야기와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이야기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합해서 생각할 이야기가 아니라
따로 떼어서 생각해야 할 이야기입니다.
1)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시고, 그를 사도로 뽑으신 것은,
그가 그럴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태오가 세리였기 때문에, 또는 죄인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셨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그가 세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도가 될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뽑으신 것입니다.
<마태오를 부르시고 뽑으실 때,
예수님께서는 그의 직업을 보지 않으시고 그의 자격만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과거를 보지 않으시고 그의 현재만 보셨습니다.
그런데도 자꾸만 마태오의 직업이 세리였다는 것을 부각시키면서
직업이나 과거의 이력에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고 옳지 않은 일입니다.>
2)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은, “내 제자가 되어라.” 라는 뜻입니다.
마태오가 곧바로 일어나 예수님을 따른 것은,
이미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마태오가 예수님을 처음 만난 때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부르심을 받기 전부터 그는 예수님을 알고 있었고, 믿고 있었고,
예수님의 부르심을 기다리면서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마태오의 응답은 어부 출신 제자들의 응답보다
더 큰 용기와 더 많은 ‘버림’이 필요했던 일입니다.
어부라는 직업은 언제든지 되돌아갈 수 있는 직업이지만,
세리라는 직업은 한 번 버리면 되돌아가기가 어려운 직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부들보다는 세리였던 사람이 더 부유했을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버려야 할 것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3) 뒤에 이어지는 식사는, 마태오가 준비한 감사의 잔치였거나,
아니면 마태오의 동료들이 준비한 송별식 잔치였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바리사이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같은 부류’가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면 죄인이 된다는 사고방식.)
바리사이들의 사고방식에 대해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죄인이 아닌 사람이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면 같은 죄인이 된다고만
생각하고, 왜 그 반대로는 생각하지 못하는가?
죄인인 사람이 의인과 함께 음식을 먹어서 의인이 될 수는 없는가?
(왜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고, 좋은 쪽으로는 생각하지 못하는가?)
어떻든 바리사이들의 사고방식은, 자신들은 의인이라는 교만과 위선에서
비롯된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천대와 멸시가 들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고방식 자체가 ‘죄’입니다.
4)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라는
말씀은, 사람들을 ‘튼튼한 이들’과 ‘병든 이들’로 분류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바리사이들은 튼튼한 이들이고,
세리들은 병든 이들이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의 뜻은, “나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왔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만나야 한다.”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전부 다, 구세주의 구원이 필요한 ‘병든 이들’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는 “너희 바리사이들도 병든 이들(죄인들)이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들만 만나신 것이 아니라 바리사이들도 만나셨습니다.
남녀, 빈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똑같이 만나셨습니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는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감히 “나는 의인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이미 구원받기로 확정된 사람이다. 그러니 나를 구원해 줄 구세주는
필요 없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5)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라는 말씀은, “이웃 사랑 없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자녀들이 서로 편을 가르고, 서로 차별하고 무시하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무엇인가를 하느님께 잘 바치기만 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일입니다.)
이웃 사랑은 이웃과 내가 똑같은 사람이라는 인식에서 시작됩니다.
“나는 의인이고 너는 죄인이다.” 같은 우월감과 교만을 버리지 않는다면,
자선 실천을 잘하고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잘 낸다고 해도,
그것은 이웃 사랑이 아니라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서 똑같은 죄인입니다.
<우리는 ‘죄인들’에 대해서 말할 때, ‘그들’이라고 표현하면 안 됩니다.
‘그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내가) 죄인이고, ‘길 잃은 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인 ‘나를’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죄와 관련해서 어떤 특정 직업이나 특정 질병을 말할 때에도,
‘그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한 마음, 한 몸인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는데,
‘그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특정 직업이나 특정 질병을 가졌던 이들을
공동체 밖으로 밀어내는 일이 되고, 차별하고 무시하는 일이 됩니다.
“‘그들’을 ‘그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 라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다른 사람들과 자신 사이에 금을 긋고, 벽을 쌓는 태도부터 버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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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02.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하루를 살아가며 수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들을 전부 알지는 못합니다. 현대인들은 많은 경우에 자신이 가진 간단한 정보로 타인을 받아들이고 판단합니다. 그가 어디 출신이며 어떤 일을 하는지, 나이는 어떻게 되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느 학교에 전공은 무엇인지 등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또한 그 사람이 어디에서 살고 생활 환경이 어떠한지,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는지에 따라 미리 그를 판단합니다. 누군가를 깊이 알아 가며 인격적인 만남을 바라기보다는, 자신의 이익과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만남을 이어갑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도 그러한 시선으로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고 만납니다. 바리사이들은 세리인 마태오를, 민족을 배신하고 돈만을 쫓아 살아가는 파렴치한으로 판단합니다.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 또한 죄인이며 배신자로 결론 내립니다. 그러한 선입관에 사로잡힌 바리사이들은 세리와 죄인과 함께하시는 예수님조차도 그들과 같은 부류로 판단해 버립니다. 그들의 선입관에는 자신은 깨끗하고 의인이라는 자만심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도, 마태오도, 그리고 다른 세리와 죄인도 진정으로 만나지 못합니다. 그 선입관과 자신의 욕심 때문에 그들에게 다가가지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지도, 그리고 그들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서슴없이 마태오에게 다가가시어 그와 함께하십니다. 색안경 너머로 보이는 모습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그들을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그들 각자의 가난함에 함께 자리하십니다. 슬픔과 두려움, 고민과 갈등에 휩싸인, 그리고 병들어 있는 그들의 아픔에 다가가십니다. 그것이 그분의 자비이며,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어떻게 만나고 있습니까? 그가 가지고 있는 무엇인가로 그를 쉽게 판단하고 그가 나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를 따져 가며 그와 함께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만남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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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02.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구분과 차별이 아니라 포용과 통합의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알리십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 백성과 이방인이 언급됩니다.
"내 고향, 내 친족에게 가서 내 아들 이사악의 아내가 될 여자를 데려오겠다고 하여라."(창세 24,4)
사라가 죽은 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에게 아내를 얻어주기 위해 자기가 떠나온 고향으로 종을 보냅니다. 당시 그들이 몸붙여 사는 가나안 땅의 여자가 아니라 동족의 딸을 통해 후손을 얻고자 했기 때문이지요.
아브라함이 이루게 될 민족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하느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선택은 단지 그 민족의 번영이나 안위만을 위한 특혜가 아니라,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 계획의 시작입니다. 하느님께서 다른 민족을 적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근간과 기틀이 형성되는 단계에서 하느님 백성이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어가는 과정이라 볼 수 있을 겁니다. 결국 세상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을 통해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더 이상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구분이 필요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 주신 사랑의 결속만 남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의인과 죄인이 언급됩니다. 민족이라는 하나의 틀이 완성된 후에는 민족 내부에서 또 다른 구분의 단초가 등장한 것이지요. 바로 율법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마태 9,9)
식민지 이스라엘의 세리는 동포의 혈세를 착취해 정복국 로마의 배를 불려 주고 자신도 그 권력에 기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방인과의 잦은 접촉과 동포에 대한 착취 때문에 늘 죄인이라 손가락질을 받는 이들이지요.
세관은 그런 세리들의 일터이고 그곳에 앉아 있던 마태오 역시 그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날 예수님은 그곳을 지나가시면서 짧은 찰나에 마태오 내면의 깃든 고뇌와 갈망, 가능성을 보십니다. 그리고 지체없이 그를 부르시지요. 그가 지금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고 어떤 평판을 받든 상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욱 그 자리에서 그를 부르신 겁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마태오는 그대로 일어나 그분을 따라나섭니다. 이렇게 그는 육을 만족시키는 세리라는 직업을 떠나 영의 길로 주저없이 들어선 것이지요.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 9,11)
예수님의 제자단에 참여하게 된 마태오는 예수님을 모시고 동료들까지 불러 잔치를 베풉니다. 그런데 직업이 직업인만큼 마태오의 주변 사람들은 그와 비슷한 처지의 세리이고 죄인이었나 봅니다. 그러니 바리사이들 눈에 그 잔치는 세리와 죄인들의 불결하고 부정한 난장일 뿐이겠지요. 그들은 당장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항변합니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예수님은 사람을 구분하지 않으십니다. 구분이 없으니 차별하지도 않으시지요. 예수님 눈에는 의인도 죄인도 한 아버지의 한 형제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가로막는 구분의 벽을 허물고 모두를 끌어안으십니다.
예수님께 의인은 이미 하느님 사람이니 살아온 그대로 주님 앞에 머무는 기특한 벗이고, 죄인은 새로운 부르심에 응답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화될 기대되는 형제입니다. 서로를 손가락질하며 선을 긋고 차별하는 것은 주님의 방식이 아니지요.
하느님 백성의 기틀이 형성되던 때에는 순혈 민족과 이방인의 구분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온 세상의 주인이신 분이 구원의 지평을 이스라엘 담장을 넘어 온 세상으로 활짝 열어주신 뒤에는 오히려 구분이나 차별이 극복하고 넘어서야 할 구태이며 악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형제와 이웃 안에서 의인과 죄인을 가르던 율법의 문자적 잣대 역시 그 모두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을 통해 사랑으로 통합되었습니다. 주님 앞에서 완전한 의인일 수 없고, 또 죄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에게 손가락질과 비방, 소외와 방치, 적대와 외면은
스스로를 주님과 관계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릴 뿐입니다.
율법은 이제 더이상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고 가르는 잣대가 아니라 모두를 포용하고 통합하는 울타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선포하고 실행하신 예수님 가르침의 골자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부르러 오셨으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탁월한 지식이나 능력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의인이 되게 하시니 이 또한 감사합니다. 그러니 우리 또한 사람을 함부러 차별하거나 무시하지 말고, 죄인이고 또 의인인 우리를 통해 세상이 조금 더 포용적이고 관대하며 사랑 넘치는 그런 곳이 되기를 빌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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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02.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3)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릅니다.
'마태오의 직업'은 세금을 거두어다 로마 제국에 바치는 '세리'였고, 백성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죄인인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십니다.
이런 모습을 본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2-13)
나는 의인인가? 아니면 죄인인가?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오늘 말씀이 불편하게 다가왔을 것이고,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기쁘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은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했고, 병자나 세리를 죄인 취급했습니다.
요즘 우리가 독서로 듣고 있는 창세기의 말씀은 '아브라함의 큰 믿음'과 그에게 내려지는 '하느님의 축복'을 전합니다.
아브라함 나이 100살, 사라의 나이 90살 때 얻은 귀한 외아들 이사악까지도 아낌없이 하느님께 번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큰 믿음과 순종 앞에서'...
그리고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이 외아들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큰 사랑 앞에서'...
"나는 의인이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아니 그렇게 말해도 되는가?
완전하신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의인이 되려고 노력하는 죄인'입니다.
그런 나를 부르러 오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주님 부르심에 "예!" 라고 응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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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02.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마태오가 필요로 하는 예수, 유다가 필요로 하는 예수
오늘 복음은 마태오가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로 불림을 받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오와 같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고 바리사이들은 기분이 상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예수님은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이들과 함께하십니다. 그렇다고 유다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윗의 후손으로서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해방해 줄 왕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사도 중에 마태오도 예수님이 필요했고 가리옷 유다도 예수님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이 차이는 무엇일까요?
필요하다는 말은 어떤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같은 예수님이 필요했지만, 마태오에게 예수님이 필요한 이유와 유다에게 예수님이 필요한 이유는 서로 다릅니다.
부모가 아이를 낳는다면 분명 아이가 필요해서일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오처럼 아이가 필요한 부모와 유다처럼 아이가 필요한 부모가 다릅니다.
영화 ‘4등’(2015)의 내용입니다.
준호는 만년 4등을 하는 수영선수입니다. 준호 엄마는 어떻게든 준호를 1등으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왕년에 아시아 신기록까지 경신한 한 코치를 소개받습니다.
그런데 코치는 돈은 받으며 아이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아이가 놀다가 지쳐서 코치에게 수영을 가르쳐달라고 합니다.
아이의 성화에 못 이겨 아이 수영하는 모습을 본 코치는 가르칠 재능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코치의 가르치는 방식은 ‘구타’였습니다.
코치도 사실 선수 시절 맞는 게 싫어서 선수를 그만둔 것이었는데 지금은 아이의 성적을 올릴 수 있는 자신이 아는 유일한 방법이 그것뿐이었던 것입니다.
엄마는 준호가 몸에 멍이 든 상처가 나서 돌아오는 것을 알지만 엄마는 밤에 살짝 아이의 몸을 들춰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자인 아빠가 이것을 알아버렸습니다. 이때 아이는 대회에서 2등을 합니다.
그렇더라도 아빠는 아이를 계속 구타하면 기사에 내버리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아빠는 코치가 맞을 때 기사를 내어달라고 할 때 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는 거 아니냐며 그 청을 거절했던 바로 그 기자였던 것입니다.
코치는 아빠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를 때립니다. 아이는 더는 못 버티겠다며 수영을 그만두겠다고 합니다.
엄마는 크게 화를 내며 준호를 본척만척합니다.
준호의 어머니는 이제 준호 동생에게 기대를 겁니다. 동생이 엄마의 희망이 된 것입니다.
준호는 자신이 맞은 대로 자기 동생을 때립니다.
그리고 자신도 다시 수영하겠다고 코치를 찾아갑니다.
코치는 엄마 생각하지 말고 혼자 하면 금메달을 딸 수 있다는 말을 남기고 떠납니다.
아이는 죽을힘을 다해 1등을 합니다.
엄마는 기뻐합니다.
그런데 준호는 2등 했을 때는 기뻤지만 이상하게 1등을 했는데도 기쁘지 않습니다. 영화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준호와 엄마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엄마는 준호를 통해 수영 잘하는 아이의 엄마가 되고 싶어서
준호가 필요합니다. 이 필요함은 가리옷 유다가 예수님을 필요로 한 것과 같습니다.
필요로 한 대상이 그 필요한 대상이 아닌 그 대상을 통해 얻어질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다 지도자들이나 가리옷 유다는 예수님을 통해 민족의 해방이나 돈과 권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준호에게 엄마가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기를 경쟁이라는 고통 속에서 구해주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냥 엄마만 있으면 되는 그런 필요함이었습니다. 이것이 마태오가 예수님을 필요로 한 이유입니다.
마태오는 돈과 권력, 쾌락에 물들어있는 자신으로부터 구해줄 예수님이 필요했습니다.
유다가 돈을 위해 예수님이 필요했다면 마태오는 그 욕심을 버리기 위해 예수님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과연 누구와 함께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세상에서 돈과 명예에 대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지, 아니면 그 욕심들을 없애기 위해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예수님을 필요로 한다고 다 그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지는 않으십니다.
어떤 유튜브에는 한 영재 아이가 아버지에게 파리채를 던지는 충격적인 장면도 있습니다.
똑똑했던 명이라는 아이가 그렇게 부모와 동생에게까지 문을 닫아버리고 공격적인 행동을 보인 이유는 아이에게 보살핌을 주어야 했을 때 부모가 그렇게 해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008년 금융위기 때 집안이 어려워져 부모는 장남인 명이에게 공부를 강요하였습니다.
성적이 좋지 못하면 몸에 상처가 날 때까지 때렸습니다. 그것에 대한 보복을 받는 것입니다.
[출처: ‘아버지에게 파리채 던지는 영재, 그 이유는?’, 유튜브 채널, ‘SBS STORY’]
아이를 이용하려고 하며 필요로 했던 것이 사랑이었다는 거짓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군가를 필요로 할 때 그 사람 때문에 다른 욕심들이 사라질 수 있어야 진정한 사랑입니다.
유튜브에 이런 실험 카메라 동영상도 있습니다.
안과에서 아들과 어머니, 의사 선생님이 짜고 아들이 실명 단계에 있어서 각막을 이식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가족 중에 누군가 각막을 이식해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한없이 미안한 마음으로 아버지 한쪽 어머니 한쪽 이식해 주면 되는 거 아니냐고 말합니다.
아들은 감동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눈이 그렇게 안 좋게 태어나게 만든 것에 대해 오히려 미안한 마음을 가집니다.
[출처: ‘아들의 갑작스러운 실명 소식, 그리고 아버지의 한 마디’, 유튜브 채널, ‘엔스크린’]
살 만큼 살았고 더는 욕심내며 살지 않게 각막이라도 내어줄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런 욕심을 끊을 아들을 바라는 마음이 진짜 사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필요로 한다고 말할 때 마태오의 참사랑일 수도 있고 유다의 거짓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자기실현을 위해 예수님을 필요로 합니다.
어떤 사람은 모기가 되려고, 또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가 되려고 세상 욕구를 끊기 위한 마음이 아닌 이상
그리스도를 바라는 마음은 다 가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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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02.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냥 죄인이 아니라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그냥 죄인이 아니라 아무 조건 없이 용서 받은 만큼 무조건 용서하는 죄인입니다!
언젠가 한 대학병원 영안실에 조문을 갔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한 조직 보스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봅니다.
한 인상, 한 덩치 하는 분들이 영안실 입구에 줄줄이 서 있었습니다.
그렇게라도 자신들의 세를 과시하고 싶어 하는 유치한 모습이 참으로 가관이었습니다.
마치 조폭 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와 있는 느낌이어서 기분이 참으로 꿀꿀했습니다.
그 멀쩡한 젊은이들이 하루 빨리 정신을 차리고 세상 도움 안 되는 부끄러운 집단에서 빠져나오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세리 마태오가 지난 삶을 청산하고 새 출발하는 송별 만찬 때의 분위기도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인근 지역의 내놓으라 하는 세리들과 창녀들, 고리 대금업자들, 폭력 청부업자들, 조폭들이 우르르 몰려와 식탁에 앉았습니다.
식당 분위기가 살벌했을 것입니다. 입만 열면 욕설이요, 행동거지들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의 태도는 너무나 자연스러웠습니다.
스스럼없이 그들의 대화에 끼어 드시고 어울리시며 포도주 잔을 기울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본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직접 따지지는 못하고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오 복음 9장 11절)
귀가 밝으셨던 예수님께서 그런 분위기를 즉시 파악하시고, 바리사이들에게 한 말씀 던지시는데,
역사에 길이 남을 불멸의 명언 한 마디를 던지셨습니다.
그 한 말씀은 이천년 세월을 건너와 오늘 우리에게도 큰 위로와 희망을 건네주고 있습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오 복음 9장 12~13절)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얼마나 감사하고 은혜로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유다 문화 안에서 죄인들은 쳐 죽여야 되는 존재였습니다.
그들에게 구원이나 영원한 생명이나 하느님 나라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왔다고 하시니, 어쩔 수 없이 매일 죄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정말이지 감격스러워 눈물이 다 날 지경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냥 죄인이 아니라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그냥 죄인이 아니라 아무 조건 없이 용서 받은 만큼 무조건 용서하는 죄인입니다.
그 옛날 세관에 앉아 있던 세리 마태오를 부르듯이 오늘도 죄 속에 깊이 파묻혀 살아가는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이십니다.
어서 빨리 죄 속에서 일어나라고, 더 이상 죄인으로 살지 말고 당신 제자로 살아가자고 초대하시는 주님께
그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지덕지한 마음으로, 예! 하고 응답하며 기쁘게 일어서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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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02.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제1독서 (창세23,1-4.19; 24,1-8.62-67)
아브라함은 빈소에 들어가 사라의 죽음을 애도하며 슬피 울었다. 창세 23,2
며칠 전 큰아버지께서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고향에 내려갔는데, 결국 돌아가셔서 상(喪)을 치르고 장례미사와 안장(安葬)까지 보고 올라왔습니다.
아브라함이 부인 사라를 잃고 슬피 울었다는 오늘 독서 말씀을 읽으면서 큰어머니의 오열(嗚咽)이 오버랩 됩니다. 평생을 가톨릭 교인으로 사셨던 고인께서 그리스도의 품(κόλπος, 콜포스, 공동번역 요한 1,18 참조) 안에서 안식(安息)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장례를 치르면서 삼일동안 제가 했던 일을 돌아보니, 마르타와 마리아의 역할이었던 것 같습니다. 음식 나르고 상 치우고 문상객 신발 정리하고, 또 틈나는 대로 연도 바치러 오신 분들 틈에 섞여 함께 연도를 바치기도 하였습니다. 적어도 가톨릭 장례에 있어 이 두 가지 역할은 어느 것이 우선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고인과 유가족들을 위해 둘 다가 유익한 일임을 깨닫습니다.
큰아버지의 죽음은 여러 모로 제게 깊은 의미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내로라하는 집안이 아니다 보니, 장례의 규모나 문상객 수, 하다못해 조화(弔花)의 개수까지도 다른 호실과 비교해 소박할 수밖에 없었고, 외적으로 드러나는 이것들이 마치 고인과 유가족의 삶을 판가름하는 기준으로 이해되기까지 했습니다.
고인의 넋을 기리고 유가족들을 위로한다는 장례의 취지가 충분히 살려지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저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지금 내가 부모님 장례를 치러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아찔해지더군요. 자식들도 많지 않은데다, 사회적인 성공가도(成功街道)와는 먼 삶들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약간은 씁쓸하고 우울한 장례식의 한 단면이었습니다.
그래도, 한 가족처럼 연민의 정으로 연도를 바치러 와주었던 고인의 성당 지인들의 훈훈한 마음은 좋은 기억으로 남습니다. 빈소 방문은 물론이고, 염(殮)과 입관 예절, 출관, 화장(火葬), 매장(埋葬) 예절까지 함께 하면서, 기도와 찬송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아직 도시화가 덜 된 지역이라 그런지, 교우의 일을 마치 자신의 일인 양 챙기고 보살피는데 특별한 정을 쏟아 부어 주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습니다. 초기교회 공동체의 삶의 모습도 이러하지 않았을 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큰아버지의 죽음은 평소 왕래가 뜸했던 먼 일가친척들도 함께 할 수 있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고인의 죽음이 공동체의 일치와 결속을 다지는 ‘생(生)의 자리’가 된 것입니다. 생명이 꺼진 바로 그 자리에서 또 다른 생명력이 활발히 발산되고 있다는 오묘한 섭리 앞에서 잠시 누멘(Numen)적 감상에 젖어봅니다.
가톨릭 교리는 죽음에 대해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므로, 주님 안에서 다시 만나리라는 희망을 가집니다.”(상장예식서 시작기도 中)
현대 가톨릭 신학에서도 죽음을 ‘하느님(예수님) 앞에 마주섬(encounter), 그분과의 인격적 만남’으로 정의합니다. 신학자들은‘그분의 눈은 불꽃같았으며’(묵시 1,14) 라는 묵시록의 표상을 해석하면서, 죽음 이후 인간은 인자(그리스도) 앞에서 그분 눈빛에 조명을 받아 자신의 지난 세월의 공과(功過)를 숨김없이 바라보게 되는데, 이 때 자신의 죄를 바라보는 것 자체가 가슴 아픈 고통의 순간인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러한 영혼의 정화(purgation)의 과정(process)이 곧 연옥입니다. 심판정, 불 등의 상징적 묘사들은 이런 식으로 인간학적으로 재해석되고 있습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추기경 시절에, “과정(process)으로서의 연옥을 통해 인간은 그리스도와 하느님을 만나고, 모든 구속된 이들과의 전적인 친교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장애를 불태워버리고, 각 사람을 당신의 살아있는 몸에 담그는 주님과의 만남에 초점이 모아져 있다.” Zachary Hayes, Visions of a Future: A Study of Christian Eschatology, pp 110-116. 고 밝힌 바 있습니다.
결국 가톨릭적 이해에서 볼 때, 죽음 이후의 삶은 분명히 있고 이 삶은 정화의 단계를 거쳐 하느님과의 보다 깊은 일치로 향하기 때문에, 죽음은 희망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희망을 가슴에 안은 채 고인의 죽음을 기억하면서, 연도 중 한 부분인 시편 150편 중 일부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할렐루야! 하느님을 찬양하여라, 그분의 성소에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숨 쉬는 것 모두 주님을 찬양하여라. 할렐루야! "(시편150,1.6)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9,9-13)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12)
이 구절은 세리,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예수님의 행위를 비난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일침을 가하시는 대목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메시야이신 당신의 사명이 바로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이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건강한'에 해당하는 '휘기아이논테스'(hygiainontes; healthy; whole)는 '건전하다', '바르다', '참되다'는 뜻을 지닌 '휘기아이노'(hygiaino)의 현재 분사로서, 육체적으로 건강하다는 뉘앙스를 지니고 있지만, 그보다는 '도덕적, 윤리적으로 바르다'는 뉘앙스를 더 강하게 띄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말씀하시는 스스로 '건강한 이들'이란, 종교적, 윤리적으로 올바른 이들이 아니다.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스스로 올바르다고 자부하면서, 인간의 영적 악함을 깨끗하게 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불필요하다고 하며 거부하는 이들을 말한다.
이들은 바로 당시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비방하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모두 지칭하며, 그 외에도 예수님을 필요하지 않다고 거부하는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 모두를 포함한다.
그리고 '병든'에 해당하는 '카코스'(kakos; sick)도 육체적으로 병들고 허약한 것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악한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기에, '병든 이들'이라는 표현에도 '죄인들'이라는 뜻이 있다.
이들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정해 놓은 종교적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로서, 하느님 대전에 진실로 구원자를 필요로 하여 자신의 죄에 대해 가슴을 치는 모든 이들을 가리킨다.
'의사'에 해당하는 '이아트루'(iatrou; a physician; a doctor)이신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들을 위해 오신 분이며, 마태오 복음에서 잔치에 초대되어 온 모든 죄인들도 그 중에 포함될 것이다.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며, 예수님이 구원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죄인들은 예수님께 선택 받을 수 있지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계속해서 자신들의 의로움을 자랑하며 율법주의와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은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선택에서 영원히 제외될 것이다.
'회개시키러'로 번역된 '메타노이아'(metanoia)는 '마음을 고치다'라는 동사 '메타노에오'(metanoeo)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마음을 바꿈'이라는 뜻이다.
루카 복음 5장 31절에서 예수님께서 막연히 죄인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님을, 루카 복음 5장 32절에서 죄인들을 선택한 목적을 분명하게 언급하시면서 밝히신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무가치함과 죄를 인식하고 참회하는 죄인들의 마음을 고쳐서 새롭게 만들기 위해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부정하게 여겨 접촉하는 것을 꺼리는 죄인들과 함께 친교를 나눔을 밝히신 것이다.
♣ 단죄와 배척이 아닌 서로를 품는 자비 ♣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오신 까닭과 제자의 소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습니다.”(9,10) 그분께서는 죄인의 구원하시려고 그들과 함께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으로 자처하는 이들보다 죄인 취급을 받는 의지할 데 없는 ‘공적인’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들을 죄인으로 낙인 찍어 상종하지도 않던 바리사이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들은 죄인들과 세리들을 종교생활에서 배제하고 회개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경건한 사람이 이런 부류와 함께 식사하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로 보았습니다(바빌론 탈뭇 브라콧 43b).
어찌 보면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데 반발한 바리사이들을 탓할 수 없는 듯 보입니다. 왜냐하면 예언자 아모스는 사업상의 거래에서 속임수를 쓰고 가난한 사람을 등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단죄한 바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모스의 단죄는 회개를 유도하기 위한 경고였을 뿐이었는데 그들은 결정적으로 단죄해버린 것입니다.
바리사이와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가까이 대하시고 사랑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식사하심으로써 그들에게 용서와 화해의 가능성을 보이시면서 회개를 호소하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품으시려고 애쓰셨지만 특히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에게 애정을 쏟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9,13)
우리는 관계 속에 살아가면서 죄로 기우는 경향 때문에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여기서 두 종류의 죄인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마음이 굳어져 후회할 줄 모르는 죄인입니다. 그들은 어떤 잘못에도 양심의 가책이나 괴로움을 느끼지 않고 자기 허물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회개의 필요성도 전혀 느끼지 않고 스스로 의롭다고 믿으며 하느님과 무관하게 살아갑니다.
또 다른 부류는 자신의 비참함을 알고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이들입니다. 우리 모두 죄인인 우리를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회개에로의 부르심에 마음을 열어야겠습니다. 주님의 자비 앞에서 죄를 인정하고, 영혼의 치유자이신 그분의 자비에 맡길 줄 알아야겠지요.
오늘 복음에 비추어 신앙공동체의 삶과 사회생활에 대해서도 성찰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를 보기 보다는 남의 죄에 민감하고, 또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우면서도 남의 작은 허물조차 참지 못하는 바리사이의 탈을 쓰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죄인과 의인을 가르고, 은연중에 죄인을 공동체의 삶에서 배제시키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어떤 때는 신앙공동체 안에서 오히려 더 냉정하고 가혹한 ‘낙인찍기’를 하고 있음을 보기도 합니다. 한 번 실수하면 헤어나지 못하고, 틈만 나면 그 사람의 실수나 허물을 들춰내고 어떤 책임이나 봉사에서도 배제시키는 경우들이 종종 일어나기도 하지요.
무릇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면 오히려 신앙공동체에서나 사회생활 중에 죄나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그 공동체의 넘치는 사랑으로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야겠지요. 회개는 가혹한 단죄나 처벌이 아니라 따뜻한 사랑의 손길 안에서 더 깊이 그리고 더 빨리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 영혼의 어둠 속을 헤매는 죄인임을 고백하면서 서로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고 나누는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도록 배척하고 단죄하는 마음을 버리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했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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