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림굿에 집착하는 무당사회
무교신화를 영위하는 사회에서 신화는 곧 살아가는 삶의 실재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무교신화는 삶의 수단이며 방편이다. 현대사회라 할지라도, 차후에 미래사회가 올지라도 무교신화는 전승될 수밖에 없다. 만일 전승이 단절된다는 것은 곧 그 사회의 소멸을 뜻하는 것이며, 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무대에 오르는 기회를 상실하는 것이다.
양종승은『강신무당 전승고』에서 기초적인 갈등이 발생하는 원인에 관하여 살피면서 ‘굿판에서 연행되는 전승과 관계되어 이루어지는 갈등을 전승의 난이 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왜 무당들은 제자에게 전승과 비 전승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일까, ‘갈등과 전승의 난이 점’을 지닌 채로 굳이 전승하려고 애쓰는 것인가, 이점에 있어서의 해답은 공동체적 삶의 양식에서 찾을 수 있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무당이 무당 굿 해 먹는다.”는 지적도 있지만 굿판을 혼자서는 영위할 수 없는 성질을 지닌다.
신의 소명을 부여받은 무당은 그 업을 다할 때까지 그 소명을 이행하지 않으면 신들림 이후에 받는 첫 신벌과는 다른 중벌 개념의 ‘신벌’을 당하는 것으로 조사된다. 계율을 어긴 무당의 신벌은 대체로 입무 전 단계의 양상과 엇비슷하다. 다소 차이를 보이는 것은 입무 전의 신벌은 입무와 더불어 소멸되지만, 일정기간 징벌을 당한 후에 소멸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일반 형법상의 범법자가 죄 값을 치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는 방법으로는 신벌이 소멸되지 않으며 일정기간의 고난과 기도, 그리고 정성을 드림으로서 소멸된다는 것이다.
‘무당이 되기로 결심한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새로운 자기창조의 행위이다’라고 제시하면서 아울러 ‘무당은 신의 부름 속에 사는 것이며 그 소명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내부와 외부의 저항을 극복해야 한다.’고 하였듯이 일반적으로 성무가 되는 과정을 굿판에서 결정지어지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의 부름’과 그 ‘소명’을 계율로 인식하고 그것을 어떻게 이행할 것인가, 그리고 소명을 계율로 인식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내부의 갈등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를 무당들은 고민한다. 연구자 또한 그러한 애로점을 살피는 작업을 수행함으로서 무교를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여겨진다.
무당사회에서는 애로점들을 악용하여 “막혔다”고 하여 무당굿을 시킨다. 그러나 그 ‘막힘’의 원인과 ‘맺힘’을 스스로 찾아서 풀어야한다. 그 막힘과 맺힘을 풀지 못하면 무당으로서의 생활 자체가 어려움을 겪는다. 무당으로서 어려움을 겪는 것 중 외적으로는 ‘손님이 들지 않는 것’과 내적으로는 ‘온갖 구설과 집안의 우환’이 대표적인 것이다. 외적으로 집안에 손님이 들지 않아서 무업을 진행할 수 없으며, 내적인 우환으로 인해 단골의 방문도 뜸해진다. 무당들에게 몸주신의 계율은 엄하고 두려운 것이다.
신명의 왜곡과 세속적 욕망추구에 따라 내림굿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신명의 왜곡이란 신에서 내린 공수나 그 뜻을 어기거나 외면하여 인간의 공수, 인간의 뜻으로 무업을 행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파행으로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로는 신을 내리면 안 되는 위치인 애동 무당임에도 불구하고 제자를 생산하는 경우이다.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엄마로서 군림하는 것이다. 아직 성무가 되지 않은 상태인 애동 제자가 내림굿을 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며, 그러한 경우에 내리는 자와 내림을 받는 자, 두 무당이 함께 신의 벌전(신벌)을 당할 수 있다. 따라서 신 선생들은 애동 제자가 신 제자를 두는 것을 삼가기를 요구한다. 그 이유는 완전한 좌정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자를 생산하면 본인이 막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은 드물다. 이로 인해 신 엄마와 자손 간에 반목이 발생하여 서로를 불신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능력 없는 애동 무당이 신엄마로 군림할 때 무당사회에 많은 고민을 제공하게 된다. 점 못 보는 제자를 양산하기 때문이다. 쌍둥이 만신은 “무당은 경문에 막히고, 인간은 이문에 막히는 것”이라면서 신의 법도를 지키는 것과 인간의 욕심을 버리는 것을 강조하였다.
용한 무당이 되라는 의미가 아니다. 무당이 점을 못 본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논지이지만 실제로 점사를 못 보는 애동 무당이 많다. 점사를 못 보기 때문에 단골의 형성에 문제가 생기고, 굿을 뛰지 못하므로 굿을 배울 기회가 없다. 굿을 배울 기회도, 굿을 뛰지도 못하므로 제자가 느끼는 자괴감과 강박관념은 커질 수밖에 없다. 결국 스스로 무계에서 도태되어 독립적인 무업을 하거나 다른 선생을 찾게 된다.
제자를 내리지 말아야할 애동은 역시나 가르칠 준비나 능력이 되지 않은 상태이다. 적어도 신 선생이 되려는 무당은 본인이 내린 제자가 독립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금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들은 제자를 양산하는 것이다. 그러한 결과로 제자가 불평하면 “부정이 들었다”거나, “상문이 들었다.”거나, “신갈이를 잘못했다.”라고 하면서 재차 신 굿 아닌 무당이 무당굿을 하는 것이다.
원천을 무시한 무리한 내림이나 신을 청하는 것은 무당의 구조를 왜곡시킨다. 이러한 왜곡을 방지하기 위해서 애동 제자 일 때 신을 받아야하는 사람이 오면 그 사람을 신 엄마에게 의탁하는 것이다. 실제로 ‘신사맞이’를 준비 중인 와룡당 만신은 차선희 만신을 본인의 제자로 삼는 것이 아니라 신 엄마에게 의탁하였다. 결국 와룡당과 차선희의 관계는 신 엄마와 자손의 관계가 아니라 신 동기(신 자매)로서 생활하고 있다. 그들의 원래의 관계는 무당과 단골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신선생의 능력여하를 떠나서 신을 받은 후(허주굿이나 신내림굿을 한 이후) 원래의 신 엄마보다 더 큰 만신에게 제자가 되겠다고 간청하는 경우가 있다. 쌍OO 엄마의 경우가 그러한 예이며, 김OO 만신은 스스로 내린 제자인 정OO을 김OO 만신에게 양자로 들어간 예이다. 그 연유로는 특정한 굿을 배우겠다는 제자의 간청이 있었으며, 양자를 받는 만신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졌다. 신내림굿이나 합의굿을 통해 무계편입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특정한 능력이나 배움을 위해 원 무계를 벗어나 다른 무계로 편입한 예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을 신엄마라고 생각하는 애동 무당들이 있다.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에서 무업을 공유하는 애동 무당들의 그룹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일반인으로 구성된 ‘귀신을 본 사람들’, 무교인들이 직접 운영하는 ‘무당 카페 혹은 무속인 카페’, 신이한 현상을 주제로 삼은 ‘빙의에 관련한 카페’ 등도 있다.
이러한 그룹들의 공통점은 무당의 개인적 담론이거나 본인을 소개하기 위한 광고판 구실을 한다. 그러나 눈여겨 볼 것은 그 사이트에 들어 있는 무교자료이다. 문학적 가치나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할 수 없다 할지라도 각 지역별 또는 굿거리별 무가들이 풍부하여 무당과 무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습득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다음으로는 담론 형성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개인이 순수한 의도로 만든, 의사소통의 장으로서 개설한 사이트는 서로의 의견을 공유하거나 알림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다만 이러한 사이트들은 개인의 경험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유’라는 인터넷의 특성을 이용한 정체불명의 무교의 탄생을 주도한다. 한 검색사이트에 활동 중인 무당이나 무교에 관련한 사이트의 수는 약 2천개라고 볼 때, 가상공간에서의 이러한 활동들은 가치의 보편성을 따지기 이전에 무교의 시공간이 가상공간으로 탈바꿈하여 그곳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래의 제목들은 ‘Daum'이라는 인터넷 검색 사이트의 무교 관련 카페 254개의 명칭 중에서 간추린 것이다. 그곳에 가면 영원히 애동으로 살아가는 무당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올바른 무속인들의 모임... ’
‘바른 무속인들의 모임’
‘21세기 무속 - 21c 도가 수행자와 신 제자 모임.’
‘무속사랑 - 무속을 사랑하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내가 가야할 길, 발길 돌아선 이곳 - 애동 제자들의 어려운 마음을 함께해요.’
‘신명을 사랑하는 모임 -신을 받으신 분이나 받으실 분의 모임’
‘힘내라 애동 제자 - 애동 제자들의 모임’
‘영신제자 - 전국의기도처 및 무속에 관하여 정보교환을 하고자함’
위의 카페명칭에서 보듯이 그들이 공유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카폐명에서 보여지 듯 애동 무당들이 겪는 현실적인 문제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외에도 각 포털사이트 마다 무교에 관한 카페들이 다수 존재한다. 왜 무당들은 가상공간으로 향하는 것인가, 신과 늘 대화한다는 그들이 왜 그곳에 모인 것인가, 무업을 지속해야하는 무당이 지니는 사회적 실제는 무엇인가라는 자문을 수없이 던지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문서 없는 무당, 무가를 구송을 할 수 없는 무당, 선생 없이 혼자서 무업을 꾸려나가는 애동 무당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가상공간속에서 무꾸리(무업)를 배운다. 신과 나누는 대화만으로는 무당이 지닌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그곳에 둥지를 틀고 모이는 것이다. 그것이 옳은 방법이든 아니든지 중요하지 않다.
‘카페’라는 가상공간을 통해서 그나마 무꾸리를 할 수 있다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당장 손님이 와서 용궁에 치성 드리러 가자고 할 때, 고사라도 드려달라고 요구할 때, 그들은 신 선생을 대체하는 이곳을 찾는 것이다. 굿판에 설 수 있는 무당의 수는 한정되고 그것을 배우기 위해서 무업은 기능과 예능의 문제가 아닌 현실적 문제이며 직업적인 업무이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앞서 말한 무속 종합반인 무속학원에 등록하여 무업을 배우는 애동 제자들이 존재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체성을 무시한 채 직업적으로 아무 굿이나 배워서 제자가 아닌 직업으로서 ‘무당업’을 준비하는 것이다. 애동 무당들은 세속적 욕망에 쉽게 노출된다. 금전에 따라 속성으로 굿을 가르쳐 정상적인 사?제 관계가 아닌 직업으로서의 ‘무당업’을 양성하는 무속 연구소, 굿 전수소 등의 정체불명의 단체가 생겨나고 있다. 이러한 단체는 서울굿, 황해도굿, 경기도도당굿 등의 구분이 없다. 개별 굿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굿장구, 굿춤, 굿문서 등을 강신무들을 대상으로 지역 구분 없이 가르친다. 이러한 단체들은 대입학원으로 비교한다면 단과반이 아니라 종합반 구실을 하고 있으며, 직업인 양성소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신을 모신 이후의 제반 갈등 속에 부대끼는 무당은 오히려 행복한 것이다. 갈등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그들은 부모를 잃은 고아와 같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 오로지 홀로 독단의 길을 걷는 것이다. 독립의 길을 터득하지 못한 채 차츰 무업에서 벗어나게 되고 낙오자임을 숨기고 살아갈 뿐이다. 가끔 점사를 보고 있으면 신분을 감추고 손님으로 들어선다. “신당을 비우고 왜 이곳에 왔냐.”고 나무라면 한숨 가득, 눈물 가득, 한풀이, 넋풀이를 하고 간다. 누가 그들을 그리 만들었을까. 뜬 금 없이 “선생님에게 신 받으려면 돈 많이 들어요?”라고 묻는다. “무슨 신을 또 받아, 지금 계신 신도 감당을 못하면서, 몸주신께 기도 열심히 하세요.”라고 응대한다. 그 말 이외에는 적당한 표현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굿판은 무교의 본질 가운데 중요한 요소인 집단성과 공동성의 의미를 상실해 버렸다. 여럿이 함께하던 굿판의 어우러짐이 개인화를 지향하는 현실로 변모함으로써 굿판에서 구송되는 ‘청배’와 신에 관한 이야기는 관심을 두려하지 않는다. 다만 이 굿을 하려했던 목적이 달성되기만을 바라거나, 사회적 인식선상에서 은밀하고 쉬쉬하며 굿판이 서둘러 끝나기를 원할 뿐이다. ‘청배’를 구송하는 무당도 그 내용을 굿판에 참가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자하는 신화에 대한 배려도 없거니와 다른 무당, 제가 사람들도 그 청배에 대해 관심이 없다. 아니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일반 대중가요에 익숙한 이감(耳感)과 음감으로 인해 그러한 것들이 낯설기 때문에 무엇을 이야기 하는지 알지 못한다. 결국 무가를 구송하는 그 시간은 그냥 지루한 시간일 뿐이다. 다소 친절한 무당이 있다면 지금 거리는 ‘무엇이다’라고 말을 함으로서 마음에 준비-마음에 준비는 그 거리에서 나올 공수에 대한 기대감이다-만을 할 뿐 그 거리의 의미를 생각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제 누구도 신의 엄함과 엄정함을 내세우거나 믿으려하지 않는다. 다만 무당이 잘 맞추는가, 용한가를 궁금해 할 뿐이다. 잘 맞추는 것과 용함이 신의 영험을 대변하는 시대 속에서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12지에 관한 이야기나 마을이 생긴 설화를 듣고 자란 이들은 이제 삶의 무대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이제 그것을 경청할 자손도 없거니와 설혹 그런 이야기를 꺼낸다고 할지라도 어린 손자에게 묵살당하기 십상인 것이 현실이다.
첫댓글 즐감요 ,,
고맙습니다 포근한 밤 되세요 관세음보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