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진목사/두지파반의 귀환 (수 22:1-12)
초점:교회론
요약
두지파반의 4만 군대는 7년간의 봉사를 마치고 자신들의 기업으로 귀환하였다. 이 일
은 교회론의 예표이다. 여기서 그들이 보여준 절대적 헌신은 그리스도가 머리이심을,
그들의 형제애는 교인은 영적 형제가 됨을, 여호수아의 격려와 축복은 하나님께 위임
받은 교회의 축복의 기능을, 그리고 전리품 분배는 교회의 교제의 기능을, 그리고 목숨
걸고 쌓은 단은 성도가 한 몸임을, 감정을 누르고 진행한 순리적 해결은 교회는 평화
로워야 함을, 그리고 비느하스로 이단성을 파악케 함은 교회의 진리수호의 기능을 잘
보여준다.
강해
오늘 본문은 요단 동편에서 기업을 얻은 두 지파반이 이제 가나안 정복전쟁을 끝내
고 고향으로 귀환하는 내용입니다. 모두 약 4만명의 군사들이 자기의 기업은 아니건
만 여호와의 이름으로 여호수아에게 맹세한대로 형제들을 돕기 위해 약 7년간의 위
험하고 힘든 봉사를 마친 후에 귀환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여호수
아는 이들을 불러 장기간에 걸친 정복전쟁 동안 수고한 공로를 치하하고(1-3절), 권
고와 더불어 축복을 하고(4-6절), 많은 재물을 주어 그들의 기업으로 돌아가도록 조
처를 취합니다(7-8절).
그들은 돌아가 후대 자손들에게 자신들도 서편과 동일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요단강 언덕에 큰 단을 쌓습니다(10-20절). 이것으로 아홉지파반의
오해를 삽니다마는 진위를 파악하고는 그들은 더욱 견고한 공동체로 단결되게 됩니
다(21-34절). 이것이 본문의 줄거리요 문자적인 해석입니다. 이 본문이 보여주는 신
령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교회론의 이치를 보여줍니다.
교회란 과연 어떤 것인가?
1.교회는 주님이 머리이십니다.
1:16절에 "당신이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것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하면서 18절에 "누구든지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
며 무릇 당신의 시키시는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는 자 그는 죽임을 당하리니 오직 당
신은 마음을 강하게 하시며 담대히 하소서" 라고 맹세했습니다.
이 고백은 두지파반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여호수아에게 보여준 헌신의 고백이었
습니다. 그들은 여호수아에게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그들은 이 맹세대로 이 언약을
7년 동안 신실하게 지켰습니다. 내 기업과 관계가 없는 일임에도 그들은 하루도 쉬
지 않고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심자어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삼년간 귀환명령
이 내리기까지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이 얼마나 철저한 순복입니까?
아마 우리 같았으면 전쟁이 끝났는데 왜 보내어 주지 않느냐? 우리는 가족도 없는
줄 아느냐? 우리가 당신들 뒤치닥꺼리까지 다 해주어야 되느냐? 고 데모를 하고 불
만을 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호수아가 하라
는대로 순종했습니다. 앉으라 하면 앉고 서라 하면 서고 가라 하면 가고, 그들이 불
만을 품은 흔적이란 조금도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란 그리스도를 머리로하여 그에게 철저히 순복하는 곳입니
다. 그리스도가 왕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리스
도를 어떻게 따릅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성경대로 살
고 교회는 성경대로 운영하면 됩니다. 모든 직분과 조직은 이것을 위한 조직일뿐 우
리 뜻대로 할 권한은 부여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뜻을 잘 알아야 합니
다. 잘 알지 못하면서 너무 깊이 관여하는 일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두려운 일입니
다.
수1:18의 약속대로 그들은 7년을 한결같이 여호수아를 좇았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그래야 할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로 모실 때 우리는 그를 평생 섬기
기로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출21장을 보면 종이 평생 주인을 섬기겠다고 먼저 재판
장에게 가서 공적으로 판결을 받고 문설주로 데려가서 송곳으로 귀를 뚫습니다. 이
제는 내 주인의 말씀만 듣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그런 맹세를
한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주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의 자세는 언제나 주의 뜻이 어디 있을까 그리고 주의 뜻이 무엇
일까 언제나 생각하며 주의 뜻대로 하려고 해야 합니다. 눅6:46에 예수님께서는 "너
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주님이시므로 우리는 그 분의 뜻대로 살아야 하고 그
분의 뜻대로 운영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2.교회는 형제애가 있는 곳입니다.
3-4절에 "오늘날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너
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너희 형제에게 안식을 주셨으니" 했
습니다.
두 지파반은 나머지 아홉 지파반을 형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지
파반의 헌신은 아홉지파반을 위한 뜨거운 형제애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형제들을
돕되 끝까지 도왔습니다. 여기서 도와 달라 하면 여기서 돕고, 저기서 도와 달라 하
면 저기서 돕고, 어느 정복지에서 문제가 생겼다 하면 그곳으로 출동하고 낮에도 출
동하고 밤에도 출동하고 이들은 어느 지파에도 자기 가정에도 묶이지 않고 어느 곳
이나 출동하는 이스라엘의 특수부대였습니다.
제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교회에서 형제라고 불러주는 것이 그렇게 좋았습니다.
그 명칭 때문에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교회를 끝까지 다니고 싶었습니다. 교인들은
결코 남이 아닙니다. 한 가족입니다. 한 형제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형제보다 더한
형제애가 있어야 합니다. 육신의 형제는 믿지 않으면 결국 이별할 날이 옵니다. 그
러나 믿음의 형제는 영원합니다. 육신의 형제가 아프면 내 마음만 아플 뿐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형제는 내 영혼과 육체가 같이 아픕니다. 믿음의 형제 자매가 머리가
아프면 내 머리가 아픕니다. 그래서 기도해 주면 그 형제의 아픔이 낫습니다. 그것
은 믿음의 형제는 성령으로 한 몸이요 영원한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는 육신의 형제도 사랑하되 믿음의 형제들에게 더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느곳에서도
느낄 수 없는 사랑을 교회에서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나
만약 사랑하지 않는다면 에베소교회를 향한 주님의 경고처럼 교회의 춧대를 옮기실
것입니다.
3.교회는 말씀과 축복의 전당입니다.
7절에 "여호수아가 그들을 그 장막으로 돌려보낼 때에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랬습
니다.
본문 2-7절은 여호수아의 말입니다. 그는 얼마나 두지파반을 사랑스런 심정으로
칭찬하고 격려하고 권면하며 축복하고 있습니까? 2-3절은 칭찬입니다. 4-5절은 권
면입니다. 6-7절은 축복입니다.
이런 일을 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내 아버지집 얼마나 다정하고 포근한 이름입니까? 또 교회는 어
머니라고도 했습니다(갈4:26). 아버지가 계시고 어머니가 계시는 행복한 우리의 사
랑스런 집이 바로 교회입니다. 가정에서 아버지는 말씀하시고 축복해 주시고 어머니
는 감싸주시고 먹여 주시듯 교회가 그런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여정
에서 물이 없어서 고난을 많이 당했는데 엘림이라는 오아시스에 왔습니다. 그곳에는
물샘 열둘과 70주의 종려가 있었습니다. 물샘 열둘과 70주의 종려가 바로 교회입니
다. 물은 말씀이요 열둘은 주의 종들이요 종려 70은 풍성한 주님의 은혜와 은사를
상징합니다. 이처럼 교회는 이 힘든 세상의 여정을 살아가는 인생들의 쉴 곳이 되어
야 합니다.
두지파반 그들이 7년간 가족과 생이별하며 전쟁할 때 얼마나 외로왔겠습니까? 또
자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고 높은 산을 오르내리기를 얼마나 했으며 적군의 뒤를 쫓
기를 얼마나 했겠으며 죽을 고비를 얼마나 당했겠으며 얼마나 수고하고 피곤하고 얼
마나 마음의 고통이 컸겠습니까? 저도 몇 년간 성전 건축을 하다보니 몸은 성한 곳
이 없이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망치로 손가락을 때리기를 몇 번이며, 쇠붙
이에 팔과 다리를 긁히기가 몇 번이며, 불에 손을 데이고, 설치물에 머리를 찧고, 손
가락이 끊어지고, 무거운 짐을 지다 어께가 빠지고, 돈이 없어 동분서주하며 울며
기도하기를 얼마나 했으며, 일년에도 떨어진 구두만도 몇 컬레이며, 일하다 찢어지
고 옷은 어떻고, 온 몸이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두지파반 그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칭찬과 격려와 권면과 축복
을 받고는 그들의 마음은 눈이 녹는 듯했습니다. 아마 주르르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
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상한 심령을 위로하는 곳입니다. 용기와 힘을 주는
곳입니다. 은혜를 끼치는 곳입니다. 또 말씀으로 바로 살도록 권면하는 곳이기도 합
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곳입니다. 이것 없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교회론 아주 좋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4.교회는 나눔의 공동체입니다.
8절에 "너희는 많은 재산과 심히 많은 가축과 은 금 동 철과 심히 많은 의복을 가
지고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서 너희 대적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 형제와 나눌지니
라" 했습니다.
그래서 아홉 지파반은 그들에게 많은 전리품을 주어 각기 기업으로 돌아가도록 했
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을 빈손으로 그냥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취해 놓은 많
은 전리품들을 꺼내서 고루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쁨으로 기업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그래야 합니다. 교회에 나온 성도들은 무엇인가 가실 때는 축복을 한 아름
씩 안고 돌아가셔야 합니다. 먼저는 예배를 통해서 풍성한 은혜를 한 아름 안고 가
셔야 합니다. 교회는 나눔의 공동체입니다. 초대교회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물질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복과 각양 은혜와 은사를 서로 나누는 것입니다.
여기 재산 가축 보물 의복 등은 이런 모든 복과 은혜와 은사들을 가리키는 것입니
다. 이것을 교제라고 부릅니다. 헬라어로는 '코이노니아'입니다. 코이노니아는 교회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주님이 주신 것들 나눠 보세요. 신기하게 나누어질
뿐 아니라 더 많이 채워집니다. 능력도 나누어집니다. 은혜도 나누어집니다. 말씀도
나누어집니다. 지혜도 혼자만 갖지 말고 나누십시오. 신앙의 힘을 잃으신 분들 손을
잡으시고 기도해 보세요. 새 힘이 임합니다. 물질도 성령의 인도따라 나누십시오. 그
런데 우리 교회 안에서만 나누지 말고 성령의 인도따라 더 넓게 나누면 더 큰 유익
이 있습니다. 더 넓게 줄 뿐아니라 밖의 훌륭한 분들을 초청하여 은혜를 받으십시
오. 교회의 특징은 나누는 곳입니다.
5.교회는 한 몸입니다.
10절에 "요단 가에 단을 쌓았는데 볼만한 큰 단이었더라" 했습니다.
본문 10-20절의 내용입니다. 동편으로 간 두 지파반이 요단 언덕가에 볼만한 큰
단을 쌓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이스라엘을 동서로 갈라놓는 요단강 때문이었습니
다. 그래서 그들은 동서편의 백성들은 모두 하나님의 동일한 한 언약의 백성들이라
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 여호와의 단의 모형을 만들었습니다.
여기 요단강이 문제입니다. 가나안을 동서로 가른 것도 요단강이었습니다. 지상교
회와 천성교회를 구분짓는 것도 죽음의 요단강입니다. 그래서 '요단강 건너가 만나
리' 찬송부릅니다. 혹은 요단강은 한 신앙을 가졌으면서도 정치적으로 갈라진 여러
교파들을 상징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지역 혹은 혈연 혹은 학연 혹은 인종 혹은 국
가 등으로 갈라놓는 구분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보여주는 진리는 아무
리 건너지 못할 요단강이 그 사이를 흐르고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
라는 사실입니다.
두지파반은 이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단을 쌓는 일을 실천했습니다.
이것으로 큰 오해가 발생하여 전쟁의 위기로까지 갈 뻔했습니다만 그들이 그 일을
상의 없이 감행한 것은 아마도 여호수아가 허락해 주지 않을 것 같아서 였을 것입니
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단은 오직 중앙 성소 한 곳에만 있어야 하는데 다른 것도 아
닌 여호와의 단의 모형을 만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상의하지 않
고 우리는 서로 하나다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단을 만들었습니다. 나
중에 서편에서 오해하여 대군을 소집했음을 불쾌하게 여기지 않고 문제삼지 않았던
것을 볼 때 그들은 증거의 교육용 단이라는 확신 뿐아니라 오해로 올 시련까지도 각
오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귀한 교회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철저한 교회관을 갖
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잘못된 교회관과 목숨바쳐 싸우기를 원하고 계십
니다. 예를 들면 개교회주의는 잘못된 것입니다. 개교회주의는 성경적인 근거가 조
금도 없습니다. 내가 출석하는 교회만 잘되면 된다 이 정신은 어디에도 없는 정신입
니다. 그러므로 시기하고 질투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모두가 그리스도께서 피값
으로 사신 주의 교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아무 교회나 출석하라는 뜻은 아
닙니다. 주의 뜻 안에서 교회를 정했으면 거기서 충성해야 합니다. 교회 내부에 문
제가 존재해도 나를 보내신 뜻에 맞추어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감사한 것은 지금은
이 개교회주의가 많이 사라졌습니다. 과거에는 교회론은 정말 황무지와 같았습니다.
특히 선교를 하면서 개교회주의가 많이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성령론 분야도 많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혹은 무교회주의도 경계해야 합니다. 이것은 예배와 훈련과 교육과 전도와 양육과
전문화 등등 여러 가지에 취약점을 지닌 반교회적인 운동입니다. 무형의 교회만을
인정하는 것으로 가죽부대 없는 포도주요, 목자와 우리 없는 양들과 같습니다. 이런
주의는 배척해야 마땅합니다.
두 지파반처럼 교회가 한 몸이라는데 우리는 목숨 걸어야 합니다. 그래서 연합적으
로 서로 도우며 일해야 합니다. 그런데 순수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하긴 하지만
우리 교회 이름 안 내주면 안하겠다는 그런 수준 낮은 생각으로 하면 안 됩니다. 우
리는 크니까 거기에 상응하는 자리를 안 주면 안하겠다는 교만한 발상도 버려야 합
니다. 우리는 크니까 전통이 있으니까 장악해야 한다 그래야 체면이 선다는 그런 마
음도 버려야 합니다. 파워가 있다고 개인이나 교회나 교단들이 종횡무진 설치는 일
이 없어야 합니다. 어느 회든지 이 실력 대결 때문에 한 몸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순서와 질서대로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레위지파든 대제사
장이든 모두 반열대로 봉사합니다. 그러니까 분쟁이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
도 노회도 총회도 교단연합회도 순리대로만 하면 문제될게 없습니다. 교회는 성경의
원리대로만 운영하면 됩니다. 또 교인들도 엉뚱한 기대를 버려야 합니다. 우리 교회
목사나 장로님들 언제나 시찰장 노회장 총회장될까 그런 기대 버려야 합니다. 교인
들이 이런 것으로 지도자를 평가하고 또 은근히 바라는 것 때문에 교인들을 의식해
서 지도자들이 더 정치의 유혹을 받습니다. 정치를 하더라도 한 몸을 위해서 하고
하지 않더라도 한 몸을 위해서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 어떤 것도 한 몸을 해치는
일이라면 조심해야 합니다.
6.교회는 평화로워야 합니다.
12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하니라"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들의 인간적인 부족한 면을 엿보게 됩니다. 먼저 동편 사람들은
교육용 제단이지만 상의 없이 성급하게 수축하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아무리 이해해
주지 않을 것 같아도 요청하면 여호수아가 자신이 결정치 못하면 여호와 앞에 여쭈
어 결정할 것이기 때문에 가능할 일인데 말입니다. 그리고 서편 사람들도 그렇습니
다. 여기 "곧"이라 했습니다. 즉 그 진위를 파악하기도 전에 수십만의 대군을 일으켜
치러 가려 한 일도 너무나 성급한 속단입니다. 무엇이든지 성급하면 실수가 있게 마
련입니다. 다행히 비느하스를 조사단장으로 각 지파별로 10인씩 조사위원을 선정하
여 진위를 파악토록 했으니까 다행이었지 처음 감정대로 했다가는 큰 전쟁이 일어날
뻔 했습니다. 정확한 사항을 알기도 전에 소문으로만 듣고 감정을 발하여 전쟁하려
고 나선 그들 얼마나 어리석고 나중에는 부끄러워 했겠습니까? 동편 사람들도 불쾌
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일은 언제나 인격적으로 합리적으로 그리고
언제나 말씀과 은혜 안에서 해야 합니다.
여기서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진리는 교회는 평화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정을
앞세우면 안 됩니다. 교회는 성령의 감동이 지배하는 곳이지 인간의 감정들이 지배
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의식적인 거룩만 주장하지 말고 질적인 거룩을 주장
해야 합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감정으로 했으나 이내 냉정을 되찾고 조사단을 만들
어 일을 순리로 풀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일의 모범과 원칙을 보여주는 귀한
사례입니다. 하여간 교회에서는 감정은 늘 죽여야 합니다. 교회란 사람이 모이는 곳
입니다. 사람들은 제각기 감정이 있습니다. 이 감정들 죽이지 않으면 교회는 인간의
집단이 되버립니다. 교회에 예수 냄새나야지 인간 냄새 나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임들이 퇴색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신앙적인 모임으로 시작
한 것들이 사적인 모임으로 변하고 잡담의 모임들로 변하면 시험이 거기서 옵니다.
이런 모임이 많을수록 문제들이 거기서 생기는 것입니다. 잡담하는 모임은 그 모임
이 어떤 모임이든지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예배한다 하면서 잡담하고, 회의한다 하
면서 잡담하고, 집무를 집행한다 하면서 잡담하고, 구역예배한다 하면서 잠담하고,
기도한다 공부한다 하면서 잡담하고 그래서 교회와 교인들의 모든 문제가 거기서 생
겨나고 교회 안에는 그런 모임은 고쳐지든지 없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무슨 프로그램을 진행하든지 교인들이 덕담 외에는 사적인 잡담을 못
하게 합니다. 교계에도 쓸데없는 조직과 모임들이 왜 그리 많은지 모르겠어요. 예를
들면 교계 밖에는 좋은 모임들이 비교적 많은데 교계 내부에서는 이런 모임보다는
불필요한 모임들이 더 많아 예를 들면 감투를 위한 정치로 수십 대의 자가용이 몰려
다니고 너무한 것 같아요. 그래서 이런 곳에 교인들이 휩싸이지 않도록 철저히 단속
을 시킵니다. 왜냐하면 좋은 것보다 나쁜 것을 더 배워 순식간에 좋은 신앙 다 버려
놓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교회의 평화를 깨는 일은 막아야 합니다. 저의 목회의 철칙이 그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만 교제해야지 인간적으로 교제해서 내 편 만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편이 된 사람 한 사람도 없어요. 저는 교인들을 모두 예수 편만 만들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뜻이 하나가 되어 다툴 일도 분열될 일도 없어질 것입니
다. 마24:12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는 예언대로 평화로운 교회가 많지 않습니다. 분
쟁하는 교회는 부흥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팔복에서 말씀하셨듯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어집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답다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힘을 합해 평화로운 교회를 만드십시다.
7.교회는 진리를 수호해야 합니다.
12절에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려 가려 하니라" 했
습니다.
만약 동쪽 지파들이 여호와의 단외의 다른 단을 쌓았다면 그들은 진멸 당해야 마땅
합니다. 레17:3-9 신12:2-14에서 율법이 그것을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3절에
비느하스가 조사단의 단장인데 그의 임무는 진상을 조사하는 일로 이단성 여부를 파
악함이었습니다. 그는 아론의 셋째 아들인 엘르아살의 아들로서 20년간 대제사장을
역임한 사람이고 모세를 도와 미디안 정벌에 참여했고 바알브올 사건 때 우상숭배
를 한 시므리와 고스비를 창으로 찔러 처단한 진리에 선 사람으로 이 공로로 영원한
대제사장직의 언약을 받기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이 사건의 조사단장이 된 것
은 진리수호를 위한 상징적인 의미도 큽니다.
만약 진리가 변질되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
라고 부르지를 못하는 교회들이 많다고 합니다. 홍길동이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
러보지 못한 것처럼 여성신학자들이 성경을 문화의 산물로 보아 가부장제도 시대에
성경이 쓰여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했다고 어머니도 된다는 논리를 펴면서 박해하
니까 사람들이 다투기가 싫어서 그냥 하나님이라고 한답니다. 최근 이화여성신학연
구소 주최로 독일 해방신학자요 여성신학의 어머니라는 도르티 죌레 교수를 초빙하
여 강연회(98년 5월 25일-6월 1일)를 가졌는데 신문 기사를 보니까 역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함을 가부장적인 문화의 산물로 이해하면서 하나님을 특정된 어떤 이름
으로 명명함은 하나님에 대한 공격이며 하나님을 인간의 영역에 묶는 통제행위로서
이는 하나님을 하나님이 아니라 종교적 이데올로기화 시킨 것으로 비판하고 있습니
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에 관한 명명은 인간으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의 자기 계시
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은 그 계시한 만큼만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이상의 계
시에 대한 관심은 호기심으로 불필요한 이론을 불러오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스
라엘의 회복 등 제자들의 호기심을 억제시키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허락하신 계시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고전4:6에 "기록한 말씀밖에 넘어가지 말라"
이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여성들의 권리가 짖밟히고 있다면 모두가 나서야 합니
다. 진정한 영성운동은 여성의 권리를 결코 짖밟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성의 여부는
부부 간에 화목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성신학자들처럼 하나님의 속성까
지 변질시키면서 불필요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지 않고 성경 자체의 교훈속에서
얼마든지 여성의 권리를 옹호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성경관 논쟁의 시대입니다. 약 4세기까지 기독론 논쟁 이미 끝났습니다.
그 후에 삼위일체 논쟁도 끝났습니다. 중세기에 교회론 논쟁도 끝났습니다. 이제는
성경관 논쟁의 시대입니다.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 문화의 산물이냐 후기에 편집한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온전한 영감이냐 이 논쟁입니다. 이제 사람들이
좀 머리가 커져 교만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그냥은 못 믿겠다는 것입니
다. 여러분!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이지 문화의 산물이 아닙니다. 문화의
산물이라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글자 하나까지도 영감
으로 된 책입니다. 성경을 의심하면 신앙은 다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진리를
수호해야 합니다. 비느하스처럼 목숨을 걸고 진리수호를 위해서 싸워야 합니다. 진
리가 없으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어야 합
니다.
<결론>
성경은 동편으로 귀환한 두지파반을 통하여 귀한 교회론을 가르쳐줍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부름 받은 구원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주님이 머리이십니다. 교회는 형
제애가 있는 곳입니다. 교회는 위로와 말씀과 축복의 전당입니다. 교회는 나눔의 공
동체입니다. 교회는 한 몸입니다. 교회는 평화로워야 합니다. 교회는 진리를 수호해
야 합니다. 아무리 요단강이 흐르고 또 흘러도 교회는 하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서 주신 이 아름다운 교회를 지켜나가고 말씀 안에서 더욱 새롭게 개혁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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