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話頭)
경주 역전에 중앙시장이 있다.
경주는 넓은 들로 둘러쌓여 있어
농작물과 민물고기가 풍부하고
남쪽으로는 높은 산들이 줄지어 서 있어
버섯과 산나물 그리고 과일들이 많이 나온다.
가까운 동해에서 해산물을 쉽게 공급받으니
경주의 물산은 풍요롭다.
시장에 가면 물건들이 다양하고 풍성하니
보는 이의 마음도 넉넉해져 기분이 좋다.
시장 밖의 길거리에도
많은 아낙네들이 앉아서 채소나 과일을 판다.
어느 해 봄.
중앙시장 앞길을 걷다 보니 난전에서
많은 봄 과일 속에 버찌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교태스런 붉은빛에다
반짝이는 과일 껍질이 하도 예뻐
저절로 그 앞에 발길이 멈추어졌다.
과일 더미 위는
달콤새큼한 향기가 허공을 꽉 채우고 있어
그 자리를 쉽게 떠나지 못한다.
가까이서 보니
버찌들의 붉은 색들의 종류도 다양했다.
검붉은 것이 있는가 하면 밝게 붉은 것
그리고
분홍빛과 노랑색이 섞인 것 등이 있다.
과일의 크기도 가지가지여서
좌판의 풍경들은
그림 전람회 작품이 되어 황홀감을 느끼게 한다.
“사장님 과일 좀 사 가소”
투박스런 경주말이 들린다.
이런 말투는
딴 지방 사람이 들으면
공짜로 과일을 준다고 해도 그냥 갈 소리다.
“얼마씩 하는데요?”라고 말하자.
“체리 사실래요? 버찌 사실래요?”“하고 되묻는다.
이게 무슨 소린가
벚나무 열매가 버찌고
영어로 체리가 아닌가.
그 게 그건데,
아낙네의 질문에 잠깐 가슴이 답답해진다.
순간적으로 화가 치민다.
60년대 서울 명동.
‘본전’ 다방과 ‘청자’ 다방이 유명했다.
거기는 대화가 불가능 한 곳이다.
로큰롤과 소울 등
서양음악의 굉음(轟音)으로 가득 찬 곳,
멋쟁이 청춘남녀들의 고급데이트 장소다.
같은 명동이라도
국립극장 근처나 내무부 청사 부근에 가면
한복 입은
마담들이 있는 엄숙한 다방들이 있었다.
젊잖은 사장님이나 관리들이 출입하는 곳이다.
‘설파’ 다방은
클래식 음악 전문다방이어서
음악 애호가들이 다녔고
‘타임’ 다방은
조용한 서양 유행 음악을 주로 틀어주어
증권시장, 은행, 공무원 등의
샐러리맨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조용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만만한 다방은 한참 찾아야 한다.
‘포 시즌’ 맥주집 근처 ‘장미 다방’이 그런 곳이다.
서울 생활 초기,
그 곳에서 우유 한 잔을 주문했다.
‘레지’가 검을 찍찍 씹으며 되묻는다.
“밀크 하실래요? 우유 하실래요?”
이 건 또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하나는 영어고 하나는 우리 말일 뿐인데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가? 화내며 물었다.
“여봐 당신 날 놀리는 거야?
그 게 그거잖아.”
사투리를 쓰니까
서울역에 금방 내린 무식한 촌놈 취급한다는
분한 마음이 들어 화를 내며 대든다.
“아유 손님두
얼굴은 잘 생기셨는데 뭘 모르셔.
우유는 목장 우유의 준 말이구요.
밀크는 전지분유를 타서 드리는 거예요.
목장은 비싸고 밀크는 싸죠.
손님 몸 건강 생각해 목장 드셔”
짜증도 내지 않고 그렇다고 미소도 짓지 않고
지극히
사무적인 표정으로 쉽게 설명을 해준다.
프로의 모습,
세련된 명동 레지의 품격을 말해준다.
목장을 마시며
그녀를 보니 매우 귀여워 보였다.
콧대 높은
명동성모병원 의사가
무명의 다방 레지에게
무언의 꾸중을 듣는 순간이었다.
“체리 할래요? 버찌 할래요?”라고 말을 듣는 순간
짜증이 나서 “
사쿠란보는 없어요?”라고 어깃장은 놓고 싶었다.
그 순간
장미 다방 그녀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 할매의
이상한 소리에 토를 달지 않기로 했다.
명동 레지에게서 받은
교육의 효과가 나타난 모양이다.
“뭐가 다른지 아주머니 설명 좀 해주소”
“미국서 온 버찌는 체리이고
국산 버찌는 버찌라고 하지”
할매도 레지처럼 간단하게 설명해주었다.
“일본산 사쿠란보는 없어요?”라고 물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는
할매는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애국심이 발동해서 국산을 사기로 했다.
“버찌 주소.”라고 하자
그 아낙은 “와 버찌 살라카노?
기왕이면 수입 좀 사주소”라고 했다.
왜냐고 묻자
그거 팔면 이문이 더 남는다고 했다.
이 가난한 아낙에게 이익을 주는 게 애국인가?
아니면
구슬땀 흐리며
버찌를 재배한 농민을 위하는 것이 애국인가?
정의란 무엇일까?
일본 ‘이도류(二刀流, 쌍칼)’의 명인 검객
‘야마모토 무사시(宮本武藏)’도
기생들에게서
노자(老子) 도덕경을 배웠다고 한다.
모르는 것은 무조건 배워야 된다.
어른들은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고 하지 않던가.
수십 년 전
장미다방 레지의 가르침이
오늘 과일 파는 할매들의 이상한 소리에도
인내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해 경주의 봄날
애국에 대한 새로운 화두를 던져준 이 노 보살.
그녀는 나에게
또 다른
하나의 수양의 길을 제시해 주었다.
첫댓글 긴 글은 잘 모르지만
경주역앞 시장은 알고있어요..
ㅇㅇ형식의 부폐지요..
목로주점을 아시면
그냥가기 어려운 곳이고요,.
고맙습니다
ㅎㅎ
그럴수도
있군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