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 3일 – [오늘의 명상]
“나의 업의 총량은 얼마일까?”
복(福)은 구(求)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길러 만드는 것이고
화(禍)는 고연이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상(傷)하는 것이다.
[덧붙임]
어제 업(業)의 총량(總量)에 대한 설명에 대해 많은 문의가 왔다.
부자와 거지가 어찌 똑같은 감정을 가질 것이며,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감정이 어찌 같다는 말인가? 또 현실적으로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의 모습이 엄연히 차이가 나는데 고락의 감정이 차이가 없다는 설명에 동의하지 못함은 물론,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문의가 많았다.
무관심하여 그냥 넘어가기 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여준 여러분들께 우선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 드린다.
그리고 자신은 이해가 잘 되지 않으나, 이해 안되는 것에 대해 따지듯이 주장하기 보다 궁금한 점을 하나하나 물어 주시는 분들께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참고로 노파심에서 한마디 알려드리자면, 소승이 말하고 쓰는 모든 글들은 모두 경전에 입각하여 부처님과 역대 조사님들께서 밝혀 말씀하신 것들을 근거로 대신 설명 드리는 것이니, 개인적인 주의 주장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다만, 설명에 있어서 다소 부족한 점이 많음도 솔직히 시인합니다.
“신심명(信心銘) 43, 44, 게송을 보면,
미생적란 (迷生寂亂) 미혹하면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같이 생기고,
悟無好惡 (오무호오) 깨달으면 좋아함과 싫어함이 같이 없어진다.
一切二邊 (일체이변) 일체 모든 상대적인 두 가지 양 극단은
良由斟酌 (양유짐작) 무지하여 그저 짐작할 뿐이다. “
싫고 좋고 상대적인 두 가지 마음은 깨치지 못한 미혹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고, 혹시나 짐작하여 좋은 것만 취하려 하는 것은 무지함에서 나오는 마음의 소치라는 뜻이다.
비록 작은 소국이지만 일국의 왕자로서 부귀와 영화에 대해 평생을 보장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싯달타가 왜 출가를 하셨을까?
바로 이 감정의 마음을 정확히 보고, 두 가지 감정의 마음을 벗어나야만 윤회(輪廻)의 고(苦)를 면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부처님은 고락(苦樂)의 업 즉, 감정이 전혀 없다. 좋은 감정이 없으니 나쁜 감정도 없다. 그래서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더라도 기분이 좋은 감정도 없지만 기분 나쁜 감정은 더더욱 없다.
다만, 여여(如如)하고 적멸(寂滅)하며, 자유자재하고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마음뿐이다. 따라서 생사(生死)와 생멸(生滅)이 없으니 생로병사(生老病死)도 없다.
엄연히 몸이 늙고 병들어 죽는데 왜 생로병사가 없느냐 의문이 들 수 있으나, 정작 부처님은 생로병사에 대한 감정이 전혀 없으니 늙어도 늙는게 아니고 병들어도 병든 게 아니며, 죽어도 죽는게 아닌 것이다. 옆에서 보는 사람의 근기가 그렇게 보일 뿐이다.
누구나 감정의 총량이 같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감정 즉,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의 총량이 50이면 슬픔과 괴로움과 불행의 총량도 50이라는 뜻이지, 사람들 모두가 무조건 감정의 총량이 같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고(苦)의 총량이 만(萬)이면 락(樂)의 총량도 만이고, 고의 총량이 1이면 락의 총량도 1이라는 것인데, 사람에 따라 총량이 많으면 많을수록 업이 크고 두텁다 할 것이다. 업의 총량이 많을수록 탐(貪)진(嗔)치(痴) 삼독(三毒)심과 정비례한다. 즉, 욕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고락(苦樂)의 업도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부처님의 업 즉, 고락의 감정이 0이라면 9지보살은 1, 8지보살은 2, ~ 초지보살은 10, 각 아라한에 따라 11, 또는 그 이상의 업의 총량이 될 수 있겠다.
업의 총량 즉, 감정의 총량이 적은 사람일수록 업이 가벼워 상대적으로 크게 괴롭거나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으나, 그 반대의 업을 가지고 욕심이 많을수록 고통과 괴로움의 강도는 높아져서 일상 생활에 있어서도 각종의 사건 사고 내지는 불행한 일들이 나타날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하여 보이고 기억되는 것과는 반대의 업이 발생될 수도 있으니, 이는 전생의 삶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계산이 잘 안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니 맞지 않는다고 실망하는 것은 섣부른 행동이라 할 것이다.
아무튼 감정의 총량을 줄이는 것이 업을 멸하는 요체가 되어 실제의 삶에 있어서도 등락(騰落)이 큰 고락(苦樂)의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되니, 감정의 총량을 줄이는데 매진 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일례로, 스님들은 모두를 버리고 더 이상의 감정을 얹을 소재들이 없으니 상대적으로 감정의 총량이 줄어들어 근심 걱정이 거의 사라진 상태가 된 것처럼, 반연(攀緣)이 많고 감정을 일으키는 욕심의 대상이 많을수록 감정의 총량이 늘어날 수밖에 없으니, 절대적으로 복잡한 일을 줄여나가는 것이 걱정 근심을 줄이는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도 기도로서 감정의 총량을 줄이는데 정진에 정진을 거듭해 본다.
- 진우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