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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마살 향기 스크랩 비우고 싶어서 걸어본 지리산 둘레길
그저물처럼 추천 0 조회 93 09.10.27 15:45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생명평화결사 활동을 하면서 그동안 여러 차례 지리산 둘레길 걷기를 함께 하자는 연락이 왔었지만 교

통편이나 시간상의 이유로 번번이 거절하였는데 이번에는 반드시 가야할 것 같아 무리해서 가게 되었

다.

남편과 둘만 있을 때에는 열흘쯤이라도 시간을 내 해외로 다녀오곤 했는데 아버님이 오신 이후로 사실

며칠 어디 다녀온다는 것이 여간 마음 무겁지 않아 망설여지곤 하였다.

그래도 이번에는 많이 걷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가지 일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진 관계로 길을 걸

으며 마음을 정리해보자는 생각도 있었고 길이 나에게 알려줄 것이 무엇인지도 궁금했고 기대되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것들이 길을 걷다 생각나기도 하였고 생각을 정리하거나 다듬기도 할 수 있었던 경험

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생각보다 적은 수의 사람들로 걷기팀이 조직(?)되었다. 어쩌면 불문산악회에서 먼 길 가는데 가장 적

은 수가 아닌가 몰라. 그러나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소박하게 맛을 낼 수 있다는 것은 여

행을 다녀본 사람이라면 안다. 사실 혼자면 어떠랴?

아침 6시 30분에 안동에서 출발, 인월에 도착하니 10시가 넘었고  거의 11시가 되어 길을 나섰다.


지리산 둘레길은 도법스님이 앞장 서시는 <지리산 생명연대>에서 오래 전에 계획하고 실행에 옮겨 최

근에 와서야 개통되었다. 지리산 생명연대는 2002년에 만들어져 지리산의 생명평화를 기원하며 그동

안 지리산댐 건설 반대, 케이블카 건설 반대 . 반달곰 지키기 등 다양한 활동들을 해오고 있으며 지리

산 둘레길도 무분별한 지리산 등반으로 지리산이 황폐해지는 것을 다른 측면에서 대안으로 제시한 것

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지리산 둘레길은 지리산 둘레에 있는 전북·전남·경남 등 3개 도, 남원·구례·하동·산청·함양 등 영호남의

5개 시·군, 16개 읍·면, 총 80여개 마을을 잇는 300여km의 장거리 도보길을 계획하고 있는데 2011년에

야 완성이 된다한다. 현재는 5개의 코스로 약 70여km가 개통되어 있다.

우리는 총 19km인 인월- 금계구간과 3km쯤 되는 금계- 동강 구간의 일부인 벽송사까지 걷기로 했다.

첫날은 인월에서 창원마을까지 가 그곳 민박집에서 일박을 하고 다음날 창원마을에서 금계를 거쳐 벽

송사까지 가기로 계획을 하여 인월 지리산 둘레길 안내센터에서 출발을 했다.


산을 오른다는 것과 걷는다는 것은 많이 다르다.

오른다는 것이 정복, 결과, 만족감, 보람, 성과 등과 연결되는 의미를 포함하는 행위라면 걷는 것은 순

례의 의미를 담으면서 길과 사람과 마을이 이어지는 관계의 설정이 있기도 하고 걸음이 무심으로 흘러

가는 경험을 만들기도 한다. 차원 높여 말한다면 求道의 의미도 있을 것이다.

 

<인월에 있는 지리산 길 안내센터, 지리산길 안내서와 친절한 안내원이 있다.>

 

3박자가 맞아 떨어진 우리들의 길

남자 한명과 여자 세명,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쌍의 재바른 부부와 공주, 그리고 무릎 아픈 할머니

한사람이 동행이 되어 나선 길- 천천히 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오르막은 숨이 차서 헉헉대느라 늦고 내리막길은 무릎이 아파 어거적거리며 내려오느라 늦고 경치 좋

은 곳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사진 찍느라 늦고 이래저래 늦을 수밖에 없는 터라 앞서 가던 남정네로서

는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가다 쉬고 가다 쉬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래도 여자들은 아랑곳없이 저 하고 싶은대로 하면서 걸었

다.

그런데 말이 걷는 것이지 사실 산오름이나 다름 없었다. 우리가 ‘둘레길 걷기’ 의 의미를 너무 쉽게 생

각한 것이다. 그저 천천히 걷는 길로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출발 한 후 월평 마을에 들어서고 둑길 따

라 걷다가 중군마을을 지날 때 뿐이었던 것 같다. 그 이후로는 계속해서 오르막 내리막을 반복하면서

숨찰 지경에 이른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마을들이 지리산 골짜기에 있고 당연히 재를 오르내리야 하건만 우리는 그저 길은 평평할 것이라는 관

념에 빠져 놀란 지경이 되었다.

 

<마을 형국이 반월형이라 월평이라 불리는 마을이 인월-금계구간의 첫걸음이다. 지금부터 가는 길 곳곳에 이런 알림목이 있는데 빨간 표지가 인월에서 금계쪽이고 검은 것이 운봉쪽이다>

 < 월평에서 내를 따라 제방길을 걸었다. 바로 옆에는 국도가 있어 차가 쌩쌩거리며 달리고 있다. >

<임진왜란 때 군단편성의 중군이 주둔했다해서 중군마을인데 입구의 안내벽화가 아주 멋있다>

<안내문에서 본 것처럼 곳곳에 토종꿀을 재배하고 있었다>

<황매암-황매가 많아서 황매암이라 한다. 이름이 이뻐 비구니절집인가 했는데 아니었다>

 < 황매암에서 수성대 가는 길목에서 본 아름다운 단풍>

<수성대 계곡에서 점심을 먹었다. 밥이 많았는데도 열심히 먹었다. 계곡은 깊고 깊어 끝이 없고...>

<황매암에서 넘어가는 배너미재- 운봉이 호수였을 때 배가 넘나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배너미재를 넘어가면서 내려다본 장항마을- 지붕들이 반듯반듯한게 아주 품위있어보였다>

 

 

 

<장항당산-노루목당산소나무라고 한다. 지금도 당산제를 지내고 있는 신성한 장소이다-뒤에 보이는 산이 천왕봉인지 아닌지........>

<곳곳에 감나무가 잎을 떨구고 서 있었다. 붉은 감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더욱 빛났다>

 

그 뿐만 아니었다. 장항마을을 지나 등구재로 오를 때에는 주변에 여러 민박집 소개 팻말이 붙어 있었

는데 ‘나마스테’니 뭐니 여럿 중 ‘길섶’이라는 팻말이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당연히 민박집이라 생각했

고 길섶이라는 이름처럼 둘레길 가는 길섶에 있을 것이란 막연한 생각을 했었다. 고개길을 넘어오다

오른쪽으로 도는 길에 커다랗게 ‘길섶’ 팻말이 있고 가는 길의 모양도 그려놓았기에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그 길로 올라갔다. 왼편 내리막길에 둘레길 표시가 있는 것은 보지도 못한 채 말이다.

길섶이란 표시가 다시 나오자 우리는 불현듯 그곳에서 시원한 음료수나 맥주를 한잔 들이키자고 제안

이 나왔고 갑자기 힘이 솟아 으샤으샤 하며 길을 내려갔다.

그런데 둥근 느와지붕을 한 두채의 집이 보이고 사람들은 오가지 않는데다 먼저 왔던 길손이 이곳에

아무 것도 팔지 않고 아무 것도, 주인도 없다고  손사래를 치며 가라는 것이었다. ‘이런...’우리는 갑자

기 힘이 빠졌고 앞으로 갈 길이 걱정되어 아무 미련없이 그곳을 떠나왔다. 표지판을 원망하면서......

다음날 그곳에 갔던 다른 사람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우리가 갔던 그때 주인도 그곳에 있었으며 우리가

하는 대화도 다 들었다는 것이다.

지리산을 사랑하여 지리산 속에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진작가가 지리산의 비경을 찍어 전시를 하고 있

는 그 곳을, 우리는 산속에서 어둠에 젖을까봐 초조한 마음으로 여유 없이 돌아섰다는 것이 얼마나 부

끄러운지..........둘레길 걷기의 의미가 무색해지는 순간이 아니었나싶다.

 

<장항마을을 지나 매동가는 삼거리에서 등구재쪽으로 오르면서 본 국화밭-국화차를 만들것인듯>

<길목에서 만난 아주머니-선량한 웃음으로 우리를 맞았다. 지나는 길손들이 아무도 감나무나 식물에 손을 대지 않는다고 말했고 우리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지리산길을 걷는 사람의 마음은 다르다고>

<등구재 쉼터에서 본 상황마을- 멋진 다랑논이 펼펴져 있다>

 

거북이등을 닮아 이름 부쳐진 등구재에서 우리는 지는 해를 보내고 어둠을 맞았다.

첩첩 지리산 능선이 서서히 숨어드는 모습, 그 앞에 하늘거리는 억새풀, 붉은 숨을 토하는 나뭇잎, 꽃

보다 아름다운 붉은 감..... 색채와 형태의 조화미를 어떻게 표현할 수 없었다.

어둠 속에 찾아든 창원마을- 민박집, 아직 장사때 묻지 않은 소박한 노인네들이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

로 정겹게 우리는 맞이하고 또 맛난 저녁을 대접해 주었는데 서울서 온 가족 여행객은 방을 얻지 못해

노인정에서 자게 되었다. 한달 전에 예약을 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참으로 미안해야 될 것인데 주인어른들은 별로 그런 기색도 없이 그저 노인정에 가서 자라는 것이었

다. 잠자리만 있으면 된다는 듯이 .... 우리로서는 감당이 되지 않는 처사인데 주인어른은 그러지 않아

도 될 인심인 듯 보였다. 그들은 숫제 예약의 개념이 없는 것 같았다.

하기야 문자메세지가 뭔지도 모른다고 하시니......아들 딸 좋은 대학 나오고 대처에 나가 잘 살고 있으

니 좋은 집도 지어주었고 그래서 민박을 하게 되었으니 뭐 어쩔 수가 없는 듯.

두꺼운 바지 하나 달랑 입고온 공주님은 할머니에게서 땡땡이 꽃무늬 바지를 하나 얻어 입고 편한 잠

을 잤다. 이런 인심이 좋아 다른 것들은 묻히는 것 같은데...우리가 서울 여행객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아름다운 해너미>

<조선시대 마천면내의 세로 거둔 물품을 보관한 창고가 있었다하여 '창말'이라 불리었다가 이웃 원정마을과 합하여 '창원'이 되었다는 마을에서 일박하였는데 민박집 주인내외의 풋풋한 정을 기억하며..>

 

다음 날 아침 창원마을을 둘러보고 금계마을을 지나 의탄다리를 건너 의중마을에서 샛길을 올라 서암

정사와 벽송사로 갔다.

가는 길에 만난 시누대길에서는 동물들의 은신처라는 팻말을 보고 갑자기 숨을 죽이고 걸었다. 숨을

죽이니 사방이 조용해지고 내 발소리만 크게 울렸다. 조심조심 걸어보니 돌을 밟는 것이 흙을 밟는 것

보다 소리가 훨씬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흙 위에 널려있는 갈비와 낙엽들이 밟히며 뽀독거리는 소리마저 가슴을 졸이게 하니... 숨을 죽이면 세

상이 달라진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너무 인위적인 서암정사를 스치듯 보고 우리는 벽송사로 갔다. 벽송사는 산문이 없고 큰 바윗돌에 벽

송사 산문이라 적혀있었다. 상징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주 특이하였는데 벽송사라는 이름에 걸맞는 멋

진 소나무가 대웅전 뒤 산자락에 서 있었다.

벽송사는 6.25 전쟁 당시 인민군의 야전병원으로 쓰였는데 국군이 야밤에 기습을 하여 많은 인민군 환

자가 죽었다 한다. 또한 주변에 빨찌산 비트가 여러곳 있고 빨찌산 토벌 루터가 이어지는 곳이기도 하

였다. 빨찌산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피처럼 붉은 단풍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면서 생각은 무상하게 변

했는데 그 또한 부질없음을 알려주는 서산대사의 시를 읽으며 느끼며 간직하며 우리들의 걷기는 마침

표를 찍었다.

계절의 향기가 소용돌이치는 칠선계곡 어귀에서 우리는 차를 타고 나와 인월로 왔다.

 

 

<숨 죽여 걸었던 시누대 길- 잠시 놀러나온 다람쥐에게 말없이 손만 흔들었다>

< 벽송과 창공을 뒤로 둔 아름다운 벽송사 대웅전과 달을 보는 간월대가 있다>

<마음을 비워내라고 말하는 서산대사님의 시-새기고 또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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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10.27 18:16

    첫댓글 안내문 없나요? 지난 토요일 KBS 다큐 3일 그마을은 아닌듯하고...

  • 작성자 09.10.28 08:51

    검색에서 지리산 둘레길을 쳐 보시면 자세한 구간과 마을들이 다 나온답니다.

  • 09.10.28 08:55

    이미 벌여 놓은 판이긴 합니다만,. 생명을 내세우는 실상사에서 벌인 판치고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시작의 의도는 좋았겠지만, 그 다음에 밀려들 아우성을 예측하지 못했을까요.. 이제 더 이상 판을 크게 벌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행인과 주민의 몫으로 남겨두고, 잘 마무리 되기를 기원합니다

  • 09.10.29 07:51

    가고파서 가슴에 담고 있었는데,,,걷기 힘들지 않던가요? 멋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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