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11월, 독일 정부는 중무장한 군함으로 중국 청도지역을 점령하고
이를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청도에 기간시설을 추진하기 시작
한다.
이후 1903년, 맥주를 즐기는 독일인들이 청도 내의 자국의 군인들과 교민
들을 위하여 건설한 맥주공장이 청도맥주의 시초가 된다.
독일 상인 란더만과 그의 동업자가 맥주 생산에 필요한 설비를 전량 독일에서
들여와 만든 시설은 중국에 지어진 최초의 맥주공장이다.
'르얼만맥주주식회사청도주식회사'라는 상호로 출발하게 된 청도맥주는
연간 2,000톤에 달하는 정통 독일 맥주를 생산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청도맥주를 바라보는 중국인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그 시절 중국인들에게 청도맥주는 침략자들이 생산해 낸 황색의 물에 지
나지 않았으며, 심지어 '말의 오줌' 이라는 핀잔으로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청도 맥주는 그 품질이 뛰어나, 1906년 처음 출전한 독일 뮌헨 맥주
박람회에서 금메달을 차기하게 된다.
이후, 독일은 1916년 9월, 1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청도에서 철수하게 된다.
일본의 지배시대...
독일의 지배체제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청도는 다시 일본의 지배체제하에
놓이게 된다. 청도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함과 동시에 청도 맥주의 운명도 뒤
바뀌게 되었다. 일보은 당시 형식적인 금액인 50만 은전에 청도맥주를 사들여
'대일본맥주주식회사청도공장' 이란 이름으로 개명한다. 이런 극심한 변화 속
에서도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것은, 일본인들이 당시 청도맥주의 설비와 양조
기술을 그대로 유지했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이후 1916년 12월, 맥주공장이 다시 가동되기 시작하는데, 이 시기의 청도 맥주
는 상표를 찰황, 태양, 복수(福壽), 기린 등으로 바꾸어 달게 되었으며, 이렇게
생산된 맥주는 교동반도에 주둔한 일본 군인들과 교민들에게 공급되었다.
일본인들은 이후 청도맥주의 제조방법을 변화시키고 각종 설비를 증축함으로써
맥주 생산능력을 연간 2,000톤에서 4,000톤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일본이이
경영하던 30년 가까운 이 시기가, 청도맥주 역사상 생산관리가 제일 혼란했던
시기로 전해진다.
이 시기의 청도맥주 공장인 '대일본맥주주식회사청도공장'에는 일본인 직원
15명, 일본인 노동자 7명, 그리고 중국인 노동자 64명이 있었는데, 그 당시 중
국인 노동자 중 한 명이었던 '곽가복' 씨는 "키가 작고 음험하게 생긴 일본인이
중국인 노동자들을 관리했는데, 3cm 굵기에 1m정도 되는 나무 막대기를
가지고 다니며 중국인 노동자의 일손이 조금이라도 느리면 사정없이 머리를
후려쳤다. 배불리 먹지 못하고 따뜻하게 입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정성을 다해
일하기란 불가능했다." 고 당시를 회상한다.
국민당정부 통치 시기...
1945년 10월, 제2차 세계대전에 패한 일본인들이 청도에서 물러가고 국민당
정부가 들어서며 청도맥주는 또 다시 '청도맥주공사'로 이름을 바꿔 달게 된다.
국민당이 통치하던 이 시기에는 각 기업들의 발전이 부진했고, 청도맥주의 생
산량도 떨어져 연간 약 2,000톤의 생산량을 보였다고 한다.
이후,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인민해방군에 밀려 청도에서 철수하면서 해상
으로 대량의 물자를 운반해 갔으나, 청도맥주 공장의 기계설비는 운반해
갈 수 없었으므로 무사할 수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949년 6월 2일, 중국인민해방군이 청도에 들어왔다. 그 날, 인민해방군 청
도시 군사관제위원회는 주임, 부주임의 직책을 만들고, 청도맥주 회사를 접
수, 관리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청도맥주는 정식으
로 '국영청도맥주공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재생간 체제에 돌입한다.
그러나, 당시 수립된 중국정부의 경제봉쇄정책으로 인해 맥주의 원료인 홉의
수입이 어려워지자, 이를 자급하기 위해 이듬해인 1950년, 이촌에 홉 생산기
지를 만들고 시험가동하게 된다.
결국, 1952년부터 이촌에 설립한 홉 생산기지에서 만들어진 홉으로 청도맥주는
정상적으로 맥주를 생산할 수 있게 된다.
이후, 1967년 이르러 홍콩과 기타 국제시장의 맥주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170
만 위안을 국가계획위원회와 국무원으로부터 대출, 기존의 연간 1.9만톤의
생산량을 2.6만톤으로 끌어올리게 되고, 이런 노력을 통해 더욱 많은 생산량
을 가지게 된 청도맥주는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중국 내 20여 곳의 내수 및
해외 수출을 시작하며, 바야흐로 중국 맥주업계에서 굴지의 제일기업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러나, 발전을 거듭하던 1978년 10월, 홍콩으로 수출한 청도맥주중 한 병
에서 세척용 솔의 일부분이 발견되고, 이는 당시 경제봉쇄시대에 몇 안되는
수출품중 하나였던 청도맥주의 이미지에 엄청난 타격을 입히는 일대 사건으
로 발전하였다. 이 사건 이후, 청도맥주는 매년 4월 10일을 '품질 향상 기념
일'로 정하고 현재까지 제품의 품질 향상 및 관리에 힘쓰게 된다.
이러한 갖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77년 여를 지나온 1979년에서야 청도맥주
는 중국정부로부터 정식으로 상표인증을 받게 된다. 1983년, 중화인민공화
국 상표법이 공포되면서 상표 이름에 도시의 이름을 사용할 수 없는 조항
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특혜를 느리게 된다.
이 후, '황제의 딸'로 불릴정도로 중국 계획경제의 보호 장치 안에서 안정적
인 발전과 크고 작은 영예를 거머쥐던 청도 맥주는, 급속도로 밀려드는 시장
경제의 원리에 따라 800여 곳의 공장을 가진 중국 산 후발 맥주 주자자들의
도전과, 50여개국의 해외 브랜드와 무한경쟁체제에 경쟁을 시작해야 하는
일대 위기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1996년 6월 24일, 리구이롱
사장과 펑쭤이 사장이 청도맥주의 부활을 위해 취임하게 되고, 각각 내부
관리와 시장 개척을 책임지게 되면서 청도맥주사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
게 된다.
약 2년여의 준비가 끝나고 1998년 5월, 이미 중국인들에게는 잘 알려진
청도맥주의 사업확장 전략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한다.
이 전략의 핵심은 맥주의 생산 및 판매시장형태를 상, 중, 하의 피라미드
형태로 나눈 것이다.
피라미드의 상부조직에는 업무의 기준이 되는 청도맥주 본사가 위치하고
지방의 각 맥주회사를 인수 및 관리해서 각 지역의 생산 및 판매의 기지가
되는 중부조직을 만들고, 이를 통해 각 지역의 시장 특성을 수집하고
직접 시장을 개척, 판매하는 하부조직을 가지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전략은 3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청도맥주가 전국
각지의 30여개 맥주기업을 인수 합병해서 생산 및 판매망을 확충하면서
기업규모를 확장해, 다시 업계 1위의 자리로 복귀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청도맥주가 서안 '한스맥주'를 인수해 되살린 사례는 이러한 기업확장
전략의 분위기를 설명하는데 좋은 예가 된다. 청도맥주가 처음 인수를
단행할 당시의 서안 한스맥주는 그 품질과 명성이 이미 바닥에 떨어져
공장에서는 매일 변질된 맥주를 하수도에 버리는 일이 예사일 정도로
극심한 매출부진에 허덕이는 회생불능의 상황이었다고 한다.
당시 청도맥주의 총재였던 진즈궈가 "서안 한스맥주 공장에서 새로 만든
맥주의 시장점유율을 조사하기 위해 매일 저녁 야시장, 호텔 등지를
돌며 조사를 하고 맥주병을 세는 것일 일이었다."라고 회상할 정도로
시장조사를 철저히 했고, 청도맥주 본사의 관리시스템과 기업문화를
현지 상황에 맞게 개선 및 적용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이런 노력의 결과, 인수 이듬해인 1997년에 서안 한스맥주는 기존의
손실을 만회하고 이익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2001년에는 서안 한스
맥주사가 산서성 위남맥주공장과 한중맥주공장을 인수하는 등 현재까
지도 청도맥주의 자회사로써의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형태의 기업확장 전략은 2000년 8월에 이르러 절정을 이르게
되었는데, 청도맥주회사는 8월 중 열흘 사이에 무려 3개의 외국자본
의 맥주기업을 인수하게 된다.
9일 상해의 칼스버그, 18일 북경의 오성맥주와 삼환맥주를 동시에
인수하게 됨으로써 청도맥주는 바야흐로 중국업체로써 외국맥주
업체와의 경쟁체제에 돌입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결국, 중국이 2001년 WTO에 가입하기 직전, 중국
업계 1위 청도맥주와 세계 제일의 기업 A-B사가 '배타적 협의'를
체결함으로써 결실을 맺게 된다.
두 회사는 2002년 10월에 정식으로 동맹합작 파트너가 되었고, 이
것은 청도맥주가 국제시장에 진출하는 초석이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청도맥주는 2002년 말까지 40여개의 맥주기업
을 소유하게 된다.
청도맥주의 확장과정에서 일어난 맥주전쟁은, 실제로 중국내의
맥주 소비시장에도 전에 없던 활기를 불어 넣었으며, 중국 내 맥주
총생산량이 20년 전에 비해 무려 47배나 증가하게 하는 실로 경
이적인 맥주 붐을 창조해 낸 것이며, 이 기록은 미국에 이러 세계
두번째라고 한다.
청도맥주의 현재와 미래...
'열정이 꿈을 이루게 한다'
명실상부하게 중국의 맥주문화를 이끌어 온 청도맥주사의 기업
이념이다.
초기의 경제봉쇄시대를 통해 세계와 격리를 꾀하던 중국은, 이제
2008년 중국 북경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세계를 포용하기 시작
하고, 중국 일류 기업 청도맥주사도 새로운 열정을 가지고 세계
와 함께 할 꿈을 키워가고 있다.
2005년 8월 11일, '북경올림픽 준비위원회'와 청도맥주주식유한공사'
가 스폰소 계약을 맺음으로써 청도맥주는 2008년 북경올림픽의
공식스폰서가 됐다.
아울러 청도맥주는 '중국테니스대회', '하문국제마라톤대회' 등
스포츠 대회와 CCTV경제채널의 '중국을 꿈꾼다' 등의 코너에
협찬을 하면서 중국의 열정에 불을 지피고 있다.
'3류 기업이 제품을 파고, 2류 기업은 브랜드를 팔지만, 1류 기업
은 문화를 판다'는 말이 있다.
올림픽을 개최하여 세계를 받아들이려는 중국정부와 함께하는
청도맥주의 경영철학과 기업활동은 분명 1류 기업을 향하며
세계화를 꿈꾸고 있다.
그러나 , 지난 100년간 청도맥주는 청도라는 지역과 함께
명예와 능욕의 역사를 함께 해 왔으며 이런 기업은 중국에서
그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첫댓글 우아...대단합니다^^ / 중국 전체로 봤을때는 청도맥주가 이제는 청도에서 나온것을 찾기 힘든 상황입니다..고건 좀 아쉽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