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18 티켓을 가지고 하는 여행, 저도 예전에 함 해볼까 했던 여행인데 무지 빡빡하군요. 주마간산격으로 휙 한바퀴 돌고 다시 찬찬히 여행을 시작하는 것도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다녀와서 뭐가 기억에 남을까 싶기도 하네요.
어쨌든 다양한 군상들이 넘 잼나서 퍼왔습니다. 자식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오신 78세 할아버지, 출장간다고 와이프를 속이고 온 저자(아마 40대 후반 일 듯), 철인3종선수, 방학 맞은 학생들 등등 전국 각지에서 모인 다양한 연령대의 인간들이 모여서 하는 여행 잼날 것 같기도 하고 실제로 가면 좀 짱날 것 같기도 하고....근데 페리로 가면 침대도 없이 그냥 바닥에서 함께 자는건가요?
교토의 금각사지, 2년전 여름에 갔을때도 가랑비가 내렸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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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배낭(1)-- 19 + 1인의 전사
.. .. 2002년 1월 10일 오후 3시, 부산 중앙동의 국제여객 터미널 2층 출국청사엔 각양각색의 배낭객들이 7박8일의 일본 배낭여행을 위해 궃은 날씨를 뒤로 하고 하나가 되기 위해 모여들고 있었다. 이름하여 "19인의 戰士".
자식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죽기 전 싼 가격(동경-요코하마-오사까-교오또-고구라;후쿠오카 7박8일 42만9천원)에 일본 구경을 하고 싶어 길라잡이 동행일을 손꼽아 기다리다 신청했다는 78세의 할아버지로부터 일본어학원에서 만나 의기투합해 일본 청소년 문화의 현장을 답사하려는 17세의 고교생에 이르기까지, 京鄕各地에서 하나가 된 우리의 배낭군단을 이끌 "길라잡이"는 퍽 서구적인 인상의 말쑥한 청년 미스터 권.
전문적인 여행사 가이드가 아니고 대학에서 일본학을 전공한 후, 1년간 일본 유학 경험이 있을 뿐이라며 1번째 길라잡이 임무에 여행객보다 더 초조해 하는 그의 순진한 눈매에서 웬지 이번 여행이 퍽 인간적 여정으로 이어질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부산에서 시모노세끼를 운항하는 "부관페리"호의 2등 객실 한 칸을 할당받은 우리 팀은 여장을 풀고 자신의 취침석을 확보한 후, 배의 출항시간에 맞춰 준비해 온 컵라면, 햇반 등으로 우선 저녁식사들을 해결했다. 선내에 비치된 급수대의 탕수로 끓여 먹는 컵라면의 맛은 약간의 출렁거림으로 다가오는 배여행의 낭만을 한껏 고조시키기에 족했다.
밤이 깊어갈수록 波高도 높아만 가는지 잠자리에 드러누운 육신들이 마치 시소를 탄 것 같은 한밤의 遊戱를 벌인다. 아무리 똑바로 누우려 안간힘을 다해도 풍랑에 따라 좌우로 요동을 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거대한 바다 한 가운데 놓여있는 나약한 인간의 존재를 각인시킬 뿐이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심야의 사투가 사그러들었다. 벌서 시모노세끼 외항에 도착했다. 여기서 3시간 가량을 기다렸다 이민국(세관) 직원들이 출근하면 상륙한단다.
"어젯밤에 화장실 갔다 오다 몇번이나 선실벽에 머리를 박았는지 몰라" 하며 심야의 악몽을 떠올리는 우리 팀 최연장자(78세 노인; 아마도 세계 배낭여행 최연장자로 기네스북에 오를 듯) 김 할아버지의 주름진 얼굴 위에 무사도착의 평온함이 배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치 피난민 수용소를 연상시키는 선내시설이 영 아니다 싶어, 물어 봤더니 역시나 日帝 때 운항하던 배란다. 그래서 한일 월드컵을 맞아 올 4월에 퇴역하고 신형으로 교체된다나--.
부산과 시모노세끼를 운항하는 배는 한국의 부관페리호와 일본의 하마유호 2척인데 일전에 일본의 하마유를 이용해 큐슈를 여행해 본적이 있다는 구미에서 온 고교생 말로는 일본 배 하마유의 시설이 훨씬 현대적이고 좋다며 부관페리의 낙후된 시설에 불만을 토로한다.
간단한 입국수속을 마치고 페리 터미널을 나서다 오른쪽으로 도니 곧 바로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가이꾜 유메'타워가 눈 앞에 들어온다. 타워를 배경으로 모두들 일본 첫 상륙기념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곤 시모노세끼역 7번 홈에서 고구라행 기차에 탑승, 해저터널(큐슈와혼슈 사이의 간몬해협을 연결하는)를 지나 14분 만에 기타큐슈 최대의 도시 고구라에 도착했다.
고구라역 北口쪽 코인락카에 배낭을 넣고(100엔 동전 3개;300엔) 오후 5시 30분까지 이곳으로 집결하자는 길라잡이의 통첩을 끝으로 모두들 뿔뿔이 흩어졌다. 출국전 직장 잔무관계로 (아니 그보단 일본 쯤이야 하는 가벼운 맘으로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단 말이 더 정확하다.) 제대로 현지 공부를 않고 배낭여행사에서 준 지도 등 자료와 서점에서 구입한 여행서적 만을 달랑 들고 미지의 땅에 도착한 난 일단 길라잡이의 뒷꽁무니를 따라잡을 수밖에------.
몇몇 사람(광주에서 온 40대부부, 구미와 청주,전주에서 온 고교생)을 제외한 거의 반에 가까운 학습부진아(일본여행예습)들이 고구라城으로 향하는 길라잡이를 따르고 있었다. 1975년 여름, 한국의 희망 유제두가 일본의 와지마 고이찌(輪島功一)를 K.O로 누르고 WBA 주니어 미들급 세계 챔피온으로 등극함으로써 우리에게 비로소 알려졌던 도시 '고구라(小倉)의 실체는 그렇게 서서히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일본배낭(2)--고구라(小倉)에서 시간 때우기
.. 고구라驛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에 고구라城이 자리하고 있었다. 일본을 여행하는 많은 이들의 뇌리에 가장 강한 인상으로 남아들 있는 일본건축의 백미- 일본의 古城, 그 중의 하나인 고구라城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사진에서 봐 오던 그 멋진 자태완 아무래도 좀 거리가 있는 듯---. 오사까성이나 나고야성 같은 이름있는 城이 아니라서 그런가? 하기야 코펜하겐의 인어공주상이나, 중국의 만리장성처럼 갖은 수식어가 붙은 현장일수록 가 보면 失笑를 금할 수밖에 없는 곳이 더 많은 법! 情緖의 나침반이 어디를 향하는 가에 따라 대상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구라성내를 한 바퀴 도는 중, 문득 안내판의 문구가 시야에 포착된다. 1월 30일 이곳 성의 書院에서 한국의 유시훈 棋士가 王立誠 碁聖에 도전해 대국을 벌인다는 안내문이다. 비록 그 시간에 난 이곳에 없겠지만 유기사의 선전을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고구라성 앞의 다리를 건너 현대적 쇼핑몰과 旦過市場이란 재래시장을 구경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흩어졌던 일행들과 조우, 다 함께 고구라 시내를 순환하는 모노레일을 탔다. 우리가 승차한 단과역에서 집결지인 고구라역까진 불과 2정류장, 그러나 고구라 시내를 구경하기 위해 일부러 반대쪽 홈에서 타고 한 바퀴를 둘러 가기로 했다.
모노레일을 타고 공중에 떠 시가를 훑어 보니, 보잘 것 없이 한적한 시골도시로 여겨지던 고구라(키타큐슈)의 상상을 초월한 전모가 백일하에 드러난다. 멋진 경마장에, 사통팔달로 뻗어 있는 도로망이며, 산 위에 계단식으로 지어진 일본 전통가옥의 운치며 모든 것이 도보로 돌아 본 고구라의 초라한 첫 인상을 상쇄시키고도 남는 듯하다. 한 바퀴를 되돌아 고구라역에 닿았다. 아직 집결시간(pm 5:30)까진 시간이 1시간여 남았다.
일행들이 고구라역 北口 코인락카 앞에서 기다리는 동안, 난 근처 쇼핑가를 한 바퀴 돌아 보기로 했다. 구주의 한 소도시에 불과한 고구라역 청사와 구름다리로 연결된 사방의 대형쇼핑가, 컨벤션센터, 무역전시관 등의 시설은 경제대국 일본의 위용을 과시하기에 족했다. 1시간여 周遊를 거쳐, 역청사로 돌아오는 길목에 석양을 등지고 늘어선 자동차 행렬의 섬광이 일본에서 맞는 첫 밤의 감회를 설레게 한다.
저녁 8시에 출발하는 오사까행 명문대양 훼리를 타기 위해 고구라역 북구 쪽 무료 셔틀버스 (출발지인 신모지항까지 운행하는)승강장에서 줄을 서 기다렸다. 그런데 얼핏 보니 가다가나로 항큐훼리라 적혀 있다. 뭔가 꺼림칙했지만 명문대양 훼리와 항큐 훼리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승강장이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잠시 후 도착한 버스는 우리의 맞은 편 승강장에 도착해 손님들을 승차시키고 있지 않는가? 우리를 보고 따라서 줄을 섰던 많은 이들이 후다닥 달음질쳐서 그쪽으로 뛰어가길래 우리도 황급히 그쪽으로-----, 그리곤 버스에 가려 보이지 않던 명문대양 훼리 승강장이란 가다가나 표지판을 보고서야 啞然失色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지껏 엉뚱한 곳에 줄을 섰으니 당연히 대부분의 우리 일행은 콩나물 시루 같은 버스 안에 서서 신모지(新門司)항까지 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순진한 길라잡이는 뒷통수를 긁고선 "전 東京밖에 잘 몰라요. 이곳은 제 전공이 아니라니까요?"하며 능청을 떤다. 25분 가량을 만원버스에서 고생하다 선착장에 닿았다.
곧장 승선수속을 마치고 정해진 우리의 2등선실에 찾아 들었다. 어제 이용했던 한국선적의 부관훼리를 훨씬 상회하는 선내시설이 일단 여행자의 마음을 푸근하게 안정시킨다. 우선 선내 전망욕실로 뛰어가 목욕부터 했다. 창밖으로 항만을 바라보며 선내에서 하는 목욕---, 욕조의 뜨거운 물이 여독을 말끔이 풀어준다. 근데 옷보관함 이용에 100엔 동전이 웬 말인가? 욕실 무료제공이라면서-----.
배안엔 카페와 휴게실, 각종 자판기 등 편의시설이 완벽했다. 220엔 짜리 아사히 캔맥주로 갈증을 풀고 난 뒤, 내일의 여정에 대비해 오사카 시내지도와 여행서적을 펴들고 "벼락치기 공부"에 들어갔으나 농땡이 학생의 뇌리엔 잡상념만 가득할 뿐 정리가 잘 되지 않는다. 어쨌든 내일은 기필코 혼자 만의 자유여정을 가지리라.
오사까성, 天王寺(덴노지) 부근, 도톰부리, 신시이바시, 혼마찌 등 대충의 루트를 짜고선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 2시경 일본에서도 해상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세도나이가이 해상국립공원을 통과한다지만 그때까지 기다리다 밤잠을 설치면 다음날 관광에 지장이 많을 것 같았다.
그러나 웬걸, 잠자리에 들었으나 광주에서 부인과 함께 온 40대 아저씨의 무지막지한 미사일 포와 청주 가족 중 둘째 대학생아들의 중형 발칸포가 박자를 맞춰 가며 조용한 선실을 뒤흔드는 통에 종시 잠을 이룰 수 없다. "다음부턴 기필코 저들이 자기 전에 잠드리라!" 다짐 또 다짐하고 있는데, 옆자리에 자던 부산 청년(철인 3종경기 선수) 張某가 짜증을 내며 벌떡 일어나더니 밖으로 나갔다 다시 들어온다.
잠시 후, 부시럭거리는 소리에 그를 쳐다보니 이왕 자기는 틀린 것, 배나 채워보자는 속셈인지 어두컴컴한 선실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먹고 있다. 이를 킥킥거리며 보고 있는 또 한 무리의 여인네들(서울서 온 초중학교 동기라는 인품과 체력이 넉넉했던 두 아가씨)까지 오사까로 향하는 명문 대양 훼리의 2등 선실 속에는 "미사일과 발칸포 세례에 잠 못이루는 외로운 영혼"들의 눈물겨운 밤의 투쟁이 세도나이가이의 비경 속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일본배낭(3)- 배설의 희열과 양심의 가책이 함께 한 오사까
.. 1월 12일 아침 7시,오사까 남항에 도착했다. 8시 30분, 훼리터미널 역에서 310엔에 오사까 중심부의 梅田(우메다)역까지 가는 지하철 티켓을 끊었다. 웨리터미널역에서 모노레일(뉴 트램)을 타고 그 종점인 스미노에고엔(住之江公園)역까지 와서 지하철 요쯔바시센으로 환승한 후, 다이고구쪼역에서 다시 미도스지센으로 환승, 마침내 우메다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메다역 지하도를 통해 바로 연결되는 오사까역으로 이동, 中央口 부근의 코인락카에 각자 짐을 넣은 후, 저녁 6시까지 이 장소에서 모이기로 하고 헤어졌다.
어젯밤 흔들리는 배에서 벼락치기 공부한 내용을 되새기며 오늘 하루 오사까 시내를 휘젓고 다닐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두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오사까성으로 향하기 위해 다시 우메다역으로 급히 걸어가는데 누군가 날 부른다. 78세의 김노인이 애처로운 얼굴로 "날 좀 데려가" SOS를 친다. 가히 난감해진다.
집의 부친 뻘되는 연세의 어른을 외지에서 잘 모셔야 함은 君子之道이겠으나, 어제 종일 고구라에서 빈둥거리느라 일본배낭여행의 진수를 맛보지 못한 터라, 오늘은 일본 제2의 도시 오사까를 최대한의 기동력으로 살피렸더니-----?
때 마침 대부분의 우리 일행이 첫 목적지로 오사까성을 잡은 터라, 자연스럽게 합류가 되어 미사일포 광주 아저씨를 선두로 걸어 가기로 했다. 오사까역 출구를 빠져나와 잠시 방향감각들을 잃고 헤매는 순간, 연이틀 아침을 컵라면으로 때웠더니, 슬슬 아랫배에서 심상찮은 신호가 온다. 몇 걸음 옮기는데 도저히 더 못 참을 것 같다. 때 마침 우메다역으로 향하는 지하도 표시판이 눈에 들어온다. 우선 살고 보자 싶은 마음에 일행에서 잽싸게 빠져나와 우메다역 지하도의 화장실을 찾아들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밀폐된 공간에서의 배설의 희열! 경험해 본 사람들은 다 알거다!
이번 배낭여행 중 가장 짜릿하고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속담은 "배낭여행도 배설후"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거의 10여 분 이상을 소모하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이제 다시 지상의 그 자리로 가는데 5분 여 이상이 소요될 터고---, 고민 끝에 홀로 지하철을 이용해 오사까성으로 가기로 했다. 이미 일행이 그 자리에 없을 것이란 이유로 자위하려 했지만, 실상은 김노인을 교묘히 따돌렸다는 양심의 가책을 못내 지울 수 없었다.
지하철을 1번 환승 후, 손 쉽게 오사까성을 찾았다. 500엔을 내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천수각 위에까지 직접 올라갔다. 천수각 5~6층부터는 성의 내력을 홀로그래픽,사진 등의 각종 자료들을 통해 치밀하게 설명해 놓았다. 일본인들의 자기문화에 대한 애착을 실감했다.
고구라성보다는 역시 작품임엔 틀림없지만 그래도 사진보단 못한 것 같다. 천수각을 나서면서 매표소관리인에게 부탁해 한글로 된 팜플렛 1장을 얻었다.
오사까성 근처의 역사박물관과 NHK 오사까 지국을 대충 눈으로 찍고 다시 지하철을 이용, 덴노지(天王寺)로 향했다. 오사까 지하철의 1회 평균 운임은 대략 230엔 선, 동경의 평균 160엔 선에 비해 비싼 편이다.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850엔 짜리 1일 패스를 끊는게 더 나을 뻔했다. 그러나 그 때 당시야 지하철을 3번 이상 더 탈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일본식 정원의 독특한 향취를 풍기는 덴노지 공원과 성덕태자 유물 특별전을 열고 있는 덴노지 박물관을 빙 돌아 덴노지 동물원으로 향했다. 그 도중에 일본 만의 독특한 풍류를 접할 수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200엔 짜리 路上 가라오케!
주로 황혼을 지난 노인들이 길가의 행인들을 청중으로, 알 듯 모를 듯한 그네들의 인생유전을 구슬픈 엔가 곡조에 실어 영혼어린 열창들을 해대고 있었다. 노래가사가 흐르는 모니터를 등 뒤로 하고 우수에 젖은 감은 눈을 길가의 청중들에게 돌리며 자신의 인생을 노래로 엮어내는 듯한 애절한 멜로디가 덴노지 공원 모퉁이를 도는 내 귓전에 비수처럼 꽂혀 왔다. 순간 다시 한 번 자신을 데려가 달라며 애절하게 호소하던 김노인의 슬픈 눈망울이 내 구멍난 양심 속에 오버랩되었다. 최인호의 [돌의 초상]이나 안정효의 [솜바지]에 나오는 "아버지를 버린 자식"이 된 기분이었다.
덴노지 동물원의 입장료는 500엔, 동물원은 남원과 북원으로 나눠져 있는데 포유류,파충류,맹금류, 야행성동물에 이르기까지 실로 놀랍도록 다양한 동물들을 완벽한 관리체계 속에 수용하고 있었다. 눈에 띄는 것은 가족 단위의 소풍객과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혼자 나선 젊은 엄마들이 상당 수였다는 건데, 요즘 일본에서 사회문제화되는 미혼모 붐과 무슨 연관이 있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근데 여기서 난 뉴질랜드까지 가서도 못 보고 온 키위(주둥이가 뾰족하고 털이 북실한 뉴질랜드의 천연기념물 새)를 야행성 동물관에서 볼 수 있었다. 덴노지동물원! 정말 대단한 곳이다. 400엔 짜리 우동과 200엔 짜리 김말이밥으로 점심을 때우고 본격적 오사까 시내 주유에 나섰다.
미도스지센 난바역에서 하차한 후, 도톰부리, 신시이바시, 혼마치 등을 거슬러 오르면서 거대도시 오사까의 심장부를 관통했다. 시가를 흐르는 운하와 대형 쇼핑센터, 주말이라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의 행렬, 모든 것이 어제의 고구라와 비교되었다. 일본의 명물 금룡라면이 600엔이다! 이미 점심을 먹은 지라 시식할 기회를 놓쳤다. 쇼니 타워의 쇼룸에 앉아 신시이바시와 도툼부리의 경계를 이루는 觀賞流水의 장관을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4층의 쇼룸에선 "미이라2"가 대형 HD TV로 재생되고 있다.
다시 지하철로 우메다역까지 온 후, 무료전망대로 유명한 항큐 우메다32(항큐 그랜드)빌딩을 물어 물어 찾았다. 32층의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오사까역 주변의 스케일은 그야말로 장대무비! 그것이다. 대충 오사까의 지형이 뇌리에 잡힌다. 우메다 지하 음식상가에서 샌드위치(380엔)로 저녁을 해결하고 생수병에 바닥난 물을 보충했다. 생각난 김에 내일 아침거리로 같은 샌드위치를 하나 더 샀다. 이제 집결지인 오사까역으로 슬슬 가 볼 시간이다.
마침 주말 저녁이라 오사까의 최고 번화가인 오사까역(한큐,한신 대형백화점과 각종 유통시설, 호텔, 사철역 등이 밀집한) 주변은 개미새끼처럼 많은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5분 거리의 오사까역으로 오는데 이건 완전히 2002년판 "흥남철수작전"이다. 내가 걸어간다기보다 인파에 떠밀려 오사까역으로 떠밀려 오고 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듯--. 다행히 제대로 떠밀려 왔길래 망정이지 인파에 휩쓸려 엉뚱한 곳으로 갔으면 나의 일본 배낭여행은 이날로 종칠 뻔했다.
오사까역 중앙구 코인락커 앞엔 벌써 많은 일행들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게 내게 손을 흔드는 김노인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덕분에 오늘 김노인을 모시고 다닌 청주가족(50대부부와 두 대학생 아들)의 가장어른 (지리선생님?)께서 "오늘 우린 오사까성만 다녀 왔어요"하는 체념조의 어투가 못내 가슴에 저려온다. 길라잡이 말이 오늘 비행기 편으로 도착한 또 다른 배낭 팀 20명이 이후부터 합류할 거란다. 이젠 40명의 배낭족이 밤 기차를 타고 東京을 향해 야간진군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역무원으로부터 "청춘18"티켓에 검인을 받으며 개찰구로 들어와 우선 6시 54분발 오가끼행 기차를 8번 홈에서 승차했다. 이제 2시간 여의 여정 후 오가끼역에 도착할 것이다. 거기서 1시간 30분여를 기다리다 11시 9분발 동경행 야간열차 '문라이트 나가라'에 탑승해야 한다. 고된 역정이 시작된 것이다. 오가끼를 향해 동진하는 차창 밖에 비친 일본열도의 겨울달이 고즈넉이 가슴을 파고든다
일본배낭(4)- 휘청거리는 오후(동경1일째)
.. 오가끼(大垣)로 가는 밤의 기차에서 서울에서 온 두 늙은(?)아가씨와 좌석 동거(?)를 한 관계로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당당한 풍채 만큼이나 넉넉한 마음을 가졌던 수영강사 지연씨, 곧 인형매니아 카페를 오픈할거라는 해맑은 웃음의 메이컵 아티스트 경숙씨, 둘은 초중학교 동기였다.(서로가 상대방을 성질이 지랄이라며 농을 해대는 품이 두 사람의 진한 우정을 넘겨 짚기에 족했다.) 하기사 그들도 이미 어린 나이가 아니긴 했지만 남을 배려하고 웃어른을 생각하는 마음이 그들보다 실없이 나이만 먹은 날 많이 부끄럽게 했다.
저녁에 오사까역에서 비행기팀 20명이 합류하는 바람에 졸지에 20명 병력의 구대장에서 40명 병력의 소대장으로 지위가 격상한 우리의 순진한 길라잡이 미스터 권이 허둥대는 것을 보고 자상한 누님처럼 다둑거려 주던 그녀들을 옆에서 지켜 보면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일본의 달이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다.
오가끼에서 이름 한번 거창한 "문라이트(moonlight) 나가라" 야간열차로 환승했다. 이제부턴 지정석에 앉아서 갈 수 있다. 그래야 야간취침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박과는 달리 의자에 앉아서 자야 되니 완전 취침이 되긴 글렀다. 게다가 밤새 서는 숱한 역에서 손님이 승하차하느라 계속 불을 켜고 운행하니 이건 완전히 고문 중에 상고문이다. 목욕에다, 맥주에다 컵라면 식사까지 가능했던 2일간의 선박여행이 꿈처럼 그립다. 단 한 순간도 눈을 부치지 못하고 새벽 4:47 동경역에 도착했다.
비몽사몽간에 길라잡이를 따라 숙소인 '가야바쵸 펄' 호텔에 도착, 일단 짐을 맡기고 저녁에 각자 개별 체크인하기로 하고 다시 해산했다. 문라이트인지 문둥이 나이트인지 밤기차의 고문에 시달린데다 동경 예습을 전혀 못했던 터라 "동경이 전공"이라는 길라잡이를 믿어 보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그런데 아뿔싸! 그를 따르는 신도 수가 엄청나다. 어젯 밤에 새로 합류한 비행기 팀의 낙동강 오리알 부대(어린애들과 아줌마)와 우리 팀의 김 노인과 연과 숙 두 언니, 전주에서 온 헤비급 고교생, 그리고 나까지-----, 이건 완전히 깡통들만 하나씩 걸치면 "거지왕 김춘삼과 그의 일행들"이다.
근데 우리의 순진하고 불쌍한 길라잡이는 지가 김춘삼인지도 모르고 의기양양 앞장을 선다. 근교의 편의점에서 컵라면, 빵 등을 골라 새벽의 여명에서 깨어나기 시작하는 동경 한복판의 아스팔트 보도에 죽치고 앉아, 일순 한국에서 온 거지들의 합동 아침식사가 진행되고 있는 광경을 또 한 명의 거지인 내가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 지하철을 이용, 동경역으로 이동, "청춘18"이란 막강한 비밀병기를 가진 우리는 JR 山手線(야마노떼)을 무한정 자유이용해 신주꾸역,신오꾸보역을 거쳐 하루주꾸까지 왔다. 도심 한복판 신주꾸의 아침 신작로에 새까만 까마귀들이 괴성을 질러가며 비행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내가 일본에 와 있음을 실감케 한다. 신오꾸보역사의 한 귀퉁이에선 작년 1월26일 일본인 취객을 구하려다 꽃다운 젊음을 바친 우리의 유학생 이수현 씨의 고혼이 살아 보이는 듯했다.
역사를 빠져 나오면서 驛舍 벽에 질서정연히 붙어있는 상자아파트(라면박스 등으로 지은 일본거지들의 거처)를 보면서 이 속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과 경제대국 일본의 허상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보다 조금 고급거지들은 메이지 신궁과 요요기 경기장 근처에 보다 고급주택(텐트형?)을 갖고 있었다. 근 10년간 이어지고 있는 일본의 경제불황을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하라주쿠역은 驛舍부터가 일본식의 독특한 운치를 풍기게 하더니 역사 건너편에서 시작되는 다께시다 도리를 비롯한 온갖 가게의 분위기가, 일본 젊은이들의 멋과 패션의 경연장이다. 아오야마 거리의 각종 캐릭터샵과 패션샵, 펜시점 등을 거쳐 메이지 신궁, 요요기 공원 등을 周遊하는데, 모두들 大長征에 그로기 상태다. 특히나 78세의 김노인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비틀거리신다. 그야말로 "휘청거리는 오후"다.
미스터 권이 할아버지와 그 중 가장 꼬맹이 초등학생을 데리고 호텔로 먼저 가겠다며 "나머지 분들 모시고 아끼하바라(秋葉原)까지 알아서 가실 수 있으시겠죠?"한다. 그러면서 "전
동경 중에서도 하라주쿠(原宿) 전공이라니까요?" 예의 그 순진한 농간을 또 부린다.
전혀 의사와 상관 없이 임시 길라잡이가 됐는데, 나 자신도 지도 보고 첨 가는 길, 신병 거지들까지 데리고 가야 하니 그야말로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다. 다행히 JR 야마노떼를 이용해 쉽게 아끼하바라에 도착할 수 있었다. 驛舍 바로 앞이 電子商街라 바로 구경과 쇼핑에 돌입, 전주 고교생과 같이 올림프스 카메라를 1대 씩 구입했다. (가격은 2만 8천엔! 어설픈 일본어 '좃도 마께떼 구다사이'를 구사해 2만9천500엔 짜리를 조금 깍았다. 미스터 권과 헤어지기 직전 즉흥적으로 배운 한 마디를 유효적절히 써 먹은 셈이다. 그런데 일본어에선 '좃도'란 말이 여러모로 유용되어 그 뉴앙스가 자못 의미심장한 우리를 당혹케 한다.)
다시 지하철 히비야센으로 이동, 손쉽게 호텔로 복귀하여 배정된 방에서 목욕을 한 후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어른 말을 듣지 않고 부득 부득 요금을 아낀다며(실상은 요금도 같았다.) 직통노선(히비야센)을 버리고 JR과 마루노우지센, 히비야센을 혼성사용하겠다던 우리의 두 언니 연과 숙의 거지 일행(?)들은 종시 호텔에 도착한 기미가 없다. 이튿날 아침 호텔 로비에서 만났더니 동경역에서 길을 잃어 헤매다 1시간이나 걸려서 돌아왔다며 "의기양양"한 내게 "깨깽깨깽" 항복신호를 보내왔다. 그 얼마나 귀여운 우리의 누이인가!
목욕 후, 잠시 눈을 붙였다. 그러나 배낭여행 중, 유일하게 호텔에서 지내는 이 밤, 그래서 도시 그것도 동경의 야경을 볼 수 있는 千載一遇의 기회를 침대에서 뒹굴며 허비할 순 없었다. 동경지도 1장을 달랑 들고 지하철 역으로 달려갔다. 일단 히비야센을 타고 은좌로 갔다.
은좌역에서 바로 연결된 미쓰꼬시 백화점의 지하식품부에선 폐점시간을 앞두고 "떨이 세일"이 한창이었다. 100엔 짜리 모찌 몇 개를 80엔에 사서 입에 넣고 씹으면서 지상으로 나와 은좌의 화려한 밤거리를 거닐었다. 네온사인 찬란한 은좌의 야경을 보면서 1930년대 일본의 유명한 풍속작가 다께다 린따로우(武田隣太郞)의 [銀座八町]의 한 장면이 뇌리에 오버랩되었다. 다께다가 묘사했던 은좌의 뒷골목 술집 앞에는 30년대보다 훨씬 화려하고 세련된 복장의 여인들이 종이판을 쳐든 "삐끼"와 함께 양복쟁이 행인들을 호객하고 있었다.
다시 마루노우지센을 타고 신주꾸역에서 내려 동경도청을 찾아 갔다. 공짜 전망대에서 동경의 야경을 조망하고픈 나그네의 야망이 지하철 역에서 동경도청까지 이어진 안내판을 따라 일순에 도청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막상 도청 앞에 이르니 사방은 컴컴하고 도대체 전망대 입구가 어느 쪽인지 막막하기만 하다. 때 마침 밤 산책을 나왔던 젊은 부부 가족에게 SOS를 쳤다. 英語에 부담을 느낀 그들이 어려워하면서도 도움을 베푸려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어렵게 의사소통이 되어 무난히 북쪽 전망대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었다. 가던 길을 접어두고 친절하게 전망대 엘리베이터까지 동행해 주는 그들의 몸에 배인 친절에 다시 한 번 소름 끼치는 일본의 저력을 느낄 수 있었다.
동경도청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동경의 야경은 그야말로 고혹적이었다. 오색찬연한 밤의 조명이 각종 건축물의 기하학적 구도를 가히 환상적으로 채색하고 있었고 그 분위기에 이성을 잃은 일본의 청춘들이 연인들의 몸을 공개장소에서 마구잡이로 더듬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신기하게 쳐다보는 사람은 나 혼자뿐, 다들 무관심하다. 마누라와 결혼 전 데이트할 때 공개된 장소에서 손목 한 번 제대로 못 잡았던 난, 동경도청 전망대에서 데이트하지 않은 걸 뒤늦게 후회하고 있었다. 전망대 식당에서 400엔 짜리 "파니니"로 뒤늦은 저녁식사를 하면서도 내 눈은 찬란한 동경의 야경보다는, 자꾸만 아까부터 열렬히 연인의 가슴을 애무하는 3시 방향의 노랑머리 청년의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일본배낭(5); 부루라이트 요코하마!(동경2일째+요코하마)
.. 오랜만에 숙면을 취했다. 흔들림 없는 지상에서 등판대기 대고 잔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건지 비로소 깨달았다. 배낭여행은 이래 저래 끝 없는 교훈을 준다. 원래 열이 많은 체질인지라 유까다(일본식 가운)마저 홀라당 벗어 던지고 그야말로 수면 삼매경에 빠졌더니 얼마나 개운한지----? 그런데다 아침은 이번 여행 중 유일하게 제공되는 호텔 조식! 생각보다 얼마나 푸짐한지 걸신 들린 거지 마냥 되는대로 어거적 어거적 집어 넣고 나니 속이 꽉 찬 기분이다. 그리고 눈치봐서 빈 생수병에다 얼음물도 가득 보충하고 나니 이제 千軍萬馬를 얻은 듯한 기분! 게다가 아침 전, 객실에서 오늘의 일정에 대한 예습까지 대충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어제 동경시내를 무리하게 쏘다녔더니 발바닥이 부르텄다. 국내출장을 가장하기 위해 다들 운동화로 무장한 배낭족 가운데 나 혼자만 구두를 신고 왔더니 영 후유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어제 동행했던 85Kg의 전주 고교생 녀석도 발에 여기저기 물집이 심해 여간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았었다. 자식 키우는 입장에서 여사로 보이지 않는다.(녀석 말을 들으니 자기 아빠가 나보다 3살이나 아래다. 그런데도 아빠는 자기 친구 애들은 대학 다니는데 나는 애가 늦다고 한다길래, 너희 아빠보다 3살이나 맣은 나는 이제 애가 중학생이라고 아빠께 전하랬다.) 비상용으로 가지고 온 대일밴드를 거의 녀석에게 주고 난 2장 만 발바닥에 발랐다. 기분이 그런지 한결 걷기가 나았었다. 녀석도 아저씨 덕분에 훨씬 걷기가 좋다고 했었다.
밤 11시 요코하마역 東口에서 만나자는 길라잡이의 통보를 끝으로 우리의 "거지사단"은 또 다시 정처없는 동경유랑의 길에 접어들었다. 어제 물집이 나도록 무리하게 걸었으니 오늘은 어디서 푹 쉬다 오후 늦게 요코하마에서 그 소문난 夜景을 즐기리라 맘 먹고 프론트에서 일본 젊은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데이트 장소이자 해상유원지인 "오다이바"(お台場) 가는 길을 미리 알아 두었으니 마음 든든하기 그지 없다. 길라잡이가 "오다이바가 끝내줘요! 저도 애인에게 거기서 프로포즈할 거예요" 하길래 "어떻게 가는데?" 했더니 "저도 아직 안 가봐서 잘 몰라요! 전 하라주쿠 전공이라니까요?"하며 예의 그 귀여운 미소로 응대한다. 하여간 평생에 도움이 안 되는 길라잡이다! 그러나 순진한 童顔의 그가 한 없이 사랑스럽기만 하니 내 참! 인연이란 뭔지-------? 동경 지하철과 전철 노선망엔 "오다이바"가는 길이 나타나지 않는다. 프론트에 알아봤더니 신설된 私鐵의 모노레일을 이용해야 한다며 새로 제작된 노선도를 보여준다.
"오다이바"야 게 있거라! 내가 간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기만 하다. 막 지하철 계단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데, 뒤에서 "아저씨! 오늘 저 아저씨하고 같이 다니면 안 될까요?" 전주 고교생 녀석이다. "너 이제 발은 다 나았냐?" "예 어젯밤 호텔물에 발 담그고 목욕했더니 부기가 싹 빠졌어요. 보여 드릴까요?" 하며 냄새나는 발을 내 코 앞에 들이밀 기세다! "애구구! 알았다. 알았어, 같이 가자, 같이 가!" 요즈음 애들같지 않게 심덕은 좋은 녀석이다. 덕분에 지나가는 일본인들 붙잡고 사진 한 판 박아달라고 구걸하지 않아도 될거고 외롭지 않아서 나도 밑질건 없다.
지하철을 1번 환승 후, 신바시(新橋)역에서 私鐵 모노레일 역으로 이동, 레인보우 브릿지를 건너 오다이바 해상공원으로 향하는 모노레일을 탔다. 요금이 장난이 아니다. 편도 360엔.
그러나 오다이바로 가는 도중, 공중에 떠서 보는 동경의 임해 부도심권은 색다른 멋이 있다. 이윽고 레인보우 브릿지가 보인다. 가히 환상적이다. 밤에 와서 봤으면 정말 매혹적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인보우 브릿지의 야경을 보면서 프로포즈하고 싶다는 일본 젊은이들의 소원이 이해되었다. 그러나 갈매기 한 마리 없는 대낮의 "오다이바 해상공원"은 무료하기 이를 데 없다. 후지 TV사옥을 밖에서 대충 훑고 세가에서 운영하는 조이플러스에 들렀다. 입장료는 500엔, 녀석은 게임 한 판만 하고 가지며 빈 자리에 앉더니 정신이 없다. 담에 아들녀석과 같이 오게 되면 데리고 올 곳이 한 군데 더 생긴 셈이다.
대충 오다이바를 마무리하고 다시 신바시역으로 돌아와 요코하마행 전철표를 자동발매기에서 끊었다. 그런데 우리의 목적지는 요코하마 다음 역인 "사구라기죠", 요코하마에서 내려 환승해야 한다는 역무원의 친절한 설명이다. 신바시에서 사구라기죠까진 450엔. 일본의 기차는 보통이나 쾌속이나 값이 똑 같다. 우린 당연히 먼저 온 쾌속을 이용, 요코하마에서 내려 환승, 사구라기죠역에 무난히 내릴 수 있었다. 역사를 나와 곧장 "미나도미라이21" 인포메이션센터에서 한국어로 된 요코하마 지도와 미나도 미라이 21 지구의 안내문을 받아들었다.
일본에서 동경도청전망대를 제치고 이제 가장 높은 건물이 되었다는 "랜드마크타워"의 고층 전망대가 입장료 1000엔의 고상한 오만을 부리며 우리 앞에 버티고 섰다. "너 말고도 무료전망대 어디 없을까 보냐!" 우리는 도도히 그 앞을 지나쳤다. 랜드마크타워 건물로부터 퀸스트리트 쇼핑센터를 거쳐 국제 컨벤션센터에이르기까지 9개의 복합건물이 연이어 연결된 세계최대의 쇼핑몰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미나도미라이21"지구의 쇼핑촌은 그 규모도 엄청났을 뿐 아니라, 시드니의 다링하버와 런던의 타워브릿지를 모방한 듯한 해안의 조경은 야마시다공원을 왕복하는 조명찬란한 유람선 및 베이 브릿지의 고혹적 자태와 더불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일본 대중가요 "블루라이트 요코하마"의 황홀한 멜로디와 가사의 배경이 되기에 족했다. 2002 월드컵 결승전 개최도시 요코하마의 매력이 강한 견인력으로 다가왔다.
요코하마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 차이나타운과 모도마찌의 낭만을 즐기기 위해 다시 이시가와죠 역에서 내렸다. 간나이역을 지나면서 차창밖으로 일본 프로야구"요코하마베이스타스"의 홈구장이 보였다. 아름다운 항구도시의 해변에 그림처럼 자리한 "베이스타스" 구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野球狂인 나의 瞳孔은 벅찬 감회를 주체키 힘든가 보다. 이미 시야를 벗어난 차창 밖 왼 쪽으로 자꾸 시선이 간다. 차이나 타운은 朱雀門을 비롯한 9개의 형형색색의 대문이 밤의 雲霧 속에서 행인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관우를 모시는 關帝廟가 일본의 한복판에 버젓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여기저기 식당을 전전하다, 마침 친절히 "이락샤이마세" 꾀꼬리처럼 호객하는 아줌마의 목소리가 예쁜 딤섬 집에 들어갔다. 동전만한 딤섬이 4개에 380엔, 그래도 개 중엔 가장 싼 집이다. 거구인 전주 고교생 녀석 눈치를 보니 이 걸 먹고 어떻게 이 夜한 밤을 견딜까 하는 양이다. 허나 저나 나나 아직 半밖에 안 치른 일본 여정, 벌써 탄환 다 떨어지면 몰골도 이런데 정말 상자 아파트 신세를 져야 할지도 모른다. 1분이면 끝날 식사를 두 남정네가 일부러 느릿느릿, 만만디---, 딤섬 하나 먹고 물 한잔 마시고--- 또 생수병에 물 보충하고-----,우리의 쉬어가려는 지연작전에 두 말 않고 먼 발치에 앉아서 졸다가 물이 떨어졌다 싶으면 조르르 달려와 물병을 채워주는 여급 아가씨의 친절이 찡하니 가슴에 와 닿는다.
요코하마의 정겨움이 물씬 풍기는 모또마치의 상점가를 지나 베이브릿지의 야경이 죽인다는 "미나도도미에루오까고엔"(항구가 보이는 공원)에 올라 야경보다는 또 다시 한 치의 틈도 없이 밀착한 청춘남녀의 포옹장면을 수도 없이 목격해야 했다. 근데 오늘이 무슨 날인지 기모노 차림의 젊은 여성이 눈에 많이 띈다 싶었더니 바로 오늘이 일본의 공식 공휴일인 "성인의 날"이란다. 그래서 월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쇼핑가가 일찍부터 붐볐나 보다! 베이브릿지가 보이는 공원을 뒤로, 한국 총영사관과 가나자와문학기념관을 돌아 프랑스산 언덕을 내려 오며 보는 요코하마 주택가의 깔끔한 뒷골목이 퍽 인상적이다.
또 다시 발바닥이 아파온다. 기차시간까지 공짜로 죽치고 있을 만한 데를 훑어보니 국제페리 여객터미널 대합실이 생각났다. 거기다 3층은 무료 전망대다. 녀석을 독려해 거기까지 가기로 했다. 가는 도중, 한 가게에 군중이 웅성댄다. 요코하마 베이를 배경으로 TBS 드라마를 찍는 모양이다. 안전요원들이 통행을 통제하는데 크레인 카메라 불빛 아래 바바리코트 차림의 어여쁜 여자 탈렌트 모습을 보려고 추운 날씨에도 구경꾼들이 제법 몰려 있다.
한참을 걸어 페리 터미널에 도착했다. 여기서 태평양을 가로질러 샌프란시스코나 하와이까지 가는 크루즈가 발착하는 곳이다. 밤 8시가 지나 이 시간에 운행하는 배가 있을 리 없으니 자연히 대기손님도 없을텐데 터미널 안은 뜨근한 난방과 함께 불까지 환하게 켜져 있다. 게다가 3층 전망대에 오르니, 左靑龍 右白虎런가? 좌측으론 미나도미라이21 위락지구의 화려한 불빛이, 우측으론 베이브릿지의 깜박이는 탐조등이, 그리고 바로 앞엔 아침 항해를 앞둔 거대한 여객선의 금빛 실루엣이 들어찬다. 가히 그림같은 요코하마의 밤 전경이 다시 한 번 나그네의 여심을 사로잡는다. 진작 이곳에 와서 야경을 감상하며 쉬는건데! 후회막급이다.
넓은 3층 전망대 로비엔 열심히 객담을 나누는 중년의 두 일본인과 우리 두 사람 외엔 없다. 등받이 없이 쫙 펼쳐진 푹신한 의자에 드러누워 요코하마의 忙中閑을 즐기는 기분을 어디에 비유할까! 그것도 공짜로---, 역시 "배낭족에겐 정보가 생명이다"란 영원한 아포리즘이 대합실 천장의 전등 사이로 내 뇌리에 반추되어진다. 한 30여분이 지났을까? 심상치 않은 잔잔한 음악과 함께 상냥한 여성의 멘트가 들려온다. 서글픈 곡조와 더불어 "사요나라--- 구다사이"하는 어조가 에구! 문닫을 시간을 알리나 보나--. 조금 있으니 정복 차림에 슬리퍼를 끄는 터미널 직원이 열쇠뭉치를 손에 들고 "스미마센"을 연발하며 나타난다. 아쉬운 맘에 되잖은 일본어로 "이마 시마이데스까?" 했더니 공손한 어조로 "하이!"하며 절을 해댄다.
그날 밤 우리 둘은 마지막 보루였던 페리터미널에서 정확하게 밤 9시 정각에 쫓겨났다. 요코하마역으로 가기 위해 이시가와죠역으로 향하는 우리의 머리 위로 "부루라이트 요코하마(Bluelight Yokohama)"의 이즈러진 달빛이 서럽게 흐느끼고 있었다.
일본배낭(6); "교토는 가랑비에 젖어" or "김노인 실종 사건"
.. 요코하마 驛舍에서 밤 12시가 지나도록 기다리려니 다들 이만 저만 고생이 아니다. 어디 제대로 앉을 데도 없이 東口 쪽 소고백화점 앞에 퍼질러 앉은 모습들이라니----? 이를 딱하게 여긴 역무원이 청춘18의 검인도장을 하루 늦게 찍어 줄테니 지금 개찰구 안으로 입장하란다. "청춘18"이란 일본의 동하계방학 중에 발행하는 JR의 특별할인티켓으로, 1인이 5일간 혹은 5인이 하루 동안, 신칸센과 초특급을 제외한 JR의 전 열차를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요술방망이와 같은 티켓이다. 그런데 여기서의 하루란 0시부터 24시까지를 말한다. 따라서 밤 11시59분에 검인을 받았다면 1분 후, 하루분이 날아가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든 밤12시를 넘겨 입장하기 위해 개찰구 밖에서 구차스러운 몸짓을 펼쳐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이 눈물겨운 몸부림이 용케 맘씨 좋은 역무원 눈에 포착이 된 모양이다.
세상을 살면서 때론 남에게 불쌍하게 보여야 예기치 않은 得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이다. 대가족의 장남으로 강사생활을 전전하던 나도 장가들기 위해 숱한 맞선을 봐야 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택한 꼼수가 맞선상대에게 "불쌍하게 보이기 작전"이었다. 주눅이 든 얼굴로 상대방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결혼하면 아내에게 두 말 없이 꽉 잡혀 숨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하고 지낼 것 같은 겸손하다 못해 구차하고 불쌍한 눈빛으로 상대방을 바라 봤다. 이 작전에 걸려든 사람이 바로 내 아내다. 그러나 아직도 긴가 민가 하는 아내가 딴 맘 못 먹게 아내의 직장(아내는 교사였다.)에 漢詩로 된 열렬한 충성서약서를 써 보냈다. 오랜 세월이 흘러 全文을 다 기억하진 못하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아내는 같은 직장의 한문선생님께 자문을 구해도 "正統漢文"이 아닌 吏讀(이두)인 것은 분명한데 해석을 할 수 없다고 한다면서 내게 무슨 뜻인지를 물어왔다. 난 마지막 카드를 던지는 비장한 심정으로 해석을 해줬다. "사랑해 사랑해요, 당신을 당신만을, 이 생명 다하도록 당신만을 사랑해" 라고------.
일순 멈칫해 하는 아내에게 "가진 것 없지만 여왕처럼 모시고 행복하게 해 줄테니 한 번 데리고 살아보시라"고 비굴한 목소리로 청혼을 했고 맘 약한 아내는 선뜻 그러마고 대답했다. 그 결과 제 눈 제가 찔렀다고 아내는 수 틀리면 "내가 미쳤지 미쳤어" 하면서 왕탄식이다. 그 아내 몰래 난 다시 학회 출장을 핑계로 나홀로 배낭을 즐기고 있지 않는가? 한 가지 불안한 것은 같이 간다고 둘러댄 K선생이 우리 집에 전화라도 하는 날이면 그날로 쪼다 인생은 종치는 거다. 입을 맞추기 위해 K선생 집에 몇 번 전활했는데 그 때마다 사모님이 받는 바람에 끝내 모략을 꾸미지 못한 게 못내 불안하다.
갑자기 불안한 맘에 화들짝 놀라 잠을 깨니 벌써 나고야(名古屋)다. 그런데 청소부 아저씨가 올라 타더니 앞 차량을 손짓하면서 "노리가에" 뭐라 뭐라 하는게 갈아타라는 소리 같다. 알고 보니 이곳 나고야부터 오가끼(大垣)까진 우리가 탄 차량부터 일부 차량을 떼내고 운행한단다. 앞 차량으로 급히 옮겼으나 편안히 앉아 오던 지정석의 기득권은 이미 사라지고, 우린 신문지를 깔고 바닥에서 불공을 드리거나, 좌석이 빌 때 번개같은 기동력으로 빈 자리를 꿰차는 심야의 기동력을 발휘해야만 했다. 오가끼 역에 기차가 서자 말자 다시 우리는 1분 후 발차하는 교토행 기차로 환승하기 위해 숨가쁘게 2번 플랫홈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고 2시간 후, 일본의 古都 교토(京都)역에 도착했다.
오가끼에서 교토까지의 2시간 여정 중 잊을 수 없던 건 大邱(그것도 나와 같은 동네)에서 온 여대생의 거의 神技에 가까운 손아귀 握力이다. 나고야에 기차가 서기 직전, 여기서 객차를 떼낸다는 사실을 알리 없었던(길라잡이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그녀는 양치질을 하기 위해 칫솔에 치약을 짠 뒤 세면실에 들어가다가 갑자기 펼쳐진 긴급상황에 그대로 칫솔을 들고 황급히 객차를 갈아탔다. 그리곤 용케 얻어걸려 앉은 좌석에서 2시간 동안이나 치약 묻은 칫솔을 손에 꽉 움켜쥐고 꿈 속을 잘도 헤매고 있었다. 실로 하늘이 준 재주였다. 여학생이 얼마나 성격도 괄괄하던지, 다른 사람은 다 90일 체류허가를 받았는데 자기만 15일이라고 속상해 하기에 "혹시 前科가 있는게 아니냐"고 농을 걸었더니 한 술 더 떠서 "아이 아저씨는 사람 많은 데서 그런 일급비밀을 폭로하면 어쩌느냐"며 一喝한다.
다시 오사까역 맞은편 중앙우체국 앞으로 오후 5시 30분까지 집결하자는 전갈을 끝으로 교토역에서 뿔뿔이 헤어졌다. 원래 나의 "청춘18파트너"였던 칫솔아가씨와 광주아가씨는 바로 오사까로 간다면서 두 늙은 언니 연,숙씨와 파트너를 바꾸잔다. 두 언니도 그러자며 동의한다. 안 그래도 나 혼자 구두 신고 온 사연(마누라 몰래)을 아는 두 언니는 신주쿠의 미라노좌에서 같이 찍은 사진을 마누라에게 등기속달로 보낸다며 은근히 협박을 한다. 안 바꿔줄 도리가 없다. 그러고 보니 "청춘18"이라는 게 완전히 현대판 "노비문서"다. 1사람이 5일이내를 써도 되고 5인이내의 몇 사람이 하루를 써도 되는 특성상(도장찍을 欄만 있으면 된다.), 당연히 배낭여행사에선 티켓 관리를 위해 5난1조로 된 티켓 1장에 몇 사람씩을 묶어 배정하게 된다. 따라서 도시간의 이동 땐 아무리 미운털이 박힌 놈이라도 파트너와 동행치 않을 수 없는 것이다.
古都의 이미지를 불식시키는 초현대식 교토驛舍의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가랑비 내리는 교토의 四圍는 아늑함과 안온함 그 자체였다. 어디를 둘러 봐도 고층 현대식 건물보다는 전통사원과 가옥, 고성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교토역 코인로커에 배낭을 맡긴 후, 오후 2시 반에 여기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우선 교토타워 지하의 사우나를 찾았다. 언니들도 같이 온다길래 혹시 남녀혼탕이면 어떡하나 떨렸는데, 750엔 짜리 사우나는 우리 동네 3000원 짜리보다 더 못한 평범한 목욕탕이다. 같이 入浴했던 철인3종선수 張相根 씨가 인정스럽게 내 등을 밀면서 "형님! 저는 오늘 역에서 가까운 절 몇 군데 돌랍니다."한다.
역 앞의 市버스 안내소에서 1일패스를 500엔에 구입하고 버스노선도를 받았다. 다른 도시와 달리 유물 보존관계로 지하철을 맘 대로 뚫을 수 없어 교토 관광은 버스가 제격이란다. 1번 승차에 220엔이니 1일패스가 훨씬 경제적이다. 게다가 교토의 버스는 그 자체가 하나의 박물관이다. 모양도 고풍스러운데다. 좌석도 나무로 돼 있어 퍽 이색적이다. 우선 100번 버스를 타고 淸水寺(기요미즈데라)를 찾았다. 버스에서 내려 근 10여분 가량을 비를 맞으며 오르막길을 오르니 절 입구가 보인다. 입구 초입에 세워진 산쥬노꼬(三重塔) 앞에서 마침 교환학생으로 일본에 왔다는 한국 초등학생을 만나 기념사진을 찍었다. 일본에서 보기 드문 산쥬노꼬의 홍색 丹靑이 퍽 인상적이었다. 비맞고 찾아온 보람을 느꼈다고나 할까? 아내에게 사진을 폭로한다고 협박하는 두 언니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면 교토역의 약속시간에 늦지 않아야 한다. 그러려면 너무 욕심을 내지 말고 빨리 다음 장소인 金閣寺(낀까꾸지)로 가야 한다.
다시 202번 버스를 타고 전통건축물 보존지구로 일본의 시정 정취가 물씬 풍기는祗園(기온)으로 와서 건너편 정류장에서 12번 버스로 갈아 타야 했다. 우리처럼 바로 맞은 편에 반대노선 정류장이 있는 시스템이 아니라서 기모노 차림 중년부인의 친절한 도움을 받아야 했다. 버스가 교토의 한 복판에 위치한 二條城(니죠조;17C 도구가와 이에야스의 교토 숙소)에 이르자 한 무리의 서양인 관광객이 한 일본인 여성통역과 함께 승차한다. 마침 내 옆자리에 일행 중 한 사람이 앉기에 물었더니 미국 오레곤주 포틀랜트에서 왔단다. 영어가 유창한 일본인 통역에게 돌아갈 때 탈 205번 버스의 정류장을 물었더니 기사에게 물어서 친절히 알려준다. 이번 여행에서 확실하게 느끼는 일본인들의 몸에 배인 친절! 하루 아침에 얻을 수 없는 무형의 무한한 財産임을 재삼 깨닫게 된다. 금각사의 400엔 짜리 입장권은 부적 모습이라 퍽 이채롭다. 입구를 들어서 왼 쪽으로 꺽으니 연못 속에 금 단장을 한 3층 누각이 눈부신 자태로 다가 온다. 교토1경으로 친다는 세평에 걸맞게 우중에도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비 때문에 햇살에 반사되는 금빛찬란한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쉬웠다. 급하게 사진 1장 박고 두 언니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부랴 부랴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갔다. 정류장엔 머리를 뒤로 묶은 초로의 멋쟁이 신사가 역시 교토역으로 가는 205번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균적 일본인답지 않게 영어가 유창하길래 신상을 캤더니 자신을 올해 60세로,교토의 명문 同志社大 화공과 출신의 기술서적 번역가로 소개한다. 한국의 저항시인 윤동주도 당신의 동문인데 아느냐고 물었더니 아쉽게도 잘 모르겠다며 겸연쩍은 미소를 짓는다.
교토역에서 정확히 2시 반에 張선수와 두 언니를 만나 6번 홈에서 오사까행 기차를 탔다. "청춘18"티켓을 보여주고 무사통과하는 기분이 삼삼하다. 원래는 신칸센을 한 번 체험하려 했으나, 불과 16분 만에 가는 짧은 거리고, 고속 구간도 아니라 쾌속의 질감을 못 느낀다기에 무료로 가는 "청춘18"편을 택했다. 오사까에 내려 한큐32번가의 우메다그랜드 전망대와 우메다 지하도의 음식상가를 거쳐 집결지에 도달했으나, 구미에서 온 고교생 4총사의 모습이 끝내 보이지 않는다. 비 내리는 오사까 중앙우체국 앞에서 나머지 35명의 대식구가 한참을 기다리다, 페리 시간에 맞추기 위해 進軍을 해야만 했다. 니시우메다역에서 지하철을 탄 후 住之江公園에서 모노레일로 환승해 오사카 남항의 페리터미널에 도착했다. 3일전의 역순이라 어렵지 않게 혼자서도 얼마든지 올 수 있는 길이다.
페리터미널에 도착하니 문제의 구미 4총사 녀석이 먼저 도착해 있다. 청주가족의 가장이신 지리선생님께서 노발대발하셔서 녀석들을 꾸짖고 한 바탕 소란이 벌어진 틈에 우리는 大驚失色할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78세의 김노인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화장실로 어디로 온갖 곳을 뒤져도 종적이 묘연하시다. 뒤늦게 비행기팀의 한 학생이 말하길 모노레일 안에서 졸고 계시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도 따라 내리기 급급해 미처 챙기지 못했단다. 페리의 출발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길라잡이의 얼굴색이 거의 똥색이다. 일단 페리사무실로 달려가 긴급사실을 알리고 출항시간의 조정을 부탁하는 모양이다.
구미 녀석들 때문에 어수선하던 분위기는 일순 비행기팀 배팀 할 것없이 40명의 걱정스럽게 굳은 표정 하나로 모여진다. 以心傳心으로 김노인의 安危를 염려하는 단합된 氣運이 역력하다. 철인3종선수 張이 "형님! 일단 제가 터미널역에 한번 갔다 오겠습니다!"하며 비호처럼 뛰어나간 뒤, 길라잡이도 뒤를 따른다. 그 10분 뒤, 무거운 분위기 속에 우울한 침묵이 계속되던 터미널 안은 환희에 찬 40명의 환성으로 뒤바뀌어 갔다. 온몸이 땀투성이가 된 김노인이 초죽음의 행색이 되어 張과 길라잡이의 부축으로 터미널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노랑머리 언니는 눈가에 눈물까지 비치고 모두가 김노인의 무사귀환에 한 가슴 쓸어내리며 자기 일처럼 안도하고 있었다. 이번 여행 중 처음으로 "우리는 하나(We are the World)"임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바닥에 퍼질러 앉아 아직도 떨리는 가슴을 진정치 못하고 "졸다가 깨보니 아무도 없길래 내가 펄쩍 뛰고 난리를 쳤지! 그러니 역무원이 둘이나 쫓아와서 왜 그러냐고 묻길래---"하면서 역무원의 도움을 받아 천신만고 끝에 무사히 돌아오게 된 武勇談을 펼치는 김노인의 땀에 젖은 베레모 위로 출항을 알리는 명문대양 페리의 점멸신호등빛이 곱게 내려 앉고 있었다.
일본배낭(7); 아! 후쿠오까 돔!(완결편)
.. 새벽녘에 큐슈의 신모지항에 입항했다. 고구라역까지 콩나물 시루를 방불케 하는 셔틀버스편으로 도착, 비행기팀 20명과 배팀 20명은 아쉬운 작별을 했다. 일정상 후쿠오카의 호텔에서 자고 내일 아침 비행기 편으로 출국하는 비행기 팀과 시모노세끼항에서 오늘 저녁 배로 출국해야 하는 배팀의 상이한 스케쥴 때문이다. 우리 배팀은 거의가 고구라(小倉)에서 쇼핑이나 하면서 그대로 고꾸라지겠단다. 오후 3시 반 시모노세끼 역 집결시각에 맞추기엔 왕복 3시간의 후쿠오카 여정이 너무 무리란 생각들이다.
배팀 중에서 備蓄分 "청춘18"티켓이 1장 남았다는 구미 고교생 2 녀석과 나, 이렇게 3사람 만이 후쿠오카를 냉큼 다녀오기로 했다. 후쿠오카의 하카다(博多)驛까진 고구라驛에서 1시간 14분, 1250엔이다. 후쿠오카까지 길라잡이 權과 동승하면서 그의 보복성 질문(모더니즘과 리얼리즘에 관한)에 시달려야 했다. 내가 굳이 짧은 시간에 후쿠오카를 고집하는건 다분히 세계 최초의 개폐식 돔(dome)방식 경기장인 "후카오카 돔"을 보고 싶은 욕심이다.
지하철 공항선으로 니시진(西新)역에서 내려 웅장한 건축미의 후쿠오카 타워가 멀리 보이는 북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5분 쯤 걸으니 우측으로 붉그스레한 후쿠오카 돔의 지붕이 보인다. 막 신호등을 건너 돔 쪽으로 향하려는데 우측 코너 쪽에, 초라한 음식점의 광고문구가 보인다. 먹음직스런 치킨가스 도시락이 390엔! 사진으로 보는 도시락의 내용은 일본물가에 비해 굉장히 충실한 수준이다. 지체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안주인이 "이락샤이마세" 반갑게 인사를 한다. 주문한 도시락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뱃 속에서 또 괴기한 신호가 온다. "또이레와 도꼬데스까?" 안주인은 잠시 망설이더니 예의 그 친절한 미소로 자신들의 주방을 가로질러 내실 화장실을 선뜻 내어준다. 배설의 다행함과 즐거움 속에 그들의 친절이 뼈에 사무치도록 고마웠다.
많은 소설의 무대로 등장했던 후쿠오카江의 다리를 건너는데 가랑비가 더욱 세차진다. 중국영사관을 지나 한국총영사관 코너를 도니 바로 후쿠오카 돔이 眼前에 到來한다. 아! 후쿠오카 돔이여! 너보려고 이 雨中에 찾아온 한국 나그네의 정성을 넌 알아줄거나! 발걸음을 바삐 옮겨 돔 아래까지 갔다. 돔 입구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우산을 받치고 지나가던 아가씨에게 사진을 한 판 부탁해 박고-----, 그런데 아가씨가 날 보고 웃는 폼이 심상치 않다. 돔 입구 맞은 편 호크스 타운(후쿠오카 돔의 홈팀인 다이에호크스 구단에서 운영하는 쇼핑센터)에 들어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봤더니 맙소사! 거울 속엔 구질한 청색 배낭을 걸치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동여맨, 비에 젖은 웬 "부시맨"이 하나 서 있다.
12시부터 시작되는 "후쿠오카 돔"의 50분짜리 백스테이지 투어(back stage tour;요금 1000엔)를 신청했다. 점심시간인지라 신청한 손님은 단 3명뿐이다. 1사람은 홋카이도에서 왔다는 100Kg은 족히 되어 보이는 거인, 또 1사람은 시즈오카에서 왔다는 얼굴부터가 어린애 손바닥처럼 작은 소인, 그리고 한국에서 온 부시맨------,
수용인원 4만8천, 일본최고 높이의 외야펜스 6M, 미모의 안내 도우미는 입에 거품을 물고 후쿠오카 돔의 설명에 열을 올린다. 3부분의 돔 지붕 중, 화창한 날, 가장자리의 두 부분이 열리는데 완전개방에 걸리는 시간은 불과 20분이란다. 직접 인조잔디 그라운드를 밟는 기분이 짜릿하다. 3루측 덕아웃을 통해 라커룸 안으로 들어가, 타자들의 스윙 연습실, 투수들의 투구 연숩실, 선수전용식당 등 편의시설을 구경했다. 세계최초의 돔 야구장은 60년대 미국메이저리그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돔구장, 과학적으로 플라이볼의 최고 체공높이를 계산해 만든 당시로선 꿈의 구장이었다. 그러나 90년대 이래 요미우리 자이언츠(巨人)가 고라구엥 구장을 도교 돔으로 개조하면서 일본에서 뒤늦게 돔 붐이 일어 오사까 돔, 나고야 돔에 이어 세계적인 명물(지붕개폐식 돔이면서 미식축구장이 겸용되도록 스탠드이동식) 후쿠오까 돔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불현 듯, 이 담에 미국에서 메이저리그 30개 구단의 홈구장을 전부 가 보리란 야망이 꿈틀거린다. 안내 도우미가 홈팀인 "다이에 호크스"에 대해 설명하길래, 이 팀의 전신인 전설적 포수 노무라(野村)가 감독 겸 선수로 활약하던 70년대 낭까이(南海)호크스에 대해 말해 줬더니 "낭까이"에 대핸 잘 모르겠다면서 스포츠지 기자냐고 묻는다.
바쁜 걸음으로 하까다역으로 돌아와 모지(門司)驛에서 환승하는 시모노세끼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180m 짜리 인공운하로 유명한 복합쇼핑타운 "캐널시티" 방문은 다음 기회로 미뤄야 할까 보다. 하까다에서 시모노세끼까진 1430엔, 소요시간은 모지까지 약 75분, 모지에서 환승 후 시모노세끼까진 약 7분, 도합 1시간 22분쯤에다 환승대기시간까지 합치면 넉넉잡고 1시간 40분~45분은 잡아야 한다. 모지驛에서 20분을 기다리다 3시41분 시모노세끼행 기차를 탔다. 막 기차에 오르니 칫솔아가씨와 광주아가씨가 "아저씨!"하며 반갑게 반긴다. 고구라驛에서 시모노세끼行이라고 타긴 했는데, 잘못 탄 것 같아 저으기 불안했다며 날 보자 구세주를 만난 것 같단다. 큐슈와 혼슈 사이의 간몬(關門)해협를 연결하는 해저터널의 레일통과 소음이 이미 집결시각(3시 반)을 넘겨버린 지각생의 불안을 극대화시킨다.
집결시각을 20분이나 넘겨 3시 52분에 시모노세끼驛에 도착했다. 어제 혼이난 구미의 두 녀석은 벌써 와 있다. 녀석들 말이 후꾸오까에 도착해서 역 근처를 배회하다 어제 생각이 나서 부리나케 되돌아왔단다. 괜히 일행들에게 뒤통수가 따가와 온다. 서두르는 길라잡이를 따라 페리터미널로 향하다 驛舍와 港灣이 내려다 보이는 구름다리 위에서 마지막으로 전체가 하나된 기념촬영을 했다.
오늘 저녁 우리의 배편은 올 때완 달리 일본선적의 "하마유"이다. 오사까까지 이용했던 명문대양훼리를 상회하는 훌륭한 선내시설에 모두들 대만족이다. 옷장보관료 없는 선내전망욕실도 명문대양훼리보다 더 넓직하고 편하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이제 여행의 피날레를 돈독하게 장식하기 위해 맥주파티가 벌어졌다. 아사히맥주와 기린맥주 220엔짜리, 330엔짜리 캔이 돌아가면서 한 번씩 쏴대는 우리 일행들에 의해 연이어 공수되어 오고, 엄마가 준비해 줬다는 고급 밑반찬을 주저없이 술안주로 내놓는 연이 언니와 숙이 언니 , 국영업체의 지방출장소장 출신으로 1달이 넘는 유럽 배낭경력의 광주 미사일포아저씨 부부, 2002 아시언 게임 철인3종경기 대표출전이 꿈인 張선수(밤이면 웃통을 홀랑 벗고 자는 바람에 같은 2등선실에 자던 여인네들을 大驚失色케 했던 인물이다. 앞으로 선박 배낭여행할 땐 이런 인물 옆에 자지 않도록 "자는 남자도 다시 한 번 봐야" 할게다.), 칫솔아가씨와 광주아가씨, 그리고 우리의 길라잡이까지 모두 빙 둘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는 모습이 어쩜 그렇게 가축적(?)이고 화기애매(?)할 수가 없다.
끝내 사양하시는 김노인과 청주 가장어른께도 맥주 1컵씩을 드리고 재빨리 선내욕실로 달려갔다. 선내방송에서 풍랑이 심하니 조심하란 멘트가 나온 직후인지라, 욕실은 완전히 나만을 위한 독탕이다. 화장실 쪽에서 어린 학생의 구토소리가 심하게 들려오고 어머니인 듯한 여인의 걱정스런 음성이 그치지 않는다. 탕안에 누워 있으니 심하게 흔들리는 선체의 요동 때문에 물이 머리를 덮었다 가라앉았다 자동으로 세면을 시켜준다. 잠시 전정기관의 혼란을 느끼기는 했지만 이 또한 재미있는 체험이다. 그 때 드르륵 욕실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광주 미사일포 아저씨가 들어온다. "역시 여행 베테랑은 다르다니까?" 아무도 없는 욕탕을 편안히 독점하겠다는 요 통밥! 그러나 잠시 생각을 해 보니 잊은게 있다. 저 양반의 미사일포 때문에 밤잠을 설치지 않으려면 오늘은 기필코 내가 먼저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생각이 예까지 미치자, 얼른 욕실을 나왔다. 부랴 부랴 선실로 돌아와 탈의실에서 츄리닝으로 갈아 입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마지막 밤이라 주는 대로 다 받아 마셨더니 또 뱃 속에서 신호가 온다. 재빨리 화장실로 뛰었다. 그러나 흔들리는 배 때문에 멀미환자들로 1,2층의 각 화장실은 초만원이다. 한참을 기다려 다급하게 볼 일을 마치고 돌아왔더니, 맙소사! 벌써 자리에 누운 광주아저씨의 미사일포가 우렁차게 작동 중이었다. 그 사이로 장단을 맞춰 청주 둘째 아들의 발칸포 소리도 어김 없이 들려 왔다. 오늘은 술이 취해 웃통을 벗지 않고 얌전히 아가씨들 틈에 끼어 자는 철인 張의 옆에 우리의 길라잡이 權이 잠들어 있다. 이미 선택의 여지없이 유일한 빈 자리가 되어버린 權의 옆에 드러누울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숨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얌전히 잘 자던 權이 이날따라 갑자기 자다 말고 내 머리통을 쥐어뜯고 이를 가는가 하면, 곤히 잠든 아가씨들 옆에서 자신의 상의를 벗어제껴 우람한 뱃살을 공개했다 말았다 한다.
애고 애고! 난 그날 밤 새벽녘 배가 부산 외항에 정박할 때까지, 대한해협의 거센 파도로 출렁이는 배 안에서 미사일과 발칸포의 소음에, 끊임 없이 헤드록(head-lock;목조르기)을 가해 오는 權의 횡포에 배낭여행의 마지막 밤을 눈물로 지새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