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2-분노의 기원 - 애착의 관점에서 Self 2014. 8. 20. 0:34
존 보울비(John Bowlby, 1907-1990) 는 아동의 분노는 상실에 의한 좌절에 근원이 있다[참고]는 말을 했다.이 때의 분노는 애착대상으로부터 분리될 지 모른다는 기본적인 불안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분노는 근본적으로 그 분리에 대한 반응이자 항의라는 것이다. 또한모든 방어의 근원에는 애착하고자 하는 기본적인 욕구를 무력화시키는 분리가 자리잡고 있다고 하였다. 우리가 분노할 때, 이 분노는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생리적 분노 [분리에 대한 분노]
먼저 보울비가 말한 분노에 대해 뜯어보자. 다음은 보울비가 연구했던 '분리(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이 실험은 6개월~3세 사이 (부재가 일시적이라는 사실을 아이가 이해할 수 있기 전)의 유아에게 시행된 시험이며, 이 들이오랜 시간 지속된 분리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검토한 것이다. [참고]
항거(protest) – 애착대상이 돌아오게 하려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함. - 연령이 낮은 아이 : 화를 내고 고통스럽게 울면서 마지막으로 부모를 보았던 곳에서 부모를 찾음. - 연령이 높은 아이 : 부모가 돌아오기를 요구하고 울면서 그들을 찾는다. (일주일간 지속) 절망(despair) – 상실한 사람이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잃어감. 달랠 수 없을 정도로 울거나 무관심과 슬픔 속으로 물러날 수 있다. 점차 조용하고 순종적이 됨. (1~3세 사이의 아동은 9일~10일까지 지속) 거리 두기(detachment) – 외견상 회복(recovery), 상실한 사람과 자신의 관계를 억압하거나,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을 거둠. 그 사람을 대신하는 인물에게 자신을 애착시킴.단, 거리 두기의 정도와 가역성은 대신 주어지는 보살핌의 질과 아이가 돌아가게 되는 상황에 따라 다양함. |
보울비는 분리 불안에 마주했을 때, 항거와 분노가 나타남을 말했다. 애착으로부터의 분리를 받아들일 수 없기에 분노하는 것이다. 이 상실에 대한 분노는 어른에게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어른도, 아직 사랑하는 대상과 이별해야 할 때는 그 이별 대상과 이별 자체에 대해 분노를 경험한다. 연인과 다투다 화를 참지 못하고 폭행하거나 결국 죽이게 된 기사들도 심심치 않고 눈에 띈다.이러한 연구는신경학적으로 검증이 되기도 하였다.[참고] 이 기고의 말미를 보면 좌절-공격 가설에 관한 다음의 내용이 나온다.『기대했던 기쁨이나 쾌락이 실현되지 못하면 곧바로 분노의 반응으로 이어진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실험이 있다. 고양이의 쾌락 신경회로를 인위적으로 자극하면 고양이는 격렬한 쾌감을 느낀다. 그러나 이 자극을 거둬들이면 고양이는 갑자기 난폭해지는 것이다. 쾌감을 박탈할 때마다 고양이의 분노는 더욱 커진다. 낭만적 사랑의 쾌감에서 한순간 거절당한 연인의 분노를 이 실험 결과에 빗대어 설명할 수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신경과학자들의 추론이다.』 결국 애착에 대한 분노는 학습심리학 관점에서 볼 때, 강화물의 박탈에 따른 소거폭발[참고]로 볼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것이다.해당 기고 내에서 소거폭발에 대한 언급은 없으나, 고양이에 관한 실험은 소거폭발에 관한 실험과 동일하다.
학습된 분노 - [성인의 분노에 대한 역동적 해석]
분노는 분리에 대한 저항으로서 표현된다. 즉 애착의 위기를 느낄 때 표출된다. 그런데 애착의 위기는 누구로부터 기인한 것인가? 유아는 양육 환경 안에서 불가피하게 자기 가치의 조건화(conditioned self-worth)과정[참고]을 거치게 된다. 이는 즉,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부모의 강화 처벌에 따라 재단되는 것을 말한다. 설리반은 이를 두고 '부모의 불안이라는 산에 의해 날카롭게 부식되어 간다'[참고]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는 유아가 부모의 가치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여 부모의 꾸지람, 분노와 같은부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냈을 때 유아는 애착이 끊길 것 같은, 분리에 대한 불안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유아는 살아남기 위해, 부모와의 애착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깎아내는 고통을 인내하며, 때로는 분노를 터뜨리면서도 결국 애착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자신을 구부리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유아기에 마무리가 되나? 그렇지 않다.부모의 가치 체계는 아동에게 내면화되면서 초자아로 형성되고, 이에 따라 아동과 부모 사이에 존재했던 분리에 대한 갈등 구조는, 자기와 초자아 간의 갈등 구조로 대치된다. 간단하게 보면 부모에게 향했던 분노는 초자아를 향하겠지만, 초자아란 결국 나의 신념이므로 결국 그 분노는 나를 향하게 된다. 나를 향한 분노란 곧 죄책감이다.죄책감이 바로 초자아가 주는 처벌이다. 이러한 초자아의 역할로 인해부모가 거부했던행동을 스스로도혐오하게 되고, 스스로 절대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려 하게 된다.예를 들어보자. 어떤 아이가부모의 지속적인 요구에도 불구하고 어지른 것을정리하지 않았고, 부모는결국 화가 폭발하여 아이를 집 밖에 내놔버렸다. 이때의 공포와 분노가 트라우마로 남아 성인이 되어 매우 정갈하게 생활하는 경우다. 이들은 무언가 어질러진 장소에서 심한 불쾌감을 느끼고, 정리할 줄 모르는 사람에 대해 분노감을 경험하기도 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누군가를 미워할 때는, 그 사람에게서 자신의 가장 싫은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라고말했던 것은이 것과 같은맥락에 있다. 이 때의 분노, 미움은 나를 집 밖으로 내버렸던부모에게경험했던 분노와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분노는 누구에게 향한 것인가? 어지르고 정리하지 않는 나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타인이 미운가? 어지르고 정리하지 않음에 대한 분노가 타인에게 투사된 것이다.
이러한 역동적 해석은 학습심리학적 관점에서도 설명이 된다. 부모의 가치체계는 학습된다. 부모의 가치체계에 따랐을 때 강화물이 주어지거나, 혹은 그것에 따르지 않을 때 처벌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작적 학습에 의해 특정 행동, 특정 심상, 특정 욕구에 대한 분노가 학습된다. 그 행동만하면 강화물을 얻을 수 없었거나, 처벌을 받았거나, 애착이 분리되는 고통을 겪었기 때문이다.
나의 분노
우린 여러가지 분노를 경험한다. 내 경우 요즈음의 일상을 돌이켜보면 떠오르는 몇몇 상황들이 있다.(주1)
[에피소드1.] 운전 중에 다른 차가 어이없이 끼어들 때가 있다. 당연히 양보해가며 운전해야 할 상황이라면 비켜주기도 한다. 하지만 상대가 조금 더 빨리 가겠다고 얄미운 짓을 하는 상황이라면 비켜주기 싫어서 앞차와 간격을 좁히기도 하는데 사고가 나건 말고 계속 밀고 들어오는 것들이 있다. "내가 들어가면 넌 서게 되어있어" 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한번 그렇게 끼워주고 나면 마치 내가 불의에 굴복이라도 한 듯, 어떤 개인의 이익을 위해 원치 않으면서도 이용당한 듯 불쾌한 기분이 밀려든다.
[에피소드 2.] 이제 곧 둘째의 백일잔치가 다가오는데, 둘째의 백일도 첫째와 마찬가지로 양가 어르신들과 형제들만 초대해서 두번에 나누어 치르기로 이미 결정을 한 상태다. 그런데 며칠 전 처가 백일잔치에 쓸 배경 스크린과 기타 테이블 장식 등의 대여를 알아보면서 너무 비싸다고 투덜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가족들에게 맛난 음식만 대접하면 됐지 왜 첫째 때 안하던 장식까지 알아보러 다니냐며 그런 것 할 필요 없다고 했다. 그랬더니 처는 안하긴 뭘 안하냐고 첫째 때도 다 했었다는 말을 했다. 이런 말이 한 두 번 더 오가다가 내가 버럭 화를 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말귀를 못알아듣냐고, 내가 하는 말의 포인트를 못잡겠느냐고, 요새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말귀 못알아듣는 사람들 때문에 성질이 난다고. 첫째 백일 때 이런 장식 돈주고 사서 했냐 안했냐? 그 사진을 며칠 전에도 봤는데 그 땐 이런 거 안했다. 음식 대접이나 잘하면 되지 왜 그런 장식에 큰 돈을 들이냐고. 처는 그제서야 "얼마 비싸지도 않아... 자기가 비싼 것만 봐서 그렇지..."라며 말의 방향을 바꿨다.
[에피소드 3.] 나는 걸음이 빠르다. 아니 빠르다기 보다 급하다. 마음이 급하니 걸음이 빠른 것이다. 집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 앞에서 섰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있거나 심지어 문이 열려 있으면 기분이 좋다. 하지만 엘리베이터가 저 높이 올라가 있다면 답답함이 밀려온다. 그런데 그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다 서다 오다서다를 반복하면 짜증까지 밀려온다. 그렇게 기다렸다가 드디어 문이 열렸는데 바로 그 순간 내 뒤로 어떤 사람이 다가와 마침 열린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이제 살짝 화까지 난다. 저 사람은 무임승차를 한 것이다. 내가 대기 버튼을 눌러놓고 이제껏 기다렸다가 타는데, 저 사람은 그 공을낼름... .객관적으로볼 때논리적이지 않고 관습적으로 볼 때속좁은 생각이다. 왜 이럴까?
첫번째 에피소드와 세번째 에피소드의 열등감으로 인한 시기심의 맥락[참고 :인색함에 관하여]에 있다. 남이 무언가 쉽게 얻는 것에 대해 강한 시기심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 시기심의 배경은 무엇인가? 내적인 열등감으로 인해 남들 보다 뒤쳐지면 안된다는 불안에 싸여 있는 상황에서 타인은, 특히 어떤 측면이건 나보다 우월하거나 무언가를 선점한 타인은 내 열등감을 자극하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러한 타인에게 불쾌한 정서가 일어난다. 어떤 사람의 행동이 도덕적으로 나보다 우월하다면 딱히 이유를 찾을 수 없이 불편할 것이고, 엘리베이터에 무임승차한 사람의 경우에는 그 사람의 행동이 잘못이 아님을 알면서도 짜증이 날 것이며, 위험하게 밀고 들어오는 행패를 부리며 나보다 좋은 위치를 선점했을 때는 명분이 확보되어 거침없이 분노가 터져나온다. 그렇다면 두번째 에피소드는 어떤가? 그런 에피소드를 몇번 겪었었다. 보면 상대방의 주장에 모순이 존재하는데 이를 인정하지 않고 논점을 흐리거나 오히려 자신의 주장을 강변할 때 터지는 분노다. 그런데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를 못하면 논점을 명확히 해서 다시 짚어주면 되는데 왜 화가 나는 걸까? 한참을 내성해보고 나서, 논점을 흐리거나 우기는 것이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분노를 경험하는 대상은, 이미 내 열등감과 불안을 자극해서 기분을 상하게 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를 테면, 훌륭한 성과나 진취적인 태도로 나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후배사원, 일정 지연 등의 상황에서 나의 자격지심을 건드리는 상사, 견실하지 못한 지출패턴으로 나의 인색함을 자극하는 처와 같은 경우다. 이 들에 대한 분노가 겉으로 표출되지 못하고 있다가 그 들이 논리적인, 혹은 도덕적인 헛점을 보일 때 그 분노가 터져나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바로 열등감에 있다. 열등감을 자극하는 상황에서 분노가 생겨났고, 그 분노는 내적으로 잠재해 있다가 상대가 도덕적, 논리적인 헛점을 보이는 상황에서 그것을 소재로 터져 나감을 볼 수 있었다. 여기서 열등감이란 무엇인가? 유년기에 스스로에 대해 유능감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함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부모를 만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부모로 부터인정과 칭찬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생겨난 자신에 대한 부적절감이다. 그렇다면 분노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분노에 대한 역동적 해석에서 보았듯, 유아기에 그것은 나를 인정하고 수용하지 않는 부모를 향한 것이었다. 어지간 해서는 애착을 허용하지 않는 냉정한 부모에 대한 분노였다. 그리고 아동기로 접어들면서 그 것은 내면화된 가치체계, 초자아를 만족시키지 못하는데에 따른 나 자신에 대한 분노가 된다. 그러나 나 자신에 대한 분노는, 죄책감은 너무나 괴로운 것이다. 나를 나로서 인정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결국 방어를 통해 억제되고 합리화된다. 타인에게 도덕적, 논리적 결함이 있는 경우는 분노가 그 것으로 합리화되면서 겉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무의식에 터질 듯 눌려있던 분노는 그 기회를 잡아 울컥울컥 터져 나온다. 결국 나는 내가 이정도 일에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인다.
분노의 또다른 원인들
위에서 살펴본 사례와 같이 분노는, 어지간 해서는 애착을 허락하지 않는 부모에 대한 것으로 시작되었다가, 초자아가 형성되면서 나 자신에게 향한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나머지 무의식에 억압되며, 적절한 기회와 대상을 찾아 합리화 과정을 거치면서 표출되기도 한다. 하지만 합리화 방어도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어서 형성되는 것이기에 이것에 실패할 경우 완전히 억압되거나,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분노를 경험하기도 한다. 여기서 합리화란 곧 남 탓이다.
그렇다면 모든 분노의 기원은 이런 애착의 분리에 대한 항거라고 보아야 하겠나? 모두가 그렇다고 보긴 어려울 것 같다. 사람들이 어떤 때 화가 나는지를 조사한 아래 연구를 보자.
호주의 심리학자 피트니스(J. Fitness)는 2000년에 호주 직장인 175명을 대상으로 어떤 경우에 화가 나는지를 조사했는데, 그가 발표한 결과를 보면 화가 나는 원인으로는 크게 다섯 가지가 있었습니다. 이 중 부당하게 대우받은 경우가 44%로 가장 많았습니다.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나를 꾸짖는 경우, 열심히 일했는데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경우, 동료에 비해 과중한 업무가 부과된 경우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두 번째로 많은 것은 부도덕한 행동을 봤을 때(23%)였습니다. 예를 들어 동료의 거짓말, 게으름, 절도, 사기, 성희롱 등을 목격한 경우입니다. 세 번째는 자신의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15%)였습니다. 이는 꼭 누군가의 잘못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컴퓨터 작업 중 컴퓨터가 고장 난 경우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만약 같은 일을 하는 동료가 사태의 심각성을 공감해 주지 못하면 더 화가 납니다. 더욱이 동료의 잘못이나 게으름으로 화난 고객을 상대할 때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네 번째는 자신이 존중받지 못할 때(11%)입니다. 자기를 빈정거리거나 무시하는 경우죠. 대개는 상사로부터 이와 같은 대우를 받는다고 합니다. 다섯 번째는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한 경우(7%)입니다.[참고] |
인간의 욕구는 애착의 욕구 하나 뿐인가? 위에서, 고양이의 쾌락 신경회로를 인위적으로 자극하면 고양이는 격렬한 쾌감을 느끼는데, 이 자극을 거둬들이면 고양이가 갑자기 난폭해지는 것을 확인한 시험에 대해 언급했었다. 인간은 자신의 욕구가 만족되었을 때 긴장이 해소되면서 만족감을 느끼는데, 이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않고, 그 기대를 무너뜨리면 불안과 분노를 경험한다. 요는, 이러한 욕구에는 수면욕, 성욕 등 생리적인 욕구도 있고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론[참고]을 보더라도 다양한 유형의 욕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에릭슨의 연구[참고]의 관점에서 본다면, 1세부터 3세 사이에 아동은 자율성 대 수치심의 테마를 갖는다. 빠르게 성숙하는 신체적 능력으로 인해 자기애가 고양되며, 이를 바탕으로 주도적으로 세상을 탐색하고 자신의 힘을 시험해보고자 한다. 이 시기에 자율성과 주도성에 대한 욕구가 매우 중요하고 강해진다. 사실 이것은 아이를 키워본 사람은 누구나 아는 것인데, 아이들은 이것을 좌절시켰을 때 매우 강한 분노를 표출한다. 위 피트니스의 연구에서 세번째 '자신의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매슬로우가 정의한 욕구 중 존경(esteem)의 욕구가 있다. 이 것은 타인에게 존중받고 싶어하는 욕구를 말한다. 첫번째 '부당하게 대우받은 경우', 두번째 '부도덕한 행동을 보았을 때', 네번째 '존중받지 못할 때', 다섯번 째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한 경우' 모두 이 존경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 상황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물론 설문에 응한 사람은 다양한 유형의 가치체계와 열등감을 가지고 있을 수 있고, 그들의 의식 수준에서 존중받지 못했다는 정도로 표현했다고 해도, 그 이면에는 어떤 역동이 숨어 있을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자기심리학에서 주장하듯 자기애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이며, 이것에 상처가 났을 때 인간은 보편적으로 분노를 경험한다.
* 주
1. 사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4월이다. 위의 에피소드들도 당시에 기록한 것으로, 그 때만 해도 나는 나의 분노를 깊이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이해하고 싶어 쓰기 시작한 글인데, 생각처럼 분석이 되지 않아 글쓰기를 멈추었더랬다. 그리고 8월 말로 접어든 지금에야 나의 분노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인색함에 관하여 - 강박성 성격의 대물림] 을 쓰다가 시기심의 관점에서 분노를 통찰하는 기회를 얻었기때문이다. 무려 4개월의 시간이 걸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