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설 연휴 첫날 불광 CGV에서
김덕영 감독의 <건국전쟁>을 봤다
11시 50분 첫 회인데 극장의 좌석은 맨 앞줄
가장자리 몇 석만 비었을 뿐 만석이었다
다큐멘터리 영화에 이렇게 많은 관객을 보고 깜짝 놀랐다
중장년층이 주류였지만 개중에는 젊은 학생들도
단체로 왔는지 눈에 많이 띄었다
<건국전쟁>은 극영화가 아니고
다큐멘터리 플러스 인터뷰 영화다
이승만에 대한 전면적인 재평가
오늘의 대한민국 위대한 성취의 뿌리가 뭐냐를 묻고 있다
좌편향 선동세력의 철저한 정치적 왜곡을
문서와 기록 자료에 기초한 팩트체크와 진실로
그 동안 국민들이 얼마나 속고 살아왔는지를 보여준다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결코 이승만을 미화하는 영화가 아니다
이승만도 과(過)와 오(誤) 가 있다
과오를 담담하게 들여다보면서 좌편향들에 의해
그동안 잘못 알려진 의혹들을, 진실을 통해 바로잡고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지만 박진감이 있고 감동적이다
중간중간 여러 사람의 인터뷰와 새로운 자료의 발굴로
재미까지 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다
영화가 끝나고 영화관을 나오면서
가슴이 웅장해지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자부심이 느껴진다
사실 초등학교의 국민교육헌장 세대로
해방공간과 6. 25를 아우르는 이승만 정권은
살아보지 못했고 경험하지 못했다
다만 배움과 자료의 습득 터득으로 알뿐이다
그 배움과 자료의 습득 과정에 있어서
<이승만>은 선(善)보다 악(惡)이 깔려있고
나쁜 사람, 독재자, 살인자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대한민국의 현대사 역사에 대한 인물에 있어서
좌파들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을 3종 세트로 만들어
독재자로 낙인 찍어났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거짓 선동에 속아서는 안되고
역사의 편향 왜곡을 가만히 보고 있어서도 안된다
영화를 보고 나서 느낀 점은 이승만은
나라를 100년 앞을 내다 볼 줄 아는 선각자였고
평생 나라를 위해서 살아간 <愛國者>란 느낌이 강하다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요양병원에서 90세로 쓸쓸하게
임종하는 순간까지 그의 가슴속에는 오로지 대한민국만 있있다
이승만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은 천만다행이고
신이 주신 대한민국 역사의 축복이다
당시 상황으로 봐서 김구나 여운형이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면 아마 오늘날 대한민국은 공산화되었거나
미얀마 수준에 머물렀을 겄이다
왜냐하면 이승만이 세계에서 민주주의가 가장 꽃핀
미국에서 democracy를 공부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를 지나 대한제국 일제강점기는 아직
왕정의 흐름이 남아 있고 김구나 여운형은
그 연장선상의 인물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젊은 나이에 미국으로 가
1907년 워싱턴대학에서 학사(32살)
1910년 하버드대학에서 석사
1910년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서양 문물을 보고 배우면서 어떻게 해야 우리나라가
잘살고 선진일류국가가 되는지를 터득한 분이다
이승만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다
이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면
거대한 지구의가 돌고 한반도 상공에서 인공위성이
찍은 듯한 한반도는 반으로 갈라져 북쪽은
전깃불이 없는 어둠, 남쪽은 밝음으로 대비
곧이어 사우스코리아의 초현대 모던한 서울과
노스코리아의 공화국 병사들의 행진으로
남북분단의 결과를 영화는 암시한다
마지막 앤딩
<이 작품을 대한민국 건국 1세대들에게 바칩니다>까지
나라가 왜 둘로 쪼개지게 되었는지?
남쪽이라도 이승만이 자유 국가를 건국하지 않았다면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될 뻔 한 건국이야기
토지개혁으로 농업을 발전시키고
산업화의 기반을 어떻게 마련했는지
신분 차별의 철패와 남여평등으로
어떻게 교육을 시키는지
이승만이 일제 치하로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어떤 기여를 했는지
또 외교 국방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한강철교 폭파와 3.15 부정선거 4.19를 거치며
좌편향 왜곡이 얼마나 쓰레기 인지를 보여준다
8.15 해방은 어떻게 주어졌을까?
연합군인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이 항복하면서 우리나라는 해방되었다
물론 상해 임시정부와 무장 독립군들의 노력도 있었다
그 당시 일본군은 완전 무장세력이 700만
독립군은 고작 몇천 명 정도였으니
무장세력으로 독립은 거의 불가한 것을 알고
이승만은 독립군의 무장 투쟁하에 외교적 활동이
독립운동에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미국에서 외교적으로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헌신한다
1941년 제팬인사이더아웃(japan inside out)을 출간해서
일본이 반드시 미국을 공격할 것이다
미국 내 평화주의자의 말을 들으면 안된다
평화주의자는 사실 간첩이라고 설파한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은 진주만을 공격한다
제팬인사이더아웃은 이승만을 유명 인사로 만들어준 책이다
미국은 이승만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고
그것은 원폭 투하로 이어져 일본의 폐망을 가져왔다
좌편향들은 이승만을 지워야하기 때문에
주구장천 의열단 김원봉을 읇조린다
해방된 조국 대한민국은 어떡했는가?
1945년 8월 15일 해방되었지만
그냥 일제로부터 벗어났을 뿐이지
정식으로 독립한 날은 아니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38도 선이 그어졌다
6.25 잰쟁 때 38선이 생겼다는 사람이 있겠지만
38선은 1945년 8. 15일 해방의 부산물이다
38선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주둔하며
3년 동안 군정이 시작되었는데 이 기간 좌우 대립은 극에 달했다
소련은 각본대로 김일성을 내세워 북쪽만 단독정부를
만들 구상을 하자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38선을 넘어 북으로 가 분단을 막아보고자
김일성과 만났으나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고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고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남한에서도 1948년 5월 10일
총선거가 실시되어 전체의석 210석 중
무소속이 126석
이승만 계열이 30석
민주국민당이 24석
기타 30석의 국회의원을 뽑았다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가 탄생했다
국회의장에는 이승만이 선출되고
제헌국회가 만들어졌으니, 헌법을 만들어야 했다
1948년 7월 17일 헌법이 제정되었다(제헌절)
헌법이 만들어졌으니 대통령을 뽑아야 했다
1948년 7월 20일 제1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제1대 대통령 선거는 직선제가 아닌 간선제로
국회의원이 대통령을 뽑았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이승만 후보와
<한국독립당> 김구가 붙어
180 : 13
앞도 적인 지지로 이승만이 당선되었다
대통령에 떨어진 김구는 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했다
부통령 선거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이시영 후보와
<한국독립당> 김구가 붙어
133 : 62로 이시영이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좌편향들이 이승만을 깎아내리고 김구를 띄우지만
당시 김구는 이승만에 견줄 인물이 못되었다
김구도 물론 훌륭한 분이지만 정치적으로는 그랬다
1948년 8월 15일 드디어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
1845년 8월 15일 해방되고부터 3년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이제서야 비로소 완전한
독립 국가가 탄생했다
왕정제도가 사라지고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들어선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이승만의 역활은 지대했다
위에서도 얘기 했듯이 이승만은 선각자고
미국에서 공부한 정치학과 헌법학,
특히 민주주의 democracy 틀을 그대로
우리나라에 가지고 왔다고 보면 된다
1948년 이승만은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줬다
1930연대 40년대는 서구의 선진국 많은 나라들이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았다
스위스 경우는 1971년에 여성 투표권을 줬다
그래서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된 것이
우리나라에 있어서 축복이라고 한 것이다
다음을 보면 더욱 그렇다
유진오가 기초한 제헌 헌법 초안은
대통령은 상징적인 국가원수이고 의회에서 선출하는
국무총리가 실권을 가지는 내각책임제였다
그러나 초대 대통령이 유력시되던 이승만 국회의장이
대통령이 강력한 권한을 가지는 미국식 대통령 중심제를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결국 타협책으로 4년 임기에 1회 중임이
가능한 미국식 정부통령 제로 결정하고 국무총리제도를
실시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당시 대통령 중심제가 되지 않고 장관 중심의 내각제가
되었다면 그 어수선한 시기에 나라는 개판오분전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고려 왕건 조선의 이성계 등
나라를 건국한 사람이 여럿 있지만 대한민국의 건국은 획기적이다
인류 역사상 민주주의를 이렇게 단시간에
접목시킨 나라는 없다 동남아를 보면 안다
미국도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100년의 전쟁이 있었다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져 버렸는데 이 영화를
좀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역사적 사실을 알아야 한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建國)>
건국은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좌편향들은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보지 않는다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 수립일을 건국일로 본다
문재인 정부는 2019년 건국 100주년 기념이라고
유공자를 불러 놓고 기념식을 했다
1919년 <건국>은 논리적으로 전혀 맞지 않다
지금은 1919년 건국이라는 소리가 수그러들었지만
국가 구성의 3대 요소는 <국민> <영토> <주권>이다
임시정부 하에서는 이 모든 요소가 없었다
국민도 일본 사람이고 영도도 일본 주권도 빼앗겼다
그러므로 상해임시정부 수립일이 대한민국 건국절이 될 수 없다
임산부의 배속에든 아이의 임신 일을
그 아이가 태어난 생일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좌편향들이 왜 이렇게 1919년에 집착할까?
그것은 바로 1948년을 인정하는 순간
<이승만>을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좌경화된 역사관은 전부 이승만 부정에 있다
좌편향들은 이승만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김구를 추종한다
구미 미국에서 독립운동하던 이승만과
상해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하던 김구는
처음에는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관계가 좋았다
그러나 독립이라는 똑같은 목적을 두고 두 사람은
가는 방향이 달라지면서 소원한 사이로 바뀐다
김구는 안중근 의사의 이토히로부미 암살
윤봉길 의사의 수류탄 투척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일본을 공격하며 독립운동을 했는데
해외 정세에 밝은 이승만의 생각은 달랐다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행동에 박수를 보내지만
서구 구라파에서는 테러리스트라는 인상을 줘
우리나라 독립에 방해가 될까 봐 국제사회에
주권을 강탈한 일본을 널리 알려 독립을 쟁취하는 쪽을 택했다
또 해방되고 정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이승만은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공산주의 와는 절대
같이 갈 수 없다는 입장인데 김구는 이념을 떠나
민족화합으로 같이 가야 된다는 입장이었다
오늘의 남북 현실을 봤을 때 이승만의 혜안이 돋보인다
정말 이제는 좌편향들의 진실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
이승만은 정권을 잡고부터 제일 먼저 <농지개혁>에 착수한다
1899년 젊은 나이의 이승만은 만민공동회를 주도
왕정 철폐와 신분제 철폐 근대화를 부르짖다
한성 감옥에 투옥되어 사형선고를 받는다
선교사의 도움으로 1094년 5년 9개월의 옥고를 지르고
간신히 풀려나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젊었을 때부터 왕정 철폐와 신분제에 반감이 있었던
이승만은 토지개혁을 통해 지주제가 붕괴하고
상당수 농민이 땅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당시 북한 김일성도 농지개혁을 했는데
남한과는 완전히 달랐다
나라가 자본주의 경제를 이루려면
열심히 일할 동기를 주어야 하는데
토지개혁으로 소작농이 사라지고
농민이 자기 소유의 <땅>을 가진 것은
토지 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 전환을 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오늘날 대한민국 기업들이 세계를 상대로 경쟁할 수 있는
토대가 되어 IT 강국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 정권이 가장 역점을 둔 것은 교육이었다
당시 문맹률이 80%였던 우리나라는
찢어지게 가난해서 못살았고 여자는 인간으로
취급도 하지 않고 근대화도 실패해 일제에 침략당했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미국에 유학하면서 여자도 자유롭고
신분 차별없은 사회를 겪어보고는 많은 것을 느꼈다
나라가 잘살려면 자본이 돌아야 하고
자본주의가 되려면 먼저 민주주의가 바탕이 되어야 하고
민주주의가 되려면 사람이 똑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교육이 꼭 필요하며
교육은 이승만 대통령이 가장 애쓴 부분이다
교육을 최우선 순위 두고 얼마나 교육에 열성이면
6.25전쟁 때도 애들 교육하는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피난하면서도 애들에게 철저하게 교육하고
대학생만큼은 전후 나라를 세울 기둥이 되기 때문에
전쟁 중에도 소집하지도 않았다
배움을 많이 늘려서 대한민국을 똑똑하게
하여야 한다는 이승만의 집념은
당시 돈 많은 사람에게 사립학교를 짓게 해서
오늘날 세계에서 사립학교가
제일 많은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이승만의 <교육愛>는 교육열로 나타나
유대인들도 한국의 교육열을 부러워할 정도다
세계 10위의 경제 강국
그 저변에는 국민의 교육열이 깔려있다
세계 10위의 경제 강국이 된 데는
1953년 10월 1일<한미상호방위조약>도 빠트리면 안 된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미국과 협상에서 이승만의 고집으로 이뤄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쉽게 말하면 초강대국 미국으로부터
안보를 무기한 약속받고 돈까지 뜯어낸 조약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국가의 안정이 보장되었다
덕분에 대한민국이 북한을 압도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좌편향들이 미군 철수 종전선언을 주구장천 주장하는 것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이승만에 있어서 넷떼르처럼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3.15 부정선거> <4.19혁명>다
이로 인해 이승만은 독재자로 낙인 찍히는데
영화에서 보듯 이승만은 절대로 부정선거를 하지 않았다
부정선거, 4.19를 알아보기에 앞서 먼저
사사오입(四査五入)을 알아봐야 한다
위에서도 얘기했듯이 제헌국회의 헌법은 대통령은 4년 임기로
2번만 집권 할 수 있도록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미 2번의 집권(1948년~1956년)을
한 상태로 다시 출마하려면 헌법을 고쳐야 했다
당시 1956년은 6.25 직후로 나라가 불안정한 상태고
전국이 폐허가 되고 공산집단에 치를 떤 국민은
하루속히 나라의 안정을 되찾고 전후 복구를 바라는 쪽이었다
정권이 바뀌면 다시 나라가 어수선하고
사회 안정을 찾기 어려웠다
대통령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헌법을 바꿔야 하는데
대통령에 부여된 권한으로 3선개헌을 국회에 넘겼다
재적의원 2/3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법률이 통과된다
재적의원 203명 중 찬성 135명, 반대 60명, 기권 7명 무효 1명으로
재적의원 203명의 2/3는 135.3333..명이다
법이 통과하기 위해서는 136명 이상의 찬성표가 나와야 했다
운명의 장난인지 찬성표가 딱 136표 나왔다
자유당 정권은 0.333...은 사사오입을 적용 0.5 이하는
죽은 표라고며 헌법을 통과시켰다
3선개헌 법안은
①. 주권의 제한이나 영토의 변경 등 국가 안위에 관한
중요사항에 대하여 국민투표 실시
②. 국무총리제를 삭제하고 국무위원의 연대책임제를 폐지하며
국무위원에 대한 민의원의 개별적 불신임권 부여
③. 참의원에 대법관 등 법률에 의해 재정된 공무원 임명 인준권 부여
④. 경제체제의 중점을 국유. 국영의 원칙으로부터
사유. 사영의 원칙으로 이전
⑤. 대통령 궐위 시 부통령이 대통령이 되고 잔임 기간 중 재임
⑥. 현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제한을 철폐
개헌의 골자는
제네바회담에서 외세에 의해서 주권의 제한이나
영토의 변경이 있을 때는 국민의 힘으로 돌파한다는 중요한 법안이며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시장주의 경제체제로 만들어 미국으로부터
전후 복구비 원조를 많이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사사오입통과로 ④가 원인이 되어 미국의 원조가 급격히 늘어
충주 비료공장이 건설되고 인천에 제철소가 만들어져
오늘날 우리나라가 경제 강국이 되는데 초석이 되었다
사사오입을 시도했던 당시의 경제적 배경과
외교적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 ①~⑤를 쏙 빼고
⑥만 내세워 사사오입이 이승만의 장기 집권용이라고 공격하는데
위에서도 보듣 사사오입 통과는 외세 투쟁용이고
대미투쟁 성격이 강하다
방법론에 문제가 있는지 몰라도
사사오입이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다시 생각해 볼 때 암울한 생각이 든다
당시 국민들 대다수는 전후 사정에
이승만 한 대통령 인물이 없다며 문제 삼지 않았다
이는 3대 대통령 선거에서 결과로 나타났다
3대 대통령 선거는 전 국민 직선제 선거였는데
자유당의 이승만은 무소속의 조봉암과 붙어
득표율 70% : 30%로 압도적 당선을 했다
국민들의 반응으로 볼 때
이는 우리나라를 위하는 쪽으로 긍정 해석하는 편이었다
문제는 바로 4대 대선에서 터졌다
1960년 4대 대선에서
자유당에서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 부통령 후보는 <이기붕>
민주당에서는 대통령 후보는 <조병옥> 부통령 후보는 <장면>이 나왔다
그런데 조병옥은 지병으로 선거기간에 미국병원에서 사망했다
이승만은 무투표로 대통령에 당선되는 처지
그래서 이승만은 대통령 선거에 부정투표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4대 대선은 대통령보다 부통령 선거에 사활이 걸려있었다
조병옥은 사망했고 어부지리로 대통령이 될 이승만은
84세로 당시로는 너무 노쇠한 나이였다
만약 임기 중 노쇠한 대통령이 사망하면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기 때문에 자유당 이기붕의 간신배들은
부통령 선거에 목숨을 걸며 부정선거를 저지른다
그 유명한 <3.15 부정선거>다
<3.15 부정선거>는 절대 이승만이 지시 하지 않았다
영화에서도 나오듯 노쇠한 이승만에게
정치 간신배들은 인의 장막을 치고 이승만에게
알리지도 않았다 이승만이 부정선거를 지시하지 않는 이유는
다시 설명하겠지만 정치 맛을 본 자유당 간신배들은
정치깡패를 동원 부정선거를 치르자, 당일 3월 15일에
시민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경찰은 시위대를 진압 잠잠해지는 것 같았는데
한 달이 지난 4월 15일 김주열이라는 중학생 시체가
마산 앞바다 바다 위에서 떠올랐다
시위대에서 실종된 김주열의 시체를 바다에서 건져보니
띵띵 부은 몸에 눈에는 최루탄이 박혀있었다
눈에 최루탄이 박혀 있다는 것은
공권력에 의한 죽음으로 보고 잠잠하던 시위는
확 불붙으며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부정에 항거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대학생들의 눈에 이건 분명 정당하지 않은 부정이고
부정에 맞서 싸우는 것은 옳은 일이었다
당시 학생들의 시위는 남로당 시위처럼 과격하지도 않았고
평화적 시위였는데 자유당 정치 간신배들은
공권력을 동원 무력으로 진압해 사상자가 속출했다
급기야 4월 19일 전국적으로 혁명이 일어났다
4. 19 혁명이 일어나도 이승만에게 알리지 않았다
인의 장막에 둘러싸인 이승만은 철창에 갇힌 호랑이었다
자유당 간신배들은 본인의 이권을 챙기기 위해
3.15 부정선거도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당시 국무회의 기록에 대통령은 왜 이리 시끄럽냐고 묻자
간신배들은 빨갱이가 들고 일어났다고 거짓으로 둘러댔다
4. 12일 김주열 학생의 시체가 바다에서 떠오를 때도
정치 간신배들은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당시 국무회의 기록에 그대로 나와 있는 팩트다
4월 21일 정치간신배들은 사태가 너무 커져서
어찌할 바를 몰라 그때서야 대통령에게 알렸다
이승만은 보고를 받고 곧바로 4.19 학생들이
부상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본 부상 학생은
<할아버지 할아버지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요> 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그걸 보고 내가 맞아야 할 총을
우리 귀한 아이들이 맞았다며 펑펑 우시면서
<학생들이 왜 이렇게 되었어? 부정을 왜 해?
암,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은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이 젊은 학생들 참으로 장하다!>
<이제는 내가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와도 되겠구나
젊은이들이 주권을 갖기 시작했구나> 라고한다
이런 대통령이 독재자인가?
좌편향들은 지금도 3.15 부정선거는 이승만이 저질렀고
4.19 발포도 이승만이 내렸다고 선동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6일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다
5월 29일 측근들이 출국을 권유 하와이로 떠난다
하와이로 떠나면서 달랑 트렁크 4개만 가지고 떠났다
하나는 이승만 대통령 옷
또 하나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옷
또 하나는 이승만 대통령이 쓰던 오래된 타자기
마지막 트렁크는 그날 먹을 점심과 약
하와이로 떠난 이승만 대통령은
그토록 고국에 가고 싶어 했지만 끝내
돌아가지 못하고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요양병원에서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 유언-
잃었던 나라의 독립을 다시 찾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는지
우리 국민은 알아야 하며
불행했던 과거사를 거울삼아
다시는 어떤 종류의 것이든
노예의 멍에를 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우리 민족에게 주는 유언이다
영화에는 이승만의 악마화 프레임이 또 나온다
전쟁 중 서울 시민을 서울에 남으라고 해놓고
혼자 도망가고 한강 다리를 폭파해
무고한 시민이 죽었다고 선동하는데 날조된 것이다
밀고 내려오는 인민군 탱크를 막으려고
한강 다리 옆에 피난민이 건널 수 있는 가교를
만들어 놓고 한강대교를 폭파했다
한강 다리 폭파 지시도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이 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채병덕은 전쟁중 사망했다
6.25전쟁이 빨리 끝날 줄 알았는데
장기전이 되고 많은 사상자가 나오니
빨리 휴전 협정을 하고 망명하라는 존 무초 대사의 권유에
<나에게 총이 있다면 먼저 너부터 쏘고 문으로 들어오는
공산군을 쏘고 내 아내를 쏘고 마지막으로 나를 쏘겠다
나한테 망명하라 하지 마라>고 한다
누구나 사람에게는 공과 사가 있다
3.15 부정선거와 4.19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승만은 절대로 살인자가 아니고 독재자 악마가 아니다
정말로 국민과 나라를 사랑했고
우리나라 정치와 역사에서 5천 년 역사 중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분이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영화 크리딧 부분 자막으로
후기를 마친다
1. 한국전쟁으로 손해를 입은 30억불의 <피해>를
1957년까지 완전 <복구>했다
주택 52만 호가 새롭게 건축됐다
2.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기간 11년 8개월 중
재헌의회 선거를 포함해
모두 <11차례>의 전국 투표가 실시됐다
1년에 한 번 꼴로 투표를 통해 국민의 뜻을 물었다
3. 1957년 6천50만 환이던 저축고는
1958년 <1억 240만> 환으로 증가했다
4. 이승만 정부는 1달러 <700원>의
환율을 목숨걸고 방어했다
뒤이어 들어선 장면 정부의
1.300원에 비하면 대단한 일이었다
5. 1957년 <원자력>이 뭔지도 모르는 시대
이승만 정부는 원자력 전문가를 키우기 위해
<국비 유학생> 제도를 도입했다
6. 1959년 7월 연구용 원자로가
대한민국 땅에서 처음 건설되었다
덕분에 오늘날 대한민국의
<원전 기술>은 세계 최고다
7. 이승만의 <토지개혁>으로
소작농이 사라지고
농민은 자기 소유의 <땅>을 가졌다
8. 토지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 전환은
대한민국 기업들이
세계를 상대로 경쟁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덕분에 지금 대한민국은
<IT 강국> 으로 거듭나고 있다
9. 이승만의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은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승화됐다
'박정희의 <기관차>는
이승만의 <레일>위를 힘차게 달렸다'
9.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국가의 안정이 보장되었다
덕분에 대한민국이 북한을 압도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10. 동해 상에 <이승만 라인>을 선포하고
그것을 <평화선>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승만의 영토를 지키겠다는 의지는
독도를 지키는 데 큰 역활을 했다
11. 그는 독도와 한국전쟁을 통해
<두 번>이나 대한민국의 <영토>를 지킨
유일한 대통령이었다
좌편향의 이승만 악마화
이승만 건국 정권은 친일파를 내각으로 구성 친일 잔재라고 선동하는데
실상은 전혀 다르다
어느 좌편향 교수의 이승만 악마화
어느 좌편향 역사 강사의 이승만 악마화
이 강사는 자신의 유튜브에서 이승만이
<백인 여성들을 꼬드기고, 20대 여성과 불륜하며 재벌 행세를 하다 체포됐고,
수사 도중에 백인 여성에게 접근해 재벌2세를 사칭 데이트를 했고,
미국에서 재판 받기를 거부하고 하와이에가서 백인주류를 꼬드겨
플레이보이로 기소됐>고 주장하지만 이는
100% 거짓말로 이승만을 악마화하고 있다
노디김이라고 갖다붙인 사진
이 사진의 실제 인물은
신마실라(본명:신미숙 1892~1965)로(아래사진 원형테두리)
이화학당 1회졸업생으로 201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표창까지 받은 분
<실제 노디김 사진>
좌편향의 이승만 악마화
전쟁 중 서울 시민을 서울에 남으라고 해놓고
이승만이 혼자 도망가고 한강 다리를 폭파해 무고한 시민
800명이 죽었다고 국방부 자료를 인용 선동하는데
정확한 근거가 없다
6.25전쟁 중 한강 다리는
한강철교 3개
광진교
한강대교
5개가 폭파되었다
이 사진은 대동강 철교 사진으로 퓰리쳐상을 받은 시진이다
아래 사진은 한강 다리 옆에 피난민이 건널 수 있는 가교를
만들어 놓고 한강대교를 폭파했다
당시 한강대교는 오늘날과 같이 강물이 많지 않았다
노들섬 부근도 백사장으로 장마로 홍수가 났을 때만 물이 불었다
첫댓글 건국전쟁
관객수가 백만이 넘었고
아직도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더군요.
사실 이승만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몰랐던 터라
충격이었지요
아이들이 제대로 알아야할 역사를 이렇게나 왜곡시키며
뭘 가르치고 있었나.
왜 그렇게
이승만 지우기에 열심이었는지
박정희 조차도 이상하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 내지 않았으면
오늘날 우리나라가
이렇게 자유국가로 건재하고
발전을 했을까요
아직도 젊은이들은
김구를 위대한
독립운동가요
이승만을 독재자로
잘못 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승만 바로알기 영화
후속작도 계속 만들 예정이라니 아이들에게도 많이 알려져서 역사를 바로 잡아야합니다
건국전쟁을 보고
내가 남긴
cgv관람평에 좋아요
표시가 70여개에
나도 놀랐습니다
단체로 보기도 하고
입소문을 타고 아직도
관객이 이어지고 있다는건 다큐영화로서는
이례적이네요
긴 영화평 잘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