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절[ 三一節 ] 104주년 축사
『오늘은 3.1절 104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경축일입니다. 1919년 기미년 첫날 조선의 2.000만백성이 하나가되어 조선의 독립을 세계만방에 선포하였습니다.그로부터 104년 우리 후손들은 선조들의 뜻을 이어 받지못하였습니다
남북분단.외세개입.한국전쟁 민간인학살.인권침해.동서갈등.남녀갈등.세대간 갈등.이념갈등.노사갈등.정치보복이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반복되고있습니다.
동학혁명.3.1독립정신.4,19혁명.부마항쟁.5.18항쟁.6.10항쟁.촛불항쟁으로 이어지면서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성취한 나라로 발돋음하였지만 또다시 진보세력의 분열과 동상이몽(同牀異夢)으로 밝은 미래를 담보할수없는 나라가 되어가고있습니다.평화보다 전쟁의목소리가 커지고있으며 화합보다는 보복이 춤을 추고있으며 경제발전과 민주화는 후퇴를 거듭하고있습니다. 나라에 위기가 닥치면 생업에 종사(從事)하는 민초들이 들고 일어나 목숨을 초개(草芥)와같이 버리고 부패한권력을 응징하고 개혁을 요구하며 제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정치권력이 공을 독차지하고 그들은 처음에는 개혁과 민생안정을 내걸고 국정을 운영하였지만 결국은 자신들이 향유(享有)하고 있는 기득권력을 내려놓지못하고 더 강력한권력과 천문학적 부의 축재를 쌓기위해 부정과 부패의 늪에서 허우적거려 나라는 혼란속에 빠져들고있습니다. 모든것을 바로 잡기위해 결국 희생은 민초들이 겪어낼수밖에 없습니다. 3.1절 104주년을 맞이하여 지난 우리 선조들이 분연(奮然)하게 봉기하였던 그날을 돌이켜보며 우리민족이 진정 독립이 되었는가를 성찰(省察)하는 3,1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민초(民草)들이 전개한 3, 1 만세운동의 동기와 발생원인.전개과정.결과 피해규모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3.1 만세운동
3.1 만세운동은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 만방에 알린 날을 기념하는 날로 국경일입니다.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인 3·1운동은 "대한독립만세"가 온 거리에 퍼진 날이며. 1919년 3월 1일에 펼쳐진 3·1운동은 독립을 위한 민족적인 항일저항운동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독립을 하지는 못했지만, 우리나라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릴 수 있었고,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의 민족해방운동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 발생원인
일본제국의무단통치와 의 우드로 윌슨 , 레닌의 민족자결주의가 확산되었고 조선의 고종황제의 사망이 독살설과 스페인독감이 확산되어 민심이 극도로 흉흉(洶洶)하였던것이 계기가되었습니다.
3.1 운동은 수 개월에 걸쳐 한반도전역과 세계 각지의 한인 밀집 지역에서 시민 다수가 자발적으로 봉기하여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무단이 대한 저항권을 행사한 비폭력 시민 불복종운동(civil disobedience)이자 한민족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이었습니다.
민세 시위자들은 '조선 독립 만세'라는 구호를 앞세워 일본제국의 무단통치(武斷統治)를 거부하고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이는 민간과 지식인의 반향을 일으켜 대규모의 전국적 시위로 발전하였으며 시위가 끝난 뒤에도 그 열기는 꺼지지 않고 각종 후원회 및 시민단체가 결성되었고 민족 교육기관, 조선여성동우회와 근우회 등의 여성 독립운동 단체, 의열단 등의 무장 세력, 독립군이 탄생했으며, 종래에는 현대 한국의 모체(母體)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탄생시킨 운동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3·1 운동으로 시작되었기때문에 대한민국임정 시절부터 국경일로 지정하여 경축하였던 날로, 한국의 5대 국경일 중 하나이며 임시정부에서는 1920년에 3·1절을 국경일로 지정하여 국경일 명칭을 ‘독립선언일’이라 칭하였으며, 3월 1일을 ‘대한인이 부활한 성스러운 날(聖日)’로 내무부 포고를 공포하였습니다.
3·1 독립선언 1주년 기념식은 상해 올림픽대극장에서 성대하게 진행되었으며. 이후에도 3월 1일은 광복을 열망하는 독립운동가들과 온 민족에게 가장 큰 기념일이자 축제의 날이었으며, 중국, 미주 등의 해외 동포들 또한 3·1절이 되면 다양한 행사를 통해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였습니다.
광복 이후 미군정 치하에서는 1946년 2월 21일 군정법률 제2호 ‘경축일 공포의 관한 건’을 공포하여 경축일로 지정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대한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열사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제한되었고, 행정명령 13호 ‘3·1절(독립일) 기념축하식 거행에 관한 건’을 통해 지정된 장소 이외에는 축하식을 제한하였습다.
정부 수립 이후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공포함으로써 국경일로 지정되었고,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에 따라 공휴일로 지정되어 임시정부로부터의 국경일 전통을 계승하였다. 이날이면 정부에서는 애국지사, 독립유공자 유족, 국가 주요인사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참석한 기념식을 거행하며, 각 지역에서도 기념식을 비롯하여 1919년 3·1운동 당시 해당 지역의 만세 운동 광경의 재현과 같은 다양한 행사를 시행하였고 또한 가정과 기업 등에서도 태극기를 게양하여 이날을 기념하고있습니다. 3,1절 노래가 있지만 가사조차도 모르는 요즈음 젊은 세대들이 많습니다.
[ 3.1절 노래 가사 ]
기미년 삼월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 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은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하 이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기미독립선언서 전문]
우리는 오늘 우리 조선이 독립국이며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합니다. 이를 세계만방에 알려 인류 평등의 큰 진리를 환하게 밝히며, 이를 자손만대에 알려 민족의 자립과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반만 년 역사의 권위에 의지하여 이를 선언하며, 이천만 민중의 정성을 모아 이를 두루 밝히며, 영원한 민족의 자유와 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하며, 인류가 가진 양심의 발로에 뿌리박은 세계 개조의 큰 기운에 발맞추어 나아가기 위하여 이를 제기하니, 이는 하늘의 명백한 명령이며 시대의 대세이며 전 인류 공동 생존권의 정당한 발로이기에 세상의 어떤 힘도 이를 막거나 억누르지 못할 것입니다.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와 강권주의의 희생이 되어 유사 이래 수천 년 만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의 압제에 뼈아픈 고통을 당한 지 이미 십 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우리의 생존권을 빼앗겨 잃은 것이 그 얼마이며, 정신상 발전에 장애를 받은 것이 그 얼마이며, 민족의 존엄과 영광에 손상을 입은 것이 그 얼마이며, 새롭고 날카로운 기운과 독창력으로 세계 문화에 이바지하고 보탤 기회를 잃은 것이 그 얼마이겠습니까! 슬픈 일입니다.
오랜 억압과 울분을 떨치고 일어나려면, 현재의 고통을 헤쳐 벗어나려면, 장래의 위협을 없애려면, 땅에 떨어진 민족의 양심과 국가의 체면과 도리를 떨쳐 얻으려면, 각자의 인격을 정당하게 발전시키려면, 가엾은 아들딸들에게 괴롭고 부끄러운 현실을 물려주지 않으려면, 자자손손에게 영원하고 완전한 행복을 안겨 주려면, 가장 크고 급한 일이 바로 민족의 독립을 확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천만 겨레마다 마음속에 칼을 품은 듯 굳게 결심하니, 인류 공통의 성품과 이 시대의 양심이 정의라는 군사와 인도주의라는 창과 방패로 호위하고 도와주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나아가 싸우니 어느 강도를 꺾지 못하겠습니까! 물러가 일을 꾀하니 무슨 뜻인들 펴지 못하겠습니까!
병자수호조약 이후 때때로 굳게 맺은 갖가지 약속을 배반하였다 하여 일본의 배신을 죄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학자들은 강단에서, 통치배들은 실생활에서 우리의 선조들이 대대로 닦아 온 찬란한 위업을 식민지로 삼아 문화민족인 우리를 야만족같이 대우하여 다만 정복자의 쾌감을 탐할 뿐이요, 우리의 오랜 사회 기초와 뛰어난 민족의 성품을 무시한다 해서 일본의 무도함을 꾸짖으려는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격려하기에 바쁜 우리는 남을 원망할 겨를이 없습니다. 현재를 꼼꼼히 준비하기에 급한 우리는 묵은 옛일을 응징하고 잘못을 가릴 겨를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오직 자기 건설이 있을 뿐이지, 결코 남을 파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 자신의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고자 하는 것뿐이지, 결코 묵은 원한과 일시적 감정으로 남을 시샘하여 쫓아내고 물리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낡은 사상과 낡은 세력에 얽매여 있는 일본 제국주의 통치배들의 부귀공명의 희생이 되어 압제와 수탈에 빠진 이 비참한 상태를 바르게 고쳐서 억압과 착취가 없는 공정하고 인간다운 큰 근본이 되는 길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우리 민족의 요구에서 나온 것이 아닌 우리나라의 침략·강점이었으므로, 그 결과는 마침내 위압으로 유지하려는 일시적 방편과, 민족 차별의 불평등과, 거짓으로 꾸민 통계 숫자에 의하여 서로 이해가 다른 두 민족 사이에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원한의 구덩이를 더욱 깊게 만들고 있는 오늘날의 실정을 보십시오!
용감하고 현명하게 그리고 과감하게 과거의 잘못을 뜯어 고치고, 참된 이해와 선린을 바탕으로 우호적인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것이 서로 간에 화를 쫓고 복을 불러들이는 지름길인 줄을 밝히 알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원한과 분노에 쌓인 이천만 민족을 폭력으로 구속하는 것은 오직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하여 동양의 안전과 위태함을 좌우하는 사억 중국인들은 일본에 대한 두려움과 시기가 갈수록 두터워진 결과, 동양의 온 판국이 함께 넘어져 망하는 비참한 운명이 될 것이 분명하니, 오늘 우리 한국의 독립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정당한 생존과 번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동양의 선진 후원국으로서의 중대한 책임을 온전히 이루게 하는 것이며, 중국으로 하여금 악몽처럼 괴로운 일본 침략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또한 동양의 평화로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평화와 인류행복에 필수적인 받침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어찌 사소한 감정상의 문제이겠습니까!
아!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무력의 시대가 가고 도덕의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과거 한 세기 동안 갈고 닦으며 키우고 기른 인도주의 정신이 이제 막 새로운 문명의 밝은 빛을 온 인류 역사에 비추기 시작하였습니다. 새 봄이 온 세계에 돌아와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혹심한 추위가 사람의 숨통을 막아 꼼짝 못하게 한 것이 저 지난 한 때의 형세라면 화창한 봄바람과 따뜻한 햇볕에 원기와 혈맥을 떨쳐 펴는 것은 이때의 형세이니, 천지의 돌아온 운수에 접하고 세계의 새로 바뀐 조류를 탄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도 없으며 아무 거리낄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본래부터 지녀 온 권리를 지키고 온전히 하여 생명의 왕성한 번영을 맘껏 누릴 것이며, 우리의 풍부한 독창력을 발휘하여 봄기운 가득한 천지에 순수하고 빛나는 민족문화를 찬란히 꽃피우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떨쳐 일어났습니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우리와 함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남녀노소 없이 어둡고 답답한 옛 보금자리로부터 분연히 일어나 삼라만상과 함께 기쁘고 유쾌한 부활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억만대의 조상님들의 신령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리를 돕고 온 세계의 새로운 형세가 우리를 밖에서 호위하고 있으니, 시작이 곧 성공입니다. 다만 앞길의 광명을 향하여 힘차게 곧장 나아갈 뿐입니다.
공약삼장
오늘 우리의 이번 거사는 정의와 인도주의 그리고 생존과 영광을 갈망하는 민족 전체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인 감정으로 정도에서 벗어난 잘못을 저지르지 맙시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 최후의 한 순간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흔쾌히 발표합시다.
모든 행동은 질서를 가장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떳떳하고 정당하게 합시다.
단기 4252년 3월 1일.
조선민족대표:
손병희, 길선주, 이필주, 백용성, 김완규, 김병조, 김창준, 권동진, 권병덕, 나용환, 나인협, 양순백, 양한묵,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이승훈, 이종훈, 이종일, 임예환, 박준승, 박희도, 박동완, 신홍식, 신석구, 오세창, 오화영, 정춘수, 최성모, 최린, 한용운, 홍병기, 홍기조
3) 전개과정
한편 탑골공원에선 민족 대표들의 갑작스런 시위 장소 변경에 당황하여 학생 그룹에서 강기덕을 보내 찾아다니다가 그들이 태화관에 틀어박혀있는 걸 찾아내고 민족 대표들에게 항의하였으나, 최린과 손병희에게 공원에 가서 발표를 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답변만을 듣게 되었습니다
학생 그룹은 그들로부터 독립선언서만 받아내고 독자적으로 움직여 경신학교 학생 정재용이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거리로 나가 만세 시위 운동을 벌였다. 여기에 만세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혹은 고종의 국장을 보기 위해 상경한 일반 민간인들이 가세하여 수십만 인파가 모여들어 시위의 열기가 고조되었으며 시위대는 한편은 보신각을 거쳐 숭례문쪽으로 향했고, 다른 한편은 덕수궁 대한문 쪽으로 향했습니다.
시위대가 다시 종로로 향하자 일본 헌병과 기마부대가 시위대를 폭압적으로 진압하려 했으나, 시위대는 물러서지 않다가 오후 6시에 자진 해산했지만. 3월 2일이 되자 조선총독부는 전 병력을 동원해 만세 시위 운동을 주도한 학생들과 시위 참가자들을 마구 연행했는데, 이 날 하루에만도 무려 1만여 명이 체포되었습니다
거의 같은 시각에 평야, 의주, 선천 .안주 원상, 남포에서 만세 시위 운동이 일어났고, 다음날인 3월 2일에는 이북 전역으로 만세 운동이 확산되었다. 3월부터 4월 사이에 전국적으로 수천 회의 만세 시위 운동이 벌어졌고 ] 일본은 이를 강압적으로 진압하여 각처에서 학살 사태가 속출했습니다(대표적 사건이 제암리 학살사건)
만세 운동은 3월 초부터 일제의 탄압과 만행이 시작되면서 이에 대한 저항으로 일본 헌병 등을 때리거나 경찰서 등을 파괴하는 식의 폭력 시위 양산을 처음부터 안고 있었으며, 후기 만세 운동은 직접적인 불만이 많았던 농민과 노동자에게까지 확산되어 운동의 폭력적 양상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한편 "대한 독립 만세" 는 일종의 상징처럼 굳어진 구호지만 사실 3.1 운동 때는 "조선 독립 만세!"라는 구호가 많이 쓰였으며. 대한제국이 성립되었다가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에 '대한 독립 만세'라고 외쳤다고도 하지만, 국호가 대한제국으로 바뀌었어도 당시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조선'이라는 국호가 더 친숙했습니다. 당시의 신문 보도나 3.1 운동 이후 전국에서 벌어진 만세 운동 전단지에는 '조선 독립 만세'라고 쓰여 있는 기록을 많이 볼 수 있었으며 당장 기미독립선언서 에도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유민임을 선언하노라"라고 적혀있습니다.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이뤄짐에 따라 서서히 태극기가 만세 항쟁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대전군 유성면에서는 조선이 독립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마을 한복판에 태극기를 달았으며, 전라남도 연안에서는 어선들이 태극기를 단 채 조업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다만 3.1 운동에 참가한 민간인들은 국제 정세에 대해 매우 어두웠다. 한 예로 1919년 4월 1일 오전 10시, 황해도 해주에서 5천 장의 전단지를 뿌리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5명의 여자들은 "우리가 일제히 독립을 외치면 세계의 이목은 우리나라로 집중될 것이요, 조선은 세계 강대국의 동정을 얻어 민족자결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3.1 운동에 200만의 조선 민간인들이 참가하여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어도 세계 강대국들은 끝끝내 조선 독립을 외면했으며 당시 일본은 제1차대전의 승전국이었기 때문에 어떤 나라가 압력을 가해 조선을 독립시키게 하는 일은 불가능하였고 결국 조선의 독립은 일본이 2차대전의 패전국이 되는 1945년 8월 15일로 미루어지게 됩니다.
4) 피해규모
박은식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3.1 운동에 참여한 시위 인원은 약 200여 만 명이며 7,509명이 사망, 15,850명이 부상, 45,306명이 체포되었으며, 헐리고 불탄 민가가 715호, 교회가 47개소, 학교가 2개소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3.1 운동은 최초의 시민 주도 운동이며 이전과는 달리 어떤 특정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게 아니라민간과 지식인들이 스스로 일본의 식민 통치에 반감을 느끼고 가담했기 때문이다. 또한 초기 운동의 시작에 한해서 비폭력 투쟁을 넘어 적극적 저항으로 나아가는 것도 민초들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며. 그 결과, 33인들 중에서 한용운을 비롯한 소수를 제외한 이들의 투옥 기간이 5년 미만이었던 것에 비해서, 후기 시위 주동 인물들은 10~15년이 넘는 장기형을 선고 받게 되는 것에서 어느 쪽이 더 위협적이었는지가 단적으로 드러나고있습니다.
33인의 민중피해 대책이 전혀 고려되지않았으며 자신들의 안위를 먼저걱정하여 피신하기에 급급하였으며 그중 일부 인사는 일제의 회유책에 넘어가 친일의길을 걸었던 아픈역사가 있습니다.
5) 미완성의 저항운동
일제에 의해 집계된 200만명은 당시 조선 인구의 6.31%에 달했습니다. 이보다 훨씬 도시화와 교통 및 통신 발달이 진행된 1987년 6월 항쟁도 참여 인원은 전인구의 4.8% 정도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 기록이 깨지는 것은 2016년 박근혜 국정농단퇴진 촛불시위 였습니다. 다만 이 기록은 주최 측의 추산이라 과대집계되었을 가능성이 크고 3.1 운동의 참가자 수도 일제가 과소집계하였을 가능성이 크며, 인구 비율로도 3.1 운동이 더 많이 참가했기에 여전히 한국사 최대의 시민 운동이라고 해도 맞는 말이며, 많은 자료에서 3.1 운동을 한국사 최대의 시민 운동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지도부가 부재한 상황에서의 산발적 저항이라는 형태의 한계를 드러낸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비폭력 만세 저항 운동의 문제라는 것은 후기 농민과 학생층이 주도하는 과정에서는 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반대로 지나치게 산발적으로만 이루어져서 일본제국주의 무장경찰의 해산 움직임에 각개 격파 당하는 상황이 벌어졌으며. 3.1 운동이 전국에서 무려 2개월 정도에 걸쳐서 일어났다는 것 또한 일이 큰 성공을 거둘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주도층이 따로따로 움직인 덕분에 3.1 운동을 전후로 국내의 저항 운동은 침체기에 빠지기 시작했고, 저항 노선은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한계는 독립운동 세력의 개혁을 불러왔고, 단결을 통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하였으며 실제로 이 시기 임시정부가 곳곳에 설립되었으나 몇 개는 실질적인 영향력이 없었고, 3개의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창립에 참여하였습니다.
또한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종의 '민간의 재발견'이 이루어지게 된 것도 3.1 운동이 계기가 된다. 이전 지식인들에게 민간인은 말 그대로 교화의 대상이지 독립운동의 동반자적 위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때문에 이전 시기 영웅 혹은 초인의 출현을 기대하거나, 한일병합 이후에 완전히 자포자기에 빠지는 모습이 보여지는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3.1 운동 이후에는 그에 따른 시각이 변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 민간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활동이 적극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되었습니다.
3,1만세운동은 우리민족의 저력을 일본제국에게 조선지배의 부당함을 항의한 대규모 저항운동이었으며 서양을 비롯한 열강에게 조선이 자주국가였는점을 만방에 알리는 계기가되었습니다.
3.1만세운동 104 주년을 맞이하여 3.1정신을 가슴깊이 새기면서 조국분단을 극복하고 민족이 하나되어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다시한번 확인하고 세계와 미래로 나아가는 주춧돌로 삼아야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3년 계묘년 3월1일아침
상임대표의장 윤호상
부의장박남순/대구상임대표 김만덕/경북상임대표 이성수/부산상임대표 이춘근
경기상임대표 정명호/충북상임대표 박종래/전남상임대표 선용규/광주상임대표 이창준
운영위원장 정국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