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임진왜란 시기 康津 지역의 의병활동과「金陵倡義錄」
임진왜란 시기 康津 지역의 의병활동과「金陵倡義錄」
김만호*
* 전남대학교 사학과 강사
목 차
1. 머리말
2. 「금릉창의록」 분석
3. 금릉창의와 그 의미
4. 맺음말
[초록]
「金陵倡義錄」은 임진왜란 시기에 금릉 즉, 康津 지역에서 창의한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
다. 이 자료는 단독 문건이 아니라 개인의 문집에 부가적으로 실려 있는 것으로 창의한 자의
이름과 간략한 설명이 기재되어 있다. 현재까지 확인한 바로는 모두 7종의 「금릉창의록」이
전해지고 있다. 우선 문집에 4종이 실려있는데 金應鼎의 懈菴文集, 郭期壽의 寒碧堂
集, 黃大中의 兩蹇堂集, 趙彭年의 溪陰集이 그것이다. 또한 湖南地方壬辰倭亂史
料集 Ⅲ에도 2종이 실려있고, 花巖祠誌(1927년 刊)에서도 확인하였다. 이처럼 다양한
판본이 존재하지만 내용상으로는 문집에 실린 4종이 기본이 되고 있다.
편제를 보면 우선 이름을 적고 아래에 本貫과 字를 割註 형식으로 적었다. 그리고 그 아
래에 관직이나 과거합격 내역, 임진왜란과 관련된 활동 내역을 담고 있다. 총 39명의 인물을
싣고 있는데, 강진의 인물은 25명이고 타지역의 인물이 14명이었다. 이렇게 보면 「금릉창의
록」은 강진만이 아니라, 강진 지역의 의병활동과 관련된 자들을 함께 적은 기록이라 하겠다.
또한 강진 내에서는 성전, 작천, 병영, 옴천면 출신자들이 주로 입록되어 있었다. 가문별로
는 原州 李氏, 海南 尹氏, 淸州 金氏가 다른 가문보다는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금릉창의록」을 작성한 시기는 1606년 이후로 보이며, 작성을 주도한 세력은 金應鼎, 金億
秋, 趙彭年, 李浚 등으로 보인다.
292 지방사와 지방문화 19권 2호
「금릉창의록」을 통해 강진 지역에서 결성되었던 금릉창의 활동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
할 수 있었다. 김억추가 檄文을 보냈다든지, 김응정, 이준, 鄭名世, 박대기 등이 병량미와
의병을 모았던 사실 등을 새롭게 밝혀냈다. 즉, 지금까지 강진 지역의 의병활동은 정유재란
당시를 중심으로 정리되었지만, 「금릉창의록」을 통해 임진년의 상황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
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하겠다. 또한 이 기록은 전쟁을 수습해 가는 과정에서 그러한 사실
을 기록하여 후대에 남기려 했던, 강진 지역 내의 재지 사족들의 동향도 함께 가늠할 수 있
게 해주는 중요한 사료라 하겠다.
[주제어] 임진왜란, 강진, 금릉창의록, 호남, 의병
1. 머리말
임진왜란 발발 초기 일본군은 조선의 관군을 상대로 승승장구 하였지만,
그들의 일방적 공격은 곧 지역별로 擧義한 의병에 의해 막혔다. 일본군의 초
기 공격방향에서 벗어나 있었던 호남 지역에서도 의병이 결성되어 국가적 위
기를 극복하고자 했다.1) 이 지역을 대표하는 의병장들로는 高敬命, 金千鎰,
崔慶會, 任啓英 등을 들 수 있으며 長城 지역의 南門倡義도 주목할 만 한다.
특히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보여준 호남 의병들의 희생정신은
전투의 승패와 무관하게 높이 평가되었다. 이러한 호남 의병들의 활동은 경
상도 지역의 그것과 비교되면서 각기 ‘勤王的 의병’과 ‘鄕保的 의병’으로 그
성격이 규정되기도 했다.
康津 지역의 경우 임진왜란 당시에는 전라도 병마절도사영(이하 전라병
영)이 자리하고 있어서 전라도 지역 관군(육군)의 거점 역할을 담당하고 있
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라감사 李洸은 전라병사 崔遠으로 하여금 전라
도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4만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北上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직후 강진의 전라병영은 병사 최원이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도중에 최원은 휘하의 병사들과 함께 金千鎰의 부대에 합류하여 江華를 지
1) 호남의병에 대한 연구는 최근 하태규에 의해 정리된 바 있다. 하태규, 2015, 「임란 호남의병에 대한
연구현황과 과제」, 歷史學硏究 59, 湖南史學會.
임진왜란 시기 康津 지역의 의병활동과 「金陵倡義錄」 293
켰다.2) 즉, 1592년 6월 경 강진 지역은 官軍의 공백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임진년(1592년)에는 일본군이 강진 지역을 침략한 바 없었다.3) 하
지만 침략이 전혀 없었다고 해서 이 지역에서 의병이 결성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전쟁 발발 소식을 접한 강진 지역에서도 이 지역의 사족들이 창의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이 글에서 검토할 「金陵倡義錄」(이하 「창의록」)이 바로
전쟁 초 강진 지역의 사정을 전하고 있다.
「창의록」은 임진왜란 시기에 금릉 즉, 康津 지역에서 창의한 인물들에 대
한 기록이다. 물론 이 자료는 개인의 문집에 부가적으로 실려 있는 것으로
창의한 자의 이름과 간략한 행적만 기재되어 있다. 또한 「창의록」은 수록의
경위를 파악할 수 있는 관련 자료가 전혀 없기 때문에, 이 문건의 초안을 작
성한 인물(들)이나 작성한 시점 역시 特定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자료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를 분석하려고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동
안 강진 지역의 의병활동은 정유재란기를 중심으로 설명되었기 때문에 전쟁
초 강진 지역의 동향을 파악할 수 없었다.4) 그런데 「창의록」은 바로 이 시기
강진 지역의 의병활동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자료라고 생각한다.
현재까지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문집에 실린 「창의록」이 4종, 湖南地方
壬辰倭亂史料集 Ⅲ에 수록된 2종,5) 花巖祠誌에 담겨있는 것까지 하면 총
7종이 존재한다. 또한 수록된 인물 역시 그 수가 다르고 배열순서도 동일하
지 않으며, 인물의 행적 역시 판본별로 미세한 차이가 있다. 그러함에도 지금
까지 「창의록」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진행된 바 없었다.6) 이 글을 통해
「창의록」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임진왜란 시기 강진 지역의 의병활동에 대
해서도 조명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Ⅱ장에서는 「창의록」을 분석할 것이다. 우선 판본을 검토
2) 燃藜室記述 16권, 宣祖朝故事本末, 金千鎰․梁山璹.
3) 선조실록 39권, 선조 26년(1593) 6월 5일(무자).
4) 김동수, 2007, 「정유재란기 호남지역 의병의 향토방위전 사례 검토」, 歷史學硏究 30, 湖南史學會.
5) 全羅南道壬亂史料編纂委員會 編, 湖南地方壬辰倭亂史料集 Ⅲ, 全羅南道, 1992.
6) 지금까지 「창의록」을 언급한 연구는 조원래(2012, 「임진왜란과 의병항쟁」, 강진군지 Ⅰ, 강진군
지편찬위원회)와 김덕진(2015, 손에 잡히는 강진역사, 남양미디어)의 것을 들 수 있다. 하지만
두 글 모두 「창의록」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지는 않았다.
294 지방사와 지방문화 19권 2호
하여 수록 인물의 수나 순서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등을 밝혀보고자 한다.
다음으로는 수록된 인물의 출신지별․본관별로 정리하여 수록된 인물들의
성격을 파악해 보려고 한다. 그리고 「창의록」 작성 시기와 작성자를 추정해
보겠다. 이를 위해 「金陵司馬案」이나 강진의 「留鄕座目」과 같은 자료도 활용
할 것이다.7) Ⅲ장에서는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임진왜란 당시에 결성된
것으로 보이는 강진의 금릉창의에 대해 조명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금릉
창의 구성원들의 활동양상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만약 이 작업이 성공한다면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금릉창의록」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가능해질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전쟁 초 강진 지역의 창의과
정 및 주요한 활동을 조망해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2. 「금릉창의록」 분석
1) 판본 검토
우선 7종의 「창의록」을 개괄적으로 검토해 보겠다. 「창의록」은 金應鼎
(1527~1620)의 懈菴文集, 郭期壽(1549~1616)의 寒碧堂集, 黃大中(1551
~1597)의 兩蹇堂集, 趙彭年(1549~1612)의 溪陰集 이렇게 4종의 문집
에 실려 있다. 이들은 모두 木活字본이며 수록순서나 내용은 김응정과 곽기
수의 것이 유사하고 황대중과 조팽년의 것은 약간 차이를 보인다. 호남지방
임진왜란사료집 Ⅲ(이하 사료집)에도 「창의록」 2종이 소개되어 있는데,
하나는 “(三) 金陵倡義錄”에 포함된 것으로 필사본이다(이하 사료집 三).
7) 「金陵司馬案」에 대해서는 윤희면의 연구(2013, 「조선시대 전라도 司馬案 연구-강진 사마안 사례
-」, 호남문화연구 53, 호남학연구원)를 참고하길 바란다. 사마안 자료는 全羅南道 編, 全南의
鄕校(1987, 全羅南道, 32~35쪽)과 李炳在의 康津鄕校誌(1981, 朗州印刷社, 47~49쪽)에 수록된
것으로 하였다. 더불어 윤희면의 논문 뒤에 첨부된 <강진 사마안 생원 진사 명단>이라는 표도 참조
하였다. 강진의 「留鄕座目」은 양광식이 정리한 (2011, 강진유향좌목, 강진군 문화재연구소)을 중
심으로 살필 것이다. 이 책에는 원본 이미지가 뒤편에 실려 있어서 함께 검토하였다.
임진왜란 시기 康津 지역의 의병활동과 「金陵倡義錄」 295
解題에 따르면 이 「창의록」은 김응정의 해암집 附錄으로 전해오며 후일에
는 화암사지에 再錄되어 있다고 했다.8) 그래서 김응정의 문집에 수록된
「창의록」과 사료집 三을 비교해보니 인물의 수록 순서와 내용이 모두 동
일했다. 단, 朴麒壽의 활동 내력에 “鄭○鄭○○”이라는 부분이 추가되어 있는
것은 달랐다. 사료집에 수록된 두 번째 「금릉창의록」은 “(二五) 弄圃 柳希
達 神道碑”의 참고용으로 실린 것이다(이하 사료집 二五). 확인한 결과 이
판본은 황대중의 문집에 실린 「창의록」을 母本으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형
식과 내용 측면에서 앞에서 언급한 5종의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9) 마지막으
로 화암사지에 수록된 「창의록」이 있는데, 이것은 황대중의 문집에 있는
것과 동일하였다. 단 “金陵倡義錄”이라는 제목 아래에 “趙溪陰名彭年黃兩蹇
堂名大中文集”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는 것만 달랐다.
정리하자면, 「창의록」은 현재 총 7종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중 문집에 실
린 4종이 다른 3종의 모본이 되고 있었다. 모본이 되는 즉, 문집에 실려 있는
「창의록」 중에서도 김응정의 문집과 곽기수의 문집에 실린 것이 유사하고
황대중과 조팽년의 문집에 실린 것은 약간 다르다. 때문에, 「창의록」은 크게
세 종류의 계통이 존재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판본의 선후관계를 파악해 보자. 이를 위해 모본이 되고 있는
문집 수록 「창의록」만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다. 먼저 각 문집들의
序文과 跋文 작성 내역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는 아래의 <표 1>로 정리하
였다.
8) 해제에는 “花岩桐誌”라고 되어 있지만 오타로 보인다. 사료집, 67~72쪽에 사료집 三의 「금릉
창의록」이 실려 있다. 화암사는 임진왜란 때에 순절한 尹綸, 尹紳, 尹致敬, 尹履慶, 尹益慶, 尹東喆,
尹東老 등 해남윤씨 1門7忠의 신주를 모시고 있으며, 현재 강진향토문화유산 제9호로 지정되었다.
9) 이 판본에는 “金陵倡義錄”이라는 題下에 “金陵康津古號壬亂倡義會盟”이라 적혀 있다. 즉, 「금릉창
의록」이 임진왜란 때 금릉 지역에서 창의한 회맹록임을 설명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 문건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다. 한편, 유희달 부분에는 “竹山縣監居羅州”라고 하였다. 호남절의록에는 접
반관으로 활동한 이후 竹山府使를 제수 받았다고 했다. 선조실록을 보면 유희달은 1601년에 죽
산현감으로, 1603년에 죽산부사로 확인되기 때문에 사료집 二五는 잘못된 기록은 아니다. 다만,
기존 5종의 「창의록」에서는 임진왜란 중의 승진 내역은 기록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이 판본과
차이가 있어 보인다.
序跋 / 後序
郭期壽(1549~1616), 寒碧堂集 徐宗伋, 1742년10)
郭鍾錫, 1905년11)
郭繡翊, 1930년
金應鼎(1527~1620), 懈菴集 權震應, 1773년
奇宇萬, 1905년
鄭義林, 1905년 吳漢奎, 1905년
黃大中(1551~1597), 兩蹇堂集 崔益鉉, 1894년
鄭義林, 1893년
崔益鉉, 1896년
趙彭年(1549~1612), 溪陰集 奇宇萬, 1899년 趙冕衡, 1899년
<표 1> 문집별 서문, 발문 작성 내역
296 지방사와 지방문화 19권 2호
이처럼 「창의록」을 싣고 있는 4종의 문집 중 가장 먼저 성립된 것으로 보
이는 것은 곽기수의 것이다. 물론 「창의록」이 서문 작성시점인 1742년부터
문집에 포함되었었는지, 아니면 문집이 간행된 1930년에 가서야 포함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김응정 문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
다. 다만, 위의 표를 통해 서문 작성시점을 보면 곽기수․김응정의 문집은
18세기 중후반에, 황대중과 조팽년의 19세기 후반이기 때문에 적지 않은 시
간차가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실제로 내용상으로도 곽기수․김응정의 문집
에 실린 것과 나머지 문집에 실린 「창의록」의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이러한
점을 보더라도 두 판본은 수록인물이나 순서, 활동 내용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일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이제 4종류의 판본 중 서문 작성 시점이 가장 빠른 郭期壽의 寒碧堂集
에 수록된 「창의록」을 통해 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창의록」은 “金陵
倡義錄”이라는 제목 하에 38~39명에 달하는 인물들이 나열되어 있다.12) 먼
저 이름을 기록한 후 아래에는 割註형식으로 本貫과 字를 나란히 적어두었
다. 號는 모두 싣고 있지 않았다.13) 본관과 자 아래에는 다시 이름과 동일한
10)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제공하는 寒碧堂先生文集에 대한 주기사항 중 서문을 작성한 서종급의 생몰
년(1688~1762)을 감안하지 않고 壬戌年을 1922년으로 잘못 파악했다.
11)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제공하는 주기사항에는 곽종석을 “鄭宗錫”으로 誤記했다.
12) 조팽년의 계음집에만 “金陵倡義錄”이 아닌 “倡義錄”이라고 되어 있다.
13) 사료집 二五에 실린 「금릉창의록」에는 이름을 적고, 아래에 작은 글씨로 字와 號를 병기한 후
아래에 본관을 적고 그 아래에 활동내역을 적었다. 호를 추가로 기록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으
나 柳希達, 郭期壽, 鄭名世, 金應鼎, 馬應房, 朴大器 등 6명만 호를 기록했을 뿐, 나머지 33명은
임진왜란 시기 康津 지역의 의병활동과 「金陵倡義錄」 297
크기로 해당 인물의 활동 내역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인물별로 수록한 내용이
나 형식이 조금씩 다르다. 임진왜란 당시의 관직여부, 과거합격여부, 임진왜
란 때의 주요한 직책 등이 선별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柳希達, 金億秋, 尹履慶, 崔遇, 李億福, 李彥贇, 趙彭年은 당시
의 관직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중 김억추와 이언윤은 임진왜란 당시의 활동
상도 병기되어 있다. 尹俔의 경우에는 무과에 합격했다는 사실만을 기록했으
며, 郭期壽와 尹東老는 ‘義士’로만 기록되어 있을 뿐 다른 활동들은 전혀 적
혀 있지 않다.
이처럼 「창의록」에는 각 인물별 구체적인 활동상이 서술되어 있지 않다.
참여한 전투 및 전투의 결과, 戰功에 따른 贈職이나 여타의 포상 내역도 모
두 빠져있다.14) 1799년에 간행된 湖南節義錄만 보더라도 이름과 本貫, 字
號, 先祖, 사승관계, 개인의 성격과 같은 것들이 우선 제시되고 있으며, 임진
왜란 때의 구체적인 전공과 포상 내역 등이 차례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비
하면 「창의록」의 내용은 매우 소략하다고 할 수 있겠다.
다음은 인물의 배열 순서를 문집별로 비교․대조해 보려고 한다. 이를 <표
2>로 정리해 보았다. 수록된 인물의 수나 그 순서만 놓고 보면 곽기수와 김
응정의 문집에 실린 「창의록」은 동일한 판본이고, 황대중과 조팽년의 문집에
실린 「창의록」은 서로 유사한 점이 많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두 종류의 판
본의 차이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선 김응정․곽기수 문집의 16
번째 인물 金汝重이 황대중의 양건당집에서는 21번째로, 또 17번째의 金
應鼎은 26번째로 밀려났다는 점이다. 둘째, 황대중과 조팽년의 문집에 실린
「창의록」에는 새롭게 김덕란이 추가되었다. 셋째, 조팽년의 계음집은 대체
로 황대중의 것의 순서와 동일하지만, 황대중 문집의 7번째 인물 李億福이
14번째로, 14번째의 李楠이 7번째로 이동하는 등의 차이가 있다.
우선 이렇게 수록된 인물의 수와 순서가 문집별로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
적혀 있지 않다.
14) 김억추는 1592년 순창현감을 역임하다가 나중에 1597년 전라우수사로 부임하지만, 「창의록」에는
‘순창현감’으로만 기록하고 있다.
寒碧堂集 懈菴文集 兩蹇堂集 溪陰集
1 柳希達柳希達柳希達柳希達
2 金億秋金億秋金億秋金億秋
3 尹履慶尹履慶尹履慶尹履慶
4 崔遇崔遇崔遇崔遇
5 鄭麒壽鄭麒壽鄭麒壽鄭麒壽
6 尹俔尹俔尹俔尹俔
7 李億福李億福李億福李楠
8 尹東老尹東老尹東老尹東老
9 李彥贇李彥贇李彥贇李彥贇
10 趙彭年趙彭年趙彭年趙彭年
11 郭期壽郭期壽郭期壽郭期壽
12 林懽林懽林懽林懽
13 黃大中黃大中黃大中黃大中
14 李楠李楠李楠李億福
<표 2> 문집별 수록 인물의 순서
298 지방사와 지방문화 19권 2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곽기수․김응정․황대중․조팽년 등 현재 「창의록」
을 수록하고 있는 이들이 함께 모여 작성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어느 시점
에 작성된 「창의록」을 후대에 문집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옮겨 적으면서 차
이가 발생했던 것 같다.
다음으로는 김덕란의 출입여부에 대한 것이다. 살펴본 것처럼 곽기수와 김
응정의 문집에는 누락되어 있고, 황대중과 조팽년의 문집에는 포함되어 있
다. 김덕란의 거주지는 강진군 城田面 金塘里 金塘마을이고 김응정은 兵營面
三仁里에 살았다. 만약 최초의 작성자가 김응정이었다면 김덕란이 실수로 누
락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곽기수는 강진군 성전면 松月里 大月마을에 살
았기 때문에 인근 마을에 살던 김덕란의 존재를 모를 리 없다. 즉, 곽기수의
문집에 실린 「창의록」은 김응정의 그것을 그대로 옮겨온 것임을 알 수 있고,
또한 곽기수와 김응정은 최초의 작성자가 아니라 할 수 있다. 황대중과 조팽
년 쪽에서 김덕란이 누락된 것을 확인했고 그래서 그를 추가로 입록시켰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15 丁景達丁景達丁景達丁景達
16 金汝重金汝重李潛李潛
17 金應鼎金應鼎李浚李浚
18 李潛李潛申仁浚申仁浚
19 李浚李浚梁景福梁景福
20 申仁浚申仁浚金萬齡金萬齡
21 梁景福梁景福金汝重金汝重
22 金萬齡金萬齡文英凱文英凱
23 文英凱文英凱洪繼勳洪繼勳
24 洪繼勳洪繼勳鄭名世鄭名世
25 鄭名世鄭名世全夢星全夢星
26 全夢星全夢星金應鼎金應鼎
27 馬應房馬應房馬應房馬應房
28 李繼鄭李繼鄭李繼鄭李繼鄭
29 朴大器朴大器朴大器朴大器
30 任自英任自英金德鸞(新) 金德鸞(新)
31 廉傑廉傑任自英任自英
32 金應秋金應秋廉傑廉傑
33 朴麒壽朴麒壽金應秋金應秋
34 鄭彦佑鄭彦佑朴麟壽朴麟壽
35 金大福金大福鄭彦佑鄭彦佑
36 尹瑞中尹瑞中金大福金大福
37 魏德和魏德和尹端中尹瑞中
38 李止得李止得魏德和魏德和
39 李止得李止得
※ 음영은 문집의 저자이고, 밑줄은 문집별 異體字이며, ‘(新)’은 추가된 인물을 뜻한다.
임진왜란 시기 康津 지역의 의병활동과 「金陵倡義錄」 299
마지막으로 인물 수록 순서에 일정한 기준이 있는지를 검토해 보았다. 하
지만 생몰년 순서도 아니었고 과거합격 이력이나 관직의 높고 낮음도 그 기
준이 아니었다. 거주지별도 정리한 것도 역시 아니었다. 네 종의 「창의록」에
조금씩 변화가 포착되지만 몇 명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동일한 순서를 유지하
고 있다. 이러한 점은 문집 작성 단계에서도 「창의록」의 인물 배열순서에 별
다른 문제점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신지 인물 합계
康津
성전 郭期壽, 金大福, 金德鸞, 李 楠, 李億福, 李彥贇, 李 俊
24명
작천 金億秋, 金應秋, 黃大中, 馬應房, 尹東老,15) 洪繼勳
병영 金應鼎
강진읍 任自英, 尹履慶
옴천 趙彭年
도암 金萬齡
신전 李 潛
군동 崔 遇, 朴麟壽
칠량 廉 傑
불명 申仁浚, 梁景福
長興丁景達, 金汝重, 文英凱, 鄭名世, 魏德和5명
羅州柳希達, 林 懽, 李止得, 鄭彦佑4명
靈巖朴大器, 全夢星, 李繼鄭3명
海南尹 俔, 尹端中2명
務安鄭麒壽1명
<표 3> 출신지별 인물 정리
300 지방사와 지방문화 19권 2호
2) 수록 인물 분석
우선, 수록된 39명의 출신지를 정리해보면 아래의 <표 3>과 같다. 이는
「창의록」에 수록된 인물들 중 강진 지역 출신자는 어느 곳에 집중되었는지,
혹은 타지역 출신자의 비중은 어느 정도인지를 드러내 줄 것이다. 사실 「창
의록」에는 수록 인물들의 거주지가 별도로 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호
남절의록에 표시된 居鄕 관련 정보를 참고하였다. 물론 이 자료에 명시된
정보가 1799년(정조 23)을 전후한 시기의 것임을 알고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정보라 생각된다.
위 표로 정리한 것처럼, 「금릉창의록」에 수록된 39명 중 강진 출신 인물은
24명으로 전체의 61.5%에 해당한다. 그 다음으로 장흥, 나주, 영암 지역이
15) 윤동로의 居鄕은 堂索으로 나오는데, 당색은 현재 작천면에 속한다(양광식, 강진 유향좌목, 강진
군 문화재연구소, 2011, 59; 64쪽).
연번 본관 명수 이름 연번 본관 명수 이름
1 原州 李4 李 楠, 李億福, 李繼鄭, 李 浚16 文化 柳1 柳希達
2 海南 尹4 尹履慶, 尹 俔, 尹東老, 尹端中17 光山 李1 李彥贇
3 淸州 金3 金億秋, 金應秋, 金大福18 全州 李1 李 潛
4 咸陽 朴2 朴大器, 朴麟壽19 咸平 李1 李止得
5 海美 郭1 郭期壽20 羅州 林1 林 懽
6 金海 金1 金德鸞21 長興 任1 任自英
7 度康 金1 金應鼎22 光山 鄭1 鄭彦佑
8 安山 金1 金萬齡23 羅州 鄭1 鄭麟壽
9 靈光 金1 金汝重24 靈光 丁1 丁景達
10 長興 馬1 馬應房25 晋州 鄭1 鄭名世
11 南平 文1 文英凱26 天安 全1 全夢星
12 平山 申1 申仁浚27 漢陽 趙1 趙彭年
13 濟州 梁1 梁景福28 海州 崔1 崔 遇
14 坡州 廉1 廉 傑29 南陽 洪1 洪繼勳
15 長興 魏1 魏德和30 長水 黃1 黃大中
<표 4> 본관별 인물 정리
임진왜란 시기 康津 지역의 의병활동과 「金陵倡義錄」 301
많고, 해남과 무안 출신 인물도 확인된다. 타지역 인물들이 38.5%나 포함되
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창의록」이 강진 지역 인물들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강진 지역에서 창의할 때 도움을 주었거나 관련된 인물들까지 포함
시킨 자료라는 것이 명확해 진다. 그러함에도 강진의 창의에 타 지역 인물이
40%에 가깝게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의문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시도한 인물들의 지역별 구분은 행정구역에 따른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살펴야 한다. 즉, 강진의 성전과 작천을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은 하나의 생활권으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강진에 인접
한 장흥, 영암, 해남 지역의 인물을 포함한다면 전체의 87%에 해당한다. 즉,
강진의 금릉창의는 강진 북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인근의 장흥, 영암, 해남
지역의 인물들과 함께 결성하였음이 분명하다.
다음은 본관별로 정리해 볼 텐데, 특정 가문의 위세가 반영되었는지도 궁
금하다.
302 지방사와 지방문화 19권 2호
이를 보면 「창의록」에는 본관을 달리하는 다양한 인물이 수록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동시에 원주 이씨, 해남 윤씨, 청주 김씨 가문에서는 3명 이상의
인물이 입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이 문건이 작성될 시점에 강진 지역을 장
악하고 있었던 사족세력이 대체로 그들일 것임을 추정 가능케 해 준다.
그런데, 이중 원주 이씨 가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남(1505
~1555)16)과 이억복(1537~1586)의 생몰년을 보면 임진왜란 발발 이전에 사
망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창의록」에 수록된 인물 중 유일하게 이 두
사람이 임진왜란을 겪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의문은 다음에 살펴볼 「창의
록」 작성 시기와 작성자 부분에서 어느 정도 해결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3) 작성 시기와 작성자
「창의록」이 작성된 시기는 대략 임진왜란(1592년, 선조 25) 이후부터 곽
기수의 한벽당집의 서문이 작성된 1742년(영조 18) 사이로 추정된다. 하
지만 선조의 문집을 발간하기 위해 새롭게 작성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즉, 임진왜란 종전 이후의 시점에 작성되었던 이 문건을 문집 발간하는 과정
에서 수록한 것으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초의 작성 시기는 임진
왜란 이후의 한 시점이 될 것이다. 더 좁혀 본다면, 금릉창의에 동참했던 이
들이 살아있을 때 혹은 동참자의 자손들이 직접 보고 들었던 내용일 가능성
이 높다.
이를 위해 먼저 수록된 39명의 생몰년과 작성 시점을 특정할 수 있는 과거
급제 내력을 위주로 검토해 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창의록」 작성의 上限을
추정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주목한 인물은 최연소자들이었다.
16) 原州李氏世譜에서 확인되는 이남은 “弘治乙丑生” 즉, 연산군 11년(1505)에 태어나 “嘉靖乙卯五
月十三日卒” 즉, 명종 10년(1555)에 죽었다. 족보에서는 “中宗辛卯年武科”라 하여, 이남이 중종
26년(1531)에 무과에 합격한 사실이 확인된다. 이후 이남은 사헌부 감찰, 光陽 및 茂長의 현감을
역임한 바 있다. 明宗實錄에는 을묘왜변 때 海南縣監 邉協이 포위되자 전 무장현감 이남이 倭
人들과 접전을 벌이다가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明宗實錄 18권, 명종 10년(1555) 5월 21일
(갑인).
임진왜란 시기 康津 지역의 의병활동과 「金陵倡義錄」 303
「창의록」에 입록된 인물 중 윤동로와 이준은 동갑인데, 둘 모두 임진왜란 발
발 당시에 14살로 구성원 중에는 가장 어렸다. 윤동로는 “義士”로만 기록되
어 있어서, 그의 행적을 통해 이 문건의 작성 시점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이준의 경우는 다르다. 함께 이름을 올리고 있는 이계정의 조카인
이준의 경우 「창의록」에 “武科助軍糧器仗”라고 되어 있다. 原州李氏世譜
에 따르면 선조 庚子年에 생원시에 합격했고, 丙午年에 무과에 급제했다고
되어 있다.17) 즉, 이준은 1600년(선조 33)에 생원시에 입격하였으며 1606년
(선조 39)에는 무과에 합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창의록」이 작성
된 시점은 적어도 1606년 이후가 될 것이다.
앞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창의록」 작성의 원칙 중 하나는 임진왜란 당대
의 사정만 기록한다는 것이었다. 수록된 인물이 나중에 과거에 합격하기도
하고, 관직에 오르지만 「창의록」에는 일체 그러한 변동사항을 기록하지 않았
다. 하지만, 유일하게 이준의 내용에서만 임진왜란 이후의 사정 즉, 무과합격
내역이 담겨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작성자를 논할 때 다시 언급하도록
하겠다.
다음은 「창의록」을 작성한 자가 누구였는지, 혹은 어떤 가문에서 주도한
것인지를 살펴보자. 이를 위해 두 가지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첫째, 강진
출신 인물들의 거주지를 검토해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수록된 39명의 거주
지가 다양하지만 타지역에서 금릉창의자들의 명단을 주도해서 작성했을 가
능성은 낮아 보인다. 때문에 강진 내의 인물들에 집중하기로 한다. 아마도
창의의 거점이 된 지역의 인물들이 「창의록」 작성을 주도했을 것이기 때문
이다.
둘째, 전쟁 이후에 「창의록」이 작성된 점을 염두에 둔다면 강진 지역의 유
력한 가문에 속한 인물이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건을 작성한 이유는 先祖
현창에 대한 의지와 노력이 있어야 하고, 또 이를 뒷받침할 지역 내의 기반
이 갖추어져 있는 세력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주도인물 분석을 위해서
17) 李學培 編, 1974, 原州李氏世譜 1卷, 卯洞追遠堂.
거주지 이름 본관 생몰년 「留鄕座目」「金陵司馬案」科擧
1
성전
郭期壽 海美1549~1616 - 癸丑(1613) 文科
2 金大福淸州1558~? 1590.12.3
3 金德鸞 金海1557~1597 -
4 李楠 原州1505~1555 1549.1.26. 武科
5 李億福原州1537~1586 1549.1.26.
6 李彥贇光山1543~1592 1549.1.26.
7 李浚原州1579~1645 - 武科
8
작천
金億秋淸州1548~1618 1589.2.30. 武科
9 金應秋淸州생몰년미상 - 武科
10 馬應房長興1524~1597 1549.1.26.
11 尹東老海南1579~1660 1626.4.19.18)
12 黃大中長水1551~1597 -
13 洪繼勳 南陽1538~1597 -
14
강진읍
尹履慶海南1550~1597 1589.2.30.
15 任自英 長興생몰년미상 -
16
군동
朴麟壽咸陽생몰년미상 -
17 崔遇海州1543~1613 -
18 병영 金應鼎 道康1527~1620 1590.12.3.
19 옴천 趙彭年漢陽1549~1612 - 癸丑(1613) 文科
20 도암 金萬齡安山?~1592 -
21 신전 李潛 全州1561~1593 -
22 칠량 廉傑坡州1545~1598 -
23
불명
申仁浚平山?~1598 - 武科
24 梁景福濟州?~1592 -
<표 5> 「창의록」 내 강진 출신 인물 분석
304 지방사와 지방문화 19권 2호
는 비슷한 시기에 작성된 강진의 「留鄕座目」과 「金陵司馬案」을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창의록」에 수록된 강진의 인물을 全數調査하여 정리하
면 아래의 <표 5>과 같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들을 지도에도 표시해 보았다.
18) 양광식은 天啓 6년을 광해 13년(1621)로 보았으나(강진유향좌목, 강진군 문화재연구소, 2011,
29쪽), 이는 인조 4년(1626)이 맞다.
<그림 2> 강진 출신 인물의 지역별 분포
임진왜란 시기 康津 지역의 의병활동과 「金陵倡義錄」 305
지도상에 인물들을 배치해 놓고 보면, 「창의록」의 작성 주도 세력이 확연
하게 드러난다. 즉, 성전, 작천, 병영, 옴천 등 주로 강진의 북부 지역에 해당
하는 이들이 중심이 되었던 것 같다. 참고로 고려 때의 道康郡의 치소는 현
재 병영면 하고리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옛 도강군의 치소를 古郡內面이라
부르기도 했다. 지리적으로 보면 도강현의 옛 치소는 작천면과 맞닿아 있으
며, 북쪽으로 가면 옴천면에 인접해 있다. 그리고 이 도강의 별호가 바로 金
陵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1417년(태종 17)에는 도강과 耽津이 병합되어
康津이 되었는데, 첫 치소는 옛 탐진현의 산성이 있던 강진읍 보은산 지역이
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1429년 다시 치소를 도강의 松溪로 옮기게
되었다. 이 송계가 ‘古康津’이나 ‘古邑面’으로도 불리는 현재의 성전면 수양
리에 해당한다. 그런데 다시 읍치를 탐진 쪽으로 옮기자는 의견이 대두되었
고, 결국 1475년(성종 6)에 치소가 옮겨졌다.19)
이렇게 본다면, 임진왜란 이후 성전, 작천, 병영 즉, 옛 도강 지역 사람들이
거주지 이름 본관 생몰년 「留鄕座目」「金陵司馬案」科擧문집
1
성전
郭期壽 海美1549~1616 - 癸丑(1613) 文科○
2 李浚原州1579~1645 - 武科
3 작천 金億秋淸州1548~1618 1589년 武科
4 병영 金應鼎 道康1527~1620 1590년 ○
5 옴천 趙彭年漢陽1549~1612 - 癸丑(1613) 文科○
<표 6> 「금릉창의록」 작성 주도자
306 지방사와 지방문화 19권 2호
당시에 이미 康津이라는 공식명칭이 있음에도 굳이 「金陵倡義錄」이라는 제
하의 문건을 만들었던 점은 이상의 강진 치소의 변경 과정과도 무관해 보이
지 않는다. 그들은 ‘금릉’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옛 도강 지역 출신자들만
의 단결을 도모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 한다. 결국 이 문건은 강진 전체의
의병 활동을 정리한 것이라기보다는 金陵 쪽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작성된
것이라고 이해해야 옳을 것이다.20) 또한 옛 도강 지역은 북으로는 영암을
거쳐 나주로, 동으로는 장흥을 거쳐 보성으로 나갈 수 있었기 때문에, 타지역
의 인물들과도 교유가 가능했다. 영암의 朴大器, 李繼鄭, 全夢星이나 장흥의
丁景達, 金汝重, 文英凱, 鄭名世, 魏德和과 같은 인물 8명이 「창의록」에 함께
이름을 올렸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이상의 정보들을 종합하면, 「창의록」 작성을 주도한 것으로 보이는 인물
들을 조금 좁혀볼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의 <표 6>이 이를 정리한 것이다.
위와 같이 선정한 이유는 첫째, 문집에 「창의록」을 싣고 있는지의 여부였
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현재 「창의록」은 곽기수, 김응정, 황대중, 조팽년
이렇게 네 명의 문집에만 남아있다. 이중 황대중은 전란 중에 사망했기 때문
에 종전 후에 작성된 「창의록」 작성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이므로 논외로 하였
다. 같은 가문 출신의 인물도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를 제외
19) 김덕진, 손에 잡히는 강진역사, 남양미디어, 2015, 23~25쪽; 53~56쪽.
20) 옛 지명에서 題名을 따오는 것은 단순히 尙古的 의식과 관련되어 있을 수도 있다. 다만, 강진 지역
의 경우 「금릉창의록」에 수록된 인물들이 옛 도강 지역에 집중되어 있음에 주목해 보았다.
임진왜란 시기 康津 지역의 의병활동과 「金陵倡義錄」 307
한 곽기수, 김응정, 조팽년이 우선 검토 대상이 될 것이다. 두 번째 김억추를
추가했는데, 그는 황대중과 이준 등에게 창의를 권했던 장본인으로 금릉창의
를 발의한 인물로 보인다. 특히 김억추는 1597년 전라우수사까지 역임을 했
기 때문에 전쟁 종결 후 강진 지역에서의 그의 입지는 매우 높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마지막으로 이준을 포함시켰다. 그 이유는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임진왜란 이후의 행적을 유일하게 기록해 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선 이들 다섯 명의 관계는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김응정의 문
집을 보면 곽기수, 조팽년, 김억추와 주고받은 시가 남겨져 있어 그들 간에
교유가 있었음은 알 게 해 준다. 조팽년은 김억추를 따라 선조를 호종하기도
했다. 즉,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강진 지역의 주요 인사는 김응정, 김억
추, 곽기수, 조팽년이라 해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21)
첫째는 김응정으로, 임진왜란 발발 초반에 강진 내에서 의병활동을 한 자
는 그가 유일하다. 「금릉창의록」에 수록된 인물 중 생몰년을 파악할 수 있
는 이들 중에 최고령자는 마응방(1524년생)인데, 그 다음이 바로 김응정
(1527년생)이다. 동시에 이들 모두 「留鄕座目」에 이름이 확인되기 때문에
지역 사회에서는 유력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이중 마응방은 정유재란 때 남
원성 전투에서 순절했기 때문에 그가 「창의록」 작성에 참여했을 리는 없다.
결국 강진 지역의 원로 그룹 중에서는 김응정이 유일하게 생존해 있었고,
때문에 「창의록」 작성 시에 금릉창의와 관련된 사정을 가장 잘 아는 이가
바로 김응정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곽기수는 「창의록」이 처음 작성될 때에는 관여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곽기수의 문집 한벽당집에 수록된 「창의록」에만 자신의 활
동 내역이 자세히 적혀 있기 때문이다. 곽기수 혹은 그의 후손들이 전해 받
아든 「창의록」에는 자신의 혹은 先祖의 활동 내역에 “博士”로만 적혀 있었던
것 같다. 절의록에 따르면 곽기수는 선조 12년(1579)에 進士가 되었고, 선
21) 김응정의 족보에 “郭期壽, 趙彭年, 黃大中, 金億秋와 함께 금릉거의에 동창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는 사실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道康金氏大同譜 1권, 道康金氏大同譜所, 1993, 99~
102쪽).
308 지방사와 지방문화 19권 2호
조 16년(1583)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박사와 예조좌랑, 부안현감을 지냈
다. 그런데, 부모님이 연로하여서 곽기수는 강진으로 돌아와 봉양하고 있었
다.22) 즉, 「창의록」에 나오는 관직은 임진왜란 직전 혹은 당시에 가장 높은
것을 적는 것이 일반적인 원칙이기 때문에, 곽기수가 이 문건 작성에 처음부
터 참여했었다면 자신의 관력에 “博士”가 아닌 “縣監”으로 적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보면, 곽기수는 「창의록」의 최초 작성자일 수 없다.
나중에 이 문건을 접한 후손들이 先祖의 임진왜란 이전의 관력을 보충한 것
으로 보이기 때문이다.23)
한편, 현재 남겨진 4종의 「창의록」 중 곽기수와 김응정의 것은 인물의 수
록 순서가 같으며, 김덕란이 빠진 38명으로 수록 인물의 수도 동일하다. 尹端
中을 尹瑞中으로 기록한다든지, 윤서중의 활동 내역도 “率義士”라고 하여 다
른 두 종류의 「창의록」에서는 “率義使”라고 한 점도 동일한 특징이다. 또한
朴麟壽를 朴麒壽로 기록한다든지, 김응정에 대한 활동 내역도 이 두 종은 상
세히 기록한 반면, 황대중과 조팽년의 문집에서는 “參奉”이라고만 기록해 둔
점을 볼 때에도 그러하다. 이렇게 보면, 곽기수는 김응정이 작성한 혹은 김응
정의 집안에 전해오던 「창의록」을 전달받은 것이라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
을 것 같다.
세 번째는 조팽년이다. 곽기수의 문집에는 「金陵司馬齋記」라는 글이 전하
는데 이는 1612년(광해 4) 강진 지역에서 생원․진사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
이 모여 공부하는 곳인 사마재를 설치하면서 지은 글이다. 곽기수에 따르면
강진은 궁벽하여 마을 사람들이 활쏘기를 많이 하고 글을 배우는 선비가 적
다고 하였다. 단, 靑蓮 李後白(1520~1578),24) 崔應斗(1534~?),25) 趙彭年,26)
22) 湖南節義錄 2卷 上, 「壬辰義蹟」, <昭義將> 同倡諸公事實, 郭期壽.
23) 곽기수의 후손들은 전쟁 이후 승승장구 하였다. 우선 곽기수의 아들 郭致堯는 1609년(광해 1)에
生員試에 합격하였고, 1613년(광해 5)에 작성된 「金陵司馬案」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또한 곽치요
의 아들이자 곽기수의 손자인 郭聖龜도 1624년(인조 2)에 生員試에 합격하였다.
24) 이후백은 1555년(명종 10)에 36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
구원 소장[奎 106]).
25) 최응두는 1570년(선조 3)에 37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隆慶四年庚午二月十八日司馬榜
目(국립중앙도서관 소장[古朝26-29-2]).
26) 조팽년은 선조 6년(1573)에 25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萬曆元年癸酉二月二十四日司馬
임진왜란 시기 康津 지역의 의병활동과 「金陵倡義錄」 309
林自新(1540~?)27) 그리고 곽기수28) 자신이 과거에 합격하였다고 하였다.
이처럼 조팽년은 임진왜란 때에 선조를 호종하는 역할을 했으며 전쟁이 수습
된 이후에도 강진 지역에 몇 안 되는 지식인층이었다. 조팽년은 문집을 남기
고 있으며 그 문집에 「창의록」이 실려 있다. 이를 보면 조팽년 역시 이 문건
작성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다음은 김억추이다. 「창의록」을 보면 김억추와 관련된 자들이 상당수 포
함되어 있다. 순창현감 김억추는 전쟁 직후 선조를 扈從하였는데, 그의 문집
顯武實記(1958년 刊, 전남대 소장본) 2권에는 「大駕扈從諸公錄」이라고 하
여 함께 호종한 자들 62명의 명단이 남겨져 있다. 이중 김억추와 함께 「금릉
창의록」에 기록된 자는 魏德和, 趙彭年, 朴麟壽 등 총 3명이다. 또한 동일한
문집 2권에는 「從軍諸公事實」있는데 여기에는 11명이 기록되어 있다. 이중
에서 「창의록」에서도 이름이 확인된 자는 金應秋, 金大福이다. 김응추는 김
억추의 둘째 동생이고, 김대복은 再從弟이다. 또 「參佐諸公錄」도 있는데 35
명의 명단이 나와 있다. 그중에는 丁景達, 尹端中, 李繼鄭, 尹履慶, 黃大中,
李楠, 金應鼎, 洪繼勳 이렇게 8명이다. 총 39명을 기록한 「창의록」 중 김억추
와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고 있는 사람이 13명으로, 이는 전체의 1/3에 달
하는 수치이다. 이는 「창의록」이 김억추 계열의 인물들이 다수를 차지한 명
단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특히 황대중의 문집 兩蹇堂集에 실린 「격왜일기」에는 소위 ‘金陵倡義’
의 대체적인 경위가 밝혀져 있는데, “淳昌郡守 金億秋는 公<황대중>과 尹俔,
李浚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康津은 곧 沿海의 咽喉이다. 급히 창의하여
군사를 모아 城山에 結陣하여 일본군이 오는 길목을 막아라!’라고 했다.”라
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강진 지역의 ‘금릉창의’는 김억추가 황대중, 윤
현, 이준에게 강진이 전략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성산에서 결진하여 일본군
榜目(국립중앙도서관 소장[한貴古朝26-29-3]).
27) 임자신은 선조 15년(1582)에 43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萬曆十年壬午二月二十八日司
馬榜目(조선시대(朝鮮時代) 생진시방목(生進試榜目) 4, 국학자료원, 2008).
28) 곽기수는 선조 12년(1579)에 31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萬曆七年己卯四月初二日司馬
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古 4650-108]).
310 지방사와 지방문화 19권 2호
의 침략을 막으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창의록」에 김억추가 격
문을 전했다라고 하는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볼 때,
「창의록」 작성 시에 김억추가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작지 않았음을 알 수
있게 된다.
마지막은 李浚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창의록」에 실린 인물 중 이남과
이억복은 원주 이씨인데, 둘 모두 임진왜란 이전에 사망하였지만 이름을 올
리고 있다. 또한 이준은 유일하게 「창의록」의 작성 원칙을 어겨가며 임진왜
란 이후에 무과에 합격한 사실까지 기록해 두었다. 그런데 이준 역시 원주
이씨이다. 이남의 아들이 이억복이고, 이준은 이억복의 조카가 된다. 이것만
놓고 보더라도 「창의록」 작성에 원주 이씨 가문이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
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이처럼, 현재 「금릉창의록」을 수록한 문집을 작성한 인물들, 「창의록」에
실린 인물들의 비중을 살펴볼 때 김응정, 김억추, 조팽년, 이준 등이 주도하
여 작성한 것은 아닌가 한다. 아마도 이들 중 일부 혹은 모두가 주도하여 작
성한 원본을 서로 옮겨 적으면서 수록 인물의 숫자나 순서가 조금씩 변화했
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3. 금릉창의와 그 의미
임진왜란 발발 초기에 강진의 도강 지역을 중심으로 한 장흥, 영암, 해남
지역 출신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의병 조직이 바로 금릉창의다. 이
조직 구성원들의 이름과 이들의 과거합격 내역, 관력, 당시의 활동 등을 기록
한 것이 바로 「금릉창의록」이었다. 그렇다면 이 장에서는 「창의록」의 기록을
중심으로 관련 문집과 호남절의록의 내용을 함께 검토하면서 금릉창의의
활동을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강진 금릉창의를 최초로 주도한 인물은 김억추로 보인다.29) 「창의록」에는
“縣監時宰淳昌傳檄文”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임진왜란 발발 당시 순창현
임진왜란 시기 康津 지역의 의병활동과 「金陵倡義錄」 311
감이었던 김억추가 격문을 강진 지역에 전했다는 내용이다. 순창현감 김억추
는 宣祖의 부름을 받고 大駕를 扈從하는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이후 그는
1592년 6월 13일에 安州牧使에 임명, 1597년에는 全羅右水使로 부임하게
된다.30) 선조를 호종할 때 강진 옴천 출신의 조팽년,31) 성전 출신의 곽기수
도 함께 했다.32) 이 외에 「창의록」에 이름을 올린 朴麟壽33)와 魏德和34)도
선조를 호종하였다.
김억추가 격문을 전해주었다는 사실은 황대중의 양건당집에 수록된 「纂
述先考兩蹇堂壬辰倡義擊倭日記」(이하 「격왜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거
기에는 김억추가 康津의 황대중, 尹俔, 李浚에게 “강진은 곧 해로로 통하는
咽喉之地이니 급히 의병을 일으켜 성산에 결진, 적의 침입로를 막아야 한다.”
고 편지를 보냈다고 하였다.35) 이렇게 보면 김억추는 당시 강진 지역에 없었
지만, 이 지역으로 격문을 보내면서 강진에 대한 방어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김억추는 강진의 작천의 황대중, 성전의 이준, 해남에 살던 윤현에게
이러한 편지를 보내어 만약에 있을 일본군의 침략에 대한 방어의 계책을 전
29) 김억추의 문집은 1958년에 長興 追慕齋에서 간행한 顯武實記가 있다. 이 문집은 전남대소장본
(OC 2H2 현37ㄱ)이 있고, 양광식의 울둘목 승리 김억추 장군(강진군문화재연구소, 2012)라는
책의 뒷부분에도 실려 있다. 舊序는 松沙 奇宇萬이 1914년, 序文은 曉堂 金文鈺이 1958년, 跋文은
후손인 金基元과 金珍圭가 모두 1958년에 작성한 바 있다. 김억추의 문집은 1970년에 光州 錦江祠
에서 발행한 顯武公實記도 있는데, 이는 부록이 추가되어 있을 뿐 顯武實記와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김억추의 동생 金應秋, 再從弟 金大福도 「창의록」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30) 湖南節義錄 2卷 下, 「壬辰義蹟」, 一道擧義諸公事實, 金億秋.
31) 「창의록」에는 “校理”로만 기록되어 있는데, 崔時弼이 쓴 조팽년의 行狀을 보면 그는 1573년(선조
6)에 생원시에, 1576년에는 문과에 합격했다. 이후 조팽년은 1586년(선조 19) 11월 全義縣監에 제
수되었고, 1590년 10월에는 承文院 校理에 임명되었다.
32) 한벽당집에 수록된 「창의록」에는 “弘文博士員外郞扶安縣監”으로 기록되어 있다. 호남절의록
에 따르면 “선조 12년(1579) 進士가 되었고 선조 16년(1583)에 문과에 급제하여 弘文館博士와 扶
安縣監을 지냈는데 부모께서 연로함으로 돌아와 봉양하였다.”라고 하였다.
33) 湖南節義錄 3卷 上, 「壬辰義蹟」, <忠武李公>參佐諸公事實, 朴麟壽. 한편, 김응정의 해암문집과
곽기수의 寒碧堂集에는 “朴麟壽”를 “朴麒壽”로 기록하기도 했다. 이를 정확히 하기 위해서 함양
박씨 文元公派 족보를 살펴보았다. 이에 따르면 13대 朴仁雄에게 5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龜壽,
麟壽, 麒壽, 鳳壽, 鸞壽가 그들이다. 문원공파 족보는 함양박씨 홈페이지(www.xn—bh3b09n
7it45c.kr/subpage.php?code=s4_8&xml=s4)를 참고하였다.
34) 장흥 관산 출신인 위덕화가 「창의록」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김억추의 문집 顯武實記
에 수록된 「大駕扈從諸公錄」에 위덕화의 이름이 보인다. 참고로 「창의록」에는 “宣傳官”으로만 기
록되어 있다.
35) 兩蹇堂集, 「纂述先考兩蹇堂壬辰倡義擊倭日記」.
312 지방사와 지방문화 19권 2호
달한 것이다.36)
강진 지역에 격문을 전달한 인물로는 나주 출신의 林懽도 「창의록」에 이
름을 올리고 있다. “倡義使金千鎰從事官傳檄文”라 하여 창의사 김천일의 종
사관이었던 임환이 강진 지역에 격문을 전달했음을 전하고 있다.37) 김천일
휘하에서 활동한 금릉창의 구성원으로는 영암 출신의 朴大器가 있다. 「창의
록」에는 “助軍需”로 기록되어 있어서 임진왜란 때 군수물자를 모으는 데에
도움을 주었음을 전하고 있다. 나주 출신 鄭彦佑 역시 “助兵糧”이라고 되어
있다.
나주 출신 유희달은 직접 강진 지역에 와서 의병을 규합하기도 했다. 황대
중의 「격왜일기」에 따르면 “兵使 宣居怡는 각 읍의 군병을 통솔․감독하여
방어의 계책으로 삼았다. 首校를 羅州에 보내 유희달에게 창의하여 起兵할
것을 권했다. 이에 소기와 술을 많이 준비하고, 本縣(강진현)의 客舍에서 보
여 의병을 규합하였다. 이보다 먼저 檄文을 이웃 마을에 전하였다. 이에 義士
들이 蜂起하고 義穀을 납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자못 많았다.”라고 했다.
「창의록」에는 유희달이 “宋遊擊接伴使”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송
유격”은 遊擊 宋大斌을 가리키는데, 宣祖實錄에는 송대빈의 이름이 1593
년(선조 26) 4월 2일에 처음 나온다.38) 趙慶男의 亂中雜錄에는 1593년 5
월에 이 처음이다.39) 조경남은 1592년 11월 때 행해진 명나라 군대의 分軍
시에 송대빈이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 이후에 강을 건넜을 것이
라고 부연설명을 해 두었다. 즉, 송대빈은 1592년 11월~1593년 4월 즈음에
조선으로 온 것으로 보인다. 선거이는 1593년 1월 5일에 전라병사에 임명되
었기 때문에, 1593년 1월 까지 유희달은 송대빈의 접반사가 아니었다. 이를
통해 보면 나주에 있던 유희달이 강진으로 와서 창의를 권했으며, 이를 계기
36) 「창의록」에 윤현은 “武科”로만 기록되어 있다. 호남절의록에 따르면 그는 1585냔(선조 18)에 무
과에 급제하였다. 湖南節義錄 2卷 下, 「壬辰義蹟」, 一道殉節諸公事實, 尹俔.
37) 임환의 문집 習靜遺稿가 전해지는데, 여기에는 「창의록」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습정유고의
遺事나 行蹟 부분을 보더라도 임환과 강진 지역의 관계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김천일 관련
연구를 확인 하더라도 임환이 강진 지역에 왔다는 정확한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38) 宣祖實錄 37권, 선조 26년(1593) 4월 2일(병술).
39) 趙慶男, 亂中雜錄 2권, 계사년(1593) 상, 5월.
임진왜란 시기 康津 지역의 의병활동과 「金陵倡義錄」 313
로 더욱 활발한 의병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러던 중 유희달은 1593년 1~4
월 경 明將인 유격 송대빈의 접반사로 임명된 것이다.
김억추와 유희달의 경우를 보면, 「창의록」에 수록된 인물들이 임진왜란
당시에 모두 강진 지역에 있을 필요는 없다는 점을 알 수 있게 된다. 즉, 강
진 금릉창의를 가능하게 했던 인물들 혹은 그들과 함께 했던 강진 출신 인물
들이 함께 이름을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는 아마도
실제 강진 지역의 의병들이 이 지역을 침입한 일본군과 접전을 벌이지 않았
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창의록」은 일본군과 실제로 맞서 싸웠던 이들의
명단, 즉 同苦錄과 같은 성격의 문건은 아니라고 여겨진다.40)
김억추의 顯武實記에 수록된 「參佐諸公錄」에는 김억추를 도와 활약했
던 자들을 기록한 명단에는 윤이경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었다.41) 즉, 경기도
양근군수 윤이경은 同鄕의 김억추와 협력한 것으로 보인다. 「창의록」에는 윤
이경이 “郡守時宰楊根因家書入錄”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금릉창의와 관련
한 행적은 家書를 참고하여 이름을 올린 것이다. 윤이경이 강진읍 富春里(현,
춘전리) 출신이었기 때문에,42) 강진에서 「창의록」을 작성할 때 윤이경의 집
안에 남겨진 기록을 참고했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참고로 윤이경
은 현재 화암사(花岩祠, 군동면 화방리 소재)에 배향되어 있다. 또한 윤이경
의 조카인 尹東老도 「창의록」에 수록되어 있다.
「창의록」에 따르면 금릉창의의 실무담당자는 황대중으로 보인다.43) 그는
“貞陵參奉揔務兼書記”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작천면 九祥里(현, 용상
리) 출신인 황대중은,44) 총무 겸 서기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이를 뒷받침해주
는 기록은 그의 문집 양건당집의 「격왜일기」이다. 「격왜일기」에 따르면 都
承旨 李恒福이 司僕提調 尹斗壽에게 “각도에서 강건하고 용감하며 기개와
40) 동고록의 간행에 대해서는 김강식의 연구를 참고할 수 있다. 김강식, 2012, 「조선후기의 임진왜란
기억과 의미」, 지역과 역사 31, 부경역사연구소.
41) “尹履慶 字士榮 海南人 參奉衛曾孫 縣監容子 除陽根郡守”
42) 양광식, 2011, 강진 유향좌목, 강진군 문화재연구소, 67쪽.
43) 황대중에 대해서는 양광식의 책(2007, 조선충신 양건당 黃大中 장군과 愛馬, 강진문화재연구소)
을 참고하길 바란다.
44) 양광식, 2011, 같은 책, 68쪽.
314 지방사와 지방문화 19권 2호
체격이 아주 굳센 사람들을 뽑아야겠다. 뽑을 때에는 학식이 있는 사람, 말타
기와 활쏘기를 잘하는 사람, 과거에 합격하고도 벼슬길에 나서지 못한 사람,
그리고 궁술이나 무예에 뛰어난 자들로 하되, 특별히 뽑힌 종류에 따라서 올
려 보내어 궁궐을 경호케 한 뒤에 육지와 바다를 견고하게 지키는 일이 현재
해야할 가장 시급한 일이다”라고 말했고, 선조 역시 이 의견에 동의했다. 이
때 선발된 전라도의 別抄者가 80명이었다고 했는데, 황대중은 문학과 효성
이 지극하고 청렴하여 나라에 천거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전라도 별초
군을 거느리는 군인의 우두머리가 되었다고 했다.45)
황대중과 함께 군량과 兵器와 儀仗을 도운 이는 李浚이다. 「창의록」에 “武
科 助軍糧器仗”라고 되어 있다. 당시 이준의 나이는 14살에 불과했으므로 독
자적인 활동을 하기 에는 어려웠을 것이고, 삼촌 李繼鄭의 의병에 가담한 것
은 아닌가 한다.46) 참고로 이계정은 32세인 1570년(선조 3)에 무과에 합격
하였으며,47) 1576년에는 重試에 합격하여 昆陽郡守가 되었다. 임진왜란 발
발 시에는 茂朱의 助防將에 제수되어 세운 공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1593년
7월 10일 倡義使 金千鎰의 馳啟에 따르면 6월 15일에 助防將 이계정이 진주
성에 입성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1594년 12월 1일 金應南이 충청수사로 이
계정을 추천하기도 한다.48) 절의록에 따르면 그가 실제로 충청수사에 임
명되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49)
강진 지역에 진법을 전해준 丁景達도 「창의록」에 이름을 올렸다. 거기에
는 “時宰善山 演送陣法”이라고 되어 있어서 선산부사 정경달이 진법을 자
세히 설명하여 강진 지역에 보내주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50) 다만, 정
45) 康津鄕校誌의 長水黃氏世族 편에는 “壬辰倭亂이 일어나매 忠憤을 못이겨 自進出戰하여 湖南別
抄軍을 이끌고 京城으로 달려가 王城을 지키며 王께서 義州로 播遷하시매 義州까지 扈從하면서
많은 戰功을 세웠다.”(李炳在 編, 康津鄕校誌, 朗州印刷社, 1981, 357쪽)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
지만 이는 최근의 자료이며, 황대중의 문집을 제외하고는 그가 전라도 별초군의 수장이었다는 사실
은 다른 자료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다.
46) 이계정은 「창의록」에 “郡守”로만 기록되어 있다.
47) 庚午式年文[武]科榜目(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만송 貴 386 1570]).
48) 宣祖實錄 40권, 선조 26년(1593) 7월 10일(임술); 宣祖實錄 58권, 선조 27년(1594) 12월 1일
(갑신).
49) 輿地圖書, 靈巖, 人物, 李繼鄭. “登武科官至忠淸水使値壬辰亂戰亡事載勳錄”
임진왜란 시기 康津 지역의 의병활동과 「金陵倡義錄」 315
경달이 선산 지역에서 행했던 전략전술을 통해 간접적으로 추정해 볼 수 있
을 뿐이다. 그의 盤谷亂中日記에 따르면 “이때 변방의 보고가 날로 위급
해지자, 관찰사 金睟와 절도사 曺大坤이 分軍하는 일로 순행하다가 선산부
에 이르렀다. 나는 四運의 법을 만들어 1운은 城市에, 2운은 路邊에, 3운과
4운은 먼 곳에 두어서 각각 양식을 지급했다”는 내용이 보인다.51) 김경숙
의 연구에서도 정경달은 4寨에 각각 都廳을 설치하여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했다고 한다.52) 만약 정경달이 강진에 진법을 전해주었다면, 전쟁
발발 당시에 그가 선산 지역에서 실제로 행했던 그 방법을 전수해 주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강진 지역에서 병량미를 모아 행재소에 전한 李止得도 「창의록」에 이름을
올렸다. 「창의록」에는 “時募糓本道 行政府關文”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사
복내승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本道 즉, 전라도 지역에서 병량미를 모았
다. 또한 政府 즉, 의정부에서 보낸 關文을 행했다고 한다. 절의록에 따르
면 나주에 거주하던 이지득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행재소까지 갔는데, 병량
미가 부족하여 남쪽으로 내려와 구했다. 당시 의정부에서 내려보낸 관문의
대강은 “內乘 李止得은 국가의 위급한 형세를 보고 마음 속에 그 급한 병을
끊겠다는 뜻을 품고 본도에 내려가 곡식을 모아 병사를 먹이겠다고 원하니
그 성심이 참으로 가상하다. 각 관은 배의 세금을 면제해 주고 쌀을 싣는 것
을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었다.53) 이처럼 나주사람 이지득이 남도로 내려와
병량미를 모을 때 강진에 들렀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錦城李忠烈錄에 따르면, 이지득은 私儲를 다 기울여 백미 142석과
적두(赤豆) 1석을 운반해 납부하였고 그 후 다시 배를 타고 호남으로 내려왔
다. 이때 일본군이 수로를 파악하기 위해 장흥의 경계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50) 조원래는 정경달의 사례를 언급하면서 「금릉창의록」의 의의 중의 하나가 당시의 군사전략상 매우
구체적인 사실을 남기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하였다(조원래, 2012, 「임진왜란과 의병항쟁」, 강진군
지 Ⅰ, 강진군지편찬위원회, 241~242쪽).
51) 盤谷遺稿 7卷, 「亂中日記」 1592년 4월.
52) 金景淑, 2013, 「임진왜란초기 지방관의 守土活動-善山府使 丁景達 형제의 활동을 중심으로-」, 朝鮮時代史學報 65, 朝鮮時代史學會, 138~143쪽.
53) 湖南節義錄 2卷 下, 「壬辰義蹟」, 一道殉節諸公事實, 李止得.
316 지방사와 지방문화 19권 2호
들은 이지득은 의병 수백명을 모아서 장경홍(張景弘) 등과 함께 분격(奮擊)
하여 일본군을 흥양(興陽)까지 몰아내었다.54)
任啓英 휘하에서 활동한 금릉창의 구성원 중에는 金汝重과 文英凱를 들
수 있다.55) 김여중의 경우, 그의 문집 軒軒先生文集 1권, 「임진모의격서」
에 “전라도 보성 전 현감 任啟英, 朴光前, 장흥 진사 김여중 등은 능주현령
김익복과 함께 삼가 재배하고 열읍제우들에게 글을 씁니다.”라고 되어 있다.
이를 보면 김여중은 임계영 부대와 함께 활동했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문영
개의 경우, 「창의록」에 “自山陽左義將任啓英倡義所傳檄而來”라고 되어 있어
보다 자세한 활동을 알 수 있다. 문영개(1565~1620)는 山陽에 있는 좌의장
임계영의 창의소로부터 격문을 전해 들고 왔다. 참고로 산양은 보성의 옛 지
명이며, 문영개는 장흥 출신인 進士 文緯世의 아들이다.56) 절의록에 따르
면 문위세는 王子師傅 朴光前, 綾城縣令 金益福, 임계영과 함께 寶城 관아에
모여 격문을 여러 고을에 발송하여 의사를 모집하였다. 다시 말해, 문영개는
문위세와 함께 활동을 하였고 그 과정에서 문영개는 임계영 좌의병에서 발한
격문을 강진에 전달해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동생인 直長 任仲英과 함께 창
의하여 邊士貞의 휘하로 들어갔던 任自英도 있다.57)
이 외에도 강진 군동 출신의 전 潭陽府使 崔遇는 아들 崔有建과 함께 고경
명의 부대에 합류하여 활동하기도 했다.58) 고경명 부대에 합류한 금릉창의
인물은 영암의 全夢星과 강진출신의 金德鸞도 있다. 권율의 휘하에서 이치전
투에 참여했고,59) 이후 體察使 鄭澈의 휘하에서 裨將으로 활약한 李潛이라
는 인물도 있다.60) 이 외에도 「창의록」에는 해남현감 양응정과 함께 熊峙에
54) 錦城李忠烈錄(1802년 刊, 古2748-25-1-2) 2권, 忠烈, 忠未褒, 李止得.
55) 「창의록」에는 “進士”로만 기록되어 있다.
56) 문위세는 현재 장흥군 有治面 勒龍里에 소재한 江城書院에 모셔져 있다(長興郡의 文化遺蹟, 國
立木浦大學博物館․全羅南道 長興郡, 1989, 330쪽; 353~354쪽).
57) 湖南節義錄 2卷 上, 「壬辰義蹟」, 敵愾將桃灘邊公事實, 任自英.
58) 湖南節義錄 1卷 上, 「壬辰義蹟」, 忠烈公同倡諸公事實, 崔有建. 康津郡誌(1967년 刊) 5권, 충절
조에는 “父親의 病勢危篤함”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하였다.
59) 「梨峙大捷碑諸公名帖」에는 權慄을 비롯한 118명의 명단이 남겨져 있는데, 여기에 “李潛 贈參議”라
고 하였기 때문이다. 全羅南道壬亂史料編纂委員會 編, 1992, 湖南地方壬辰倭亂史料集 Ⅲ, 全羅
南道.
임진왜란 시기 康津 지역의 의병활동과 「金陵倡義錄」 317
서 싸우다 전사한 梁景福과 金萬齡도 있다.61) 또한 장성남문창의에 합류한
洪繼勳의 이름도 보인다.62) 호남절의록에 따르면, 홍계훈은 강진의 召募有
司가 되어 家僮 80인을 이끌고 義士 수백 명과 곡식 70석을 모아서 都廳으
로 실어 보냈던 것이다. 이와함께 「창의록」 鄭名世 “縣監義穀三十石納于都
廳” 부분을 검토하려고 한다. 현감이었던 정명세가 의곡 30석을 모아 都廳에
납부했다는 것인데, 아마도 강진의 소모유사였던 홍계훈과 관련이 되어 있는
듯 하다. 장흥출신의 정명세가 인근의 강진 소모유사 홍계훈을 통해 병량미
를 납부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금릉창의 구성원 중 전라병사 최원의 휘하에서 관군으로 활동한 李彥贇도
있다. 「창의록」에는 “監察助軍需兵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전에
이언윤(1543~1592)은 監察이었는데, 전쟁 발발 이후에는 군수품과 무기를
마련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절의록에 따르면 그는 임진왜란 때에 家童
100명과 義士 100여명을 이끌고 100石 정도의 私財를 내어서 弓矢나 槍劍
등을 스스로 갖추었다고 했다.63) 하지만 그는 兵使 崔遠 휘하에서 북상하던
중 淳昌․玉果 등지의 병사들이 일으킨 군병반란을 제압하다가 목숨을 잃었
다.64) 이언윤은 강진 출신인물로 임진왜란 때에는 감찰의 직책을 수행했으
며, 의병을 모으고 군수품과 병기를 갖추어 전라병사 최원을 도왔기 때문에
「창의록」에 수록된 것이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여한 高從厚 부대에 병량미를 보낸 金應鼎도 있다.
60) 「창의록」에는 “體察使鄭澈裨將”라고 기록되어 있다.
61) 「창의록」에 양경복은 “司僕”으로, 김만령은 “司直”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만령은 아들 金夢龍과 함
께 임진왜란 때 활동했다. 한편, 軒軒軒先生文集의 행장에는 1592년 9월 敵愾將 邊士貞이 의병
을 일으키자 김여중이 정예병 300을 모으고 쌀 80석을 갖추어 도움을 주었다고 되어 있다. 아마
이때 강진 출신인 李潛(1561~1593) 등과 함께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62) 「창의록」에는 本貫과 字만 나와있을 뿐 다른 기록은 없다.
63) 黃大中, 兩蹇堂集, 「擊倭日記」에는 이언윤이 私囷 200石을 내었다고 했는데, 이 점만 다르고 병
력과 무기를 마련한 부분은 절의록과 동일하다. 참고로, 康津郡誌(1967년 刊) 5권, 충절 조에
는 이언윤이 “군량 400석을 모으고 家僮 수십명과 이웃마을 勇壯者 수백명을 모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64) 임진왜란 중에 발생한 군병반란에 대해서는 李章熙와 하태규의 논문을 참고하면 된다.
․李章熙, 1968, 「壬辰倭亂中 民間反亂에 對하여」, 鄕土서울 32, 서울市史編纂委員會.
․하태규, 2010, 「임진왜란 초기 호남군병의 난과 운암전투의 실상」, 역사와 담론 56, 호서사학회.
318 지방사와 지방문화 19권 2호
김응정의 해암문집과 곽기수의 한벽당집에 수록된 「창의록」에는 “敬陵
參奉 發檄列邑義穀五百石送助復讎將高從厚軍”이라고 하여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특히 이 기록은 김응정이 錦山 전투의 패전소식을 듣고 기의
하였지만 병을 얻어서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였고, 그래서 모아둔 의병
과 군량을 復讐將 高從厚의 軍陣에 보내 도왔으며, 또 소금과 곡식 5백 석을
마련해 관군에게 제공하였다고 전한 절의록의 기록과도 일치한다.65)
도강김씨 족보를 보면 김응정은 侍直公派에 해당하는데, 시직공 乙卿을
파조로 하고 있다. 김응정은 懈庵, 傳白堂이라는 호를 함께 사용했고 94세까
지 장수를 누렸다. 거주지는 강진군 兵營面 索遯里(현, 삭양리)이다.66) 그는
선조 丁未年[1607년]에 송강 정철과 감사 崔瓘이 交章啓薦하여 敬陵參奉을
제수하고 또 持平을 제수하였으나 다 취임치 않았다고 한다.67) 임진왜란을
당하여 격문을 내어 의병을 모병하고 많은 의곡을 마련하여서 高從厚 장수
휘하에 보내어 왜적을 복수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郭期壽, 趙彭年, 黃
大中, 金億秋와 함께 금릉거의에 同昌하였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68) 족보
의 기록만 놓고 보면, 금릉창의의 주역은 이들 5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김
응정, 곽기수, 조팽년, 황대중의 문집에 모두 「창의록」이 실려 있다. 김응정
역시 「창의록」 작성의 주도 인물로 거론되어야 마땅하다.
무안 출신의 鄭麒壽도 「창의록」에 이름을 올렸는데, “義士”로만 기록되어
있을 뿐 강진과 관련된 활동은 확인되지 않는다. 참고로 호남절의록에 따
르면 그는 임진왜란 때 白衣로 창의하여 500명을 모집하였고, 충무공 이순신
의 막하에서 활동하였다. 또 1593년에는 이순신의 명령에 따라 창의사 김천
일의 부대로 들어가 함께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다시 이순신의 휘하에서 힘을 보태었으며 1598년 11월 19일 露梁해전에서
는 이순신과 함께 탄환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69) 「창의록」에 이름을 올린
65) 湖南節義錄 1卷 下, 「壬辰義蹟」, <孝烈公>同倡諸公事實, 金應鼎.
66) 양광식, 2011, 강진 유향좌목, 강진군 문화재연구소, 69쪽.
67) 그런데 鄭澈은 1593년에 죽기 때문에 1607년에 김응정을 참봉으로 추천할 수는 없다.
68) 道康金氏大同譜 1권, 道康金氏大同譜所, 1993, 99~102쪽.
69) 湖南節義錄 3卷 上, 「壬辰義蹟」, 忠武公李公舜臣同殉諸公事實, 鄭麒壽.
임진왜란 시기 康津 지역의 의병활동과 「金陵倡義錄」 319
것을 본다면, 아마도 무안에서 창의하여 여수의 이순신에게 가던 중 강진에
들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 「창의록」의 내용을 중심으로 수록 인물들의 행적을 검토해 보았
다. 그 결과 금릉창의 활동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금릉창의를 주도한 인물은 김억추였으며, 실제로 강진 지역에서 창의를 준비
한 인물은 황대중으로 보인다. 김억추는 강진 지역에 격문을 전해주었는데,
황대중과 윤현, 이준이 최초의 수신자였다. 이들 세 명이 강진 지역의 금릉창
의 주축 구성원으로 여겨진다. 둘째, 김억추를 도왔던 이들이 다수를 차지하
고 있다. 우선 김억추와 함께 선조를 호종했던 강진 출신 인물들이 여럿 확
인된다. 조팽년, 곽기수, 박인수, 위덕화 등이 그들이다. 또한 활동상은 뚜렷
하지는 않지만, 윤동로와 윤이경이 모두 김억추를 도왔다. 셋째, 타지역 사람
들이 금릉창의에 영향을 미친 사례이다. 나주 출신의 임환, 유희달, 정언우,
영암 출신의 박대기 등이 그들이다. 임환은 격문을 전해주었으며, 정언우와
박대기는 병량미 등 군수품 확보에 도움을 주었고, 유희달은 직접 강진 지역
에 와서 의병을 규합하였다. 선산부사 정경달은 강진 지역에 진법을 전달해
주기도 했다. 넷째, 이외에 다른 의병장 혹은 관군에 합류한 이들도 「창의록」
에 이름을 올렸다. 최우, 전몽성, 김덕란 등은 고경명 부대에서, 김여중과 문
영개는 임계영 휘하에서 활동하였으며, 웅치․이치 전투에 참가한 이잠, 양
경복, 김만령도 주목된다. 장성남문창의에 가담한 홍계훈, 전라병사 최원을
따라갔던 이언윤도 확인된다. 마지막으로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가한 고종
후 부대에 병량미를 보낸 김응정, 이순신 휘하에서 활동했던 정기수 등도 「창
의록」에 기록되어 있다.
4. 맺음말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금릉창의록」의 의의를 정리하면서 글
을 맺고자 한다. 우선 「창의록」은 김응정, 김억추, 조팽년, 이준 등이 주도하
320 지방사와 지방문화 19권 2호
여 발간한 것 같다. 김응정은 임진왜란 당시에 강진 지역에서 활동했으며 원
로 급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김억추는 임란 당시에 순창현감이었는데, 강진
의 황대중, 이준 등에게 연락하여 금릉 창의가 가능하도록 했다. 또한 「창의
록」 수록 인물 39명 중 1/3에인 13명이 김억추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
었다. 조팽년은 곽기수와 함께 강진 지역에서 과거시험에 합격한 몇 안되는
인물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김억추와 함께 선조를 호종했으며 김응정과도
교유한 인물이다. 원주 이씨인 李浚의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임진왜란과 무
관한 이남과 이억복이 실린점, 이준은 임란이 종료한 뒤인 1606년에 과거에
합격했는데 이 사실이 문건에 기록된 점을 볼 때 그러하다.
수록 인물의 출신지를 분석한 결과 「금릉창의록」에 수록된 39명 중 강진
출신 인물은 25명으로 전체의 64%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강진
다음으로는 장흥, 나주, 영암 지역이 많고, 해남과 무안이 그 다음이었다. 타
지역 인물들이 36%나 포함되어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보면, 「창의록」이 강
진 지역 인물들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강진 지역에서 창의할 때 도움을 주
었거나 관련된 인물들까지 포함시킨 자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강진에 인접
한 영암, 해남 지역의 인물을 포함한다면 전체의 87%에 해당하는 점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
활동 내용을 보면, 「창의록」에는 다른 기록에서는 보이지 않는, 즉 임진왜
란이 발발했을 때 강진 지역이 창의와 관련된 실상이 드러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김억추가 격문을 보내어 강진 지역의 창의를 권했다든지, 김천일
의 종사관이었던 나주의 林懽과 임계영을 도왔던 문영개도 강진 지역에 격
문을 전달했다든지 하는 것이다. 나주의 유희달도 강진 의병의 결성을 도왔
다는 사실이 「창의록」에 나와 있다. 또한 김응정, 이준, 정명세, 박대기, 정
언우, 이지득 등은 강진 지역에서 병량미와 의병을 모으는데 주도적인 역할
을 했음도 밝혀졌다. 특히, 강진 지역의 방어를 위한 진법 운용에 정경달의
도움이 컸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즉, 다른 기록에서는 나오지 않
는 강진 지역의 의병 창의 과정의 구체적인 모습들이 「창의록」에 담겨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 시기 康津 지역의 의병활동과 「金陵倡義錄」 321
「창의록」은 임진왜란 이후 전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강진 지역에서 창의
한 자들을 기록하여 그들의 충절을 후대에 전하고, 이를 통해 강진 사회에
대한 입지를 다질 수 있었지 않을까 한다. 그 과정에서 임란 이전의 이남과
이억복 같은 인물도 함께 거론하였고, 강진 출신자가 아니지만 강진의 창의
에 도움을 준 타지역 인물들도 함께 이름을 올렸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창의록」을 통해 강진 금릉창의를 재구성해보았다. 이를 통해
강진 지역에서 금릉창의를 가능하게 했던 인물 및 주도한 자들을 밝혀냈다.
또한 금릉창의에 도움을 주었던 타지역 인물 및 그들의 활동상에 대해서도
파악하였다. 금릉창의는 강진 내에서만 활동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김
억추, 고경명, 임계영, 고종후 등 타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의 휘하에서 활약
했던 이들 역시 금릉창의의 주요한 구성원이었던 것이다.
투고일 : 2016. 10. 01. 심사완료일 : 2016. 11. 01. 게재확정일 : 2016. 11. 07.
322 지방사와 지방문화 19권 2호
[참고문헌]
「留鄕座目」, 「金陵司馬案」, 明宗實錄, 宣祖實錄, 輿地圖書, 湖南節義錄(1799년 刊), 花巖
祠誌(1927년 刊):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e12107-105), 羅州三綱錄(1948 刊), 康津郡誌(1967
년 刊).
郭期壽, 寒碧堂集(1742년 初刊, 1930년 重刊).
金億秋, 顯武實記(1958년 長興 追慕齋 刊); 顯武公實記(1970년 光州 錦江祠 刊).
金汝重, 軒軒軒先生文集(1883년 刊).
金應鼎, 懈菴文集(1905년 刊).
林 懽, 習靜遺稿(2006년 民昌社 影印).
丁景達, 盤山世稿(서울亞細亞文化社 刊, 1987).
趙應祿, 竹溪日記(1992년 國史編纂委員會)
趙彭年, 溪陰集(1899년 刊).
黃大中, 兩蹇堂集(1896년 刊).
강진군지편찬위원회, 2012, 강진군지, 강진군.
郭期壽 著, 郭瑞欽 編輯, 2008, 寒碧堂先生文集, 寒碧堂郭期壽先生 紀念事業會.
國立木浦大學博物館․全羅南道 長興郡, 1989, 長興郡의 文化遺蹟, 國立木浦大學博物館.
김경옥, 2012, 장성 남문의병과 오산창의사, 목포대학교박물관․장성군.
김덕진, 2015, 손에 잡히는 강진역사, 남양미디어.
김동수 교감․역주, 2010, 호남절의록, 景仁文化社.
金應鼎 著, 梁光植 譯, 1994, 懈菴文集, 강진문헌연구회.
金千鎰 著, 鄭雲翰 譯, 1982, 國譯 健齋先生文集, 夫盛印刷社.
梁光植 엮음, 1991, 김덕란 의병장 순절록, 탐진향토문화연구회.
양광식 편저, 2007, 조선충신 양건당 黃大中 장군과 愛馬, 강진문화재연구소.
양광식 편저, 2011, 강진유향좌목, 강진군 문화재연구소.
양광식 편저, 2012, 울둘목 승리 김억추 장군, 강진군문화재연구소.
李炳在 編, 1981, 康津鄕校誌, 朗州印刷社.
李學培 編, 1974, 原州李氏世譜 1卷, 卯洞追遠堂.
全羅南道․康津郡, 1990, 康津郡 마을史(城田面 編), 康津郡.
全羅南道․康津郡, 1993, 康津郡 마을史(鵲川面 編), 康津郡.
全羅南道․康津郡, 1998, 康津郡 마을史(郡東面 編), 康津郡.
全羅南道․康津郡, 1999, 康津郡 마을史(薪田面篇 編), 康津郡.
全羅南道․康津郡, 2001, 康津郡 마을史(道岩面 編), 康津郡.
전라남도 문화예술과, 1998, 文化財圖錄-文化財資料篇-, 전라남도.
全羅南道壬亂史料編纂委員會 編, 1992, 湖南地方壬辰倭亂史料集 Ⅲ, 全羅南道.
全羅南道 編, 1987, 全南의 鄕校, 全羅南道.
임진왜란 시기 康津 지역의 의병활동과 「金陵倡義錄」 323
趙湲來, 1989, 壬亂義兵將 金千鎰硏究, 學文社.
趙應祿 著, 趙南權 譯, 1999, 國譯 竹溪日記, 太學社.
김동수, 2007, 「정유재란기 호남지역 의병의 향토방위전 사례 검토」, 歷史學硏究 30, 湖南史學會.
김동수, 2011, 「호남절의록의 사료가치 검토(1)」, 歷史學硏究 44, 湖南史學會.
金景淑, 2013, 「임진왜란초기 지방관의 守土活動-善山府使 丁景達 형제의 활동을 중심으로-」, 朝鮮時代史學報 65, 朝鮮時代史學會.
김경옥, 2013, 「金陵邑誌의 편찬시기와 성격에 대한 검토」, 歷史學硏究 52, 湖南史學會.
李海濬, 1998, 「朝鮮後期 靈巖地方 洞契의 成立背景과 性格」, 全南史學 2, 全南史學會.
윤희면, 2013, 「조선시대 전라도 司馬案 연구-강진 사마안 사례-」, 호남문화연구 53, 호남학연구
원.
324 지방사와 지방문화 19권 2호
The Activities of Righteous Army in the
Ganjin(康津) during the Imjin War(壬辰倭亂) and
Geumneung Changuirok(金陵倡義錄)
70)
Kim, Man-ho*
The Geumneung Changuirok or “Record of the Immense Righteous Ones
of Geumneung,” is a record of major personalities of the Gangjin area in
Southwest Korea at the time of the Japanese invasions, the Imjin War of 1592
-98. The material is not one single volume. The term Geumneung Changuirok
is applied to any of a number of individual compilations of stories. Until now
there were known to be seven types of Geumneung Changuirok, but an analysis
of the contents shows the various records are from the collections left behind
by Kim Eung-jeong(金應鼎), Kwak Gi-su(郭期壽), Hwang Dae-jung(黃大中),
and Jo Paeng-nyeon(趙彭年).
The standard practice of historians at the time was to write each person’s
name, the origin of the patriarchal clan, and the adult name as an insert. Below
that would be one’s official work or past accomplishments and activities during
the Imjin War. Thirty-nine names in all are included in the records and
twenty-five of them are people of Gangjin, while fourteen are from elsewhere.
Seen this way, the Geumneung Changuirok details the actions of Righteous
Army figures not only from Gangjin. Also, within Gangjin we know specific
townships of origin, like Seongjeon, Jakcheon, Byeongyeong, and Omcheon.
Separated by clan, the Lee of Wonju(原州李氏), the Yoon of Haenam(海南尹
* Lecturer, Chonnam National University
임진왜란 시기 康津 지역의 의병활동과 「金陵倡義錄」 325
氏), and the Kim of Cheongju(淸州金氏) are represented more than others.
We can also see that the Geumneung Changuirok was written after 1606 by
writers like Kim Eung-jeong, Kim Eok-chu(金億秋), Jo Paeng-nyeon, and Lee
Jun(李浚).
The Geumneung Changuirok’s significance, foremost, could be said to be
in its inclusion of facts and information not seen in other records, namely,
in what movements there were when the Imjin War broke out; the details of
the situation, of the creation of the Righteous Army at this moment of national
crisis, become clear. As a result, the delivery of notices, the rice provisions
for soldiers, and the chief forces of the ad-hoc assembled Righteous Army
become easier to grasp. Also, the Geumneung Changuirok gives us a rough
idea of the situation for people who came from the same towns as the Gangjin
rural elite though this record of how Korea got a handle on the war and formed
the Righteous Army.
Key Words: Imjin War(壬辰倭亂), Gangjin(康津), Geumneung-Changuirok(金陵
倡義錄), Honam(湖南), The Righteous Army(義兵)
스크랩 원문 :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