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례 고찰]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 성씨와 본관(본)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네 뿌리 의식의 근본이 되고 있는 전통으로 민법에도 규정되 어 있으며 성은 혈통이고 본관은 시조의 거주지나 근거지의 지명을 따서 만든 것이고 성씨를 갖게 된것은 삼국시대 부터 였습 니다.
중국과 교류하며 한자를 사용한 왕족과 지배층이 성씨를 갖기 시작한 것입니다.
삼국사기에도 고구려 창업자 주몽이 부여에서 탈출하는 길에 현인 3명을 만나 ‘극’씨, ‘중실’씨, ‘소실’씨라는 성씨를 내렸다는 장면이 나오죠. 그러나 성씨와 본관이 보편화된 건 고려 때부터 였습니다.
17세기 중반. 조종운(1607~ 1683)이 지은 ‘씨족원류’에 약 540개 가문의 계보가 실려 있는데 본관이 거의 고려시대 정해진 군현 명칭이거든요.
이중환(1690~1752)의 택리지 도 “고려때 비로소 중국의 씨족제도를 모방해 성씨를 반포 하면서 일반사람들도 성을 갖게 되었다.”고 확인하고 있으며 성씨와 본관제도를 최대한 활용한 사람은 고려 태조 왕건이 었습니다.
토성분정(土姓分定)이라 해서 협력자나 유력세력에게 성씨를 주고 그들의 거주지를 본관으로 정해주었습 니다. 토성을 통해 지연과 혈연을 아울러 표현하도 록 한 것이죠. 930년 고려 왕건과 후백제 견훤이 고창전투 를 벌였는데 후삼국시대 최종 승자를 결정지은 최후의 결전이 었죠.
처음에는 왕건이 승산이 없어 보였습니다. 3년전 공산전투에 서 패해 군사가 적고 사기도 떨어진 상태였죠, 그러나 고창의 세 호족인 김행․김선평․장정필이 왕건에게 식량을 대며 협조해 견훤군 8000명을 사살하고 대승 하죠. 왕건이 얼마나 기뻤겠습니 까? 고창 마을이름을 ‘동쪽 지역 이 편안하게 되었다’며 안동 (安東)으로 바꾸고 개경(개성) 서경(평양) 동경(경주) 다음가는 대도호부를 두어 중시합니다.
또 자신을 도운 세 호족에게 안동이라는 본관과 성씨를 내립 니다. 김행은 ‘권’씨, 김선평은 ‘김’씨, 장정필은 ‘장’씨 성을 갖게 되죠. 안동 권씨․ 안동 김씨․ 안동 장씨가 여기서 출발한 것이죠.
경기도 이천도 왕건이 지명을 바꾼 곳인데요. 왕건이 남쪽을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남한강의 이천 부근에 이르렀을 때 이곳 출신 서목이란 사람이 이섭(강을 건너는데 도와줌) 했다고 해서 지명을 이천(利川) 군으로 바꿨죠. 이천 서씨가 여기서 유래한 것이죠.
경주도 마찬가지입니다. 935년 신라 경순왕이 항복해오자 수도 ‘계림’ 을 ‘경사스러운 고을’이 라며 경주(慶州)로 바꿉니다. 그리고 경주의 6부 이름을 고치고, 6부에 각각 성씨를 내리죠. 경주를 본관으로 하는 이․정․손․최․배․설, 6개 성씨가 생긴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왜! 왕건은 성만 하사하지 않고 복잡하게 본관까지 줬을까요? 신라와 비교하면 답이 나오죠. 신라는 성골과 진골이 권력과 부를 독점하는 폐쇄적인 골품제 사회였죠. 고려는 신라와 달라야 민심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골품제를 해체하고 소외됐던 지방 유력층에게 토성을 줘서 지배층으로 편입시켜 새 질서를 세우려 했던 것이죠.말하자면 본관제는 단순히 지방 호족들의 친족제도를 넘어서, 반세기 가까운 내란으로 쪼개진 민심을 아우르려는 고려판 사회통합 정책이자 지역발전정책이었던 것이죠.
초기에 토성을 받은 유력 계층은 ‘백성(百姓)’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금 ‘백성’은 보통사람을 뜻하지만 그때는 지배층에 속하는 특별한 사람이었죠.
지금으로 치면 명문가문 쯤 되겠 는데 본관이 어느 지역인가에 따라 그 사람의 위상도 결정되었 죠. 전국지역이 군사․경제․교통 등 중요도에 따라 경이나 목․도호부․군․현 등으로 편제되어 격이 달랐거 든요. 왕건이 발해 세자 대광현에게 왕족의 성인 왕씨를 준 것도 그만큼 대광현의 위상을 높여주기 위한 것이었죠
그 후 고려에서 과거제가 시행되 면서 본관과 성씨 사용이 더 확산 되는데요. 문종 9년 (1055년)에 과거 응시자격이 향리층 이상에 서 ‘씨족록’에 본관과 성씨가 실려 있는 사람으로 확대되자 일반인들도 과거를 보기 위해 본관과 성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나라 성씨와 본관은 전부 몇 개나 될까요? 조선초 세종실록지리지에 실린 성씨 수가 250개였습니다. 1930년대(일제강점기) 국세통계 조사 자료의 성씨 수도 250여개니까 둘의 차이가 없죠. 또 조선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 승람에서는 성씨수가 277개였습 니다. 성씨가 있는 사람은 전 국민의 55%였고요. 그런데 1909년 일제 통감부 시절 민적법 시행으로 우리 국민 모두가 성을 갖게 되거든요. 그때 성씨수가 270여개 였습니다. 역시 둘의 차이가 거의 없죠.
성씨수가 250여개와 270여개로 조금 다릅니다만 이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목할 것은 성씨수가 조선초와 대한제국 말에 차이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죠.쉽게 말해 성종 때 성이 없던 45% 국민이 처음 새로 성을 갖게 되니까 성씨 수가 늘어나야 정상인데, 비슷한 것이 죠. 무엇을 뜻할까요?
과거 우리사회의 구조적인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인데요. 조선사회의 신분구조가 변화한 것이죠. 조선시대 신분은 양반․중인․상민․
천민으로 나뉘었죠.
초기에 양반(중인 포함)은 10%, 천민 노비가 40%였는데 19세기 철종 때 양반이 70%로 늘어납니 다.
전 국민의 양반화, 일 안하고 에헴~하며 유학사대부 행세하는 사람들이 대다수가 된 것이죠.
반면 천민은 급격히 줄어 대구지역 호구조사 결과를 보면 19세기 말 1%도 되지 않습니다.
이런 통계들을 볼 때 2가지 상황 이 추정되는 것이죠.
하나는 성씨가 없던 40~50%의 하층민이 도망하거나 공명첩 등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신분상승 을 하였고, 동시에 성씨를 갖게 되는 과정에서 여러 편법으로 대규모의 족보세탁이 이루어졌 다는 사실입니다.
유쾌한 얘기는 아닙니다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팩트죠. 이들이 자신들의 성씨를 처음 선택할 때 어떤 성씨를 선호하였 을까요? 유력한 성, 숫자가 많아서 족보에 편입돼도 표가 잘 나지 않는 성씨 등이 인기가 많았겠죠. 우리나라가 김․이․박씨 등 특정 성씨의 비중이 외국에 비해 매우 높고, 상위 5개 성씨가 절반이 넘는 이유인 것이죠.
그래서 “우리 족보의 90%는 가짜다.” 라는 말도 있지만, 글쎄요,. 조금 세련되게 말한다면 우리 족보는 생물학적 계보가 아니라 사회문화적 계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 새로 등장한 성씨들 >
끝으로 최근 몇년동안 우리나라 성씨와 본관에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특이한 흐름이 나타나고 있는데요.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5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성씨 수는 534개입니다.
5명 이상이 되는 한자 성씨로서, 대한민국 건국 때부터 존재한 성씨만을 집계한 것이죠. 그러나 한자 성이아닌 성씨나 귀화인 성씨까지 고려하면 전혀 얘기가 달라집니다. 2015년 기준으로 주민등록상 전체 성씨가 5,582 개인데, 그 가운데 '한자가 아닌' 성씨가 4,074개에 달한다고 합니다. 거의 귀화인으로. 가또․ 가루시아․ 코비․즈엉․리샤․굳등 귀화인의 성씨임을 쉽게 알 수 있지만, 곰등 순 우리말인지 귀화인 성씨인지 판단이 어려운 것도 있습니다.
또 전통방식으로 성과 본관을 정했지만 독일 이씨의 시조가 된 전 한국관광공사 사장 이참(베른하르트 크반트), 영도 하씨의 시조가 된 국제변호사 하일(로버트 할리) 같은 유명인 도 있죠. 명예 한국인 히딩크 감독은 한국이름이 동쪽나라 한국을 구했다고 해서 허동구고 요. 해마다 귀화인의 창성창본 신청이 7000건을 넘는다고 하는데, 국제화시대를 맞아 불가피한 변화겠죠. 이런 현상을 보고 아마 고유 전통이 깨진다고 아쉬워하는 분들도 있을것 같습 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 영원히 변치 않는 전통은 없죠. 우리가 지금 한자 성명을 쓰고 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오랜 기간을 한자 성과 이름으로 표현 하지 않았잖아요.
우리와 같은 소리글자인 영어처럼 성과 이름이 길었던 것이죠. 거칠부, 연개소문, 흑치상지, 명림답부, 을지문덕 같은 이름이 다 그 흔적들이니
관련자료나 보다 더 상세한 내용은 영상을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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