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직관된 사태들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한 현실에서는 단적으로 어떤 등급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사태가 다른 사태보다 더욱 많은 현실성을 갖지 못할 것이다(57쪽)."
"직관하는 주관은 대상들과 대상들의 실존을 그야말로 직접적으로 인식하며, 인식하는 주관이 대자적으로 존립하고 존재하는 것처럼 그것들을 표상력의 작용들과는 전혀 무관한 채 대자적으로 존립하고 존재하는 것으로서 인식한 다(62쪽)."
사물들이 실존하고 있다는 사실뿐 아니라 사물들이 실존하는 방식도 이렇게 절대적으로 확실하다면, 사물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사물들이 원래대로 존재한다는 것이 동시에 자명하게 이해되지 않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여기서는 두 가지 인식이 동시에 주장되고 있는 셈이다.
한 인식에 따르면, 사물들의 실존과 성질은 자명하게 이해된다.
다른 인식에 의하면, 이 실존과 성질은 결코 자명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우리는 앞서 언급된 주장과, 이성적인 인식의 추구를 이해하게 만드는 이런 방식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순보다 더 완전한 모순을 고안 해낼 수는 없다.
그리고 우리는 이보다 더 비틀리고 꼬인 형이상학으로의 이행도 생각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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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회의주의자들에게는 모든 인간 지성에 타당성을 주장하는 모든 [경험 과학적인] 학설들 의 명제들도 의심의 대상이었다.
이 사실은 그리스 회의주의자 들이 그들의 의심의 참된 근거들에 대해 무지했다는 것을 증언한다.
더군다나 오늘날과는 달리 그 당시에는 각각의 학문의 인식들을 가능하게 하는 특수한 근원뿐만 아니라 각각의 학문 속에서 가능한 확신의 정도가 여전히 탐구되지 않고 있었다.
현재 모든 이성적인 의심벽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예를 들어 물리학과 천문학과 같은 많은 학설들이 그 당시에는 입증할 수 없는 의견들과 근거 없는 가설들의 총체에 불과할 뿐이었다.”
이런 특성이 이 근대 회의주의의 특징을 완성하며, 고대 회의주의와 근대 회의주의의 구별을 드러내준다.
따라서 의식의 사실들 이외에 근래의 물리학과 천문학도 모든 이성적인 회의주의에 도전하는 학문들일 것이다.
이 학설들은 - 이 학설들의 고유성에 속하지 않는 순수하게 수학적인 것을 이 학설들에서 제외시킬 경우 - 감각적인 지각들의 보고와, 힘들과 질료들 등의 지성 개념들과 지각들의 혼합으로 구성된다.
철저하게 객관성을 주장하는 이 학설들은 그렇지만 순수하게 형식적인 지식이다.
이 지식을 이루는 한 부분인 지각들의 보고는 학문적인 지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지각을 언표 할 때 지각의 주관성 이외에 다른 것이 표현되지 않는 한, 지각들의 보고는 회의주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반면, 이 지식을 이루는 또 다른 부분은 독단적인 지성의 최정점이다.
고대 회의주의자들은 이런 학문들의 뻔한 독단론과 타협할 수 있는 이 회의주의의 잡종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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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회의주의가 한낱 순수한 회의주의로 등장하는 이런 특수한 형식 속에서만 회의주의를 바라보도록 만드는 회의주의의 개념들은 일반적으로 철학의 관점 앞에서는 사라진다.
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회의주의는 슐체 씨와 그의 동료들이 독단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을 그런 철학적인 체계들에서조차 진정한 회의주의로 발견될 수 있다.
회의주의와 철학의 참된 관계를 규정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회의주의 자체는 모든 참된 철학과 가장 긴밀하게 통일되어 있다는 점을 통찰하지 못한다면, 또한 회의주의도 아니고 그렇다고 독단론도 아닌 그러면서도 회의주의면서 동시에 독단론인 어떤 철학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회의주의의 역사들과 보고들과 새로운 간행판들은 모두 아무런 결실도 맺을 수 없을 것이다.
회의주의의 인식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본질적인 것, 회의주의와 독단론의 관계가 아니라 회의주의와 철학과의 이런 [참된] 관계, 독단론이 아닌 철학의 인정, 그러므로 요컨대 철학의 개념 그 자체, 바로 이런 것을 슐체 씨는 놓쳐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슐체 씨가 회의적으로 검사한 철학들로부터 철학의 이념을 빼낼 수 없었다면, 고대 회의주의의 역사적인 측면이 적어도 철학이란 슐체 씨가 알고 있는 전부인 독단론과는 다른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도록 벌써 그를 인도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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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은 설명과 더불어 그의 『윤리학』을 시작하고 있다
"나는 자기 원인을 그것의 본질이 현존재를 자기 안에 포함하는 것으로, 또는 그것의 본성이 실존한다고 파악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본질이나 본성의 개념은 실존으로부터 추상됨으로써만 정립될 수 있다.
즉, 하나는 다른 하나를 배제한다.
이렇게 각자가 타자와 대립하는 한에서 각자는 규정될 수 있다.
양자가 결합하여 하나의 통일된 것으로 정립될 경우, 양자의 결합은 모순을 포함하고 따라서 양자는 함께 부정된다.
그런가 하면, "신은 세계의 내재적 원인이지 일시적 원인이 아니다(『윤리학, 1부, 정리 18)"라는 또 다른 명제를 통해 스피노자는 원인과 결과의 개념을 부정하였다.
왜냐하면 - 원인이란 결과와 대립하고 있는 한에서만 원인이기 때문에 - 여기서 스피노자는 원인을 내재적인 것으로 설정하고 그럼으로써 원인과 결과를 하나로 통일된 것으로 정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일자와 다자의 이율배반도 [유한한 개념들을] 지배한다.
일자는 다자와 동일한 것으로 정립되고, 실체는 실체의 속성들과 동일한 것으로 정립된다.
모든 이런 이성의 명제는 단적으로 서로 충돌하는 두 주장들 속에서 해소된다.
예컨대, 신은 원인이면서 원인이 아니고, 일자면서 일자가 아니고, 다자면서 다자가 아니다.
또한 신은 본질을 가지는데, 이 본질은 그 자체 다시 제거된다.
왜냐하면 본질이란 형식과의 대립 속에서만 파악될 수 있으며, 그러면서도 [신의] 형식은 [신의] 본질과 동일한 것으로 정립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밖의 여러 예들이 있을 수 있다.
사태가 이렇기 때문에 '모든 로고스에는 동등한 로고스가 대립한다'는 회의주의의 원리가 매우 강력하게 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위 모순율은 이성에 대해 형식적인 진리조차 품고 있지 않다.
반대로 모든 이성의 명제는 개념들과 관련해서 모순율을 위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성의 입장 에서 볼 때, 어떤 명제가 한낱 형식적이라는 것은 이 명제와 모순적으로 대립하는 명제가 동등하게 주장되지 않은 채 이 명제가 단지 대자적으로 정립된 데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이 명제는 거짓이다.
따라서 모순율을 형식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모순율을 동시에 거짓으로 인식한 다는 것을 뜻한다.
모든 진정한 철학이 이런 부정적인 측면을 갖거나 혹은 모순율을 영원히 지양하기 때문에, 하고 싶다면 누구든지 이런 부정적인 측면을 즉각 부각시킬 수 있고, 각각의 이런 측면으로부터 회의주의를 서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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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주의자들은 “이것이 아닌 만큼 저것도 아니다"는 저 표현을 통해 오히려 그 현상이 쓰면서 단 것인지, 아니면 쓰지도 않고 달지도 않은지에 관해 알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섹스투스가 회의주의와 카르네아데스의 신아카데미학파를 구별하는 것도 이런 식이다(33장).
신아카데미학파의 원칙은 모든 것은 파악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섹스투스의 말에 따르면, 아카데미학파는 어쩌 먼저 파악불가능성을 주장으로서 언표하고 있다는 점에서만 [회의주의와] 다를 뿐이다.
슐체 씨가 저 회의적 표현들을 한정 하기 위해 말하는 것은 “섹스투스는 회의주의자란 사물들의 선험적 성질에 관해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아무것도 규정 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치려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회의적 표현은 자기를 자체 내에 품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을 지양하고 만다"는 회의주의자와 아르케실라우스의 저 주장에 대한 어떤 대립도 슐체 씨의 이 말 속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사물들의 선험적 성질이란 대체 무엇을 의미할까?
사물들도 존재하지 않고 사물들의 성질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에 바로 선험적인 것이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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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친숙한 무기는 철학자들 간의 의견의 상이성에 의존하는 것이다.
섹스투스는 앞에서 인용한 구절 바로 다음에 이 무기를 또한 길게 상술하고 있다.
이미 크세노폰이 소크라테스에게 그렇게 주장하라고 타이르고 있듯이, 철학적 의견들의 상이성이라는 이 무기는 도덕적인 독단 론자들이 사변에 반대해서 회의주의자들과 공유하는 화제거리며, 말[의 상이성]에 집착하는 피상적인 견해에서 본다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 회의주의는 [진정한] 철학, 즉 회의주의를 동시에 자체 내에 포함하고 있는 철학과 떨
어지고 격리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것은 독단론과 (아카데미학파의 명칭 하에 번성한) 철학
간의 이런 구별뿐만 아니라, 철학과 회의주의와의 커다란 일치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반면 근래의 회의주의는 이런 일치점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런데 철학과 일치하는 회의주의를 별도로 할 경우, 철학과 분리된 회의주의는 이중적일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이성에 반대할 수도 있고 이성을 지향할 수도 있다.
고대의 진정한 회의주의는 섹스투스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 철학과 유리되고 철학에 등을 돌린 회의주의의 형태와는 뚜렷하게 대비된다.
진정한 고대 회의주의는 철학처럼 긍정적 측면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지식과 관련하여 순수한 부정성을 주장하면서도 [철학에 우호적이지 않은 만큼] 철학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았다.
나중에 고대 회의주의는 철학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렇지만 고대 회의주의의 철학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와 독단론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는 완전히 별개의 것이다.
철학이 독단론이 되자마자 회의주의는 철학을 외면했는데, 이것은 얼마나 회의주의가 철학과 세계 일반의 공통의 퇴화에 보조를 맞추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마침내 회의주의는 최근에 독단론과 함께 침몰하고 만다.
그리하여 이제 회의주의와 독단론에게서 의식의 사실들은 부인할 수 없는 확실성을 지니며, 진리는 시간성 안에 놓이게 된다.
양극단이 서로 손을 잡았기 때문에, 그것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행복한 시대에 위대한 목표가 다시 한 번 성취된 셈이다.
즉, 독단론과 회의주의는 심층적으로 서로 일치하며, 양자는 상대방에게 진짜 형제애에서 우러나온 악수를 건네는 것이다.
슐체 씨의 회의주의는 가장 조악한 독단론과 하나가 되며, 동시에 크루그의 독단론은 저 회의주의를 자체 내에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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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회의주의는 이 열 가지 회의적인 논변 형식들에 한정되었다.
그리고 모든 철학 일반과 마찬가지로 이 열 가지 논변 형식들은 일상적인 의식이 갖고 있는 독단론 자체를 겨냥하고 있다.
이 논변 형식들은 일상적 의식이 무의식적으로 사로 잡혀 있는 유한성들의 불확실성과 정신의 무관심에 대한 근거를 제시한다.
이 정신의 무관심 앞에서 현상이나 지성이 제공하는 모든 것은 동요하게 된다.
회의주의자들에 의하면, 유한한 모든 것이 이렇게 동요하는 가운데 "그림자가 신체로부터 나오듯이" 아타락시아가 생기며, 이것은 이성에 의해 획득된다.
말의 입 거품을 제대로 그릴 수 없었던 화가 아펠레스가 마침내 이 작업을 포기하면서 붓을 닦는 데 쓰였던 [그래서 온갖 색깔로 뒤범벅이 된] 스펀지를 그림에 내던지는 바람에 그가 원래 그리려 했던 말 거품이 묘사되었던 것처럼, 회의주의자들도 이렇게 모든 현상하는 것과 모든 사유된 것이 뒤섞인 혼란 상태 속에서 참된 것을, 즉 이성에 의해 획득된 저 무관심한 평정을 발견한다.
이런 평정을 동물은 본성적으로 지니고 있지만 인간은 이성을 통해 획득하며, 이 점이 인간과 동물을 구별지운다.
퓌론은 일찍이 거친 광풍이 몰아치는 배 위에서 겁에 질린 동행자들에게 그런 위험에는 전혀 아
랑곳하지 않은 채 평온하게 먹이를 먹고 있는 돼지를 가리키며, 현자 또한 바로 그런 아타락시아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이 회의주의는 오로지 이 인물[퓌론]과 자연의 필연성에 대한 그의 완전한 무관심 속에서만 긍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회의주의의 에포케를 기초지우는 열 가지 논변 형식들을 간략하게 언급해봄으로써, 의식의 사실들과 사물들의 확실성을 겨냥하는 회의주의의 방침을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
요컨대, 모든 사물의 불확실성과 에포케의 필연성은 ①동물들 간의 상이성으로부터, 2)인간들 간의 상이성으로부터, 3)감각 기관의 조직의 상이성으로부터, ④주체가 처한 상황의 상이성으로 부터, ⑤상이한 위치와 거리와 장소에 의존해서, ⑥(감각에게 [감각 대상을] 결코 순수하게 제공하지 않는) 혼합에 의해, ⑦사물들의 상이한 규모나 성질들에 근거하여, ⑧(말하자면, 모든 것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상대적인] 관계로부터, ⑨사건의 발생 횟수의 많고 적음을 바탕으로, 10)문화와 관습, 법률, 신비적인 신앙, 선입견[의 상이성]에 근거하여 해명된다.
섹스투스 스스로가 이 논변 형식들의 형식과 관련하여, 이 모든 논변 형식들은 "본래 3원성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진술하고 있다.
즉, "이 논변 형식들의 형식은 [1]인식하는 주체의 상이성의 논변 형식과 [2]인식되는 대상의 상이성의 논변 형식과 [3]판단하는 주체와 판단 받는 대상 양자의 합성에 기반한 논변 형식으로 구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의 논변 형식을 상술할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다른 논변 형식들과 뒤섞이게 된다.
동물과 인간의 상이성에 기반하고 있는 제1논변 형식 과 제2논변 형식을 다루면서 섹스투스는 벌써 제3논변 형식에 해당하는 감각 기관의 상이성에 관해 언급한다.
논의를 극도로 확대시키면, 섹스투스가 말하고 있듯이, 이것들은 모든 유한한 것이란 타자를 통해 조건지워진다는, 즉 모든 것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제8논변 형식과 관련된다. 우리는 이 논변 형식들이 우연히 긁어모은 것이며, 완성되지 않은 반성을, 아니 오히려 이 회의주의의 고유한 이론을 고려해 볼 때 반성의 무계획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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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는 이 논변 형식들이 회의주의가 학문들의 비판 활동에 좀더 일찍이 관계했었더라면 드러내지 않았을 미숙함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논변 형식들의 내용은 이 논변 형식들이 반철학적인 경향과는 멀리 떨어져 있으며, 오로지 일상적인 상식의 독단론에만 대항하고 있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입증한다.
이 논변 형식들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이성과 이성의 인식을 다루지 않는다.
이 논변 형식들은 하나같이 유한한 것과 유한한 것의 인식 작용인 지성하고만 관계할 뿐이다.
이 논변 형식들의 내용은 한편으로는 경험적이며, 이런 한에서 즉자적으로 사변과 전혀 관계가 없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이 논변 형식들의 내용은 모든 현실적인 것이란 타자에 의해 조건지워진다는 관계 일반과 관련되며, 이런 한에서 그 내용은 이성의 원리를 표현한다.
따라서 이 회의주의는 결코 철학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통속적인 상식이나 일상적인 의식을 적대시하는 것이다.
이때 회의주의는 통속적인 상식이나 일상적인 의식을 철학적 논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대중적인 논의를 통해 공격한다.
일상적인 의식은 주어진 것, 사실, (유한한 것이 현상으로 명명되건 혹은 개념으로 명명되건 가리
지 않고) 유한한 것을 고수하면서, 이런 것들이 확실한 것이고 안전한 것이고 영원한 것인 양 거
기에 달라붙는다.
반면 저 회의적인 논변 형식들은 일상적인 의식[의 수준]에 맞추어서 일상적인 의식에게 그런 확실성들이 가변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이 회의주의는 일상적인 의식과 마찬가지로 현상들과 유한성들에 도움을 청한다.
현상들과 유한성들은 상이하며 그것들은 모두 자기를 관철할 수 있는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고 또 유한한 것 자체에서 이율배반이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을 바탕으로, 이 회의주의는 유한한 것의 비진리를 인식한다.
그러므로 이 회의주의는 철학을 향한 첫 번째 단계로 간주될 수 있다.
왜냐하면 철학의 시원은 일상적인 의식이 제공하는 진리를 벗어나서 좀더 높은 진리를 예감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 의식의 사실들을 확신하는 최근의 회의주의에게 이 고대 회의주의와 이 첫 번째 철학의 단계를 참조하라고 지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아니 우리는 최근의 회의주의에게 심지어 통속적인 상식에 유의하라고 명해야 하는 것이다.
통속적인 상식은 그것이 지닌 의식의 모든 사실들과 이 유한한 의식 자체가 소멸하며 따라서 거기에는 어떤 확실성도 없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속적인 상식의 이런 측면과 이 [고대의] 회의주의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구별된다.
통속적인 상식은 "모든 것은 무상하다"고 언표하는 데 반해, 고대의 회의주의는 어떤 사실이 확실한 것으로 내세워질 경우 그 확실성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통속적인 상식에서는 유한성들을 의심하는 이런 회의주의가 유한성들을 고수하는 독단론과 병존함으로써 이 회의주의는 한갓 형식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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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반해, 독단론은 본래의 [참된] 회의주의에 의해 지양되며 이 회의주의에 의해 전 영역에 걸쳐 현실성과 확실성이 불확실성의 세력권으로 고양되고 특수한 관습들과 법률들과 여타의 격식들이 지닌 위력에 무의식적으로 귀속해 있는 통속적인 독단론이 파괴됨으로써, 의식의 사실들의 불확실성에 대한 저 통속적인 믿음은 더 이상 형식적이지 않게 된다.
개인이란 관습들과 법률들과 격식들이 지니고 있는 위력에 비하자면 단지 객체일 뿐이며, 이 위력은 그것이 지닌 개별성들 가운데 개인을 자기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파악한다. 즉, 통속적인 독단론은 스스로 이런 맥락에서 지성적인 지식을 산출하고, 이와 더불어 언제나 저 위력에 봉사하는 데로 점점 깊이 빠져들어갈 뿐이다.
이성의 자유는 회의주의가 자연의 필연성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인식함으로써 자연의 필연성을 벗어나도록 한다.
그러나 동시에 회의주의는 이 필연성을 최고로 존경한다.
왜냐하면 회의주의에게서 자연의 필연성의 개별성들 가운데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으며 단지 보편성을 갖춘 자연의 필연성만이 확실하고, 따라서 회의주의 자체는 마치 자기가 선이 무엇인지 알기라도 하는 양 어떤 개별성을 자연의 필연성 속에서 완성하려 했던 절대적 목적으로 여겨 그 개별성을 자연의 필연성으로 옮겨놓지 않기 때문이다.
회의주의가 개인에게서 예상하는 바는, 시간의 유한성 속에서 순차적으로 드러나는 필연성이 무의식적인 종족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수행하는 바로 그것이다.
시간은 이 종족에게 절대적으로 동일한 것, 확고한 것, 영원한 것, 어디서나 똑같은 성질을 지닌
것으로 간주되는 것을 이 종족으로부터 빼앗는다.
이런 일은 자연의 필연성에 따라 점차 낯선 민족들을 알게 될 경우 가장 흔히 일어난다.
예컨대, 유럽인이 신대륙을 알게 되었을 때 이것은 지금까지 그들이 지녀왔던 상식의 독단론과, 권리 및 진리에 관한 수많은 개념들에 대해 그들이 그토록 자신했던 확실성에 회의적인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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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주의자가 계속해서 꼬투리를 잡히는 이유는 그들의 주장이 취하고 있는 이런 형식적인 가상 때문이다.
즉, 회의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의심한다고 하면서도, 이 "내가 의심한다" 또는 "나에게 그렇게 보인다" 등등은 확실하다고 하기 때문에 응수의 빌미를 제공하고 만다.
이렇게 회의주의자들은 사유를 통한 모든 정립 작용에서 정립 작용의 형식을 고수하면서도 이런 방식으로 언표된 모든 활동성이 독단적이라고 공언하기 때문에, [그들이 내세운] 사유 활동의 실재성과 객관성은 되치기를 당하는 것이다.
[회의주의에게서] 부정성이나 주관성은 더 이상 인물의 주관성 - 이는 동시에 객관성이기도 하다 - 에 한정되지 않고, 지식에 적대적인 지식의 주관성이 되고 말았다.
즉, 회의주의의 부정성이 극도로 수미일관하게 진행되어 이런 극단에 이르면, 회의주의는 비일관적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극단이란 그것의 대립물 없이는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수한 부정성이나 주관성은 그것의 극단 속에서 무화되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거나, 그렇지 않다면 그 즉시 최고로 객관적이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을 의식한다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며, 또한 적대자들이 이런 점을 의식하도록 재촉하였다.
바로 이것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회의주의자들은 “모든 것은 거짓이며 결코 참되지 않다. 어떤 것도 다른 것보다 우월하지 않다"는 그들의 선언들이 자기 지시적이라는 것을 인정했던 것이다.
회의주의자들은 또한 이런 슬로건을 언표하면서 회의주의자가 말하는 것은 단지 그에게 보이는 것뿐이며, 객관적인 존재에 대한 어떤 의견이나 주장을 제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가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가를 언표하는 데 불과하다는 점을 분명하게 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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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이 최근의 회의주의는 회의주의의 가장 고상한 측면을 결여하고 있다.
즉, 이 회의주의는 일상적인 의식의 독단론을 조준하고 있지 못하다.
회의주의는 우리가 지적했던 세 가지 변형태들 가운데 어떤 것이든 간에, 즉 회의주의가 철학과 동일하며 단지 철학의 부정적인 측면일 뿐이든가 혹은 철학과 동떨어져 있으나 철학에 대항하지 않든가 혹은 철학에 대항하든가 간에, 독단론에 대해 적대적이다.
반면 최근의 회의주의에서는 일상적인 의식이 전 범위에 걸친 무한한 사실들과 함께 부정할 수 없는 확실성을 갖는다.
이 회의주의에게서는 의식의 이런 사실들을 기초로 한 추론과 이 사실들의 반성과 분류가 이성의 작업을 구성한다.
이 작업은 한편으로 이 회의주의의 학문으로서 경험 심리학을 우리에게 제공하며, 또 다른 한편
으로 분석적 사유를 사실들에 적용함으로써 모든 이성적인 의심을 넘어서는 많은 여타의 학문들을 만들어낸다.
고대 회의주의도 유물론도 아니 가장 통속적인 인간 지성마저도, 그것이 완전히 짐승의 것이 아니라면, 부정할 수 없는 확실성과 진리를 의식의 사실들에 두는 이런 만행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최근에 이르기까지 이런 만행은 철학에서 전혀 들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이 최근의 회의주의에 따르면, 우리의 물리학과 천문학과 분석적인 사유는 모든 이성적인 의심증을 무시한다.
그래서 이 최근의 회의주의는 한정된 인식 작용에 대항하고 유한한 지식을 적대시하는 고대 후기 회의주의의 고상한 측면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최근의 회의주의는 경험적 직관과 경험적 지식의 너무나 도 뻔뻔스런 한정성 속에서 자신의 진리와 확실성을 정립한다.
이때 경험적 지식이란 경험적 직관을 반성으로 변화시키고 경험적 직관에 어떤 것도 부가하지 않으면서 단지 경험적 직관을 분석할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 최근의 회의주의에서 여전히 회의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 점은 무엇인가?
이 회의주의는 필연적으로 이성의 진리를 부정하는 것밖에는 다른 일을 할 수 없다.
그리고 이를 위해 이성적인 것을 반성으로 변질시키고 절대적인 것의 인식을 유한한 인식 작용으로 바꾸어놓는다.
그렇지만 어디에서나 관철되는 이런 변경의 기본형식은 앞에서 인용된 스피노자의 제1 정의와 반대되는 것 을 원리로 삼고 그것을 절대적인 원칙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스피노자의 제1 정의가 자기 원인을 그것의 본질이 동시에 존재를 포함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데 반해, 최근의 회의주의의 기본 형식은 사유된 것은 그것이 사유된 것이기 때문에 동시에 존재를 자체 내에 포함하지 못한다는 데서 성립한다.
사유와 존재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이성적인 것을 사유와 존재라는 대립 항으로 이렇게 분열시키고, 또한 이런 대립을 절대적으로 고수하는 것이 말하자면 절대화된 지성이다.
이 절대화된 지성이야말로 이 독단적인 회의주의가 무한히 되풀이되고 어디서나 적용되는 근거다.
대자적으로 고찰 할 경우, 이 대립은 그 속에서 차이가 최고로 추상적으로, 그리 고 가장 참된 형식으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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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와 위대한 천부적 재능에 대한 경멸을 볼 때, 그리고 환상이 철학의 문체에 단지 웅변술의 수사들만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는 견해를 볼 때, 황색 신문들이 이야기를 꾸며내듯이 이성도 허구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하는 견해를 볼 때, 이성이 일상적인 현실을 넘어서서 무엇인가를 꾸며냄으로써 환영들이나 몽상들이나 신지학적인 공상들을 산출한다고 간주하는 견해를 볼 때, 환상이 아무리 높게 비상하며 허구를 지어내도 이성은 시적인 허구를 만들어내는 가운데 이 환상을 능가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견해를 볼 때, 우리는 이성이 천재성의 결여에 갈채를 보낼 때의 야만과 소박함 혹은 개념들의 통속성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터무니없는 것인지 우열을 가릴 수 없다.
우리가 위대한 천부적 재능에 대한 경멸을 야만이라 부를 경우, 우리는 문화의 영역 너머에 있는 저 자연적인 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야만인은 천재성을 신적인 어떤 것으로서 존경하고, 또한 그것을 야만인의 의식의 무지
몽매함에 비추는 한 줄기 빛으로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오히려 문화의 야만인데, 문화의 야만이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미개함이며, 이것은 스스로 절대적 한계를 만들고, 이 편협함 내에서 자연의 무제한적인 것을 경멸한다.
문화의 야만이 인식하면서 자기를 언표하는 곳이 지성이다.
개념들과 관련해서 볼 때 그것들은 저 경험 심리학으로부터 유래한다.
경험 심리학은 정신을 [외적인] 질들 속으로 흩어지게 한다.
그래서 이런 질들 하에서 경험 심리학은 전체적인 것과 천재성과 재능을 발견하지 못하고, 정신들을 '능력들'로 가득 찬 주머니처럼 서술한다.
여기서 능력들 각각은 특수한 것이다.
즉, 이성은 직관을 결여하고 있고 환상과 분리되어 있는가 하면 환상은 이성을 결여하고 있다.
텅 빈 능력들의 공허함은 힘든 노동을 통해 사태들로 채워질 수 있을 뿐이며, 사태적이고 사물적인 충만 속에서 만 자신의 가치를 지닐 수 있다.
지성은 주관의 영혼 주머니에 살고 있는 여타의 능력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이다.
왜냐하면 지성은 어떻게 모든 것을 사태로, 즉 한편으로는 개념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물들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지성은 또한 비판적인 두 개의 알파벳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지성은 최초의 두 개의 서술적인 알파벳 속에서는 다른 사태들을 제시한다.)
여기서 지성은 모든 것을 개념들과 개념들 밖에 존재하는 사물들로 나누는 단조로운 일을 한다. 이 과정은 이성의 이념이 주는 생기를 결여하고 있다.
그것은 환상이나 행운 없이, 흐릿하게 울리면서 감각을 무디게 하고 최면을 거는 강압적인 어조로, 무성한 사리풀의 지역을 걸을 때와 똑같은 효과를 낳으면서 진행된다.
어떤 노력을 해도 이 사리풀의 마취 향기에 저항할 수 없다.
거기에서는 어떤 생기발랄한 빛에 의해서도 예감의 형태로나마 활기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