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 군위군
김수환 추기경 생가-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공원-
경북 군위군 군위읍 용대리 238-7
필자는 평소 김수환 추기경을 존경해온 사람이다.
그러다가 정의구현사제단의
종교인답지 못한 언행을 보면서
과거 정의구현사제단을 옹호하면서
박정희 대통령 유신체제에
비판의 목소리를 냈던 김수환 추기경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박정희 대통령과 유신체제는
흑백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성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일정부분 순기능도 역기능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망팔의 나이에 접어들어 생각해 보면
역기능보다도 순기능이 훨씬 더 크고 강했으며,
그만큼 우리 민족이 세계사에
우뚝 설 수 있는 기반이 닦여졌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김수환 추기경 생가를 방문하면서
역시 김수환 추기경은 옳고 그름을 알고
나라의 큰 어른으로서
등대지기와 조타수의 역할을
하였음을 알게되어 아주 기쁜 마음,
아니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즉 ‘2004년 사순절 기념 강연에는
노무현 탄핵사태 등으로
국론이 분열될 것을 우려하여
여당에 참을 것을 주문하였다가
함○○ 신부로부터
불의한 독재시대에 권력자들이 늘 했던 표현이며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한편,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의
단식농성 현장을 찾아 위문했다가
다시 신부 함○○의 규탄을 받기도 했다.’는
설명문을 읽게 된 것이 요인이었다.
여전히 김수환 추기경을
존경할 수 있게 되어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1922~2009) 김수환 추기경 1922년 대구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막내로 출생한 김수환 추기경은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되었으며, 1998년 서울대교구장을 은퇴하여 2009년 2월 16일 선종하였다. 그의 묘소는 용인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
(春)병풍처럼 둘러쳐진 팔공산 삼존불상 옛날부터 8대 명산영악으로 손꼽힌 팔공산은 산세가 삼존불의 형상이라 하여 영산이라 믿었다. 기암과 어우러진 숲과 골짜기에는 천년 고찰과 암자, 불교 문화재들과 유적들을 품고 있다. |
(夏)맑은 물이 어우러진 동산계곡 팔공산의 원시림과 4km에 걸쳐 흐르는 계곡으로 곳곳에 크고 작은 20여 개의 폭포가 계곡을 따라 이어져 절경을 더하며 서쪽으로 2km 떨어진 곳에는 군위 삼존석굴이 있다. |
(秋)작은 공룡능선 아미산 |
(冬)아름다운 간이역 화본역 아담한 역사에서 보여지는 간이역 특유의 분위기가 관광객을 사로잡는다. |
추기경 생가 이 초가(군위군 군위읍 용대리 238번지)는 추기경께서 다섯 살 되던 해 이사와 군위보통학교를 마치고 소신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살던 곳이다. |
“서로 밥이되어 주십시오!”
추기경 김수환
제1절 김수환 추기경의 출생과 종교활동 1. 유년기 시절 김수환 추기경은 1922년 6월 3일에 대구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김수환의 할아버지인 김보현은 천주교를 신봉하다가 1868년에 발생한 '무진박해'로 인해 연산에서 관군에게 잡혀 순교하였을 만큼 집안이 대대로 독실한 천주교 집안이었다. ‘무진박해’로 아버지를 잃고 유복자로 태어난 아버지 김영식은 박해를 피해 살던 고향을 떠나 다른 신자들처럼 옹기장수로 전국을 떠돌았다. 그러던 중 1895년경 칠곡 신나무골 교우촌과 가까운 신촌에 정착하고 그 해 그곳에서 서중하와 만나 결혼하였다. 어머니 서중하는 가난한 옹기장수인 김영석과 결혼하고 고단한 삶을 살았으나 자식들 앞에서는 한번도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부모는 여덟명의 자녀가 전부 로마 가톨릭 성직자가 되기를 바랐으나 넷째 형 김동한과 김수환 2명만이 그 꿈을 이루었다. 김수환이 5살 때 그의 가족은 군위로 이사하였고 군위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보통학교 1학년 재학 중 아버지 김영석이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서종하는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며 자식들을 엄하게 키웠다. 그러나 김수환은 생전에 회고하기를 “어머니는 자식들 교육에 엄하셨지만 먹는 것 입는 것은 마치 부잣집처럼 해주셨다. 그 대신 사치란 있을 수 없었고 심지어 엿이나 과자 같은 군것질도 할 수 없었다.”라고 회고하였다. 그의 어릴 적 꿈은 상인이 되는 것이었다. 보통학교를 졸업하면서 읍내 상점에 취직해서 5년쯤 장사를 배워 독립하고서 25살이 되면 결혼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상급학교 진학과 그리스도 신앙의 영향 등으로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보통학교에 다닐 때 그와 넷째 형 김동한은 어머니로부터 불려가 나중에 사제가 되라는 권유를 받고 그 길을 걷게 된다. 한편 어머니는 방랑벽이 있던 그의 맏형을 안주까지 찾아가 데려왔다고 하며 김수환은 훗날 어머니의 깊은 신앙심과 사랑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2. 학창시절 군위 공립보통학교에 다니다가 김수환은 다시 대구로 돌아와서 1933년에 성 유스티노 신학교로 진학하여 2년 후에 졸업했다. 이후 서울대교구의 신학교였던 동성상업학교에 진학하여 학업을 지속하였다. 1941년 4월에 20세의 김수환은 대구교구의 장학생으로 조치대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했으나 점차 독립투쟁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가톨릭출판사에서 간행하는 아동 잡지 월간 소년에 연재되고 있는 만화 전기 (혜화동의 할아버지)에서는 김수환이 신학수업 전통에 따라 본래는 로마에서 공부해야 하는데, 일제 시대여서 조치대학교에 진학했다고 설명하였다. 일본 유학시절 친일 성향의 일부 학생들과 조선인을 무시하는 일부 교수들과 관리들의 부당한 처우로 방황했지만 독일인 가톨릭 사제의 격려로 학업을 지속하였다고 한다. 나중에 김수환은 학도병에 강제로 징집되어 동경 남쪽의 ‘후시아 섬’에서 일본 사관후보생으로 훈련을 받았다. 김수환은 성신대 학생 시절 넷째 형 김동한이 사목하던 부산광역시 범일성당을 방문, 성당 부설 보육원에서 일하며 가끔 사제관 잡일을 돕던 여인으로부터 청혼을 받았다. 그녀가 김수환에게 나를 받아줄 수 있겠느냐며 청혼하자 당시 로마 가톨릭의 사제서품 전이던 김수환은 ‘나는 정말 사제가 될 것인가?를 놓고 일생일대의 고민을 했고 적잖이 마음이 흔들렸다고 한다. 그러나 한 여인을 온전히 사랑할 자신이 없고 그보다는 많은 사람을 위해 도움을 주는 일이 좋겠다.’라고 마음을 정리하고 결국 청혼을 거절하였다. |
제1절 김수환 추기경의 출생과 종교활동 3. 광복과 사제서품 1944년 23세의 김수환은 졸업을 얼마 남겨 놓지 않았던 무렵에 강제로 학도병에 징집되어 도쿄 남쪽의 후시마 섬에서 사관후보생 훈련을 받고 장교로 임관하였다. 이때 일본 군복을 입고 ‘전석재’ 신부와 촬영한 사진이 언론에 공개되어 비난의 소재가 되었다. 이듬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다시 조치대학교에 복학했으나 1945년 9월에 자퇴한 후 귀국하고 이듬해 성신대학에 입학하여 1950년 29세에 졸업하였다. 그로부터 1년 뒤인 30세에 1951년 9월 15일에 대구에 있는 계산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4. 주교와 대주교 1966년 2월 15일 김수환은 44세에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마산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같은해 5월 31일에 성지여자중·고등학교의 강당에서 주교 서품식과 교구장 착좌식을 가졌다. 김수환 주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교구를 이끌었으며, 초대 교구장으로서 아무것도 없던 마산교구에 발판을 마련했다. 1967년 서울대교구의 교구장인 노기남 대주교가 고령의 나이를 이유로 은퇴하자 1968년 4월에 바오로 6세에 의해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교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서임되었고 5월 29일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주교좌에 착좌하였다. 당시 서울대교구는 교구장이 1년 가까이 공석이었기 때문에 행정상태가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는데 김수환은 대주교로서 이를 잘 타개하여 안정된 행정을 수행하였다. |
제2절 김수환 추기경의 사회활동 1. 철권통치 비판 그러나 그는 1972년 10월 유신 이후 박정희의 철권통치를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지학순 주교가 연루돼 구금됐을 때는 석방을 탄원하러 박정희 대통령을 직접 찾아가 면담하기도 했고, 그 앞에서 정권의 독재를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또한, 정교분리와 자유와 인권 등의 문제를 놓고 박정희와 갑론을박 하다가 논쟁 끝에 박정희를 설득시켜 지 주교의 석방을 얻어냈다. 1974년 7월 인혁당 사건 관련자에 대한 탄원서에 서명하였다. 또한 1971년에 대한민국 전역에 생방송으로 중계된 성탄 미사에서 그는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일입니까? 이런 법을 만들면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그렇게 되면 국가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입니다.”라며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의 유신비판 강연과 시국연설을 불쾌해 한 박정희는 강원룡과 김수환의 강연, 연설, 방송은 꼭 시청하거나 보좌관을 시켜 녹화해두었다 한다.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가 암살당하자 직접 추모사를 낭독하기도 하였다. 이때 추모사에서 “인간 박정희가 이제 주님 앞에 섰습니다.”라는 표현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편, 박정희에 대해 그는 장기집권야욕을 버리고 나머지 과제를 후임자에게 넘겼더라면 지금 국민의 존경을 받는 국부가 됐을 것이라며 아쉬워하기도 하였다. 2. 1980년대 이후의 활동(5공 6공 시절) 1980년대의 군사정권 출범 뒤에도 재야 활동을 하였다. 12.12 사태 이후 인사를 온 당시 전두환 소장에게 “서부 활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서부영화를 보면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잖아요.”라고 비판했다. 또 가장 마음에 아팠던 일로 광주 민주화운동이었다고 말하면서 그는 “개인적으로 가장 고통을 겪었을 때가 그 때였어요. 사태가 그대로 알려지지도 않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처할지도 모르는 상태이고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봤지만 먹혀들어가지도 않고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은 것 같으니까.…” 라는 말을 남겼다. 또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에는 “이 정권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라고 묻고 싶습니다. 이 정권의 뿌리에 양심과 도덕이라는 게 있습니까. 총칼의 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모르는 일입니다’ 하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라며 강도높게 비판했다. 1987년 4.13 호헌 조치 당시에도 미사에서 이를 철회하라는 요구를 6월 항쟁 때는 명동 대성당에 들어온 시위대를 연행하기 위해 경찰이 투입되려 하자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라고 버틴 것도 그였다. 1983년 넷째 형 김동한 사제가 사망하자 그는 형이 마지막으로 거주하던 곳을 찾아 그곳에서 한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3. 1990년대 이후 한편 노태우 정부 집권 당시 그는 국군보안사령부의 사찰 대상 중 한사람이 되어 감시당하였는데, 이는 1990년 10월 4일 한국외대 재학 중 민학투련 출신으로 보안사로 연행되어 프락치로 수사에 협조해오다 탈영한 윤석양 이병의 폭로에 의해 밝혀졌다. 1991년 7월에는 강원도 고성의 통일전망대를 방문해서 장애인들과 남북통일을 기원하며 평화의 종을 울렸다. 1997년 76세의 김수환은 고령의 나이를 이유로 로마 교황청에 서울대교구장 사임 의사를 밝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그는 다시 여러 차례 사임 의사를 밝혔고 1998년 4월 19일에는 아시아 특별 주교 시노드 참석차 교황청을 방문한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사의를 표명하였고 결국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98년 5월 29일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직의 사임을 허락하였다. 같은 해 12월 14일에는 서울 성북동의 길상사 개원법회에 참석하여 축하함으로써, 종교 간의 화합을 보여주었다. 이에 대한 답례로 1998년 2월 24일에 법정 스님이 명동성당을 방문하여 특별 강연을 가지기도 하였다. 1998년 77세에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직을 당시 청주교구장이었던 정진석 대주교에게 물려주었다. 이후 사회 활동에 많이 참가해 영향을 끼쳤으며, 세계적으로 최고령 추기경과 최장 재임 추기경으로서 명성이 높았다. 1999년 4월 28일 김수환은 강원도에서 추기경 서임 30주년 축하식을 열어준 군종사자들과의 면담에서 ‘장면 총리의 역사적인 재평가 작업을 여생동안 이뤄보고 싶다’는 의지를 적극 표명하였다. 6월 4일 장면 총리서거 33주년 기념일에 신임인사차 예방한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은 김수환에게 장면의 포천 묘소를 국립묘지로 이장할 것을 제의하면서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2000년 12월 26일부터 2001년 1월 28일까지 강원룡 목사, 이돈명 변호사와 함께 전쟁의 참상·평화의 가치 체험현장 전시회 추진 공동위원장으로 전시회를 주관하였다. |
제2절 김수환 추기경의 사회활동 4. 2000년대 이후의 활동 2001년 1월 26일 오전 10시 반부터 1시간 20분 동안 경기도 의왕시의 서울구치소에서 사형 직전의 사형수들을 찾아 미사를 집전하기도 하였다. 2001년 2월에는 한국 정당 정치 실록 1. 2권이 출간될 무렵, 최근 정치인들이 정권욕에 빠져 제구실을 못 한다며 대한민국의 정치계를 질타했다. 2002년 천주교 규정에 따라 만 80세가 되어 교황 선출권을 상실하였으나 2004년 4월 9일 사제급추기경 수석에 승계되었다. 이에 김수환은 공식 업무에서 은퇴한 추기경 대신 실무를 맡을 추기경이 한국 천주교회에 절실히 필요하다고 로마 교황청에 통보하였고 이듬해 소설가 최인훈과의 인터뷰에서 이를 증언하였다. 2006년 6월 22일, 대한민국에 새로운 정진석 추기경이 나옴에 따라 김수환은 다행이라고 표현했다. 2004년 사순절 기념 강연에는 노무현 탄핵사태 등으로 국론이 분열될 것을 우려하여 여당에 참을 것을 주문하였다가 함세웅 신부로부터 불의한 독재시대에 권력자들이 늘 했던 표현이며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 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한편,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의 단식농성 현장을 찾아 위문했다가 다시 신부 함세웅의 규탄을 받기도 했다. 문화예술 활동에 두드러지게 활동한 바는 없으나 2004년 3월 24일 오후 서울 중앙시네마에서 열린 특별 시사회에 특별히 참석하여 관람하기도 했다. 또한 테레사 수녀의 생애를 다룬 ‘마더 데레사’도 관람하기도 했다. 2005년 4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종 후 새 교황을 선출하는 선거(콘클라베)에는 연령제한 규정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으나,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 교황 베네딕토 16세로 선출된 후 교황 즉위 미사를 2명의 추기경과 공동으로 주관하였다. 5. 생명 윤리에 관련된 견해 2001년 1월 26일에 경기도 의왕시의 서울구치소에서 사형 직전의 사형수들을 찾아 미사 집전한 뒤 기자회견에서 그는 사람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생명경시 풍조가 근본적인 문제라고 지적하였으며 사형제도와 낙태 문제에 대해 반대 의견을 피력하였다. 2004년 동아일보와의 회견에서 그는 “사형제 폐지, 낙태반대 등은 모든 것이 다 생명을 위해서이다. 우리가 사는 것이 무슨 돈을 벌기 위해서, 권력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고 인간이 참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줄여서 말하면 참 생명이다. 참 생명은 현실에서만이 아니고 영원으로 이어지는 생명이며 생명은 세상 모든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6. 서번트 리더십 서울교구장에서 물러난 지난 1998년 김수환은 스스로를 “혜화동 할아버지”라고 칭하여 게시판에 올라온 신자들의 편지(게시글)에 2년 여간 일일이 답하였다. 또한 신자들의 직접 답장을 쓰면서 글씨 크기를 확대하여 작성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 이른바 ‘서번트 리더십을 보였다’고 평가된다. 7. 예술활동 2004년 3월 24일 오후 서울 중앙시네마에서 열린 특별 시사회 특별히 참석하여 관람하기도 했다. 또한 테레사 수녀의 생애를 다룬 마더 데레사도 관람하기도 했다. 2007년 10월 18일부터 23일까지 세종문화회관 전시실에서 열린 ‘현대 미술 오늘과 내일’ 전에 김수환이 그린 드로잉이 전시되었다. 동성고등학교가 개교 100주년을 맞아 동문의 작품을 소개하는 전시에서 동성고등학교의 전신인 동성상업학교 1941년에 졸업한 김수환은 드로잉 14점과 그가 평소 아끼던 붓으로 직접 쓴 판화 7점을 출품하였다. 김수환이 그림 드로잉은 검은색 유성파스텔을 이용해 동그란 얼굴 안에 눈, 코, 입 등을 그리고 그림 아래에 ‘바보야’ 라는 문구를 적은 자화상과 옛집, 원, 산, 기차 등이었고 붓글씨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등이었다. 또한 역시 동성고등학교 동문인 홍익대학교 미대 학장이 김 추기경의 모습을 한지에 수묵으로 그린 그림 6점도 전시되었다. 김 추기경이 만든 전시작품의 수익은 장학기금으로 사용되었다. |
제3절 김수환 추기경의 사망 1. 사망 및 장례 2008년 7월부터 노환으로 기력이 쇠약해져 서울성모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왔다. 2008년 10월 4일 오전 한때 호흡곤란으로 산소호흡기에 의존하는 등 위독한 상태에 이르렀으나 기력회복했다. 2009년 2월 16일 오후 급격히 호흡곤란과 혈압이 떨어지면서 의식을 잃어 의료진이 응급조치에 나섰지만, 결국 오후 6시 12분 경 강남성모병원에서 88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개신교와 대한 성공회, 한국 정교회, 불교, 천도교, 원불교 등 각 종파에서도 죽음을 애도했고 김수환을 추모하기 위해 전국에서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보도에 따르면 2월 20일 자정까지 방문한 조문객 수가 38만 7천 420여 명으로 이는 그해 5월 23일에 사망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를 방문한 조문객 500만명, 1979년 암살당한 박정희를 추모하기 위해 5일장기간 중 광화문 앞에 모인 문상객 200만명, 1949년 김구가 안두희에게 암살된 직후 그를 추모하기 위해 10일간 경교장에 조문한 100만명 등에 이은 역대 4번째 최다 조문객 방문 기록이다. 2월 21일에는 약 40여만명이 성당을 찾아 조문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김수환의 장례식은 국민장과 사회장 중에서 택할 것으로 결정하였다가 바티칸으로부터 특별히 교황장으로 하라는 연락을 통보받았다. 김수환의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졌기 때문에 선종한 다음 날 2월 17일에서 19일까지 사흘동안 새벽 6시부터 자정까지 시신을 일반인에게 공개하였다. 단 비공개로 염습이 시작되는 2월 19일 오후 4시부터 1시간 동안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였다. 조문기간 동안 명동대성당에 김수환을 추모하기 위해 방문한 조문객들은 명동 대성당부터 퇴계로4가, 명동역, 명동역 골목을 잇는 무려 3킬로미터가 넘는 긴 행렬을 이루었으며, 4초간의 조문을 위해 평균 3시간30분 가량을 기다려야 했음에도 불만이나 지루해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전혀 안면이 없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커피나 음료수를 나눠주기도 하였다. 조문기간 동안 명동대성당에는 이명박 및 전두환, 김영삼, 김대중 등 전직 대통령들과 정치인 정부 관계자, 주한 외교사절, 재계 인사, 종교계 인사, 예술인, 전현직 자치단체장 등이 조문하였다. 장례미사는 2009년 2월 20일에 명동 대성당에서 치러졌으며, 시신은 용인시 천주교 공원묘원 성직자묘역에 안장되었다. 당초에는 서울대교구장으로 장례를 치를 예정이었으나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2009년 2월 19일 교황을 대신하여 장례미사 및 집전례를 집전하는 특사로 정진석 추기경을 임명하였다고 발표함으로써 교황장으로 격상되었다. 추도사는 베네딕토 16세를 비롯해 이명박 대통령(한승수 국무총리가 대독), 오스발도파딜라 주한교황대사 등이 했다. 추도 미사는 약 800여명이 참가했다. 비석에는 김수환의 표어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가 한국어와 라틴어로 새겨졌으며 비문(碑文)으로는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이 없어라.” 라는 시편 23편의 구절이 새겨졌다. 장례는 정통 가톨릭 예식과 유교 예식이 어우러져 치러졌으며, 장례와 관련한 모든 의식은 국가기록물로 지정되고 기록되었다. 2월 22일에는 대한민국 전국의 성당에서 추도 미사가 열렸다. 서울대교구는 2009년 4월 6일 주님 수난 성지주일까지 사순절 기간을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추모 기간으로 선포했다. |
제3절 김수환 추기경의 사망 2. 사망 이후 한편, 김수환은 1990년 1월 5일에 장기 기증 서약하였고, 선종 후에는 자신의 각막을 두 사람에게 기증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이 각막을 기증했다는 사실이 보도되고 나서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에는 평소보다 10배나 많은 사람이 장기기증 의사를 밝혔고, 여타 공공기관 등에서의 장기기증 약속, 그리고 연예인들의 장기기증 의사 또한 이어졌다. 특히 가수 장윤정, 서인영, 박현빈, 쥬얼리 S. 배우 정한용, 희극인 양원경 등이 자신의 장기를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장기기증운동본부 관계자는 “김 추기경 선종 이후 장기기증 문의가 쇄도했고 실제로 기증 의사를 밝힌 사람 수도 많이 늘었다.”며 “특히 선종 이후 5일까진 기증 희망자가 너무 많아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 라고 말했다. 또한, 그의 평소 가르침에 따라 자원봉사와 입양 등의 봉사도 이어졌다. 서점가에는 그와 관련된 책이 잇따라 출간되었으며, 수원대학교 명예교수이자 문학평론가인 구중서 교수가 김 추기경 평전으로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용서하세요》를 집필하였다. 김수환의 말과 글을 시구처럼 편집해 엮은 잠언집 《바보가 바보들에게》도 발간되었다. 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그가 한국 사회에 남긴 인사말을 사회운동으로 펼치고 있다. 서울대교구는 그가 선종한 후 2009년 3월 9일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라고 적힌 지름 9cm 크기의 원형 스티커를 50만장 찍어 일반에 배포되었다. 이 스티커는 빨간색을 바탕으로 그가 그린 자화상 《바보야》를 중앙에 새겨 많은 사람이 차량 유리창이나 사무실 출입문 등에 이 스티커를 붙여 김 추기경의 넋을 기렸다. 묘소는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 천주교 공원묘지에 있으며, 하루평균 800명의 추모객이 다녀간다. 2010년 2월에는 그가 그린 자화상의 이름을 본뜬 모금 및 배분 전문 공익법인 《바보의 나눔》이 창립되었다. |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공원]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공원]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공원 안내도]
[바보나무]
[김] “세상엔 옹기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1922년 5월 봄. 대구 남산동에서 가난한 옹기장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옹기와 인연이 깊은 추기경은 자신의 호를 '옹기'라 불렀다. 그는 생전 제자들에게 “옹기는 곡식뿐만 아니라 오물도 담는 선조들의 삶의 그릇이었다. 세상에 꼭 필요한 옹기 같은 사람이 돼 달라.”는 당부를 아끼지 않았다. |
[수] “당신 안에는 지금 무엇이 담겨있나요?” 추기경은 용대리부터 보통학교까지 코스모스를 구경하며 십리가 넘는 길을 매일 걸어 다녔다. 추기경의 어린 시절 꿈은 자신의 점포를 차리는 거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이 다음에 커서 신부가 되라.”고 하셨고, 그는 군위보통학교 5학년을 마친 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정에 들어갔다. ∙1933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 입학 ∙1941 3월 동성상업학교 을조(소신학교) 졸업 ∙1941 4월 일본 상지(조오찌)대학 문학부 철학과 입학 ∙1944 학병 강제징집 ∙1947 성신대학(가톨릭대학의 전신) 편입 |
[환] “당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고 있나요?” 김수환 추기경에게 인간은 그 자체로 귀하고 존엄한 존재였다. 그가 꿈꾸었던 세상은 차별받지 않는 세상이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주기 위해 노력을 했다. |
[사랑] “서로 사랑하여라.” 가난하고 고통받는 약자들의 편에 서 있던 김수환 추기경은 국가적 사건에도 침묵하지 않고 사랑과 나눔 정신을 이어나갔다. 1970년대 유신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 국가로 향해 나아가야 할 이정표를 제시하는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지주였고, 남북으로 갈라진 이념적 갈등을 중재하고 민족적 대화합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이제 우리의 마음을 먼저 풀어야 합니다. 사랑이야말로 그 어떤 적개심도 녹일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나] “나는 바보입니다.” 있는 그대로 인간으로서, 제가 잘났으면 뭐 그리 잘났고 크면 얼마나 크며,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안다고 나대고, 어디가서 대접받길 바라는게 바보지. 그러고 보면 내가 제일 바보같이 산 것 같아요. 당신도 나와 같은 바보인가요 |
[눔] 사랑은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사랑을 믿는 것이다. |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공원 기념관]
[스테파노 경당]
[스테파노 경당]
[성모상]
[성모상]
[세상을 바꾸는 바보들을 위한 무대]
[세상을 바꾸는 바보들을 위한 무대]
[십자가의 길 제1처 '예수 사형선고를 받으심]
[십자가의 길 제12처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
[십자가의 길 제14처 '무덤에 묻히심']
삼국유사 속 웅녀마늘 ■ 목적 : 단군신화를 기반으로 한 웅녀마늘 향토자원 육성 ■ 품종 : 한국 토종마늘 (Elephant gartic) ■ 재배기간 : 파종 10월 중하순 ~ 수학 익년 6월 중순 ■ 특징 ○ 백합과 여러해살이 구근 ○ 화훼 및 경관용 꽃이 피는 마늘 (5월 하순 ~ 6월 하순) ■ 2012년 “웅녀마늘” 상표 특허 및 도메인 등록 군위군농업기술센터 |
[추모정원]
[추모정원]
[추모정원]
[추모정원]
[추모정원]
[추모정원]
[추모정원]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상]
[김수환 추기경 생가]
[우물과 옹기가마]
옹기 가마와 우물 김수환 추기경의 할아버지 김요안 공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김 추기경의 부모는 천주교 박해를 피해 왜관, 김천, 대구, 칠곡, 선산을 거쳐 1922년 이곳으로 이사해 옹기장수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이 어린 시절을 보내며 신앙을 키웠던 이곳에 옹기가마와 우물을 재현하였다. |
[김수환 추기경 생가]
[김수환 추기경 생가]
[안방]
[윗방]
추기경님!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김윤만 제오르지오 류미선 마리아 막달래나 김태경 요셉 2023. 1. 22. 설날 |
[평화의 숲]
[평화의 숲 예수상]
[염수정 추기경 기념식수]
재경구구회 이광락 동기가
대구광역시 군위군
부모님 산소에 벌채를 갔다가
도보로 20분 거리에 있는
김수환 추기경 생가를 방문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