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20일 토요일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제1독서 : 에제 43,1-7ㄷ
복 음 : 마태 23,1-12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류시화 시인이 쓴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을 보면
성지순례를 가고 싶어 하는 유다인에 대한 영화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지순례를 가고 싶어 하는 유다인은 매번 성지순례를 가려고 할 때마다 생각했습니다.
‘성지순례를 가려면 멋진 구두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성지순례를 가려면 기타가 있어야 노래 부르며 가지.’
성지순례를 가려고 할 때마다 계속 필요한 무언가가 떠올라서
그것을 준비하느라 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유다인들은 학살당하게 됩니다.
수용소로 끌려가던 이 유다인은 말했습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다고. 그냥 노래 부르며 갔으면 됐을걸.”
필요한 것만을 찾다가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습니다.
목적지에 가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을 찾는 것보다 목적지를 향해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최후의 목적지가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들어갈 것은 생각하지 않고,
지금 필요한 것만을 찾으면서 그 나라에 들어갈 준비는 전혀 하지 않습니다.
지금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것만을 생각하면서,
하느님께 인정받을 행동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하느님 나라라는 최종 목적지에 들어갈 유일한 준비물이었습니다.
이 준비물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 율법을 준 아버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모세가 준 율법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지요.
특히 이집트에 민족 전체가 포로로 잡혀갔다 나온 후
이 율법 하나에 의지해서 삶을 지탱했고,
율법을 잘 지키느냐에 따라 하느님을 잘 섬기고 못 섬기는 표로 삼았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율법 학자가 민중의 지도자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그리고 이 율법의 세부 조항까지 철저하게 지켰던 사람이 바로 바리사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하지 않으시지요.
그래서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가 말하는 것은 모두 실행하고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말라고 하시지요.
그들은 말로만 가르치고 가르치는 것을 정작 본인이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려고 위세를 떨치며,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만 합니다. 바로 위선의 표였습니다.
위선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하지 않는 자의 모습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스스로 낮추는 삶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중심의 사랑의 삶
-진실, 겸손, 섬김-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 강론 제목은 “하느님 중심의 사랑의 삶”으로 정했습니다.
초창기부터 수도사제로서 만33년 동안 살면서,
강론시 참 많이 주제로 이용한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 결코 비상한 삶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사랑 중심의 삶을 뜻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요 판단의 잣대입니다.
좌파냐 우파냐의 문제가 아니라,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 상식이 문제입니다.
사랑의 상식입니다. 좌우, 진보와 보수 막론하고 사랑의 상식을 지녀야 함은 기본인데
이것이 이뤄지지 않으니 참으로 개탄스런 혼란한 사회 현실입니다.
저에겐 일기쓰듯 하는 강론입니다.
어제 며칠 전 찍은 영정사진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영정사진을 볼 때마다, 사부 성 베네딕도의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말씀을 늘 생각하며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 이제는 죽음도 멀리 있지 않구나” 하는 자각이 듭니다.
죽음을 날마다 환히 둘 때 본연의 하느님 중심의 사랑의 삶을,
즉 진실과 겸손, 섬김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사랑의 진실, 사랑의 겸손, 사랑의 섬김, 모두 사랑으로 수렴되는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어제는 참 각별한 날이었습니다.
요셉 수도원에서 34년 사는 동안, 아니 수도생활 40년 동안
수도원에 있으면서, 저녁기도에 불참하고 금요 강론 못하기는 처음입니다.
오후 뜻밖의 폭우와 더불어 비를 함빡 젖고 많은 선물을 들고 방문했던,
열정의 사랑이 넘쳤던 귀한 손님 때문이었습니다.
면담 고백성사를 드리고 형제의 도움으로 자동차를 불러 보내드리니 6시10분,
그리하여 저녁기도, 금요 강론을 할 수 없었지만 마음은 참으로 홀가분하고 후련했습니다.
사랑의 잣대로 할 때 너무나 자연스럽고 올바른 행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의 삶의 잣대로 볼 때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귀한 진리를 배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꾸중을 듣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바로 우리의 반면교사 역할을 합니다.
이들의 예를 들면서 실제로 주님이 목표하는 바는
교회내의 지도자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상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과는 다른 좋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도 많았으리라 생각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사랑의 삶의 잣대로 볼 때 이들은 세가지 점에서 실격입니다.
첫째, 진실입니다.
사랑의 진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진실하지 못했고 말은 옳고 많으나 실행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이들의 말은 실천하되 행실은 본받지 말라 하십니다.
하느님 중심의 사랑의 삶은 본질적인, 내적 삶인데 이들에게는 이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의식한 삶이 아니라 외부의 시선을 의식한 허영의 껍데기 삶입니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이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이고,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 불리기를 좋아합니다.
참으로 유치해 보이지만 자기중심의 허영의 삶의 절정을 보여주는데 이들은 전혀 자기를 모릅니다.
부끄러워할 줄도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도 모릅니다.
한마디로 똑똑한 바보로 오늘날도 이런 사람들은 많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떠나면 누구나 있을 수 있는
이런 외부 지향적 자기도취의 허영심 많은 바보 같은 삶입니다.
둘째, 겸손입니다.
사랑의 겸손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일 때 저절로 따라오는 사랑의 겸손입니다.
다음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에 하느님을, 그리스도 예수님을 두고 모두가 평등한 형제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대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이요 이대로 살면 하느님 중심의 겸손한 삶입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참으로 통쾌하고 상쾌하고 유쾌한, 답답한 마음을 확 뚫어주는 우상 타파의 선언 같은 말씀입니다.
이렇게 우리 삶의 중심에 하느님을, 그리스도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야
참으로 자유롭고 진실하고, 그리고 겸손한 삶입니다.
도대체 이런 중심을 하느님이나 그리스도 예수님 아닌 그 누구로 대체할 수 있겠습니까!
한마디로 대체 불가능합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이, 그리스도 중심이 실종되면 교만과 탐욕의 무지의 바보가 됩니다.
무지와 허무의 어둠의 늪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비춰줄 수 있는 중심 거울인 하느님이,
그리스도 예수님이 없기에 회개도 자기를 아는 겸손도 지혜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셋째, 섬김입니다.
역시 사랑의 섬김입니다.
저는 봉사라는 말보다는 섬김이라는 순수한 우리 말을 좋아합니다.
학원이란 말보다도 역시 순수한 우리말 배움터란 말을 좋아합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는 자기 수도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로 정의합니다.
평생 주님을 섬기는 법을 배워야 하는 수도공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을 섬김과 겸손의 삶을 강조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역시 역설적 영적 진리를 보여줍니다.
섬기는 이가 가장 높은 사람이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이는 저절로 높아질 것이라 합니다.
날로 고령화시대로 접어드는 사회요 교회와 수도원입니다.
참으로 연로하고 약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려면
교회나 수도원 장상의 섬김의 역할은 날로 바쁘고 중요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말 그대로 섬김의 직무, 섬김의 권위, 섬김의 리더쉽이란
복음적 삶의 실천이 될 수뿐이 없는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마 공동체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 장상이고,
세계에서 가장 바쁜 분이 온 인류의 심부름꾼, 섬김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일 것입니다.
예전 고 이형우 시몬 베드로 아빠스님의 문장 표어는 “서로 섬기라”였고,
아빠스 취임시 “공동체의 심부름꾼” 역할을 잘하겠다는 말씀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비단 장상뿐 아니라 우리는 우리 수도 형제들의 소임 상
책임을 다하는 사랑의 섬김 활동을 통해서 감동 받기도 합니다.
오늘로서 에제키엘서는 끝나지만, 내용은 아주 기막히게 좋습니다.
성전을 떠났던 주님의 영광이 회개로 깨끗해진 백성들이 모인 주님의 집에 들어오는 장면이고,
주님의 집은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 찬 장면에 이어 들려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대로 진실과 겸손, 섬김의 삶에 충실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합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곳은 내 어좌의 자리, 내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영원히 살 곳이다.”
진실과 겸손, 섬김으로 깨끗해진 우리 삶의 성전을 거처로 삼아
영원히 사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바로 오늘 성인축일 초대송 후렴,
"당신 성인들 안에서 찬란히 빛나시는 주님"이란 말마디와 일치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의 전형적 모범이 오늘 기념하는 마지막 교부로 불리는
시토회의 클레르보 수도원의 성 베르나드도 아빠스 학자입니다.
그 병약한 몸으로 63년 동안 살면서 이룬 업적을 생각하면 정말 불가사의입니다.
이 성인뿐 아니라 많은 교회학자 성인들이 인터넷도, 컴퓨터도 없는
그 불편하고 힘든 시대에 어떻게 친필로써 그 많은 대작을 썼는지 불가사의요,
참으로 얼마나 한눈팔지 않고 주님 섬김의 삶에 전념했는지 감탄하게 됩니다.
이런 거인巨人 같은 성인들이나 옛 신자들에 비하면,
오늘날 신자들은 참 왜소矮小하고 천박淺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에 붙는 칭호를 소개합니다.
세기의 위인, 세기의 골키퍼, 세기의 화해자, 교황의 조언자, 세기의 설교자,
신앙의 옹호자, 분열의 치료자, 수도원의 개혁자, 성서학자.
신학자와 더불어, “꿀처럼 단 박사(Mellifluous Doctor of the Church)” 로 불려진 수도성인입니다.
클레르보는 '빛의 골짜기'라는 뜻이라 하니
수도원을 환히 비췄던 성인의 섬김의 성덕임을 깨닫습니다.
성인의 일생은 성모님께 대한 깊은 신심에 의한 것이었고
성인의 설교와 저서들은 마리아 신학의 기초가 됩니다.
성인은 언제나 “베르나르도야, 너 무엇하러 여기 왔느냐(Ac quid venisti)?”는 글씨를 앞에 놓고
분투의 노력을 다해 살았다 합니다.
성인의 문장은 꿀 벌통이고 양봉업자의 수호성인입니다.
참으로 교회와 온 인류에 주신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같은 진실과 겸손,
섬김의 모범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진실과 겸손, 섬김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둔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어떤 사람이 ‘아마도 죽은 후에 신부님들은 입만 천당 가고,
수도자들은 귀만 가고, 일반 신자들은 발만 갈 것입니다’ 하고 우스갯소리를 하였습니다.
신분에 맞는 삶을 산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는 것이 많거나 좋은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삶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로라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삶이
표양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아셨기에 군중과 제자들에게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3).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장애가 될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마더 데레사)
들은 것과 말한 것, 행하는 것 사이에는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로마2,13)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거두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거두는 것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이 꾸중을 듣는 것은
그들의 지향과 행동이 주님의 마음과 일치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말해야 하고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이 말씀하시도록 나를 도구로 내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라고 하셨습니다.
길다란 예복을 걸치고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높은 자리를 찾으며
스승이라는 소리를 듣기를 원하고 속으로는 온갖 잡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는 사람은 어느 시대나 있어왔고 지금도 있습니다.
그게 바로 저입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고(마태23,11), 자기를 낮추는 사람(마태23,12)이 되어야 한다고
강론을 하면서도 정작 대접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으니 큰일입니다.
“백성이 떼 지어 모여들듯 너에게 와서, 나의 백성으로 네 앞에 앉아 너의 말을 듣는다.
그러나 그 말을 실천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입에는 열정이 차서 그럴듯하게 행동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제 이익만 좇아간다.”(에제33,31).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오시면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1고린4,5).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둘 것이요, 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거둘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심든지 정성껏 심어야 하겠습니다.
실행이 해답입니다. 무엇을 하던지 사랑으로!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업그레이드(upgrade)'라는 용어를 알게 됩니다.
새로운 기능이나 정보가 있으면 그것을 컴퓨터에 다운 받아야 합니다.
예전의 용량과 기능으로는 새로운 것을 열 수 없기도 하고, 정보를 확인하기 어렵기도 합니다.
비밀번호도 6개월에 한 번 정도는 바꾸도록 권장하고 있습니다.
비밀번호가 해킹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스마트폰과 스마트워치도 가끔씩 업그레이드를 하게 됩니다.
확인을 누르면 스스로 알아서 업그레이드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있는 부르클린 교구에서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교구장이 새로 바뀌었고, 시간이 지났으니 저에 대한 정보를 다시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저에 대한 정보는 제가 속한 서울 대교구에서 보내면 된다고 합니다.
부르클린 교구에서 보낸 메일을 보면서 저도 업그레이드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의 영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사제로서 결격사유는 없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업그레이드해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미국 생활에서 체류할 수 있는 기간을 정해주는 것이 비자입니다.
종교 비자는 30개월입니다.
대부분의 교포 사목 신부님들은 5년가량 있기때문에 비자를 갱신하기 위해서 한국엘 다녀옵니다.
새로운 비자를 받아야 미국에 계속 체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운전면허증도 기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새롭게 갱신하지 않으면 운전할 수 없습니다.
미국은 주민등록증이 없기 때문에 운전면허증을 주민등록증처럼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수기도 가끔씩 필터를 교환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부부 사이에도 업그레이드는 필요한 것 같습니다.
편하다고, 익숙하다고 서로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확인하지 않으면
부부가 아닌 동거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기념일을 잘 챙겨주고, 축하 카드도 써주고, 같은 취미를 가지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업그레이드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업그레이드는 우리 삶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업그레이드 할 것들을 말씀하십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만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은 묶어 다른 사람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장에서는 높은 자리를,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는 스승이라 불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스승이라 불리지 않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우리는 모두 형제라고 하십니다.
가장 높은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늘의 사제들도 꼭 업그레이드해야 할 내용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이 꼭 업그레이드해야 할 사항입니다.
오늘의 삶이 교만하고, 나의 일을 남에게 맡기고,
하느님의 영광이 아니라 나의 욕망을 따라가는 삶이라면
우리는 모두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해 주신 말씀으로 업그레이드하면 좋겠습니다.
늦었지만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높은 자리!
그럴싸해 보이지만, 사실 다 부질없다는 것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늘 예수님으로부터 강력한 질타를 받고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처신 하나하나를 묵상하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어찌 그리 제가 살아온 지난 모습과 닮아있는지,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에,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는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마태오 복음 23장 5~7절)
돌아보니 수도자요 사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젊은 시절부터 윗자리에 자주 앉았습니다.
수도회 내 이런저런 보직을 담당하면서, 마이크를 잡고 한마디 할 때도 많았습니다.
미사 때면 잠자리 날개처럼 화사하고 질감 좋은 제의를 차려입고 사람들 앞에 자주 섰습니다.
그런 삶이 지속되다 보니 부끄럽게도 스스로 뭐라도 된 것처럼 어깨가 으쓱해지곤 했습니다.
그런 제 모습을 보시고 주님께서,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난감해하였을까 생각하니
얼굴이 후끈 달아오를 지경입니다.
늦었지만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높은 자리! 그럴싸해 보이지만, 사실 다 부질없다는 것을.
높은 자리! 다 지나가는 것이라는 것,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것.
결국 그 자리는 낮은 자 되어 이웃을 섬기라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자리라는 것.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오 복음 23장 11~12절)
’성구갑’이란 성경 구절이 들어있는 작은 통입니다.
유다인들은 작은 성구갑을 이마나 팔에 달고 다녔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천하겠다는 의미로
성구갑을 몸에 지니고 다녔겠지요.
그런데 정말 웃기는 것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성구갑은 유난히 크고 화려했습니다.
자연스레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었습니다.
크고 화려한 성구갑!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과시욕이 지나쳤습니다.
자신들의 신앙이 얼마나 깊은지를 자랑하고 싶은 허영심의 극치에 달했습니다.
“이것 한번 봐주세요! 이 멋진 성구갑을!
내가 얼마나 하느님 말씀을 애지중지하는지?
내가 얼마나 성경 말씀을 극진히 여기는지를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자칭 가장 하느님 가까이 있는 사람들,
가장 하느님 말씀을 자주 접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실상 그들은 가장 하느님과 멀리 있는 사람들,
가장 하느님 말씀에 반하며 사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철저한 이중성, 과시욕과 허영심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공허한 의(義)를 가차 없이 폭로하십니다.
그들의 공허한 의는 예수님께서 온몸으로 보여주신 참된 의와 극명하게 비교·대조되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적인 신앙과 이중적인 삶, 그로 인한 철저한 몰락과 멸망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강력한 경고요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말은 실행하되 행실은 본받지 말라.
박상대 마르코 신부
마태오 복음 21장부터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활동기가 보도된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께서는 즉시 성전 정화(21,12-17)를 통하여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과 예수의 이런 권한을 놓고 심하게 논쟁을 벌이셨다.(21,23-27)
이어서 두 아들의 비유,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혼인 잔치의 비유(21,28-22,14) 등의
가르침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지도층 인사들을 단죄하기 시작하셨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 사람들과의 세금논쟁(22,15-22)과 부활토론(22,23-33)을 통하여
그들의 감탄을 자아냈으며, 그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다.
또한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로서 사랑의 이중 계명이 새롭게 선포되었다.(22,34-40)
예수께서는 자신이 육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영으로는 다윗이 이름 불러 칭송했던(시편 110,1) 주님이요,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유다교의 공적 지도자들 앞에서 계시하셨다.(22,41-45)
이 계시는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는 예수님의 마지막 자기 계시이다.
이제부터 예수님은 메시아 그리스도로서
유다교의 지도자들과 최후의 격전을 벌이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은 유다교의 지도층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총체적으로 책망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청중은 갈릴래아 활동기에서와 같이 군중과 제자들이다.
예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새로운 정의를 선포하셨다.
오늘은 바리사이와 율사들의 잘못된 정의를 책망하신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산상설교에서 새로운 정의를 선포하셨다.
오늘은 바리사이와 율사들의 잘못된 정의를 책망하신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정의가 무조건 잘못된 것으로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존경과 비난을 동시에 표하신다.
그들이 예수의 존경받을 수 있는 이유는 모세의 律座에 앉아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막중한 권한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비난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의 행동이 말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위선자’들이다.
아직은 아니지만, 곧 예수님의 입술에 ‘위선자’라는 단어가 오르게 될 것이며,
이들에 대한 일곱 가지 불행이 선포될 것이다.(23,13-33)
‘위선자’는 원래 연극용어로 배우들을 지칭한다.
배우들은 자신의 실존을 철저히 가면 뒤에 숨기고 각본과 배역에 따라 연기 한다.
자기 자신은 그렇지 않더라도 배역이 주어지면 각본에 따라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행동은 관객들에게 보이기 위한 행동이 된다.
바리사이와 율사들이 바로 그런 부류에 속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결론이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며,
무거운 짐을 백성에게만 지우고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마나 팔에 聖句 넣는 갑을 크게 만들어 달고 옷단에도 기다란 술을 달고 다니며,
잔치에서 맨 윗자리와 회당에서 제일 높은 자리를 즐겨 찾고,
거리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며, 사람들로부터
스승이다, 지도자다, 하는 말을 즐겨 들으려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마치 오늘날 교회 안에 성직자들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오늘 바리사이와 율사들에 대한 예수님의 비난이
그들에게만 적용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진정한 스승과 지도자는 그리스도 당신 한 분뿐이시며,
믿는 이들은 모두 한 형제자매임을 가르치신다.
예수님만이 가르치시는 先生이며, 우리는 모두 배우는 학생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계속 전해야 하고
다시금 가르쳐야 하는 사도직을 수행해야 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이 명심해야 할 점은 그를 또한 스승이신 예수님 앞에 늘 학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 진다.”(11-12절)는
오늘 복음의 역설을 지워지지 않는 글씨로 마음에 써넣어야 하는 것이다.
남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거나 남 앞에 자주 서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위선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고, 말이 많으면 행동이 따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동료로부터 神父와 組暴의 세 가지 공통점을 듣고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마음이 아팠다.
세 가지 공통점이 즉,
첫째는 ‘검은 옷을 주로 입고 다닌다.’는 것,
둘째는 ‘밥 먹고 돈을 내지 않는다.’는 것,
셋째는 ‘아무한테나 반말한다.’는 것이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