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내에서 자체로 알아낸 6·25 진실 "6·25는 전쟁 초기 참가자들에게 물어보아라!" 한 마디만 계속 보냈어도 북한 사람들이 그렇게 속지 않았을 것. 이민복(대북풍선단장)
이 세상 가장 폐쇄된 곳이 북한이다. 라디오 인터넷을 막아 놓은 유일 곳이라는 것으로 증명된다. 폐쇄가 심할수록 반대로 외부를 알고 싶어진다. 나 역시 외부 소식 특히 남조선 소식이 너무 궁금하였다. 1990년 8월 강원도 철원에서 남한 삐라를 보게 되었다. 출장 기간을 연기하면서까지 샅샅이 뒤져 보았다. 대부분 북한 실정과 정서를 모르고 보낸 것들이지만 그럼에도 인생 혁명을 일으킬 만한 것이 있었다. 6·25 전범자가 누구인가 하는 엄청난 진실을 알게 자극을 준 것이다. 여기 사람들은 이 문제가 얼마나 핵심적인 문제인가를 잘 못 느낀다. 그래서인지 이에 대응하는 것이 어설프기 짝이 없다. 6·25 전쟁 때부터 지금까지의 대북 전단내용들을 보면 전범자가 누구인가를 강조하는 내용이 거의 없다. 오히려 북한이 이것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악용한다. 민족사의 최대 비극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돌려놓고 증오하게 만든 것이다.서로 사랑해야 통일하는데 증오하게 만드니 반 통일 주범인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통일할 수도 없고 설사 통일했다고 해도 문제이다. 원래 공산 철학은 증오의 철학이다. 증오의 이 불에 기름을 붓는 것이 6·25 전쟁이다. 필자가 처음 6·25 전범자는 김일성과 북한이라는데 코방귀를 뀌었다. 남한 삐라는 물론 진실을 썼다. 하지만 진가를 비교할 수 없는 북한에서 소용이 없다. 오히려 북한이 선전한 것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래서 북한 사람들은 세뇌당하고 사는 것이었다. - 남한 삐라에서 김일성에 의한 6·25 전쟁 발발 근거는 크게 두 가지이다. 그 첫째가 소련 공산당 총서기 흐르쇼브 회고록에 밝혀져 있다는 것이다. 그 둘째가 인민군 이학구 대좌가 귀순하여 불었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진실이지만 왜 북한에서는 거짓보다 먹혀들기 힘들까.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북한 사람들은 어떻게 소련 공산당 총서기가 자유세계에 회고록을 보냈는지 믿어지지 않고 또 그런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또 이학구 인민군 대좌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투항한 자가 살려면 무슨 소리들 하지 않을까 하며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진실 자료는 도서관을 비롯해서 어디서도 볼 수가 없다. 싹 다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에서 북한의 거짓 선전이 더 믿어지게 들린다. 이런 북한의 주장이 왜 남한의 주장보다 더 멋있게 들리는지 아래에 소개한다. 북한이 주장하는 미국에 의한 6·25 전쟁설 근거 역시 크게 두 가지이다. 그 첫째는 6·25 전야 미 국무장관 덜레스가 38선을 시찰하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사실 외교적 시찰이었지만 실제로 왔다 간 사진을 앉힌 남한 신문자료가 있다. 그 둘째는 북침하여 <아침을 해주,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는 신성모 국방장관의 말이다. 국군의 장관이 이렇게 말하며 쳐들어왔다며 남한 신문자료를 보여주면서 선전, 교육하기에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힘 없으면서도 폼잡느라 한 신성모의 허풍을 북한이 아주 잘 악용하는 것이다. 한편 3일 만의 서울점령은 수령 우상화로 돌려놓았다. 김일성 장군님이 천재적 군사 예지로 이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대비하여 1~2 킬로 쳐들어온 적들을 일시에 무찌르고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뇌된 믿음이 얼마나 강한지 탈북하여 남한에 와서도 고집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면 필자는 6·25 전쟁 진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남한 삐라를 보고 처음부터 믿지 않았지만 하지만 가끔씩 나를 자극하였다. 자극을 받은 때마다 점차 이상한 점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수령님이 천재적 군사 전략가라고 해도 침공자의 서울을 3일 만에 먹은 것이 이상해졌다. 1·2차 세계 대전을 비롯해서 세계 전사에 없는 기적인데 과연 그게 맞을까 의문도 조심씩 생겨났다. 그러던 중 아주 쉽게 6·25 진실을 아는 방법을 찾아냈다. 연구원 습성이어서인지 경험주의적인 방법을 찾은 것이다. 6·25 초기 참전자나 38선 주민에게 조용히 물어보는 것이었다. 조용히라는 뜻은 공개적으로 말하면 죽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주위에 둘러보니 6·25 참전자가 수두룩하였다. 20만의 인민군이 쳐 내려왔다니 그럴 만도 하다. 나의 연구소 관할 화부 아바이가 6·25 초기 참전자이기에 북한에서 최 예우인 술, 담배를 준비하고 만났다. 영웅이라고 추어주며 술취한 겸에 속심을 다 말하게 유도하였다. 이분은 원래 조선족 출신 팔로군이었다. 6·25 전야 중공 팔로군에서 조선족만 차출하여 어디로 이동시킨다. 단동을 거쳐 신의주로 넘어갈 때에야 조선에 가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때 인민군복도 지급되었는데 상하 견장을 달게 하는데 기분이 나빴다고 한다. 자신들이 기차에서 도착한 곳은 원산이었는데 진탕망탕 놀았다고 한다. 하지만 소련군 고문이 나타나 군기를 잡고 배치한 곳이 속초 강릉 계선이다. 38선 당시 북한 땅이었으며 앞에는 백골 부대라는 국군이 있었다고 한다. 중국 해남도까지 장개석 군대를 쳐부신 백전노장들이지만 긴장했다고 한다. 싸움을 해보면 죽을 각오자들이 가장 무서운데 백골이 되로록 싸운다니 말이다. 6·25 새벽 4시 대포를 쏘고 들어가 보니 빤쯔바람에 죽거나 도망하더란다. 이 대목에서 저는 속으로 <아차! 우리가 먼저 쳤구나> 차후 38선 주민에게도 물어보았는데 마찬가지였다. 국군은 아침 해주, 점심 평양, 소리하며 허풍 떨다가 인민군 땅크에 밀려 나갔다는 것이다. 이외 또 하나 검증한 것이 있다. 6·25 전쟁 때 미군이 양민을 가장 많이 잔인하게 죽인 신천 사건이다. 이곳에는 증오의 박물관 신천박물관이 있으며 전군, 전민을 견학시킨다. 여자 젖가슴을 도려내고 머리에 못 박고 어린이에게 휘발유를 주어 죽이는 만행에 온 군민이 치를 떨며 미제를 증오하게 만드는 곳이다. 신천에서 시집온 아주머니에게 쌀 선물을 드리면서 조용히 말을 시켜보았다. 신천은 주 전선이 아니어서 미 놈 코빼기도 못 보았다고 한다. 대학살은 좌우익 동족끼리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한 번만 확인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여러 번 확인하니 확신이 들었다. 6·25 전범자와 대학살의 원인을 확실히 알게 된 것이다. 그러자 두 가지 분노가 치밀어 올라 욕이 나갔다. 우선 김일성의 사기와 전범자임에 나도 모르게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내가 욕하고 내가 놀랄 정도였다. 거대한 우상심은 한순간에 무너지고 대신 반발심이 그만큼 높아진 것이다. 두 번째 욕은 남조선 당국이었다. 전후 지금껏 6·25는 전쟁 초기 참가자들에게 물어보아라! 한 마디만 계속 보냈어도 북한 사람들이 그렇게 속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현재 제가 보내는 전단 내용에는 이 말들이 반드시 들어있다. 앞서 말했지만 통일은 간단하다. 서로가 증오하지 않으면 된다. 가해자가 오히려 피해자처럼 행세하도록 사기 친 자들에게 더는 속지 않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러자면 대북 풍선이 가장 위력한 수단이라고 본다. 사람은 아는 만큼 행동하게 되어있다. 왜 들고 일어나지 못하는가 묻기 전에 알려주어야 한다. 탈북자가 남한에 오면 북한에 대한 정보를 취득한다. 나도 168개의 정보를 제공, 그 첫 순서가 대북 전단의 효과성이었다. 폐쇄와 거짓이 특징인 북한에 진실을 넣을 수 있는 핵보다 위력한 수단이자 효과라고 했다. 사명감을 다하겠으니 대북 전단 부서에 6개월만 일하게 해달라고 했다. 99% 되었다고 하였지만 1% 때문에 무산되었다. 남한은 사명보다도 밥벌이가 우선이었다. 나 때문에 기득권이 무너지는 것을 우려한 것이다. 한편 하늘이 무너질 정도로 답답한 남한 정부의 행실이 나타난다.(중략) 강조하건데 대북 풍선은 북한 동포의 눈과 귀를 열어주는 원초적인 인도주의 인권 운동이다. 평화통일의 지름길은 북한 동포를 깨우치는 길밖에 없다고 황장엽, 태영호 등 탈북인사들이 말한다. 대북 풍선은 조용히 그리고 북한이 언론을 자유화될 때까지 보내져야 한다. 결코 인기나 돈벌이, 정치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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