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머리말
사풍(射風)이란, 활터의 풍속이라는 뜻이다. 활량들이 모여서 활을 쏘는 과정에서 활쏘기를 하기에 좋도록 만들어진 분위기와 절차를 말한다. 활터는 혼자서 활을 쏘는 것이 아니고 여럿이 모여서 쏘기 때문에 반드시 그에 걸맞는 갖가지 약속과 규약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활쏘기를 하는 데 서로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며 활쏘기의 본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모든 방안과 관습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풍은 고정불변의 것은 아니며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한다. 말하자면 유행과 비슷한 면이 있다. 유행은 지나고 보면 우스운 것이지만, 막상 그것이 한 번 작용하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법에 가까운 규정력을 지닌다. 유행에 뒤떨어졌다는 것은 미개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누구나 한다. 사풍도 마찬가지여서 시대에 따라서 장소에 따라서 조금씩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지역의 사풍에 익숙한 사람이 다른 지역의 사풍에 당황하는 수도 생긴다.
그렇다고 해서 사풍이 늘 변하는 것만은 아니다. 사풍은 활쏘기라는 행위에서 유래하여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시대가 변하더라도 활쏘기라는 행위가 지향하는 바가 분명하므로 시대가 변해도 움직일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활쏘기를 하는데 옆에서 떠들지 말라든가 하는 것은 시대를 초월해서 활터라면 어느 곳에서나 지켜져야 할 일이다. 따라서 사풍이란 변하지 않는 부분과 변하는 부분이 있는 것이니, 경직된 사고로 사풍을 바라보면 결코 바람직한 활터 풍속을 이룰 수 없다.
사풍이 무너진다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사풍이 무너진다는 것은, 그 이전의 사풍과 다른 부분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풍이 무너진다는 개탄은, 그 이전의 사풍을 전제로 한 것이며, 이 경우 그 이전의 사풍이 새로 생긴 사풍보다 더 나은 것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큰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검토가 요구된다.
그런데 여태까지 사풍을 개탄하는 탄식만 있었지, 사풍에 관한 논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사풍은 어떻게 보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의 성격이 다분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일정한 논의에 부치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그런 이유보다는 그러한 생각들을 논의할 조그만 공간조차 마련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생겨난 문제들이다.
시대는 바야흐로 전환기에 와있다. 인터넷의 발달과 정보교환의 전지구화로 급격하게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세계화의 성격상 지구촌의 일부에서 유지되는 전통은 천덕꾸러기로 전락하기 일쑤이다. 설사 천덕꾸러기가 되지 않더라도 소외당하며 입지가 점점 좁아진다. 우리의 활쏘기 또한 그러한 환경에서 결코 예외일 수 없다.
따라서 국궁계 내부에서 이러한 위기의식을 인식하고 세계화에 걸맞는 이론을 내부에서 갖추어서 준비하지 않는다면 머지 않아 자멸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세계화가 대세인 이상 세계화에 걸맞는 새로운 논리와 사풍을 확립하여 전세계인이 즐길 수 있는 스포츠로 거듭나는 것이 이 전환기를 건너는 현 시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세계인의 입맛에만 맞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하다간 자칫 우리 본래의 모습을 잃고 국적불명의 것으로 바뀔 수도 있다. 그것을 예방하려면 전통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방책을 마련해야 하며, 이때 전통이란 활쏘는 ‘기능’이기보다는 활터에 전해오는 풍속, 즉 사풍의 개념에 더 가깝다. 따라서 세계화의 문제는 곧 올바른 사풍의 확립이라는 논제로 귀결된다.
사풍이 무너지고 있다는 개탄은 이미 있던 것은 지켜지지 않는데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규범이 확립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사풍에 관한 정리를 할 필요가 있으며 여태까지 전해오는 활터의 풍속을 정리하지 않으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사풍이 개선되고 나아가야 할지 알 수 없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여태까지 전해오는 전국의 사풍을 정리하면서 그를 바탕으로 어떻게 하면 우리 활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를 검토해보기로 한다.
2.사풍의 여러 가지 문제들
우리의 활쏘기는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오랜 역사를 지나오면서 형성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즐긴 사람도 계층도 다양하다. 그래서 어느 한 가지 시각을 고수하면 나머지 다른 부분을 간과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논의를 어렵게 만든다.
지금 시대는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사회이지만, 불과 한두 세대 전까지만 해도 계급과 계층이 분명히 갈라진 사회였다. 그렇기 때문에 계급과 계층에 따라서 활쏘기의 양상도 다양했다. 우선 지배층인 양반들이 즐기던 활쏘기 풍속이 있었고, 일반 백성들이 즐기던 활쏘기 풍속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지방마다 달랐고 시대마다 달랐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떤 풍속을 기준으로 우리의 사풍을 바라볼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사풍이 무너진다는 개탄은 어떤 시각을 전제로 하며 그런 시각에 맞지 않는 다른 행동이 나타날 때 그것을 꾸짖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활터를 지배하는 관점은 전 시대의 계층 중에서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인가? 바로 이 점을 풀어야만 그 개탄의 의미가 드러난다.
활쏘기는 단오날 씨름이나 그네타기와 같이 전국 곳곳에서 시행될 만큼 온 백성이 즐긴 대중화된 운동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주도하는 계층은 지배층인 양반이었다. 그 이유는 너무나 분명하다. 전쟁용 무기이기 때문이다. 무기는 그 성격상 권력 창출의 핵심이자 근원이기 때문에 국가에서 관리할 수밖에 없다. 국가에서 관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그것의 주동자가 지배층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활쏘기가 조선시대의 가장 중요한 무기였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사풍 역시 전쟁을 수행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흔적은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다. 편사라든가, 취격, 영접 같은 풍속이 다 그런 것들이다.
그리고 현재 유행하는 활터의 분위기 또한 그런 경향이 아주 짙다. 국궁1번지라고 자부심이 대단한 서울 황학정은 아예 왕실의 활터에서 출발한 것이며, 사풍이 엄격하기로 유명한 전주 천양정이나 남원 관덕정의 경우도 모두 조선시대의 관리들과 깊은 연관을 맺던 곳이다.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그러한 영향은 많이 사라졌지만, 문제는 그 후에 활터가 전국에 걸쳐서 늘어나면서 이러한 엄격한 사풍을 유지하던 활터들이 모델이 되어 사풍을 확대재생산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정간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정간은 전라도 지역에서 퇴임구사들을 존경하는 의미로 시작된 것인데, 지금은 마치 신주단지 모시듯이 하는 행위로 바뀌었다. 이 역시 엄격한 사풍을 지향하던 전라도 지역에서 기원한 풍속이다.
따라서 지금의 활터 풍속은 조선시대의 지배층인 양반의 관습에 뿌리를 대고 있으며, 당시 지배문화의 한 축을 담당하던 양반들의 수준 높은 관습이 최근 들어 몇 가지 변화를 일으키면서 사풍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이다. 결국 양반 사회의 관습이 변화된 시대에 따라 변질을 일으키면서 사풍 또한 퇴보하게 된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이른바 ‘양반’에 대한 관념이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볼 때 양반은 전 시대의 기생층이 분명하다. 노동에 종사하지 않으면서 노동자들을 부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계급주의 관점으로 볼 때 드러나는 양상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문화라는 국면으로 접어들면 전혀 다른 양상으로 드러난다. 예를 들어 조선 후기에 예술 분야에서 진경(眞景)을 지향하며 이룬 놀라운 성과는 양반들을 빼놓고는 아무런 설명이 되지 않는다.
활터는 계급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의 문제이다. 삶의 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계급주의 관점으로 재단할 수 없는 인간들의 향기가 무수히 배어있다. 바로 그 점이 문제이다. 분명 우리 시대의 경박한 문화가 따를 수 없는 기품 있는 정서와 품격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활터의 풍속을 논할 때 반드시 전제해야 할 것은 활터가 지닌 지배층의 기생성에 대한 지탄이 아니라 조선후기의 찬란한 문화를 창출했던 주체들의 문화의식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 선비들은 활터에서 무엇을 했나? 이에 대한 답은 그리 어렵지 않다. 선비들은 머리를 쓰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몸이 허약했고, 그 허약한 몸을 활로 달랬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문화나 문제의식은 고스란히 활터로 옮겨왔다. 활터에는 늘 한 아름이나 되는 한지가 마련되었고, 먹과 붓이 활방 한 구석에 놓여서 사군자를 치고 시를 즉석에서 지어서 기생들에게 불렸다. 1960년대까지도 진주 남강에서는 갓 쓰고 도포 입은 선비들이 모여서 활을 쏘는 중간중간에 먹물을 가득히 갈아놓고 즉흥시를 썼다. 그냥 벼루가 아니라 바윗덩이에 홈을 파서 만든 커다란 벼루에다 말이다. 그러면 같이 활을 쏘던 기생들은 장구와 가야금을 끌어당겨 그 시에 곡을 붙이고 창을 했다.1) 뽕짝이 정 건물의 처마 밑까지 밀려들던 시절의 일이다.
그런데 요즘의 활터 분위기는 어떠한가? 텔레비전 소리가 정 건물을 찌렁찌렁 울리는가 하면 제법 고상한 풍속이라고 해야 바둑이나 장기이다. 심하면 화투판이 벌어지며 포카판을 벌리고 다방 아가씨를 불러다 놓고 시시덕거린다. 이러니 사풍의 타락을 개탄하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리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끔찍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화투를 치고 텔레비전을 본다고 해서 그 행위 자체가 나쁜 것일 수는 없다. 시대의 흐름이 그렇고 구성원들 모두가 요구한다면 활터에서 포르노 영화를 상영한들 무슨 상관이랴? 그러나 우리가 항용 ‘바람직하다’고 하는 것은 일정한 문화의 토대 위에서 평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 또한 우리의 가치관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유도하여 활터의 풍속을 정립할 수 있는 그런 곳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몫인 것이고, 그것은 바깥에서 들어오는 문화를 주체성에 대한 자각도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경우 주체성이란 앞세대부터 이어 내려온 훌륭한 관습과 덕목을 말한다. 우리 활터에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훌륭한 덕목이 많다.
지배층이 활터의 풍속을 주도했다는 것은, 한국 전쟁이 끝난 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는다. 조선시대나 일제시대와 분위기는 바뀌었을망정 활터를 주도한 계층은 역시 지배층이었다. 양반 사회의 전통과 유산을 이어받은 각 지역의 유지들이 별다른 대체문화를 찾지 못한 상태에서 선대부터 전수된 활쏘기를 즐겼고, 그들과 일정한 교류를 하는 관계의 인사들이 활쏘기를 즐겼다. 특히 법조계와 중앙정보부, 그리고 세무계통에서 활쏘기가 오래도록 유지되었다.2) 이것은 상류층의 스포츠 관행이 골프로 이동하던 1970년대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니까 1970년대 중반까지 활쏘기는 한국 상류사회를 관류하던 고급 스포츠였다. 이러한 관념이 남아서 아직도 활쏘기를 부자들이나 하는 운동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1970년대까지도 활쏘기는 일종의 멋이었다. 그래서 과녁에 맞추는 것보다는 얼마나 멋있는 복장을 하느냐, 두루주머니가 얼마나 멋있느냐 전통에 어떤 글씨를 새겨서 품위를 높이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1970년대를 산 사람들의 증언은 한결같다. 그래서 월례회가 되면 두루마기를 갖춰입든가, 아니면 양복 정장에 넥타이를 매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변화가 온 것은 1970년대 중반이었다. 이때부터 활쏘기는 저 낮은 대중을 향하여 문을 활짝 연다. 그렇게 문을 열도록 만든 것은 개량궁의 등장이었다. 개량궁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활은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대상이었다. 그 값 때문이다. 다루기도 힘들 뿐더러 값이 만만찮기 때문에 호구지책에 바쁜 일반인들은 돈도 되지 않는 취미 생활에 그만한 돈을 부담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내내 추진된 박정권의 불도저식 근대화 정책과 베트남 전쟁, 그리고 중동 특수에 힘입어 1980년대로 접어들면 생활 형편이 나아지고 삶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달라져 생활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고, 활터의 문턱 또한 낮아져 일반인들의 참여가 부쩍 늘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국궁인구가 갑자기 폭발하듯이 늘어난 배경에는 이러한 조건이 작용한 것이다.3)
사풍의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것은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었으니, 바로 이 때부터 사풍은 타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태까지 멋과 여유로 즐기던 활쏘기가 활터의 풍속에 별다른 호기심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참여하면서 오로지 과녁 맞추는 것이 유일한 능력으로 정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정황을 부추긴 것은 단급 제도이다. 묘하게도 1970년대 초반부터 단급 제도가 시행되었고, 이때부터 활터의 전래된 관습이나 구사들을 존경하기보다는 과녁에 화살을 몇 발이나 맞출 수 있는가 하는 능력을 과시하는 장으로 변한 것이다. 이제부터 맞추는 능력 이외의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었다. 인간성이 좀 모자라도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못 되었다. 대회 나가서 1등상을 많이 타고 단체전에서 우리 정에게 유리하게 시수를 내면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 구사에 대한 존경심이 좀 못하더라도 그런 데서 쓸 구석을 찾는 것이다. 구사에 대한 존경심이나 태도가 등급화되어 나타나는 것도 아닌 데다가 겉으로 드러나는 능력은 맞추는 것으로 확연히 입증되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은 점차 중요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되는 관행이 시작된 것이다. 바로 이것을 사풍이 타락한다고 개탄하는 것이다.
어느 정의 한 교장이 한탄을 하면서 들려준 이야기이다. 집궁 4년 되는 30대 후반의 젊은 사원이 어느 날 승단 대회에 다녀오면서 한다는 얘기가, 이제 5단 명궁이 되었으니, 정에서 잔치 준비를 하고 명궁을 축하하는 현수막을 거리에 내걸라고 주문하더란다. 나이 일흔 넘은 구사들이 주욱 앉아있는 정 안에서 그가 외치고 다닌 말이 이렇다며 혀를 끌끌 찼다. 이제 이런 젊은 사원들에게는 활터의 전통이란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는 것이다. 명궁인 자기의 사법이 제일이고, 이제 자신에게 더 이상 코치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이런 경박한 모습은 단급 제도와 과녁 맞추기 맹신이 만든 합작품의 표본이다. 우리는 이런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3. 버려야 할 말, 궁도
젊은 세대의 이러한 경박성에 대해 무언가 맞설 방안을 찾던 사람들에게 두 가지 반가운 대안이 나타났다. ‘궁도’와 ‘정간’이 그것이다.
궁도는 활쏘기의 행위를 도를 추구하는 행위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맞추기만으로 능력을 판별하는 세태에 대하여 일정한 제동을 걸 수 있다. 왜냐하면 활쏘기를 도로 규정하는 순간, 활터에 들어서는 몸놀림부터 화살을 주우러 가는 동작까지 일체가 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도는 하루아침에 터득되는 것이 아니고 오랜 세월 정진해야 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우리 사회에 깊이 침윤되어있기 때문에 젊은 사원이 아무리 높은 단에 이르러도 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세월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이르게 된다. 늙어가는 마당에 힘까지 딸려 맞출 능력이 신통치 못한 구사들에게도 세월의 몫을 주장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궁도라는 말이 순식간에 전국을 점령하게 된 시점도 1970년대이며, 이것은 묘하게도 단급제도가 시행된 시점과 정확히 맞물린다.
1960년대까지는 활쏘기 대회라고 했다. 물론 일본 궁도의 영향으로 드물게 궁도대회라고 한 경우도 없지 않겠지만, 해방 후 일본 문화를 청산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일본 것 버리기 운동이 전개되었고, 그 영향은 활쏘기에도 미처 1960년대 이르면 활쏘기 대회라는 말을 쓴다. 중앙일보사에서 후원하여 1959년부터 실시된 전국대회의 이름도 “제1회 전국남녀활쏘기대회”였다.4)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궁술대회”라는 말을 썼다. 그러다가 궁도대회라는 명칭으로 굳어진 것은 1970년대로 접어드는 시점이다.5)
그러나 궁도라는 말을 차용한 것은 국궁사의 돌이킬 수 없는 과오일 수밖에 없다. 활쏘기라는 아름다운 우리말을 버린 것도 그렇거니와, 궁도라는 말속에 담긴 반역사성과 반민족성 때문이다. 궁도라는 말은 일본군국주의가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의 일환으로 모든 스포츠를 제도화하면서 만든 용어이다. 중국인들을 상대로 대학살을 자행하고 독립군들을 마루타로 사용하여 인간으로서는 상상을 할 수 없는 잔혹한 짓들을 서슴지 않으며 자신들의 입지를 확립한 일본제국주의의 의도가 들어있는 말이다.
궁도라는 말 하나를 쓴다고 해서 그런 역사에 연결시킬 필요까지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말은 결코 가치중립성을 갖지 않는다. 반드시 가치관을 내포하는 것이 언어의 속성이다. 궁도라는 말은 아무리 그럴 듯하게 포장을 해고 치장을 해도 이러한 역사의 함의를 결코 벗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 민족에게 그런 무자비한 탄압을 자행한 자들의 말을 아무런 반성 없이 빌려쓰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고 훌륭한 전통을 지닌 ‘활쏘기’에서…. 이러고도 우리가 대회 때마다 묵념을 해주는 ‘먼저 가신 궁도인’들께 과연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 싶다.
다행히 궁도라는 말의 이러한 성격에 대해서 심도 있는 연구를 한 글들이 최근 들어 발표되었다. 한병철과 한병기가 공동으로 쓴 “독행도”라는 책에서 궁도의 이 같은 성격을 정리했고6), 김집은 “황학정100년사”에서 일제시대에 궁도 용어가 쓰이게 되는 과정을 아주 잘 추적하여 정리했다.7)
일본에서 말하는 도는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도하고는 다르다. 일본의 도는 어떤 형식이나 절차를 말한다. 예를 들어 궁도란 활쏘기를 행하는 과정에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 행동 양식이나 절차를 정리하고, 그대로 따르는 것을 말한다. 일본궁도는 ‘사법팔절’이라는 요령으로 정리되었다. 따라서 이 중에 한 가지라도 건너뛰면 그것은 도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어깨를 드러내서 뒤로 옷을 젖히고 깍지를 끼고서 화살을 당기는 동작 하나까지 모두 그렇게 해야 하는 일본 궁도계 내의 절차와 원칙이 있는 것이다. 그 절차와 양식을 가리키는 말이 ‘궁도’인 것이다. 따라서 과녁에 맞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궁도의 원칙만 잘 지키면 화살은 저절로 가서 맞는 것이다.
이 뿐이 아니다. 일본 내의 어떤 단체든 그들 구성원이 어떤 합의를 거쳐 절차가 확정되고 양식이 결정되면 그것은 곧 도이고, 그것을 따르는 사람은 도인인 것이다. 꽃꽂이도 그 절차를 규정하여 실행하면 도가 되는 것이며, 북 치는 것도 그 절차와 요령을 합의하여 결정하면 곧 도가 되는 것이고 그에 따라서 하면 도를 행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다분히 그 과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것이 일본의 도이다.8)
그러나 우리나라의 도는 이와 딴판이다. 우리나라에서 우리 조상들이 생각한 도는 이 세상과 우주를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원리였다. 따라서 도사라고 하면 그것을 깨닫고 그 경지에 이른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도사는 만나기도 힘들 뿐더러 이루기도 쉽지 않은 경지이다. 도사들이 산 속 깊은 곳에서 이슬을 먹고산다는 식으로 신격화되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속세에서는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른 사람을 ‘선생’이라고 불렀다. 유학에서도 벼슬을 하지 않고 성리학의 오묘한 원리를 공부하여 일가를 이룬 사람을 선생이라고 한다. 우리가 활터에서 쓰는 선생이란 말은 바로 그것이다.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사람에게 선생이란 가장 자랑스런 호칭이다.
일본의 도와 한국의 도는 이와 같이 다르다. 이렇게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한테 일제시대에 궁도라는 말을 뒤집어 씌웠으니, 이 말을 그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해할 수가 없으니 이미 있는 개념으로 바꾸어 이해하는 길밖에 없다. 그래서 궁도라는 말을 궁사도(弓士道)라는 말의 준말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궁술은 다만 기술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오 궁술에는 궁도(혹은 궁사도)라는 것이 엄정히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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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식 과학적 병기가 발달된 지금(現下) 황금시대를 당하여 궁시를 말하는 것은 너무나 케케묵은 냄새가 나는 느낌을 금할 수 없다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궁시는 무기로서는 아무 가치를 인정할 여지가 없다 할지라도 그 궁사도(弓士道)에 있어서는 오히려 본 받을 것이 상당히 있을 줄로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파렴치한 사람이 하도 많아서 그들은 조선사람이라고 하면 하잘 것 없는 민족으로써 생각하고 멸시하기를 마지아니하지마는, 우리의 종래 문물만은 우리의 눈을 숨겨가면서 집어다가 이것을 다시 우리에게 자랑하기도 하고 팔아먹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을 최신식 문물이라 하여 부러워하기도 하고 혹은 고가로 사기도 한다. 이러한 실례가 한두 가지가 아닌 것으로 보아 조선의 궁사도 그것도 조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날도 없지 아니한 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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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조선 궁술에는 궁사도가 있으며 그 궁사도가 어떠하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자세히 알게 되는 날에는 조선궁술은 동양에서는 물론이오 저 구미 스포츠계에까지도 새로운 환영(歡迎)이 있을 줄로 생각한다. 조선의 궁사도는 아닌 게 아니라 한 운동으로만 생각한다 할지라도 확실히 이상적 운동의 가치가 많은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 궁술은 서양 사람들이 신사 운동으로 가장 숭상하는 테니스에 비교하기를 주저할 만한 가치를 가졌다.9)
여기서 말하는 궁사도란 궁술의 하위 개념으로, 활쏘기 하는 사람들의 도라는 뜻이니, 형식과 절차를 강조하는 일본의 궁도하고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궁도라는 말은 이렇게 어설프게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그 개념은 지금도 아직 소화되지 않은 채 사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궁도는 형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활을 통하여 도를 터득한 사람들에게 붙여줄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정작 활 쏘는 사람이 활을 통하여 도를 터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는 미지수이다. 몇 년째 활을 쏘는 내가 그런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직 활쏘기는 과녁 맞추는 스포츠이자 놀이일 뿐이다.
활터에 떠돌아다니는 비디오 테이프 중에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이 있어서 소개한다. 우리의 활쏘기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을 때 어떤 일이 생기는가 하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일본의 어느 시 궁도협회와 우리나라의 어느 도 궁도협회가 활쏘기 교류를 가진 모양인지, 우리나라의 흰 옷 입은 궁사들이 일본에 가서 그들의 궁도를 구경하고, 그들에게 우리나라의 활쏘기를 소개하는 테이프였다. 첫날은 일본의 궁도를 소개하는지 일본 사람들이 활을 들고 나와서 활쏘기하는 전 과정을 시연했다. 그것을 지켜보는 한국의 활량들은 자못 진지했다. 마치 교무실에 끌려온 학생들처럼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구경했다. 일본의 궁도가 분위기가 그렇기 때문이다. 온갖 폼 다 잡고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동작으로 살얼음 위를 걷듯이 활을 쏜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감히 기침소리 한 번 내기 쉽지 않은 것이다.
그 다음 날은 우리의 활쏘기를 일본 사람들에게 구경시켜주는 모양이었다. 공설운동장에다가 과녁을 놓고서 활을 쏘는데, 시끄럽기가 마치 장터에 온 듯했다. 일본인들은 비디오를 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찍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활 순을 냈다. 그 다음은 더 가관이었다. 일본 사람들이 그 먼 거리를 날아가는 우리 활의 성능에 놀랬는지, 몇 사람이 나와서 활을 만져보고, 시위도 당겨보고 그랬다. 그러자 한국의 활량들은 깍지까지 벗어서 끼워주면서 당기는 요령을 알려주고 실제로 쏘아보게까지 했다. 물론 교류 차원에서 간 것이기 때문에 그러했으리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비디오로 바라보는 나의 머릿속에는 ‘치욕’이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면 그것은 나의 과잉반응이었을까? 일본인들은 실험 삼아 우리 활을 만지작거리며 하고픈 짓을 다 하며 궁금한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다 풀어버린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일본인들의 활을 그렇게 만지작거리며 시위도 당기고 화살을 걸어서 이리저리 겨누었다면 일본인들은 과연 어떻게 했을까? 그래 잘 한다 하면서 깍지도 벗겨주고 당기는 요령도 알려주고 그랬을까? 제 정신이 있는 일본인이라면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일본인들에게 활은 ‘도’이기 때문이다. 도! 도이기 때문이다. 같은 활을 쏘면서도 그들은 우리하고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4. 부풀려진 믿음, 정간
정간 역시 마찬가지다. 점점 경박해지는 젊은이들에게 구사들의 권위가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 그럴듯한 설명을 해줄 수 없는 상황에서 전라도 지역의 정간이 나타났고, 그것을 유일한 대안으로 생각한 끝에 1970년대 들어 갑자기 불어난 전국의 사정에서 너도나도 배워간 것이다. 이것이 해방 전에는 있지도 않던 정간이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진 이유이다.10)
정간에 대해서 처음으로 언급한 책은 “한국의 궁도”(1986년)이다. 해방 전에는 없던 것이고 최근에 생겨난 것이라며 정간에 대한 해의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11) 그러나 이런 설명은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의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정간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설명한 책은 “한국의 활쏘기”(1999년)이다. 이 책에서는 전라도 지역에서 발생한 풍속이라는 것을 구사들의 증언을 통하여 고증하였다.
이 책이 시중에 나가고 며칠 되지 않아서 남도의 한 곳에서 활을 쏘는 분이 편지를 보내왔다. 정간에 관한 것이었다. 그 편지에서는 정간의 뜻을 새롭게 수립해야 한다면서 정간의 뜻을 나름대로 해석해서 보내왔다. 정간의 正은 과녁이고 間은 쇠뇌이름 간짜로, 정간이란 활을 쏘는 곳을 뜻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정간이란 성주를 모신 것이기 때문에 경건해야 한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이 편지를 받고서 나는 많이 망설였다. “한국의 활쏘기”에는 이미 정간의 기원부터 그 의미까지 아주 자세히 설명되어 있어서 더 이상의 논의가 필요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굳이 그 글을 읽고서 이런 편지를 보내왔으니, 그것은 그 편지를 쓴 분이 다른 뜻이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과연 이런 분한테 정간의 뜻을 밝혀진 사실대로 다시 설명을 해주어야 하느냐 아니면 그냥 공손하게 참고하겠다는 정도의 완만한 답장을 보낼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아무리 믿음이 그러하더라도 사실은 사실인 것이고, 믿음 때문에 사실을 바꿀 수는 없는 법이다.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기에 정답을 보내기로 하고 “한국의 활쏘기”에 쓰인 그대로 답장을 보냈다. 정간에 대한 자구의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과 정간은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이 내가 보낸 편지의 요지였다.
그러자 며칠 뒤에 바로 답장이 왔다. 그 답장은 흥분한 상태에서 쓴 것이 역력히 드러났다. 그러면서 정간에 대한 나의 태도를 “정간폐지론”으로 결론지으면서 분개한 어조로 끝을 맺었다. 황당했지만, 그 편지를 읽으면서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마음이 정해지면 원하는 그 방향 이외의 의견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활쏘기”에도 내가 쓴 편지에도 나는 정간을 폐지하자고 주장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분은 정간이 해방 후에 생긴 전라도 지역의 풍속이라는 지적을 정간폐지론으로 받아들여 해석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분한테 다시 답장을 썼다. 답장의 요지는, 나는 정간 폐지론을 주장한 적이 없으며, 그것은 지난번에 보낸 편지를 다시 냉정하게 읽어보면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이고, 책에 대해 애정을 갖고 관심을 보여주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감사한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 뒤에 답장은 오지 않았다. 아마도 편지를 다시 읽고서 내 의견을 받아들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사람이 달나라에 가기 전까지 우리는 달에는 옥토끼가 방아를 찧고 있다고 믿었다. 그것이 아무리 황당한 발상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전까지는 그것을 사실로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의 일이고 사람 사는 사회의 일이다. 그러나 1970년대에 미국에서 사람을 달나라에 보내어 달나라는 메마른 땅덩이일 뿐이며 사람이나 생물은 살 수 없는 환경이라는 것을 생중계 하였다. 이제 달나라에 옥토끼가 산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허구로 밝혀진 것이다.
그런데 그 후에도 달나라에 옥토끼가 산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때 옥토끼는 사실이 아니다. 옥토끼가 사람들의 향수를 달래고 상상력을 풍부하게 해주는 요인이 될 수는 있어도 절대로 그것이 사실로 확정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이 옥토끼가 설화나 상상 속의 가공물이 아닌 현실 속의 사실로 살아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을 과연 누가 믿어줄 것인가? 그런데도 이 옥토끼가 한국의 국궁계에는 아직도 버젓이 살아있다. 정간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정간폐지론자는 아니다. 그렇다고 정간옹호론자도 아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정간 따위엔 별 관심이 없다. 그것은 전라도라는 한 지역에서 일어나는 극히 사소한 풍속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1986년까지도 전주 천양정에는 정간이 없었고, 서울 황학정에는 지금도 정간이 없다. 1986년까지 전주 천양정에 정간이 없었다는 것은 내 이야기가 아니고 현재 대한궁도협회의 공식 교범인 ‘한국의 궁도’를 편집한 임종남의 말이며 황학정에 정간이 없다는 것은 거기에 가 보면 될 일이다. 나는 지금 정간에 대한 내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간이 어떻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정간에 대해 더 이상 말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정간에 대단한 애착과 믿음으로 그 동안 국궁의 발전을 위해 힘을 써오신 구사들을 위해서 사족 같은 내 사사로운 견해를 덧붙이는 것으로 정간에 대한 논의의 종지부를 찍으려고 한다.
우리나라의 활쏘기는 오랜 역사를 통하여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렸기 때문에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풍속을 낳았다. 그 과정에서 전국의 사정에 공통된 예절과 풍속이 생겼다. 그러나 그러한 풍속은 곧 각 지역으로 퍼져가며 다양한 모습으로 정착했다. 그래서 어느 한 지역의 풍속이 옳다고 말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풍속이 전국에 산재한다. 이것이 우리 활 풍속의 장점이자 자랑이다.
정간은 전라도에서 1960년대에 발생하여 1970년대에 실시된 전북지역의 활쏘기 대회를 매개로 해서 전국으로 퍼져나간 풍속이다. 이것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입방아 찧을 것은 못된다. 그것은 활을 쏘는 사람들 자신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간이 마치 옛날부터 있었으며 그것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는 현재의 풍토와 분위기는 결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 한 지역의 풍속이며, 그렇기 때문에 한 지방의 풍속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점이다. 정간이 전라도 지역의 특성을 보여주는 풍속이라면 이것은 오히려 전라도 사람들에게 자랑스러운 일이며, 새로운 시대로 도약하는 국궁의 장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풍속은 유행과 같은 것이어서 조금씩 변한다. 정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전라도에서 시작된 풍속이며 어른과 구사를 존경하는 풍토가 잘 전달된 전라도 지역의 관습으로 정착된 것이라면 그것은 전라도 사람들에게 아주 자랑스러운 전통이 될 수 있는 일이다. 전통 역시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간이 옛날부터 있던 것이라고 주장을 한다든지, 정간을 모시지 않고 ‘정간배례’를 하지 않으면 ‘궁도인’의 자격이 없다거나, 정간에 대한 자유로운 논의를 꺼리는 상황이라면 정간은 국궁의 발전에 해가 될지언정 절대로 도움이 될 수 없다. 믿음으로 사실을 부인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도 없는 일이다. 사실은 어디까지나 사실인 것이다. 내가 달나라에 옥토끼가 있다고 아무리 믿어봤자 달에는 메마른 흙만이 있을 뿐이다.
정간은 건축물의 한 가운데를 가리키는 말이다. 국어사전에 그렇게 나와있다. 그런데 전라도 지역에서는 퇴임원로나 지역의 유지들이 활을 쏘았고, 그들이 나이가 들어 활을 쏘지 못하게 된 뒤에도 활터에 나와서 후학들의 활쏘기 모습을 보며 지냈다. 전라도 지역의 고풍이란 풍속은 바로 이와 같은 분위기를 배경으로 하여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정 건물의 중앙에 놓인 곳에서 앉아서 소일했고, 자신을 존경하는 후학들에게 시도 써주고 잔치도 베풀어주고 했다. 신사들은 의례히 활터에 올라오면서 그곳에 가서 인사를 했다.
그러다가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활쏘기가 소원해지고 원로구사들이 이승을 떠나면서 그 자리가 비었다. 그러자 그때부터 새로 배우게 된 사람들이 의문을 품게 된다. 왜 아무도 없는 곳에 인사를 하느냐는 지극히 당연한 질문을 한 것이다. 이제부터 구사들은 활을 배우러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매번 인사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주어야 하는 아주 귀찮은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나온 것이 ‘정간’이라는 현판을 거는 것이었다.
정간은 그 성격이 신을 모시는 것이 아니다. 만약 나한테 편지를 보낸 분들의 말대로 정간이 성주신을 뜻하는 것이라면 당장 특정종교, 특히 개신교와 마찰이 일어난다. 정간을 성주신의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개신교도들은 활을 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것을 분명히 생각해야 한다. 정간을 결코 신이 아니다. 그렇다면 정간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른들이 앉아있던 위치를 가리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고 활터의 어른들에게 인사하는 것, 그것이 정간의 의미이다. 그런데 이런 풍속은 옛날부터 있었다. 등정례가 그것이다. 활터에 처음 올라오면서 먼저 올라온 어른에게 ‘왔습니다’하고 인사하면 먼저 와있던 사람들은 ‘오시오’로 응수한다. 얼마나 간편하고 좋은 인사법인가? 그런데도 따로 무슨 복잡한 예가 필요하단 말인가?
배례란, 엎드려 절하는 것이다. 그리고 절대복종의 맹세이다. 일본 문화에서 잘 볼 수 있는 말이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에 임금에게 절을 하거나 향교에서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절을 할 때는 배례라는 말을 썼다. 그러나 지금 우리 생활에서는 그런 배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더우기 정간 배례라고 하면서도 엎드려 절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게 무슨 배례인가? 그냥 정간례라고 하면 이해할 수 있다. 배례는 어불성설이다. 배례라고 붙이려면 정말 매일 같이 활터에 올라와서 정간에 대고 큰절을 하든가 하면 될 일이다.
물론 여기서 말트집을 잡자는 얘기는 아니다. 이미 있는 등정례를 애써 무시하고 굳이 불필요하게 엄격한 격식을 강요하려는 저의가 무엇인가 묻고 싶은 것이고, 그것이 과연 국궁의 발전에 보탬이 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논의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말이 길어졌지만, 한 가지 방안을 내놓으며 간단히 매듭짓겠다.
정간은 분명 전라도 지역에서 전통이 있는 풍속으로 정착했다. 그것까지 뭐랄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것을 마치 옛날부터 있어온 진리인 양 전국의 활터에 강요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요즘 신생 정에서는 건물이 없이 과녁만 놓고서 활을 쏘는 곳이 많다. 그렇다면 그런 활터는 정간이 어디란 말인가? 정간을 놓을래야 놓을 곳이 없지 않은가? 요컨대 정간을 마치 활터마다 갖추어야 할 필수요소로 생각하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해방 전부터 원로 구사들이 있던 정에서는 정간을 모시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어른도 없는 신생 정에서 굳이 정간을 모실 필요가 없다. 그래서 옛날부터 선생안을 모시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주는 전통이 있는 곳에서는 전라도 지역의 전통에 따라 회원들 간의 합의 하에 정간을 모시는 것이 좋을 듯싶다. 그러면 정간에 대한 정 나름의 자부심도 생길 것이고, 그것은 활터의 다양한 풍속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그렇지 못한 실정이라면 개념도 모호하고 뜻도 분명치 않는 정간을 굳이 모시려고 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자기네 정에 정간을 모셨다고 해서 정간이 없는 남의 정을 우습게 보는 것은 내 기준으로 남을 보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집에서 제사를 이렇게 지내니 너희 집도 이렇게 지내라는 식의 간섭에 지나지 않는다. 정간은 구성원들의 합의 사항일 뿐 활터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니다. 정간이라는 형식에 담고자 하는 뜻은 이미 등정례에 다 들어있다. 등정례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조선의 궁술”을 보기 바란다.
5. 사풍의 기준, 황학정
한국의 사풍은 획일화 되어있지 않고 아주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활쏘기가 오랜 역사를 거치는 동안 각 지방마다 지역마다 나름대로 다른 곳과는 다른 풍속이 자리잡았다. 그러한 각 지역의 풍속은 각기 개성을 갖고 발전했다. 따라서 각 지역의 풍속은 그 모습 그대로 존중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통신수단이 발달하고 중앙의 통제가 강화되면서 각 지역의 특색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여 앞으로도 진행될 불가피한 추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각 지역의 풍속은 그 지역의 풍속으로 존중하되, 각 지역의 활량들이 한 자리에 모일 때는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방마다 각기 다른 풍속을 지닌 활량들이 한 장소에서 만날 때 어디를 기준으로 행동을 통일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서로 자기네 풍속이 옳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준설정은 불가피한 일이다.
나는 그 기준을 해방 전후 시기의 황학정으로 본다. 이유는 간단하다. 오늘날 우리의 활쏘기 모습을 처음부터 주도한 곳이 서울 황학정이고, 서울 황학정은 조선 왕실의 활쏘기를 이어받은 곳이어서 가장 점잖고 기품있는 풍속을 유지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이러한 생각을 중심으로 하고 요즘의 사풍을 하나씩 검토해보기로 한다.
1) 권영구 대담(1998.7.8.)
2) 이선중, ‘사정과 나’, 국궁1번지(제1호, 황학정, 1995) 53~57쪽
고정식 대담, ‘제주의 활쏘기 이야기’, 온깍지궁사회 홈페이지 설왕설래
http://www.onkagzy.com
중앙정보부원들이 활쏘기를 한 것은 박정희가 활을 쏘았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현충사대회에 깃발을 만들어주었고, 해마다 현충일날 온양의 현충사에 와서 시사를 했다. 그리고 진해 벽해정의 현판도 스스로 써주었을 만큼 활에 관한 관심은 남달랐다.
3) 정진명, ‘국궁대중화의 현황과 과제’, 21세기 국궁 발전의 방향과 과제(육군참모총장기 전국남녀궁도대회 기념 학술세미나 자료집, 육군박물관․국궁문화연구회, 2001) 40쪽
4) 황학정 100년사, 132쪽
5) 김복만 대담(1998. 4. 15.)
6) 한병철․한병기, 독행도(학민사, 1997)
7) 황학정 100년사(황학정, 2001)
8) 이석희 대담(2001. 10. 14)
9) 정언산인, 조선궁도와 사풍(조선일보, 1934. 6. 3.)
10) 정진명, 한국의 활쏘기(학민사, 1999) 40~45쪽
11) 임종남 편, 한국의 궁도(대한궁도협회, 1992) 97~9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