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리(李德履) 저(著) 《동다기(東茶記)》의 차문화사적 자료 가치
정민 연구논문 <문헌과 해석> 수록
1. 《동다기》의 발견 경위
지난 2006년 9월 15, 16 양일간 그동안 진행해온 다산 관련 작업을 마무리할 겸해서 강진 답사를 다녀왔다. 다산초당과 자료전시관에 들러 다산 유묵과 관련자료를 살펴보고, 다산의 제자 황상(黃裳)의 일속산방 터와 다산이 아들 학연과 함께 한 겨울을 나며 《주역》을 읽었던 보은산 고성암, 그리고 첫 거처였던 주막거리 사의재 터 등을 둘러보았다. 마지막으로 다산의 강진 시절 막내 제자인 자이당(自怡堂) 이시헌(李時憲, 1803-1860)의 거처가 있던 백운동 원림을 찾았다.
백운동 원림을 찾은 것은 지난 해 전시된 다산친필유물전에서 본 다산의 친필 편지에 백운동을 수신자로 한 것이 여러 통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해 강진의 전시는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다산의 강진 생활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생생한 자료들이 많이 나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다. 유배 당시나 이후까지 다산은 백운동의 주인이었던 이시헌의 부친 이덕휘(李德輝)의 도움을 적지 않게 받았던 듯, 편지에는 이런 저런 고마움의 표시와 차떡 제조 방법에 관한 조언도 실려 있어서 이번 길에 그 원본을 확인하고 싶었다. 백운동은 초의가 그린 〈백운동도〉가 〈다산초당도〉와 함께 합첩된 것이 세상에 전한다. 백운동은 원형이 온전히 보존된 우리나라의 몇 되지 않은 전통 원림 가운데 하나다.
이시헌의 5대손인 이효천(李孝天) 선생의 후의로 다산 관련 자료를 열람하던 중, 《강심(江心)》이란 낯선 제목의 필사본 한 권에 눈이 멎었다. 이시헌의 친필로 쓰여진 이 책은 서문이나 저자 표시도 없이 사부(辭賦)와 고체시들이 실려 있었다. 그러다 중간 부분에서 〈기다(記茶)〉와 〈기연다(記烟茶)〉로 적힌 잡록이 나왔다. 분량이 적지 않은데다 언뜻 보기에도 18세기 지식인들의 지식 경영 방식에 따라 차와 담배에 대해 비망록 형식으로 기록한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끝장에는 이 글을 지은 사람이 이덕리(李德履)라고 밝혀져 있었다. 주인의 양해를 구해 복사된 자료를 빌려 서울로 올라왔다.
저자인 이덕리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고, 차에 관해서는 문외한인지라 먼저 초의의 《동다송(東茶頌)》을 펼쳐보았다. 읽다보니 시의 하단 각주에 《동다기》를 인용한 대목이 있었다. 놀랍게도 좀 전에 본 〈기다(記茶)〉의 한 단락이 그대로 나오는 것이 아닌가. 기존의 해설서를 보니 《동다송》은 실물이 전하지 않는다 하고, 대부분 다산 정약용 선생이 지은 저술로 논의되고 있었다. 다산의 막내 제자였던 이시헌이 자필로 필사한 이 〈기다〉가 그간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찾고 있던 〈동다기〉였던 것이다.
흥미는 곧바로 흥분으로 바뀌었다. 이에 《동다기》와 관련된 정보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며칠 뒤에 《동다기》가 이미 1992년에 용운 스님에 의해 차전문지 다담에 10개월에 걸쳐 연재 형식으로 소개되었음을 인터넷 검색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잡지에 게재된 상태의 원고를 급히 구해보았다. 〈기다〉의 내용과 동일하였다. 용운 스님이 소개한 《동다기》는 대흥사 승려 법진(法眞)이 1891년에 필사한 것으로, 필사자의 이름이 ‘전의리(全義李) 저(著)’로 표기되어 있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전의 이씨가 지은 것으로 정리되었으나 현재까지 오리무중의 상태로 남아 있었다.
백운동본 《동다기》와 원문을 꼼꼼히 대조해보니 법진본 《동다기》는 필사 상태에 문제가 많았다. 서설 부분 중간에 중요한 내용이 398자 누락되고, 본문의 한 단락이 통째로 빠졌으며, 뒷부분이 전부 탈락된 반쪽 짜리였다. 특히 차무역을 통해 국부를 창출해야 한다는 이 글의 핵심 주장은 서설에서 간략히 언급되고 후반부에 가서 비로소 구체적 내용이 나온다. 법진본은 전반부의 차무역 부분이 탈락되고, 그 구체적 내용에 해당하는 후반부가 없어져서 실제적인 알맹이가 다 빠져버린 어정쩡한 글이 되고 말았다.
한편으로 법진본 《동다기》는 원본이 세상에 공개된 적이 없어, 원문의 미심쩍은 오류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예를 들어 ‘비국가유생민(裨國家裕生民)’을 탈초과정에서 잘못 읽어 ‘선국가유생민(禪國家裕生民)’으로 해놓는 바람에 ‘선(禪)’자의 풀이를 두고 억지 해설을 하게 된다던가, 출전이 있는 고사를 그저 글자 따라 해석하여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대목이 적지 않았다. 후술하겠지만 어쩐 일인지 이능화와 최남선, 문일평과 같은 학자들은 일관되게 《동다기》를 다산의 저술로 못 박았다. 까닭에 많은 다인(茶人)들은 지금까지도 다산이 지은 《동다기》의 존재를 기정사실화 하고 이 책의 등장을 고대해온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번 《동다기》의 출현은 이 글의 저자 문제와 구체적 내용 연구에 확실한 매듭을 짓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소장자 이효천 선생의 흔쾌한 이해로 금번 《동다기》의 원본 필사인 〈기다〉 전문을 문헌과해석에 영인 게재하고, 이 책의 저자와 이 책을 둘러싼 저간의 논란, 주요내용과 자료 가치 등을 거칠게나마 소개키로 한다. 자료 공개를 통해 이 책이 갖는 차문화사적 의미를 복권시키고, 나아가 실학 저술로서의 위상을 복원하여 전문 연구자들의 연구를 촉구하자는 뜻에서다. 원문의 탈초와 번역 및 주해는 현재 작업이 진행 중에 있다. 빠른 시일 안에 원문을 교감하고 전체 내용을 풀이한 후 주석을 달아 단행본으로 공간하겠다. 자료의 중요성을 공감하고, 학문 발전을 위해 공개를 선뜻 허락해 준 이효천 선생께 깊이 감사드린다.
2. 《동다송》과 《동다기》
《동다기》가 세상에 처음 알려진 것은 초의 스님이 지은 《동다송》의 주석에 《동다기》의 한 대목이 인용되면서부터다. 《동다송》은 초의 스님이 정조의 부마였던 해거재(海居齋) 홍현주(洪顯周, 1793-1865)의 부탁으로 그에게 중국차의 역사와 우리나라 차의 특성에 대해 설명해주기 위해 지은 장편의 고체시다. 초의는 각종 차 관련 전적에서 뽑아낸 내용을 압축해서 한 편의 시로 녹여냈다. 그러면서 각 구절의 의미를 보충 설명하기 위해, 구절마다 관련 있는 원전의 내용을 주석에 달아 놓았다.
이후 이 책은 우리나라 차문화사에서 없지 못할 유일무이의 저작으로 중국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에 준하는 《조선다경》의 대접을 받아 이미 수종의 주석서가 간행된 바 있다. 한편 당대 홍현주 같은 귀족조차 차에 대해 전혀 몰라 초의에게 문의한 것을 보면, 당시 우리나라에서 차문화가 얼마나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었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다.
《동다송》의 실제 내용을 보면 대부분 중국의 차 고사를 길게 인용하고, 우리나라 차에 관한 내용은 끝 쪽의 네 구절과 몇 곳 주석에서 잠깐 언급한 데 불과하다. 말하자면 중국차의 역사와 차 일반론을 노래한 《다송》 끝에 우리나라 차에 관한 내용이 살짝 보태진 것이지, 《동다송》으로 명명하기엔 ‘동다(東茶)’에 관한 부분이 지나치게 소략한 감이 있다.
《동다송》에서 《동다기》과 관련이 있는 대목의 원문과 각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국에서 나는 것도 원래 서로 같나니
東國所産元相同 동국소산원상동
색과 향, 기운과 맛 중국과 한 가질세.
色香氣味論一功 색향기미논일공
육안차의 맛에다 몽산차의 약효 지녀
陸安之味蒙山藥 육안지미몽산약
옛사람은 두 가지를 아울렀다 평가했지.
古人高判兼兩宗 고인고판겸양종
《동다기》에서 말하였다.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 차의 효과가 중국 남쪽 지방에서 나는 것만 못하다고 의심한다. 내가 보건대 색과 향기, 기운과 맛이 조금도 다를 바 없다. 다서(茶書)에서는 육안차(陸安茶)는 맛이 낫고, 몽산차(蒙山茶)는 약효가 좋다고 했다. 우리나라 차는 대개 이 둘을 겸하였다. 만약 이찬황(李贊皇)이나 육자우(陸子羽)가 있다 해도, 그들은 반드시 내 말이 옳다고 할 것이다.”
《동다송》에서 언급한 우리나라 차에 관한 언급은 《동다기》의 원문을 압축해 놓은 것이다. 이밖에 《동다송》의 주석 부분에 지리산 화개동의 차나무 이야기와 다산의 〈걸명소(乞茗疏)〉의 구절 인용 등 우리나라 차와 연관된 언급이 일부 있다. 이렇게 본다면 《동다송》은 명실상부하게 ‘동차(東茶)’의 내력을 찬송한 글은 못 된다. 오히려 차를 전혀 모르는 귀족 홍현주에게 차의 효능과 맛, 차에 얽힌 중국의 역대 고사, 그리고 끝에 가서 우리나라 차의 품질에 대해 설명하여, 차에 관한 지식을 정리해주려는 목적에서 지은 입문적 성격의 시에 가깝다.
이제 이 《동다기》의 출현으로 조선 후기 차문화의 맥락이 비로소 소연해지게 되었다. 새롭게 발굴된 자료로 미루어 볼 때, 《동다기》는 1837년에 지어진 초의의 《동다송》보다 적어도 50년 가량 앞선 것으로 보인다. 《동다송》에서 초의가 《동다기》의 저자를 ‘고인(古人)’으로 일컬은 것은 이 때문이다. 또 그 내용이 비교적 풍부해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동다기》와 관련하여 가장 보편화된 오해는 흔히 이 책이 다산의 저작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대부분의 차관련 연구서나 인터넷 상의 글에서 ‘동다기’를 검색어로 치면 이 책은 한결같이 다산 정약용의 전해지지 않는 저술로 기술되고 있다. 용운 스님이 발굴 소개한 법진본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전의 이씨가 지었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다인들은 여전히 다산의 《동다기》가 따로 존재하고 언젠가는 세상에 나올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는 듯 하다.
도대체 무슨 근거에서 그간 《동다기》를 다산의 저술로 생각하게 되었을까? 이것은 그 출발이 이능화와 최남선, 문일평 등의 초기 저술로 소급된다. 이능화가 1918년 간행한 《조선불교통사》에서 처음으로 《동다기》가 다산의 저술임을 언급한 이래, 다산 창작설은 육당 최남선과 호암 문일평에 의해 반복되었다. 문일평은 그의 〈다고사(茶故事)〉에서 “근세 열수 정약용 같이 다도에 조예가 깊던 이도 없는 바 아니다. 그는 전남 강진에 적거하였을 때 산다(동백)를 배양하며 또 《동다기》를 저술하여 스스로 다산이라 호(號) 하였다.”고 적었고, 이어지는 글에서 초의의 《동다송》을 거론하면서 “그는 역주에 다시 정다산의 《동다기》 중의 일부를 인용하여 가로되”운운하여 《동다기》의 다산 창작설을 기정사실화 했다.1) 하지만 기술 내용을 보면 그 또한 《동다기》의 실물은 전혀 보지 못한 것이 분명하고, 이능화의 잘못된 기술을 그대로 답습한데서 비롯된 오류였다. 육당도 《조선상식문답속편》 중 〈농학은 어떻게 발달하여 나왔습니까〉란 항목에서 “정다산의 《동다기》와 초의의 《동다송》은 조선에 있는 다도 부흥 상 흥미 있는 문헌입니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후 여기에 근거해서 《동다기》의 다산 창작설이 기정사실화 되어 지금까지 이어졌다.
3. 《동다기》의 작자 이덕리에 대하여
법진본 《동다기》에서는 저자를 ‘전의리(全義李)’라고만 했지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법진이 필사 당시 저자의 이름을 실제 몰랐거나, 아니면 밝히기 어려운 사정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반면 금번에 발견된 백운동본은 필사자 이시헌이 끝에다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강심(江心)’의 의미는 자세하지 않다. 이 한 책에 적힌 사(辭)와 문 및 시는 바로 이덕리(李德履)가 옥주(沃州)에서 귀양 살 때 지은 것이다.(江心之義未詳. 此一冊所錄辭文及詩, 乃李德履沃州謫中所作. 강심지의미상. 차일책소록사문급시, 내이덕리옥주적중소작.)
《동다기》가 수록된 《강심》 표제의 이 책 저자가 이덕리(李德履)이고, ‘옥주적중(沃州謫中)’에서 이 책을 저술했다고 했다. 옥주(沃州)는 충북 옥천(沃川) 또는 진도(珍島)의 별호다. 귀양지였다면 옥천이 아닌 진도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결국 이 책은 이덕리가 죄를 지어 진도에 유배와 있으면서 지은 것이다. 이덕리는 당시 죄인의 신분이었기에 자신의 저서에 이름을 밝히지 않고 본관만 밝혔던 듯하고, 이것이 필사되어 유통되면서 법진본의 ‘전의리(全義李) 저(著)’로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이시헌은 이 책의 저자가 이덕리임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벌을 필사한 뒤 끝에다 위의 언급을 남겨두었다.
그렇다면 《동다기》의 저자 이덕리는 어떤 인물인가? 막상 족보 등 문헌기록에서 이덕리를 추적하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먼저 역사정보시스템과 민족문화추진회의 검색엔진으로 검색하여 몇 가지 단서를 얻었다. 먼저 이덕리는 《해사일기(海槎日記)》에 처음 그 이름이 나온다. 1763년 계미년 일본에 통신사로 갔던 조엄(趙曮, 1719-1777)의 일기다. 일기 가운데 〈장계(狀啓) 연화(筵話)〉7월 8일조 기사에 왕이 통신사 일행과 문답을 하는 대목에 이덕리 관련 언급이 있다.
이덕리의 차례가 되자 상께서 말씀하셨다. “어느 집안이냐?” 조엄이 말했다. “부사 이인배(李仁培)의 가까운 일가요, 장한상(張漢相)의 외손입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이삼(李森)의 처조카로구나.” 명하여 전교(傳敎)를 쓰게 했다. (至李德履, 上曰: “誰族?” 趙曰: “副使之近族, 張漢相之外孫也.” 上曰: “然則李森妻姪也.” 命書傳敎. 지이덕리, 상왈: “수족?” 조왈: “부사지근족, 장한상지외손야.” 상왈: “연즉이삼처질야.” 명서전교.)
또 《해사일기》 중에 실린 〈삼사일행록(三使一行錄)〉 가운데 〈사행명단(使行名單)〉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자제군관(子弟軍官) 이덕리(李德履) 자 수지(綏之), 무신생(戊申生), 전의인(全義人). 이방예방(二房禮房).
이 기록을 토대로 볼 때 이덕리의 본관은 전의이고, 자는 수지(綏之), 그리고 1728년 무신생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또 부사 이인배의 가까운 일족이고, 숙종조 조선 최고의 무인이었던 장한상(張漢相, 1656-1724)의 외손이며, 어영대장과 훈련대장을 거쳐 영조 때 병조판서에 올랐던 무신 이삼(李森, 1677-1735)의 처조카였다. 임금이 이름만 듣고도 이삼의 처조카임을 알았던 것으로 보아 당시 무인 계통의 명망 있는 집안의 후손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승정원일기》를 찾아보니, 1749년에는 성균관 생원(生員), 1759년에는 진사(進士)로 나오고, 1772년 영조 48년 기사에는 한량(閑良) 이덕리를 이제 절충(折衝)으로 가좌하고 상을 더해 주었다는 언급이 보인다. 다시 두 해 뒤인 1774년 9월 2일 기사에는 이덕리를 창경위장(昌慶衛將)으로 삼는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21일 기사에 창경궁위장 이덕리가 병으로 직무를 수행하기 어려워 글을 올려 체직을 청하므로 회복 되기를 기다릴 수 없으므로 잠시 교체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자 이를 윤허한 내용이 나온다.
이런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이덕리는 생원 진사를 거쳐 1763년 조선통신사의 자제군관으로 일본을 다녀왔고, 그 이후 1772년 정 3품 당상관인 절충장군에 가좌되었음이 확인된다. 또 1774년에는 도성 경비의 책임을 맡은 종 2품 오위장(五衛將)으로 창경궁 수비의 책임을 맡았으나, 한 달도 못 되어 병으로 체직되었다.
조사 과정에서 필자는 이덕리란 이름을 윤광심(尹光心, 1751-1817)의 《병세집(幷世集)》에서 다시 만났다. 《병세집》은 윤광심이 1775년을 전후하여 당대 주목할만한 작가의 시문을 모아 엮은 선집이다. 여기에 이덕리의 글은 당대 쟁쟁한 문장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시권과 문권 모두에 실려 있다.
이 책 문권에는 이덕리의 자를 이중(而重)이라 하였고, 〈제고이헌납중해시(祭告李獻納重海詩)〉 9수가 수록되어 있다. 시의 서문에는 1775년 3월 4일 벗 이중해(李重海)의 장례에 우인(友人) 전성(全城) 이덕리가 양산(楊山)으로부터 술 한 병을 들고 와서 널 앞에 곡을 하고, 지극한 슬픔에 차마 글을 지을 수가 없어, 지난 해 겨울 함께 술 마시며 지은 시 9편을 읽는 것으로 대신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1775년은 이덕리가 48세 나던 해다. 전성(全城)은 전의(全義)의 다른 표기이다. 이 글은 당시 그가 경기도 양주에 살았고, 헌납 벼슬을 지낸 이중해(李重海)와 몹시 절친한 사이였다는 또 다른 정보를 말해준다. 또 《병세집》 시권에는 신의보(申儀父)를 위해 지어준 장편의 〈용안헌시(容安軒詩)〉와 〈이성하애사(李盛夏哀辭)〉가 수록되어 있다.
《병세집》은 당대 활동하던 문인들의 시문을 가려 뽑은 것이다. 박지원과 이덕무 등의 문집에 실리지 않은 글이 수록되어 있을 만큼 현장성이 강한 엔솔로지인데, 이 책의 시권과 문권 모두에 이덕리의 이름이 올라있는 것을 보면, 이덕리는 당대 문명이 상당했던 실력 있는 문인이었음이 분명하다.
이에 전의이씨 대동보에서 이덕리의 이름을 확인해 보았다. 하지만 족보 어디에서도 그의 이름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인배를 찾아 그 근족을 훑어 보니 ‘덕(德)’자는 ‘배(培)’보다 한 항렬이 높았다. 이덕리가 장한상의 외손이라 하였으므로, 이에 다시 덕자 항렬 윗대에서 장한상의 딸과 혼인한 사람을 찾아보았다. 확인 결과 장한상의 전의 이씨 사위는 이전룡(李田龍)이었다. 그 또한 무과에 급제한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이덕리는 이전룡의 아들임이 분명하다. 이인배와는 7촌간이 된다. 하지만 족보에는 어찌된 셈인지 이전룡의 아들에 이덕필(李德弼)의 이름만 올라있을 뿐 이덕리가 없다. 덕필은 첨지를 지냈다고 했으니, 이덕리와는 다른 인물이다. 그런데 1754년, 영조 갑술년에 간행된 전의이씨 구족보에는 이전룡의 부친인 이만동(李萬東)의 이름 아래 이전룡의 이름마저 올라있지 않다. 즉 이전룡은 고종 이후에 나온 신보에부터 그 이름이 올라있다. 후대에 첨가해서 올린 것인데, 전후 정황은 알 수가 없다. 짐작컨대 전룡이 서계(庶系)였을 가능성이 있고, 그렇다면 이덕리 또한 서얼이 된다. 그런데 이덕리의 이름은 전룡의 아래에도 또 빠져 있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그가 진도에 장기간 유배된 일과 혹 관련이 없지 않을 것으로 짐작되나, 그에 관한 자료가 더 나오기를 기다려야 확실히 말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이덕리의 저술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이름은 다산의 《경세유표(經世遺表)》와 《대동수경(大東水經)》에 두 차례 더 등장한다. 인용문을 본다.
이덕리의 《상두지(桑土志)》에, “서울 서쪽 교외에서 용만(龍灣)에 이르도록 그 중간의 연로(沿路)의 전지(田地)에 모두 구혁(溝洫)을 설치하여 지망(地網)의 제도를 본뜨고자 했다.”고 했는데, 그 말은 반드시 쓰는 것이 마땅하다. -《경세유표》 지관수제(地官修制), 전제(田制).
이덕리의 《상두지》에 말하였다. “세상에서는 대청황제가 동선령(洞仙嶺) 청석동(靑石洞)에 이르러 용골대(龍骨大)를 목 베려 한 것이 두 번이었다고들 말한다. 이것은 모두 야인의 말이다.” -《대동수경》 , 〈패수(浿水)〉 .
다산의 두 차례 인용을 통해 이덕리가 《동다기》 외에 《상두지》란 저술도 남긴 학자였음이 새롭게 밝혀진다. 첫 번째 인용문의 내용은 백운동본 《동다기》의 뒤쪽에도 그대로 실려 있다. 《상두지》는 국가 경제와 지리 등의 내용을 담은 실학 계통의 서적이다. 이 책 또한 《동다기》와 마찬가지로 현재 다산의 저술로 오인되어 1973-74년에 다산학회가 편찬하여 간행한 《여유당전서보유(與猶堂全書補遺)》(경인문화사) 제 3권에 다산의 이름으로 버젓이 실려 있다.
《상두지》의 서문에 ‘계축정월상간서(癸丑正月上澣序)’라고 되어 있으니 이 책이 저술된 것은 1793년(정조 17)의 일이다. 서문 끝에 이 자료를 옮겨 필사한 이가 “공은 야인으로 이름을 칭탁코자 했으므로 권도로 이 서문을 써서 스스로를 감추었다.(公欲托名野人, 權爲此序以自晦)”고 적었는데, 이때 다산은 한창 중앙 정계에서 바쁘게 활동할 때였다. 귀양지에 있던 이덕리가 자신의 이름을 감추고서 지은 저술임을 언급한 것이다. 무엇보다 《상두기》 안에 실린 내용 중에 《동다기》에서 제안한 차무역의 구체적 방안이나 서변(西邊)의 둔전 설치, 지망법(地網法) 시행 건의 등 핵심 내용이 《상두지》에서도 정확하게 재천명되고 있어, 《상두지》는 이덕리의 저술임이 확실하다.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한 단락만을 읽어본다.
차는 천하가 똑같이 즐기는 것이다. 우리나라만 유독 잘 몰라 비록 죄다 취하여도 이익을 독점한다는 혐의가 없다. 국가로부터 채취를 시작하기에 꼭 알맞다. 영남과 호남에는 곳곳에 차가 있다. 만약 한 말의 쌀을 한 근의 차로 대납하고, 10근의 차로 군포를 대납하게 허락한다면, 수십만 근을 힘들이지 않고 모을 수가 있다. 배로 서북관의 개시(開市)에 운반해서 월차(越茶)의 인쇄해 붙인 가격에 따라 한 냥의 차에서 2전 은을 받으면, 10만근의 차로 2만근의 은을 얻을 수 있고, 돈으로는 60만 전이 된다. 이 돈이면 한 두 해가 못되어 45개 둔전(屯田)을 설치할 수 있다. 따로 〈다설(茶說)〉이 있는데, 아래에 첨부해 보인다.
茶者天下之所同嗜. 我東之所獨昧, 雖盡物取之, 無榷利之嫌. 政
차자천하지소동기. 아동지소독매, 수진물취지, 무각리지혐. 정宜自國家始採. 而嶺南湖南, 處處有茶. 若許一斗米代納一斤茶,
의자국가시채. 이영남호남, 처처유차. 약허일두미대납일근차, 或以十斤茶代納軍布, 則數十萬斤不勞可集. 舟輸西北開市處, 依
혹이십근차대납군포, 즉수십만근불로가집. 주수서북개시처, 의越茶印貼之價, 一兩茶取二錢銀, 則十萬斤茶可得二萬斤銀, 而爲
월차인첩지가, 일양차취이전은, 즉십만근차가득이만근은, 이위錢六十萬. 不過一兩年, 而可置四十五屯之田矣. 別有茶說, 附見
전육십만. 불과일양년, 이가치사십오둔지전의. 별유다설, 부견于下.
우하.
표현과 논리가 《동다기》의 본문 내용과 일치할 뿐 아니라, 끝에서 말한 별도의 〈다설〉은 다름 아닌 《동다기》를 지칭한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상두기》가 이덕리의 저술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경세유표》 등에서 다산이 분명히 이덕리의 저술로 밝히고 인용한 글이 어떻게 다산의 저술로 바뀌었을까? 향후 《강심》에 실린 작품과 《병세집》에 실린 시문, 그리고 《상두지》를 한데 묶어 이덕리의 학문과 문학에 대해서는 이제부터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상두(桑土)란 무엇인가? ‘상두’란 말은 《시경》 〈빈풍(豳風)〉의 〈치효(鴟鴞)〉에서 “장마비가 오기 전에 저 뽕나무 뿌리를 가져다가 둥지를 얽었거늘. (迨天之未陰雨, 徹彼桑土, 綢繆牖戶 태천지미음우, 철피상토, 주무유호)”이라 한 데서 끌어 쓴 말이다. 상두(桑土)는 뽕나무 뿌리다. 새가 비가 오기 전에 미리 뽕나무 뿌리를 물어다가 둥지의 새는 곳을 막는다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환난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유비무환의 의미로 쓴다. 이덕리의 《상두지》는 글자 자체의 의미로 보나 위 다산의 인용으로 보나, 또 실제 내용으로 보나 국방과 경제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실학적 성격의 저술이다. 그 자료적 가치와 의의는 실로 대단한데, 본고에서는 따로 논하지 않는다.
한편 《강심》에 수록된 〈실솔부(蟋蟀賦)〉에는 이덕리 자신의 신상과 관련된 한 가지 단서가 더 있다.
나는 병신년(1776년, 영조 52), 4월 은혜를 입어 옥주(沃州)로 유배왔다. 성 밖 통정리(桶井里)에 있는 윤가(尹家)에서 살았다.(중략) 3년만에 통정리 서쪽 이가(李家)로 옮겼다. (余以丙申四月, 恩配于沃州. 居城外桶井里尹家.....三年移住井西李家.... 여이병신사월, 은배우옥주. 거성외통정리윤가.....삼년이주정서이가....))
이로 보아 이덕리는 49세 때인 1776년 3월 영조가 승하하고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4월 초에 사도세자 복권 움직임과 관련해서 일어난 상소 사건에 연루되었던 듯 하다. 이때 선대왕을 모함하는 대역죄를 물어 이덕사(李德師)와 박상로(朴相老) 등이 복주되었다. 이덕사는 이덕리와 함께 《병세집》에 작품이 수록되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족보 뿐 아니라 실록에도 이덕리의 이름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승정원일기》에도 정조대 기록에서는 이덕리의 이름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가 종2품 창경궁위장까지 지냈던 인물인데도 말이다.
다만 그는 1776년에 귀양 와서 1779년에도 계속 진도 유배지에 있었다. 또 〈기다〉의 본문 제 7항목에서 계해년(1743년, 영조 19) 봄 상고당 김광수(金光遂)의 집에서 차를 마신 뒤로 40여년이 흘렀다고 적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그는 1780년대 중반까지도 여전히 귀양지에 있었고, 여기에 《상두지》의 서문이 1793년에 쓰여졌으니, 결국 이덕리는 18년이 넘도록 진도의 유배지에 계속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다산의 강진 유배기간과 같다. 그는 아마도 유배지를 벗어나지 못한 채 세상을 마쳤던 듯 하다. 〈기다〉, 즉 《동다기》는 이덕리가 58세 나던 1785년을 전후해서 지은 것이다. 또 《상두지》는 그로부터 8년 뒤인 66세 때 완성되었다. 이상이 각종 문헌 근거를 바탕으로 재구성해 본 이덕리의 생애 사실의 전체 내용이다.
4. 《동다기》의 체재와 내용
이제 《동다기》의 체재와 내용에 대해 살펴보겠다. 이덕리의 《강심(江心)》이란 책에 실린 이 글의 원 제목은 〈기다(記茶)〉이다. 《강심》은 가로 19.6cm×세로 15.3cm의 크기에 반행반초의 세련된 서체로 쓰여진 필사본으로 모두 55장이다. 제목 표제 바로 아래 ‘자이서고(自怡書庫)’라 했고, 집안에 전해오는 필체와 대조해보니 자이당 이시헌이 직접 필사한 것이었다. 앞쪽에는 〈석령사(席嶺辭)〉ㆍ〈여불우부(女不遇賦)〉ㆍ〈백장죽부(百丈竹賦)〉ㆍ〈실솔부(蟋蟀賦)〉ㆍ〈토환게(土丸偈)〉가 실려 있고, 이어 〈기다(記茶)〉와 〈기연다(記烟茶)〉를 실었다. 다음에는 중국 역사상의 인물에 자신의 심회를 가탁한 영고시(詠古詩) 연작 15수가 나오고, 끝부분에 앞의 〈기다〉에 이어지는 〈다조(茶條)〉가 실려 있다.
이시헌이 필사할 당시 원본은 서문도 없고 체재가 갖추어지지 않은 난고(亂藁) 상태였던 듯하다. 〈기다〉는 10쪽에 걸쳐 차에 관한 내용을 실었는데, 다섯 단락으로 된 서설 부분과 15개 항목으로 이루어진 본문이 이어진다. 본문 끝에 다음과 같은 이덕리의 메모가 적혀 있다.
앞의 십여 조목은 모두 차에 관한 일을 떠오르는 대로 적은 것이다. 하지만 국가에 보탬이 되고 민생을 넉넉하게 하는 큰 이로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이제 바야흐로 본론으로 들어가려 한다. (右十數條, 皆漫錄茶事. 而未及其裨國家裕生民之大利. 今方挽入正事. 우십수조, 개만록차사. 이미급기비국가유생민지대리. 금방만입정사.)
그리고 이 메모 아래 이시헌이 작은 글씨로 “이하 10조목은 지금 책이 흩어져서 적을 겨를이 없다.(以下十條, 今散帙, 不暇錄. 이하십조, 금산질, 불가록)”고 부기하였다. 이덕리가 《동다기》를 한 번에 저술한 것이 아니라 두 차례에 나눠 썼고, 앞쪽은 차에 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뒤쪽은 차가 국가 경제와 민생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에 대해 쓴 것임도 알 수 있다. 법진본 《동다기》가 앞쪽만 싣고 뒤쪽은 싣지 않았던 것은 원본의 어지러운 상태와도 무관치 않다.
이어 《강심》의 맨 뒤쪽에 〈다조(茶條)〉란 제목 아래 다시4쪽 7항목의 글이 이어진다. 제목 아래 ‘마땅히 앞의 〈다설(茶說)〉 아래 놓여야 한다.(當在上茶說下)’라고 적혀있다. 이 〈다조〉가 앞서 말한 〈기다〉의 속편임을 밝힌 것이다. 이 7항목이 법진본에는 모두 빠져있다. 또 앞부분에서도 법진본은 백운동본의 서설 3단락 일부와 4단락 전체가 탈락되어 있고, 본문의 11단락도 누락되어 있다. 그러니까 현재 남은 분량으로 보면 법진본은 백운동본의 절반 가량만 남아있는 셈이다.
그 내용을 항목별로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서설〉
1. 차는 국가에 보탬이 되고 민생을 넉넉하게 할 수 있는 금은주옥(金銀珠玉) 보다 소중한 자원이다.
2. 차는 그 연원이 오래고, 위진부터 시작해서 당송 때 성행했다. 북로(北虜)는 차가 생산 되지 않는 곳이지만 육식으로 인해 배열병(背熱病)을 앓기 때문에 차를 몹시 즐긴다. 중국 역대 왕조도 차를 미끼로 북방 민족을 제어했다.
3. 우리나라 차의 산지는 영남과 호남 지방에 산재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작설차로 약용에 쓸 뿐 마실 줄 모른다. 경진년(1760년, 영조 36) 차 파는 중국 배가 표류해 와서 온 나라가 비로소 차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후 10년간 그 차를 마셨다. 하지만 차는 우리에게 그다지 긴요한 물건이 아니어서 이후로도 차를 만들어 마실 줄은 몰랐다. 차를 만들어 중국의 은이나 말, 또는 비단과 교역을 하면 국용(國用)이 넉넉해지고, 민력(民力)이 펴지니, 국가에 보탬이 되고 민생을 넉넉하게 해 줄 수 있다.
4. 예전 중국의 여러 나라에서는 모두 그 타고난 환경을 이용하여 부국의 기틀을 다졌다.
5. 중국차는 아득히 만리 밖에서 생산 되는 데도 이것을 취해 부국의 바탕으로 삼아 왔다. 하지만 우리나라 차는 바로 울타리 가나 섬돌 옆에서 나는 데도 사람들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래서 이 글을 지어 당국자들이 베풀어 시행해 볼 것을 건의한다.
〈본문〉
1. 차는 따는 시기에 따라 우전차(雨前茶)와 우후차(雨後茶)가 있다. 차 따는 시기는 동지에서 곡우 전까지와 곡우 후에서 망종까지로 구분된다. 잎의 크기로 진짜 가짜를 구별하는 것은 말 관상 잘 보는 구방고(九方皐)가 말을 살피는 것처럼 어렵다.
2. 차에는 일창(一槍)과 일기(一旗)의 구별이 있다. 잎의 크기만 가지고 따질 수는 없다. 일창은 처음 싹터 나온 한 가지이고, 일기는 한 가지에 달린 잎을 말한다. 그 뒤에 가지 위에 다시 가지가 나면 그 잎은 못 쓴다.
3. 차는 고구사(苦口師)니 만감후(晩甘侯)니 하는 명칭이 있다. 차는 맛이 달아 감초(甘草)라고도 하는데 혀로 핥으면 단 맛이 난다. 달여서 고약처럼 만드는 것은 겨울 잎을 따도 괜찮을 듯하다.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차의 진액은 멋대로 만들어, 맛이 쓰고 약용으로 밖에 못 쓴다. 일본 사람이 만든 향다고(香茶膏)만 못하다.
4. 흰 차는 떡차에 향약(香藥)을 넣어 만든 것이다. 송나라 때 문인들이 노래한 것은 모두 떡차다. 옥천자(玉川子) 노동(盧仝)의 〈칠완다가(七椀茶歌)〉는 엽차를 노래한 것이다. 떡차는 맛과 향이 좋을 뿐이니 중국의 방법을 본떠 만들 필요가 없다.
5. 떡차는 향약을 넣어 절구에 빻아 물에 넣고 끓인 것이다. 중국차는 다른 것으로 가미하지 않았다. 차에 꿀을 타서 마시는 경우도 있는데 촌티를 못 면한 것이다.
6. 우리나라 차는 색과 향, 기운과 맛에서 중국 것과 조금도 차이가 없다. 중국의 육우나 이찬황 같은 사람도 내 말을 인정할 것이다.
7. 계해년(1743년, 영조 19) 봄에 상고당(尙古堂) 김광수(金光遂, 1696-1770)의 집에 들러 중국 차를 맛보았다. 이 때 주인이 감기 든 늙은 하인에게 차가 특효약이라며 몇 잔 마시게 하는 것을 보았다. 차 파는 배가 들어왔을 때 우리나라 사람은 설사약으로 차를 먹었다. 내가 직접 딴 차로 시험해보니, 감기와 식체(食滯), 주육독(酒肉毒), 흉복통(胸腹痛)에 모두 효과가 있었다. 이질 설사와 학질, 염병까지도 모두 효험이 있었다.
8. 냉차를 마시면 가래가 끓는다. 하지만 표류해 온 사람들과 역관 서종망(徐宗望)의 경우를 보면 뜨거운 음식을 먹은 뒤에는 냉차를 마셔도 문제가 없는 듯 하다.
9. 차는 잠을 적게 하므로 공부하는 사람이나 길쌈하는 아낙, 또 선정(禪定)에 든 스님네들에게 꼭 필요하다.
10. 차는 산 속 바위 많은 곳에서 난다. 대숲 사이에서 나는 차가 특히 좋다. 해가 들지 않아 대숲의 차는 늦게까지 딸 수 있다.
11. 동복(同福)은 작은 고을인데, 한 원님이 여덟 말의 작설을 따서 이를 달여 고약으로 만들려 한 일이 있다. 이 엄청난 양을 따서 차로 만들면 수천 근은 될 테고, 이것을 따는 노력으로 수천 근의 차를 찌고 덖을 수도 있는데, 나라에 보탬이 되도록 쓸 줄 모르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
12. 차는 비온 뒤에 따는 것이 가장 좋다. 깨끗하기 때문이다. 소동파의 시에도 그런 말이 있다.
13. 《문헌통고》를 보면 차를 딸 때 고을 관리가 몸소 산에 들어가서 백성들을 독려해서 차를 따게 한다고 했다. 좋은 것은 공차(貢茶)로 하고, 그 다음은 관차(官茶)로 하며, 나머지는 백성들이 취해 쓰게 허용한다. 차가 나라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줌이 이와 같다.
14. 차에 편갑(片甲)이란 것이 있는데, 이른 봄의 황차(黃茶)를 가리킨다. 차 배가 들어왔을 때 온 나라 사람들이 황차라고 불렀다. 하지만 살펴보니 이른 봄에 딴 것이 아니었다. 정유년(1777년, 정조 1) 겨울 흑산도에서 온 사람에게 물어보니 표류해온 중국인이 아차(兒茶), 즉 황매(黃梅)를 보고 황차라고 했다고 한다. 황매는 생강맛을 띠고 있는데, 이것을 달여 고약으로 만들어 차에 섞어 마시면 감기와 여러 질병에 신효가 있다. 일종의 별차다.
〈다조(茶條)〉
1. 주사(籌司), 즉 비변사(備邊司)에서는 전기(前期)에 호남 영남의 여러 고을에 관문(關文)을 보내, 차의 유무를 보고하게 하고, 차가 나는 고을은 수령으로 하여금 가난해서 집이 없는 사람과 집이 있어도 십원(十員)이 못 되는 사람, 그리고 군역세를 중복해서 내는 사람을 가려 뽑아 대기하게 한다.
2. 비변사는 전기에 낭청첩(郎廳帖) 100여장을 내서 서울 약국 사람 중에 일 처리 잘 하는 사람을 가려 뽑아, 곡우가 지나기를 기다려, 해당 고을에서 뽑아 대기시킨 사람들을 이끌고 산에 들어가 차를 따서, 찌고 덖는 법을 가르친다. 차 한 근에 50문씩 쳐주어, 첫 해는 5천냥으로 제한해서 1만근의 차를 취한다. 일본 종이를 사서, 봉지에 담아 서울로 나눠 보내고, 관가의 배로 서북 개시(開市)로 보낸다. 낭청 가운데 한 사람을 압해관(押解官)으로 임명해 납고(納庫)케 하고 수고비를 준다.
3. 중국 차 배에 붙은 차 가격은 은 2전이었고, 봉지에 담은 차는 1 냥이었다. 압록강에서 북경까지 수천 리이고, 두만강에서 심양까지도 또 수천 리이니, 한 봉지에 2전이라면 값이 너무 싸다. 한 봉지에 2전으로 값을 치면 1만근의 찻값은 은으로는 3만 2천냥이 되고, 돈으로 환산하면 9만 6천냥이 된다. 해마다 생산량을 늘려 1백만근을 생산하면 비용이 50만이 될 것이니 국가의 경비로 써서 백성의 힘을 덜어준다면 큰 이익이 아닐 수 없다.
4. 어떤 이는 우리나라에 차가 나는 것을 알게 되면 중국에서 반드시 차를 공물로 바치라 할 것이니, 새로운 폐단을 만드는 것이라 한다. 하지만 만약 수백 근의 차를 중국에 보내 천하로 하여금 우리나라에서 차가 생산되는 것을 알게 하면 연나라 남쪽 조나라 북쪽의 상인들이 수레를 몰고 책문을 넘어 우리나라로 몰려올 것이다. 처음에 1만근으로 제한하자고 한 것은 시일과 거리 때문에 재화가 정체될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만약 유통만 잘 된다면 1백만 근이라도 판매에는 문제가 없으니, 얻기 힘든 기회다. 제한을 두면 안 된다.
5. 차 시장을 열면 감시어사(監市御史)와 경역관(京譯官) 및 압해관(押解官)을 선발하여 이 일을 맡긴다. 수행 인원은 일 맡은 자의 재량으로 정한다. 다만 만인(灣人)만 시장에 올 수 있게 한다. 차 시장이 파하면 상급(賞給)을 좋게 주어 장려한다.
6. 경제 규모가 적은 우리나라가 갑작스레 수백만 냥의 세수(稅收)가 생기면 무슨 일이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여러 가지 비용 외에는 조금도 손대지 못하게 한다. 다만 서쪽 변방의 성 쌓고 연못 파며 둔전을 운영하는 데 쓴다. 길 가 양 옆으로 5리에 전조(田租)의 절반을 감면해주고, 힘껏 성관(城館)을 쌓고, 구혁(溝洫)을 파서 천리 길에 그물망처럼 이어지게 한다. 올해 못하면 내년에 계속하게 한다. 또 서쪽 변방의 재력 있는 인사를 모집해서 활쏘기를 익히게 하고, 수백 명을 두어 대포를 쏘는 연습을 시키며, 성적이 우수한 자에게 상을 준다면 외적의 침입을 막고, 이웃 나라에 위엄을 떨칠 수가 있다.
7. 차는 잠을 적게 하므로 숙직 서는 사람이나 혼정신성(昏定晨省)하며 어버이를 모시는 사람, 새벽부터 베틀에 앉는 여자, 과거 공부하는 선비 등에게 모두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다.
이제 내용을 간략히 정리한다. 서설을 간추리면 이렇다. 백성은 포백숙속(布帛菽粟)을 중시하고, 나라에서는 금은주옥(金銀珠玉)을 귀하게 친다. 차는 황량한 들판 구석진 땅에서 절로 피고 지는 평범한 초목이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지만 이것으로 국가 경제를 돕고 민생을 넉넉하게 할 수 있다. 중국 북방은 차가 생산되지 않는데, 북방 오랑캐는 늘 육식을 하므로 배열병(背熱病)을 앓는다. 차가 이 병에 특효가 있으므로 이들은 늘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차를 수입해 마신다. 역대 중국이 북쪽 오랑캐를 견제할 때 흔히 차를 미끼로 썼던 것은 그런 까닭이다.
우리나라에도 호남과 영남 어디서나 차가 난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차를 약용으로만 쓸 뿐 따서 마시는 자가 없다. 오히려 중국에서 사가지고 와서 마시기는 해도 나라 안 도처에 널려 있는 차를 취할 줄은 모른다. 1760년에 중국 차를 가득 실은 배가 표류해와서 비로소 우리나라 사람들이 차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 차를 10년 간 실컷 먹고 다 떨어졌는데도 차를 따서 마실 생각은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차는 애초에 긴요한 물건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모두 취해 전매해도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 차를 만들어 서북 개시(開市)에 내다 팔아 은이나 말 또는 비단과 교역하면 국가 재정이 충실해지고 백성들의 생활이 나아질 것이다. 즉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물건을 팔아 국가 경제를 살릴 수가 있다.
국가가 안목을 가지고 근원을 틔워 흐름을 끌어주면 천하의 재물은 물이 아래로 흘러내리듯 한곳으로 몰리게 된다. 중국은 남쪽 땅 만 리 밖에서 나는 차를 가져다가 북쪽에 팔아 오랑캐를 방어하는 재화로 삼는데, 우리나라는 왜 도처에 자생하는 이 귀한 차나무를 마치 토탄(土炭)처럼 하찮게 여겨 이용할 줄 모르는가? 그래서 내가 이 글을 지어 당국자가 차 무역으로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되는 길을 찾아보라고 건의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본문 15조목은 차무역에 관한 내용은 없고, 차의 종류와 명칭, 차의 효능과 음다飮茶) 방법, 우리나라 차가 중국차에 절대 뒤지지 않는다는 것, 차가 식체(食滯)나 주육독(酒肉毒), 흉복통(胸腹痛) 및 이질과 학질, 그리고 염병에까지 특효가 있다는 것을 적었다. 또 동복(同福)의 어떤 수령이 백성을 시켜 여덟 말의 작설을 따게 해서 고약으로 만들게 한 이야기를 적고, 여덟 말이면 수천 근의 차를 만들 수 있는데, 이것으로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되게 할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이 참 애석하다고 했다.
뒤쪽의 〈다조(茶條)〉7조목에서는 구체적인 차 무역의 방법과 절차를 소개했다.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비변사에서 이른 봄 호남과 영남에 공문을 보내 차의 유무를 보고하게 하고, 가난한 백성을 조사해서 차 따는 인원으로 차출할 수 있도록 준비 시킨다. 그러면 낭청(郎廳)은 백 여장의 첩을 발부해 서울의 약국에서 일 처리 잘 하는 사람을 선발해서 곡우가 지난 후 이들을 차가 나는 고을로 보낸다. 이들은 미리 차출해둔 백성들을 이끌고 산에 들어가 차를 따고, 이들에게 덖는 방법을 가르쳐 차로 만든다. 차 한 근에 50문씩 쳐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수고비로 준다. 첫 해는 5천냥을 한정하여 1만근의 차를 만든다. 이것을 서북 시장에 내다 판다. 낭청 한 사람이 책임을 맡아 진행한다. 한 봉지에 2전의 값을 매겨 팔면 1만근을 팔아 은 3만 2천냥, 돈으로 환산하면 9만 6천냥을 벌어들일 수 있다. 해마다 생산량을 늘여 1백만 근에 이른다면 그 이익은 어마어마 해서 국가 재정에 주름살이 펴지고, 백성들의 힘을 덜어줄 수가 있다. 가난한 백성은 차를 따서 돈을 벌어 좋고, 국가는 차를 팔아 막대한 이익을 남길 수 있어 좋다.
혹 어떤 이들은 우리나라에서 차가 생산되는 것을 중국이 알게 되면 해마다 공물로 바치라는 요구가 끊이지 않아 새로운 폐단을 야기할 것으로 말하는 이도 있겠지만, 이것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다는 식의 생각과 다를 게 없다. 먼저 수백 근의 차를 중국에 주어 우리나라에서도 차가 생산된다는 것을 알게 하면, 중국 북방의 장사꾼들이 저 먼 남쪽으로 가는 대신 우리나라로 몰려들 것이다. 첫해에 1만 근으로 제한한 것은 유통 시장이 형성되지 않아 재화가 정체될까봐 염려해서 그런 것이고, 유통 경로만 형성되면 한 해 1백만 근을 파는 것도 문제될 것이 없다. 이야 말로 놓칠 수 없는 기회가 아닌가?
다시(茶市)를 열 때는 국가에서 감시어사(監市御史)와 경역관(京譯官) 및 압해관(押解官)을 선발하여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만인(灣人)에게만 시장을 개방해서 이곳의 실정을 모르게 하고, 다시가 파하면 이들 관계자에게 넉넉한 상급(賞給)을 주어 자기 일 하듯이 열심히 하도록 뒷받침해 주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국가가 갑자기 세금 외에 수백만 냥의 수입이 생기면 그 돈으로 무엇을 할까? 생산과 유통에 드는 경비를 제외하고는 이 수익을 모두 서변(西邊)의 성을 쌓고 못을 파며, 건물과 도랑을 수축하고 둔전을 경영하는데 써서 변경에서 서울까지 이르는 천리 길이 마치 그물망처럼 물길로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여 국방을 강화하고 도적을 막아 이웃나라에 위엄을 떨쳐야 한다. 차무역은 실로 적은 비용으로 국가 경제에 큰 활력을 불어넣고 가난한 백성들의 생활에 보탬이 되는 획기적인 방안이 아닐 수 없다.
5. 《동다기》의 자료적 가치
이상에서 《동다기》의 저자 이덕리와 책의 내용에 대해 일별해 보았다. 이제 이 자료의 차문화사적 가치를 간략히 정리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첫째, 우리나라 최초로 차문화와 관련된 전문서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차를 전혀 마실 줄 몰랐다. 상고당 김광수 같은 일부 호사가들이 중국에서 들여온 차를 마시긴 했지만, 일반 백성들은 생활 공간 근처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차나무를 보고도 그것이 어디에 쓰는 것인지조차 몰랐다. 고작 약용으로 쓸 줄만 알았다. 《동다기》는 차의 각종 명칭과 마시는 법, 그리고 각종 효능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둘째, 차의 국가 전매와 국제 무역을 통한 국부 창출을 주장했다. 기호품인 차가 국제 교역 시장에서 갖는 상품 가치를 꿰뚫어 보고 국가적 차원에서 차를 관리하고 전매해서 그 이익으로 국방을 강화시킬 것을 주장하면서 그 실행 방법과 단계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그 방법이 대단히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한 방식으로 되어 있다.
셋째, 당대 차에 얽힌 사건과 주변 정황을 알 수 있게 하는 생생한 정보를 담고 있다. 예를 들어 1760년에 차무역선이 남해에 표류해서 온 조선이 10년간 마셨다는 이야기를 비롯해서 당시 지식인들이 중국 차를 가져다가 마시던 정황 등이 흥미롭게 묘사되어 있다.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 가운데 〈강남 절강 상선과 통상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를 보면 “나는 황차(黃茶)를 실은 배 한 척이 표류하여 남해에 정박한 것을 본적이 있다. 온 나라가 그 황차를 10여년 동안 사용하였는데,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5)고 적은 대목이 있다. 이 책의 기록과 그대로 일치한다. 이를 통해 당시 조선에서 차문화의 실상과 주변 정황을 좀더 생생하게 알 수가 있다.
넷째, 우리나라 식으로 차 만드는 법과 마시는 법을 제시했다. 떡차와 향차의 차이, 우리나라 차의 우수성, 약효와 그밖에 차에 얽힌 이런저런 일화들을 소개해서 객관적 실상 파악이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이덕리가 《동다기》의 저자로 자리매김됨과 동시에 《상두지》의 저자까지 명확하게 밝혀짐으로써 우리는 한 사람의 완전히 잊혀진 실학자를 복권시킬 수 있게 되었다. 향후 국방 분야와 차문화 관련 연구자들의 활발한 연구가 이어질 것을 기대한다.
한편 이 글에서 미처 소개하지 못한 이덕리의 저술에 〈기연다(記烟茶)〉가 있다. 담배에 관한 최초의 저술로, 1810년에 지어진 이옥의 《연경(烟經)》 보다 20여년 앞서 지어졌다. 이 또한 당시 조선의 담배 흡연과 관련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자료와 내용은 다음에 따로 소개할 기회를 갖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