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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추픽추 정상에 오르다
[연재] 임영태의 남미 여행기 (4)
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마추픽추를 산정을 향하여 오르다
12월 31일, 일요일이다, 2023년의 마지막 날이다. 새벽 5시에 일어나 간단히 준비를 마치고 6시에 숙소에서 제공한 소박한 아침을 먹는다. 커피, 빵, 파파야 주스, 달걀 범벅... 식사를 끝내고 가방을 챙겨 나가려는데 숙소 직원이 가방은 두고 필수품만 챙겨서 가라고 조언한다. 마추픽추에 가방은 반입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올라가서 보니 가져갈 수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겁고 불편하니까 출입구에 돈을 주고 짐을 맡겼다. 나는 매는 가방은 두고 폰과 보조배터리, 물이 든 텀블러, 우산, 휴지, 물티슈, 복대 가방, 지갑, 선글라스 등만 챙겼다. 윗옷 주머니가 불룩해지며 내 모습이 임산부 같다. 상관없다.
아침 6시40분 마요르 광장 성당 앞에 모여서 마추픽추(Machu Picchu) 유적지를 안내할 가이드로부터 설명 듣고 7시20분경 버스를 탔다. 버스는 30분 정도를 달려 마추픽추 유적지 출입구에 도착했다. 버스는 강을 끼고 난 도로를 따라 산의 초입까지 잠시 간 뒤 30분 동안 직벽에 가까운 산봉을 지그재그로 올랐다. 마추픽추를 두고는 세계 7대 불가사의에다 건축적 의미 등 역사유적이 지닌 의미를 너무나 많이 들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나를 경탄시킨 것은 주위의 놀라운 산세와 그 풍광이었다. 주변 경관은 버스를 타고 오르면서 또 마추픽추를 탐방하면서 내내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마추픽추에서 바라본 건너편 산 경치는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따로 없었다. 안개 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환상적인 경치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마추픽추 주변 경관. [사진-임영태]
마추픽추 모습. [사진-임영태]
오전 8시경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10여명이 한팀을 이뤄 마추픽추 관람을 시작했다. 우리 팀은 한국인, 중국인(홍콩), 미국인 등 여러 나라 사람들의 혼성이었다. 부부, 친구, 여행팀으로 온 사람도 있고 혼자 온 사람도 있었다. 2시간 반 동안 가이드의 영어 설명을 들으며 유적지를 관람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이드의 설명은 대충 듣고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도 가이드의 설명은 대충 듣고 사진 찍기에 골몰한다. 흔히 하는 말로 인생 사진 한 장 찍을 만한 풍광이다.
여행은 먹는 것, 보는 것,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들의 여행은 대부분 사진으로 남기는 것에 집중돼 있는 것은 아닐까? 여행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느끼는 것, 성찰이 아닐까? 뭔가 느끼려면 잘 보아야 하고 지식이 필요하고 또 생각할 여유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들의 여행이라는 게 쫓기는 사람처럼 시간 맞춰 지나가다 보니 그게 쉽지가 않다. 그걸 피하기 위해 패키지가 아니라 자유여행을 선택하지만 그조차도 시간에 쫓기면서 지나게 되면 마찬가지 결과를 만든다.
여행을 떠나기 전 인터넷 자료를 중심으로 좀 훑어보았을 뿐이다. 그것조차도 대충 눈대중으로 읽다보니까 머릿속에 든 것이 없었다. 마추픽추 유적에 대해서도 제대로 아는 게 없었다. 유적지 내의 중요한 유적에 대해서는 가이드가 설명을 해줘서 열심히 들으면 기본적인 사실은 이해할 수 있지만 구경하기, 사진 찍기, 설명 듣기, 일행 따라 다니기 등 이게 조화를 이루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유적을 제대로 느끼고 감상하고 느끼는 것이 어렵다. 그냥 스쳐가는 것이 되고 유적에 대한 파악도 인상 정도로 끝나고 만다.
아구아스 칼리엔테스-마추픽추 가는 길. [구글지도 캡쳐]
깎아지른 절벽 저 아래로 우루밤바 강이 흘러가고 있다. [사진-임영태]
마추픽추를 발견한 미국 역사학자 빙엄
마추픽추(Machu Picchu)는 케추아어(남미 원주민 언어의 일종)로 ‘늙은 봉우리’란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마추픽추 북쪽에 바라보이는 산봉우리가 있는데 트레킹을 하는 사람들이 기어서 오르다시피 해서 올라가는 와이나픽추(Huayna Picchu)는 ‘젊은 봉우리’란 뜻이라고 하니 그 대조가 재미있다. 마추픽추는 해발 2700여 미터의 산정상 부근에 위치해 있는 ‘공중도시’다. 백두산 천지와 같은 곳에 그것도 훨씬 험한, 깎아지른 절벽 같은 곳에다 세운 도시다. 산 아래서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잃어버린 도시’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잉카 제국 황제 파차쿠티와 투팍 잉카 유판키 재위 시기인 1400년대 후반에 지어졌고, 약 80여년 간 사람들이 거주하다가 스페인 정복기인 1530년대 무렵 버려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마추픽추가 무얼 위한 곳인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설이 없는 상태이다. 잉카 황제의 별장, 귀족들의 휴양지, 군사시설, 교육기관, 천문 관측과 신전 등 종교 중심지, 교역과 물류 중심지 등 여러 주장이 있지만 정확히 해명되지 않고 있다. 그 때문에 마추픽추는 여전히 불가사의하고 신비한 곳이다. 이곳에 도시 기능이 살아 있을 때는 적게는 수백 명에서 1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주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잉카 제국의 수도 쿠스코를 장악해 마지막 공세를 취하던 1530년대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마추픽추도 도시기능을 잃어버린 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힌 것이라고 보고 있다. 스페인 정복과 통치 기간에도 험악한 산꼭대기에 있었던 탓에 마추픽추는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2012년 내셔널지오그래픽에 실린 마추픽추 유적지 사진.
마추픽추를 발견, 발굴한 미국의 역사학자 하이엄 빙엄.
마추픽추 등산로(빙엄 로드) 지도. [구글지도 캡쳐]
마추픽추는 1911년 미국의 라틴아메리카 역사학자이자 예일대학 교수였던 하이럼 빙엄(Hiram Bingham)이 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빙엄은 1909년 산티아고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동안 페루의 잉카제국 유적들을 답사했다. 그는 1911년 잉카제국 최후의 수도이자 항전지였던 빌카밤바(마추픽추 유적지에서 서쪽 방향으로 더 들어간 빌카밤바 강 상류에 위치)를 찾기 위해 페루 원정팀을 꾸렸다. 조사 과정에서 빙엄은 원주민 농부로부터 고대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우루밤바 계곡 아래 살던 원주민 가족 소년의 안내를 받아 간 곳에서 마추픽추를 발견하게 된다. 오늘날 빙엄 로드로 불리는 마추픽추로 오르는 길은 그야말로 구절양장의 꾸불꾸불한 길이 계속되지만 원주민들이나 트레킹족들은 중간중간 직선으로 오르는 길이 있어서 훨씬 빨리 오를 수 있다.
이후 빙엄은 계곡을 훑어 내려가면서 그 지역 유적들을 차례로 발견했고, 잉카제국의 임시수도였던 비트코스와 잉카제국의 최후 항전지 빌카밤바까지 발견했다. 빙엄은 1912년 예일대와 내셔널지오그래픽, 그리고 페루 정부의 지원 아래 마추픽추를 다시 방문해 4개월간 머무르며 그곳 유적들을 발굴, 조사했다. 1915년에도 이곳을 방문해 발굴작업을 진행했고 유적지에서 발굴한 유적 가운데 모두 5만여 점을 예일대로 가져갔다. 빙엄은 페루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사를 진행했지만 유물은 18개월간 임대받았던 것이다. 페루 정부는 이 유물들은 1916년 예일대학에 18개월간 임대해준 것인데 예일대학이 돌려주지 않았다며 꾸준히 반환을 요구했고, 예일대학이 성의를 보이지 않자 소송을 제기해서라도 돌려받겠다고 했다. 2007년부터 페루 문화부와 예일대학이 협상을 시작해 발견 100주년이 되는 2011년 반출 유물 중 5천여 점을 페루에 반환했다. 이곳에서도 문화재 약탈 문제가 있지만 그대로 다른 곳에 비하면 양반인 셈이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마추픽추의 불가사의들
마추픽추 유적을 통해 정교한 수로와 물관리, 자연석을 이용한 신전 건축, 철제도구가 없는 상태에서 이뤄진 정교한 석축 건축과 조각기술, 나침반과 해시계의 정확성 등 잉카인들의 놀라운 기술력, 과학적 사고를 확인할 수 있다. 잉카인들은 이처럼 높은 곳에 이 같은 도시를 건설했을까? 수레나 바퀴도 쓸 수 없는 이곳에서 어떻게 이 큰 돌들을 옮겼을까? 모든 점에서 경이롭다.
마추픽추는 중앙의 수로를 중심으로 남과 북이 서로 다른 성격으로 구성되었다. 남쪽은 돌로 쌓아올린 수 미터 높이의 계단식 밭들이 수백여 개 있는 농업지역이다. 계단식 밭에서는 옥수수와 감자, ‘안데스의 초록빛 황금’으로 불리는 코카 잎을 재배했다. 야마(Lama, 라마)와 같은 가축들도 따로 길렀다. 야마(라마)는 남미 고산지대에 서식하는 낙타과 동물이다. 말, 소, 돼지 같은 가축이 없었던 남미에서는 털을 얻고 식용으로 이용하기 위해 집에서 길렀던 가축이다. 이와 비슷하지만 다른 동물로 남미에는 알파카와 과냐코가 있다. 북쪽은 대형 광장과 거주지, 태양의 신전과 달의 신전, 왕의 무덤이 있는 콘도르 신전 등 종교 시설, 그리고 해시계 등이 배치된 도시지역이다.
잉카인들에게는 이 높은 고지대에서 도시를 세우면서 가장 일차적인 문제가 물 문제였다. 여름에는 비교적 비가 자주 오고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려 기본 수량은 풍부했다. 잉카인들은 식수와 농사에 필요한 물을 끌어오기 위해 지하수가 나오는 곳에서부터 돌을 이용해 물길 고랑을 만들었다. 마추픽추에 있었던 200여개의 건물 대부분은 사람이 거주하던 가옥이거나 저장고였다고 한다. 가옥 출입문은 사다리꼴이고 지붕은 3,500미터 이상의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이추(Ichu)라는 풀로 덮었다. 정사각형의 공용 마당을 가운데 두고 10여채씩 무리를 지어 지어진 2층 집들이 좁은 골목으로 연결되었다. 공용 마당에는 커다란 맷돌, 부피가 큰 농기구, 연료로 사용되는 야마의 배설물 저장소가 있었다. 잉카인들은 감자를 말린 추뇨를 주식으로 이용했다. 추뇨를 만들기 위해 태양과 서리에 번갈아 노출되도록 감자를 널었으며, 말린 야마 고기 등은 집 바깥에 줄을 매어 매달았다고 한다.
광장 둘레에는 종교 건축물을 배치했다. 정교한 부조가 새겨져 있고 반원형의 탑이 있는 태양의 신전, 세 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 제1전, 왕의 무덤 등이다. 왕의 무덤은 잉카 최고의 신에게 헌정된 숭배 장소로 추정되는데 시신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신전 근처에는 왕궁은 아니지만 왕녀를 위한 것으로 추정되는 집이 있는데, 유일하게 방이 두 개였다. 여기에는 거실과 식당, 그리고 유일하게 실내에 화장 설비를 갖추고 있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성벽 밖으로 나가서 대소변을 보았던 것이다.
태양의 신전 앞 정상부에는 해시계로 알려진 인티와타나(Intihuatana)가 있다. 인티와타나는 대략 너비 36cm에 높이 1.8m의 돌기둥이다. 인티와타나는 케추아어로 ‘태양을 끌어들이는 자리’라는 뜻이라고 하며, 태양을 숭배했던 잉카인들은 해마다 동지(남반구에서는 여름)가 되면 여기서 태양신에게 제물을 바치며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잉카인들은 태양이 두 개의 의자를 갖고 있다고 믿었는데, 북쪽이 주된 의자, 남쪽이 보조의자라는 것이다. 태양이 남쪽 의자에 자리를 잡을 때인 하지가 한 해의 시작, 북쪽 의자에 자리를 잡을 때인 동지가 한 해의 끝이었다. 잉카인들의 전설에 따르면 안티와타나에 이마를 대면 영혼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열린다고 믿었다고 한다.
인터넷을 조금만 찾아보면 마추픽추에 대한 상세하고 풍부한 내용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잘 찍은 사진과 함께 유적 하나하나에 대해서 설명까지 곁들인 여행기록도 많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은 사람은 그걸 참조하기 바란다.
마추픽추 전경. [사진-임영태]
마추픽추 유적지 평면도.
마추픽추 유적지 전경도.
해시계 인티와타나. [사진-임영태]
샘터와 물 저장고. [사진-임영태]
라틴아메리카 문명의 원형이자 상징이 된 곳
마추픽추는 가장 원형에 가깝게 가장 보존이 잘된 잉카제국의 유적지로 스페인 정복 이전의 남미 고대 문명을 대표하는 상징적 지역이 되고 있다. 유럽의 아메리카 정복 이전의 아메리카, ‘잊힌 아메리카’의 원형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추픽추는 페루의 소유물이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인들 모두의 것이 되고 있다. 쿠스코에서 3일 밤낮을 걸어서 마추픽추에 도착한 체 게바라는 제국주의 철기문명에 패퇴한 잉카제국의 유적을 보면서 잃어버린 아메리카의 원형을 찾기 위한 진정한 혁명을 꿈꾸었다. 또 칠레의 혁명 시인 네루다는 1943년 멕시코 총영사를 마치고 귀국하던 중 마추픽추를 방문하고 2년 뒤 ‘마추픽추의 산정에서’라는 제목 아래 연작시를 발표했다.
네루다는 “마추픽추 드디어 나는/ 잃어버린 밀림의 무성한 잡초 사이에 난/ 지상의 계단으로 올라갔다. 너를 향해.// 돌단으로 만든 공중 도시,/ 잠든 옷 속에/ 이 땅이 숨겨놓지 않은 최후의 거처./ 네 안에서 번개의 요람, 인간의 요람이/ 두 평행선처럼/ 가시 같은 바람 속에서 흔들렸다.”고 했다. 그는 마추픽추에서 그 도시를 건설한 원주민들의 흔적을 도처에서 만났다. 하지만 찬란했던 문명의 주인공들은 사라지고 돌로 된 유적만 남아 있고, 후대는 그 영광을 망각한 채 무관심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인류의 여명”을 밝혀줄 공중도시, 그리고 성스러운 강에서 벌어진 역사를 통해 “죽은 왕국이 아직 살아 있다”라고 노래했다.
혁명의 상징이 된 체 게바라(왼쪽)와 쿠바 혁명가 시엔푸에고스(오른쪽). [사진-임영태]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혁명 시인 파블로 네루다.
게바라도 그렇고 네루다도 그렇고 마추픽추를 페루의 문화유적으로만 보지 않았다. 유럽 정복 이전의 아메리카 문명의 상징, 원형으로 파악한 것이다. 두 사람은 역사를 단지 지나간 과거의 일로 보지 않고 자신이 살고 있던 현재와 연결시켜 파악했다. 위대한 잉카문명을 건설했던 원주민들의 역사를 아메리카 민중의 현재적 삶을 새롭게 열어갈 힘의 원천, 변혁의 동력으로 보려 했다. 그래서 네루다는 혁명시인답게 마추픽추를 보고 과거의 찬란한 문화유적에 대한 감상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그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노동을 바친 이들을 불러내고 그들을 현재의 민중의 삶과 연결시켜 세상의 변화를 노래했다.
형제여, 나와 함께 다시 태어나자 형제여!
고통으로 가득 찬 저 깊은 곳에서 내게 손을 내어다오.
바위 저 깊은 곳에서 너는 돌아오지 않으리.
땅속 세월에서 너는 돌아오지 않으리.
굳어진 너의 목소리, 돌아오지 않으리.
뚫어진 너의 눈, 돌아오지 않으리.
농사꾼이여, 실 잣는 이여, 말없는 목동이여!
수호자 과나코를 돌보는 이여!
위험한 발판을 딛는 석공이여!
안데스의 눈물을 긷는 자여!
손가락이 짓이겨진 보석공이여!
눈물짓는 도공이여!
그 옛날에 묻어버린 그대들의 고통에
새로운 생명의 잔을 주려무나.
(중략)
사슬 그리고 사슬, 고리 그리고 고리, 한 발짝, 그리고 또 한 발짝
모든 것을 말해다오.
숨긴 비수들에 날을 세워
내 가슴과 손에 건네다오
황금색 찬란한 강처럼
땅속에 묻힌 호랑이 강처럼.
그리고 나를 울게 해다오
시간을, 날을, 해를, 눈먼 시대를, 별 같은 세기를.
- 네루다, 「마추픽추의 산정에서」 중에서(파블로 네루다/ 고혜선 옮김, 『모두의 노래』, 69-71쪽 참고)
나는 마추픽추를 보면서, 또 마추픽추까지 가는 과정에서 만난 자연환경을 보면서 잉카인들의 삶과 그들의 역사에 대한 경외심이 들었다. 그 험준한 산악지대, 좁디좁은 계곡 계곡마다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문명을 만들어간 사람들의 놀라운 생활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아메리카 정신의 원형을 찾아 현재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으로 삼고자 했던 이들을 생각했다.
마추픽추 정상을 돌아 내려오는 길에 와이나픽추로 가는 샛길을 보았다. 늙은 산봉우리는 쉽게 구경할 수 있지만 젊은 봉우리 와이나픽추에 오르기 위해서는 많은 힘을 쏟아야 한다. 와이나픽추 또한 갈 수 있는 인원이 제한돼 있어서 미리 신청을 해야 가능하다. 이 대표는 와이나픽추 트레킹에 대한 열망과 미련, 아쉬움으로 쉬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나도 그 봉우리를 보면서 저 봉우리 꼭대기, 정상에서 바라보는 느낌은 또 다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마추픽추의 왼편(남쪽) 경작지대와 오른편(북쪽) 도시지역. [사진-임영태]
‘젊은 봉우리’ 와이나픽추. [사진-임영태]
유적지를 모두 돌아보고 출입구 근처에 오니 남미지역을 대표하는 가축 야마가 한가로이 풀을 뜯거나 쉬고 있다. 그동안 영상이나 사진으로는 많이 봤지만 실물을 보는 것은 처음이어서 호기심이 동했으나 잘못 접근하면 침을 뱉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약간은 경계심이 들었다.
한가로이 쉬고 있는 야마들. [사진-임영태]
콘도르 신전. [사진-임영태]
계단식 밭. [사진-임영태]
북쪽 주거지역 모습. [사진-임영태]
한해의 마지막 밤을 보내며
마추픽추 탐방 후 다시 버스를 타고 아구아스칼리엔테스로 내려와 점심을 먹었다. 오후 2시 30분 잉카레일을 타고 오얀타이탐보에 도착했다. 돌아오는 잉카레일 열차 안에서 같은 칸에 자리를 잡은, 마주보는 네 좌석을 차지한 젊은 미국 승객들의 목소리가 너무 크고 시끄러워 머리가 흔들릴 지경이다. 귀마개를 해도 소리가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떠든다. 밝고 쾌활하고 명랑한 것은 좋은 데 그래도 다른 사람도 생각해서 목소리를 낮추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한국에서도 가끔 노인들이 친구들과 술 한잔 걸치고 전철에서 크게 떠들어 듣기 싫을 때가 있지만 저 수준은 아니다. 속으로는 ‘저런 싸가지 없는 놈들!’ 소리를 수십 번 해 본다. 아주 젊은 20대 애들도 아니고, 결혼한 지 6년이나 됐다는 부부까지 끼어 있는데 도무지 예의가 없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는 눈꼽만큼도 없다. 나는 국제사회를 좌지우지하는 미국의 지금 현재 행태가 저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한국 같았으면 ‘조용히 해’라고 소리를 쳤을지도 모르겠다. 하진 한국도 엉망이긴 마찬가진지 모른다. 몇 년 전 버스 안에서 계속해서 큰 소리로 전화하는 젊은이에게 좀 조용히 하라고 했다가 낭패를 본 적이 있으니... 열차 승무원도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는다. 다른 승객들도 싫었지만 그냥 참는 모양새다.
신년 맞이로 들떠 있는 아우아스칼리엔테스 시장. 잉카를 상징하는 노란 색이 지천이다. [사진-임영태]
아구아스 칼리엔테스의 점심 식사. [사진-임영태]
쿠스코로 돌아오는 열차 안 모습. [사진-임영태]
쿠스코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차창 바깥 풍경. [사진-임영태]
4시30분 오얀타이탐보에서 쿠스코로 되돌아오는 미니버스를 탔다. 전날 왔던 길을 거꾸로 되돌아 쿠스코에 도착하니 6시30분경 되었다. 한적한 시골에서 도시로 왔다는 느낌이 금방 전해졌다. 쿠스코의 밤거리 조명이 너무 아름답다. 화려하지 않지만 운치 있고 은은한 분위기가 사람의 가슴을 설레게 만든다. 야경이 죽인다. 아직 크리스마스트리나 같은 성탄절 조형물도 일부 남아 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어서 그런지 도시 전체가 들떠 있는 느낌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밤, 오늘의 여정이 순조롭게 끝나는가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쿠스코를 떠나기 전날 새로 예약한 호텔을 찾아가기 위해 아르마스 광장에서 구글지도를 켠 채 길거리를 가다가 살짝 올라온 도로 가장자리 턱을 보지 못하고 거기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왼쪽 무릎이 지구와 충돌했고 핸드폰이 손에서 퉁겨져나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으며 손바닥과 손가락 일부도 도로바닥과 강하게 충돌했다. 머리를 땅바닥에 부딪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도로로 넘어졌기에 차가 많이 지나다니는 곳이었다면 교통사고가 날 수도 있었지만 느린 속도의 차량도 많지 않았다. 나는 넘어진 와중에도 아픈 것은 뒷전이고 핸드폰 걱정이 됐다. 사실 여권보다, 돈보다, 지금은 폰이 가장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다른 것은 해결이 되지만 폰은 망가지면 해결도 안 되고 비행기 표 확인, 사진 촬영 등 여행에 결정적인 장애가 초래된다.
그래도 폰 액정은 멀쩡하다, 보호케이스와 분리되긴 했지만 액정 한 귀퉁이만 살짝 상처를 입었고 액정 보호 필름도 귀퉁이 일부만 찢어진 정도였다. 화면도 켜진다. 그런데 지문 인식을 못한다. 속으로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패턴 인식은 된다. 한참을 끙끙 앓고 이리저리 얼렌 끝에 패턴은 문제가 없는데 지문은 됐다 안됐다 한다. 이렇게라도 수습된 게 정말 다행이지만 불편하다. 제발 여행이 끝날 때까지 더 이상 문제가 없길 바란다. 이걸로 액땜한 셈 치자.
아르마스 광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새 호텔로 가서 뒤늦게야 체크인 했다. 호텔 카운터에서 주변 음식점 중에서 괜찮은 곳이 어딘지 물어보았다. 소개받은 음식점 루나(NUNA)로 갔더니 사람들이 북적인다. 연말을 즐기는 관광객들이 주를 이룬다. 샐러드 면 요리, 소고기 스테이크, 참지 스테이크를 시켰다. 칵테일과 음료도 시켰다. 음식 맛이 좋았다. 식사를 끝내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 광장은 신년맞이 축제로 난리다. 비가 살짝 내려 기온이 쌀쌀한데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 나와서ᆢ 놀고 있다. 불꽃 축포와 공연도 진행되었다.
쿠스코 시내. [사진-임영태]
송구영신. 새해를 맞기 위해 쿠스코 아르마스 광장에 모인 관광객들. [사진-임영태]
새해맞이 불꽃놀이. [사진-임영태]
호텔로 돌아온 뒤, 차를 한잔 마시고 잠시 짐을 정리했다. 하루를 돌아보며 간단한 메모를 한다. 페이스북에 올릴 글도 정리한다. 새벽 2시 10분인데도 여전히 노래 공연이 계속되고 있다. 바깥 광장 쪽이 노래 공연 소리로 요란하다. 신년 맞이 폭죽 소리, 불꽃놀이 축포 쏘는 소리도 들린다. 광장으로 가서 구경하려고 호텔 정문으로 갔더니 문이 닫혀 있다. 다른 투숙객과 호텔 직원 몇 사람이 구경을 하고 있는 2층 베란다에 끼어서 한참을 구경했다. 광장 전체는 볼 수 없지만 광장의 축제 분위기는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새벽까지 갈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마무리하고 잠을 자야겠다. 방으로 돌아와 페이스북을 마저 끝내려고 보니 80% 정도 썼던 글이 다 사라지고 없다. 하는 수 없이 간단하게 다시 정리를 한다.
임영태 필자 약력
출판기획자, 저술가. 청년시절 민주화․사회운동에 관계했으며, 한국 근현대사와 세계사, 인문․사회 관련 대중서의 기획․집필에 힘쓰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공식 보고서 발간을 총괄했으며, 지금은 평화박물관의 ‘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에서의 학살-한국현대사, 기억과의 투쟁』, 『새로 쓴 한국현대사-해방부터 촛불항쟁까지 35장면』(공저), 『솔직하고 발칙한 한국 현대사』(공저), 『스토리 세계사 1~10』, 『두 개의 한국 현대사』,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 『국민을 위한 권력은 없다』, 『대한민국사 1945~2008』, 『대한민국50년사』, 『북한50년사』, 『거꾸로 읽는 한국사』(공저), 『거꾸로 읽는 통일이야기』 등이 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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