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사 연표 | |
1777 |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권철신 권일신 이승훈 정약종 정약전 정약용 서양학문과 천주교리 학문 연구 시작 |
1783 |
이벽 주어사 강학회 참석-천주교리 연구회로 발전 |
1784 |
이벽 병사 이승훈 최초 세례(북경 그라몽신부) 명례방 모임(최초신앙공동체 한국 천주교회 창설) |
1785 |
을사 추조 적발 사건-김범우 토마스(최초 순교) |
1790 |
윤유일 사제 영입 요청(북경 구베아주교,로마교황청에 조선교회탄생 알림) |
1791 |
신해박해-진산 사건(윤지충 권상연 군문효수) 정조 15년 |
1794 |
최초 사제 영입-중국인 주문모 신부 입국 |
1795 |
최초 평신도단체 명도회조직-초대회장 정약종(최초교리서 주교요지)4천명 |
1801 |
순조 1년 신유박해(1차대박회)주문모 이승훈 정약종 권철신 초대교회지도자 거의 순교 황사영 백서 완성 |
1839 |
기해박해(2차대박해)앵베르주교 모방신부 샤스탕신부 정하상 유진길 등 100여명 순교 정하상-상재상서 |
1845 |
최초 사제 탄생 |
1846 |
병오박해(3차대박해)김대건신부 현석문 교우 9명 순교 |
1849 |
최양업 사제수품 귀국 1만 1천여명 |
1866 |
병인박해(4차최대 규모 박해)9명 성직자와 황석두 장주기등 8천명 희생 |
1882 |
최초 본당 설정 종현 성당(명동 대성당) |
1969 |
최초 추기경 김수환대주교, |
1984 |
성인 103위 탄생 200년 역사 4번째 성인이 많음.신자수500만 10% |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약사
1563 년 이후김해김씨안경공파(金海金氏安敬公派) 시조 61세, 경파조 11세, 파조 5세인 김의직(金義直, 1563)이 충청도병마절도사가 되면서부터 김대건 신부님에 이르기까지 충청도에 살기 시작.
1743 년 성 김대건 신부님의 증조부 김진후(金震厚, 비오, 1814년 순교) 출생
1788 년 증조부 김진후(비오) 천주교 입교로 전 가족 천주교 입교
1791 년 신해박해로 증조부 김진후(비오) 체포. 면천군수 연암 박지원 도움으로 석방
1795 년 성 김대건 신부님 부친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 1839년 순교) 솔뫼 출생
1798 년 성 김대건 신부님 모친 장흥 고씨(우르술라) 여사울 출생
1814 년 12월 1일 증조부 김진후(비오) 76세에 옥 중 순교1821 년 8월 21일 김대건(아명 再福) 솔뫼에서 탄생
1827-1830 년 사이 조부 김택현 박해와 흉년을 피하여 가족을 이끌고 솔뫼에서 서울 청파로 이사1830 년 이전 서울에서 떠나 경기도 용인 산중 한덕동에 피신
1830 년 조부 김택현 한덕동에서 선종. 그후 부친 김제준 교우촌 골배마실에 정착
1836 년 초 부친 김제준(이냐시오)는 서울 정하상(바오로) 집에 유숙하는 모방(Maubant)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가족사를 들려줌
1836 년 4월 김대건(안드레아) 용인 은이 공소에서 모방 신부에게 세례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
1836 년 7월 11일 김대건은 앞서 선발된 최양업(토마), 최방제(F.사베리오)가 있는 서울 모방 신부 댁으로 가서 합류
1836 년 12월 3일 정하상(바오로), 조신철(가롤로)의 인도를 받아 마카오로 가기 위하여 서울에서 의주 변문으로 출발
1837 년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 신학교 수업 시작
1838 년 11월 27일 동료 최방제(F.사베리오) 열병으로 사망
1839 년 9월 26일 기해박해로 부친 김제준(이냐시오) 서울 서소문 형장에서 참수 순교
1842 년 2월 15일 이후 김대건은 조선 입국을 노력1844 년 12월 25일 만주 소팔가자(小八家子)에서 삭발례(削髮禮)에서부터 부제품(副祭品)까지 고 페레올(Ferreol)
1844 년 12월 25일 주교로부터 받음1845 년 1월 1일 압록강을 거쳐 입국
1845 년 1월 15일 서울 도착. 돌우물골(石井洞)에 유숙
1845 년 2월 15일 간 중병
1845 년 3월 조선 예비 신학생 선발·지도
1845 년 4월 30일 현석문(가롤로) 등 11명 조선 교우들과 함께 제물포 출발
1845 년 8월 17일 중국 상해 금가항(金家港) 성당에서 사제 수품
1845 년 8월 24일 상해에서 30리 떨어진 만당(萬堂) 성당에서 첫미사
1845 년 8월 31일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조선 교우들과 함께 라파엘(Raohel)호 승선 후 상해 출발
1845 년 9월 28일 제주도 인근 섬에 표착(4차 입국)
1845 년 10월 12일 강경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
1846 년 5월 14일 페레올 주교의 지시에 따라 선교사 서해 입국로 개척을 위해 교우들과 함께 마포 출발
1846 년 5월 29일 백령도에서 중국 어선과 접촉하고 편지와 지도 탁송
1846 년 6월 5일 관헌들에게 체포됨
1846 년 6월 9일 해주 감영으로 압송. 문초
1846 년 6월 21일 서울 포청으로 이송. 이때부터 40여 차례 공초
1846 년 7월 30일 스승 신부들과 동료 최양업에게 보내는 마지막 서한 작성
1846 년 8월 26일 페레올 주교께 보내는 하직 편지 보냄. 이 무렵 세계지도와 지리개설서 작성
1846 년 8월 29일 회유문 "교우들 보아라" 작성
1846 년 9월 15일 헌종(13년)이 중신들의 뜻을 묻고 역률죄로 사형 선고
1846 년 9월 16일 서울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26세에 순교
1846 년 10월 26일 이민식(빈첸시오)가 시신을 새남터에서 수습
1946년 10월 30일 이민식(빈첸시오)가 미리내에 안장
1857 년 9월 23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하여 가경자(可敬者, Venerabilis)
1925 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福者, Beatus)
1984 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김대건 신부님 시성(諡聖 Canonizatio)
김대건 신부 얼굴 복원
성 김대건 신부의 얼굴이 복원, 흉상이 제작됐다. 서울대교구 명동 주교좌본당(주임=백남용 신부)은 6월 22일 오전 11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얼굴 복원 결과 보고회를 갖고, 20개월에 걸쳐 이뤄진 복원 및 제작과정을 공개했다.
가톨릭 의대, 한국과학기술원, 건국의대, 연세치대, 울산대 등 5개 대학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공동으로 참여한 얼굴 복원작업은 명동 본당 사목위원이었던 고(故) 김수대(아우구스티노)씨가 99년 6월 선종하기 전 유언으로 얼굴 복원 작업에 사용해달라며 2억원을 기탁하면서 이뤄졌다.
김대건 신부 얼굴 복원은 지난 97년 11월 조용진 서울대 교수가 제작 공개한 김대건 신부상에 이어 두 번째다. 명동성당측은 김대건 신부 얼굴 복원 작업이 완료됨에 따라 이를 토대로 조만간 가톨릭 미술가회에 김대건 신부 전신상과 상본 제작을 의뢰할 계획이다.
특히 가능한 오는 9월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에 맞는 순교자 성월에 맞춰 전신상 제작을 완료해 그 조각상을 성당 회랑 왼쪽 예수성심상이 있던 자리에 봉안키로 했다.
이번 보고회에 따르면 김대건 신부의 얼굴이 갸름하면서도 마른 형태로 이마부분이 곧게 나와 있고 눈확(안와) 및 눈꼬리가 다소 처져 있으며, 광대뼈의 돌출 정도는 미약하고, 뒤통수는 상당히 돌출돼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번 복원 작업에 참여한 제작팀은 김신부의 두개골 및 턱뼈 사진과 유해 실측 기록, 21살에서 26살 사이의 한국인 163명의 얼굴 실측 데이터 등을 바탕으로 뼈대를 제작했으며, 이어 기름에 반죽한 찰흙(油土)으로 살을 붙이고 얼굴 근육까지 찰흙으로 표현해냈다.
특히 국내에서 처음으로 법의인류학(Forensic Anthrop -ology)적 기법으로 복원했으며, 이를 토대로 조각가 구본주씨가 흉상을 제작했다.
명동본당 주임 백남용 신부는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에 김대건 신부님 흉상을 복원하게 돼 감회가 깊다"고 밝히고 "앞으로 많은 신자분들이 김대건 신부님의 얼굴을 보면서 순교자들의 신심과 열정을 본받고 체험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명동본당은 김신부 흉상을 명동성당과 가톨릭대 성신교정, 절두산 성지에 각각 1벌씩 보관할 예정이다.
석남사
서운산 남쪽 기슭에는 청룡사가, 그 너머 동북쪽 기슭에 세월의 무게와 역사의 기품을 간직한 천년고찰 석남사가 푸근하고도 웅장한 자태의 석남사가 있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수도승들이 유난히 많았던 석남사인지라 스님들의 손길이 곱게 묻어나는 것만 같다.
고려 광종의 아들 혜거국사가 크게 중건하는 등 이름 높은 스님들이 석남사를 거쳐갔다. 석남사는 당시 수백인의 참선승이 머물렀던 수행도량으로 이름이 높았던 것.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웅전은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단촐하면서도 당당해 보인다.
대웅전 바로 아래 학이 나는 듯한 팔작지붕집이 영산전과 조화를 이루며, 옹기종기 터를 다스린 석남사 경내는 서운산의 풍취에 푹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풍겨난다. 신라 문무왕 20년에 고승 담화덕사가 창건했으며 이후 고려시대 혜거국사가 크게 중수했다. 경내에는 16나한이 모셔진 영산전을 비롯해 대웅전, 마애석불 등의 도지정문화재와 석탑, 부도 등 향토유적이 있다.
대웅전
석남사 대웅전은 절의 중심에 있는 것으로 석가모니를 모시는 법당이다. 영조 1년(1725)에 해원선사가 대웅전과 영산전의 기와를 갈았다고 전해지고 있으며「雍正 四(三)年 乙巳 三月日 造成」이라고 쓰여진 대웅전 숫기와가 발견되어 1725년에 대웅전이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1978년에 영산전 앞에 있었던 것을 현 위치로 옮겼다. 앞면 3칸·옆면 3칸으로 1층이며,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집이다.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의 건물이다.
건물의 모서리를 장식한 공포로 보아 원래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었으나, 후에 맞배지붕으로 고쳐진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에는 중앙에 불단이 설치되어 있고 삼존불을 모시고 있다. 그 위에 보기 드문 2층의 닫집이 있다
영산전
영산전은 석가모니불상과 그 생애를 여덟 가지로 나누어 그린 그림을 모신 곳으로 지은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쳤다.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시대 건축물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밖으로 뻗쳐 나온 재료의 끝이 짧고 약간 밑으로 처진 곡선을 이루고 있다.
이는 조선 초기 건물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튼튼하게 균형 잡힌 모습을 이루고 있으며 조선 초기에서 중기 사이의 건축 양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석남사마애여래입상(石南寺磨崖如來立像)시도유형문화재 제109호
석남사(石南寺)에서 약 1㎞ 떨어진 암벽에 새겨진 불상으로, 전체 높이는 5.3m이다. 불신 뒤의 광배(光背)와 발밑의 대좌(臺座)를 모두 갖추고 있으며, 얼굴 부분이 마모된 것을 제외하면 완전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3중(三重)의 원형두광(圓形頭光)과 타원형신광(楕圓形身光)을 조화시켜서 키 모양의 독특한 광배(光背)를 이루고 있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넓적한 머리묶음이 있고, 둥근 얼굴에는 눈·코·입이 비교적 작게 표현되어 있어 이 불상의 시대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2중으로 표현된 턱과 목 주위에 있는 3줄의 삼도(三道) 표현은 다소 비대해 보인다. 체구는 당당한 편이며, 옷은 양 어깨에 걸치고 있다. 불의(佛衣)는 양 어깨를 감싸고 배 부분까지 U자형을 이루었고, 두 다리에 각각 타원형 옷주름을 표현했으며 내의(內衣)를 묶은 띠매듭도 나타내었는데 모두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체구에 비해 작은 두 손은 가슴까지 들어 오른손은 검지만을 펴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당당한 체구(體軀)에 비해 작은 두 손은 가슴께에서 설법인(說法印)과 같은 손모양을 하고 있다. 머리 주변에는 3줄의 선으로 둥근 머리광배를 나타냈고, 몸통 주위에도 3줄의 몸광배를 표현했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으나 부분적으로 다소 형식화된 모습이 보여서 만들어진 연대는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
청원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다. 백제 때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 산에 푸른 안개가 끼어 있어서 절 이름을 청원사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1975년 도공(道空)이 대웅전 내의 삼존불을 개금할 때 복장(腹藏)에서 사경(寫經)이 발굴되었는데, 여기에는 청원사(淸願寺)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481년(조선 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현재의 절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조선 초에 바뀐 것임을 알 수 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 1,000명이 이곳에 안전하게 대피하여 산 이름을 천덕산으로 바꾸었다. 청원사는 산골짜기 언덕 안으로 늘 푸른 안개가 끼는데 연유한 것이라 전설이 전하고 있다. 아울러 옛날 청원사에서 불도를 닦던 스님이 명절이 되자 팥죽을 쑤어 부처님께 공양하려고 하였는데, 음식을 해 먹은 지가 너무 오래되어 아궁이에 불을 피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산을 내려가 마을에서 불씨를 얻어 절로 돌아와 대웅전에 들어갔더니 벌써 부처님의 입에 팥죽이 묻어 있었다는 일화가 구전되고 있다. 건물로 대웅전과 산령각·요사 등이 있는데, 이중 대웅전은 조선 후기에 세워진 건물이다. 유물로 대웅전 후불탱화와 청원사칠층석탑·부도·고려사경·본존불 등이 남아 있다.
후불탱화는 1891년(고종 28)에 만들어진 것이며, 부도는 고려 충렬왕 때의 승려 안제(安諦)의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칠층석탑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6호로 지정된 유물이다. 고려사경은 불상의 복장에서 나온 유물로 출처와 조성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어 불경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또한 불상이 종이로 만들어진 지불로 되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청원사 칠층석탑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16
4장의 판석으로 구성된 2층 기단의 갑석은 상·하면 두 곳에 오엽의 연화문을 새겼는데 측면마다 각 면 4개씩의 안상문을 새겼다. 각 층 탑신에는 우주(隅柱)가 모각되어 있으며 옥개석(屋蓋石)은 받침 표현이 없는 특이한 형태로 7층까지 급격한 체감 없이 거의 같은 형태이다. 이러한 탑은 전형적인 고려시대 탑의 형태로 경기도 지방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양식이다.
낚시터를 지나 청원사 들어가는 입구에 "이 뭐 꼬" 라는 돌석이 있다.
미륵불이란?
미래불(未來佛)이 곧 미륵불(Maitreya)이다. 범어로는 마이트레야(Maitreya)라고 하며, 미륵은 성씨이고 이름은 아지타(Ajita, 阿逸多)이다. 그의 성인 미륵은 자씨(慈氏)라고 번역되고 이름인 아지타는 무승 (無勝) 또는 막승(莫勝)으로 풀이된다.
인도의 바라나국 어느 바라문의 가정에 태어나 석가모니 부처님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는다. 그리고는 석가모니 부처님보다 먼저 입멸하여 도솔천에 올라가 그곳의 천인들을 교화한다. 그렇게 하기 56억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사바세계에 출현하여 화림원(華林圓)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도하여 3회의 설법으로 3백억의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현재는 도솔천 내원궁(內院宮)에서 보살로서 존재해 있으나 이미 수기를 받은 부처님이시다. 그러므로 미륵은 도솔천을 주재하고 그 곳에서 항상 설법하고 있는 입장으로 볼 때는 미륵보살이라 함이 타당하고, 또 그의 하생(下生)의 입장에서는 이미 미륵불로 불려지게 된다.
사회가 불안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지상 낙원의 세계를 꿈꾸게 된다. 이러한 혁명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 알맞은 복음적인 부처님이 바로 미륵불이다. 후삼국 시대의 궁예가 스스로를 미륵이라 자칭한 것은 그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미륵불은 석가모니불이 미처 제도하지 못한 중생들을 모두 구제하기 위하여 용화수라고 해서 이 불이 봉안된 불전을 용화전(龍華殿)이라고 부른다.
아양동 미륵
안성시 아양주공아파트 107동 바로 뒤에 미륵 두 기가 모셔져 있다. 본래 아양동은 아롱개마을 이었으나 현재는 아양동으로 부른다. 왼쪽 불상은 상체만 보이고 오른쪽 불상은 전신에 가깝게 노출되어 있다.
보이지 않는 하체는 땅속에 묻혀 있다. 왼쪽 불상은 상체의 키가 훌쩍 크고 꽃무늬가 선명한 보관을 썼으며, 어깨가 곧고 당당하다. 긴목에 윤곽이 뚜렷한데 마치 화장을 막 끝낸 도시 미인처럼 화려하다. 하얀 자갈로 눈동자를 삼은 것도 특이하다. 반면에 오른쪽 불상은 기다란 관모를 쓴 것처럼 장식 없이 소박하고, 목이 짧아 어깨가 붙어버렸다.
옷도 법의가 아닌 관복처럼 주름이 적다. 얼굴의 윤곽도 생전 다듬어본 일 없는 시골 할아버지의 형상이다. 그래서 이 마을 사람들은 두기의 보살상을 두고 왼쪽 불상은 할머니, 오른쪽 불상을 할아버지 미륵으로 부른다. 안성 미륵에서 새로운 점은 미륵이 마을로 내려오고 민간신앙화 되면서 기존의 형식이 무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법의와 관복이 혼용된 모습이고 수인의 개념이 깨지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매년 정월 보름이 되면 아양동 미륵님께 치성을 드린다고 하는데 남자들은 풍물을 치고 여자들이 제를 주관한다고 한다.
대농리 미륵
왼손으로 약병을 잡고 오른손을 아래서 받쳐 든 모습이 가지런하다. 아양동미륵과 태평미륵처럼 이곳 대농리 석불입상도 아랫부분이 완전히 땅속에 묻혀 있다. 그 옆에 문인석이 미륵불의 바지춤을 잡고 있는 것처럼 함께 놓여 있는 것이 익살스럽다.
기솔리 미륵 (쌍미륵)
쌍미륵사에 들어서면 절 입구에서부터 눈에 먼저 띄는 것은 머리에 갓을 쓴 미륵불 두 분이 있다. 부처님 정수리에 솟은 상투모양의 혹에 넓고 둥근 자연석을 다듬어 보석으로 꾸민 관으로 씌워 놓은 것이다. 기솔리 석불입상은 쌍미륵불이라고도 불린다.
남자 미륵불이라 불리는 키 5.4m의 미륵과 여자 미륵불이라 불리는 5.0m높이의 미륵, 이렇게 두 분이 함께 서 있기 때문이다. 기솔리 석불입상이 서 있는 곳은 안성 보개면과 삼죽면에 걸쳐 있는 국사봉 산 중턱이다. 미륵불을 정면으로 보고 섰을 때, 왼쪽에 있는 남미륵불이 좀 더 크고 몸이 좋다. 커다랗고 갸름한 얼굴이 주는 편안함은 우리 가까이에서 쉽게 만나는 사람들 얼굴에서 느꼈던 낯익음일 것이다.
송편처럼 둥그런 눈썹이며 길쭉한 코, 두툼하게 복스럽게 생긴 입술이 그렇다. 목까지 늘어진 귓볼이 후덕함을 더해준다. 등에 거뭇거뭇하게 피어 있는 이끼들이 미륵이 세워진 시간을 말해주고 있다. 얼굴 생김새에 비하면 미륵불의 손과 옷의 주름 등은 세밀하게 조각하지 않았다. 미륵불이 입고 있는 법의는 부드러운 주름을 여러 번 지으면서 목 아래부터 발끝까지 만들어져 있다.
미륵불 두 분 모두 손의 위치나 모양이 자연스럽게 보이지는 않는다. 미륵불을 만든 사람이 조각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왼편에 있는 미륵불은 목도 굵직하고, 어깨도 각이 진 모습이다. 이에 비해 오른편에 있는 미륵불은 옷 주름도 훨씬 둥글고 부드러울 뿐만 아니라, 목도 어깨 넓이에 비해 가는 편이다.
얼굴 생김새도 조금 더 또렷한 인상을 준다. 두 미륵불이 있는 자리에 서면, 기솔리의 전경이 그대로 한 자락에 펼쳐진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는 미륵불 앞에서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많은 소원을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
매산리 석불 입상(태평미륵)
비봉산을 등지고 서 있고 미륵당이라고 불리는 누각에 모셔져 있다. 미륵의 키가 5.6m이므로, 그 미륵을 보호하는 누각의 높이도 만만치 않다. 미륵의 생김새는 그리 균형미 있게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보석으로 장식한 관인 보관을 쓴 얼굴이 몸 전체의 1/3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갸름하고 길쭉한 얼굴에 이마까지 덮고 있는 꽃무늬가 부드럽게 보인다.
가로로 길쭉한 눈과 반달처럼 둥그런 눈썹이 시원스럽다. 둥근 귀가 어깨까지 닿을 정도로 긴데, 소원을 빌러 온 백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미륵의 마음이 담긴 듯하다. 얼굴의 생김새가 이성적인 것에 비해서, 몸집은 당당함마저 풍긴다. 살집 두툼한 손가락과 투박한 어깨선이 그러하다.
누각의 생김새 가운데 눈길이 가는 것은 나무 기둥을 받치고 있는 돌인 주초석이다. 오른쪽과 왼쪽에 각각 세 개 씩의 돌을 네모나게 깎아 세웠는데, 솜씨가 거칠고 투박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거칠거칠한 화강암 면을 만져보면 기둥을 다듬던 망치와 정소리가 돌에서 울려나오는 것 같다.
미륵불이 있는 마당에는 5층석탑이 놓여 있다. 석탑의 외형이 많이 상해있긴 하지만, 미륵불과 그 모습이 서로 잘 어울린다. 나지막한 담 안에 마련되어 있는 미륵불과 석탑으로 주변 분위기가 고향처럼 편안하다
첫댓글 그림은 서로 호환이 안되는지 보여 주질 않는군요. 사무실 컴이 낯을 가립니다..ㅋㅋ
어떻게 이리 공부를 많이 하셨나요?
공부 거리는 늘고, 차암.
정리하고, 컴에 올리고, 또 머리에 입력시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