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2024. 2. 25(주일) - 사순절 둘째 주일 - (2024년 8주)
제목; “예수님의 제자의 길, 선교사의 길”
성경; 막 8:31-38 (p.67) (시 22:27-29, 85<85>, 505<268>, 621)
<예배의 부름> (시 22:27-29)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세상의 모든 풍성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I.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순절 두 번째 주일을 맞이하며 우리 주님의 사랑과 은혜, 평화가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특별히 어제가 1년 중 달이 제일 크고 밝다는 정월대보름을 보냈는데, 이지러짐 없는 둥근 달과 같이 늘 여유 있고, 너그럽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2024년 되시길 기원합니다. (☞ 사진 보며)
저는 여러분의 기도와 격려 덕분에 지난 주간에 타이완 선교지를 다녀왔습니다. 1992년 저와 함께 장신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선교 훈련을 받은 후 중국으로 파송되어서 쿤밍에서 10년 동안 중국 선교사로 사역하다가, 중국에서 모든 선교사들을 추방할 때 쫓겨난 후, 곧바로 타이완 선교사로 파송받고 다시 중화권으로 선교를 떠나 타이완에서 10년 동안 사역하고 있는 동기생 조문철 선교사님의 선교 현장과 타이완을 돌아보고 왔습니다. 여러분이 다 알다시피 제가 남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를 제외하고 아프리카부터 러시아 등 약 50개국을 다녀보았는데, 타이완은 이번이 처음이라 참으로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제가 동기생인 장신대 신대원 85기 상임회장(담임목사, 머슴)으로 섬기면서 동기생들의 길흉사를 다 챙기고, 특별히 암 등 질병으로 고통받는 동기생들과 선교사님들을 늘 찾고 보살피고 있습니다. 그런데 6년 전에 한 동기생으로부터 타이완 조문철 선교사 사모님 허계영 선교사님이 유방암으로 신촌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연락을 받고 암 수술을 앞둔 허계영 선교사님을 만나 기도해 주고, 동기생들이 모금해준 병원비를 조금 전달했습니다. 다행히 허 선교사님은 수술을 잘 받고 치료받은 후 다시 타이완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이전에도 가끔 연락했었지만, 사모님 암 수술 후 조 목사님과 자주 연락하고 국내 들어오시면 만나면서 동기생들이 타이완을 한번 방문해 주면 좋겠다는 것을 동기회에 공식적으로 요청을 했고, 햇수로 3년 전인 지난 2022년 12월 동기회 총회에서 타이완 선교지 방문을 결정했고, 그 결정에 따라 이번에 타이완을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타이완 선교지 방문에 동참한 한국에서 간 18명의 동기생 가족들은 사실 추운 겨울에 따뜻한 타이완에 가서 조금 쉬고 오겠다는 생각으로 갔는데, 결과는 타이완 최북단에서 최남단 까오슝까지 남북 길이 약 400km를 왕복하고, 해발 1,700m에 개척한 원주민 교회를 방문하는 등 강행군이었습니다. 그래서 몇몇 동기생이 하는 말이 ‘역시 강홍준 목사과 함께 하는 여정은 극기 훈련’이라는 말이 또 나왔습니다. (☞ 사진 보며)
그래서 나중에 좀 더 상세하게 타이완 선교지 소개를 할 기회가 있으면 하고, 오늘은 이번에 방문한 선교지 몇 군데를 사진과 함께 소개하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 타이완 선교지 방문 보고 (☞ 사진 보며)
- 갈멜산교회 : 조문철 선교사님 개척한 해발 1,700m 고산교회,
4년전 행방불명된 목사님 사모님, 단니푸 전도사님께서 시무하고 있는 교회
- 장개석기념교회 예수당
- 카오슝 복기교회(BBC) : 양시루 목사님, 30세 회심, 27세 교회 개척, 현재 73세
신학교 다닌적 없음, 등록교인 5,000명, 출석교회 3,000명, 타이완에서 제일 큰 지하교회
- MFCI 소수민족선교회 : 37개국 선교 목표, 현재 35개국 460명 선교사 파송
- 성경의 맥과 핵 : 허계영 사모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오늘은 매우 짧고 간단하게 소개하지만 언제 시간이 되면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생각나는 대로 타이완 조문철, 허계영 선교사님과 타이완 선교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II.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막 8:31-38)은 이른바 1차 수난 예고와 베드로의 항변과 책망,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에 관한 말씀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앞 문단과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하는 예수님의 정체(identity)에 대한 제자들의 이해와, 그 중에서도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29)는 고백과 함께 묶어서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27-30). 이렇게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과 연결된 오늘 본문은 복음서 전체 흐름의 결정적 전환점에 해당합니다. 세례 요한, 선지자, 엘리야 등 다양한 이름과 얽혔던 항간의 소문과 달리, 베드로를 대표로 한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당신은 하나님의 메시아’라는 정확한 고백을 내어놓았습니다(막 8:27-30). 그러나 정확한 고백이 언제나 정확한 이해로 이어지는 것은 아인니다.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이라는 역설 앞에 격하게 대응하는 제자의 모습은 복음과 제자도의 본질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계기로 작용합니다.
이렇게 앞부분과 연결해서 본문을 구분해 보면,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27-29),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과 부활 예고(30-31), 거기에 이어지는 베드로의 항변과 예수님의 책망(32-33), 그리고 그 뒤에 결정적으로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34-38)이 따라 나옵니다.
예수님의 정체에 이어지는 예수님 따르는 제자의 길은 어떤 길입니까?
1.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31)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오늘 본문은 바로 앞부분 예수님의 정체(identity)에 대한 이해와 연결됩니다. 특별히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29)는 베드로의 고백에 대해서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30)고 함구 명령을 내립니다.
그런데 반전은 31절에서 시작됩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해서 함구 명령을 내렸지만, 이른바 ‘1차 수난 예고’를 통해서 자신의 수난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공개하며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글 성경은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로 번역하는데, 원문을 직역하면 ‘그가 가르치기 시작하셨다’(카이 에릌사토 디다스케인, καί ήρξατο διδάσκειν)입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은 이전까지 당신의 수난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 본문을 좀 더 깊이 연구해 보면, “비로소”에 해당하는 ‘에릌사토’(ήρξατο)는 ‘시작하다’는 뜻의 동사 ‘아르코마이’(ἀρχομαι)의 3인칭 단수 부정과거 중간태로, “가르치시되”(디다스케인, διδάσκειν)라는 부정사와 함께 사용되어 ‘그가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새로운 행동의 시작을 암시하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기점으로 하여 자신이 당하실 수난을 공개적으로 명백하게 선포하기 시작하실 것을 암시합니다.
이때부터 예수님은 여태 수면 위로 올라온 적이 없는 결정적 비밀을 ‘가르치기 시작하시는데’(31), 메시아인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정치적, 종교적 권력에 의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며, 사흘 후에 부활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대놓고' 말씀하십니다. 고난받는 여호와의 종처럼(사 53:3-5,10), 혹은 건축자가 ‘내버린 돌'처럼(시 118:22), 이 메시아는 고난과 배척의 길을 통해 자기 소명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고난의 가르침은 이후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까지 두 번 더 반복되며 그 의미와 무게를 더해 갑니다(9:30-32, 10:32-34).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으로 신적 필연성을 지닌 것들이며, 이는 베드로의 신앙고백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써, 제자들이 반드시 인지해야 할 영적 지식입니다. 당위성을 내포한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는 하나님의 뜻과 성경의 성취라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14:36,49).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시간표 대로 제자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수난 예고를 통해서 앞으로 전개될 십자가의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복음서를 보면 곳곳에서 예수님은 중요한 순간에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엉뚱한 소리 하는 제자들에게, 정확한 상황 판단과 교훈을 가르쳐 주십니다. 바로 이어지는 9장에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에서의 황홀한 변화 후에 내려온 산 아래에서 귀신 들린 아이를 고쳐주지 못하고 쩔쩔매는 제자들 앞에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23)라고 말씀하시면서 귀신 들린 아이를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조용히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28)라고 물어올 때,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29)고 가르쳐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어떻습니까? 내가 하는 신앙고백과 삶은 분리되거나 괴리되지는 않습니까? 메시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 마음에 새기고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시길 기원합니다.
2.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32-33).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32-33)
예수님께서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면서”이제는“드러내놓고”(파르레시아, παρρησίᾳ), 곧 ‘숨김없이’, ‘공공연하게’말씀하셨습니다. 이전까지는 예수님께서 천국의 진리를 가르치실 때 비유나 수수께끼로 말씀하셨으나(4:11,39), 여기서는 자기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말씀만큼은 직설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 대해 베드로의 반응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붙들고”(프로슬라보메노스, προσλαβόμενοσ)는 개인적으로 은밀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 예수님을 ‘자기 곁으로 당겨 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항변하매”(에피티마오, ἐπιτιμάώ)는 ‘책망하다’, ‘꾸짖다’. ‘비난하다’는 뜻이며, 이어지는 33절 “예수께서 …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의 ‘꾸짖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마가가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보인 반응이 얼마나 적극적이고 험악했던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예수님을 ‘꾸짖고’, 예수님은 베드로를 ‘꾸짖으신’ 것입니다. 제자는 자신의 기대를 저버리는 스승을 꾸짖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제자로 따라나선 제자들을 기본적인 사고와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했지만 그렇다고 메시아에 대한 그들의 기대가 변한 건 아닙니다.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메시아는 그토록 기다린 ‘다윗의 자손’, 곧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건져 하나님 나라를 세울 정치적 구원자였습니다. 이런 정치적 승리의 열망은 고난과 죽음이라는 패배의 드라마와는 맞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격하게 저항합니다. 그래서마태복음에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마 16:22)라는 베드로의 항변의 말이 전달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면 자신의 인생도, 자신의 꿈도 물거품이 되고 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33)고 엄히 꾸짖으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통해서 일하는 사탄의 정체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니 사탄의 도구가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만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사람의 일”이란 십자가 없이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메시아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예수님은 다시금 자신을 유혹하는 사탄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사탄에게 가장 적절한 방식, 곧 더 단호한 ‘꾸짖음’으로 맞대응하십니다. “내 뒤로 물러가라, 사탄아!” 이때 예수님의 시선은 ‘그의 제자들' 모두를 향합니다.베드로뿐 아니라 모든 제자가 이 꾸지람을 들었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에게서 드러난 사탄의 얼굴은 그가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들을 생각한다는 사실이었다. ’생각'은 마음과 행동의 지향이다.
그런데 공관복음을 대조해 보면, 누가복음에는 아예 베드로가 예수님께 ‘항변한 내용’이 없고,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이 베드로를 ‘꾸짖으셨다’라고 한 말이 없는데, 마가복음만이 유일하게 ‘꾸짖으셨다’라고 말합니다. 마가복음의 예수님은 베드로의 항변에 더욱 단호하고 엄격하게 반응하신 듯합니다. 이어지는 구절을 살펴보면, 베드로의 문제점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생각한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십자가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는 계획이었다면, “사람의 일”은 예수님의 능력과 명성에 편성해 인간적인 덕을 보려는 계획이었다고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그처럼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은 사탄이 부추기고 바라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십자가의 수난 예고를 있을 수 없는 일로 거부하고 항변할 때, 그는 사탄의 종노릇하고 있었던 셈이 되는 것입니다. 제자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도 언제든 사탄이 기뻐하는 일에 종노릇할 수 있음을 강력하게 경고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우리는 교회나 성도가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사탄의 도구처럼 사용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했지만, 베드로의 고백은 여전히 하나님 아닌 사람의 관심사에 조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막고 사람들의 관심과 열망에 맞추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탄의 전략입니다. 이전 광야에서 예수님의 길을 막으려 했던 사탄은 이제 그와 가장 가까운 제자의 얼굴로 예수님의 길을 막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속지 않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의 얼굴로 나타나더라도 사탄은 사탄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 사탄의 모습을 분명히 기억하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막고, 교회와 예배를 막는 모든 세력들과 싸워서 승리해야 합니다.
3.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34-37)
이렇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하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33)으로 시작되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가려는 이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하려거든”(델레이, θέλει)은 ‘뜻을 세우다’, ‘선택하다’, ‘원한다’는 뜻인 ‘델로’(θέλω)의 3인칭 단수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결코 변함없이 지속되는 굳은 결단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따를 것이니라”(아콜루데이토, ἀκολουθείτω) 역시 현재 명령형 형태를 취하여 있어, 그 행위의 지속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이어지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의 두 가지 조건, 곧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를 짐’을 만족시키고, 그 어떤 어려움과 시련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당신을 따라오라고 명령하고 계신 것입니다.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는 다만 이 명령에 순종하여 주님을 따를 뿐, 그 과정상의 어려움을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는 않습니다.
1) 제자의 길은 자기를 부인하는 길입니다(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34)
예수님를 따르는 제자의 길은, 제일 먼저 자기를 부인하는 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아파르네오마이, ἀπαρνέομαι)는 직역하면 ‘자기 자신을 거부하다’(deny oneself)는 뜻으로, 이는 단순히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아(自我) 중심의 삶을 완전히 포기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참된 제자들이 이전의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새로운 왕, 곧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사는 삶을 말합니다. 이러한 요구는 31절에서 언급된 인자가 당하는 고난과 관련지어 생각하게 합니다. 즉 예수님의 갈 길과 그리스도인이 갈 길은 같은 고난의 길이고, 그 고난의 길을 가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한 내적 거부, 곧 자기 집착이나 안일함, 또는 이기심과 자기 자랑을 모두 포기할 수 있어야 하며, 자기 자신을 삶과 행동의 목표로 삼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의 삶의 원칙을 근본적으로 뒤바꾸어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그 삶의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이 같은 포기는 자신에게 닥쳐온 고난, 심지어 죽음까지도 두려움이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몇 년 동안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창궐 속에서 살아왔고 아직도 그 영향력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예전에는 웬만하면 감기라고 우습게 여겼을 수도 있는 바이러스입니다. 건강한 사람 중에는 무증상으로 왔다 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코로나19가 확산된 이유는 우리의 면역력이 급격히 저하되었기 때문입니다. 먹어야 되는 좋은 것들은 먹지 않고, 입이 즐거운 것들을 찾아 먹었으며, 먹을 것을 많이 생산하기 위하여 농약과 많은 화학약품을 사용하였습니다. 덕분에 인간의 육신에는 면역력이 급격히 감퇴하였고, 코로나의 침공에 맥을 못 추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많은 소유와 편안함을 찾으며 창조의 질서를 무너뜨렸습니다. 그 결과는 참으로 엄혹합니다. 창조의 세계에서 인간의 욕심은 죄가 되었고,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의 관계들은 모조리 파괴되었습니다, 이 잘못되고 파괴된 창조 질서를 회복하고 되돌리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의 질서가 회복되며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과 죄의 유혹으로 가득한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영적인 회복과 더불어 인간의 육신과 사회의 건강함을 회복하는 길은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는 사탄의 유혹을 과감히 뿌리치고 십자가의 주께로 나아가는 데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은 제일 먼저 자기를 부인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부인해야 하고. 자기 욕망을 부인해야 하며, 자기 사랑을 부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세워야 합니다.
2) 제자의 길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길입니다(34).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의 길 두 번째 조건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첫 번째 조건 “자기 부인”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조건입니다. 이전에 삶의 주인이었던 자아(自我)를 중심으로 살던 삶을 부정하는 것은 새로운 삶의 주인을 예수 그리스도로 모시고 그를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즉 새로운 삶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단지 살아가면서 겪게 될 근심, 생활고(生活苦) 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분명히 31절에서 언급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제자들과 그리스도인의 삶과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엄청난 고난과 고통을 당하셨고, 바울은 이 주님의 십자가에 남은 고난을 몸으로 채웠다고 고백합니다(“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 1:24).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으로,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라 희생하고 헌신하고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다 보면 광신자(狂信者)라고 욕을 먹기도 합니다. 가족들과 불편한 관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목숨이 위태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목숨을 내어놓는 위험한 길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첫걸음을 시작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사형 언도를 받은 죄임임을 자각하고, 자기가 달려 죽게 될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지고, 아무 죄도 없이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사실 당시 ‘십자가’라는 말은 고난과 죽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바로 이 십자가를 지는 일이며, 이것은 고난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 모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끝까지 따라가서 천국에까지 이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3) 제자의 길은 자기 목숨을 주님을 위해서 내어주는 길입니다(35-37).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35-37)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의 길 마지막 조건은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내어주어야 할 “목숨”으로 번역된 ‘프쉬케’(ψυχή)라는 낱말은 지상의 삶과 내세의 삶 모두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여기서 “목숨” 곧 ‘프쉬케’는 흔히 ‘영원한 생명’을 가리키는 ‘조에’(ζωή)나 ‘마음’, ‘영혼’, ‘생명’등을 의미하는 ‘프뉴마’(πνεῡμα)와는 다른 ‘육체적 생명’, ‘현재 누리고 있는 생명’ 등을 의미합니다. 실로 인간이 실현하여 얻고자 하는 “온 천하”조차도 이 “목숨” 곧 ‘프쉬케’에 견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목숨(프쉬케)을 구원하고 영원히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는 말씀은 십자가의 길이 죽음의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임을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언젠가는 죽을 몸을 위하여 사는 일에 아등바등합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과 거짓 평화라도 누리기를 바라며 다리 하나는 주님께, 천국에 걸치고 있지만, 다리 하나는 세상에 적당히 걸치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천하보다 소중한 그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잃을 각오로 살아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죽고자 버둥대면 영원한 생명을 얻어 구원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과 복음은 십자가를 제외하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루신 구원이 곧 복음(福音)입니다. 그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 생명을 나누기 위한 십자가, 복음을 위하여 한없이 무거워도 메고 가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 길이 구원의 길이고 생명의 길입니다.
4. 제자의 길은 영광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38).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걷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목숨을 내어놓고 끝까지 따라오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길이 고난의 길, 죽음의 길이 아니라 종국적으로 영광의 길임을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38)는 말씀을 통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영광으로 나아가는 길임을 밝혀줍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음란하고 죄 많은” 사회입니다. 하나님 아닌 사람, 곧 인간의 욕망에 조율된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가 승인하는 생존 가치는 예수님과 그의 복음이 선포하는 진정한 삶의 비전과 충돌합니다. 그래서 부활에 이르는 메시아의 행보는 불가불 이 땅에서의 고난과 죽음이라는 골짜기를 통과합니다. 이 악한 세대에서 ‘자기 목숨을 구원하는’ 일, 곧 메시아의 길을 피하고 이 세대의 가치에 순응하며 현세적 생존과 번영을 확보하려는 일은 결국 자기 목숨을 파괴하는 치명적 실수가 됩니다. 반면 메시아 예수님을 뒤를 따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 곧 ‘나와 복음 때문에 자기 목숨을 파괴하는' 사람은 오히려 그 목숨을 구원할 것입니다(35). 제자를 주어로 한 ‘파괴’와 ‘구원’의 동사는 제자들 편에서의 결단의 중요성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불편해하지도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은 사람은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시는 주님께서 기억하신다고, 예수님을 위해서 수치를 감당하는 자에게 영광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반면에 주님을 위하여 당하는 모욕과 불편함을 부끄러워한 사람들은 주님께서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라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현대사회에서는 경쟁력 없는 삶을 선택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살아가려고 하는데 수치와 고난, 시련이 올 때도 있습니다. 예수 믿고 받는 영광이 간혹 있기도 하지만 별로 없습니다. 이런 영광 없는 길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가는 길이요, 가야 할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그 길에서 주님을 잘 따라가면. 지금의 어려움들은 물러가고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보며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끝까지 믿음의 길을 잘 걸어간 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의 빛이 이 세상에 나누어지며, 이 세상이 함께 빛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III.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어제 국민일보에 소개된 가슴 뭉틀한 기사를 소개하면서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2024. 2. 23 국민일보).
“고국 위해 의술 펼 것”… 故이태석 신부 제자 전문의 합격 이라는 기사가 저의 마음을 정말 따뜻하게 하고, 특별히 선교지를 다녀온 다음이라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제가 지난 2018년 11월 4일설교에서‘울지마 톤즈’라는 영화와 함께 대한민국의 아프리카 슈바이쳐라고 불렸던 故 이태석 신부님에 대해서 소개한 적이 있는데, 바로 그 故 이태석 신부님의 남수단 제자인 ‘토머스 타반 아콧(왼쪽, 토머스), 존 마옌 루벤(존)’ 두 사람이 지난 23일 발표된 제67차 전문의 자격시험 합격자 2,727명 가운데 외과, 내과 전문의로 합격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 사진 보며)
충분한 의료 서비스를 보장받지 못하는 남수단 사람들을 위해 주저없이 내과와 외과에 뛰어든 두 제자는 힘든 자국민을 위해 의술을 펼칠 것을 다짐했습니다.
토머스와 존은 이태석 신부의 권유로 한국에서 의사의 길을 걷게 됐습니다. 둘은 2009년 수단어린이장학회 도움으로 공부를 시작했지만, 이들이 한국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신부는 대장암으로 선종(鮮終)했습니다.
하지만 둘은 포기하지 않고 의사가 돼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집념 아래 2012년 이 신부의 모교인 인제대 의대에 합격했습니다. 먼 타지에서 어학과 의학을 함께 공부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둘은 인제대에서 전액 장학금으로 등록금과 기숙사비 지원으로 학업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토머스와 존은 각각 83회(2019년)와 84회 의사국가시험에 합격해 의사가 됐습니다. 이후 인제대 부산백병원에서 인턴 수련을 마쳤으며, 토머스는 인제대 상계백병원 외과, 존은 인제대 부산백병원 내과에서 레지던트로 수련받아 올해 전문의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두 제자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고 의학 공부를 통해 의사가 될 수 있었던 모든 것들이 이태석 신부님 덕분”이라며 “또한 전공의 수련에 어려움 없이 임할 수 있게 도와준 인제대 백병원 교직원분들 덕분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리고 내과와 외과를 택한 배경에는 열악한 남수단의 의료 서비스 환경이 있었습니다. 남수단은 수년간의 내전으로 많은 사람이 충분한 의료 서비스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외과를 선택한 토머스 전문의는 “남수단에는 외과 의사 부족으로 간단한 급성 충수염이나 담낭염 등도 빨리 수술받지 못해 죽는 사람이 많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외과를 택했다”고 했습니다. 내과를 택한 존 전문의도 “어릴 때부터 내전과 의사가 없는 환경 속에서 진료를 받지 못해 고통을 겪는 이들을 많이 보았다”며 “그중에는 말라리아·결핵·간염·감염성 질환 등 내과 질환이 대부분이라 내과를 택했다”고 했습니다.
이 둘은 ‘힘든 일이 있어도 연연하지 말라’는 이태석 신부님의 가르침을 새기며, 고향인 톤즈로 돌아가 신부님이 못다 펼친 인술을 펼치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남수단의 돈 보스코로 불린 故 이태석 신부님은 1987년 인제대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됐습니다. 이후 살레시오회에 입회해 사제의 길을 선택한 뒤 2001년 아프리카 남수단의 오지 톤즈로 건너가 병실 12개짜리 병원과 학교, 기숙사를 짓고 구호·의료 활동 등을 벌이다 48세 때인 2010년 선종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의식적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되새기는 사순절을 지내며 이 말씀을 묵상합니다. 베드로를 꾸짖는 예수님의 눈길이 모든 제자를 겨냥했던 것처럼, 그분의 꾸지람은 그들만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내재한 암세포를 진단하고 도려내는 수술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꾸짖는 예수님과 사탄의 전쟁(battle)에서 다름 아닌 베드로의 모습으로 메시아 예수님 앞에 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중에도 두 사람이 있습니다.메시아의 길을 따르는 사람과 사탄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심지어 이 두 사람은 한 인격체 속에서도 번갈아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 속에서 예수님의 꾸지람에 정신이 번쩍 들어 다시 생각합니다. 내게 소중했지만 버려야 할 ‘사람의 일들’과 돌이켜 바라보아야 할 ‘하나님의 일’을 추스르며, 예수님을 뒤따르는 삶을 정비합니다. 그때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은 하나님의 메시아입니다”라는 고백을 서툴지만 끈질긴 뒤따름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악과 마주하는 일은 결단을 요구합니다.하나님 나라의 요구는 심지어 혈연조차 상대화합니다. 그만큼 투쟁은 힘겹습니다. 사랑하는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를 외치는 일은 예수님께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담스럽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 가장 어려운 것은 내 속에 도사린 사탄과의 싸움일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죽음 직전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나타난 사탄과 처절한 투쟁을 벌였고, 끈질긴 기도로 승리하셨습니다(막 14:32-39).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의 무게는 그 뒤를 따르는 우리의 결연함을 요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변에는 미래를 잃고 현세적 ‘짝퉁’에 목숨을 바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 밖에서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렇습니다. 사순절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으로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다시 보는 시간입니다. 현세대의 욕망이 빚은 위조지폐를 즐겨 유통시키며, 이것으로 미래의 부활조차 가불하려는 오만을 깨닫는 시간, 메시아 예수님의 길을 더듬으며 영원한 구원의 열쇠를 재확인하는 은총의 시간이다. 이 사순절에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제자의 삶의 기본인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목숨까지 내어놓고 주님의 뒤를 따라갑시다.그리고 이 제자의 길을 몸소 실천하며 살아가는 많은 선교사님의 삶과 같이, 내가 서있는 그 자리에서 선교사의 삶을 살아가므로 생명을 살리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는 충성스런 제자들 다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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