宿安國寺 안국사에 묵으며
雲住千尋聳 운주산 천 길로 솟았고,
森森眼界淸 숲은 우거져 안계가 맑네.
新堂經劫火 새로 지은 당우들은 불을 겪었고,
舊釋落晨星 옛 절에는 새벽 별들이 떨어진다.
猿鶴堪同宿 원숭이와 학이 함께 잠자리에 들 만하고,
溪山却有情 계곡과 산이 몰록 정다워라.
雜花方爛熳 온갖 꽃들은 바야흐로 난만한데,
款款谷禽聲 새 소리 골짜기서 꾸욱꾸욱 들려오네.
-징월대사 시집
영남의 명승, 징월(澄月) 스님을 7, 8년 전 포항 운주산 안국사터 조사하며 알게 되었다.
스님의 행장을 읽으니 진영이 운부암에 있다고 하여
은해사 운부암을 찾아 갔지만 볼 수 없었다.
교사불자회 법우들과 같이 절터에 올라 옛 스님들을 그리워하며 산상법회를 올리고 와서
수필 <운주산 안국사터에서>를 썼고,
나중에 <<보리수필>>에 발표하였다.
그리고, 케이와이씨 문화유산길라잡이분들과 함께
안국사터 안내문을 세운 지 삼 년이 지났다.
경주 북방의 운주산에 신라시대 창건된 안국사는
1775, 1786년 대화재 뒤에 정조의 총애를 받은 규장각 학사
흥해군수 청성 성대중이 그 중수기를 지었다.
징사(懲士), 임금의 부름을 받은 경주의 산림처사,
두항거사 이수인 선생도 안국사에 묵고 시를 남겼다.
산남의진 항일의병 항전의 근거지가 되고
의병장 정환직, 정용기 부자가 비밀리에 안국사에서 만나
13도 창의연합군의 서울진공작전에 의병이 합류하기 위한 일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1908년에 의병의 활동 근거지가 된 안국사를
일본군이 올라가 불을 지르고 부수어 초토화 시켰다.
지금은 기와 조각 밭고랑에 나딩굴고 무당의 굿터가 되었다.
문화재와 역사의 현장이 당국의 무지와 시민의 무관심으로 방치되어 있어 안타깝다.
올여름 ㅈ시인이 포항이 낳은 불세출의 천재시인
흥해향리 농수 최천익 선생의 제자인 이계선생의 문집을 구해 주었다.
반갑게도 이계가 시승이었던 징월스님에게 준 시가 실려 있다.
팔공산 징월 스님에게 드림
贈公山澄月上人
씩씩하고 걸출한 젊은 스님 魁傑少年僧
무슨 즐거움으로 산속에 사는가 居山何所樂
짐짓 달마가 동쪽으로 온 까닭을 묻자니 試問達摩來
뜰 앞의 한 그루 잣나무라 하네 庭前一樹栢
지난 성탄절에 도반들과 인연되어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처인 팔공산 은해사 백흥암에 갔다.
기록영화< <길 위에서>에 출연하신 주지스님도 뵙고,
프랑스에서 오신 푸른 눈의 스님도 만났다.
보화루에 올라서 현판들을 살폈다.
인종대왕 태실 수호암자로 조선시대 양반과 지방관청의 침탈을 금하는 경상감사의 공문서,
중수기에 징월 스님 이름이 나와서 반가웠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징월 스님이 머물며 수행하셨던 운부암과 은해사를 참배했다.
놀랍게도,
내가 한 번 뵙고자 했던
그리운 징월 스님이 은해사 성보박물관 깊숙한 그곳에서
나를 근심스러운 눈으로 지긋이 보시고 있지 않는가.
스님은 의성 금성산 아래서 태어나 산사에서 과거 시험 공부를 하다가 불경을 열람하고
속세의 일이 허망함을 깨닫고 발심 출가했다.
영남 일대의 퇴락한 사찰 중건에 공로가 많으시다.
풍양 조씨 세도가 관료들과 한강의 나룻배 위에서 만나 시를 창수하고
시축을 남겼다.
헌걸찬 풍모에 그윽하고 자애로운 눈매를 한 스님의 화상에
희곡산인은 이런 제시를 붙였다.
맑은 강, 밝은 달 澄江皓月
이를 법신이라 이르지만, 是謂法신
나는 본래부터 둥굴고 고요하여, 我本圓寂
겉 모습이 곧 참 모습이라. 卽假而眞
希谷散人 題
운주산 안국사터에서
김희준
구름이 머무는 운주산(雲住山) 안국사(安國寺) 절터로 지난 일요일 아침 교사불자회 법우들과 올랐다. 연화(蓮花) 재를 넘어 기계(杞溪)로 가는 하늘에는 먹구름이 일고 성근 빗발이 차창을 적셨다. 티끌세상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불꽃이 타오르는 중생의 가슴마냥 바닥이 드러난 냇물을 건넜다. 무논에는 농부들의 어진 손길로 심어진 모들이 하늘을 향하고, 향기로운 봄 미나리는 이제 억세어지기만 하여 보였다. 제법 넓은 바위가 펼쳐지고 숲이 우거져 청량한 계곡에서 옥수(玉水) 흘러내리는 소리가 귓바퀴에 부딪혀 왔다. 산 이름조차 혜능(惠能) 선사에게 일체 만법이 자성(自性)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주었다던 ‘금강경(金剛經)’에 나오는 저 유명한 구절, ‘마땅히 머묾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應無所住 而生其心).’를 연상하게 한다. 진속(塵俗)의 경계를 수직으로 벗어난 명산이다. 몸속에 빛나는 정신이 있어야 하고, 집안에 책이 가득해야 하는 것처럼, 무릇 산엔 절이 있어야 신령스러운 법이다.
몇 해 전에 적멸보궁 비학산(飛鶴山) 법광사(法光寺)터의 석가불 사리탑 중수 비문을 읽다가 안국사를 처음 알게 되었다. 비문을 찬한 이는 당대 제일의 문장가로 조야(朝野)에 이름을 떨쳤던 청천거사(靑泉居士)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이다. 일월지향(日月之鄕) 연일(延日)의 현감을 지내고 물러나 고령(高靈)에서 ‘금강경’을 읽으며 은거하던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지난 오월에 안국사 터를 다시 찾았다. 을사늑약 뒤에 영천, 포항, 청송을 중심으로 일어난 산남의진(山南義陳)의 가열 찬 의병 항쟁에 참가한 강대근(姜大根) 의병 이야기를 취재하던 참이었다. 먼저 왔을 때는 안국사란 이름을 가진 운주산 발치에 있는 암자에 다녀갔다. 해방 이후 어느 시점에 근처 마을의 어느 보살님이 새로 지은 곳이었다. 그 때 우물가에 깨어져 나뒹구는 빗돌을 만났다. 조선 영조, 정조 임금 시기에 정욱(淨旭), 낙영(樂英) 두 스님의 가람 중수 공덕을 종남산(終南山) 보경사(寶鏡寺) 오암 선사(鰲巖禪師, 1710-1792)의 문인, 우징(宇澄) 스님이 찬한 비명이었다. 나는 그곳을 옛 안국사터라고 잘못 생각하고 비문을 채록하고 왔다. 그러나 이번 답사 길에서 운주산 이마에 있는 옛터를 비로소 찾을 수 있었다.
안국사는 본래 신라 때 수도 금성의 북방에 우뚝 솟은 운주산에 자리하여 나라를 지키는 절로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근세까지도 안국사는 경주 고을의 이름난 절이었다. 조선 영조, 정조 임금님 때 큰 불로 당우들이 불타고, 장릉(莊陵)에 예속되어 제향(祭享)의 무거운 공역(貢役)을 부담해 왔다. 스님들과 신도들이 사찰계 조직을 가지고 신앙을 지탱하고 선방을 운영해왔다.
1906년에 일어난 산남의진의 단오(丹吾) 정용기(鄭鏞基, 1862-1907) 대장은 1907년에 안국사를 근거지로 하여 항일 의병 전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해 가을에 총수였던 동엄(東广) 정환직(鄭煥直, 1843-1907) 선생은 서울에서 동해안으로 하여 포항으로 내려왔고, 안국사에서 아들 단오 대장을 만났다. 13도 의병연합군의 서울 진공 작전에 의진이 낙동정맥(洛東正脈)을 타고 북상하여 참가하도록 독려한 것이다. 며칠 뒤에 한국독립운동사의 대혈전이었던 입암(立巖) 전투에서 단오 대장과 많은 의병들이 순국하고, 이 해에 동엄 선생도 청하 동대산에서 체포되어 영천 서세루(瑞世樓) 아래 남천(南川)에서 총살당하고 말았다. 이런 일로 일본군이 절을 초토화하고, 부도들과 비석들까지 깡그리 부수어 폐허로 만들었다. 그 불길이 칠일이나 갔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까지도 있던 관음암과 백련암, 다비장마저도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일제시기에 옛 안국사 서암(西庵)의 선방(禪房)터 아래에 허름하게 지은 암자에서 부처님께 참배하고, 간화선(看話禪) 수행을 하시는 스님을 뵈었다. 인연이 닿아 서울에서 작년에 내려와 홀로 머무시는 스님의 모습이 깨끗하여 그 수행의 깊이를 짐작하게 하였다. 스님이 권하는 맑고 그윽한 차 한 잔은 우리들의 가슴에 남은 번뇌의 티끌을 모두 내려놓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너와 나, 삶과 죽음, 흑과 백이라는 모든 대립을 넘어서는 중도의 실재 세계는 언어도단(言語道斷), 침묵의 자리임을 말씀하셨다. 큰 귀를 가지신 부처님처럼 상대의 이야기를 깊이 들을 줄 아는 반야지혜를 가지라는 법문(法門)을 해주셨다.
자리에서 일어나 스님과 법당 앞에 앉아 같이 기념사진 한 장 남겼다. 뜨락과 섬돌에는 자줏빛 달개비 꽃과 별처럼 빛나는 기린초 꽃이 엄마 따라 온 세살 박이 민정이와 어울려 앙증맞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돌확에는 샘물이 차가웠다. 나무 가지는 드리워져 동굴을 이루고, 향기로운 풀 섶에는 새빨간 뱀 딸기가 보석처럼 박혀 있다. 오솔길을 잠시 지나자 금방 드넓은 절터가 나타났다. 산봉우리 아래에 명당이 이렇게 펼쳐져 있을 줄은 산 아래에서는 짐작조차도 할 수가 없었다. 멀리 산 아래 들녘의 저수지 물빛이 빨래를 널어놓은 것처럼 하얗게 바래 보이고, 마을에는 집들이 올망졸망하였다. 시야가 탁 트여 수행자들이 머물기 좋은 곳이었다. 왜병이 불태우고 부수어 버린 절터에는 지금 산 아래 마을의 남자가 점령하고 농사짓고 있다. 가람을 갈고 씨앗 뿌려서 콩밭과 밀밭, 고추밭 사래가 길다. 무당이 세워놓은 구리 장군상도 보였다. 이곳에서 자주 굿을 한다고 한다. 장대석이 뒤집어져 있고, 주춧돌이 나뒹굴고, 신라 시기이래 근세까지의 기와와 그릇의 파편이 수도 없이 흩어져 있다. 산기슭에서는 예대로 샘물이 솟아나고, 그 아래 물을 갈무리 하던 둥근 연못 자리가 완연하였다.
문한(文翰)이 높은 집안의 서얼로 태어나 연암 박지원, 아정 이덕무 같은 한양 도성의 북학파들과 교유하였고, 문체반정(文體反正)을 단행한 정조의 총애를 받은 청성(靑城) 성대중(成大中, 1732-1812)이 쉰이 넘은 나이에 곡강(曲江)이 벌판을 적시며 흐르는 동해 바닷가 흥해(興海) 고을 원님으로 내려왔다. 그는 서른 두셋의 나이에 일본에 통신사의 서기관으로 다녀올 정도로 당대 조선을 대표하는 문장가였다. 고을살이하며 시승(詩僧)으로 이름 높던 오암 선사와 그 문인인 회관(誨寬) 스님과도 어울렸다. 여항의 시인으로 이름 높던 흥해군의 향리 농수(農叟) 최천익 (崔天翼, 1712-1779) 진사를 만나보고자 하였지만, 그가 부임했을 때 농수는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비명을 짓고 무덤 앞을 오갈 때는 말에서 내려 농수를 추모하였다. 병오년(1786) 가을날에 화마가 삼켜버린 안국사의 가람을 겨우내 눈을 치고 얼음을 깨며, 정재(淨財)를 내고 힘을 모아 신심 도타운 스님들과 신자들이 다시 세운 아름다운 일을 성대중은 중수기로 남겨놓았다.
나는 옛 사람의 글에 나오는 절터를 무슨 인연으로 오늘 찾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말없이 중생들의 괴로운 소리를 듣고 억만 겁 토록 변함없는 진리를 설법하시던 부처님 계시던 대웅전, 지옥 중생에게 지장보살님이 감로법(甘露法)을 베풀던 명부전, 사바세계에 새벽마다 저녁마다 부처님의 일승원음(一乘圓音)을 울리던 범종 걸린 종각, 새벽마다 불을 밝히고 목탁을 치며 도량을 깨우고 향 사루고 예불 올리던 스님들 머물던 요사채 자리가 상기도 뚜렷하였다. 청성 성대중 군수와도 어울렸고 조정에 천거되었던 징사(徵士), 두항거사(杜巷居士) 이수인(李樹仁, 1739-1822)을 비롯한 동도(東都) 경주 고을의 기로(耆老) 선비들이 지팡이를 짚고 올라와 시회(詩會)를 열며 닷새간 묵어갔던 발자취가 눈에 밟혔다.
우리들은 기울어진 배례석(拜禮石)이 있고 가람의 한 가운데에 자리하며 가장 큰 건물터가 있는 곳, 대웅전터로 짐작되는 자리에 멈추어 섰다. 향 한 심지 사루고 합장하고 옛 부처님과 스님들을 그리워하며 ‘반야심경(般若心經)’ 한 편 나직이 봉독하였다.
"사리푸트라여! 여여(如如)한 참된 세계에서는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때 묻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니라! ...... 너도 가고 나도 가 닿았노라! 저 해탈의 언덕에! 깨달음이여, 원만하여라! 스바하!"
독경하는 내 눈에는 또 다른 중생들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음이 보였다. 꽃뱀은 햇볕을 쬐고 앉았다가 불청객의 발걸음 소리에 놀라 법당 돌 축대 새 굴속으로 스르르 사라지고, 붉은 빛이 도는 살갗의 두꺼비는 엉금엉금 기어 돌 틈에 몸을 숨겼다. 조실(祖室) 스님 머물던 서암의 선방 터 풀 섶에는 금방 태어난 어린 고라니 새끼가 졸고 있고, 도량의 가장자리 숲에는 도마뱀과 어치와 딱따구리가 깃들어 산다. 이끼 낀 부도 탑들은 깨어지고, 빗돌은 두 동강이 나고, 법당 자리는 갈아엎어져 밭이 되고만 황량한 가람에서 나는 슬픈 감회를 숨길 수가 없었다. 두항거사도 부처님 공부 인연이 없는 속세의 자신을 한탄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이것이 이 우주의 성주괴공(成住壞空) 하는 참 모습인가. 덧없고 괴롭고 나라고 할 실체가 없는 이 세계의 유일무이한 존재 법칙인 연기(緣起) 진리를 아는 불제자인 나도 절로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것이 부처님의 무언의 설법임을 알아차릴 뿐.
왕사성(王舍城) 영취산(靈鷲山)에서 진리와 자비의 화신 관세음보살님이 설법하시는 음성이 내 가슴에도 새록새록 물결쳐왔다. 옛 스님들 독경 소리 내 두 귀에 쟁쟁히 들려왔다. 문득 이백 여 성상 앞 마흔 다섯 내 나이에 오늘처럼 녹음이 짙어오는 초여름 날, 이 절에 묵어갔던 영남의 명승, 징월(澄月, 1751-1823) 스님의 시 한 머리 떠올랐다.
宿安國寺 안국사에 묵으며
雲住千尋聳 운주산 천 길로 솟았고,
森森眼界淸 숲은 우거져 안계가 맑네.
新堂經劫火 새로 지은 당우들은 불을 겪었고,
舊釋落晨星 옛 절에는 새벽 별들이 떨어진다.
猿鶴堪同宿 원숭이와 학이 함께 잠자리에 들 만하고,
溪山却有情 계곡과 산이 몰록 정다워라.
雜花方爛熳 온갖 꽃들은 바야흐로 난만한데,
款款谷禽聲 새 소리 골짜기서 꾸욱꾸욱 들려오네.
스님을 만나 뵈올 것만 같은 감흥이 샘물처럼 일었다. 수행자들의 하안거(夏安居)가 끝나는 칠월 보름 우란분절에는 연암의 손자 박규수가 쓴 편액이 있는 팔공산(八公山) 은해사(銀海寺) 운부난야(雲浮蘭若)에 올라야겠다. 그곳에 서산대사(西山大師) 구세 법손이고, 기성당 쾌선 종사(箕城堂 快善 宗師)의 사세 제자인 스님의 진영(眞影)이 머무는 까닭이다.
****** 내가 겪은 필화(筆禍)
수필, <운주산 안국사터에서>를 써서
에이문학회 월례회 때 처음 발표하였다.
두 분의 시인이 나의 글을 비판하였다.
ㄱ시인은 '우주의 유일무이한 존재법칙인 연기'라고 하는
표현을 두고 '유일'이라는 표현을 하면 않된다고 하는 말을 하였고,
아름다운 한글 표현은 좋은데,
불교적이고 학술적이고 한자의 어려운 낱말을 쓰는 것은 수필에 어울리지 못하다며
불교 잡지에나 발표하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것은 수필 '수'자도 모르는 말씀이었다.
그러면서 스님의 시에 나오는 원숭이가 우리나라에 살지 않는 짐승이라서
현실성이 없고 자기 주체성이 없고 사대주의에 빠진 정서라고 지적하였다.
나는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지적한 말이지 않느냐, 원숭이니 학이니 하는 말은 한시의 시어일 뿐이다고 답하며
한시를 조금만 공부하면 다 알 수 있으니
한시 공부 좀 하시라고 응수를 하였다.
그만큼 유홍준의 책이 20세기 말 21세기 초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이다.
어느 교수의 표현대로 유홍준은 문화권력이고 문화전사가 되어 있다.
추사의 예술론으로 학위 논문을 쓰고 완당평전을 집필하며
추사의 문집을 원문이 아니라 번역문을 보고,
내연산 겸재 각자가 등산객의 발길에 마모된다고 잘못 말한 최완수 선생의
글을 그대로 인용하고
자신의 책 부제를
전통지리인식을 표현한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에서 가져와서
' 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라고 달아놓고서는
그 다음 책에서는
금북정맥이라고 해야 할 것을 차령산맥이라 말하고....
일인 지리학자가 식민지 지하자원 수탈을 겨냥하여 그은 산맥은
교과서 지도에서는 산줄기가 강줄기를 횡단하고 있다.
엉터리인 것이다.
앞 뒤가 맞지 않는
그런 학자의 말을 나는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정철의 가사문학에 등장하는 원숭이 휘파람이라는 말을 두고
'원숭이 정서'라고 하며 용서를 못하겠다 운운하는 것은
스스로가 얼마나 전통과 단절되고 전통에 무지한가를 폭로하는 것일 뿐이다.
전통시대에 무슨 민족주의가 있었는지?
한중일과 베트남의 한자문화권에서
창조된 한시의 시어일뿐임을 모르는 단견일 뿐이었다.
남의 인식을 그대로 자기의 인식으로 삼으면
새로운 인식과 감성을 창조하는 문학인으로서의
자격은 한참이나 미달인 것이다.
원로 수필가는 스님의 한시에 원숭이가 등장하지
나의 글에 그런 말이 나오지 않지 않느냐며 응원하고
동시에 한시 공부 좀 하라는 나의 응수를 무례하다고 타박했다.
제삼의 시인이 양쪽 말이 모두 옳다고 하며 중재를 썼다.
다시 제사의 시인이 일어나더니 내가 비문을 잘 해독한다고 응원의 발언을 하였다.
수필작품을 두고 시인들이 비판을 하길래
시인들은 시를 쓰면서 왜 문장부호는 모조리 생략하느냐며
문장의 기본부터 지키라고 요구하였다.
그리고 전통시대 한자문화권 사람들의 문학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사람들이
전통시대에 대해서도 민족주의적인 시각을 들이대며 가치평가를 하는 것은
또 하나의 사대주의일 뿐이다.
중국 대신에 미국, 유럽같은 식민지 지배 제국주의의 정신적 노예인 것이다.
회원들이 활동하는 카페에 반박하는 글을 나중에 올리니
회장이 전화하여 그 글 삭제하라고 요구하였다.
ㄴ시인은 철자법이 틀린 몇 개의 낱말을 집어내더니,
법정 스님의 <무소유>란 수필이 있듯이
불교 사상을 담은 문맥에서는 '가진다'라는 말을 쓰면 틀리니,
이 말을 써면 안된다고 하였다.
저녁밥을 먹으며 수필을 발표하게 해놓고서는
밥맛 떨어지는 언쟁이 일어날 분위기인지라
뒤에 질문한 시인에게 왜 가진다는 말을 쓰면 안되느냐고 묻지 못하고
월례회 자리는 파하였다.
한 이년 뒤에 이 글을 아무 문학지에 실을 원고로 제출하였더니,
ㄴ시인이 편집 주간 일을 하면서 아니나 다를까
여러가지로 원고 수정을 요구하였다.
문학은 언어예술인데, 작가가 문학의 재료인 언어를 구사하는데도,
'가진다'라고 하는 특정 낱말이 문장 내용에 위배된다며 이 말을 쓰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작가는 자신이 창작한 작품에 관한한 신과도 같은 불가침의 권위를 가지는데,
작품의 내용을 편집인이 수정을 요구하는 것은 무례한 짓이라고 답변을 하였다.
무엇보다도 '가진다'는 말을 쓰면 안된다고 말하는 대목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연기되어 있는 실상은 실체가 없으니 가질 것도 없고
언어로는 표현할 수도 없기 때문에 실상을 실체화하고 왜곡시키는 언어를 부정하지만,
문학은 언어예술이기에 언어를 가지고 언어를 초월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무소유를 말하기 위하여 소유라는 말을 쓸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소유(가짐)가 없으면 무소유(가지지 않음)도 없는 것이다.
작가에 대한 무례와 월권 행위는 차치하고,
언어와 불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이었다.
결국, 나의 답신 메일을 그대로 복사하여 회장에게 전하고,
회장은 나에게 나의 답신을 다시 복사하여 붙이며
인신공격식의 안하무인의 장문의 메일을 보내며
ㄴ시인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하였다.
회장에게 다시 항의의 답신을 보내고,
시비의 흙탕물에 빠지기 싫어서 그들과는 더 이상 상대하지 않았다.
결국, 나의 작품 <운주산 안국사터에서>는 이 잡지에 실리지 못했다.
회비 내고 회원으로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작품을 터무니 없는 이유로
글을 실어주지 않은 것이다.
그 후로 꼴 보기 싫어서 그 모임에 그들이 있는 한 나가지 않았다.
나중에 들으니 나의 이름이 이미 그 모임에서 삭제되고 나를 퇴출시켰다고 하였다.
삼 년 뒤에 회장인 그는 결국 그 모임의 회원 자격미달로 위치를 상실 당하는 변고가 생기며
그들은 모임에 더 이상 얼굴을 보이지 않았고
창비를 능가하는 위대한 문학잡지를 추구하던
그 잡지는 이제 사라졌다.
사필귀정이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그 모임에 나가게 되었다.
문학 모임에 종교가 충돌하고,
문학판에 명예와 부를 추구하고,
알량한 권력이 작동하고,
편들기 하고,
저녁 한 그릇도 맛있게 먹지 못하니,
일종의 언어 유희인 문학판에 역시나 말이 많은
세상사가 우스웠다.
나는 결국 이 작품을 그 다음해에 <<보리수필>>에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