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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속의 울라디보스톡★
고려인의 설움
나라없이 강제 이주
낯선 그 산하 이 곳 저 곳
바람도 매정하여라
살 만 하니 떠나라 하고
살아 보려하니 또 이방인에게
징집당해 총알받이로
전쟁터에 내 몰리고
그 황량한 벌판에도
동족을 생각하는
위대한 선각자 한 분
최재형 선생 계시었네
그냥 잠시 지나가는 여행객들아
그 무명의 조선 유랑인 생각하라
지금 배가 부르다고 마냥 웃고 떠들지만
가슴 아리는 그 동족의 恨도 기억하려므나
오랜 동족의 가슴에 서린 한
풀리지 않은 그 응어리
우,풍,한,설 다 견디고
흘러 온 세월 당쟁과 반상의 저주인가
아~~~, 러시아 황량한 벌판에 배인
발해의 유적이여 ,고려인의 한이여
쓰리고 깊게 패인 가슴속의 한
아리어 못 잊을 역사의 상처여
설움의 지난 날 k-pop으로 걷어차고
높게 비상하라, 중앙 아시에를 비추어라
새마을 노래 천하에 울려 퍼진 후광으로
세상 도처에 둘려오는 한국인의 풍요의 굉음
이곳 불라디 보스톡에
그대 혹시 오거들랑
그 아픈 동족의 한을
단 한번만이라도 생각하고 가소서
4월16~18 ㅅ 사장과 함께 불라디보스톡에 다녀왔다.
일인당 여행경비는 65만원 그리고 가이드 tip, 킹크랩 과 곰새우를 먹는 선택항목으로
90불을 추가로 지불하고 이것저것 잡비로 5만원 그리고 손자들 선물 구입비로
7만원 정도를 쓰고왔다.
세종시에서 아침 5시 공항버스를 타고 갔는데 인천 공항 제 2터미널에 도착하여 보니
아침 7시 25분이되었다. 세상이 좋아졌다. 세종시에서 두 시간반에 인천공항까지 갈 수
있게되었으니 말이다.
오래 전에 미국으로 출장을 가던 현역 시절에는 아침 일짝 떠나는 항공편을 이용하려면
하루 전날 공항 부근에 가서 호텔에서일박을 하고 아침에 공항으로 갔던 일이 두어번이나
있었는데 말이다.
일행이 12명이었는데 남자 4명, 여자 8명 , 두 부부와 지인들간에 온 사람들이 4명, 2명, 2명
이었는데,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큰 문제 없이 잘 다녀왔다. 어느 대학 교수의 강의 처럼
인간이 돈을 사용하는데 어떤 곳에다 사용할 것인가 하는 과제를 말했었다. 단지 물건을 구입하는데 돈을 사용하기보다는 추억을 구입하는데 사용하면 두고두고 그 추억을 반추하면서
살아갈 수가 있으니 훨씬 좋다고 했는데 일리가 있는 말이다.
1일차에는
.7시에 미팅 , 예정보다 20분정도 비행기 늦게 출발, 2시간 40분여 소요 거리 적당한 거리라고 생각했다. 불라디보스톡을 조망할 수 있는 독수리전망대 관란,
동방을 지배하다라는이미의 불라디보스톡은 러시아의 입장에서 동해안의 최대 항구도시라고 한다.
avanta라는 호텔은 불라디보스톡에서는 3위정도의 호텔이라고 하는데 무난한 것같았다. 이곳 저곳 돌아다니던 해외여행에 비하여 한곳에서 여장을 풀고 바쁘지않게 여유롭게 돌아다닌 것이 좋았다. 여행 경비도 싸고,
2 일차에는 버스를 타고 가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1시간여 동안 타고 ㅋ레이스키들이 강제 이주를 당할 때 타고 갔었다는 그 열차 후송 체험을 할 수 있었다. 다만 300여명의 한국인 여행객들이 서로 자리를 차지하려고 달려가서 열차를 타는 모습이 좀 꼴불견이었다. 8개이 열차칸이 어쩐일인지 4칸만 와서 서로 아귀타툼하듯이 차를 타고 많은 이들이 입석으로 1시간동안을 타고 갔다. 여행사들이 돈벌이에만 혈안이되었는지 여핵객들에 대한 배려가 아주 엉망인 것이 문제였다.
그래도 저녁에는 킹크렙가 곰새우를 먹는다고 식당에사 먹었는데 대개를 많이 먹었다.
3일차
에는 전쟁영웅들을 기리는 해밴과 잠수함을 구경하고 아무르만을 따라 나있는해안가이 길을 걸었는데 비가 오락가락하고 쌀쌀한 날씨라서 별로 흥이나지를 않았다. 일행이었던 ㅅ 사장과 함께 갔던 일행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하면서 나름 단기간의 여행을 즐기고 왔다. ㅇ틀간 아침 일찍 새벽 산책을 다녀 온 것이 오랜 추억 거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울에서 함께온 ㅅ 선생과 ㅇ 사장과의 동반 여행도 좋았고 회계사를 한다는 권사장부부와 부안에서 왔다는 아주머니4명은 친구들이라고 했다. 여행은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이 또한 즐거움이 될 수도 있다.
돗관에서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좋고 아름다운 여인들과 사랑을 나누는 것도 좋지만 인생에있어서 많은 것을 배우루수있는 가장 좋은 것이 여행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친한 사람들과 함께 여행을 통하여 더우 친해지기도 하고 어설프게 알게된 사람들이 함께 여행을 가서 본전이 다들어나서 다시는 ㅇ울리기 싫어지는 경우도 있고 아니면 여행중에 뜻밖에도 이기투합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서 여행후에도 게속되는 만남이 생긴다면 더욱 여행이 즐거움이 배가될 것이리라
길건 짧건 또는 누구와 함께 다녀온 여행이건간에 여행을 다녀오면 한동안 그
교훈이 삶속에 투영 되어 오래도록 기억할 수 가 있으니까 말이다.
이번에 다녀온 러시아의 불라디보스톡은 나에게 새로운 지식을 알게해준 귀한 기히이기도 했다.
특히 잊혀져 있던 동포 카레이스키에 관하여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우리 선조의 땅이라고 생각하는 발해의 옛 영토이기도 하고 고구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굶주리던 가난한 고려인들이 살기위해 만주 벌판으로
연해주 벌판으로 사하린으로 하나씩 둘씩 이주하여 살다가 구 쏘련시절 중앙 아시아쪽으로 강제 집단 이주를 당하였던 슬픈 역사가 있고 2차대전시절에는 쏘련의 횡포로 힘없는 종족이라 강제로 군에 징집되어 전쟁터에서 사라진 사람도 많았고 일제 시절 일제에 저항하는 독립군들을 지원하였던 최재형이란 사람의 선행에간한 이야기도 들을 수가 있었다. 고려인들이 강제로 집단 이주를 당할 때 끌려갔었다는 그 시베리아 열차의 일부 구간을 50분정도 타고 갔다가 다시 버스로 되돌아왔는데 그 황량한 벌판 어딘가에 발해의 한 부속 땅이란 곳에도 가 보았는데 벌판에 부는 바람이 싸늘한데 가슴속에는 가난을 면하려고 이주해갔던 선조들의 아픈 그날의 한이 가슴을 쓰리게 하였다.
고려인이라는 말의 기원은 1920년대로 추정될 뿐 정확한 연대는 알수 가 없었다. 19세기 극동아시아에 거주하던 고려인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高麗人 또는 고려사람이라고 한다는데 한국계 러시아 인은 옛 소비에트 연방 붕괴후 독립국가연합 전체에 거주하는 한민족을 이르는 말로
흔히 카레이스키 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데 한반도 일대를 지배하던 엣 우리나라이 고려와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고 한다. 단지 한국인과 조선인을 절충하기 위하여 고려인이라고 불리워진다고 한다. 이들 중에는 러시아,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타지스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키스탄, 우크라이나,볼도바 등이 포함된다 . 약 50여 만명에 이르는데 세부적인 자료를 첨부 해본다.
1, 고려인의 연원 및 변천
제정 러시아는 1860년 청과의 베이징 조약으로 극동 지역의 영토를 두만강 하류 유역으로 확장시키는데 성공함으로써 조선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의 국경관리는 허술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일시적 이동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고국을 떠나 영구 거주를 목적으로 타국으로 이주하고 정착하는 일인데 이것은 별개의 것이다.
조선의 신민들이 영구 거주를 목적으로 러시아령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연대에 대해서는 1863년 혹은 1864년으로 많은 논란이 있지만, 러시아 당국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시기는 1864년이다. 1864년 초 겨울에 함경도 지방 무산의 최운보와 경흥의 양응범이 이끄는 14가구 65명의 조선인들이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령 남 우수리스크 지역에 영구 거주를 목적으로 촌락(지신허)을 만들었는데 이때를 시발점으로 보고 있는 것이고, 동시에 이는 바로 우리 한인동포들의 해외이주 기원이 되었다.
1864년 9월 21일(러시아 신력 10월 3일) 조선인 거주지역을 담당하던 남우수리스크 지역의 포시에트 지구 노브고로드 경비대장인 레자노프는 상급 지휘관인 해군소장 카자케비치에게 한인들의 이주사실을 문서로 공식 보고함으로써 한인 주거지역에 관한 러시아 당국의 공식적인 승인절차가 이루어졌다. 바로 이 문서에 근거하여 러시아 당국에서는 1864년을 조선 백성들의 이주 첫 해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훗날 1914년에 이주 50주년을 기념하려고 했던 러시아 극동지방 한인들의 준비과정에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조선에서 조국을 떠나 두만강을 넘어 러시아 땅으로 이주하려는 한인들의 수는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문서자료에 의하면 1867년 1월 기준으로 185가구 999명으로 파악되었고 한인 마을도 지속적으로 형성되었다. 1877년의 자료에는 남우수리스크 지역 거주 한인이 6,142명으로 밝혀졌고 촌락만 20곳이었다.
1884년에 조선과 러시아 간의 국교가 수립되어 이때까지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은 모두 러시아 국적을 받았다. 이후 입국한 한인들은 임시거주증을 받아야 했으며 외국인으로 취급되었다.
1895년 기준 러시아의 극동 지방인 프리아무르 관구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 중 거주등록이 된 사람들은 18,400명 규모였다. 1897년 제정러시아의 전국 인구조사에 의하면 러시아 거주 한인들은 총 26,005명으로 조사되었다. 이 중에서 절대다수인 25,996명이 시베리아와 극동 지방(사할린에는 67명)에 있었고, 나머지 9명 중 2명은 유럽러시아 지방에 7명은 중앙아시아 지방에 있었다. 이러한 자료를 볼 때 20세기가 되기 전에 한인들은 극동 러시아 지역뿐만 아니라 유럽 러시아(수도인 상트 페테르부르그와 볼가강 도시인 사마라)와 중앙아시아 지역으로까지 이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00년대에도 여전히 한인들의 러시아 이주가 이루어졌고 러일전쟁 직후 러시아 극동 지역에만
34,000 여명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러시아 국적자는 절반 가량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한인 중에도 러시아 국적을 지닌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나뉘어져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북위 50도를 경계로 사할린의 남부 지역은 일본령으로 바뀌었다. 이 시기에 러시아 극동 지역은 한인 의병들의 활동과 독립군의 기지로서도 역할을 하였다. 즉 포시에트 지구에서 최재형은 최초로 의병조직을 만들었고 이범윤과 이상설은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다. 안중근 또한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을 벌였다.
1910년이 되면 러시아 극동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수는 더욱 더 증가하였다. 프리아무르 관구의 3개 행정구역(연해도, 아무르 도, 자바이칼 도)에만 52,868명의 등록된 한인들이 있었고, 5년 뒤인 1915년의 통계로는 72,600명까지 늘어났다.
1914년에 러시아는 독일과의 전쟁에 돌입하였는데 이는 러시아 거주 한인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왜냐하면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여 새로운 소비에트 체제가 형성됨으로써 다수의 한인들이 사회주의 이념을 수용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혁명 직후의 볼쉐비키 정권과 반혁명파들 간의 내전이 전개되었고 이 시기에 일본군이 러시아 극동 지방으로 침략하여 한인독립군들의 피해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1920년대 전반기에 신생공화국 소련에 거주하던 한인들은 이념적으로 사회주의자들이었고 이들이 발간했던 <선봉> 등 신문들의 기조도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내용들로 구성되었다. 소련의 한인들이 절대적으로 많이 거주하던 지역은 극동 지방이었지만 중앙아시아를 포함한 소련의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삶의 터전을 형성하고 있었다. 현재의 우수리스크 시에는 ‘조선인 사범대학’도 운영되고 있었고, 이후 포시에트와 블라디보스톡(원동 고려사범대학)에도 한인 교원의 양성을 위한 사범대학이 설립되었다.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도 지대했던 한인들은 연출가, 연극 배우들이 중심이 되어 예술단을 만들었고 마침내 1932년에는 한인극장(고려극장, 조선극장)을 설립하는데 성공하였다. 극장의 공연은 우리의 전통문학과 사회주의 혁명에 관한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다. 경제적으로는 1929년부터 스탈린의 농업집단화 정책에 의하여 한인 집단농장이 조직되어 새로운 형태의 농업경영 방식에 적응하여 유능한 농사전문가들을 배출하였는데, 20년대 중반에 조직된 협동조합을 통하여 한인들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련 최초의 인구조사(1926년)에서 한인은 총 86,999명으로 파악되었고, 대부분(85,886명)이 시베리아-극동 지방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소규모로 전국적으로 분산되어 있었다. 즉 모스크바를 비롯한 유럽러시아 지방에 926명, 우크라이나 및 백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에 106명, 중앙아시아 지역에도 81명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로 극동 지방에 밀집되었던 고려인들은 영토상의 자치지역을 얻어내려는 움직임과 소련 당국의 인위적인 이주조치 사이에서 혼란을 겪었다. 한명세는 1922년에 고려인자치구로서 포시에트 지구를 당국에 건의하였으나 1925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이를 기각하였다. 1927년에도 포시에트 고려인자치구 계획이 세워졌으나 실행되지 못 하였다. 오히려 소련 당국은 같은 해에 포시에트와 우수리스크 지역에 거주하는 토지 미보유 고려인들을 3년에 걸쳐 내륙 지방으로 이주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듬해에 폐기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1928년에는 블라디보스톡 고려인들을 하바롭스크 지역으로 이주시키는 계획이 또 다시 등장하였는데 이듬해인 1929년에 13,287명의 고려인들이 블라디보스톡에서 하바롭스크로 이주하였고, 일부는 만주나 조선으로 떠나갔다. 한편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초대받아 이주해 간 한인들도 있었다. 1928년에 오가이 P. V. 와 안병화를 비롯한 70가구 약 300명에 이르는 극동의 고려인들이 카자흐자치공화국 탈디쿠르간 군으로 벼농사 재배를 위하여 초청 이주되었다. 이들은 농업조합인 ‘카즈리스’를 조직하고 벼농사 재배에 성공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또 다시 1933년에 러시아 남부의 로스토프-나-도누의 슬라뱐스크 군에서 벼재배를 시도하였는데 이때 조직된 조합이 ‘돈리스’였다. 이것은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남부 곡창지대의 벼농사에 극동의 한인들이 투입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1930년대 소련의 국내정치적 상황은 고려인들에게 매우 불리하게 나타났다. 이 시기에 악명높은 스탈린의 정치탄압과 소수민족에 대한 억압 및 고려인들의 강제이주 조치가 실행되었던 것이다. 강제이주와 관련하여 소련 당국은 1935년 4월에 서북부 지역인 카렐리아 자치공화국의 소수 민족 1,000가구를 타지크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그리고 약 316가구를 서시베리아 지방으로 강제이주 조치하였다. 그리고 1937년 8월 21일자 스탈린의 명령으로 극동 지역에 거주하던 한인들 전원에 대하여 중앙아시아 지역으로의 전면적인 강제이주 조치를 단행하였다.
이렇게 하여 1937년 9월 21일부터 그해 말까지 약 172,000명의 소련 극동주 고려인들이 기존의 터전을 잃고 대부분은 카자흐 공화국과 우즈베크 공화국으로 집단 이주되었고, 우즈베크 공화국으로 이주된 고려인들 중 일부는 키르기즈 및 타지크 공화국으로 이주되었다. 그리고 카자흐 공화국으로 이주된 고려인들 중 일부는 러시아 공화국의 아스트라한 지역으로 이주되었다.
소련 극동주 고려인들의 강제이주가 집행되기 직전 소련 당국은 고려인지도자 2,500 여명을 체포하여 투옥시키는 정치적 탄압을 실행하였다. 정치탄압의 대상은 비단 고려인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과거 러시아 혁명에 기여한 고려인들과 지방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부당하게 체포당함으로써 기성 엘리트 고려인들의 몰락을 야기하였다. 부당한 강제이주에 대해 항거할 수 있는 고려인 지도층이 탄압받은 것은 소련 당국의 주도면밀한 계획과도 일치하는 일이었다.
강제이주 사건 이후 대다수 소련 고려인들의 생활거주지는 더 이상 극동 지역이 아니라 중앙아시아(특히 카자흐 공화국과 우즈베크 공화국) 지역으로 되었다. 중앙아시아 이주 한인들은 공화국 간 자유로운 이주도 제한받는 사실상의 특별이주민으로 취급받았다. 더구나 이 시기에 일본은 한반도와 만주를 지배하고 나아가 중국 본토를 침략함으로써 소련 당국을 안보적으로 긴장시켰다. 러시아 혁명 직후의 내전기에 일본군은 극동과 시베리아 지역을 일시적으로 점령한 바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안보적 긴장감은 극에 달하였다. 따라서 일본인과 외모가 유사한 고려인들은 소련 내에서 경계대상 소수민족으로 취급당했던 것이다.
자료에 따르면 극동에서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은 절반 이상이 농촌의 집단농장과 국영농장에 배치되었고, 나머지는 도시의 공장노동자 및 사무원 종사자로 배치되었다. 1941년에 소련과 독일 간의 전쟁이 발발하자 고려인들은 주로 후방에서 지원활동을 하는 노동군(노무부대)에 편성되어 원료 채굴과 같은 일을 도맡아 하게 되었고, 직접적인 전투참가는 금지되었다. 그러나 일부 고려인들은 현역 군인으로 참전하여 소련의 승전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국영농장과 집단농장의 구성원이었던 고려인들은 뛰어난 역량으로 인하여 점차적으로 소련 내에서 우수한 민족으로 간주되었다. 주로 벼농사와 면화농사에 치중한 고려인들의 집단농장은 전국적인 명성을 얻기도 하였으며 ‘사회주의 노동영웅’으로 훈장을 받은 고려인들도209명에 이른다.
한편 1945년에 남사할린이 소련에 재편입되면서 그곳에 잔류하던 43,000 여명의 한인들이 소련의 통치 하에 놓이게 되었는데, 이들은 주로 일본에 의하여 강제로 징용된 사람들과 그 가족이었다. 이들은 러시아어도 구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대륙의 소련 고려인들과 역사적으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고 처음에는 고국인 한국으로 귀환하려고 했던 사람들이었다.
사할린 한인들의 송환 여부문제와 함께 소련 당국에 등장한 문제는 바로 북한 정권을 지원하기 위한 소련 고려인들의 북한 파견 문제였다. 실제로 소련에 거주하던 고려인들 중 일부가 차출되어 북한에서 사회주의 정권을 유지하는데 기여하였는데, 가령 한국전쟁 정전회담 당시 북한 대표인 남일 장군은 바로 고려인이었다.
이제 소련 한인의 구성은 러시아 극동 지방으로 이주하여 생활 기반을 잡았거나 아니면 그곳에서 태어나 살았고 1937년에 강제이주를 당한 사람들 및 지리적으로 시베리아 이서 지방에 거주한 덕분에 강제이주를 당하지 않은 사람들, 이들을 이른바 ‘고려인’이라고 한다면, 일본에 의하여 강제징용된 사할린 한인 등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 볼 수 있다. 이들 모두를 크게 보면 소련(소비에트) 한인이라고 지칭할 수 있다.
스탈린 사후인 1956년부터 소련 한인들에 대한 거주이전의 자유가 보장되고 정치적 복권도 실행되면서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 남부 그리고 극동 지역으로까지 새롭게 이주하는 한인들이 증가하였다. 이미 고려인들은 김병화, 황만금 등 콜호즈(집단농장) 회장에서 보여 지듯 뛰어난 농업생산가들로 소련 사회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소련 한인들은 1988년 서울올림픽과 1990년 한·소 수교 그리고 연방해체에 따르는 새로운 국가의 성립과정의 짧은 시기에 결정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우선 소련 한인들은 ‘역사적 조국’으로 인식하던 한국에 대한 실상을 알게 되고, 한국인들과 직접적인 접촉도 하게 되었으며, 직접 한국을 방문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연방의 경우 1993년에 러시아 고려인의 복권에 대한 법령이 최고회의에서 통과됨으로써 완전한 명예회복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한인들의 협회 및 단체가 조직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과거 소련 때에는 한 국민이었지만 1992년부터는 소련이 15개 공화국으로 분리, 독립되었기 때문에 여러 국가의 국민으로 나누어지고, 그 결과 의도하지 않게 이산가족 현상이 발생하였다. 체제전환으로 인하여 경제적으로도 궁핍하게 된 한인들이 한국 언론의 조명을 받게 되면서 소련 한인들에 대한 왜곡된 인상을 남겨 주기도 하였다. 특히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러시아 연해주 지역으로 재이주해 가는 고려인들은 대개의 경우 경제적인 약자들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쨌든 소련의 와해와 함께 소련 한인은 용어부터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으니, 그들 자신이 부르는 고려사람 또는 고려인이 그것이었다. 굳이 수식어를 더 붙이면 러시아 고려인, 카자흐스탄 고려인,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등으로 불려 질 수 있을 것이다. 이들 고려인들은 앞서 언급한 대로 사할린 한인과 용어에서 차이난다.
고려인들은 혈연적, 문화적으로는 분명히 남북한 사람들과 공통적이지만 단지 언어적으로는 러시아어에 동화된 사람들이다. 물론 사할린 한인들의 새로운 세대들도 언어적으로는 러시아어를 제1언어로 한다. 그렇다면 현재 러시아어를 국어로 하지 않는 국가들에서는 어떠할까? 가령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의 고려사람들은 언어적으로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하지만 현지 주류 민족의 언어를 도외시 할 수 없다. 이 점이 바로 현재 고려인들이 안고 있는 언어문제인 것이다.
1990년대부터 이러한 언어문제 외에 고려인들에게 피할 수 없는 과제로 등장한 것은 많다. 우선 모든 민족에게 해당하지만 새로운 체제변화에 적응해야만 하는 즉 사회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체제로 바뀐 상황에서 경제적인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능력이 요구되었다. 이 과정에서 비즈니스 분야에 뛰어난 소질을 보인 고려인들이 등장하였다. 과거 소련 시기에는 농업 분야에 높은 명성을 가졌던 고려인들의 새로운 변화였다. 이러한 변화에 적응 능력이 떨어진 고려인들은 후진적 삶을 면치 못하였고 외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으로 전락하였다.
그리고 한국의 뛰어난 경제상을 목도한 고려인들은 역사적 조국으로서의 한국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같은 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느끼게 되었다. 이것은 거주 국가 고려인들의 위상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한에 대한 균형적 시각을 가진 고려인들이 많다는 것도 중요한 점이다. 그러나 한국인 사업가들과의 만남을 가지고 일부는 피고용인으로 일을 하는 과정에서 고려인과 한국인들과의 정서적 갈등 또한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고려인들이 가지는 한국과 한국인에 관한 긍정적 이미지는 청년 세대 고려인들의 한국어 배우기와 한국 유학으로 이어지고 있다.
소련의 공식 인구조사에서 나타난 한인들의 공화국별 규모인데 마지막 인구조사는 1989년에 이루어졌고 총 438,650명으로 파악되었다. 소련 한인이 가장 많은 공화국은 우즈베키스탄이었고(1989년 기준 18만 명 정도)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이 10만 명 정도의 규모로 되어 있다. 1만 명 정도의 규모로는 키르기즈스탄과 타지키스탄을 꼽을 수 있으나 그 외 나머지 국가들에서는 소규모의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구분포는 소련 붕괴 이후 각 공화국에서 있었던 일련의 정치적 변동으로 인하여 달라진다.
1940년대부터 이후 40여 년간 소련 고려인들은 농업부문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고, 농업전문가라는 편견을 얻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학자와 예술인 등 전문직에 종사하여 국가적으로 유명한 고려인들도 소련 전체적으로 많았는데, 그 이유로서 한인 부모들의 전통적으로 높았던 교육에 대한 열기가 언급되었다.
소련 고려인들은 이와 같이 경제적으로는 적응력이 뛰어났지만 언어문화적으로는 큰 변화에 봉착하게 되었다. 1937년 강제이주 이전만 하더라도 극동 지역의 고려인들은 한국어를 자유로이 구사할 수 있었고, 학교에서도 교육언어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후 1939년부터 이러한 제도는 폐기되어 전면적인 러시아어 교육이 강요되었고, 한국어는 고작 주 2~3시간 외국어로 교육될 뿐이었다. 그 결과 한국어 사용은 소련 고려인들 속에서 소홀히 되었고 자연스럽게 러시아어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구사할 수 있어야만 국가와 사회에서 안정적인 지위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여 러시아어가 고려인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제1언어로 굳어져 갔던 것이다. 1938년에 카자흐 공화국 크질오르다에서 간행된 순한글신문 <레닌기치>의 한국어 교육과 보존의 노력에도, 소련 고려들 속에서 한국어는 점차 잊혀져가는 언어로 되었던 것이다. ‘고려인’, ‘고려사람’의 정체성은 바로 이렇게 형성되었다.
고려인들의 의식주 생활문화의 특징은 한민족 전통적인 것과 현지 사회의 영향을 많이 받아 복합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음식의 경우 거의 현지 주류 민족의 영향을 받아 한국적인 것과 다소 이질적이다. 대표적으로 김치는 절인 배추와 양념 등의 부족으로 인하여 보기 힘든 메뉴이며 대신 당근을 활용한 반찬이 고려인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된장이나 고추장 등을 활용한 음식이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의복이나 주거 환경은 거의 러시아식으로 되어 있으며 농촌 마을의 고려인 가옥에서 온돌이나 마루 형태의 구조가 남아 있다. 소련 시기에 전통적 한민족 명절은 체제의 성격상 금지되었으나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이후 추석, 단오, 한식, 음력설 등이 고려인 사회에서 부흥되고 있다. 그리고 고려인들은 성씨의 본을 찾는데 매우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3. 현황
소련이 해체된 이후 러시아연방은 2002년과 2012년 두 차례에 걸쳐 공식 인구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여기서 고려인은 148,556명과 153,156명으로 집계되었다(사할린 한인 포함). 2014년에 우크라이나의 크림 지역이 러시아로 재편입됨에 따라 그곳의 고려인 약 3천명을 감안하면 모두 16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카자흐스탄의 경우는 99,665명(1999), 103,546명(2010), 키르기즈스탄의 경우는 17,299명(2009), 투르크메니스탄의 경우는 3,159명(1995) 2012년 조사는 통계 작성 중(약 1천 여명 추정)이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경우는 12,711명 (2001)이었지만 2014년 5월부터 크림자치공화국이 러시아에 재편입 되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고려인은 9천명 수준으로 추정된다.
다수의 고려인 거주국가인 우즈베키스탄의 경우는 독립 이후 한 번도 전국단위의 공식 인구조사를 실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문가들의 추정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16만 명 정도-1989년 통계치보다 2만 명 정도 감소). 타지키스탄의 경우는 독립 직후의 내전으로 인하여 기존의 1만 명 이상의 고려인들이 타 국가로 이주해 나갔기 때문에 2014년 기준으로 불과 2천여 명 수준으로 추정할 뿐이다. 에스토니아 등 기타 나머지 국가의 고려인 규모는 추정치이지만 20~200명 정도(벨라루시만 1,200명 정도)로 보고 있기 때문에 모두 합해야 2천 여명 수준이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을 감안하면 대략적인 고려인 규모는 47만 명 정도로 예상될 수 있다(2014년 기준). 고려인들 중 일부는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주해 나갔으며, 한국에 정착한 사람들도 8,358명으로 파악되었다(출입국사무소 거주등록신고자 2013.12.31. 기준). 인구조사에서 파악된 고려인 숫자는 사실 국적소지자와 선택된 민족구분을 기준으로 파악된 것이다. 고려인 혼혈의 경우 민족구분에서 러시아인이나 타 민족으로 기입하는 경우도 많다는 점도 감안되어야 한다.
고려인들은 가장 오래된 한민족 해외이주의 역사를 가진 사람들로서 비단 극동 지방뿐만 아니라 19세기 말에 이미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부에 한민족의 거주공간을 마련한 개척자들이다. 이들은 일본에 저항하여 독립운동을 선도하였고, 소련의 소수민족으로서 성공적인 삶을 구가하였다. 1937년의 정치탄압과 강제이주를 겪었던 다수의 고려인들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현지 국가에서 안정적인 터전을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소련 해체 이후 이들 고려인들은 한국에 대한 적극적인 이해와 함께 동족으로서의 자부심 또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고려인들은 남북한에 대하여 균등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하며, 동시에 한반도 통일을 위하여 이들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5, 고려인이 강제 집단 이주
가.개설
소련 인민위원회 및 공산당 중앙위원회 결정 No. 1428-326cc (1937년 8월 21일)에 따라서 극동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모든 고려인들이 카자흐 공화국 및 우즈베크 공화국 등지로 강제이주 되었다. 이유는 이 지역에서 일본의 간첩활동을 미연에 방지하는 데 있었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외모가 매우 유사하여 간첩 색출이 어렵다는 의견이 소련 지도부내에 있었고, 또한 일본은 1918년에 소련 땅을 침공한 적이 있으며, 1931년에는 이미 만주 지역을 장악하였고 1937년에는 중국 본토를 침공하였기 때문에 소련 극동 지역의 국가안보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는 점도 작용하였다. 강제이주로 인하여 고려인들의 생활기반은 극동 지역에서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전되었다.
소련 극동지역의 고려인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거주지를 재배치하려는 계획은 1937년 이전에도 여러 차례 시도되었다. 당국은 1927년에 포시에트와 우수리스크 거주 고려인들을 내륙지방으로 이주시키려고 하였고, 1928년에는 블라디보스톡 고려인들을 하바롭스크로 이주시킬 계획이 있었으나 성사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에 블라디보스톡 고려인들은 하바롭스크로 이주하였고 일부는 만주로 그리고 일부는 조선 땅으로 이주해 버렸다.
1931년에 만주 지역이 일본의 침략을 받기 시작하면서 극동 정세는 소련에 불리하게 작용하기 시작하였다. 소련 중앙정치 무대에서는 1934년의 레닌그라드 당제1서기이던 키로프의 암살 사건을 계기로 1930년대의 대숙청이 전개되었다. 숙청대상에는 소련 정권수립에 기여했던 혁명원로들도 포함되었고, 공산당 간부들도 다수 해당되었다. 이러한 정치탄압의 노선 상에 고려인 공산당 간부들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1937년 강제이주가 실행되기 직전에 극동 지역의 고려인 간부들이 당국의 보안기관에 의하여 체포되었고 그 수는 2,000~2,500명으로 짐작될 뿐 정확한 수치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1937년에 접어들면서 극동 지역의 일부 고려인들 속에서는 강제이주에 대한 소문이 돌기도 하였으나 이러한 소문은 과거에도 여러 차례 있었기 때문에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해 8월 21일에 모스크바에서 결정이 되고 9월부터 신속하게 실행되어야 하는 강제이주 집행이 실제로 이루어 질 때까지 고려인들은 평상시의 생활을 할 뿐이었다. 대략 실행 3~7일 전에 통고되고 이주열차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혼란과 어려움이 고려인 사회에서 나타났다.
소련 중앙 당국의 결정에 따라 먼저 국경 지대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이 강제이주 열차에 올랐다. 이어서 당국은 9월 28일자 ‘고려인들을 극동주에서 이주시키는 결정’(소련 인민위원회 결정 No. 1647-377cc)을 하달함으로써 극동주의 나머지 지역에 거주하던 모든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완벽하게 강제이주시키게 되었다.
소련 내무인민부 의장인 예조프의 1937년 10월 25일자 보고서에 의하면 극동주의 고려인 총 36,442가구 171,781명이 이주를 마쳤다고 하면서, 이주 고려인들은 카자흐 공화국으로 20,170가구 95,256명, 우즈베크 공화국으로 16,272가구 76,525명이 총 124편의 열차를 타고 배치되었다. 그리고 극동주의 캄차카 및 오호츠크 지역에 잔존하고 있던 700명의 특별이주 고려인들이 11월 1일부터 열차로 이주될 것이라고 하였다. 11월에는 이주 및 이주민 배치의 상황이 거의 완료되는데, 1937년 12월 5일 문서자료에 의하면, 카자흐 공화국에 20,141가구 95,427명, 우즈베크 공화국에 16,079가구 73,990명, 타지크 공화국에 13가구 89명, 키르기즈 공화국에 215가구 421명 등 총 36,448가구 169,927명의 고려인들이 배치되었다. 카자흐 공화국에 배치된 고려인들 중 500여 가구는 이듬해 초에 러시아 공화국의 아스트라한 지역으로 재이주되었다.
1937년에 단행되었던 극동 지역 고려인의 강제이주에 관한 원인으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첫 번째는 스탈린이 서명한 문서에도 적시되었듯이 극동 지역에서 있을 지도 모르는 일본 첩자의 활동을 미연에 방지하는데 있었다. 외모에서 고려인과 일본인이 서로 유사하기 때문에 일본 첩자를 가려내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극동주의 전 고려인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다는 논리이다.
두 번째는 극동주에 거주하고 있던 고려인들의 규모가 생각보다 컸고 특히 한반도와 경계를 이루었던 포시에트 군의 경우는 고려인들이 절대 다수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전에 고려인들의 자치구 요구가 비등하였고 향후에도 영토적 자치요구가 있을 것으로 본 중앙 당국에서는 미래에 있을지 모르는 이러한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할 필요성이 있었다. 1934년에 이미 극동주 지역에 유태인 자치주가 설립된 점이 참고될 만하다. 결국 1938년에 포시에트 군 공산당 지구당 제1서기였던 김 아파나시가 극동주를 소련에서 분리하기 위한 무장봉기를 획책한 혐의로 총살되었다.
세 번째는 소련에서 실시된 농업집단화 정책으로 자체 인구가 급감하게 된 카자흐 공화국 등 중앙아시아 지역에 인구를 공급하고 아울러 농업생산력 증대를 위한 노동수요가 있었고 이를 충족하기 위하여 인위적인 인구유입책이 필요하였다. 사실 극동 지역에서 카자흐 공화국으로 초청된 농업전문가들이 이미 1928년에 이주하여 활동하면서 벼농사를 성공시키고 있었다. 농업기술을 가진 극동 거주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 지역의 농업생산력 향상을 위해 적합한 민족으로 판단되었던 것이다.
강제이주 행로는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이용되었고 블라디보스톡을 비롯한 해당 지역의 역을 출발하여 노보시비리스크까지 갔고, 거기에서 남하하여 중앙아시아 방면으로 지속적으로 진행하였다. 소요 기간은 대략 30~40일 소요되었다. 열차 환경은 매우 열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편의 열차는 객차 50량, 위생객차 1량, 식당차 1량 등으로 구성되었고 대체적으로 화물 열차가 이용되었다. 객차는 이층칸으로 되어 있었고 1개의 난로가 있었는데 하나의 객차에 5~6가구(30명 정도)가 배치되었다. 열차 이동 중 노약자의 사망도 나타났고 그 인원은 554명에 이르렀다. 강제이주 과정의 실상에 관해서는 원로 고려인들의 회상을 통하여 많이 알려졌다. 한 마디로 부실한 식사와 불결한 위생상태, 식수 부족, 의료 지원의 부족 등 한 달여의 여정은 고통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카자흐 공화국의 우쉬토베는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의 첫 이주정착지로 선택된 도시였다. 1928년에 신생 공업도시로 설립된 우쉬토베에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고 이곳으로 철도가 지나가고 있었다. 현재 우쉬토베의 바쉬토베 지역에는 고려인들이 토굴을 이용한 움막을 짓고 생활했던 흔적이 있다. 강제이주의 행렬은 카자흐 공화국과 우즈베크 공화국의 여러 도시와 지방으로 연속해서 이어졌고 고려인들의 새로운 정착지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강제이주 직후 카자흐 공화국 내에서 가장 많은 고려인이 이주되었던 곳은 남카자흐스탄 주인데 8,693가구, 41,425명 (전체의 43.4%)이었다. 이곳에는 시르다리야 강이 흐르고 있어서 벼농사에 적합한 곳이었다. 다음으로 카라간다 주(12,327명), 북카자흐스탄 주(12,301명), 서카자흐스탄 주(8,986명), 악추빈스크 주(8,847명), 알마아타 주(7,622명), 쿠스타나이(3,919명) 순으로 고려인 규모가 차이를 가졌으며 전체 이주민 수는 20,141가구, 95,427명이었다. 이 자료는 1937년 12월 5일자에 작성된 것으로 10월 25일자 예조프의 보고서 내용과 다소 다르다.
고려인의 강제이주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카자흐 공화국으로 배치된 고려인들 중 500가구에 이르는 사람들이 당국의 명령으로 러시아 공화국의 스탈린 주 아스트라한 군으로 재이주되었다. 어업 콜호즈의 기반을 가지고 있던 이주 고려인들의 생활은 불안정하였는데, 무엇보다도 현지 아스트라한 군 당국과의 갈등 때문이기도 하였다. 아스트라한에 정착한 고려인들은 독일과 소련과의 전쟁이 시작된 1941년에 다시 당국의 명령으로 카자흐 공화국의 구리예프(현 아티라우)와 아크몰라로 이주되었다. 전쟁 시기에 고려인은 소련 당국이 신뢰할 수 없는 민족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우즈베크 공화국 담당자가 중앙 당국에 보고한 문서(1937년 12월 5일자)를 보면 총 16,307가구, 74,500명의 이주 고려인 규모를 알 수 있는데, 그 속에는 1929년에 우즈베크 공화국의 자치공화국에서 구성공화국으로 승격한 타지크 공화국에 13가구 89명, 그리고 1936년에 러시아공화국의 자치공화국에서 구성공화국으로 승격한 키르기즈 공화국에 215가구 421명이 포함되어 있다. 다음 표는 우즈베크, 타지크, 키르기즈 3개국에 이주된 고려인들의 통계이다.
우즈베크 공화국으로 이주된 고려인들 중 일부는 타지크 공화국(13가구 89명)과 키르기즈 공화국(215가구 421명)에 배치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콜호즈와 솝호즈 체제의 농업종사자 외에도 원면공장의 노동자와 도시 사무직으로 근무한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독일과의 전쟁이 예상되던 1940년에 소련 당국은 서북부 국경지대인 무르만스크지역에 거주하던 비러시아계 민족들을 서시베리아의 알타이 지방으로 강제이주시키는 전격적인 결정을 단행하였다(1940년 7월 23일자 소련 내무인민위원 베리야가 서명한 ‘무르만스크 시와 무르만스크 주로부터의 이주 명령’ 제00761호). 여기에는 무르만스크 거주 고려인들이 포함되었다. 문서에 의하면 독일계 소련인, 중국인, 폴란드인, 그리스인, 고려인 등 총 675가구 1,743명이 이주되었는데 그 중 정확한 고려인 수치는 파악되지 않았다(1926년 인구조사에서는 무르만스크 거주 고려인은 13명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인 1945년 가을에는 모스크바 거주 고려인들에 대한 강제이주 조치가 취해졌다. 여기에는 전쟁기간에 모스크바 주의 툴라 탄전에 노무대원으로 징집되었던 고려인들이 주 대상이었지만 여러 형태로 모스크바 지역에 거주해 왔던 사람들이 모스크바 이외의 지역으로 퇴거 조치되었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차출되었던 고려인들은 다시 해당 지역(카자흐 및 우즈베크 공화국)으로 복귀조치되었다. 문서에 의하면 1945년 2사분기 툴라 주의 탄전 관련 고려인 노무자는 1,027명이었고 같은 해 8월 기준으로는 770명 수준이었다.
이렇게 하여 고려인들의 멍에로 작용한 ‘강제이주’ 비극의 모든 상황은 종료되었다. 1953년에 스탈린이 사망함으로써 이러한 비극은 완전히 끝난 것으로 이후의 사태 전개에서 증명되었다. 흐루시초프는 1955년에 고려인의 정치적, 법적 명예회복을 선언하였고 그 결과 고려인들은 러시아인들과 동일한 대우를 받게 되었는데 대표적으로 거주이전의 완전한 자유를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강제로 이주되는 경우는 다시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스탈린 시기에는 고려인들이 극동 지방으로 재이주하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었지만, 이러한 제한 조치가 풀리게 되면서 일부 고려인들은 옛 고향으로 귀환하는 것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였다.
1937년의 고려인 강제이주 조치는 소련에서 흔히 있던 민족재배치 정책의 일환으로서 그 중심에는 스탈린이 있었다. 고려인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강제로 이주됨으로써 물적, 정신적 피해를 많이 당했던 것은 사실이다. 강력한 중앙집권력의 스탈린식 사회주의 국가에서나 가능했던 강제이주 정책은 고려인들의 생활기반이던 극동 지역의 토대를 공동체적 관점에서 볼 때 완전히 붕괴시켰다. 극동 지역에 다시 고려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937년 이후 20년이나 지나서 가능했지만 거주 인구수를 볼 때 이전과 같은 중심적 역할을 하지 못 하였다. 대신 17만여 명에 이르는 고려인이 카자흐 및 우즈베크 공화국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지역에 집중적으로 이주하게 됨으로써 유라시아 중심부 지역이 한민족의 활동무대로 되었고, 고려인들의 뛰어난 역량으로 인하여 소련 사회에서 인정받는 민족이 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37년의 대규모 고려인 강제이주는 민족적 차원의 비극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유라시아 정책과 관련되어 강력한 네트워크 구축의 중심 역할을 할 수 있는 인적 기반을 마련하였다고 평가된다.
6. 결의
한민족이나 조직의 구성원의 경우에 도 국제사회의 생존 원리와 마찬가지로 힘의 논리요 경제적인 가치의 논리이다. 만약 우리나라가 잘살게되고 정치적으로 각성이된다면 한 나라의 국민으로 잘살아가려면 국내의 국민만 돌볼 것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분산됭 살고 있는 동족에관하여서도 인식을 잘하여 더물어 잘 살아가는 동포애를 발휘하여 함께 돌보면서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고 그것이 서로 밀고 당겨주는 오늘날의 인류사회으 공동 번영을 위해 필수적일 진데 어찌된 영문인지우리나라의 정치지도자들은 거런것은 꿈도 못꾸고 집안 싸움에 온통 정열을 다 쏟아붓고 잇단 말인가. 하루속히 집안 싸움은 청산하고 포용하고 세게만방에 흩어저 살고 있는 동족들에게도 눈길을 돌리고 더불어 모든 세게인류공존번영을 위한 인류애를 발휘하여 세게지도자적 국가로 국민으로 발돋움을 해 나가기를 바라본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러시아 불라디보스톡 여행은 비록 2박3일간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나에게는 많은 것을 일깨워준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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