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명문가의 저주를 쓴 후 문득 생각난 것을 적어본다.
영섭이는 지독한 가난에서 성공하여 서울경기지역 국립대 교수가 돠었다. 나이 43세의 일이다. 용호동 빈민가 무지개 마을에서 자랐는데 아버지가 택시 운전사다. 대학교 졸업 후 첨 봤는데, 아버지는 아주 거만한 사람이었고 엄마는 엄청난 미인이었다. 잉 이건 뭐지? ....했었는데 결국 몰락한 명문가다.
5년전 10여년 만에 인천공항에서 영섭을 만났다. 서울에 기도해주러 가는 길에 문득 생각나 00대학교 교수란에서 교수실 전번으로 연락해서 돌아오는 비행기 시간 몇 시간 앞두고 만났다. 계산적인 이 놈은 결국 보니 내가 보고 싶은게 아니라 자기 아들이 안풀리니 사주를 공짜로 볼 계획이었다....자리가 사람 만든다고 참 쪼잔하고 추잡스러운 게 교수놈들이다. 교수놈들은 공짜 좋아하고 뇌물 좋아한다. 그 중 쓰레기는 성상납을 아리가또....한다.
필자가 예수님과 성모마리아 천사장 미카엘을 만난 이야기와 어떻게 기도 했는지를 말하자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몸을 부르르 떤다.
필자 :
고객이 독실한 기도교인에 아버지가 목사인데 윤지환에게 기도하는 것은 신성모독 아닐까라고 고민하던중 꿈을 꿨는데, 꿈에 사람 몸집 만한 크기의 책을 천사가 주는데 책 제목이 "시편"이었고 나는 시편에 내가 하는 기도의 답이 있다고 말하니 여호와에 대한 제사 기록이 적혀 있었다. 결국 내 기도가 구약시절 여호와에게 지내던 제사랑 같는 것을 천사가 알려준 것이다.
영섭은 갑자기 필자의 손을 두 손으로 보담으며 말한다.
영섭 :
지환아 ! 네가 하는 말 모두 진실이고 맞다. 천주교에서 죽은 자에 대한 기도 중 연옥에 있는 조상을 위한 기도는 모두 시편에서 뽑은 것이다.
그리고는 앱을 하나 보여주는데 시편 귀절로 만든 죽은자를 위한 기도문이며, 그는 평생 감추어 왔던 집안의 비밀을 이야기 한다.
< 저주받은 명문가>
이 집안은 조선조에 큰 벼슬을 한 인물들이 수두룩한 명문가이다. 영섭의 조부는 그런 집안의 장손이었고 사당에 모신 위패만 수십개이다. 그는 항상 국민학교부터 수석으로 중고등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 법학과도 수석 진학 하였다. 그리고 24세에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조선총독부 5급 서기관으로 임명된다. 일본인들도 인정한 천재다. 그 밑으로 일본인 공무원들이 수백명이다. 니뽄 반자이다.
천재인 조부는 조선은 좃됬고 끝났다. 민족의 번영은 내선일체(內鮮一體 일본과 조선은 하나다)에 있다고 확신하고, 성리학과 제사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위대한 서구문물을 계승발전 해야 하며 유럽의 종교인 카톨릭 만이 구원이라고 확신하였다. 당연히 대학교때 창씨개명을 했으니 총독부 고위직이다. 24세에 총독부 5급서기관이 되자말자 세례를 받아 카톨릭으로 바꾸고 집안을 카톨릭으로 개종 시킨다. 문중과 대판 싸움이 났고 그는 절교를 선언 하면서 나는 조센징이 아니라 니혼진이라고 외치며 사당을 불지른다. 니뽄 반자이(日本萬歲)~~~
성당에서 주기도문을 외우며 거룩한 니혼진이 된 조부님. 자손만대 일본인이자 고귀한 카톨릭으로 살 영광을 후손에게 물려주려고 했다. 그리고 그의 나이 28세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지금으로는 심근경색이겠죠? 정확히 천벌을 받았다. 조상의 사당을 불태우고 창씨개명 한지 4-5년만에 뒤졌다. 니혼진은 28세에 좆된 것이다. 구천을 헤매이는 망령이 되었다.
친일파 답게 고위직에 종손 집안이라 재산이 어마무시했던 이 집안 25세에 아들 하나 낳고 생과부가 된 조모는 재산을 정리 부산으로 내려온다. 친일파의 고향 남포동과 조선조에 왜관이 있었던 초량이다. 지금은 사라진 부산진역 맞은 편이 왜관이다. 쪽바리 본거지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남포동과 초량이다. 남편 재산으로 남포동 최고 부자중 하나로 등극한 조모님. 아들인 영섭이 아버지 교육에 혼신을 다한다. 부산대를 졸업한 아버지는 26세에 사업을 벌려 1960년대 시보레 자동차를 끌고 다녔다. 이 당시 부산에 승용차 가진 사람이 10명 정도 였던 걸로 기억한다. 남포동 최고 미녀중 하나였던 영섭 모친을 만난다. 이 당시 남포동 최고 미녀는 부산 최고다. 필자 대학때까지 부산 최고 부자와 미남 미녀들은 남포동에 있었고 호텔은 해운대 파라다이스와 조선비치였다.
1961년에 결혼한 후 6년만에 전 재산을 날린 영섭이 아버진 결국 빈민가 용호동으로 들어온다. 필자 부모가 50평대 집을 지어 용호동 들어간게 1978년으로 기억하는데 버스종점에 무지개 마을이란 빈민가와 3정거장 떨어진 필자집을 중심으로 논밭에 집들이 들어서는 중이었다. 무지개 마을 넘어 오륙도는 한센병(문둥병) 환자촌이었다. 허니 이곳에서 국민학교를 다녔다면 다들 천민 아니면 몰락한 집안들이다. 몰락한 집안 아이들이라서 그런지 부산대 진학률이 높았다. 머리 좋은 애들이 많았다.
영섭이 아버지가 거만한 운전수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20대 초반에 부산 최고 부자 중 하나였었다. 지 재산인가? 친일파 돈인데....1970년대에 운전사 수입이 좋았다. 부친은 초창기 운전사라 벌이가 좋았고 자식들을 모두 대학에 보냈다. 그런데 이 과정에 엄마의 노력이 가중된다.
* 영섭이 엄마의 헌신과 기도
시집 오자마자 몇년만에 알거지 된 남포동 미녀는 충격에 무당집들을 찾아다녔다. 수십군데를 찾으니 공통으로 나오는 말이 조상이 진노했고 그 저주라고 한다. 해결책은 굿과 제사다. 해서 그녀는 제사를 선택한다. 시댁 집안 어른들을 찾아다녀 조상들 이름을 다알내고는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다. 영섭의 말에 의하면 중학교 때까지 일주일에 2번씩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15살까지 매일 먹은게 제사밥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영섭은 빙의에 시달렸다고 한다. 초등때부터 어깨에 누군가 올라타고 있는 것 처럼 무거웠고 그래서인지 신장이 안좋다. 얼굴도 동남아 사람처럼 시커멓다. 대학교때 홀가분 해졌다고 한다. 즉 그때까지 빙의에 시달린 것이다.
항상 제 집안 사람들 죄다 얼굴이 흰데 저놈만 무슨 동남아 인간 같지 했는데, 오랜 빙의로 신장이 나빠져서 얼굴이 검었는데 30대 부터 조금씩 밝아졌지만 평생 술은 입에도 못 댄다. 쇼크로 쓰러진단다. 신장이 구제불능이다.
엄마가 일주일에 두번씩 제사를 지내자 자식들이 공부를 잘하고 남편 수입도 좋아진다. 그렇게 일년에 한두번 용한 무당을 찾아 죽은 조상들을 찾으니 나타나는 조상들이 하나 둘씩 줄어든다. 그렇게 하다가 막내아들 대학 보내면서 두달에 한 번씩 하다가 자식 모두 취직되고 영섭이 교수되자 제사를 엎었다. 더 이상 힘들어 못지낸다고....소원은 다 이루었다고....
영섭이 교수되고 제사를 엎은지 몇년후 부친이 죽었다. 조부랑 마찬가지로 심근경색이다. 66세로 추정되는데 아들 교수 되자말자 은퇴하고 자식들 직장이 있는 경기도에 온지 3년만에 죽었다. 노후를 자식들 용돈으로 편하게 보내려던 꿈은 단번에 사라졌다. 영섭은 아버지를 위해 시편의 글들로 된 죽은자를 위한 기도를 읽는다고 앱을 보여준다. 근데 이 아버지가 구천을 헤매이는데 말해주려니 눈치채고 말을 막고 화제를 돌린다. 시편을 백날 천날 읽으면 뭐하나? 연옥의 아버지를 천국에 보내야지....그럴 능력도 안되면서 용을 쓴다. 마리아 님이 우리 둘을 만나게 한 이유가 뭐겠나?
"사실 우리 아들이 공부 안된다고 힘들어 해서 너한데 사주 보라고 집사람이 부탁하는데, 그냥 안볼란다. 우리 딸은 중학교때 영국 유학가서 나이는 25세인데 아직 대학 2학년이다...."
영섭이 엄마가 제사를 접자 서서히 집안에 저주가 시작이다. 엄마 입장에서는 손자들인데 분위기가 영이다. 허나 신분세탁을 한 이 집안이 제버릇 개주겠나? 영섭도 교수 신분에 점쟁이랑 친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친일파 집안은 몰락에서 겨우 숨을 쉬게 되었지만 저주는 끝나지 않았다. 게다가 영섭이 아버지도 망령 상태다. 명문가는 여전히 바닥이다.
영섭이네 저주는 끝나지 않았다. 저주 2가 시리즈로 남았다. 영섭이 아들 딸과 조카들이다. 아들들 먼저 조지고 그 담은 딸을 치는게 저주의 법칙인데 간혹 딸부터 치는 경우도 있다. 그건 사주에서 나타난다. 영섭은 죽을 때까지 필자에게 기도 의뢰 안할 것이고 성모 마리아는 기도하라고 연결 시켜준 것이다. 난 할도리 했고 영섭이 거절했으니 그걸로 끝이다. 피차 연락 두절이다. 어리석은 교수놈들이 다 그렇지 뭔 기대를 하겠는가???
2023년 3월 7일 紫霞仙人 遊於世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