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 Q1모텔 → 김천황금성당 → 상주 신앙고백비 → 상주옥터 → 김수환추기경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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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김천황금성당
김천 지역의 천주교 전래는
유배자 혹은 박해를 피해 피난 온 신자들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김천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된 시기는 1801년 신유박해 이후로 보여 진다.
천주교 박해에 관한 정부 측 기록으로 신유박해 직후에 쓰여진 『사학징의』에는
충청도에 살던 천주교인 박춘산이 김천으로 귀양 온 사실과
부산 동래에서 현계탁이 김천 증산으로 귀양 왔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후 흥선 대원군 집권 시기인 1866년 병인박해 당시
김천에 살던 유시몬 외 5명의 천주교인이
충주 포교에 체포되어 처형된 사실도 있다.
그리고 같은 시기 경기도·충청도·경상도에서 피난 온 신자들에 의해
지금의 황점, 마구실, 장자터, 서무터, 마잠, 부상, 곤천이, 지대골[향천] 등
여러 지역에서 신자촌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중에서도 마잠 공소는 1901년에 설립된 김천본당(황금동 본당)의 근원지이다.
김천시 지좌동에 속하는 마잠마을에 천주교 신자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866년의 병인박해 이전으로 서상돈 아우구스티노의 부친인 서철순이
이 마을에서 얼마 동안 살면서 아들 서상돈 아우구스티노를 낳았다.
또한 충청도 황간의 상촌 에서 살던 권종웅 (권영조 신부의 증조부) 가정이
먼저 박해를 피해서 금릉군 대항면 대성동에 와서 얼마간 살다가
다시 병인박해(1866-1875년)를 만나서 이곳 마잠으로 피난오고 권 안드레아의 인도로
임 바오로(임동학의 선대)가 영세를 받고 그의 집안도 입교하였다.
또 마을에 별감 벼슬을 지낸 서 토마(동정녀 서 말다의 부친)와
허 요셉(도사 벼슬 지냄) 가정과 이 데레사 가정, 과부인 곽 안나와 그의 양부모도 사는 등
마잠마을은 많은 천주교인들이 몰려들어 자연스럽게 교우촌을 이룬 곳이다.
이렇게 해서 큰 교우촌으로 발전을 하자 차츰 인근의 김천 시내까지 복음이 전파되었다.
그리하여 1901년 김천 본당이 설립되기 9년 전인 1892년 12월 18일에는
마침 대구 본당의 김보록 신부를 대신해서 남은 공소의 판공성사를 주고 돌아오던
조죠 신부가 이곳 김천 장터에서 500명의 군중으로부터 봉변을 당한
유명한 김천 사건이 발생했었다.
◆ 조죠 신부와 김천 사건
「조죠 신부는 김보록 신부를 대신해서
남은 공소 판공을 위해서 각 공소를 순회하였다.
그래서 1982년 12월 18일 그 는 남은 공소 판공을 마치고 대구로 돌아가던 중
해질 무렵에 김천 시장의 상인들에게 큰 봉변을 당하고 죽을 뻔 했었다.
즉 그날은 조선 팔도에서 몰려드는 김천의 큰 장날이었다.
조죠 신부가 말을 타고 마부와 복사와 함께 김천 시장을 막 지나가는데
갑자기 상인들이 몰려들어 "양놈을 죽여라,
그놈을 짓밟아라“하는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조죠 신부 일행은 못들은 체하고 그냥 지나가려고 했었다.
그러나 모여든 군중 들 중에 김치삼이란 자가 나타나
조죠 신부가 그 까닭을 그에게 물었더니
도리어 그는 군중과 합세해서 신부에게 달려들었다.
조죠 신부가 부득이 말에서 내려 범인을 체포하려는 순간
갑자기 김치삼이 조죠 신부에게 덤벼들어 신부의 수염을 잡아 뽑았다.
조죠 신부는 맞아 죽을 것만 같은 공포감에 사로잡혀
엉겁결에 차고 있는 권총을 뽑아 들고 허공을 향해 두 발을 쏘았다.
그러자 놀란 군중들은 잠간 조용해졌다.
그러자 그 틈을 타서 조죠 신부 일행이 빠져나와 시장 맞은편 다리를 지났을 때
갑자기 김치삼을 중심으로 한 군중 500여명이 달려와서
신부 일행을 포위하고 조죠 신부에게 달려들어 남은 수염을 모조리 뽑고
발로 차고 구타하며 말, 권총, 시계 등을 모조리 빼앗았다.
그리고 복사와 마부에게도 마구 폭행을 가했다.
거의 한 시간쯤 계속되었다.
이제 조죠 신부 일행은 거의 죽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날이 어두워지고 군중들이 신부를 때리는데 약간 지쳐있자 그 틈을 타서
조죠 신부 일행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서 군중 속을 빠져나와 도망을 쳤다.
마침 다행히 500m 떨어진 곳에 교우집이 있어서
그 집에 피신해서 3일간 머물면서 상처를 치료하고 휴식을 취했다.
그리하여 간신히 목숨을 구해서 대구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이튿날 주민들로 부터 난동의 보고를 받은 김천 군수는
난처한 입장이 되어서 주범 네 명을 체포케 하고
조죠 신부로부터 빼앗은 말과 권총, 시계 등을 모두 신부에게 반환하게 했다.
한편 조죠 신부는 군수가 파견한 관리에게 범인들을 유배형에 처할 것과
선교사 보호에 관한 조약 규정을 김천 시장에게 제시하도록 약속했지만
잡힌 범인들에게 겨우 매 30대를 때리고서 이틀 만에 풀어주었다.
그동안 이 보고를 받은 대구의 로베로 김보록 신부는
경산 감사에게 두 번이나 항의하고 폭행한 범인들을 엄벌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가마를 보내어 조죠 신부를 김천에서 모셔오게 했다.
그후 범인들의 엄벌이 뜻대로 잘 되지 않자 로베르 김보록 신부는 거듭
경상 감사에게 항의하고 서울의 뮈텔 주교에게도 즉시 보고했다.
그러자 뮈텔 주교는 프랑댕 프랑스 공사에게 사건의 중재를 요청하였다.
그렇지만 모든 일들이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해 2월 23일자 중국 상해의「데일리 뉴스」신문이
조죠 신부에 관한 기사를 쓰면서
“프랑댕씨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하고 프랑스 공사를 나무랬다,
이렇듯 국제 여론까지 압력을 가하자 결국 사건은 종말을 짓게 되었다.
즉 경상 감사의 전문 보고에
“김천시에서 남상철, 김치삼, 최명천 등을 모두 엄벌에 처해서 유배하였음.
먼 곳의 어리석은 백성이 교호의 뜻을 모르고 사건을 일으킨 것은 몹시 놀라운 일.
이후 각국인의 상래시 각별히 호송할 것이고
그런 일이 없도록 시장에 게시했음” 이상이다.」
(최석우 역 Mutel 문서 230∼233까지 참조)
김천 황금 성당은 1901.5월 김성학 알렉시오 신부가 초대 주임 신부로 부임하여
현 위치 황금동(자라밭골)에 초가 한 채를 매입해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장소가 협소해 1907년 기와집을 지어 성당으로 봉헌했다.
4대 주임 김승연 아우구스띠노 신부가
1934년 붉은 벽돌조 고딕식 성당을 신축하여 1936년 축성식을 가졌다.
그 후 2000.5.27. 김천황금성당 100주년 기념으로
최경환 사베리오 신부가 새 성전을 건립하여,
김수환 추기경의 집전으로 봉헌되었다.
▼ 2000년 황금성당 100주년 기념으로 건립된 새 성전
순교자 현양비 - 병인박해 때 순교한 김천지방 순교자
유시몬과 4명의 무명순교자를 현양하는 비
이들 순교자에 대한 기록은 있으나 무덤조차 찾을 수 없기에
비를 세워 그들을 묵상하고 증거하고자 하는 염원을 담고 있다
구주보혈 진리충만 (救主寶血 眞理充滿)
구세주께서 귀하게 흘린 피로 참된 진리가 세상에 가득찼네
루르드 성모동굴 성모 마리아
2018년 성모당을 봉헌하여 대구대교구청 성모당과 영적 유대로 은총을 공유
(교구 성모당은 로마의 성모 대성전과 영적 유대)
로마 성모 대성당 ~ 대구교구 성모당 ~ 김천황금성당 성모당
▼ 구 황금성당
붉은 벽돌로 지은 구 고딕식 성전은 1936년 축성식을 가졌다.
20. 상주 신앙 고백비
경북 상주시 청리면 일대에는
옛날 박해시대부터 많은 교우촌이 형성돼 있었다.
이곳 석간산(石壇山) 아래 현재의 청리면 삼괴2리 안골짝의
커다란 바위에는 자신의 신앙을 명백히 하기 위한 한국 교회 유일의
신앙 고백비가 서 있어 지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상주군에는 1785년 을사 추조 적발 사건 당시 문중의 박해로
서울서 낙향한 서광수 (徐光修) 에 의해 처음 복음이 전파된 후
많은 사람들이 입교해 천주교를 믿어 1801년 신유박해를 비롯해
1827년 정해박해 등 역대 박해 때마다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
특히 신앙 고백비가 서 있는 청리면 삼괴2리 부락에는
1866년 병인박해 전부터 김해(金海) 김씨 집안
김복운(金福云)의 아들 4형제가 열심히 천주교를 믿어 온 것으로 전해진다.
그중 차남인 삼록(三錄, 도미니코, 1843-1932년) 은
특히 신앙이 돈독해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이 신앙 고백비가 공식적인 교회 사적으로 고증된 것은
이제 겨우 38년을 넘어섰다.
김삼록은 신앙 고백비를 세운 뒤 교난을 피하기 위해
고백비 앞에 포플러나무, 미루나무 등을 많이 심어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도록 가려 두었다.
그 뒤 1945년 해방이 되자 그의 손자인 김순경(당시 79세)이
나무들을 베어 냄으로써 비로소 신앙 고백비 앞이 훤하게 트이게 되었다.
1982년 당시 상주 서문동 본당 이성길 신부가
우연히 김순경의 둘째아들을 만나 신앙 고백비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됨으로써 교회 안에 처음 알려지게 되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984년 오기선 신부의 답사와 함께
신앙 고백비에 대한 확실한 고증이 이루어지게 됐다.
바위 위에서 의젓한 모습으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 고백비에는
천주님과 교황, 주교, 신부, 교우를 위한 기도가 새겨져 있다.
天主聖敎會 聖號十字嘉 천주 성교회 성호 십자가 (十字嘉는 十字架의 오자)
第一 天主恐衛咸 첫째는 천주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모신다
第二 敎化皇衛咸 둘째는 교황님을 받들어 모신다
第三 主敎衛咸 셋째는 주교님을 받들어 모신다
第四 神夫衛咸 넷째는 신부님을 받들어 모신다 (神夫는 神父의 오자)
第五 敎于衛咸 다섯째는 신자들(교우)을 받들어 모신다 (敎于는 敎友의 오자)
奉敎人 金道明告 (천주)교인 김 도명고(도미니코)
癸卯生本(古)盆城(今 · 金海) 계묘년(1843)에 출생, 본관은 분성(김해) 金氏
* 고백비의 역사적 유래 *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다른 형제들은 모두 박해의 서슬이 두려워 신앙을 버렸으나
김삼록은 끝까지 천주교를 믿어 하릴없는 도피 생활을 해야만 했다.
다행히 박해의 악랄한 손길을 피해 목숨을 구한 그는
1866년 한불 수호 조약으로 공식적인 박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894년부터 1900년 초 그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기 위한 표징을
단단한 바위 위에 새겼다.
자신과 집안의 문중이 살고 있던 석단산(石壇山) 아래 높이 127센티미터,
폭 39cm, 두께 22cm, 두께 22cm의 신앙고백비(信仰告白碑)를 건립한 것이다.
아침 6시 40분 김천을 출발 7시 15분경 신앙고백비 성지 주차장에 도착했다.
나는 먼저 고백비로 올라가서 둘러보고 사진을 찍고 있는데
조금 아래에서 자매들 이야기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았다.
내 뒤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형제님 한 분과 아내와 다른 자매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주 친한 사람을 만난 듯 반갑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분이 나중에 이야기 할 루시아 자매님이었다.
천사를 만난 것이다.
루시아 자매와 진요셉 형제 부부는 매주 토요일마다
성지순례를 하고 있다고 한다.
21. 상주옥터
상주에 있는 옥터성지는
안동교구 첫번째 복자인 박상근 마티아 (1837~1867)가 순교한 감옥터다.
1867년 1월 이곳 상주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한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상주, 문경, 보은, 충북 영동, 제천지역에서 체포되었던 천주교 신자들이
이 옥에 갇혀 문초를 받거나 치명 순교하였는데,
상주 옥은 일제강점기인 1912년 성첩, 문루와 함께 헐린 것으로 보인다 한다.
박상근 마티아는 2014년 8월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으로부터 복자로 시복되었다.
성지를 둘러보고 주차장으로 오다가 떡집을 발견했다.
아침 식사를 하지 못했기에 떡을 샀다(17,000원).
방금 만든 떡이라 맛있어서 운전하면서 요기를 했다.
그리고 이날 산 떡은 다음 날까지 간식으로 사용했다.
첫댓글 9박 10일간의 2차 순례여행을 마치고 어제 집에 돌아왔습니다.
이번 여행도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기도해주시고 응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 전합니다.
스테파노 형제님~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하는데 수고하셨습니다~🙇🏻♀️
주님 보시기 참 좋은 성지순례하셨습니다.
형제 님의 수고로 즐감합니다~🙇🏻♀️
편히 푹 쉬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