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견이 후원자였던 안평대군으로부터 꿈꾼 내용을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고 3일 만에 완성한 ‘몽유도원도’.
일본화로 불리는 우키요에 중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카츠시카 호쿠사이의 ‘파도 뒤로 보이는 후지산’.
최북의‘사계산수화첩’에 들어 있는 작품으로 유종원의 ‘강설’을 화제로 삼았다. ‘강설’은 조선시대 많은 화가의 산수화의 주요한 주제로 통했다.
전준엽이 만난 한국의 美感 (3) 산수화 어떻게 읽을 것인가
풍경·사상 등 녹여낸 산수화
日帝가 ‘동양화’용어로 말살
안평대군 꿈 담은 몽유도원도
조선회화史 첫장 장식한 걸작
커다란 비단에 섬세하게 표현
왼쪽 4분의1은 현실을 그리고
나머지는 환상적 분위기 가득
당시 ‘우측 → 좌측’ 구도 깨고
왼쪽부터 펼쳐지는 파격 시도
천산조비절(千山鳥飛絶)
만경인종멸(萬徑人踪滅)
고주사립옹(孤舟蓑笠翁)
독조한강설(獨釣寒江雪)
온 산에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하 많은 길 사람 자취 끊긴 지 오래
외로운 배 도롱이에 삿갓 쓴 늙은이
혼자서 낚시질 추운 강엔 눈만 내리네
겨울 경치가 눈앞에 그려지는 ‘강설(降雪)’이다. 단순히 풍경을 읊은 시일까. 한시의 명작 반열에 오른 이 시를 쓴 이는 당나라 때 관리를 지낸 유종원이다.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힐 정도로 중국 문학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개혁 정치에 힘을 보태다 지방 한직으로 좌천돼 생을 마쳤다. 그런 심정을 겨울 경치에 담았다. 사람은커녕 새조차 찾지 않는 외로운 신세가 된 자신의 처지를 눈 내리는 찬 강에서 비루한 몰골로 낚시하는 늙은이로 그렸다. 한겨울 언 강에선 고기조차 잡힐 리 없겠지.
한시는 이처럼 서정적 풍경에다 심지 깊은 생각을 담는다. 산수화 역시 그렇다. 산과 물을 그린 그림이니 풍경화인 셈이다. 우리 전통 회화에서도 산수화는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산수화 대부분은 뜻을 품고 있다. 어떤 뜻일까. 그것은 정치적 신념이거나 선현의 사상, 자연의 위대함이나 이치, 자연 친화적 인생관 또는 사랑 같은 것이다.
이런 그림을 우리는 ‘동양화’로 부른다. 당나라 때 정립된 이 회화 양식을 중국에서는 국화(나라 그림)라고 부른다. 자기네가 만들었으니 이렇게 칭하는 것도 당연하리라. 이런 회화 양식이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왔는지는 확실치가 않다. 현재 전해 오는 것은 고려 말의 그림부터다. 그리고 조선조를 지나면서 독자적인 우리 그림으로 발전했다. 당시엔 ‘동양화’라는 말이 없었다. 재료에 따라 ‘수묵’ ‘채색’으로, 그림 주제로 나누어 ‘산수’ ‘영모’ ‘화훼’ 등으로 불렀다.
우리나라와 중국으로부터 이 양식을 받아들인 일본도 ‘수묵’ ‘채색’ 등으로 불렀고, 에도시대에 이르러 통속적인 주제를 독창적인 양식으로 담은 일본적 성격의 회화로 만들었다. 뜬구름 같은 세상일을 다룬 그림이라는 뜻으로 ‘우키요에(浮世繪)’로 부르고 있다. 우키요에는 19세기 서양에 일본풍을 불러일으켰고, 인상주의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정도로 독창적인 회화 양식으로 주목받았다. 일본의 정체성을 독자적 양식으로 나타낸 그림이니 일본화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고 서구에서 들여온 회화는 유화나 수채화 등 재료에 따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동양화는 동양의 회화라는 말이다. 중국과 인도를 중심으로 아시아 전체를 동양이라 부르니까, 동양화는 국적이 불분명한 아시아 전체의 그림을 지칭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이런 말이 우리 그림에 붙었을까.
이 말은 일본이 우리 문화와 정신을 말살하려는 일제강점기의 문화 정책에 따라 붙여준 것이다. 서양에서 들어온 회화를 ‘서양화’라 하고 그에 대응하는 의미로 지어낸 용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미술은 고유한 국가의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는 억지가 담겨 있는 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일본은 우리를 영원한 속국으로 지배하겠다는 속내를 동양화라는 이름 속에 숨기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수치스러운 이름을 우리는 아무 거리낌 없이 여전히 쓰고 있다.
그러면 우리 스스로 동양의 그림이라고 부르는 우리 그림에서 인문적 미감의 진수를 찾아보자. 조선 회화사 첫 장을 장식하는 걸작은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1447년 작)다. 이 그림은 중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독창적인 미감과 구성 그리고 당대의 시대정신을 담고 있는 명품이다. 주제도 혁신적이다. 꿈을 그렸기 때문이다.
꿈을 그린 그림. 그것은 현실 밖의 세계다. 현실을 뛰어넘는 세상을 그리는 것을 초현실주의 회화라고 하는데, 20세기 서양미술사에 등장한 흐름이다. 꿈을 그려 유명해진 초현실주의 화가로는 스페인의 살바도르 달리가 꼽힌다.
조선 초기 최고 화가로 불리는 안견은 후원자였던 안평대군으로부터 꿈꾼 내용을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고 3일 만에 ‘몽유도원도’를 완성했다. 어떤 꿈이었을까. 기록을 따져 간단히 정리해 보니 이렇다.
‘안평대군이 벗들과 어울려 복숭아꽃이 떠내려오는 물길을 거슬러 오르니 험한 산과 구릉이 이어졌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고산준령을 넘어서자 복숭아꽃 만발한 아늑한 동네가 펼쳐졌다. 그곳에는 사람이 없고, 빈 배만 있었다.’
꿈속에서 무릉도원을 본 것이다. 안평은 진짜 이런 꿈을 꾸었을까.
도원은 어디일까. ‘복숭아꽃이 흘러 내려오는 곳’이라는 육조시대 도연명의 ‘도화원기’에서 나온 말이다. 내용이 안평의 꿈과 겹친다. 한 어부가 복숭아꽃이 흘러 내려오는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다 산속에 숨어 있는 무릉도원을 만났다는 이야기다.
안견은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섬세하게 표현하려고 비단에 그렸는데, 당시로서는 만만치 않은 크기(38.7×106.5㎝)였다. 이 그림은 구성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현실 세계와 비현실 세계를 함께 그려 넣은 안견의 아이디어가 놀랍다. 그림은 왼쪽 4분의 1이 현실이고 나머지는 비현실이다. 현실 세계를 매우 사실적으로 그린 데 비해, 비현실 부분은 과장과 왜곡을 섞어 환상적 분위기를 한껏 살렸다. 현실의 풍경은 안견이 살던 당시의 경치를 그대로 그려낸 듯하다. 산의 생김새도 얌전하고 나무의 놓임이나 길의 움직임, 강의 흐름 또한 상식에 맞는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보통 사람의 눈높이에서 바라본 경치다.(平遠視)
평범한 현실 풍경에서 시작된 길은 비현실 세계로 들어서면서 고산준령과 기암절벽을 만난다. 과장된 산세는 짙은 명암의 대비 탓에 움직이는 듯 보인다. 솟구치듯 불쑥 솟은 절벽과 괴기스러운 바위는 쏟아질 듯하다. 마치 산이나 절벽 아래에 다가서서 위를 올려다보는 형국이다.(高遠視)
감히 다다를 수 없는 까마득히 높은 절벽을 울타리처럼 두르고 화사한 꽃으로 치장한 복숭아나무 숲이 펼쳐진다. 안평이 꿈속에서 놀았다는 무릉도원이다. 무릉도원은 부드러운 구름 속에 잠겨 있다. 험준한 산세 가운데 놓인 탓에 한결 도드라져 보인다. 복숭아나무는 비상식적으로 크고, 위에서 지그시 내려다보는 것처럼 그려서인지 아늑하고 편안해 보인다.(沈遠視) 말 그대로 유토피아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복숭아나무 정원이다.
이 그림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선이 흘러가는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라 내용이 펼쳐지는 구성을 택했다. 가로쓰기 문화에 익숙한 오늘 우리 눈에는 편안한 전개지만 당시엔 파격이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시선을 유도하던 당시의 일반적인 구성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과감한 시도를 한 셈이다.
걸작이 나오자 안평을 따르던 많은 문인사대부가 찬사를 덧붙였는데 자그마치 스물한 명이 감상평을 내놓았다. 이 중에는 수양과 대립했던 김종서, 성삼문, 신숙주 등 당대 정치적 흐름의 중심에 섰던 인물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평가의 줄거리는 대략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현실적 해석으로 조선 건국의 당위성과 번영을 염원하는 시대정신을 반영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상상적 분석인데, 권력의 핵심에 있던 관료들이 느껴야 했던 인생과 벼슬에 대한 허망함을 낭만적으로 풀어낸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이상향을 꿈꾼다. 그 꿈은 모두가 다를 게다. 이의 상징이 무릉도원 혹은 유토피아다. 많은 이가 꿈을 이루려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자신의 무릉도원에 도달하지 못한다.
‘몽유도원도’가 담고 있는 세계는 ‘이상향을 향한 역경의 행로’쯤 될 것이다. 그래서 이 그림은 태어난 지 570년이 지난 오늘에도 유효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러면 안평이 꿈꿨던 무릉도원은 어디였을까. 세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형 수양대군(세조)과 대립하다 희생당한 비운의 왕자. 풍류로 가렸던 정치적 야심이 그것은 아니었을까.
조선 회화를 여는 대문 격인 이 귀중한 그림을 안타깝게도 우리는 보지 못한다. 일본이 중요문화재로 지정해 놓고 노출을 꺼리기 때문이다. 어떻게 일본으로 넘어갔는지는 명확하게 알 길이 없다. 가고시마(鹿兒島) 출신 시마즈 히사요시라는 이가 가장 오래 소장했는데, 임진왜란 참전 장수의 후손으로 알려져 난리 중에 약탈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할 뿐, 뒷받침할 만한 자료는 없다.
이후 여러 사람의 손을 타다가 1955년 덴리(天理)대 중앙도서관에 소장됐다. ‘몽유도원도’의 가치를 알아보기 시작한 우리나라의 환수 움직임을 피하기 위해 개인 소장가가 기증해 버렸다는 것이다. 이 그림은 두 번 고국 나들이를 했다. 1950년 일본의 개인 소장가가 우리 미술계에 매물로 내놓았는데, 구매자가 없어서 되돌아갔다. 공식 귀국은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요청해 특별전 형식으로 10일간 전시됐는데, 대여 형식이었다.
한국 회화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이 그림은 반드시 우리가 환수해야만 하는 예술 유산이다. 그러나 불법 반출 증거가 없어 현실적으로 돌려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일본이 통 크게 돌려준다면 모를까.
전준엽 화가·미술저술가 /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