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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8일 오늘의 역사
2022년 한국 방송계 거물 송해 사망
1927년 황해도 재령군에서 출생했으며, 본관은 여산이다. 1949년에 평양 국립음악학교(현재의 김원균명칭 음악종합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졸업 발표회에서 노래를 시작했다. 1950년 6월 25일(당시 23세) 한국 전쟁으로 인해 월남하여 대한민국 국군에서 통신병으로 복무했으며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의 통신문을 모스 부호로 전송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1955년 창공악극단에서 가수로 정식 데뷔했으며, 1963년 영화 《YMS 504의 수병》에서 단역으로 영화 배우로 데뷔했다. '송해'(宋海)라는 예명은 월남 과정에서 타고 있던 선박 안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넓은 바다와 같은 세상을 품겠다는 마음을 갖고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가수로서의 대표곡은 《나팔꽃 인생》, 《신명나는 세상》, 《유랑청춘》, 《내 인생 딩동댕》 등이 있으며 개그맨 서인석과 함께 《꽃청춘》을 함께 부를 예정이었으나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무산되자 서인석 단독으로 변경됐다.
송해는 다양한 예능을 가져야 하는 악극단의 특징 덕분에 만능 연예인으로 자라 여러 무대 및 방송에 출연했고, 1988년 5월부터 한국방송공사(KBS) 《전국노래자랑》을 30년 동안 진행하였다. 또한 그는 전국노래자랑을 무대에 서기 힘들 때까지 진행하겠다고 선언하였으나 2022년 6월 8일 향년 95세로 별세하였다. 고인의 유해는 고인의 아내와 아들의 묘가 있는, 송해기념관 인근 대구광역시 옥포읍 기세리 546에 안장되었다.
2021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10쌍둥이 출산
남아프리카공화국 가우텡주의 고시아메 타마라 시톨레(37)는 임신 29주차에 프리토리아의 한 병원에서 제왕절개로 10명(7남3녀)의 쌍둥이를 낳았다. 지난달 서아프리카 말리 여성이 아홉 쌍둥이를 낳은 지 한 달 여만이다.
이미 6살짜리 쌍둥이를 둔 시톨레 부부는 불임 치료를 받은 적이 없으며, 자연 임신으로 열 쌍둥이를 얻었다.
산모는 애초 여섯 쌍둥이를 임신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올해 초 정밀 검사에서 두 명의 아기가 더 확인됐다. 그녀는 “많아봤자 세쌍둥이 정도겠지 했는데, 여덟 쌍둥이라더라. 믿을 수가 없었다. 아기들이 잘못되면 어쩌나 두려워 잠을 설쳤다”고 설명했다. 더욱 놀랄만한 일은 제왕절개 수술 도중 벌어졌다. 여덟 쌍둥이도 기절할 일인데, 아기 두 명이 추가로 발견된 것이다.
2017년 빅뱅 지드래곤 4년 만에 솔로앨범 ‘권지용’ 발매, 12시간 만에 39개국 아이튠즈 앨범 차트 1위 차지
2016년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한규협‧최정명 고공농성(국가인권위 건물 광고탑) 363일 만에 내려옴
2015년 통 대통령·굽타 박사 ‘선학평화상’ 첫 수상자로
국내 최다 상금인 100만달러(약 11억원)를 주는 ‘선학평화상’ 제1회 수상자로 아노테 통(63) 키리바시 대통령과 인도의 모다두구 비제이 굽타(76) 박사가 선정됐다.
이 상은 2012년 타계한 문선명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총재의 사상을 알리기 위해 부인 한학자 여사가 제안했으며, 선학평화상위원회(위원장 홍일식)가 선정했다. 시상식은 8월 28일 서울에서 가졌다.
위원회는 8일 미 워싱턴DC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아노테 통 대통령은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국제사회에 공론화한 공을, 굽타 박사는 동남아 빈민구제와 식량 해결에 앞장선 점을 높게 평가했다”고 밝혔다.
태평양 섬나라 키리바시의 통 대통령은 온난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으로 2050년이면 바다에 가라앉을 위기에 놓인 자국 상황을 세계에 알려 환경변화에 대한 세계적 해결책 모색을 주도해왔으며, 노벨평화상 후보로도 거론됐다.
굽타 박사는 물고기 양식 기술로 ‘청색혁명’을 주도하고 동남아·아프리카 빈곤층에 가르쳐 자활을 도왔다.
2015년 이윤자 주부교실 중앙회 명예회장 별세
이윤자(87) 전국주부교실 중앙회 명예회장은 전국주부교실 중앙회장(1977 ~2011), 11·13대 국회의원, 소비자단체협의회장을 지냈다. 호주제 폐지를 위한 민법 개정, 영유아보육법 및 남녀고용평등법 제정에 앞장서 여성 권익 신장을 위해 노력했다.
35년간 전국주부교실 중앙회장으로 일하면서 시대별로 제기됐던 다양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섰다.
1970년대에는 건전한 소비 진작 캠페인을 전개했고, 80년대에는 외채 줄이기 국민운동과 우리 상품 품질 개선 운동을 벌였으며, 97년 IMF 외환 위기를 맞아서는 금 모으기 시민운동을 주도했다. 결혼 후 재교육 기회를 갖지 못한 여성들을 위해 6개월 과정의 주부대학 프로그램을 마련해 수료생 약 1만명을 배출했다.
2013년 버락 오바마 미대통령-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첫 정상회담
2009년 가봉의 오마르 봉고 대통령 사망
세계 최장기 집권자인 오마르 봉고 가봉 대통령이 2009년 6월 8일(현지시간) 스페인 병원에서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향년 73세.
봉고 대통령의 사망함에 따라 로즈 프란신 로곰베 상원의장의 대통령 직무대행 체제 속에 보궐선거를 치르게 될 전망이며, 봉고 대통령의 아들인 알리 벤 봉고 국방장관이 후계자 물망에 오르고 있다.
오마르 봉고 대통령은 지난 1967년 11월 부통령 재직 중 레온 음바 당시 대통령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산유국 가봉을 42년간 통치했다. 그는 집권 도중 쿠데타 미수사건과 반정부 유혈시위 등의 정치적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야당과의 타협을 통해 사실상 종신 대통령으로 군림해 왔다.
2009년 시각장애 피아니스트 쓰지 노부유키, 반 클라이번 국제콩쿠르 공동우승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일본의 스무 살 피아니스트 쓰지 노부유키(20)가 미국 텍사스주의 포트워스에서 폐막한 반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에서 공동 우승을 차지했다. 1962년 시작돼 13회를 맞은 이 콩쿠르는 4년마다 열리며 미국 최고의 피아노 경연대회로 꼽힌다. 시각 장애 연주자가 이 콩쿠르 본선에 진출한 것은 1973년 주디스 워커(Walker)가 마지막이었지만 그는 당시 2차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6일 결선에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협연 하였고 다음 날 결선 리사이틀에서도 그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열정’ 2악장에서 단순하고 소박한 선율로 출발해서 서서히 감동을 전파시켰다.
쓰지는 4세 때 어머니가 건네준 쇼팽의 폴로네즈 음반을 듣고 장난감 피아노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7세 때 일본 시각 장애 학생 콩쿠르에서 입상했고, 12세에는 도쿄 산토리홀에서 독주회를 가졌다. 2007년 일본의 에이벡스(AVEX)음반사에서 두 장의 음반을 발표했으며, 음반사의 권유로 이번 콩쿠르에 출전했다. 이번 반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에서는 중국의 19세 피아니스트 장 하오첸이 쓰지와 함께 공동 우승을 차지했으며, 한국의 손열음(23)이 2위와 최고 실내악 연주상을 수상했다.
2004년 130년 만의 우주쇼, 금성 ‘미니 일식’
금성의 ‘미니 일식’. 우리나라에서 130년 만에 금성이 태양을 지나가는 우주쇼가 펼쳐진다. 한국천문연구원은 2004년 6월8일 오는 8일 오후 2시12분부터 금성이 태양 앞면을 가로질러 통과한다”고 밝혔다. 달이 태양을 가려 태양의 일부가 검게 변하는 일식과 같은 원리이지만, 금성의 크기가 워낙 작아 작은 점이 태양 표면을 지나가는 ‘미니 일식’이다
천문연 김봉균 박사는 “금성의 겉보기 크기는 태양의 약 32분의 1로, 플로피 디스켓 속의 필름과 같이 태양빛을 차단할 수 있는 필터를 이용하면 태양에 작은 점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금성의 미니 일식은 태양과 금성, 지구가 일직선이 되기 때문에 발생한다.
금성은 584일마다 태양과 지구 사이에 위치하지만, 실제로 미니 일식은 약 243년에 4번 정도 일어나는 희귀한 현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874년 12월 9일 이후 130년 만에 처음 일어나는 현상이다.
2003년 고대 이집트 ‘미(美)의 화신’ 네페르티티 왕비 미라 발견
고대 이집트 제18왕조의 왕 아크나톤(재위 BC 1379~1362)의 왕비 네페르티티의 미라가 영국 연구팀에 의해 확인됐다 영국 요크대 고고학 연구팀은 ‘왕가의 계곡’의 무덤지대에서 1898년 프랑스팀이 발굴한 3구의 미라 중 하나가 네페르티티의 미라임을 확신하고 있다고 전했다. 연구팀은 이 미라의 가발조각과 귀의 구멍 등을 단서로 12년간 연구한 끝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 연구팀은 또 이 미라에서 파라오나 왕비에게만 볼 수 있는 부러진 팔을 발견했다.
연구팀의 조안 플레처(Fletcher) 교수는 “엄청난 권력을 휘둘렀던 18왕조의 왕족 여성의 미라”라며 “네페르티티임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이 미라는 발굴 당시 심하게 훼손된 상태여서 ‘젊은 여인’이라 불리며 별 관심을 끌지 못했고, 1907년 이집트 박물관의 한 방에 방치되기 전 딱 한번 사진으로 촬영된 바 있다.
플레처 교수는 이 미라의 사진이 독일 베를린의 달렘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네페르티티의 흉상(사진)과 닮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연구를 시작했다. 아크나톤 통치시 수도였던 아마르나에서 1914년 발견된 네페르티티의 석회석 채색 흉상은 긴 목과 올라붙은 광대뼈, 가냘픈 코를 가진 미인의 모습을 실증하고 있다.
‘미인이 왔다’는 뜻의 네페르티티 왕비는 이집트 귀족 출신으로 다신교를 버리고 태양신 ‘아톤’을 유일신으로 숭배한 파라오 아크나톤의 부인이 됐다. 당시 아톤의 제례를 주관하는 등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2001년 일본의 30대 정신병 환자, 초등학교서 난동을 부려 학생 8명 사망
2001년 6월 8일 일본 오사카의 한 초등학교에 약물을 먹고 환각상태에 빠진 오사카교대 부속 이케다 초등학교에 전직 시청직원이었던 다쿠마 마모루(37)가 침입, 흉기를 닥치는 대로 휘둘러 학생 8명이 숨지고 15명(교사 3명 포함)이 중·경상을 입는 엽기적 사건이 발생했다. 승용차로 학교 담 바로 앞에까지 접근한 범인은 1층 교실 창문으로 침입, 길이 30cm의 흉기를 휘두르며 칠판에 가까운 앞쪽 자리에서부터 차례로 아이들을 찔렀다. 1층의 3개 교실을 옮겨 다니며 약 15분간 난동을 부리던 범인은 교사 2명에게 붙잡혀 경찰에 넘겨졌다. 그러나 경찰조사결과 범인은 처벌을 피하기 위해 정신이상자 행세를 했고, 가족들을 망신주기 위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2000년 불교 조계종 원로회의장 탄성 스님 입적
불교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탄성 스님(70)이 2000년 6월 8일 충북 괴산 공림사 감인선원에서 참선 중 입적했다. 탄성 스님은 청계사-법주사 주지를 역임했고 지난 1994년 불교개혁 때 개혁회의 상임위원장 겸 총무원장을 맡았다.
탄성 스님은 1945년 3월 계룡산 갑사에서 금오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세상을 떠난 월산 전 불국사조실과 월주 전 총무원장, 월탄 전 법주사주지, 설조 전 불국사주지 등이 그와 절 집안 형제로 조계종의 대표적인 문중 중 하나이다. 탄성 스님은 지난 1981년 폐사나 다름없던 괴산 공림사에 선원을 재건한 후 주로 이곳에 머물며 수행에 몰두했다. 그는 1997년 조계종 원로의원이 됐으며 1999년 혜암 원로회의의장이 종정으로 추대되자 그 후임으로 선임됐다.
1997년 시인 박재삼씨 별세
`20세기 한국의 마지막 서정시인`이라 해도 결코 지나친 찬사가 아닐 서정의 시인이었던 시인 박재삼씨가 근 30년의 투병생활 끝에 1997년 6월 8일 새벽, 향년 64세로 별세했다.
1933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시인은 4살부터 스무살 무렵까지 삼천포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광주리 이고 멍게장사를 하고 아버지는 지게 지고 노동했다. 고려대 국문과 중퇴 후 신문 등에 바둑관전평을 쓰는 일 말고는 평생을 다른 직업 갖는 일 없이 살았던 이 자유인에게 대신 가혹한 가난과 병마가 덮친 것은 35세였다. 고혈압으로 처음 쓰러진 후 그는 임종시까지 만성 신부전증과 심근경색, 창으로 투병해왔다.
1955년 `현대문학`에 시 `섭리` `정적`으로 등단한 박씨는 우리 민족의 근원적 정서를 담은 `천년의 바람` 등 모두 15권의 시집을 갖고 있다. 박재삼 시인의 타계소식을 들은 문단인사들은 "문단의 든든한 어른이자 후배시인들의 귀감이었다"며 안타까워했다. 1995년 가을 백일장 심사도중 신부전증으로 갑자기 쓰러진 시인은 병마와 싸우면서도 시집 `다시 그리움으로`를 내는 등 창작욕을 불태웠다.
`춘향이 마음` 등의 대표작에서도 보듯 그의 작품은 소월과 미당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향토적 서정과 한의 세계를 정통으로 계승하고 있다. 고향 삼천포 앞바다의 반짝이는 파도에 대한 기억과 생선장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등을 추억의 공간으로 삼은 시인은 슬픔과 가난에서 우러나오는 서정을 토속적 가락에 담았다.
1994년 구총독부건물 해체결정
1991년 부산 전남북 등 남부지방 전역 최고 200mm 넘는 집중호우 32명 사망 861명 중경상
1991년 파키스탄 남부 고트키 역에서 열차 충돌 사망 200여명 부상 수백 명
1990년 이츠하크 샤미르가 주도하는 리쿠드당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우익연정 구성
1990년 제14회 월드컵 이탈리아서 개막
1989년 소련 반체제 작가 솔제니친 작품, 15년 만에 소련에서 해금
1988년 경주에서 고려시대 최대 금당 터 발견
1986년 쿠르트 발트하임 오스트리아 대통령에 당선
1985년 헝가리에서 최초의 복수입후보제에 의한 의회선거
1984년 일본 법원, 지문날인 거부한 한국인과 미국인에 유죄판결
동경 지방법원이 1984년 6월 8일 외국인등록법이 정한 지문날인을 거부한 한국인과 미국인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요코하마 지방법원도 6월 14일 지문날인을 거부한 미국 국적의 대학강사에 벌금 1만엔의 유죄판결을 선고했다.
지문날인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지문을 날인하는 것은 개인의 존엄을 인정한 헌법 13조에 위배되며, 범죄용의자처럼 지문을 채취하는 것은 국제인권규약에도 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지문날인은 1952년에 공포-시행된 외국인등록법에 근거하고 있다. 그 법은 1년 이상 체류하는 16세이상의 재일외국인에게 외국인등록증을 휴대케 하고 5년마다 교체토록 하며 이를 거부할 경우에는 ‘1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20만엔 이하의 벌금’ 을 부과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82년 이스라엘군 베이루트이남 전해안 장악
1981년 이스라엘기, 이라크 원전 폭파
1979년 이란 전은행을 국유화
1976년 한국 신무용이 형성되는데 많은 영향을 준 무용가 조택원 사망
1973년 경주 계림로 공사장에서 태환식 순금귀고리 1개 나옴.
1973년 포항제철 용광로 화입식 제철 개시
1972년 베트남 소녀 킴 푹 양, 미군 네이팜탄에 전신 3도 화상
1972년 6월 8일, 미군 전투기가 베트남 사이공 근교 트랑 방 마을에 네이팜탄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쓰러졌고 마을은 불바다가 됐다. 그때 전신에 3도 화상을 입은 채 알몸으로 울부짖으며 달아나던 벌거숭이의 한 소녀가 카메라 앵글에 포착됐다. 사진은 전 세계에 전송돼 전쟁의 공포와 고통을 절절히 전했다. 소녀의 이름은 판 티 킴 푹이었고 당시 9세였다. 네이팜탄에 등과 목덜미, 왼팔을 부상당한 소녀는 사이공 인근 코레이 병원으로 후송돼 17번에 걸친 피부이식수술 끝에 간신히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베트남 당국은 소녀가 공포에 질려 걸었던 고난의 길을 ‘식민지 보유국’ 인 미국을 상대로 싸운 영웅적 행위로 추켜세우며 소녀를 사회주의 국가인 쿠바로 유학을 보냈다.
킴 푹은 1994년 남편과 두 자녀와 함께 캐나다로 망명했고 1999년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네이팜탄 화염을 피해 알몸으로 달아나던 킴 푹 양의 사진을 찍은 당시 AP통신의 사진기자 닉 우트는 ‘전쟁의 공포’ 라는 제목으로 1973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1971년 미국 스탠퍼드대서 중성자보다 작은 새입자 파르촌 발견
1971년 칠레, 국가비상사태 선포(아옌데 대통령)
1969년 북평 무장공비 사건
1969년 닉슨-티우 대통령 미드웨이회담 개회
1969년 제68차 IOC총회(바르샤바)에서 북한 호칭 North Korea에서 DPRK로 바꿈
1969년 영화배우 로버트 테일러 사망
1969년 6월 8일 영화배우 비비안리 와의 열연으로 많은 관객을 울린 ‘애수’의 로버트 테일러가 사망했다. 57세였다.
‘춘희’ ‘애수’ ‘쿼바디스’ 등 우리나라 공개히트작품도 많은 테일러는 모두 60편의 영화에 주연했고, 180cm 키, 77kg의 체중, 물결치는 듯한 검은머리, 반짝이는 흰 이를 자랑하며 헐리우드의 가장 대표적인 스타 여배우들 그레타 가르보, 진 할로우, 에봐 가드너, 엘리자베스 테일러, 게더린 헵번, 그레어 가슨과의 공연으로도 우리에게 친숙했다. 로버트 테일러는 MGM영화사에만 27년 동안이나 전속으로 있어 헐리우드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로버트 테일러는 1939년 바브라 스탠위크와 결혼, 1951년 이혼했고 1954년 어술라 디스와 재혼하여 아들, 딸 한명씩을 두었다.
프로급의 첼로솜씨와 전시중 비행기조종 교관도 지낸 로버트 테일러는 의젓한 인품과 변함 없는 외모로 오랫동안 스타의 자리를 지켰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선거, 부정선거 논란
1967년 6월 8일 실시된 제7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부정선거 시비가 제기된 가운데 민주공화당이 3선 개헌에 필요한 3분의 2 이상 의석을 확보했다. 총의석 175석(전국구 44석 포함) 가운데 민주공화당 129석(전국구 27석) 신민당 45석(전국구 17석) 대중당이 1석을 차지했다. 무더기표, 대리투표 등의 문제가 제기된 이날 총선거 결과를 3선 개헌의 전조라고 판단한 제1야당인 신민당은 6.8총선거를 부정선거로 단정하고 등원을 거부한 채 전면 재선거를 주장했다.
7월 3일 국회가 개원되었으나 신민당은 부정선거 전면 무효화 투쟁위원회를 구성해 원외투쟁을 계속했고 이에 동조하는 학생들도 대규모 시위를 벌였으며, 이에 정부는 30개 대학, 148개 고교에 대한 휴교조치로 맞섰다. 교착상태에 빠진 시국의 수습을 위해 여야가 전권회담을 개최, 선거관리위원회 위원개선과 선거법-정당법 개정, 부정조사특위법 제정 등에 합의하고, 신민당은 국회개원 142일 만인 11월 29일에 등원했다
1965년 성업공사 발족
1964년 부부간첩 장세영 김을윤 사건
1964년 공수단 장교 8명 동아일보사 난입
1962년 제네바서 미국 소련이 우주의 평화적 공동연구 합의
1958년 제6회 월드컵 스웨덴서 개막
1956년 이기붕 국회의장 피선, 조경규-황성수 부의장 피선
1953년 한국전쟁 포로문제에 관한 협정 타결
한국 전쟁의 사실상 휴전인 포로 교환 협정이 1953.6.8 이루어졌고, 동 8월 5일부터 포로 교환이 개시되어 9월 6일에 완료되었다.
북한 측이 모든 공산포로를 무조건 송환시켜야 한다는 원칙을 주장한 데 반해, UN 측은 희망자만 송환시킨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이 때문에 협정 조인이 이뤄지기까지 여러 차례 결렬 위기를 맞았다.
UN과 북한 측은 5개 중립국으로 송환위원회를 구성해 송환거부 포로들에 대해 한 달 동안의 설득기간을 갖고 이후에도 뜻을 바꾸지 않은 포로들은 민간인으로서 석방한다는 데 합의함으로써 협정조인을 성사시켰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협정에 반발해 휴전성립이 되기도 전인 같은 달 18일부터 남한에 수용 중이던 북한과 남한 출신의 반공포로 2만7천여 명을 석방해버린다.
1952년 휴전회담 가조인
1949년 영국 조지오엘의 소설 `1984` 출판
1948년 일본, 독도 영유권 운운 파문
1948년 독도 부근서 미군기가 어선 10여 척 오폭 20여 명 사상
1941년 영국 프랑스 연합군 시리아와 레바논 진격
1940년 영국 항공모함 글로리오스 호 나르빅 해역에 침몰 사망 1204명,
1940년 랑케스트리아 호 나자르 해역에서 어뢰에 피습 사망 2500명
1937년 국제포경신협정 조인
1937년 백백교 피해자 유골 발굴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범죄’라는 백백교(白白敎) 사건.
“곧 심판의 날이 온다. 너희가 전국 53곳의 피난처에 가 있으면 난 금강산에 은거한다. 그때 천부(天父)님이 내려오셔서 난 임금이 되고 너희는 헌금을 바치는 순서대로 벼슬을 받아 날 모시게 된다.”는 말로 백백교의 교주 전용해와 그의 일당들은 무지몽매한 농민들에게 불로불사(不老不死)를 시켜 주고 세상이 자기 천하가 되면 고관대작(高官大爵)의 관직을 준다고 했다. 또 머지않아 ‘노아의 홍수’ 같은 심판이 오면 교도들만 건져 주겠다는 등 온갖 허무맹랑한 말로 사람들을 미혹했다.
물론 하나같이 다 거짓말이었다.
그들은 남녀 신도들의 고혈을 짜 재산을 통째로 상납하게 하고 돈이 없으면 딸이라도 바치게 해 성적 노예로 삼았다. 또 자기의 정사(情事)를 여신도들이 지켜보게 하고는 이를 ‘신(神)의 행사’라고 포장했다. 이에 불만을 가지는 교도가 있으면 가차 없이 죽여 버렸다. 이때 살인을 담당한 간부들은 스스로를 ‘벽력사(霹靂使)’라고 불렀다.
일본 경찰은 강원 평강, 경기 연천 등을 돌아 1937년 6월 8일 양평 지역에서 시체 발굴 작업을 계속했다. 이때까지 발견된 유골이 무려 380구. 백백교 일당은 실로 ‘인간 백정’들과 다름없었다. 경찰은 이 초대형 사건을 조사하면서 3만 장이 넘는 조서를 작성했고 24차례 현장조사를 나갔다.
각 읍면에서는 시체 처리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조선총독부에 자금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고 한다.
전모가 탄로 나자 전용해는 산속으로 들어가 자살한 것으로 전해진다.
나머지 핵심 간부 12명도 1940년 경성(京城)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백백교 사건을 ‘미신에 가까운 맹목적인 신앙과 무식(無識)이 낳은 범죄’라고 규정했다.
실제 이 사건의 피해자 중 제일 ‘유식한’ 사람은 소학교 졸업생이었다고 한다.
암울한 일제시대를 더 어둡게 만든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참극이었다.
1935년 파리에서 최초의 자동차 박람회 개막
1932년 한국-중국 연합토일군. 일본나남부대를 전멸
1925년 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설치
1921년 인도네시아의 정치가 수하르토 출생
1913년 베를린에 `독일스타디움` 개설
1906년 일본, 남만주 철도주식회사 설립 칙령 공시
1901년 러시아군 만주철군 개시
1896년 프랑스 천문학자 디스란드 보르 성층권 발견
1885(조선 고종 22) 첫 중등교육기관인 배재학당 창설
1876년 프랑스 여류소설가 상드 사망
1845년 미국의 제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 사망
전쟁영웅으로 칭송받아 온 앤드류 잭슨 대통령이 1845년 6월 8일 사망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왁스호에서 출생해 변호사 생활을 거쳐 1798년 테네시주 최고재판소 판사로 활동했다. 1824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J.애덤스에게 패하여 낙선했으나, 1828년 재도전해 당선됐다.
서부 출신 최초의 대통령으로 재임 중 구습을 타파하는 청신한 정책을 취해 서부의 농민, 동부와 북부의 노동자, 남부의 농업경영자 등으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 1832년 재선됐다. 그는 직선적이고 야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관세문제나 미합중국은행 재인가 문제 등에서는 강경한 태도를 취했지만, 여론을 중시하는 대중 중심의 정치를 펴 인기가 높았다.
또한 선거권의 확대, 대통령 선거제도의 개선, 전국당대회제의 채택, 교육의 보급 등으로 일반 대중의 정치참여 기회를 증대시킨 대통령으로 평가받았다. 그가 확립한 새로운 개념의 민주주의는 ‘잭슨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20세기 초반까지 국민들에게 영향력을 미쳤다.
1814년 영국 작가 리드 출생
1810년 독일 작곡가 슈만 출생
1809년 미국의 혁명이론가 토머스 페인 사망
1720년 숙종 사망
1689년 송시열 사망
1456년 사육신 처형
사육신은 세조 때 상왕 단종의 복위운동을 펼치다 죽은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박팽년, 유응부’ 등 여섯 명의 충신이다. 이들은 함께 거사를 계획했던 김질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한 뒤 죽음을 당했다
사육신들은 1456년(세조 2년) 6월 1일은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 환영연이 열리는 날
연회에서 무장 성승과 유응부, 박쟁 등과 함께 세조와 그 일당들 을 살해하고 단종을 복위시킬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수상쩍은 움직임을 감지한 한명회의 건의로 별운검이 전격 취소되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왕이 백성들의 농사를 살피는 관가(觀稼) 날로 거사를 미루었다.
그러자 불안해진 김질이 장인인 정창손에게 거사 계획을 알린 다음 함께 세조에게 나아가 자초지종을 고해바쳤다. 그리하여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성승, 박쟁, 김문기 등이 모두 검거되고 가혹한 국문을 당한 다음 능지처사에 처해졌고,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632년 이슬람교 창시자 마호메트 사망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가 632년 6월 8일 메디나에서 사망했다. 부친이 일찍 죽어 조부와 숙부 밑에서 자랐다. 청년시절 대상을 따라 시리아 등지를 왕래하며 만난 유력한 상인의 미망인인 하디자와 결혼, 3남 4녀를 낳았다.
40세가 되던 610년 경, 세속적인 생활을 중단하고 메카 교외의 히라산에 있는 한 동굴에서 명상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처음으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알라신의 계시를 받았다. 그 내용은 `코란` 제9장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에도 계속 알라의 계시를 받게 되자 그는 새로운 종교를 창시할 것을 결심, 부인 하디자를 최초의 신도로 받아들였다. 신도는 점차 증가했으나, 이제까지의 다신교를 부정하고 유일신 알라 앞에서 인간은 평등하다는 그의 주장이 당시 메카 지배층의 이익과 배치되어 613년경부터는 집권세력으로부터 견제와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615년에는 신도 일부가 박해를 피해 아비시니아로 피신, 그곳에서 그리스도교도에게 환영을 받았으나 마호메트 자신은 전부터 정해 둔 메디나로의 이주를 준비했다. 마침내 622년 9월 24일 신도 70여명과 함께 메카를 탈출, 메디나로 이주했다. 이를 헤지라(聖遷)라고 하며 이 해가 이슬람력의 기원이 된다.
당시 메디나의 내분을 틈타 마호메트는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해 사태를 수습하고, 메카에 대항할 수 있는 군대를 양성했다. 메카세력과의 오랜 전쟁 끝에 마침내 630년 10월 메카를 점령한 마호메트는 이후 아라비아 반도 전역의 각 부족을 속속 이슬람교로 개종해 교단을 완성해 나갔다. 그 후 건강이 갈수록 악화되어, 632년 6월 8일 애처 아이샤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했다.
BC57 신라 시조 박혁거세 왕위에 오름(음력 4월 28일 병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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